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이 깨끗해야 한울님이 복을 준다
동학에 대한 탄압이 휘몰아쳤던 1885년의 위급한 속에서도 해월은 제자들과 함께 동학의 교의에 대해 논의했다. 전성촌에서 해월이 언급한 ‘이천식천(以天食天)’과 ‘사인여천(事人如天)’은 동학 사상을 가잘 잘 설명하는 용어라고 회자(膾炙)된다. 해월이 피신 중에서도 이렇게 동학 사상의 설명 체계를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꾸준한 수련의 결과였다. 해월은 자나 깨나 주문을 외우면서 수운의 가르침을 곱씹었다. 특히 49일 기도를 많이 했는데 제자들에게 1년에 4차례 49일 기도를 하라고 통문(通文)을 돌리기도 했다. 험난한 지목 속에서도 해월은 동학을 시대에 맞추어 활용할 수 있도록 늘 정진했다.
지목이 누그러진 1886년 해월은 전성촌에서 안정을 찾아갔다. 봄이 오자 밭을 갈고 채소를 심고 감나무를 가꾸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성촌으로 찾아오는 제자들의 발걸음도 늘어갔다. 해월에게 양식을 가져다 준 서인주와 황하일을 비롯해 손천민, 권병뎍, 박도일, 박준관, 이관영, 권병일, 서치길, 송여길 등이 전성촌을 찾았다. 해월은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특히 올해는 악질(惡疾)의 유행이 염려되니 위생에 각별히 신경쓰라고 했다. 그러면서 위생 준칙을 만들어 각포(各包)에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묵은 밥을 새 밥에 섞지 말고, 묵은 음식은 새로 끓여서 먹도록 하라. 침을 아무 곳에나 뱉지 말고 만일 길이면 땅에 묻고 가라. 대변을 본 뒤에는 노변이거든 땅에 묻고 가라. 가신 물은 아무 곳에나 버리지 말라. 집안을 하루 두 번씩 청결히 닦도록 하라.
이렇게 해월이 위생에 대해 특별히 신경을 쓰라고 하자 동학도인들 사이에는 “부엌이 깨끗해야 한울님이 지나다가 복을 주고 간다.”는 말이 생겨났다. 도인들의 부엌은 늘 정결해졌고 아울러 허름한 집이 깨끗하게 손질해서 정갈해졌다. 이러한 해월의 위생 관념은 마치 예견이나 한 듯이 적중했다.
동학은 괴질도 비껴간다
6월 하순이 되어 날이 더워지자 콜레라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당시 콜레라가 유행하면 마을 사람 전체가 전염돼 죽어나가기도 했다. 당시 콜레라가 심각해서 군사 훈련도 못할 지경이었다. 8월 24일 경상도 통영의 통제영에서 승정원에 보낸 <통제영계록(統制營啓錄)>에는 “봄가을로 강무(講武)하는 것은 치국(治國)의 큰 정사인데, 오랫동안 폐지하고 실시하지 않았으니 사전의 대비에 소홀히 한 바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 괴진(乖?, 콜레라)이 각 지역에 두루 치성(熾盛)하고 있어서 민정(民情)이 더욱더 염려스러우니, 이때에 군병을 소집하는 것은 실로 고려해봐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금년 가을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의 수군(水軍)과 육군(陸軍)의 여러 조련과 순력(巡歷).순점(巡點)은 모두 우선 정지해야겠습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전국의 수군과 육군의 군사훈련은 물론 순찰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콜레라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10월 17일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괴질의 유행은 여러 도의 공통된 우환이고, 오랜 장마의 변고도 어찌 본도(本道) 만의 재앙이겠습니까.”라고 평안감사 남정철(南廷哲)이 장계를 올렸는데, 이를 통해 콜레라가 발병해 긴 장마 속에 확산돼 평안도는 물론 인근의 지역까지 번져 피해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해월을 만나러 오다가 콜레라에 걸려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7월에 임천(林川)에 사는 임덕현(林德賢)이 해월을 뵈러오다가 보은(報恩) 관기점(官基店)에 이르러 병에 걸려 끝내 사망하였다. 참담하고 측은함은 차마 말할 수 없다. 8월 20일 이후에 박도일과 김공필이 운구하여 돌아갈 때 김연국과 장한주가 호상(護喪)이 되어 전송하였다.” 멀리서 해월을 찾아오다 콜레라에 감염돼 사망하자 동학도인들이 운구해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러나 해월의 위생 준칙을 잘 실천했던 도가에서는 거의 피해가 없었다. 먹던 밥과 반찬을 새 밥과 반찬에 섞지 말고 따로 보관하게 하고 집 안팎을 잘 청소하고 설거지한 물도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해월의 위생 준칙은 콜레라의 유행 속에서 도인들이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되었다. 특히 해월이 살고 있던 전성촌 일대의 40여 호에는 아무도 콜레라에 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동학을 하면 전염병도 침범하지 못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동학이 괴질을 벗어나게 해준다는 소문은 빠르게 확산됐다. 이해 가을이 되자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경기도 등지에서 해월을 찾아 전성촌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아졌다. 사람들은 해월의 영험함을 듣고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해월의 위생 준칙은 도인들의 건강과 함께 교세 확장의 한 방법이 되었다.
