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양도성 둘레길
1. 서울성곽
서울성곽은 과거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을 둘러쌓고 있는 도성이다.
오랜 역사성과 함께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둘레는 약18.6km, 면적은 59만6812㎡이다.
서울성곽은 1396년(태조5)부터 축성을 시작했다.
성벽은 백악(白岳342m)· 낙산(駱山125m)· 남산(南山262m)· 인왕산(仁王山338m)의 능선을 잇고 있으며, 길이는 영조척(營造尺)으로 5만9500자이며 이 길이를 천자문(千字文)의 97자(字) 구획으로 나누고 매자구간(每字區間) 600자로 하여 백악의 동쪽으로부터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막음은 백악 서쪽의 조자(弔字) 구역으로 끝났다.
이때 쌓은 성벽은 석성(높이 15자) 1만9200자, 평지의 토성 4만30자이며, 수구(水口)에는 홍예(雲梯)를 쌓고 좌우에는 석성을 축조했다.
1396년 정월부터 팔도 각지에서 모인 12만 명으로 성곽 축조 공사를 시작했다.
성에는 四大門(동대문―興仁之門, 서대문―敦義門, 남대문―崇禮門, 북대문―肅竫門)과 四小門(동소문―惠化門, 서소문―昭義門, 남소문―光熙門, 북소문-彰義門)8개의 문을 냈다. 이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소실되어 그 터만 남았고, 흥인지문(동대문)만은 옹성으로 쌓았고, 숙청문(숙정문)은 암문(暗門)으로 하여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남대문은 1396년, 동대문 옹성은 1399년 완성되었다. 서울성곽은 오랫동안 밖으로는 외적의 공격을 막고 안으로는 왕권의 위엄과 권위를 보여줌으로서 나라의 안정을 꾀하는 역할을 하였다.
2. 서울과 성곽의 시초
조선 태조는 1394년 무학대사와 함께 직접 현장을 시찰한 다음 지금 서울지역으로 천도하도록 결정했다. 정도전을 한양에 파견하여 도시건설 전체를 맡겼고 정도전은 건중화와 협력하여 종묘, 사직, 궁궐, 시장 등에 대한 도시 계획을 세웠으며 1395년 9월 신도읍 공사를 완료하였다.
이후 바로 도성 축조를 위한 임시기구인 도성 축도도감을 설치하여 도성 축조 기본계획을 세우도록하고 성터 측정을 명령하여 실행하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돌이 많은 산등성이는 석성으로, 흙이 많은 평지는 토성으로 하여 쌓았으나 토성은 비에 약하여 훼손되어 지속적인 정비를 계속하다가, 세종대왕 때 도성 수축도감을 설치하여 전국에서 32만명에 이르는 군인들을 징발하여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아 성곽을 튼튼히 하는 공사를 진행하였다.
성곽은 천재지변이나 임진왜란 같은 전쟁을 거치면서 무너져왔으며 개축되기를 반복하다가 숙종30년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3군영을 동원하여 6년간 개축공사를 하였다.
영·정조 이후에도 개축은 지속되었으며 19세기 말 일본의 침략으로 성곽은 크게 훼손되었다. 또한 전차를 놓으면서,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6.25이후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보존보다는 훼손의 정도가 심해졌다.
3. 성벽의 축조기법
1) 태조때의 성벽
자연석을 거칠게 가공하여 아래쪽은 넓은 돌을 놓고 위쪽으로 갈수록 작은 돌로 쌓았으며 위로 갈수록 조금씩 들여쌓는 방법을 썼으며, 현재 남산지역 일부에서 볼 수 있다.
2) 세종때의 성벽
석재가공을 하여 아래쪽은 장방형으로 된 돌을 쌓았고, 사이 사이에 잔돌을 섞어 위로 갈수로 안쪽으로 들여쌓는 공법을 썼으며, 돌의 모양에 따라 깍아서 틈을 없애는 그렝이 기법이 일부 사용되었다.
3) 숙종때의 성벽
한변이 45센티미터 정도로 정방형에 가깝게 규격화하여 쌓았으며, 일부에서는“ㄱ”, “ㄴ” 자모양으로 가공하여 석재간 마찰을 늘려 성벽을 튼튼히 하기 위해 다듬어서 사용한 곳도 있다. 이 때는 거의 수직에 가깝게 쌓았다.
4. 성곽의 구조물
1) 4대문과 4소문
동서남북 4방위마다 각1개의 대문을 건설하고 그사이 통행의 편리를 위하여 4개의 소문을 설치하였다.
이4대문에는 유교에서 말하는 사람이 지켜야할 5가지 덕목인 5상(仁義禮智信)에서 글자를 한자씩 가져와 각문에 붙였다. 동쪽을 뜻하는 仁은 興仁之門에, 서쪽을 뜻하는 義는 敦義門에, 남쪽을 뜻하는 禮는 崇禮門에, 북쪽을 뜻하는 智는 肅竫門에 빠졌고 탕춘대성의 弘智門에 붙였으며 信은 普信閣에 붙어있음을 볼 수 있다.
