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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장에는 김계원·김재호·노봉수·안병학·여수환·조호철 공저(,2012년 농수산식품부 수학사 ) 탁.약주개론 중에서 탁.약주 변천사 부문을 옮기고자 합니다.
탁·약주 제조의 변천사
수(水)자가 첨가되어 삼수변에 익을 유자로 합성되었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 포도
주 저장용기로 사용한 암포라같이 중국의 술항아리도 밑이 뾰족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
의 빗살무늬토기 중에도 밑이 뾰족한 것이 발견되는데 술 빚는 데 사용한 것 같다. 중국
에서는 술을 빚는 원료(물), 형상(액체: 수), 그릇 등을 술의 어원으로 삼았다.
이에 비하여 우리나라에서 ‘술’이라는 말은 술의 특성을 살펴서 지은 것 같다. 첫째,
술이 목으로 술술 넘어간다는 뜻에서 술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설이 있다. 둘째, 술의 어
원은 술을 마셨을 때 느낌을 나타낸 것에서 온 것 같다.『 조선관역어(朝鮮館譯語)』에는
술을‘ 수본(數本)’으로 표기하였다. 조선시대 한글 문헌에는 술이‘ 수울’ 혹은‘ 수을’로
기록되어 있고, 이 수블은‘ 수블>수울>수을>술’로 음이 변형되어왔음을 알 수 있
다. 여기서‘ 수불’의 의미는 술을 마셨을 때 취기가 오르는 상태가 불을 쬔 것같이 얼굴
에서 열이 나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즉, 물 같은 액체를 마셨는데 불 같은 느낌이
나므로‘ 수불’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알코올을 한자로는 주정(酒精)이라 하고 영어로는 스피리츠(spirits)라 하는데, 이는
술이 정신작용에 영향을 준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글에서 술의 어원
이 수불이라면 술이 정신작용에서 기인한다는 추론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2) 신화·전설에서 본 술
전설에 술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술이 생성된 시기는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이었을 것
으로 짐작된다. 술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났을 것이다. 태곳적 원시림의 과일나무 밑
에 조그만 웅덩이가 하나 있었다. 무르익은 과일이 하나둘 떨어져 이 웅덩이에 쌓이고,
쌓인 과일들이 문드러지면서 웅덩이엔 과즙이 괴었다. 여기에 나뭇잎이 떨어져 덮였다.
그러자 효모가 번식하게 되고 마침내 발효가 일어났다. 효모는 과일껍질, 흙, 물, 공기
어디에나 있으니 말이다. 이 효모에 의해 알코올 발효가 일어나 술이 빚어졌다. 오가던
동물들이 마른 목을 축이느라 웅덩이에 괸 물(액체)을 마시게 되었다.
영리한 원숭이들이 우연히 이 액체를 마시고 황홀감에 도취되었다. 그 맛을 잊지 못
한 원숭이들은 나무 둥치나 움푹 파인 바위에 과일을 쌓아두어 술을 만들었다. 일본의
철학자 시미즈(淸水)는 젊은 시절 산속에서 수도하다가 원숭이와 사귀게 되었다. 하루
는 원숭이를 따라갔다가 원숭이들이 움푹 파인 바위에 과일 등을 이용해 술을 만들어놓
고 마시며 노는 것을 보았다.
수렵시대 사람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과실주를 만들었을 것이고, 유목시대에는 가
축의 젖을 자연 발효해 젖술을 만들었을 것이다. 농경시대에 접어들면서 인류는 곡물
을 이용하여 술을 만들게 되었다. 그렇다면 농경시대 사람들은 곡물을 어떻게 당화시켰
을까? 입으로 씹었을 것이다. 이는 가장 원시적인 당화법이다. 이는 최근에도 아프리카,
남양군도 등 미개사회에서 발견되고 있다. 고대 중국에도 예쁜 처녀들에게 쌀밥을 씹게
해서 당화시킨 후 술을 빚었다는 이른바‘ 미인주’에 관한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제왕운기(帝王韻記)』 동명성왕 건국담에는 술에 관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
다. 하루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지상에 내려와 놀다가 연못가에서 물의 신인
하백(河伯)의 세 딸을 만난다. 그녀들의 미모에 취해 사랑에 빠진 해모수는 그녀들의 마
음을 사로잡기 위하여 술을 권한다. 그 술을 기꺼이 받아 마신 큰딸 유화(柳花)는 술에
취해 수궁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마침내 해모수와 하룻밤 달콤한 사랑을 나눈 유화
는 열 달 뒤 커다란 알을 낳는데 그 알에서 나온 것이 주몽(朱蒙)이다. 주몽이 바로 나중
에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東明聖王)이다. 이 신화를 보면 한반도에는 이미 삼국시
대 이전에 술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탁·약주 제조의 변천사
탁·약주로 대표되는 전통주는 찹쌀이나 멥쌀을 주원료로 한다. 여기에 누룩을 발효
제로 넣고 부원료로 약재류, 과실류 등을 첨가해 각기 독특한 방법으로 양조했다. 모두
누룩을 넣어 만들었으니 누룩 제조가 전통주 제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누룩은 일종의 미생물 덩어리이다. 원료는 주로 밀(소맥)이고 그 밖에 보리, 옥수수,
콩, 팥, 귀리 등을 섞어 만들기도 한다. 지역 풍토와 기후에 따라 형상, 크기, 품질 등이
독특한데, 누룩의 지름이 너무 작거나 두께가 얇으면 수분이 쉽게 발산되어 숙성이 제
대로 안 되고, 너무 두꺼우면 습도가 지나치게 높아지거나 통기가 어려워 미생물이 잘
생육하지 않아 역가도 낮고, 향미도 좋지 않게 된다. 결국 누룩의 독특한 형태에는 주위
환경에 따라 미생물이 잘 생육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찾은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
다고 할 수 있다.
