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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 입문] 다음 시간 자료입니다.
제 19강
1958. 7. 29.
개념의 지시적 규정과 정의적 규정의 경계·329 | 개념은 백지상태가 아니다·330 | 개념과 짜임관계·332 | 변증법의 대상인 개념의 역동성과 생명·333 | 구두정의와 철학적 정의·334 | 철학적 정의는 사태에 대한 예비지식을 요구한다·334 | 철학적 정의는 개념들을 힘의 장들로 확장한다·335 | 철학적 정의의 특유한 특질로서의 축약·336 | 개별과학들에서의 조작적 정의들·337 | 인식의 종합적 계기의 상실·338 | 조작적 정의들의 적용영역들·340 | 유명론과 실재론의 비판적 매개로서의 변증법·340 | 현상학적 의미 분석의 진리계기·343
나는 여러분이 우선 한 개념을 규정하기 위해 가능한 두 가지 방식, 즉 지시 방식, 그러니까 그 개념으로 뜻하는 사태 자체를 가리켜 보임으로써 규정하는 방식과, 정의 방식의 구분에 주목하도록 했습니다. 이 구분은 물론 전통적 인식론에 포함됩니다. (…) 나는 그러한 구분을 다룸으로써 여러분을 본래 변증법적인 일련의 문제들로 이끌어가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지시적 규정들에 대한 호소는 단지 여러 사례들의 한 단편 속에서만 가능하고 아무튼 현실적으로 수행될 수 있는 데에 반해, 좀 더 복합적이고 더 큰 맥락에 위치하는 개념들의 경우 그러한 지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한 소급을 전제할 터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경우 양이 질로 [전환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사태 자체를 지시함으로써 계급이 무엇인지 혹은 사회가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한다고 하면, 이 두 가지는 물론 과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개념들인데, 궁극적으로 계급이 무엇인지 사람들의 눈앞에 보여주려면 무한히 매개된 과정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만 아니라 무엇보다 본질적으로 이 개념들 자체가 매우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 자체 속에 범주적 계기들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그것으로 뜻한 사태를 단순히 지시하는 것으로는 실제로 전혀 문제가 풀리지 않기 때문에도 우리는 상당히 당황하게 됩니다.(278)(입문328-329)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것들은 철학, 특히 헤겔과 니체의 철학이, 사물처럼 고정되지 않으며 또 어떤 규정성을 잃지 않고는 어떤 다른 개념들로 간단히 추상되지 않는 역사적 내용을 지니기 때문에 본래 정의가 잘 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한 바로 그 개념들입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 개념들이 어떤 하나의 내용에 무조건 고착되지 않는다는 점, 그렇게 고착될 경우 개념이 수반하는 다른 모든 것은 개념으로부터 배제될 것이라는 점, 하지만 그럼에도 개념들은 일종의 고유한 규정성을 지닌다는 점, 이러한 것이야말로 실제로 개념에 대한 변증법적 사유의 관계에서 −‘정의’라는 복합문제 전체는 ‘개념에 대한 입장’이라는 복합문제와 구분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입니다.(입문329)
한편 나는 강의 진행과정에서 충분히 드러난 인식론적 이유들 때문에만 아니라, 여러분이 이러한 주제전이를 허용한다면, 도덕적인 이유들^ 때문에도, 정의하는 방식 자체에 대해 어떤 희의를 품도록 고무하고 싶습니다.(279) 나는 예컨대 토론들에서 흔히 “이 개념에 대해 말할 수 있기 전에 먼저 이 개념을 정의해야 한다”는 생각을 고수할 경우, 그 속에는 논의되고 있는 개념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감추어져 있다는 점, 그리고 개념의 정의를 이렇게 고집하는 것은 그 충동에 비춰볼 때 실제로 개념 장치의 조작을 통해 사태에 대한 숙고와 사태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어떤 궤변술의 요소를 조금 지니고 있다는 점 등을 되풀이하여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입문329-330)
