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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과 안나의 성탄 / 렘 31:10-14, 눅 2:25-39
성탄이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은 물론 예수님이다. 그러나 주연급 배우들을 들자면 마리아와 요셉, 동방박사들, 헤롯 그리고 목자들이 있다. 성탄 때가 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므온과 안나는 성탄이라는 드라마에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면서도 우리에게 자주 기억되지 않는 사람들인 것 같다. 사실 첫 크리스마스를 가장 감격스럽게 맞이한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이 두 사람인데 말이다. 시므온과 안나가 맞이한 첫 성탄은 어떠했을까?
본문에 보면 시므온에 대한 직업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가 어디에 살았는지 그리고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성서가 이런 면을 기록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25절에 보면,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관심사였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의롭고 경건하다는 두가지 표현은 시므온이라는 사람의 명성과 관련된 단어들이다.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단어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을 때, 그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의롭다 함을 얻는 삶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경건하다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깨끗하게 사는 것이라는 단순한 의미 이상의 표현이다. 경건하다는 낱말은 본래 하나님의 깊이,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단어의 어근에서부터 나온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 시므온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대해서 깊이 고민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심각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다. 시므온은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와서 예배할 때에만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런 피상적인 신앙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대와 뜻을 분별하여 알고자 몸부림쳤던 사람인 것이다. 시므온의 이러한 마음 자세가 그로 하여금 메시야를 기다리게 만들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의롭고 견건한 시므온에게, 그가 살아잇을 때 그리스도를 만나는 ㄱ삼격을 맛보게 될 거이라는 말씀이 허락되었다. 26절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같은 말씀을 들어도 이것을 교양강좌나 목사들의 설교 정도로 지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사람도 있다. 주님의 말씀은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심령 속에서 참으로 놀라운 일을 하신다. ‘네가 그리스도를 만날 거이다. 살아잇을 때 만날 것이다.’ 시므온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구약 시대부터 메시야가 오신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를 기다려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탄생하실 즈음에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마음을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렸는데도 안 오시니까 더 이상 진지하게 메시야를 대망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므온은 예외였다. 그는 기다렸다. 그리고 살아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라는 말씀을 받은 것이다.
어느 날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무척 남루해 보이는 가난한 젊은 부부가 성전을 향해서 걸어오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우리는 그 부부가 가난했다는 사실을 24절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돈이 많은 사람들은 양이나 소로 제사를 드렸고, 그렇게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은 비둘기로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가난한 젊은 부부는 태어난지 8일된 아기를 안고 들어왔다. 21절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이 아기를 데리고 들어오는 젊은 부부를 바라보는 순간, 시므온의 가슴은 뛰기 시작한다. ‘죄송하지만 그 아기를 제가 안아봐도 될까요?’ 마침내 시므온은 그 아기를 자기의 품에 안았다. 안자마자 그의 마음 속에서 찬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29절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나님, 이제는 죽어도 좋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나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구원을 이제는 내 눈으로 보았습니다.’ 시므온이 품에 안은 아기는 메시야였다. 여기에 인류의 영원히 해결하지 못한 신비가 있다. 하나님이 ‘아기’로 오신 것이다. 한 설교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모든 사람이 접근하기 쉽도록 그분은 아기로 오셨다.’ 누가 아기에게 접근하는 것을 두려워하겠는가? 우주를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어 섭리하시는 그 하나님이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이 신비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남루한 차림의 젊은 부부가 안고 있던 아기가 메시야라는 것을 시므온은 어떻게 알았을까? 아기를 구세주로 알아보았던 시므온의 통찰력 또한 하나의 신비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참된 자유를 줄 수 있는 정치적인 메시야상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누가 가난한 목수의 품에 안겨 있는 이 아기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유를 주고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할 메시야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시므온은 남루한 차림의 부부 뒤에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손길이 있음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메시야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구세주를 안고 감격의 찬양을 부르는 시므온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의 찬양 소리를 들어보라. 이것이 진짜 찬양일 것이다. 32절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이것이 시므온이 메시야를 품에 안고 맞이한 첫번째 성탄절에 우리에게 전달하는 성탄 메시지이다. 여기서 ‘이방의 빛’이라는 이야기는 이방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정치적인 면을 볼 때, 당시에 로마가 미스라엘보다 훨씬 더 문명한 나라였다. 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배출해 낸 그리스 문명은 지식적인 면에서 이스라엘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그러나 시므온은, 이방이 정치적으로든 지식적으로든 아무리 발전해 있다 해도 여전히 그들은 어둠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다. 문명이 인간의 죄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빛이시다. 그러므로 예수가 없는 문화, 그것은 아직도 어둠이다. 정치적으로나 지식적으로 이방보다 뒤떨어져 있던 이스라엘에 살고 있었던 시므온, 그러나 그는 메시야를 품에 안는 감격의 순간에 ‘이 아기야말로 이방에는 빛이요’라고 외친다. ‘이방에는 빛이요, 이스라엘에는 영광이요.’ 고쳐 말할까요? ‘불신자에게는 빛이요, 성도에게는 영광이신 바로 그분.’ 여기에 쓰인 ‘영광’이라는 단어는 ‘임재’라는 단어와 동의어이다. 주님을 신뢰하는 주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은 곧 위로였고, 능력이었고, 변화였고, 거룩함이었다. ‘주의 백성들에게는 영광이요, 주님을 모르고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빛이요.’ 시므온의 찬양을 통해 전파되는 첫 번 크리스마스의 메시지를 기억하라.