탁주와 소주 양조에는 밀을 거칠게 빻아서 만든 조곡을, 약주 양조에는 밀을 곱게 빻
아 만든 분곡 또는 밀기울이 포함되지 않은 백곡을 사용했다. 이러한 누룩이 일본의 코
지와 다른 점은 곡류를 조분쇄한 뒤 살균하지 않은 생전분을 그대로 자연 발효상태에서
제조하기 때문에 곰팡이, 효모, 세균류 등 다양한 미생물이 존재함으로써 곰팡이에 의
한 전분의 당화력과 효모에 의한 알코올 발효능을 동시에 지녀 누룩 단독으로 전통주를
제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누룩의 당화력을 담당하는 미생물은 원료와 공기 중에 있는 누룩곰팡이
(Aspergillus속), 거미줄곰팡이((Rhizopus속), 털곰팡이(Mucor속), 빨강곰팡이(Monascus
속) 및 푸른곰팡이(Penicillium속) 등이며, 여러 종류의 사카로미세스(Saccharomyces속)
가 알코올 발효에 관여한다.
술을 빚으려면 먼저 곡물에 함유된 전분을 당으로 분해해야 하는데, 누룩에는 당화효
소가 듬뿍 들어 있어 술밥을 당화한다. 누룩은 꼬들꼬들한 밥을 흐물흐물하게 죽처럼
만들고 마침내 액체 상태로까지 변화시킨다. 요즘이야 당 분해효소가 많이 개발되었고,
기술도 발전해 곡물을 당화하기가 쉽지만, 예전에는 어떻게 해서 누룩을 만들었는지 놀
랍기만 하다.
누룩에 들어 있는 효모는 당을 분해해 알코올 발효를 일으킨다. 누룩은 당화와 발효
를 동시에 일으킬 수 있는 일종의 미생물 군집체이므로 예로부터 주모나 술꾼들이 애지
중지한 신비의 물건이었다. 술이 다 익으면 액체(술)와 고체(술지게미, 酒粕)로 나뉘는
데 액체를 분리하기 위해 일종의 체에 해당하는 용수를 박는다. 이 용수에는 맑은 술이
고이는데 이것이 약주(藥酒)이다. 특권층이나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양반을 비롯한
모든 백성이 막걸리를 주로 마셨다.
1) 고대의 술
우리나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곡주제조에 국과 얼을 사용했을 것이다.『 서경(書
經)』「 설명편(說命篇)」에는 술을 만들 때 국얼(麴蘖)을 쓴다 하였는데 국(麴)은 누룩을
지칭한 것이고 얼(蘖, 그루터기에 돋은 싹)은 엿기름(보리를 침지하여 싹이 나게 한 맥
아)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대부터 술을 만드는 데 누룩과 곡아(곡식의 싹)를 사용하였음
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누룩에는 당화효소와 함께 효모가 다량 존재하므로 술빚기가 편
리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강원도, 이북지역에 전승된 제조법 중에는 엿기름을 이
용하는 술 양조법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누룩의 변천은 우리나라 주류의 변화를 주도
하였다.
고대 누룩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만들었을 것이다. 누룩 제조법이 상세하게 기록된
최초의 서적은 북위(6세기경) 때 북양태수였던 가사협(賈思勰)이 지은 농서『 제민요술
(齊民要術)』이다.『 제민요술』에서는 누룩을 떡처럼 성형된 병국(騈麴)과 흩임누룩인
산국(散麴)으로 나누었다. 병국은 밀을 빻아서 물을 약간 뿌린 뒤 뭉쳐서 만든 막누룩을
말한다. 여기에서 분국은 볶은 밀을 가루 낸 것인데 신국(神麴) 발효력의 반밖에 되지
않는다. 신국은 볶은 밀, 찐밀, 생밀을 가루 내어 각각 같은 양을 섞어 쓴다. 신국에는
반드시 생밀이 들어가 누룩곰팡이가 쉽게 번식하나 오염되기 쉬워 만들기가 까다롭다.
