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적 예배 / 사 45:18-25, 롬 12:1-2
우리는 엄청난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급격한 변화가 우리 주변에 태풍처럼 지나가고 있다. 우리의 삶 주변에서도 놀라운 변화들이 계속되고 있다. 과거에 쉽게 볼 수 있엇던 다방이 없어지고 커피 전문점이 그 다방을 대신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런가 하면 유통구조 또한 달라지고 있다. 대형 판매점들이 생기는 것뿐만 아니라 구멍가게 대신 24시간 동안 운영되는 편의점 등의 가게들이 곳곳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음식문화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제가 어렷을 때 본 것이 있다면 자장면 만드는 것이었다. 중국집 주방장이 손으로 반죽을 빚어서 곱게 가락으로 뽑아내는 것을 보고 희한하게 생각했다. ‘가장 먹고 싶은 게 뭐니?’ 하면 우리는 ‘자장면’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요즘은 기계가 찍어내는 햄버거나 피자가 아이들의 입맛을 독점하고 있다. 이런 변화들이 우리 주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과거에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사람은 합판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다음에는 조금 바뀌어 한국하면 신발을 제일 잘 만드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신발회사들이 거의 망해가고 있다는 소식들을 접한다. 그러니까 변화해야 할 시기에 바로 변화하지 못하고 변화의 때를 놓치면 기업은 망하고 만다.
변화는 우리 주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에게도 변화가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나의 신앙에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변화이다. 예배가 살아있으면 그 인생은 일주일 동안 승리를 경험할 수 있다. 우는 사자처럼 길거리의 돌맹이들이 마귀로 변해서 나를 저주하고, 나를 공격한다 할지라도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 예배시간에 내게 주신 그 은혜와 축복을 가슴에 담고, 교회문 밖으로 나가면 아무도 나를 해칠 수가 없다. 하늘을 향해 열려 있고, 예배를 향해 바로 서있는 인생이라면 그를 불행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배의 변화가 필요하다. 사람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살도록 지어졌다. 마치 전구가 발전소와 전선으로 연결되어야 불이 켜지는 것처럼, 인생은 하나님의 능력의 생명선에서 기쁨과 평안과 감격과 삶의 진정한 목적과 가치를 날마다 공급받으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버리면 그 인생은 깜깜하다.
성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또한 이 예배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산제물로 드린다는 의미는 옛날에 죽은 제물을 바쳤던 거에 비해서 설명하고 있는 말이다. 과거에는 대제사장이 흠없는 양과 염소와 송아지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것을 제단에 바쳐서 불로 태워 죽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예배란 살아있는 예배로서 삶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사랑으로 내게 역사하신다. 성서는 죽은 제물이 하나님 앞에 드려진 것처럼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살아서 온전히 올려져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예배하기 위해서, 집에서 준비가 필요하다. 주님을 만날 기대가 필요하다. 살아계신 주님께서 나를 만나 주시고 내 삶 속에 역사하셔서, 축복해 주실 것을 사모함이 필요하다. 물론 목사가 설교도 잘 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설교가 귀에 안들어 올 때는 내 마음이 병들었을 때이다. 아픈 사람에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쓰지 않은가? 그러니까 목사의 설교가 안 들어오면 ‘아, 내가 어디 병이 났구나’ 하면 십중팔구는 옳은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교만해지고 높아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이 예배가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집에서 조용히 예배를 준비하면서 교회로 출발해야 한다.
1700년 전에 살았던 크리소스톰이라는 사람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여러분은 눈으로 하여금 나쁜 것을 쳐다보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 눈은 산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혀로 하여금 누추한 말이나 다른 사람을 향한 악한 말을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 혀가 산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손이 무법한 일을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 손은 산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손으로는 다른 사람을 도우십시오. 그리고 나를 향해서 비난하고, 욕하는 자들을 내 입으로는 축복하십시오. 눈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머리로는 그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그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제물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예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제사라는 것은 높인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찬송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내가 예배드리는 마음과 같이 가정에서 하나님을 높이면 가정이 산제물이 된다. 그런가 하면 내가 동료들 앞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놀라우신가를 내 삶으로 증거한다면 그것이 바로 산제물이 되는 것이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저 친구에게는 새상 사람들의 모습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함과 사모함이 있고 갈급함이 있다’고 인정받으며 학창시절을 지낸다면 그것이 바로 산제물이라는 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산제물이 되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왕의 왕이시고, 창조주이신 우리 하나님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인생이라면 그 인생은 복된 것이다. 그래서 ‘복있는 자는 여호와께서 그를 인정하시나니’라고 했다. 성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상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산제물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예배’라고 말한다. 어떤 성서를 보면 영적예배라고 말하지 않고 ‘합리적인 예배’라고 번역을 했다. 또 다른 성서는 ‘마땅한 예에배’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마땅한 예배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사람이 된다면 그것보다 큰 축복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산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변화를 받아야 한다.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변해야 할까?
첫째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이 세사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반항하며 경멸한다.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돈이 전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돈이 정말로 우리의 건강을 온전하게 지켜주는가? 위험에서 나를 건져줄 수 있나? 돈이 내 영혼을 만족시켜 줄 수 있나? 어떤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비애와 쓰라림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궈력의 마지막은 허망이다. 어떤 사람은 쾌락을 위해서 산다고 말한다. 우리들도 생각없이 그 줄에 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한다.
