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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2세기 출범과 제17대 장기천 감독회장
1986년을 맞으며 한국 감리교회는 선교 2세기를 연다. 이 해 10월 28일부터 30일까지 광림교회에서 제17회 총회가 감리교회 선교 2세기의 과제를 안고 개최되었다. 총회는 이러한 역사적인 과제를 감당할 새로운 일꾼들이 필요했기에 우선적으로 새 감독들을 선출하였다. 서울연회는 장기천 목사가, 중부연회는 이춘직 목사가, 동부연회는 조충원 목사가, 남부연회는 김승호 목사가, 삼남연회는 김만복 목사가 각각 당선되어 감리교회 선교 2세기 호(號)를 출범시켰다. 감독회장은 총 553표 중 340표를 얻은 장기천 감독이 당선되었다.
장기천(張基天, 호 한길) 감독회장은 1930년 3월 20일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발발 되었을 때 월남하였다. 1955년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956년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육군 군목으로 입대하였다. 1960년 정회원이 되었고 군목 전역 후 1961년 서울은제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했다. 1962년 총리원 출판부 간사로 있으면서 감리교 정간지 《기독교세계》를 편집했다. 다시 목회 현장으로 돌아와 1967년 인천성산교회에서 목회를 계속했다. 이 시기에 감리교신학대학 선교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 후 1971년 서울평동교회에서 목회하고 1981년 서울연회 초대 감독을 지낸 오경린 목사의 후임으로 한국교회역사에 유서 깊은 동대문교회를 담임하였다. 장기천 감독은 “지성적이요 복음적이며 진리의 핵심을 설득력있게 선포하는 현대적인 설교자로 알려졌다. 그의 특유의 실력은 동대문교회를 지성과 영성 그리고 실천을 겸비한 목회로 역사가 오랜 동대문교회를 착실하게 부흥시키는 결실을 보았다. 장기천 감독은 사회의 부조리와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설교로 경찰 당국의 감시를 받았다. 교회 청년 운동, 민주화 운동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등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해서서 과감한 행동을 실천했다.
1986년 10월 제17회 감리회 총회가 열리는 날 장기천 감독은 제4대 서울연회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며 동시에 제17대 감독회장에 당선되었다. 1987년에는 학교법인 감리교신학원 재단이사 및 이사장을, 학교법인 연세학원 재단이사를, KNCC 실행위원 및 통일문제위원장, 선교위원장, 환경위원장직을 담당했다. 1992년에는 미국 뉴저지 주 소재 센터너리 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8년 김대중 정부에서 대통령 통일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2001년 3월 14일에 서울 금란교회에서 개최된 제21회 서울연회(장광영 감독)에서 은퇴하고 2007년 5월 7일 별세하였다.
장기천 감독은 제7회 서울연회(1987년 3월 16일~18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8회 서울연회(1988년 3월 23일~25일, 금란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그리고 제18회 총회(1988년 10월 25일~27일, 광림교회) 개최하였다. 또한 제18회 총회(1988년 10월 25일~27일, 광림교회 개최)를 주재하였다.