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권병덕은 당시 동학 교세의 확장에 직접 참여했다고 밝히고 있다. 권병덕은 수기에서 “이때에 청암(淸菴, 권병덕의 도호)이 충청과 경상 양도(兩道)에 포덕한 이가 2백여 명이나 되었다. 해월 신사께서 (나를) 청주접주로 차정(差定)하시고 교중(敎中) 일을 잘 이끌라.”고 기록해 교세 확장이 크게 일어났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권병덕이 포덕한 두 지역은 충청도의 미원(米院)과 유구(維鳩), 그리고 경상도의 진주(晉州)다. 권병덕은 충청도에서 경상도 서부 지역까지 내려와 동학을 전파시켰다. 진주의 동학은 임규호포라고 알려졌는데 이는 권병덕이 보은의 대접주인 임규호 밑의 접주라서 그렇다. 권병덕이 임규호의 명을 받고 진주 등 서부 경남 지역에 동학을 전했다. 진주 지역의 동학 세력은 동학혁명 때까지 유지됐다.
김씨 부인 사망
1887년 1월 1일 새해를 맞아 해월은 다음과 같이 짧은 시를 지었다. “無極大道作心誠(무극대도작심성) 圓通峰下又通通(원통봉하우통통)” 해석하면 “무극대도를 작심으로 정성 드리니, 원통봉 아래서 또 통하고 통하였노라.”이다. 무극대도는 수운 최제우가 받은 동학의 원래 이름이고 원통봉(587m)은 해월이 살고 있는 전성촌의 뒷산이다. 해월은 무극대도, 즉 동학에 마음을 작정해 정성을 드려 원통봉이 있는 전성촌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 시 한 수를 통해서도 늘 수련에 정성을 다하는 해월을 엿볼 수 있다.
1월 15일에는 둘째 아들 덕기를 청주 율봉(栗峰)에 사는 음선장(陰善長)의 둘째딸과 혼인시켰다. 음선장의 큰 딸은 서인주의 부인이었다. 즉, 덕기의 혼인은 서인주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음선장은 사위였던 서인주의 권유로 1884년 동학에 입도했다. 이로써 서인주와 덕기는 동서지간이 되었다. 2월 들어 해월의 김씨 부인이 몸져 누었다. 해월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김씨 부인은 결국 2월 24일 운명했다. 김씨 부인의 묘는 원통봉 아래에 정했다. 김씨 부인의 묘 자리는 1979년 후손이 화장을 해 지금은 논으로 바뀌었다.
김씨 부인이 사망하자 해월은 전성촌의 집은 김연국에게 맡기고 보은 장내리로 갔다. 보은 장내리에는 해월의 본 부인인 손씨가 살고 있었다. 아마 1885년 해월이 장내리로 은거했을 때 손씨 부인도 같이 이사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장한주가 보은으로 가서 해월을 보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서경이 장내리로 와서 같이 살게 됐다.
환갑(還甲)을 맞은 해월
1887년은 해월이 환갑을 맞이하는 해였다. 환갑을 맞는 3월 21일에 각 포의 도인들이 장내리로 모여 잔치를 벌였다. 해월은 김씨 부인이 사망한 직후라 환갑잔치를 열지 않으려 했으나 제자들의 성화에 마지못해 잔치상을 받았다. 잔치가 끝난 직후인 3월 말에 해월은 장한주에게 식구를 부탁하고 정선으로 떠났다. 해월은 유시헌을 찾아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기도할 곳을 알라보라고 했다. 유시헌(劉時憲)이 고한의 정암사(淨巖寺, 일명 갈래사)를 주선해줘 해월은 이곳에서 49일 기도에 들어갔다. 해월은 고생한 김씨 부인의 명복을 빌며 49일 동안 극진히 기도했다.
해월이 정암사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서인주와 손천민도 뒤따라와서 49일 기도에 동참했다. 유시헌의 큰아들 유택하(劉澤夏)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수기(手記)>에 기록했다.
“정해(丁亥, 1887)년 3월에 서일해(서인주)와 더불어 태백산 갈래사 공부시 주승은 청암이요, 과량(?糧).등유(燈油) 등절을 다 준비하시고 부친께서 당부하기를 잡인이 분주케 말라하시다. 각처 도인들이 자연 알고 혹 밀밀 상봉하더니 4월에 이르러 손사문(손천민)이 내도하야 왈 태백산 공부할 곳을 정하여 주면 감자로 양식하고 지내기를 청하거늘 부친(유시헌)이 동거하여 해월선생께 알현하시고 근처 능이 암자의 주승 전수자로 부탁하여 감자.과량으로 지내게 하시다.”
해월은 시 한수로 49일 기도를 마감했다.
不意四月四月來(불의사월사월래) 뜻하지 아니한 사월에 사월이 오니
金士玉士又玉士(금사옥사우옥사) 금사 옥사 또 옥사로다.
今日明日又明日(금일명일우명일) 오늘 내일 또 내일
何何知之又何知(하하지지우하지) 무엇 무엇을 알고 또 무엇을 알리.
日去月來新日來(일거일래신일래) 날이 가고 달이 오고 새 날이 오니
天地精神令我曉(천지정신금아효) 천지정신이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도다.
해월의 이 시는 쉽게 해석이 되지 않는다. 아마 해월이 자신과 같이 깊이 공부하여 이해하라는 과제처럼 느껴진다. 다만 변하는 시간 속에서도 동학에 참여해 마음을 닦으면 대우주 대정신 대생명의 정신을 깨달을 수 있다는 의미는 끄집어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