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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통치를 위한 예루살렘 입성 준비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마 21:1)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약 3년 동안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세상 구원을 위한 마지막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들어옵니다.
4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사역을 기록한 책이지만 그 특징은 조금씩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로마인에게 종이신 예수님, 누가복음은 모든 이방인에게 인간이신 예수님, 요한복음은 초신자들에게 신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왕의 신분으로 하신 사역은 마태복음에 많이 들어있고, 기록도 체계적입니다.
마태복음 19장부터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면서 하는 사역들입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경제문제를 많이 언급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왕이 다스리는 통치와 가르침에 경제생활과 값 치르기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사역은 "팥소(앙꼬) 없는 찐빵"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통치 행위에는 종교인들이 싫어하거나 회피하는 경제와 재산문제를 직접 언급하고 있습니다.
19장에서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가진 재물을 모두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가진 재산을 내어놓겠다는 삭개오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것도 이때입니다(눅 19:11~27). 예수 그리스도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합니다. 이에 베드로와 제자들이 놀라서 묻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으니 무엇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은 “내 이름을 위하여 가족과 전토를 버린 자마다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받는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드십니다.
20장에서 예수님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로 포도원 생산물에 대한 “네 것과 내 것”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천국은은혜로 구원을 받으며, 구원 받은 자의 보수가 차별 없다는 것과 이것을 현실 경제에서도 실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세금도 없이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의 틀 안에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나중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제자들을 따로 불러 자신(인자)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져서 십자가형을 받을 것과 3일 만에 살아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마 20:18,19).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천국은 이렇게 우리 곁으로 한발씩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살로메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두 아들과 함께) 예수님 앞에서 자기 아들을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청원을 합니다(마 20:20,21, 막 10:35). 다른 제자들은 분을 냅니다. 바로 앞(19장)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가족과 전토를 버리라고 했건만, 이를 직접들은 제자와 어미가 그것도 죽음을 앞둔 예수님 앞에서 이런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그 자리에 지도자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5~28)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통치에 대하여 크게 세 가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첫째, 이방인 통치자들은 백성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고관들은 권세를 부린다고 합니다. 이것이 세속 정치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통치 행위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들은 으뜸이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라”고 합니다. 이 가르침은 지금도 국가나 공동체의 지도자, 그리고 소집단의 리드라도가 지켜야 할 철칙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역할을 말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함이 아니고, 도리어 많은 사람을 섬기려고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왕의 통치 행위에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왕의 통치 행위의 궁극적 수단(목표)은 우리의 목숨과 세상을 되살려내기 위해서 자신이 희생의 대속물이 되려는 것이었습니다.
왕의 입성과 왕의 취임(종려 주일)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 21:5)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눅 19;38)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가 왕의 신분으로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십니다. 벳바게에서 제자들에게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를 몰고 오라고 하여 그 나귀를 타고 성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나귀는 원래 말보다 작은 가축입니다. 그것도 아직 새끼입니다. 왕이 작은 나귀 새끼 등에 앉으셔서 성으로 들어오십니다.