이춘직(李春稙) 감독은 1929년 6월 13일에 강원도 춘천읍 우두리에서 이선남 장로와 장분례 권사의 셋째로 태어났다. 1956년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하였다. 1955년 인천동지방 매화교회와 무지리교회를 겸임하였고, 1958년 과림교회, 1960년 인천동지방 삼농원교회(현재 인천은혜교회), 1970년 산곡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1973년 경인지방 초대감리사를 역임하고, 그해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International Training Institute와 1974년에는 Ecumenical Institute를 수료하였다. 1975년 인천중앙교회에 부임하여 담임하던 중 1986년 10월에 개최된 제17회 총회에서 제18대 중부연회 감독에 당선되었다. 1986년에 감리교신학대학 이사, 기독교산업개발원 이사, 감리교신학대학 총동문회장, 경실련인천지역공동대표, 우리민족돕기운동본부 상임대표를 역임했다. 1993년 동북아시아선교회장을 역임하고 1999년 3월에 숭의교회에서 개최된 제58회 중부연회에서 은퇴한 후 2018년 89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정직, 진실, 겸손”의 좌우명을 가진 이춘직 감독은 제46회 중부연회(1987년 3월 18일~20일, 숭의교회 개최), 제47회 중부연회(1988년 3월 15일~17일, 계산중앙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조충원(趙忠元, 호 恩成) 감독은 1924년 1월 16일에 서울시 동대문구 신설동 207번지에서 태어났다. 1941년 서울 덕수상업고등학교, 1949년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구천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1951년 금호동교회, 1952년에 육군 군목에 입대하여 1954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계속 군에 남아 복무하였다. 1960년에 국제대학 법정학부를, 1975년에는 감리교신학대학 선교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67년 육군 제10대 군종감을 역임하고 1969년 육군대령으로 전역했다. 1970년 운천교회를 담임하면서 1971년 철원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다. 1975년 양구교회에 부임한 후 1994년 동부연회에서 은퇴할 때까지 20여 년 동안 담임하였다. 1980년 춘천동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다. 1986년에 제18대 동부연회 감독에 당선되었다. 평신도국 위원장, 총회 실행부위원, 감리교신학대학 이사, 한국기독교봉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동부연회 감독에 재임하면서 준회원 목회자 연수교육을 보강하고 평신도 신앙운동을 활성화시키고 미 자립교회 지원 대책을 세웠으며 사무전산화를 꾀했다. 그리고 지지부진한 교육원 건립문제를 중요 사업으로 정했다. 하나님의 영광, 교회, 가정, 나를 위하여 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평생을 달려온 조충원 감독은 1994년 3월에 충주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53회 동부연회에서 은퇴하고 인천광역시 부평에 거주했다. 2011년 1월 3일 향년 87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유족으로는 아내 호기옥 사모와 1남 조병완 목사, 2남 조병관 목사, 장녀 조병기 권사, 3남 조병현 장로, 4남 조병우 목사가 있다.
조충원 감독은 제38회 동부연회(1987년 3월 10일~12일, 속초교회 개최), 제39회 동부연회(1988년 3월 8일~10일, 원주제일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김승호(金承鎬, 호 宇石) 감독은 1926년 8월 10일에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천파리 냉정동 696번지에서 출생했다. 황주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군에 입대하여 참전하였다 전역 후 서울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목회를 시작했다. 그의 첫 목회는 원주지방 간현교회이다. 거기서 8년 동안 성실하게 목회하고 남부연회 예산지방 고덕교회에 부임하여 역시 8년 동안 담임했다. 이때 감리교 유지재단과 공주영명학원 재단 이사로 각각 8년 동안 활동하였다. 서산지방 서산제일교회에 부임하여 장기 목회를 하여 18년간 담임했다. 이때 서산경찰서 경목실장(18년), 서산 군정자문위원, 서산군 기독교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온양지방 온양중앙교회로 부임하여 6년간 시무하면서 온양지방 감리사, 온양시 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86년 10월에 개최된 제17회 총회에서 남부연회 제6대 감독에 피선되었다. 본부 선교국 위원장 및 실행부 위원, 감리교 대전신학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남부연회 건축헌금을 미선교부로부터 50만 달러 모금하여 정립했으며 재일 기독교 초청 감리교단 대표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 후 삽교교회에서 6년간 담임하고 1997년 3월 계룡대군인교회에서 개최된 제43회 남부연회(김영웅 감독)에서 은퇴하였다. 은퇴 후에는 감리교회 주안원로 자치회장을 5년 동안 맡았고 감독협의회 부회장 2회를 역임했다. 2009년 12월 4일에 감독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김승호 감독은 자신의 좌우명을 말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암울했던 일제 말기 노예 같이 생활하던 나는 피 끓는 젊은 날에 해방을 맞이하여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 침략으로 내 모든 꿈이 빼앗겼을 때 나는 공산주의와 싸우다가 1948년에 월남하여 동시에 부모형제를 잃고 남한에서 60여 년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감리교 목사로, 감독으로, 이사장으로 불러주시고 내 삶에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에 더 충성하지 못한 것이 심히 후회스럽기만 합니다. 남은 생은 마지막까지 신앙의 바른 길을 가다가 부르시는 날 부끄럽지 않게 주님 앞에 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김승호 감독은 2020년 94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유족으로는 안진순 사모와 아들 김형일 목사, 1녀 김은경 권사, 2녀 김미경 사모, 3녀 김은미 집사가 있다.
