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글쓰기 49 ㅡ 신뢰의 값 (사소)
거진 십이 년 동안 거래하던 서점이 있다.
지난해 추석 때는 결제를 하러 갔는데 정산을 안해놨다해서 그냥 왔다. 그리고 또 몇 개월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래서 구정 때는 맘먹고 가서 결제를 하겠다고 했다. 여자 사장님은 한쪽 구석에서 식사를 하시다가, 내가 들어서자마자 화안하게 웃으며 반기신다. 그리고 코로나로 얼마나 힘들었냐고 눈빛 위로를 건네신다.
나는 다들 힘들었기에 그런지 알고 견뎠다고 웃음으로 화답했다. 사장님은 다시 안쓰러운 듯 따뜻하게, 직원들 월급 또박또박 주는 게 쉽지 않았을 거라고, 건재하고 버텨오는 힘이 대단하다고 말씀해 주신다. 그러자 나는 사장님께 항상 식사를 좁은 데서 그렇게 하시느냐고, 그 시간마저 방해해서 죄송하다고, 책을 구경하며 기다릴테니 마져 드시라고 한다. 사장님은 괜찮다고 의자를 내밀며 잠시 앉으라고 하신다. 가져온 명절 선물을 드리니 사장님은 본인이 줘야 하는데 사왔다고 눈을 감추시며 음료를 건네신다. 처음 뵀을 때는 중년의 부인이셨는데 지금은 은빛 단발의 사장님. 세월이 그렇게 지나온 것이다.
사장님을 처음 알게 된 건 벌써 십여 년 전 일이다. 햇빛 알레르기를 앓던 여고생은 먼 곳에서 입시 컨설팅을 받으러 찾아와서는 낯선 동네에서 길을 잃었다. 학생은 헤매다가 길에서 우연히 서점 사장님을 만났고, 그분이 일러줘서 아파트를 찾을 수 있었노라고 했었다. 나는 친분이 없던 분인데 어떻게 아시고 가르쳐 주셨는지 그저 고맙기만 했었다. 그 후 가끔씩 교재가 필요하면 서점에 들르곤 했었다.
학원을 처음 열고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님은 우리 학원생이 본인 서점에서 책을 사면, 카드로 사도 에누리를 해주겠다는 특별한 제안을 해오셨다. 가끔 서점 계산대에서 고객들과 인센티브 시비가 생기는 걸 봤었고, 그럴 땐 사장님은 무섭게 보이기도 했으니, 제안을 선뜻 받기엔 어색했다. 하지만 순수한 비즈니스 어디쯤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런 혜택을 받는 업체는 우리 학원이 유일하다니 무척 고마운 마음이었다. 그 후 학부모님들은 우리 학원생이란 게 입증이 되면 서점에서 할인을 받아 책을 구입했고, 에누리 안내 문자를 쿠폰처럼 소중히 다루셨다.
사장님은 학원에는 총판에서도 공급하기 힘든 교사용 교재를 가급적 빨리, 많이 구해 주셨다. 그리고 점점 출판사들이 어려워져 교사용 교재를 공급받지 못할 때는, 판매용 교재를 외상으로 주셨다. 필요한 샘들에게는 그냥 책을 내주고 일 년에 한두 번씩, 한꺼번에 결제를 할 수 있게 배려하셨으니 그야말로 특급 서비스였다. 도서 담당 샘은 늘 서점에 들러 샘들 교재를 가져왔고, 내가 자주 가서 결제하지 않아도 되고, 인터넷보다 빠르게 샘들에게 교재를 구해줄 수 있으니 너무 좋은 편의 제공이었다.
그런데 조금 오랜만에 결제를 하러 온 지금,
사장님은 내가 결제해야 할 액수가 근 기천만 원이 된다며 혀를 내두르신다. 말하시면서 걱정하시는 눈빛이 역력했다. 나는 금액을 듣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교사들이 가져다 쓴 교재값이 쌓인 것치곤 터무니없이 금액이 많았고 순간 믿기지 않았다. 출발하기 전 분명, 실장에게 서점에 가서 결제해야 할 금액을 묻고 왔던 터라, 불러준 금액보다 세 배가 넘는 청구 금액에 '혹시 사장님이 계산을 잘못하신 게 아닐까? ' 하는 생각이 스쳤다. '언제 마지막 결제를 했던가?' 기억이 안난다.
그래도 돈 문제라 최대한 예의를 갖춰, 죄송하지만 학원에 가서 실장과 계산을 맞춰보고 결제를 마무리하겠다며, 절반을 결제한 채 학원으로 향했다. 등 뒤로 사장님의 어려운 시기이니 천천히 해도 된다고 걱정 마라는 소리가 들렸다.