둘째로, 우리는 새롭게 되어야 한다. 성서 본문에서 새롭다는 말은 시각적으로 새롭다는 말과 본질적으로 새롭다는 뜻이 있다. 제가 옷을 똑같은 질의 새옷을 입으면 그것은 시각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그러나 이 옷을 벗고 실크로 된 옷을 입었다면 그것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기서는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새로움이다.
셋째로, 우리는 마음의 변화를 받아야 한다. 이 변화라는 말은 겉모양의 변화가 아니라 본질적인 속성의 변화를 의미하는 말이다. 완전히 다른 질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성서는 우리의 습관, 방법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를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모양이 아니라 본질의 다름이고, 겉모습의 형식이 다름이 아니라 마음의 다름이다. 이런 변화를 받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제물이 되어서 온전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변화의 근거는 무엇인가? 성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곧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여러 정보들과 새로운 지식들이 우리를 많이 변화시켰다. 과거에 우리들은 전염병이 돌면 금줄을 쳤다. 그리고는 무당 푸닥거리를 했다. 그러나 과학의 지식은 무당의 푸닥거리를 그만둔 대신에 전염병이 돌면 검역을 했다. 또 깨끗이 청소를 했다. 그 환자가 만졌던 것은 불태워서 소독하는 일을 중점적으로 했다. 이것은 큰변화이다. 옛날에 의사들도 방역이 무엇인지 모를 때, 미생물의 세계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에는 이 환자의 병을 저 환자에게 옮겨줄 때가 있었다. 그러나 미생물 세계의 발견은 환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지식은 우리를 바꾸어 놓았다. 여러분, 어떤 지식이 우리를 바꾸어 놓는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성서말씀이다. 그래서 성서말씀을 매일 읽고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말씀이 내게 무엇을 명하는가를 들어야 한다. 또한 그 말씀 속에서 지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바꾸어 가면서 하루(새해)를 시작해야 한다. 놀라운 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고, 하나님을 더 믿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를 점점 발전시키게 된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성서공부를 통해서도 은혜를 주신다. 갈보리교회에 출석하는 분들 가운데 불쌍하신 분들이 있다. 어떤 분들이 불쌍하냐 하면 주일날 그냥 교회만 왔다갔다 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공부하지 않는 분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으로 살게 만든다. 우리에게 그 말씀이 없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우리 갈보리교회 성도 가운데 제가 유심히 살펴보면 참으로 복스러운 사람들을 본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말씀공부에 깊이 심취해서 말씀따라 순종함으로 형편과 처지와 다르게 그 영혼이 부쩍부쩍 자라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생애로 그 생애가 바뀌어지는 모습을 볼 때에 목회자로서 얼마나 큰 감격이 있는지 모른다.
또 우리들은 읽어야 한다.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에게 주신 은혜의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을 읽지 않고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이기적인 인생이 남이 어떻게 살았는가 보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착각하고 산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능 읽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은 성서만 읽으면 되지 다른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성서를 통해서 내게 주신 은혜도 소중하지만 이미 믿음의 형제,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서 어떻게 그 말씀이 역사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축복하셨는가를 우리가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 또한 놀라운 축복이다. 우리의 지식은 계속 우리를 교정하게 만든다. 바른 지식은 우리를 온전하게 만든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지식은 옳을 때도 있지만 틀릴 때도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옳다. 언제나 선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애로 우리를 키우신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주의 말씀을 사모하되 송이꿀보다 더 사모한다’라고 말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을 만나는 영광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비결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1997년! 이 진리 위에 든든히 서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냥 우리를 권면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자비하심으로 권면하신다고 말한다. 우리의 하나님은 언제나 자비의 아버지이시다. 여러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았는가? 아마 다른 사람이 그 정도로 잘못했으면 화를 내도 보통이 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식이 잘못했을 때에는 그 잘못보다 더 큰 자비와 용서로 안아 준다.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헤는 더욱 풍성하다. 우리 죄보다 더큰 자비하심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본다. ‘나는 너의 삶 전체가 옛날에 죽은 제물이 완전히 태워져서 드려진 것처럼 내가 기뻐하는 삶이 되기를 내가 원한다’고 하신다. 그 자비하심은 오늘도 기다리고 있다. 내가 나를 향해서 실망할 때도 하나님은 실망하지 않고 반성하기를 원하신다. 돌이키라고 말씀하신다. 변화를 받으라고 말한다.
여러분, 세월은 흐르고 있지 않은가? 세월이 흐른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 앞에 설 날이 가깝다는 말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피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다. 오늘 이 시간, 그 날이 오기 전에 나를 향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권면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네가 받아들이라. 그러면 변화가 온다. 그것은 시각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 가치적인 새로움이다. 그것은 모양과 형태의 변화가 아니라 본질적인 변화이다. 그것은 겉형식의 뱐화가 아니라 마음 중심의 변화이다. 그렇게 변화될 때에 하나님이 그처럼 기뻐하시는 산제사, 진정한 예배의 삶으로 살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1997년이 시작되었다. 한번밖에 없는 1997년이다. 이 해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좇아 점점 성숙애 가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온전히 그 삶 전체가 아름답게 드려지는 복된 해가 되기를 바란다. (1996-52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