참 왕이신 왕의 입성은 이렇게 초라합니다. 높디높은, 그리고 만왕의 왕이신 분이 천군만마를 거느리고 천하를 호령하며 오지 않고, 초라한 모습으로 입성을 합니다. 그러나 약 550년 전 스가랴 선지자가 “그가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슥 9:9)”라고 했던 예언이 이렇게 성취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 볼 때는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그를 메이사아로 인정하는 사람은 크게 환영하고 있습니다. 무리들은 감람산 내리막길에서 겉옷을 벗어서 펴어놓고 “호산나!”, “호산나!”, “다위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주를 찬양하며 맞이합니다(눅 19:37, 막 11:8).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무리들에 명하여 잠잠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눅 19:40)”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성을 가까이 오자, 성을 보고는 우시며, “너희들이 평화를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너희 눈에는 숨겨졌다. 날이 이르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고 헤롯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예루살렘의 입성과 왕의 취임식을 마쳤습니다. 저녁에는 이방에서 온 순례객 중 헬라인들을 접견하고 한 알의 ‘밀알 비유’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했습니다(요 12:20~36). 이날은 주후 29년 1월 8일 주일로 추정됩니다. 이날은 종려 주일이며, 이날부터 7일간은 고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왕의 통치 왕의 청소(월요일 첫날 사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 21:12,13)
1월 9일 월요일 아침에 예수 그리스도가 왕의 통치를 위해서 성전으로 들어오십니다. 벳바게 마을에서 성전으로 가는 길에는 무화과나무가 많았는데 한 나무에는 열매가 맺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나무가 앞으로도 열매가 맺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막 10:14) 그 무화과나무는 이튿날 잎이 말라 죽어버렸습니다(마 21:19). 이때는 유월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이때는 보리 추수를 시작하는 초실절 절기라서 아직 무화과를 추수할 시기는 아닙니다. 그래서 마가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합니다(막 11:13). 그런데 이 사건을 오해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무화과가 열리는 열매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무화과는 일반 과일과는 다르게 1년에 다섯 번 정도 열매를 맺습니다. 무화과는 가을에 달려서 유월절기에 맺는 볼품 없는 열매가 있고, 그 후에 여름부터 가을까지 계속 열리는 풍성한 열매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가 유월절기이므로 처음 열리는 볼품 없는 열매가 없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화과를 상징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매가 없는 생활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왕의 신분으로 이를 꾸짖었던 사건입니다. 무화과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마가의 말도 이스라엘의 미래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주) 성경에는 무화과라고 표현하지만, 유대인들은 처음 맺히는 무화과를 히브리어로 “파게(헬 쉬케))”라고 하고, 이후 맺히는 열매를 “테에나(헬, 쉬켄)”라고 한다. 예수님이 찾은 무화과는 유월절 무렵 열리며, 겨울에 자란 것이라 맛도 없고 상품성도 없어서 먹지를 못하고 버려지는 열매다. 그래서 주위의 가난한 자나 길을 가다가 배가 고프면 따먹어도 되는 것이다. 유월절 이후 1년에 약 다섯 번 정도 열리는 무화과(테헤나 또는 쉬킨)는 맛도 좋고 상품성이 있어서 주인이 수확한다. 감람산에서 성전으로 가는 길 주위는 감람나무, 대추야자, 무화과나무가 많았다. 예수님이 고난주간에 묵었던 감람산 “벳바게(Bethphage, 마 21:1)”는 ‘무화과 마을’, “베다니( 21:17)”는 ‘대추야자(종려나무) 마을’을 뜻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왕의 통치를 위해 이제 성전으로 들어오십니다. 성전에 들어서니 비둘기는 파는 사람,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로 법썩입니다. 왕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양과 소를 내어쫓습니다(요 2:15). 그리고 비둘기 파는 상과 돈을 바꾸어 주는 환전대를 둘러엎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시 56:7)이라고 칭함을 받으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렘 7:11)을 만들었도다(마 21:17)." 이 말씀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먼저, 성전은 기도의 집인데 장사꾼들이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거룩한 제사를 위하여 지은 집인데 이들은 여기서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은 왕의 말씀대로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해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왕이 지적한 “강도의 소굴”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 연구가들은 왕의 청소가 기도를 올리는 장소에서 장사를 했으므로 성전이 더럽혀졌고, 그래서 예수님이 이를 청소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성전청소”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성전을 청소한 정도로만 보면 사건의 일부만 본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 연구가들은 왕이 말하는 “강도의 소굴”을 제대로 짚어주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앙공동체는 그때나 지금이나 신앙의 전수와 유지에 필요한 요소(영적, 신앙적)만을 전하거나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청소는 공생애 초기에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성전을 “아버지의 집”인데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요 2:16). 그리고 46년간 지어오고 있는 성전을 3일만에 다시 짓겠다고 했지요. 곧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가 왕으로 취임하여 하는 성전 첫 사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왕의 신분으로 하는 왕의 통치 1호 사역이 이 청소입니다. 그러면서 왕이 상을 둘러엎기까지 하면서 격한 행동과 노하심으로 “강도의 소굴”이라고 꾸짖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왕을 격노하게 한 “강도의 소굴”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에서 바알 신과 바알 제도가 도입될 때 여러 번 노를 격발하셨습니다(왕상 14:22, 15:30, 16:7,13,26, 21:19).
왕의 통치 1호는 “강도의 소굴” 청소
유월절이면 전국에서 예루살렘으로 성전으로 순례객들이 모여듭니다. 이때는 레위기 제사법에 따라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부자들은 소도 바치고 양도 바칩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비둘기를 제물로 바칩니다(레 1:14, 12:8). 그래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은 종류와 값이 달라도 사해지는 죗값의 크기는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죄를 사하는 제물 하나에도 가난한 자를 배려하고 있습니다.
