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여는 세밑 김장
2022년 12월 29일 한 해의 끝자락 어둠이 깔린 저녁 시간에 여선교회 임원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김장한다는 소집령이 발동된 지 2시간 만에 각 처소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모인 비상대기조 병사들의 집합이었다. 아니, 영하 20도가 훌쩍 넘는 혹한의 날씨에 웬 김장? 산간지역은 일찍 찾아오는 겨울 때문에 10월 말이면 이미 김장이 모두 끝났고 지금쯤은 날씨와 함께 잘 익어가는 김치 맛에 잃어버린 입맛까지 돌아온다. 이런 때에 모였으니 ‘세밑 김장’이라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교회 내 취사금지가 2년이 지나도 해제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게다가 성전 증축 공사로 인해 김장의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김장 없는 겨울을 보낼 처지에 놓였었다. 그래도 50 포기 정도는 어찌 어찌 해서 마련했지만 아직 한참이나 남은 산간의 겨울을 보내기는 역부족이었다. 2023년 새해의 바통을 넘겨받은 임원들의 급선무는 부족한 김장을 확보하는 것이어서 득달(得達)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교회는 이 산간 마을 지킴이로 올해로 79번째 겨울을 맞이했다. 그동안 세밑 김장은 꿈엔들 예상이나 했겠는가? 당연히 제 때 김장철이 한참 지난 후이니 마음 놓고 있던 새 임원들에게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그래서 하루 만에 세밑김장 작전을 세우고 각 부서 지휘자들에게 비상소집령을 발동하여 이렇게 임무를 완수해 버렸다. 회장(梁順英 권사), 총무(洪順玉 권사)가 최전선에서 진두지휘하고 각 회장들은 마음을 모아서 기쁘게 충성했다. 절인 배추가 입하(入荷)되자 혼연일체, 일심동체 되어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평생직이 된 김장 일에 팔을 걷어붙였다. 늦은 밤 친교실을 밝히며 호호 깔깔 거리는 동안 하얀 배추는 예쁜 새색시처럼 빨간색 드레스로 갈아입고 뽀얀 속살을 드러내며 오묘한 자태를 뽐낸다. 추운 겨울철에 더욱 제 맛 나는 군고구마가 배달되고, 멀리 제주도에서 날아온 폰깡(귤과 한라봉을 교배한 귤의 종류)의 맛과 어울려진 세밑 김장은 이렇게 화기애애(和氣靄靄)하게 마무리되었다. 떠나가는 배를 아쉬워하기보다 다음 배에 승선을 채비하는 지혜가 담긴 세밑 김장으로 새해는 환할 것이고 남은 겨울 역시 따뜻할 게 분명하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전 3:1). 창조주가 정하신 때가 되면 그 누구도 그 때를 알고 잘 처신해야 한다. 묵은해는 가고 새해가 다가오는 교차길목에서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터치할 수 있는 겸손의 미학을 배워야 한다. 지난 역사에서는 한 시대를 호령하던 군주들은 떠나야 할 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별별 수단을 다 동원했었다. 천년만년 살겠다고 불로초(不老草)를 구하려고 발버둥 치던 진나라 시황제(始皇帝), 죽어서도 그 자리에 앉겠다고 생전에 지하 궁전을 짓던 명나라 만력제(萬曆帝) 같은 군주 등 한 번 움켜쥔 이 자리를 내줄 수 없어서 끝까지 집권야욕을 떨치지 못하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시대의 폭군들의 이야기는 때를 아는 지혜를 가르친다. 1980년 10월 21일~2002년 12월 29일까지 방영한 총 1,088부작의 농촌 드라마 ‘전원일기(田園日記)’는 국내 장수 드라마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드라마는 시청률이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종방의 된서리를 맞는다. 이 드라마는 22년간 시청률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장수 드라마의 비결은 무엇일까? 전원일기의 첫 회 드라마 주제에서 암시하고 있다. 바로 ‘박수 칠 때 떠난다’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박수 칠 때 떠나지 않는다. 아니 떠날 수 없다. 그 박수에 취해서 환몽(幻夢)에 빠진다.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자신을 볼 수 없는 무지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그러다가 늪 아래로 침몰하고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다. 자신이 떠날 때를 알지 못한 자의 필연적인 운명이다. 저 산 너머로 사라진 한해가 불귀(不歸)의 강을 건넜다. 잘했든 못했든지 어김없이 바통을 넘기고 가고 말았다. 붙들어도 소용없고 불러 봐도 무용지사(無用之事)다. 지혜자는 떠나는 때를 아쉬워하지 않고 약속처럼 다가오는 새 날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해의 끝자락에 서면 이런 지혜를 습득해야 밝은 미래가 보장된다. 새해의 신선함이 불어오고 상큼함이 번진다. 새로움은 기대감으로 채우고 이내 삶의 의욕을 충천한다.
새로운 준비를 위하여 비상대기 병사와 같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짊어지고 출발선에 선 주자들의 마음은 오직 한 가지다. 푯대를 향하여 가겠다는 다짐. 당연히 발 빠른 토끼의 승리로 끝날 ‘토끼와 거북이 달리기 경주’는 세간의 예상을 깨고 거북이의 승리로 끝났다. 승패의 원인을 분석해보니 두 주자는 바라보는 것이 달랐다. 토끼는 상대를 봤고 거북이는 목표를 보았다. 목표만 보고 달려야 승리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 그들의 달리기 대회, 새해 출발선에 선 그대의 마음가짐이라고 어찌 다를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예수님만 바라보며 달리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처럼 다 이룬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며 여기에서 만족할 수 없는 진취적 기상을 뿜어내는 사람이다. 내 옆에 누가 섰는지를 의식하는 출발은 승리의 월계관이 비껴갈 수 있음을 명심하자. 주님을 바라보며 새해 출발선에 선 경주자만이 끝내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다. 세밑 김장에 소집된 그날 여선교회 병사들을 보면서 준비하는 사람만이 새해가 밝게 다가온다는 믿음이 점점 마음에 자리를 잡는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립보서 3:14).
첫댓글 영하에날씨에고생하셨습니다.봉평교회여선교홧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