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불가능 대한민국
박상인 지음, 21세기북스 2022.
한국 경제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한국 경제의 혁신과 탄소중립을 위한 전제 조건
우리나라는 재벌 대기업 중심의 전속계약 관계가 만들어낸 각종 폐해 때문에 혁신형 경제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생기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 등이 소득 불평등으로 전이되면서 조기 퇴직과 청년실업, 자영업의 문제와 노인빈곤, 저출산 등 우리 사회의 수많은 이슈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혁신과 포용적 성장을 위해서는 경제 체제를 바꾸는 구조적 개혁이 절실하다. 우선 재벌 중심의 경제 블록화를 야기하는 전속계약 관계를 끊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B2B(Business to Business) 시장 내에서 공정한 경쟁과 혁신의 기회가 창출될 수 있다.
인터넷 플랫폼 분야가 B2C(Business to Consumer)에서 혁신을 일으키고 성공하는 것을 보면 우리 민족에겐 분명 혁신 DNA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B2B에서도 B2C에서 이룬 성공이 가능하도록 시도할 필요가 있다. 성공의 대가가 착취되지 않는, 공정한 자유 경쟁 체제가 공고해지면 B2B에서도 혁신이 불길처럼 일어날 것이다.
B2C는 그동안 내수 위주의 유니콘 기업에 치우쳐 있어서 수출이나 해외 진출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었다. 이와 달리 B2B는 중간재 중심이므로 언어나 문화적 장벽 없이 수출할 수 있는 분야이고 전 세계적으로 시장 규모도 커질 수 있다. 이처럼 충분한 성장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제조업 중간재 산업에서 반드시 혁신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 해소가 급선무다.
이런 혁신과 포용 성장은 탄소중립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중화학공업 중심의 제조업 구조를 유지한 채 탄소중립으로 이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저탄소-친환경 산업 구조로 전환하지 않고는 탄소중립은 달성되기 어렵다. 이런 산업전환을 위해서도 소유지배구조의 경직성을 해소할 수 있는 재벌 개혁이 필요하다.
왜 융합형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가
최근 융합형 혁신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자동차의 전장 분야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전장 분야는 전통 산업인 자동차와 소프트웨어 및 전기 장치가 통합되어 탄생했다. 문제는 우리나라 산업 전반에서 이런 융합형 혁신이 제대로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자동차 산업과 전자 산업이 모두 발달한 나라인데, 전장을 제대로 하는 기업이 없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이는 경제 전반에 재벌 대기업 중심의 블록화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 현대기아차 중심으로 하나의 경제 블록화가 이루어져 있다. 전자 산업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와 LG전자를 중심으로 블록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의 경쟁이 없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블록 간의 경쟁도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업계 간 융합을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과 탈 수직계열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런 변화의 흐름에서 벗어나 우리나라는 정반대의 블록화를 고수하고 있다. 이는 슘페터주의 성장과 혁신에서 굉장히 불리한 구조다. 이것이 깨져야 진정한 혁신형 경제로 나아갈 수 있다. 중간재 산업에서 이런 혁신이 일어나면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고 임금도 올라가게 된다. 그러면 원청기업과의 교섭력도 상승하므로 임금 격차도 줄일 수 있다.
일본, 독일, 미국에서는 중소기업이 대기업 임금의 80퍼센트 수준을 받는다. 구조적으로 혁신이 일어나 교섭력이 생기고 상생할 수밖에 없는 경제 체제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상대로 착취가 아닌 상생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마련되면 중소기업의 성장이 고도화되고 임금이 높아져 대기업과의 격차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가격경쟁력이 아닌 살아남기 위한 기술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인적자원이 중요해지기 때문에 경험이 많고 생산성이 높은 사람들의 가치를 더욱 중요시 여기게 된다. 당연히 조기퇴직자가 줄어들고 사회구조적 문제도 완화될 수 있다. 물론 이럴 경우에는 임금 체계를 성과급 중심으로 가져갈 필요가 있다.
인적자원이 중요해지고 성과급 중심으로 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근속 기간은 더 길어져야 한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 격차가 줄어들어 중소기업 직원이 대기업 직원 대비 80퍼센트 정도의 임금을 받게 되면, 중소기업에서 장기 근속하는 근로자가 많아지게 된다. 또한 그만큼 연금액도 높아지므로 지금처럼 중소기업을 기피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중심의 경제구조 확립
대학교수로 퇴직하는 사람과 초등학교 선생으로 퇴직하는 사람 중 누가 더 연급을 많이 받을까? 초등학교 선생이 더 많이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월급은 대학교수가 더 많지만 근속 기간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선생은 20대 초중반부터 시작해 정년까지 근속하는 반면, 대학교수는 30대 후반 혹은 40대에 시작한다. 당연히 근속 기간이 상대적으로 더 짧을 수밖에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기업 임금의 80퍼센트 정도를 받는 중소기업 근로자도 근속 기간이 길면 퇴직 후 연금 생활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굳이 퇴직 후 리스크를 감수하며 자영업에 뛰어들 이유가 없다. 연금으로 여유 있게 생활하면서 노인빈곤을 피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자영업 문제가 많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영업에도 공급자와 수요자가 존재한다. 이들 나라에서는 퇴직한 이들이 자영업의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가 된다. 예를 들면, 얼리버드Early Bird라는 스페셜 디스카운트를 하는 식당이 많은데, 저녁 6시 전에 식사하러 오면 할인을 해준다. 이 서비스는 대부분 노인들이 누리는 혜택이다. 크루즈 관광객도 젊은이보다는 노인들이 더 맣다. 연금 생활을 하면서 여유 있게 노년의 삶을 즐길 수 있는 경제구조가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조기퇴직을 하면 생계를 위해 자영업의 공급자가 될 수밖에 없다. 자영업에 대한 공급이 많고 수요가 없는 구조에서는 자영업 문제와 노인빈곤 문제 모두 해결이 불가능하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연금 생활자가 많아지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중소기업들의 생산성이 올라가고 더불어 임금도 올라야 이른 시기에 중소기업에 취직해서 오랫동안 근속하고, 그로 인한 연금 생활을 누릴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경제 구조의 근본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청년 실업, 공시족 문제, 저출산 문제 등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재벌 중심 체제로는 인간 중심의 경제구조, 인간 중심의 사회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러한 개혁을 하려면 우리나라의 경제 체질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재벌 기업 위주의 독과점 체제가 아닌 공정 경쟁 체제로 나아가기 위한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재벌 대기업과 물적자본 중심의 산업 구조를 기술력 있는 중소·중견기업과 인적자본 중심의 산업 구조로 바꾸고, 혁신 성장이 가능한 경제구조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175-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