지금 성전에서 비둘기 매매는 바로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제물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둘기를 성전에서 파는 것만 사서 바쳐야 했습니다. 이 상인들은 제사장의 허가를 받은 자들입니다. 제사장들은 집에서 기르거나 시장에서 파는 비둘기는 더러운 것을 먹고 자라서 제물에 합당하지 않다고 트집을 잡습니다. 그레서 성전에서 파는 비둘기는 가격이 시장가격보다 비쌉니다. 그래도 제사장들이 집에서 가져온 것은 흠을 잡아서 받아주지 않습니다. 제물을 드리려면 비싼 비둘기라도 사야 제물을 드리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오는 순례객들은 20세 이상 성인 남자면 1년에 한번씩 드리는 성전세 반 세겔이 있습니다(출 30:13). 한 세겔은 20게라입니다. 탈무드의 세칼림에 따르면, 성전세는 유대인의 축제 중 하나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 징수되었습니다. 1세기에 1세겔은 헬라의 드라크마(4드라크마)와 같았는데, 이는 약 14g 무게의 은화였습니다. 따라서 반 세겔은 은화 약 7g의 가치에 해당하며, 헬라 디드라크(2드라크마)와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포도원에서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입니다(마 20:2). 로마 데나리온화는 약 3.4g의 은이었으므로 반 세겔은 이틀분 임금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화폐의 교환 문제가 발생합니다. 유대 화폐 세겔화와 로마 화폐는 무게가 같다고 값도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세겔화는 순도가 높고, 데나나리온화는 순도가 낮습니다. 그래서 세겔화와 데니리온화는 무게가 같아도 가격은 세겔화가 더 높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화폐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순도가 더 낮아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화폐가 시장에서 가격을 왜곡시키는 현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화폐는 원래 가치물(재화 또는 서비스)이 아니고 가치물에 대한 청구권을 인정하는 권리 증서입니다. 그러므로 화폐는 실물이 아니고 실물을 대변하는 증표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화폐는 화폐가 가진 소재가치로 거래되는 것이 아니고, 그 화폐가 표방하는 명목가격, 곧 액면가격으로 거래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화폐가 실물과 같은 역할을 하던 시기에는 화폐가 명목가치(액면가격)보다 실물가치를 따라 거래하게 됩니다. 아직 화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결여되고, 경제적 이해도가 연약해서 그렇습니다. 화폐의 교환은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런 예를 보여 주는 것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고 하는 ‘그레샴의 법칙’입니다. 순도가 높은 화폐와 순도가 낮은 화폐가 시장에서 같은 구매력을 가지면, 실물가치가 높은 양화가 시중에 유통되지 않고 집안 장농 안에 숨겨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광복절 50주년 기념주화는 발행이 되자마자 시중에 유통이 되지 않고, 사장된 상태입니다. 이 화폐의 액면가격은 500원이지만, 실물가치는 이보다 높습니다. 기념주화는 거래를 하려면 액면가격보다 높은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세겔화와 로마화폐 데나리온화도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세겔화는 순도가 높아도 시장에서 사장될 수 없습니다. 성전세는 반드시 세겔화로만 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시장이론으로 보면 독점시장입니다. 그래서 세겔화가 데나리온화와 교환이 되기 위해서는 세셀화에 웃돈(premium)을 붙이게 됩니다. 더구나 사회에서 인구와 경제 규모가 커지면 화폐의 거래 수도 커지므로 이에 따른 화폐 발행고도 커져야 합니다. 그런데 데나리온화는 늘어나고 있지만, 세겔화는 발행고가 일정하거나 쉽게 늘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강세 화폐인 세겔화는 성전세로 인하여 모두 성전으로 빨려들어갑니다. 그래서 시중에 나도는 세겔화는 씨가 마를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세겔화 반 세겔은 시장 교환에서 ‘그레샴의 법칙’과는 정반대 현상인 ‘역그레삼의 법칙’이 작용합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양화(세겔화)가 악화(데나리온화)를 흡입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제사장들과 결탁한 환전상들은 더 높은 환율을 적용하여 가면서 가난한 자가 바치는 성전세 반 세겔에 폭리를 취합니다. 그래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에서 이 더럽고 더러운 돈장사를 하고 있는 환전상인을 꾸짖으며, 환전상을 뒤집어 엎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왕의 통치, 1호 사역으로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변한 시장 혁파(시장청소)이었습니다. 이것은 성전청소이기도 하지만, 강도의 소굴이 된 시장청소입니다. 이 강도의 소굴을 청소한 사건에 대하여 톰슨 성경, 주석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흠이 없는 동물들이 희생 제사의 제물로 매매되었다. 그리고 헬라의 로마화폐는 성전세를 위하여 세겔 단위의 화폐와 교환되었다. 상인들은 제사용 동물들의 값을 비싸게 받아 폭리를 취히므로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었고, 로마화폐를 유대화폐로 바꿀 때도 그 환율을 속이므로써 부당한 이익을 추구하는 등 성전을 더럽히고 지나치게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는 범죄를 범하고 있었다.] (톰슨 성경, 기독지혜사, 1986. 74쪽. 마가복음 11:15 주석에서)
성전에서 배운 유대인의 금융 기법
성전에서 제사장과 결탁한 상인들은 비둘기 한 마리를 비싸게 팔아먹고, 돈을 바꾸면서 웃돈을 붙여서 폭리를 취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이들에게 채찍을 가했습니다. 이것은 그 자리에 있는 상인들에게 든 채찍이라기보다 이를 묵인 조장하는 대제사장과 제사장,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채찍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등은 왕의 이런 채찍을 받아드릴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에 분을 가득 품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지를 노리고(꾀하고) 있습니다(막 11:18).
