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가을 사이 / 솔향
헤드라이트 불빛 하나에 의지해 넷을 태운 자동차가 깜깜한 산길을 헤치며 나갔다. 우툴두툴한 콘크리트로 덮인 구불구불한 오솔길 양옆에서 빽빽하게 뻗은 나무들이 별안간 눈앞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바퀴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어둠과 고요를 깨뜨렸다. 억불산 산마루에 자리한 정남진 천문과학관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여덟 시쯤이었다.
차문을 열자 귀를 찢을 듯한 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매미인가요?” 내가 물었다. 하하하 소리 내어 웃으며 “풀벌레 소리예요. 너무 좋은데요.”라고 세훈이 답했다. 작은 몸으로 엄청난 소리를 내는구나. 아님, 그 수가 엄청나든지. 공기가 상쾌했다. “여긴 가을이네요.” 미영의 목소리가 들떠 있다. 주차장에서 천문관으로 가는 비탈길을 걸어 올라갔다. 세상과 떨어져 존재하는 듯한 어두컴컴한 산속. 어쩌다가 우리는 여기에 있는가? 문득 영화나 소설 속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떨어진다. 밤이라는 시간 때문인가, 산 속이라는 고적한 장소 때문인가? 찌는 더위에서 갑자기 선선한 바람으로 건너뛴 날씨 탓인지도 모르겠다. 내 삶에 훅 들어온 이 사람들과 함께 서 있는 게 갑자기 낯설어졌다. 진영과 미영, 그리고 세훈을 알게 된 지는 1년이 조금 못 되었고, 얼굴 본 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다 같이 모인 건, 오늘이 세 번째인가?
토요일 점심때가 조금 지나 고즈넉한 찻집에서 만났다. 룰루 밀러의 자연과학 에세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해수욕장 이름만큼 유명한 횟집에서 분류학에서는 맞지 않지만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 집착을 버리지 못하여 여전히 존재하는, ‘물고기’도 맛나게 먹었다. 보성 녹차밭이 내려다보이는 창 넓은 카페에서 시원한 커피를 마시고 따뜻한 이야기를 나눴다. 미영은 부드럽고 편안하고 넉넉하다. 어떤 말도 다 받아들인다. 세훈은 성실하고 반듯한데 재치까지 넘쳐 분위기를 살린다. 진영은 자신만의 감성이 담긴 시선을 지닌 데다 눈빛도 감정도 깊다. 때론 진하고 때론 깨질 것 같아 마음이 간다. 우리는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서로의 생각을 조금씩 내비치고 삶을 나누며 공감한다. 시간은 너무도 빠르게 흘러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넘어가 버린 해가 산과 맞닿은 하늘에다 분홍빛을 남겨 놓았다. 여름날의 노을은 왜 이다지도 마음을 흔드는지. “장흥 천문관에서 별 보고 갈래요?” 세훈이 말했다. 전에 별을 좋아한다고 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우주로 들어서는 옥상 문을 열었다. 아깐 분명 몇 명 없었는데 어디선가 스무 명도 넘는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하늘을 바라봤다. 별이 눈으로 쏟아졌다. 해설사가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 별자리로 북극성을 찾는 법을 알려주었다. <스타워즈> 영화에서 보았던 광선 검에서 나오는 것 같은 레이저 빛이 직선으로 날아가 북극성에 꽂혔다. ‘와아!’ 진영이 어린아이처럼 탄성을 질렀다. 밤하늘이 별을 찍어 놓은 드넓은 검정 도화지인 양 펼쳐져 있다. 레이저를 요술봉처럼 쥔 남자가 별과 별을 이으면 별자리가 나타났다. 여름철 대삼각형, 백조자리, 거문고자리, 독수리자리가 그려질 때마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졌다. 직녀성과 견우성 사이에 뿌윰하고 긴 강이 희미하다. 어릴 적 자주 흐르던 그 은하수다. 빛의 속도로 몇만 년이나 가야 한다는 무슨무슨 성단도 천체망원경으론 보였다. 고정돼 있는 커다란 쌍안경을 장흥 시내로 돌리던 세훈이 어느 집 거실에서 기아팀 야구 경기를 보고 있단다. “진짜? 진짜?” 우주와 별을 가슴에 담은 여운이 동심으로 돌아가게 한 걸까? 그 쉬운 거짓말에 속은 걸 알고는 나이를 잊고 까르르 웃었다. 수십억 살 먹은 별들 아래서 나이가 뭐 중요한가. 시원한 바람이 활짝 핀 얼굴과 살갗을 간질였다.
주황과 파랑별이 오누이처럼 붙어서 반짝이던 알비레오 이중성과 토성의 고리가 집에까지 따라왔다. 한 시간 후면 자정이다. 세훈이 문자를 보내왔다. '아직도 토성이 눈에 아른거려요. 산에서 불던 신선한 바람이 그리워집니다. 그 청아하게 울던 풀벌레 소리도요. 은하수가 완벽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우주에 사는 게 참 행복하다는 걸 느끼기엔 충분했어요. 율포 해수욕장의 막회와 춘운서옥의 능소화처럼요.'
사전에서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 친구란다. 이건 좀 고치라고 전화 한 통 할까 보다. 진영은 나보다 아홉 살이나 어리고, 미영은 멀리 살아 만나기 어렵고, 세훈은 혼자만 남자고,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은 짧다. 그래도 나는 이들을 친구라 부르고 싶다. 산속에서 문득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던 까닭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이 광활한 우주의 작디작은 한 점에서 만나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귀하고 소중해서였으리라. 시원한 밤바람, 풀벌레의 합창, 쏟아지는 별을 마주하면 떠올릴 친구들이 생겼다. 마음이 닿는 새로운 인연과의 추억이 가슴에 새겨졌다. 아! 여름과 가을 사이, 꿈 같은 8월의 마지막 날 밤이었다. 그리고, 9월이 충만하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