우리는 시므온에 이어서 안나라는 여자 선지자가 성전에 나오는 광경을 본문에서 발견한다. 안나는 늙은 여선지자였다. 36-37절상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여인은 84년을 과부로 지냈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너무너무 불쌍한 여인이다. 이 여인이 84년 동안 남편도 없이 홀로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37절하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남편을 잃은 다음에 그녀는 한 곳에만 소망을 두기로 결심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고 있었지만, 이 여인은 그 메시야에게 소망을 두고 남은 생을 살아가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나간 세월 84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금식하고 기도하며 신실하게 섬겼던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 여인을 예수나 교회에 미쳐버린 여자라고 제쳐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 여인은 한 소망에 미친 여자였다. 자신의 구세주이신 그리고 참 기쁨이고 참 소망이신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 이 여인의 전 생애의 목표가 된 것이다.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금식하고 기도했다는 것은 이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의 표현이다. 그렇게 하기를 84년,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유혹이 있엇을까? ‘그렇게 아까운 청춘을 낭비하지 말고 빨리 재혼이나 하시오.’ ‘아니 밤낮 교회에서 살아봐야 당신에게 생기는 것이 있소?’ 그러나 안나는 그런 유혹을 이겨내면서 84년이란 긴 시간을 메시야를 기다리며 지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기다릴 수 없다.
요즘 우리는 과학의 추진력이 단순한 인간 이성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이야기를 이따금씩 듣는다. 1781년에 천왕성이라는 별이 발견되었다. 그후 1821년에 한 천문학자가 천왕성의 움직임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관측하게 되었다. 그 천문학자는 천왕성에 영향을 주고 있는 어떤 별이 옆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곧 연구에 착수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것 다 포기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천문학자는 ‘아니야, 그 옆에 무엇인가 있을거야’라면서 무려 65년을 그 연구에 바쳤다. 드디어 1886년에 그는 좀더 발전된 망원경을 통해서 혜왕성이라는 별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믿음 때문에 기다린 것이다.
안나의 84년의 기다림, 안나는 선지자였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므온처럼 생전에 메시야를 만날 것이라는 확실한 약속의 말씀을 받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 여인은 생전에 그분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속에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다리며 살았다. 이 84년의 세월을 누가 이 여인에게 보상해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느 날 성전에 들어가 있다가 시므온이 안고 있는 그 아기를 바라보았을 때 안나는 그 아기가 메시야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순간 이 여인이 느꼈을 감격을 이해하겠나? 그 순간 이 여인은 잃어버린 84년의 세월을 다 보상받았던 것이다. ‘오셨구나!’ 이 여인은 결호한지 7년만에 남편을 읽었으니까 진짜 나이는 91세 이상이다. 9살에 결혼했다면 100세이다. 이 늙은 여인과 아기의 만남, 메시야를 만나는 순간, 이 여인의 모든 기다림의 세월은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 여인의 믿음의 감격을 이해할 수 있는가?
유명한 현대의 내과 의사요 정신과 의사인 폴 투르니에라는 분은 현대인들의 신앙의 구조를 검토하면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다. ‘현대 신앙인의 비극 중에 하나는 그들이 구도의 정신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말 진지하게 진리를 찾는 사람들은 드물다. 진지하게 찾지 않으니 어찌 진리를 발견했을 때의 감격을 알겠는가? 구원의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신 것과 내 삶이 거듭나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끼쁨과 감격을 느껴보았나?
