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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예수 / 잠 8:22-31, 마 1:18-25
성탄의 의미는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바로 이것이 성탄의 의미이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여기서 말씀인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시는 엄청난 사건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지명하셔서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뺄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많은 선지자들이다. 구약성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16명도 넘을 많은 선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계시를 받고, 박해와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저멀리 메시야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예언을 하고 있다. 그래서 구약성서에는 총 456회나 메시야의 나심에 대하여 예언하고, 미리 증거하고 있다. 이 예언자들이 다 성탄을 위하여 미리 고용된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그 다음으로 소중한 분이 마리아이다. 예수님께서 한 여인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오셔야하므로 마리아이 헌신이 필요했다. 대단히 위험하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눅 1:38절에서 우리는 그녀의 유명한 헌신의 고백을 들을 수 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는 그 엄청난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현재의 희생이나 하나의 생명을 바친다는 정도가 아니다. 이제부터 다가올 많은 문제, 그 복잡하고 풀리지 않고 답답하기만 한 문제를 그대로 안고 들어가는 것이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고,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그 일생을 바쳤다. 바로 이 여인의 헌신을 통해서 임마누엘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마리아의 헌신과 희생에 대하여 생각을 합니다마는 깜박 잊고 지나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요셉이다. 마리아가 예수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 뒤에 요셉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이 있으므로 이것이 가능하게 된다.
옛날 유대인들의 결혼 풍속이 어떠했는지 한번 살펴보자. 유대인들의 결혼 풍속을 보면 3단계로 나뉘어 결혼이 이루어졌다. 처음은 약혼이요, 다음은 정혼이요, 마지막으로 결혼이다. 약혼이라는 것은 중매하는 사람과 부모님들 간에 합의하는 것이다. 양가의 부모들이 결정을 해 버린다. 정혼이라는 것은 본인들도 서로 만나고 ‘부모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약속을 하고, 랍비 앞에서 서약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받는다. 이것이 정혼이다. 이렇게 정혼이 이루어지면 정혼기간이 1년 지나가고, 1년 후에 잔치를 하는데 이것이 결혼이다. 결혼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한번 즐겁게 잔치를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문제는 1년 동안의 정혼기간이다. 이것은 절대로 서로에게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정혼하면서 이미 서로를 아내요 남편이라고 부를 수 있다. 또 그렇게 불러야 한다. 이는 내 아내요, 내 남편이요 할 수 있다. 그 1년 동안에 앞으로 살아갈 것을 준비한다. 대단히 중요한 기간이다. 만일 이 정혼 기간 중에 신랑될 남자가 죽었으면 신부될 그 여자를 ‘과부처녀’라고 불렀다. 참 불행한 일이다. 저들의 결혼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정혼이라는 말이 나온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는 바로 정혼 기간에 일어난 사건이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섭리와 함께 임마누엘 사건이 이 기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 우리를 위하여 강하게 증거하는 두가지 진리가 있다. 하나는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심이요, 또 하나는 요셉의 아들, 다윗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 이 문제에 우리의 상식은 어떤가? ‘그렇 수도 있지, 속도위반을 했구먼’ 한다. 이에 대하여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 일반상식이다. 그 당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대게 이런 경우 여자는 남자의 이름을 대야 한다. ‘나는 어느 남자로 인하여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러면 그 남자가 책임을 지게 되고, 다시 결혼이 이루어진다.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남자가 부정을 할 경우가 있다. ‘아니다. 나는 그런 책임질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 한다면 그때에는 문제가 된다. 특별히 남자의 이름을 대지 못할 때도 그렇다. 그 여자는 부정한 여자가 되어 창녀가 되고, 분명 어느 남자와든 불륜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끝내는 돌에 맞아 죽게 된다. 사람들은 그녀를 끌어다가 가차없이 쳐죽인다. 신 22:20-24절에 있는 말씀이 바로 이런 내용이다. 그 예가 신약성서에 나온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사건이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마리아를 통해 오시는 성육신의 사건, 여기에는 보호자가 필요했다. 따라서 정혼한 여자여야 했고, 정혼자인 요셉의 절대적인 헌신이 필요했다. 그런데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성서는 말한다. 의롭다는 것은 율법을 잘 지킨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와 관련이 없이 아이를 밴 마리아와 관계를 끊고자 했다. 부정한 여인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 주의 사자가 나타난다.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는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상상조차 못해본 일이다. 그러나 요셉은 천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요셉은 대단한 사람이다. 성령으로 잉태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일인데 요셉은 믿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놀랍다. 우리도 하나님의 기적을 믿어야 한다.
