유년의 추억
돌배나무 아래 동산처럼 쌓인 조개무덤
내 언니들의 꿈을 담은 조개껍질 알록달록 예쁘다
대청마루에 동네 처녀들 모여앉아
옛노래 흥얼거리는 뜰엔 봉숭아가 빨갛게 피었다
사그락 사그락 조개까던 여름밤
뽀오얀 조갯살 소금에 착착 절여서
젓동이에 이고 갯바위 선착장으로 나가
광천 오일장 나가는 똑닥선 선장한테 맡기고
오일을 기다려 통통거리며 돌아오는 똑닥선을
맞이하러 가는 언니들
선장이 내주는 빈 젓동이 받아 이고 조개젓 팔은 돈
손에 꼬옥 쥐고 돌아오면 보따리 장사를 기다려
분도 사고 뽀쁘린 천을 끊어 치마도 만들어 입었다
10월 보름날 제일 구석진 산골집 사랑마루에 천막을 치고
가요 콩쿨제가 열리는 일년에 단 한번 뿐인 축제날
촉수 낮은 희미한 전등불 아래에 섬에서 제일 인기 많은
총각이 기타를 멋드러지게 치면 흥겨운 가락이 산을 넘어
메아리져 갔다
달이 점 점 높이 떠 오르면 언니들의 분을 바른 얼굴이
뽀얗게 달덩이 처럼 보이고 향긋한 분 냄새가 퍼쟜다
우렁우렁한 마이크 소리가 요란하고 처녀뱃사공에 이어
서산갯마을이 나오고 목포에 눈물과
흑산도 아가씨가 울고 마포종점이 나오고 섬마을 선생님과
여자의 일생이 간드러지고 애달픈 곡조를 뽑아내면서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가 산을 뒤흔들었다
나는 꼬마 아가씨라는 이유로 노래하러 못 나갔지만 어서 커서
콩쿨대회에 나가 카랑카랑한 나의 목소리로 구성지게 불러서
꼭 일등을 하리라 맘 먹었으나 그것은 소망에 그치고 말았다
나는 열 여섯살에 도시로 나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달밝은 밤이면 마루창을 쿵쿵 구르며 어깨를 들썩이며
노래하던 언니들 오빠들이 아련히 떠 오른다
일년에 단 한번 뿐인 콩쿨대회날은 청년들이 서로 눈맞추는 날
돌아오는 길 달그림자 은밀하게 어린 산기슭에서 가슴 뛰는 섬 청년들의 데이트가 있고
그것이 부부가 되는 인연이 되거나 가슴아픈 첫사랑이 되거나 또는
서로가 좋아 했으나 부모한테 실컷 두들겨 맞고 안타까운 생이별이 되거나 했다
그래서 용기가 많은 언니 오빠들은 야밤에 몰래 도망쳐서 훗날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업고 오면 부모들이 버선발로 뛰어나가 얼싸안고 우는 풍경 볼만 했다
그렇게도 죽일듯이 두사람 연을 끊어 놓으려고 하더니 자식이 도망친 후에 머리 싸매고
금식하며 울고 불며 눈물 콧물로 자식이 돌아오길, 돌아오면 그 인연을 허락하마고
학수고대하던 부모들이 맨발로 달려나온 것이다
동네방네 손주없고 자랑하러 다니기 바쁜 날들이 되었다
광천에서 돈벌어 서울로 간 사위 달동네에서 전세살면서 허리띠 졸라매고 맞벌이로 억척
같이 사는데 사업 잘 되면 장모님 부부 모시겠다는 사위 말에 너무 벅차서 장모는 눈물을
줄줄 흐른다 .
갈퀴같은 손으로 사위 어깨를 두드리며 얼굴을 쓰다듬는다
언제는 이놈 저놈 감히 내딸을 데려 갈 처지도 못되는 놈이라고 하더니 그 지긋지긋한 농촌 생활을
면하게 된 자기 딸이 팔자가 피었다고 자랑한다
이야기가 옆길로 빠져 버렸다
다시 콩쿨대회 이야기로 돌아가자
달이 점 점 높이 떠 오르면 달빛아래 처녀들은 부끄러워 얼굴을 안 보이려고 보자기를 푹 눌러쓰고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그 당시에 산골에 예쁜 스카프도 없었으니 그냥 면 보자기라고 해야 옳다.
그래도 순수 하기에 청순하고 어여뻤던 얼굴들이다. 어쨌든 어린 나의 눈에는 이뻐보여서
나도 얼른 커서 분을 바르고 싶었다
밤이 점점 깊어가고 달은 높아가고 적막한 산골에 부엉이 울음소리 더욱 크게 들리는 밤
쿵쿵 쿵따라라라 띵띵 띵그르르 흥겨운 키타소리 즐거운 음악회에
점 점 깊어가는 밤 초겨울의 산 새 소리도 한몫을 차지했던 내 유년의 추억
새벽이슬 내리는 먼 산길을 돌아오고 고단한 잠을 자고 나서 며칠이
지나면 아랫마을 윗마을 아무개가 보따리 싸들고 도망쳤다는 소문이
파다하던 그시절 둘이서 도망친 그 언니 오빠 참 용감했다
지금 어디서 잘살고 있겠지
2023.9.9.토.낮.12시
첫댓글 감사합니다.
한편의 소설 같은 이야기
드라마틱하게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잠시 머리 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