이 세상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대노하면서 강도의 소굴을 청소했지만, 그 청소는 1회성으로 끝이 납니다. 강도의 소굴을 청소한 왕은 4일 후에 십자가형을 받고 죽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헤롯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티투스) 장군의 침략으로 파괴되어 버립니다. 헤롯 성전의 파괴에는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헤롯 성전은 부자들이 금으로 도금한 벽돌을 받쳐서 지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또 성전이 불에 탈 때 벽돌에 발라진 금도금이 녹아 돌과 돌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고 합니다. 성전에 불을 지른 로마의 병사들은 창과 칼끝으로 불에 녹아서 흘러내린 금을 긁어모았고, 돌을 부수며 금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부서져서 예수님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다만, 가난한 자가 바친 벽돌로 축조된 서쪽(이방인의 뜰) 성벽은 금이 들어있지 않아서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아직도 남아있는 “통곡의 벽”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한 유대인들은 유럽으로 건너가서 중세에 이르면 성전의 화폐 교환에서 터득한 금융 기법을 사용하여 금융계를 지배하는 계기를 만듭니다. 중세 유럽은 기독교 국가가 되면서 성경대로 한다면서 이자를 금지하는 이자 금지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런데 유럽에 사는 유대인들은 이자 금지법을 역이용하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사업가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지 않는 대신 서로 다른 화폐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대부를 합니다.
예를 들어 영국의 파운드화를 빌려주고 받을 때는 독일의 마르크화를 받는 것입니다. 물론 이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자율 대신 환율을 적용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 적용 환율은 법이 금지한 이자율보다 더 높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금융 기법으로 유럽에서 부자가 되고, 유럽의 금융계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전에서 화폐를 교환할 때 세겔화에서 웃돈을 붙이는 금융 기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제사장 가문은 이 금융 기법을 가보로 남겨서 중세에 유럽까지 전해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럽과 세계의 금융계를 지배하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금융의 황제 로스차일드 가문과 골드만 삭스가 그 대표적입니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금융거래에서 조지 소로스와 같은 귀재들이 많습니다.
영국은 금융술로 유럽의 부를 취하는 유대인들을 미워하여 십자군 운동 등을 통하여 추방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영국마저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찬성표를 던져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영국의 경제가 유대인 금융 자본가들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의 금융술은 나라의 독립에도 큰 영향을 키쳤습니다.