四小門은 북동쪽의 惠化門 동소문, 남서쪽의 昭義門 서소문, 남동쪽의 光熙門 남소문, 북서쪽의 彰義門 북소문이 있다.
2) 협축성과 편축성
협축성은 주로 평지에서 성곽 양쪽을 석축이나 흙으로 쌓은 것으로 중국의 만리장성이 대표적이고, 편축성은 산지가 많은 지역에서 한쪽만 석축을 쌓고 그 뒷면을 잡석이나 흙으로 채워 보강한 것으로 그 대표적이 서울성곽이다.
3)체성과 여장
체성은 성의 몸에 해당되는 부분이며 여장은 공격용 창이다.
체성은 겉으로 드러난 성벽과 그 뒷면에 채워진 돌이나 흙도 포함된다. 겉으로 드러난 벽의 석재를 면석이라하고, 면석을 받치고 있는 아래의 석재를 “기단석”이라한다. 면석 뒤 보이지 않는 곳에는 가공하지 않은 잡석으로 쌓아올리는데 이를 “뒤채움석‘이라 한다.
여장은 체성위로 올려진 낮은 담장을 말하며 성밖의 상황을 살피고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여장에는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3개의 구멍를 설치하는데 양쪽 2개는 원총안으로 구멍을 수평으로 하여 멀리 있는 적을 공격하기 좋게 하였으며, 가운데 구멍은 근총안으로 구멍을 아래쪽으로 향하게 하여 가까이 있는 적을 공격하기 좋게 하였다.
4) 곡성과 치성
성곾의 일부를 바깥으로 둥그렇게 돌출시켜 쌓은 성을 말하며, 관측소나 포대를 설치하기 위한 시설로 방어상 중요한 지점에 설치하였다. 서울성곽은 백악산과 인왕산 2곳에 설치하였으나 인왕산에 설치된 곡성은 군사시설로 인하여 들어가 보기가 곤란하다.
5) 암문과 수문
암문은 대문과 소문사이에 성곽이 굽어진 바로 뒤에 설치하여 평소에는 잘 막아두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는 비밀문으로 사용하였다. 전쟁이나 비상시 밖으로 통하는 비상구의 역할을 하였다. 서울 성곽은 개축을 하면서 8개의 암문을 설치하여 일반인의 통행을 위한 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 서울특별시는 서울을 둘러쌓고 있는 서울 성곽 복원과 함께 서울 성곽길을 조성하고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는 서울의 개발에 따른 훼손으로 사대문 안 전체를 등재하기는 곤란하다고 판단해 역사 도시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서울 성곽 등 조선시대 도성과 도성 방어 유적을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추진 대상으로 선정하여 추진하였다.
서울성곽이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대상으로 선정된 이유는 서울성곽이 세계에서 최장기간 도성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보존 상태도 비교적 좋았기 때문이다.
Walking
2026. 9.23(수요일)
동대문역에서- 와룡공원
동대문역(10:10)- 이화마루 텃밭(508 Shop)(10:40)- 혜화문(11:41)- 경신고등학교(11:53)- 와룡공원 와룡정(12:20)- 통일부 남북회담본부(1:130- 북촌 김치재(1:56)
동대문역에서 동대문을 둘러보고 한양도성 둘레길로 접어들어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 이화마루 텃밭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하였다.
화창한 가을날씨이다.
파란 하늘에 뭉개구름이 낀 한양도성 둘레길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내려간다.
낙산 정상에서 멀리 안산,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 그리고 길게 이어지는 산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조금 내려가다 성곽바깥으로 나가 둘레길을 따라 내려가니 혜화문이 눈앞에 들어온다.
혜화문에서 성곽 바깥쪽과 주택가 사이로 난 길로 경신고등학교와 서울 과학고등학교까지 이어지고 바로 위에서 북정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분기된다.
혜화문에서 과학고등학교까지 구간은 주택과 시설물 그리고 학교부지가 성곽위에 설치되어 둘레길이 복원되지 않은곳이다.
여기부터 다시 성곽안쪽으로 계단을 타고 오르막을 올라가 와룡공원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휴식하면서 간식을 먹었다.
오늘 일정은 숙정문을 지나 북악산 정상에 오르고 창의문까지 가기로 되었으나 서울 북촌등 시내 구경을 하기로 하고 감사원과 가회동 성당 그리고 헌법재판소를 지나오면서 북촌 일대를 구경하였고 식당가 북촌 김치재에 도착하여 일정을 일찍 마무리하였다.
다음에는 와룡공원에서 시작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