곰팡이 균사를 공급하기 위해 도꼬마리, 보릿짚, 뽕나무잎을 누룩에 덮었다. 물 대신 뽕
나무잎, 쑥 등을 달인 즙으로 반죽하기도 했다.
산국은 곡물 낱알이나 곡분으로 만든 것으로 성형하지 않고 흩어져 있는 누룩을 말한
다. 산국은 다시 황의(黃衣)와 황증(黃蒸)으로 나뉘는데, 황의는 밀알을 침지한 뒤 꺼내
서 두 치 두께로 펴놓고 물억새나 도꼬마리(혹은 독고마리) 같은 식물의 잎으로 덮은 다
음 7일이 지나 포자가 노랗게 덮이면 꺼내서 햇볕에 말려 쓴다. 황증은 거칠게 빻은 밀
가루를 쪄서 식히고 손으로 덩어리를 부수어 띄우는 데 7일 정도 걸린다. 오늘날 중국,
우리나라에서도 흩임누룩 방식을 많이 사용한다.『 제민요술』은 농업 분야를 다룬 방대
한 저술로 중국과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술 제조법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2) 삼국시대
고구려 건국 이야기에 술이 등장하고,『 삼국사기(三國史記)』「 대무신왕편」에 지주
(旨酒) 이야기가 나온다.『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을 보면 동이족의 무
천, 영고, 동맹 등 제천행사에서‘ 주야음주가무(晝夜飮酒哥舞)’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
다. 중국 당나라 때 수필집『 유양잡조(酉陽雜俎)』「 주식편」에 낙랑주법이란 말이 나오
는데 낙랑시대에 누룩이 체계적으로 보급된 것을 말해준다.
8세기 때 저술된 일본의『 고사기(古事記)』「 응신 천황편」에 따르면 백제의 누룩과 술
을 빚는 법이 일본에 전해졌다. 이는 백제의 술 빚는 기술이 그만큼 발달했다는 것을 입
CHAPTER 1 탁·약주 제조의 변천사 19
증하는 것이다. 백제의 개로왕(455~475)은 고구려 첩자인 승(僧) 도림(道琳)의 꾐에 빠
져 술에 도취했고, 무왕(600~641) 역시 술에 빠져 있는 사이 나라의 기둥이 썩어 들어
갔다.
백제는 쌀농사가 발달해 의자왕의 전설처럼 술을 많이 빚은 것 같다. 의자왕
(641~660)은 부왕이 놀던 사비하(泗沘河, 백마강)에서 국운이 기울어가는 것도 모르고
술과 궁녀에게 묻혀 망국을 재촉하다 마침내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게 항복하였다. 당나
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이 “일잔 신라주준 신공역소(一盞 新羅酒浚晨恐易銷): 한 잔의
신라주의 취기가 새벽바람에 사라질까 두렵구나”라고 읊은 것을 보면 신라의 술 빚기
기술이 발달했던 것 같다. 신라시대에는 김유신과 천관녀의 전설에서 보듯 술집이 상업
화된 것 같다.
3) 고려시대
고려시대 전기에는 송나라와 활발히 교류해 문물교환이 활발했고, 후기에는 원나라
의 침공과 주둔으로 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송나라 때 사신 서긍(徐兢)이 지은『 선화
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고려의 풍속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
에는 찹쌀이 없어서 멥쌀과 누룩으로 술을 빚는다. 그 색깔이 짙고 맛이 독하여 쉽게 취
하고 쉽게 깬다(高廲國無糯米而秔合麵而成酒色重味烈易醉易速醒)”라고 고려의 술에
대하여 적었다. 송·원대를 통하여 중국에는 찹쌀술이 있었으나 고려 때는 중국 강남의
영향을 받아 멥쌀로 술을 빚은 것이 서긍의 눈에 특이하게 비친 것 같다. 또‘ 술의 맛이
독하여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고 하였다. 당시 알코올 도수는 중양법, 삼중법 등 여러
차례 덧술을 해서 도수를 높였는데, 이 방법도 송나라에서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다른 부분에서는 “왕이 마시는 술은 양온서(良醞署)에서 다스리는데 청주와 법주 두
가지가 있어서 질항아리에 넣어 명주로 봉해서 저장해둔다(王之所飮日良醞左庫淸法酒
亦有二品貯瓦尊而黃絹封之)”라고 하였다.