여러분이 예컨대 강제수용소에 대한 책임이라는 전체 복합문제에 대해 토론을 할 경우, “우리가 아무튼 책임의 개념에 대해 토론할 수 있기 이전에 먼저 이 책임 개념을 도대체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대해 일단 완전히 명확히 알아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이 토론이 미뤄질 경우, 이는 아우슈비츠라는 사실에 대해 이미 어떤 말로 다할 수 없이 어리석고 동시에 어떤 악의적인 면을 지니는 것입니다. 즉 그런 식으로 외견상 정신적 자유와 과학적 성실함을 통해 비로소 철저한 판단을 얻고자 하지만, 이로써 사태 자체를 감춰버리게 되는 것입니다.(입문330)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개념이 우리의 정의들을 통해 비로소 풍부하게 차려지는 식탁으로 변하는 백지상태라고 믿는 것은 유명론적인 오류입니다.(280) 사실이 그^러하다면 의미 있게 이야기하는 것, 언어 자체가 엄밀히 말해 전혀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입문330-331)
정의되지 않은 개념, 그러니까 일단 내가 받아들이는 그대로 수용되는 단어는, 확실성의 우상 혹은 의심의 여지 없는 개념 사용가능성을 위해 개념이 내포하는 모든 것을 실제로 잘라내는 정의보다는, 그 말로 의미하는 객관성을 훨씬 더 풍부하게 담고 있습니다. 개념들을 사용할 때 변증법적 방법이 떠맡는 과제 혹은 기교는 모든 개념에 담겨 있는 이것을 보존하는 것, 그러니까 그것을 잘라내지 않는 것, 자의적 정립이나 확인들을 통해 은폐하지 않는 것, 하지만 그것을 동시에 의식으로 끌어올려 애매성이나 그릇된 모호성의 영역으로부터 실제로 벗어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정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 개념들이 들어서는 짜임관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드러난 결과, 즉 진리 개념 일반은 인식의 어떤 개별 계기에 맞서 정당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점, 어떤 개별인식도 그 전체 진리를 충족할 수 없다는 점, 오히려 그것들은 서로에 의지한다는 점에 관련됩니다.(입문331)(281)
여러분은 그저 한 사전에서 어떤 개념을 찾아보고 그 다음 또 한 사전에서 동의어들을 위해 그 개념을 찾아보는 실험을 해보면, 이 개념이 직접적으로 내포하지 않는 온갖 것을 내포한다는 점을 알게 되고, 바로 이러한 개념들의 생명은 실제로 그 고립상태가 아니라 짜임관계 속에서 비로소 작동한다는 점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물론 개념은 그것이 들어가는 가변적 짜임관계들을 통해 비로소 실제로 그 규정성을 얻으며, 이러한 변화 속에서 비로소 그 생명을 실제로 보여준다고, 또 이 경우 동시에 그 개념은 변화한다고, 즉 각 개념이 그처럼 새로운 각각의 위치에서 취하는 위상은, 단순한 사물세계에 근거하는 상대적으로 초보적이며 미분화된 칭호들이 관건이 아니라면, 개념이 어떤 다른 위치에서 지니는 의미의 변화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실제로 언어에 대한 올바른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한편으로 개념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서, 개념 앞에서의 집요함을 통해서라고 하고 싶습니다만, 그것이 뜻하는 바를 가능한 한 정확히 인식하면서, 동시에 개념이 겪는 변화를 그 나름으로 함께 의식하여 그 개념을 내적으로 규정된 것이면서 또한 자체 내에서 변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282)(입문332)
물론 개념들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며, 우리가 그것들을 획득할 때에는 이미 어떤 확고한 핵심을 지닙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의 변화도 이 확고한 핵심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동시에 개념들은 어떤 정태적인 내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체 내^에서 어떤 과정을 형성합니다. 각 개념은 본래 자체 내에서 역동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과제는 실제로 이 역동을 어떻게든 합당하게 대하는 데에 있습니다.(입문332-333)
나는 철학에서 −그리고 다름 아니라 강력한 요구를 제기하는 철학에서− 정의들이 나올 수 있고 또 심지어 나와야 한다고 전적으로 믿습니다. 하지만 이 정의들은 과학을 통해 야기된 사태들의 사물화가 사태들 자체에 설정해 놓는 과학활동의 틀 내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요구하는 말로 이루어진 정의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유형의 것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283)(입문333)