'사장님은 코로나 이후 한 번도 결제가 안됐다 하시는데, 그렇담 거의 삼 년인데 내가 정말 그럴 리가 있겠는가? ' 서점에 일 년에 두어 번은 갔었는데 말이다. 도무지 시간과 기억에 대한 질서가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샘들이 갑자기 교재를 엄청나게 이중 삼중으로 많이 가져다 썼을 리도 없었고 모든 게 모호했다.
돌아가자마자 실장에게 몇 년간 영수증과 기록을 뒤지게 했다. 그런데 우리 털털하고 인심 좋은 실장님은 장부도 기록도 계산도, 뒤죽박죽 지출 관리의 경계를 심각하게 넘나들고 있었고 말했던 결제 예정 금액마저 근거가 부족했다. 컴퓨터에 기록하는 관리 프로그램이 바뀌면서 몇 년간의 지출 정보가 삭제돼 있었다. 그런데다 실장은 해가 지난 우리 측 영수증마저도 이미 폐기했다고 해맑게 웃는 게 아닌가?
사건의 전말은,
모든 카드사에 전화를 걸어 근 삼 년간 카드 결제 기록을 받아 확인하고서야 결말이 났다. 2019년 10월이 마지막 결제였다. 2020년 다음 결제를 해야 할 시기부터 코로나로 악전고투하며 하루하루 넘어오면서 시간의 흐름은 어떤 자극도 인식도 모두 망각이란 마법에 가둬버린 것이었다.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내가 신경을 찬찬히 썼더라면 생기지 않을 문제인데, 사장님은 그 세월을 묵묵히 참고 기다리신 게 분명했는데 적반하장으로 사장님의 계산을 의심했던 것이다.
'사장님이 내가 헷갈려 할 때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그런데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걱정하시고, 하물며 그 흔하게 할 수 있는 독촉 전화도 단 한 번도 없으셨던 게 아닌가? '.
돈을 창고에 쌓아놓은 처치 곤란한 사람이 아닌 이상, 그 인내심과 아량이라는 것은 내가 일찍이 품어보지도, 경험해 보지도 못한 신이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지체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스멀스멀 민망함이 괴로움으로 변하고 있었다.
사장님께 황급히 전화를 걸어 너무 죄송하다고 사과를 드렸다. 그리고 이전에도 용무로 여러 번 전화를 드렸었는데, 왜 그렇게 많이 쌓인 외상 값을 한 번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냐고 겸연쩍은듯 여쭸다. 심지어 지난 추석 때도 찾아갔지 않았느냐고,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사태에 대한 변명은 푸념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어떤 말씀을 드려도 나의 죄스러움이 상쇄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장님께서는, 코로나로 이리저리 쓰러지는 업체들을 보면서 '사정이 괜찮아지면 어련히 와서 결제를 하겠지' 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윤원장이 안주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다 한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이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 말씀인즉슨 내심 근심하고 계셨던 것의 증명이었다. 문제는 그동안 내게 그런 걱정이나 근심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망각이 문제였다. 그런데부족하고 어리버리하고 빈틈 많은 내게 사장님은 과분한 신뢰와 배려를 주신 거였다.
과연 받을 금액을 기다리는 처지였다면 내가 사장님처럼 관대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었다. 다시 서점에 가서 나머지를 결제를 할 때도, 사장님의 천천히 해도 된다고 말씀하시며 지으시는 미소를 나는 잊을 수 없다. 이럴 때 나는 '여한이 없다'라는 문구가 생각난다. 이런 황홀한 신뢰의 값으로 어찌 일상의 고통쯤이야 선뜻 지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봄이 오고 있다.
치유의 글쓰기를 하자니 식사를 대접해 주시겠노라하시던 골짜기 백합님의 말씀과 함께 이미란교수님의 조용한 미소가 겹쳐온다.
첫댓글 요즘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네요.
참으로 좋은 분을 알고 계시네요. 문득 참 '위화적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전을 찾아 봤는데 이해하기 어려워요.^^
@사소 푸하하, 최근에 본 소설이 중국 작가 위화의 <원청>이었어요. 그 소설에 나오는 정직하고, 고지식하고, "의리있는" 인물군상이 떠올라서 제가 해 본 말이었습니다. 혼란을 초래해서 미안합니다^^
@muse 아! 인물 '위화'군요. 저기요. 교수님! 사과까지 하시다니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