김승호 감독은 평생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내무부장관의 상을 4개를 받았다. 즉 박경원 장관, 김현욱 장관, 송달용 장관, 안응모 장관이 수여했다. 특히 서산 경찰서에서는 경목실장 및 충청남도 경모위원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18년 동안 경찰행정에 기여한 공로가 큼으로 감사장을 수여했다.
김승호 감독은 제33회 남부연회(1987년 3월 25일~27일, 대전제일교회 개최), 제34회 남부연회(1988년 3월 28일~30일, 대전선화교회 개최)를 주재하였다.
김만복(金萬福) 감독은 1924년 11월 26일에 평안남도 용광군 영월면에서 태어났다. 1950년 5월 10일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2월 6일 육군 군목에 입대하여 2년 동안 군복무하고 1954년에 전역했다. 전역한 후 복지기관 진우원에서 잠시 있다가 1955년 3월 9일 대구 남문교회에서 정식 첫 목회를 시작하고 2년 후 1957년 경주교회에 부임하였는데 그곳이 그의 평생 목회 임지가 되었다. 1958년 교회에서 운영하는 웨슬레유치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어린이 교육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1962년 3월 1일 국민재건운동 경주시 위원을 2년간 맡았으며 1974년 4월 1일 경주경찰서 경목으로 22년간 활동했다. 1967년 대구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1982년 1월 7일 경주 정화위원회 경주시 위원으로 22년간 활동했다. 1985년 필리핀 기독교연합대학원 아세안 선교목회학을 졸업하였다.
김만복 감독은 1986년 10월 31일에 개최된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17회 총회에서 삼남연회 제4대 감독에 당선되었다. 1986년 3월 29일 재단법인 기독교대한감리회 유지재단이사로 4년 동안 봉사했다. 또한 1996년 4월 5일 감리교신학대학 재단이사로 3년간 봉사했다. 1989년 9월 5일 경주시 기독교연합회 회장, 1989년 9월 5일 경주시 자문이원, 1989년 9월 9일 대구보호관찰소보호위원으로 활동했다. 1994년 3월 1일에 현대 유치원을 설립하고 30여 년 전에 깨달은 어린이 교육의 소중함을 다시 실천하였다. 1995년 경주경찰서 경목, 감리회 재단이사, 감리교신학대학 이사, 경주교도소 종교위원, 이북 5도민회 경주시도민회장을 역임했다. 1995년 3월 대구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5회 삼남연회(박문순 감독)에서 정년 은퇴하였다. 은퇴 후 경주시 황성동에서 거주하며 1996년 6월부터 사회복지법인 자선단체인 우봉재단 강사 및 나사렛교단 산하교회의 담당목사로 활동했다.
김만복 감독은 2010년 2월 6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으며 2월 10일에 평생 목회했던 경주교회에서 장례예배를 거행했다. 설교는 삼남연회 정양희 감독이 맡았다. 그의 유해는 국립영천호국원에 안장되었다. 유족으로는 오영애 사모, 1남 김정호 장로와 이은희 권사, 2남 김정태 집사와 황규자 집사, 장녀 김혜선 권사와 도의순 권사, 차녀 김혜영 집사와 김덕수가 있다.
김만복 감독은 제7회 삼남연회(1987년 4월 24일~26일, 이리영생교회 개최), 제8회 삼남연회(1988년 3월 29일~31일, 대구제일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1986년은 인권을 유린당하던 제5공화국 시절 말기였다. 각종 비리가 극에 달하던 때 제17회 총회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또한 선교 2세기의 문을 여는 때라 감리교회 100년의 역사와 전통위에 서서 앞으로 다가올 100년의 교회적 비전을 제시할 “한국감리교 제2세기 백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특히 건의안에 따라 선교 100주년기념 감리회관 건축위원회를 조직하도록 했다. 웨슬리 회심 250주년이 되는 1988년 5월 23일부터 25일까지 광림교회에서 2천 년대를 향한 감리교 선교대회를 개최하였다.
장기천 감독회장, 서울연회
중부연회 이춘직 감독
동부연회 조충원 감독
남부연회 김승호 감독
삼남연회 김만복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