나 자신이 언젠가 미니마 모랄리아 Minina Moralia에서 써먹은 정의를 아마 단순한 점 때문에 여러분에게 말해도 좋을 듯합니다. (…) 거기에는 짧은 격언 형식으로 예술은 ‘자체를 진리라고 여기는 속임수에서 벗^어난 마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정의는 한 예술작품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 예술작품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입문333-33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착각하지 않는다면, 그런 정의는 흔히 퍼져 있는 예술의 정의들, 예컨대 직접적인 실제 목적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지만 동시에 의미심장한 것으로 경험되는 직관적 조형물 혹은 그런 성격의 어떤 것이라는 정의보다 좀 더 고차원적인 의미에서 더 우월합니다. 그런 정의는 이미 어떤 관념을 가진 사람에게 어떤 불빛을 밝혀주고 그것의 요소들을 결집하여 이제 예술작품에 대한 단순히 정태적이거나 이차원적인 규정 대신에, 예술작품이 실제로 무엇이어야 하는지, 내재적으로 과정적이고 내재적으로 역동적인 그 본질이 명확해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284)(입문334)
예컨대 운명은 살아 있는 자의 책임의 연관관계다 라는 발터 벤야민의 운명에 대한 정의도 비슷한 성격을 지닙니다. 그러한 정의는 물론 예컨대 이미 맹목적 필연성의 계기들, 운명 속에 필연적으로 감춰져 있는 위협의 계기, 연쇄의 계기 등을 알고 또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이미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정의가 마치 하나의 자석인 듯이, 그런 것들은 이 정의를 둘러싸고 정리되는 것입니다.(입문335)
정의들, 철학적 정의들, 그러니까 비교적 차원 높은 정신적 의미의 정의들의 의미는 엄밀히 말해 그러한 자장을 산출해내는 것이지 개념들을 정지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즉 정의들은 실제로 개념들 자체 속에서 작동하는 잠재적 생명을, 혹은 개념들 속에 힘으로 저장되어 있는 것을 폭발시키고, 개념들을 힘의 장으로서 실제로 해방하는 데에 기여합니다. 그런 한에서 변증법 일반의 과제가 단순히 사물로서 주어지고 존재하고 현존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하나의 힘의 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이처럼 비교적 차원 높은 의미의 [정의]는 변증법적 사유의 각별한 도구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변증법적 사유가 정의의 통속적인 사용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단지 이 경우에 실제로 철학의 귀결지점이 되어야 할 것을 멋대로 다루기 때문일 뿐입니다.(285) 실제로 단지 결과이자 과정 자체일 수 있는 것을 무도하게 처음에다 설정하니까 말입니다.(입문335)
이러한 정의들의 본질적 계기는, 이 정의들이 특정한 특징, 즉 축약의 특징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즉 정의들은 정식화의 간결성을 통해 그것이 내적으로 서술하는 과정의 외연적 생명과 특정하게 대립한다는 것입니다. 또 본래^ 정의들에 내재하는 이 모순, 무한히 확산되어 있는 것과 무한히 첨예화되어 있는 것 사이의 이 모순이 실제로 이런 종류의 변증법적 정의로 하여금 그 조명의 기능을 실현케 해 주는 불꽃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 여기서는 더할 바 없이 확산되어 있는 내용이 그것을 본질적으로 압축해 놓는 하나의 진술로 첨예화되지만, 이때 이러한 진술의 압축 자체를 전체 사태로 받아들일 것은 아니며, 이 첨예화 자체가 이때 다만 사태 속에서 작동하는 잠재적 생명을 실제로 가리켜 보이는 목적을 지닌다는 것입니다.(입문335-336)
오늘날 특히 번창하는 흔한 의미의 정의 유형은 이른바 조작적 정의 유형입니다.(286) (…) 조작적 정의란 우리가 어떤 특정한 자료를 상대로 한 개념을 확인하기 위해 시행하는 조작들^을 통해 그 개념을 규정하는 식의 정의입니다.