95년 9월호 가이드포스트 지에 세브란스 병원의 한 의사의 간증문이 실렸다. 5년 전에 우리나라에 이런 일이 있었다. 1월에 한 어머니가 아기를 낳았다. 그런데 둘이 가슴과 배가 붙어서 나왔다. 이를 샴쌍둥이라고 부른다. 아주 기형적인 쌍둥이이다. 세브란스 병원 의료팀들은 이 쌍둥이에 대해 정밀검사를 실시했다. 검사 결과 심장이나 소화기능은 모두 두 개씩인데 간은 하나밖에 없었다. 팔다리도 각각 둘씩 다 붙어 있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영락없이 죽게 마련이다. 수술을 해도 성공할 확률이 20%도 안되었다. 이 아이를 두고 간증문을 쓴 의사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수술을 해도 살 희망이 그렇게 크지 않고, 수술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죽을 수밖에 없는데 이제 태어난지 며칠 안된 이 아이를, 핏덩이 같은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하는 중에 잠 16:9절 말씀이 떠올랐다고 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인간의 의술에 의하여 수술을 하지만, 결과를 이루게 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 좋은 결과를 이루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게 맡깁니다.’라고 기도하고 수술을 시도했다고 한다. 특별팀을 구성하여 다시 정밀검사를 하고 검증을 해서 한달 후 2월 24일 드디어 수술에 들어갔다. 10시간 동안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서 수술을 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들어가서 심장으로 연결되어지는 혈관을 분리하고 연결하는 그 작업이 힘들어서 하마터면 두 아이 다 죽을뻔 했다고 한다. 맥박이 거의 정지되는 상태에 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두 아이가 분리되었고, 두 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고 한다. 그 의사는 수술한 다음에 간증하기를 ‘인간의 의술이 아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기적의 은혜에 의해서 두 아이가 분리되어 살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의술이 아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기적적인 은혜에 의해 두 아이가 분리되어 생존할 수 있었다는 간증을 하고 있다.
사람이 한 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때로는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신비한 능력을 체험할 때가 있다. 그 신비한 능력을 가리켜서 우리는 기적이라고 말한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그곳에는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 또는 상식,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기적이 나타날 때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는 수많은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 역사 속에 오신 사건이 예수 탄생 사건인데, 이것이 바로 기적이다. 예수의 탄생은 역사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최대 기적이요,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최대의 복음이다.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 우리 인간에게는 최대의 복음이다. 이 복된 소식이 여러분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준 일이 있는가? 있어야 여러분이 기독교인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문제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이것은 존재의 문제이지 소유의 문제가 아니다. 내 소원 성취의 여부도 아니요, 내 깨달음의 문제도 아니다. 내 인격의 문제도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되는 존재의 문제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하여 모든 철학과 종교와 사상이 대체로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께로 가고자 하는 길, 도덕과 정결과 수도와 율법과 선행과 적선과 극기와 고행 등의 방법을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께로 가고자 애쓰는 방법이 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러 오시는 방법이다.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이 복받기 위하여, 천국가기 위하여, 구원받기 위하여 내가 좀더 진실되고 선하고 의롭고 깨끗하게 살자 이런 생각을 하나? 이런 태도를 성서적인 용어로 말하면 율법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은혜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사람이 되셔서 인간에게 오셨다. 여기에 참 사람의 본질이 있고 성탄절의 뜻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계시하시고 가르치시고 훈련하시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성서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때로는 직접 인도하시며, 우리가 오늘 당하는 사건 하나하나를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를 깨닫게 하신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의 아버지다, 너는 나의 자녀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구원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끊임없이 임마누엘을 계시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높이 보좌에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올라오기를 팔짱끼고 기다리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성서가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요,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요,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구원의 지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교 사상에 철저한 어느 중국 사람이 하루는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선교사는 유교학자가 중생을 해서 기독교인이 된 것을 보고 하도 감사해서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그 사람은 비유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내가 세상을 방황하면서 진리를 찾아 헤맸고, 생명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실족해서 우물이 빠져버렸습니다. 손을 흔들면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지나가던 사람이 들여다보면서 ‘전생에 죄가 많구먼, 업보요 업보’ 하고는 가버립니다. 다시 소리를 질렀더니 한 사람이 지나가다 들여다보면서 ‘이 사람아, 그러기에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나. 오늘 실수를 거울삼아 차후에는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게나’ 그러고는 가버립니다. 그래서 또 소리를 질렀더니 이번에 나타난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팔을 걷어붙이더니 나를르 건져내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첫사람은 석가모니요, 두 번째 사람은 공자요, 세 번째 사람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깨닫고 예수를 믿기로 했지요.”
임마누엘이다. 우리의 죄를 꾸짖기나 하고 잘못했다고 책망이나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 임마누엘이다. 그 임마누엘의 뜻을 바로 알고 믿어야겠다. 임마누엘은 오늘의 사건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저 말구유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아들이요 너는 내 딸이다.’ 이 구체적인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우리의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를 영접하게 될 때에 나는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그를 믿고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 하나님 가정의 한 식구가 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임마누엘, 여기에 진정한 성탄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임마누엘 예수 성탄의 은총히 충만하기를 바란다.
(2000-52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