“강도의 소굴”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화폐의 금융술을 이용하여 고수익을 올리고 있지만, 중세 교회나 학자들은 이 금융술의 실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외환시장에서 환차익을 추구하는 금융의 기법입니다. 이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학자나 스토아학파는 말을 새끼를 낳지만, 말이 끄는 마차는 새끼를 낳지 못한다고 하면서 “화폐불임설”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중세교회의 이자 금지법을 옹호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레위기 희년법을 조금만 알았으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레위기 희년법이 가르쳐주는 토지거래는 금융수단이며, 이는 미래가치를 당겨서 팔고 사는 금융 거래입니다. 그러므로 미래가치를 팔고 사는 토지거래는 시간의 가치를 조정하는 이자와 이자율이 필수적입니다. 곧 레위기 희년법이 가르쳐 주는 토지거래는 미래에 발생할 예정 이자(지대=토지가치)에 대한 현재의 일시불 거래 가격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뒤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마 25:27)’에서도 이자를 허용한 사실이 있습니다(마 25:27). 그러나 구약시대에 유대의 지도자나, 중세의 철학자들, 그리고 지금의 경제 전문가들마저도 레위기 희년법이 말하는 토지거래가 금융거래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자의 금지는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 금융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융을 독점한 악덕 고리채업자가 가난과 궁핍을 악용하여 취하는 폭리성 이자를 꾸짖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슬람은 이자는 금하고 주식은 허용하고 있습니다. 균형 이론을 적용하면 시장기능에 따른 이자는 시장을 교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식은 정상시장에서도 실물 없는 가격이 발생하고, 생산 없는 웃도 붙어서 투기로 부풀려진 가격이 시장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의 자본투자는 금융 이자를 금하고 주식만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금융에 대해서도 이처럼 무지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금융시장에서 발생하는 환차익의 추구는 오늘날 세계의 금융과 외환 거래로 커지면서 퍼져나갔습니다. 지금도 세계는 하루에도 천문학적 숫자로 외화를 팔고 사고 있습니다. 전자 시스템을 이용하여 국경도 없고, 시간도 없고, 번개 속도로 팔고 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천문학적 거래가 실물 결제를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것은 무역수지, 해외 송금, 자본거래까지 모두 합하여도 거래 총량은 10%~20% 미만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면 나머지 80~90%는 결제수단이나 실물 거래수단이 아닌 환차익을 추구하는 투기성 거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세겔화가 순도가 높아서 화폐 교환에서 양화(강세화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웃돈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의 달러화가 기축통화(key currency)의 기능을 하면서 세계의 외환시장에서 강세시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이자율을 높이면 달러 가격이 올라서 부가 미국으로 수평 이전을 하는 효과를 가집니다. 이자율이 내리면 그 반대 현상이 발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린 이자율이 주식과 채권 등의 금융가격을 높여서 주식과 채권 등의 매입으로 세계의 부는 다시 미국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물론 이것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반드시 미국이 유리하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연준과 금융당국은 이를 선제적으로 조정하면서 화폐의 교환에서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에 세계인들은 달러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기축통화의 기대 심리가 작용하여 그런 분위기를 더 부추기고 있습니다.
성전에서의 발생한 환차익의 웃돈 거래는 가치의 생산활동이 아닙니다. 이런 성질의 웃돈 거래는 가치의 이전 행위입니다. 사회적으로 제로섬 게임입니다. 성경에서 환차익은 두 번째로 발생한 가치의 이전 행위에 속합니다. 첫 번째가 희년법을 위반하여 팔고 사는 토지거래에서 매매차익입니다. 이것은 희년법이 말하는 희년까지의 시한부 거래를, 기한 없는 영구거래로 바꾸었을 때 생깁니다. 이 가격은 가치의 생산, 실물의 교환, 소득의 발생이 없이 숫자만 커진 가격으로 거래자 간에는 생산활동이 없는 가치의 이전 행위입니다. 그다음이 주식이고, 선물이고, 지금은 어처구니가 없는 가상화폐까지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학자나 전문가들이라도 실물 금융(금전증권, 상품증권, 실물 실현이 가능한 시한부 무형자산 등)과 실물 없는 웃돈 거래, 곧 허구적 금융 거래를 물리적으로 식별하지 못합니다.
왕으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에서 행한 이러한 환차익의 추구 행위를 "강도의 소굴"이라고 강하게 질타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꾸중을 직접 들은 유대인들은 오히려 그를 잡으려고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세계의 금융시장과 자본시장은 이러한 웃돈 거래를 회수와 규모를 계속 늘리면서 헛수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질서에도 없는 자본 금융의 웃돈 거래는 땅값, 외환, 주식, 선물, 각종 파생금융상품, 이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내재가치 0에 가까운) 코인까지 생겨서 세상을 헛수로 부풀리고 있습니다.이런 “강도의 소굴”은 가증한 짓을 경고하고 있는 계시록에서 음녀와 세상의 왕들과 상인들의 거대한 결탁으로 얽히고설킨 시장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시장은 하루 만에 몰락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 때까지 이런 제로섬 게임과 허수놀이를 계속할 것 같습니다(계 18:1~24).
예수 그리스도는 왕의 신분, 왕의 통치로 이렇게 강도의 소굴을 청소했습니다. 그리고 성전까지 들어가지도 못하는 소경과 저는 자를 만나서 고쳐주고, 날이 저물어서(막 11:19) 성 밖으로 퇴청을 하셨습니다(치유와 퇴청은 사적인 사역으로 보임). 거기는 주위에 무화과나무가 있는 벧바게와 종려나무가 있는 베다니 마을이 있고, 성전도 1km 앞에 보이는 감람산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면서 월요일 하루 일정을 마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