(287)(입문336-337)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정의의 의미는 사실 한 개념에 대한 규정을 통해, 내가 명명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일종의 불빛을 밝히는 것, 그러니까 그로써 실제로 이 개념의 생명을 이루는 것이 무엇이고 실제로 이 개념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엄밀한 의미의 생산적 정의는 종합적인 정의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개념 속에 그때그때 이미 미리 주어져 있는 것에 어떤 새로운 것을 첨가하고 그것을 어떤 새로운 것, 이미 사유되지 않은 것과 관련지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관계를 통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하여금 말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종합적 계기는 조작적 정의에서 원칙적으로 삭제되어 있습니다. 혹은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실제로 일종의 동어반복입니다. 즉 그것은 단지 그 자체의 규정을 통해 규정될 뿐이며, 따라서 엄밀히 말해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 이상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입문337)
여기서 개념은 일종의 백지상태로 취급됩니다. 그러니까 그 자체로서는 우리에게 사실상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으며, 따라서 그 대신 개념은 우리가 그것을 자의적으로 규정하는 데에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변증법적인 과학주의적 사유에서 이른바 객관성에 대한 요구가 커질수록, 동시에 이때의 규정들은 단순히 주관적인 규정들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점이야말로 아마 모든 비-변증법적 사유의 아주 잘 알려진 역설들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객관화를 향한 열정은 본래 언제나 객체에 귀속되는 것, 혹은 객체가 본질적인 구성적 몫을 차지하는 것 모두를 객체로부터 빼앗아 단지 주체에 투여하게 되는 데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예컨대 [흄이나 마흐(Mach) 혹은 아베나리우스(Avenarius) 파의] 과거 실증주의는 이 점을 전적으로 인정했으며, 본질적으로 주관적 색조를 띠는 인식론을 갖고 있었던 데에 반해, 근래의 실증주의는 엄청난 솜씨로 바로 이 잠재적인 주관적 계기를 부인하지만, 그 대신 이런 계기에 완전히 희생되고 맙니다.(288)(입문338)
조작적으로 정의된 개념들을 그 조작적 정의를 넘어서 사용하는 순간 여러분이 느낄 수도 있는 것처럼, 그렇게 쓸데없는 것은 결코 아니며 또 그렇게 인식론적으로 미세한 문제도 결코 아닙니다.(289)(입문339)(290)
나는 물론 변증법적 사유도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개념들 없이는 안 된다는 점, 또 변증법적 사유도 언제나 매우 높은 추상수준의 개념들까지 늘 되풀이하여 사용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반복하고 싶습니다. (…) 변증법은 유명론이 아닙니다. 하지만 또한 변증법은 사실상 실재론도 아닙니다. 오히려 전통 철학의 두 테제, 즉 개념은 그것으로 파악된 개별자에 대해 실체적이라는 명제 혹은 개별자가^ 실체적인 것이고 개념은 단지 바람소리(flatus vocis), 단순히 공허한 울림이나 헛김일 뿐이라는 명제, 이 두 관념들은 다 같이 변증법적으로 비판을 받게 됩니다. 즉 변증법적 비판에서 개념적 존재는 단지 특정한 사실적 존재와 관계하는 한에만 존재하며, 역으로 사실적 존재는 아무튼 인식을 통해 매개된 존재로서만 존재합니다. 또한 인식은 이제 개념적 인식으로서 말고 달리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두 계기는 결코 어느 한쪽을 위해 다른 한쪽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필연적 상호-의존-상태 속에서 파악되어야 합니다.(291) 그것들은 물론 서로 분리된 상태로 확인해야 하고 아무 구분 없이 서로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또한 절대화할 수도 없습니다.(292)(입문340-341)
후설과 그 후예들은 개념들의 객관적 의미를 분석하고자 시도함으로써 아무튼 이 계기를 −단순한 [직관에] 의한 [주관적] 본질구성을 [통해 비로소] 개념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들에 그때그때 이미 내재하는 것으로서 [파악하려]−, 그러니까 그 계기를 실제로 파악하려 한 점은 그것들의 공적임을 여러분에게 주지시키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때 개념적 내용의 이 객관적 계기를 나름으로 물신화하고 그것을 중단시켜 어떤 절대적 즉자존재자로 만드는 오류에 빠졌을 뿐입니다. 즉 달리 말하면 그들은 보편과 특수의 변증법을 확인하지 못한 것입니다.(293)(입문342-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