84년의 기다림은 84년이 추구였다. 드디어 자기 눈앞에서 아기로 오신 하나님, 전 인류의 운명과 역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이 놀라운 메시야를 목격하게 된다. 이 여인의 가슴 터지는 그 감격을 짐작하겠는가? 38절상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성서는 이렇게 간단하게 기록했지만, 이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감사였나? ‘오셨군요! 나에게 메시야를 만날 수 있는 감격과 경배할 수 있는 감격을 주신 나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여인의 떨리는 가슴과 영혼이 파열되는 감사를 여러분은 정말 이해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떨리는 가슴으로 감격과 감사를 주님 앞에 드려 보았나? 이 성탄에 84년의 기다림의 세월을 보상받은 안나의 감사와 가슴 터지는 감사가 여러분에게 있는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38절하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여러분이 메시야를 만났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했다면, 여러분의 영혼을 속량하는 이 놀라운 체험이 여러분에게 임했다면 어떻게 잠잠할 수 있는가?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기대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말해야 소용이 없다. ‘진주를 개나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가슴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메시지는 전해져도 말짱 헛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구절에 나오는 속량이라는 낱말이 그 당시에는 몇 가지로 다르게 이해되고 있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이 말을 정치적인 의미로만 해석했다. 곧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킨다는 의미로 생각했던 것이다.그 당시의 사두개인들은 아예 그런 기대를 포기하고 살았다. ‘속량이라니, 그냥 이대로 사는 거지.’ 그래서 그들은 어느 정도 친로마파로서의 삶을 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에 유명했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 말고 또 하나의 종교 집단이 있었다. 에쎄네파라는 집단인데, 이들은 속량이라는 단어를 도덕적, 영적 의미로 생각했다. 곧 메시야가 오실 때 그분이 우리 민족을 정치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보다는 죄의 사슬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존재 자체에 참 자유를 주시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안나가 바로 에쎄네파의 전통에 속하는 여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에쎄네파 사람들이 금식하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여인의 속량의 희망은 단순히 사회가 달라진다는 정치적 기대가 아니었다. 안나가 바라는 속량은 나의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분, 내 눈을 열어 영원을 보여주실 그분, 나로하여금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할 수 있는 분, 나의 구세주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안나는 언제부터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나? 이 아기를 발견한 그 순간부터이다. 요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언제부터 전도를 시작했나? 예수가 자기의 비밀을 알고 자기의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구주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자마자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간다. 그리고 외친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녀는 그리스도를 만난 순간부터 전도했던 것이다. 메시야를 만난 사람, 그분이 나의 구세주라며 펄펄 뛰는 감격이 있는 사람, 하늘나라의 영원한 소망을 갖게 된 사람, 주님의 은헤로 죄사함 받은 감격이 있는 사람, 주께서 놀라우신 은혜와 사랑으로 나를 받아주시고 나를 자녀삼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감격과 환희가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어떻게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있는가? 메시야를 만나자마자 그 순간 입술을 열어 이 아기가 우리가 기다리는 구세주요 메시야임을 증거했던 안나처럼, 여러분은 이 성탄에 여러분의 영혼 속에 찾아오신 이 놀라운 구세주에 대한 감격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가 기다리던 구세주가 오셨습니다. 그분이 나의 삶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나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내 삶을 바꾸었습니다. 그분 때문에 내 삶이 달라졌습니다. 당신은 그분을 아십니까?’라고 입을 열어 증언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계절에 대한 진정한 이유가 되신다. 그분이 나의 구세주이시다. ‘주여, 내가 이제 주의 구원을 보았나이다.’ 그분은 영광이시다. 그분은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빛으로 오셨다. 그분이 여러분을 구원하신다. 그분은 나의 슬픔의 자리에서 나의 위로가 되신다, 나의 능력이 되신다. 나의 변화가 되신다. 나의 거룩함이 되신다. 나의 영광이 되신다. 이 그리스도를 아나요? ‘하나님게 감사하고‘라고 한 줄로 기록된 말씀, 그러나 이 밑바탕에는 안나의 가슴 벅찬 감사가 있었을 것이다. 여러분에게는 그분이 나의 메시야라는 사실에 대한 가슴 벅찬 감사가 있는가? 첫 번 크리스마스에 감사의 고백을 드렸던 이 여인 안나에게서 진정한 감사를 배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1995-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