『고려도경』에서는“ 고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술을 즐긴다. 그러나 서민들은 양온서
에서 빚는 좋은 술은 얻기 어려워 맛이 박(薄)하고 빛깔이 짙으며, 마셔도 별로 취하지
않는 술을 마신다”라고 하였다. 이렇듯 서민들은 막걸리를 마셨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정사를 기록한 『고려사(高廲史)』에 보면 문종(1046~1082) 때는 양온서를
두고 국가의 의식용 술을 빚었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종묘 제사에 쓰는 등 관용 농
후주를 법주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리하여 『제민요술』과 『북산주경(北山酒經)』에 나
오는 법주가 고려시대에는 체계적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술을 의인화하여 쓴 글로는 임춘의 『국순전(麴醇傳)』과 이규보의 『국선
생전(麴先生傳)』이 있다. 여기서 국은 술을 만드는 누룩을 지칭한다.『 국선생전』에‘ 주
중청자위성인(酒中淸者爲聖人, 술 중에 청주는 성인이다)’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청주가 고급 술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포도주 등 과일주가 송나라와
원나라에서 유입된 것 같으나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송나라 때의『 북산주경』에서
는 쌀, 누룩에다 포도즙을 넣어서 포도주를 빚는다고 하였다. 소동파(蘇東坡)의 『동파
주경(東坡酒經)』에 나오는 포도주도 누룩, 밥, 포도즙으로 빚는다고 하였다. 또 그의 시
(詩)에 나오는 밀감주도 이와 유사하다.
원나라의 침공과 함께 소주가 전파된 때는 충렬왕 3년(1277)으로 볼 수 있다. 고려를
지배하게 된 몽골은 일본 침략을 위한 병력 일부와 군선, 군량 등을 고려에서 제공하라
고 강요하였다. 전초기지를 제주도에, 병참기지를 안동과 개성에 둔 몽골군은 소주를
술병에 넣어 옆구리에 차고 다니며 마셨다. 이 고장에서는 소주를 만들어 몽골군에게
보급하면서 그 전통으로 안동소주, 개성소주가 유래하게 되었다. 소주류에는 1차 증류
주인 소주, 2차 증류주인 감홍로(甘紅露) 등이 있다.
『고려사』 충렬왕 22년(1296)조에 따르면 중국에 간 세자(世子, 忠宣王)에게 원나라
태후는 양 700마리와 술 500항아리를 내리고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몽골의 술이 나왔
는데 양의 젖을 발효해 만든 양주(洋酒)와 말의 젖으로 만든 마유주였다. 충렬왕 비 제
국공주(齊國公主)가 고려 궁중으로 들어와 잔치를 베풀 때 몽골식 양주와 마유주를 사
용하였다. 이로써 양주나 마유주가 고려에 알려져 고려 일부에서도 이를 음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고종 때 학자 이규보(1168~1211)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은 시
문집이다. 여기에‘ 백주시일수(白酒詩一首)’라는 시가 있는데,“ 젊을 때는 백주를 즐겨
상음(常飮)하였으나 벼슬길에 오르고는 청주를 마시게 되었다. 청주가 없을 때는 부득
이 백주를 마시는데, 위에 차서 배가 부르니 불쾌하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백주가 오
늘날의 탁주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발효된 밑술은 압착하여 맑은 청주를 얻는데 겨우
4~5병을 얻을 뿐이다(新醪壓罷强澄淸所得難過四五甁)”라고 한 시가 있는데, 여기서
밑술을 압착해
청주를 얻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용수를 박아서 떠냈는지 주머니에
넣어 압착했는지는 알 수 없다.
고종(1213~1259) 때 한림학자들의 문집이라고 알려져 있는『 한림별곡(翰林別曲)』에
는 황금주(黃金酒), 백자주(柏子酒), 송주(松酒), 예주(醴酒), 죽엽주(竹葉酒), 이화주(梨
花酒), 오가피주(五加皮酒) 같은 술 이름이 나온다. 이규보의 시문에는 수많은 술이 나
오는데, 이화주(梨花酒), 자주(煮酒), 화주(花酒), 초화주(椒花酒), 파파주(波把酒), 백주
(白酒), 방문주(方文酒), 춘주(春酒), 천일주(千日酒), 천금주(千金酒), 녹파주(綠波酒)
등이 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 비로소 우리 전통주의 근간인 탁주, 약주, 증류식소주
등이 완성된 것을 알 수 있다.
4) 조선시대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며 예를 존중하였다. 통과의례인 사례와 각종 세시풍속에 술을
곁들여 예를 차렸다. 이른바 ‘술로 예를 이룬다(酒以成禮)’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행사
는 술 빚기에서 시작되어 주연을 베푸는 것으로 종료되곤 했다. 세종 때 시작하여 성종
때 편찬된 『종국조오례』에는 각종 의례에서 술을 사용하는 방법이 자주 나온다. 그러
나 술을 빚는 방법에 대해 언급한 책은 매우 드물다. 효종 때 간행된 『농가집성(農家集
成)』「 사시찬요초」에 따르면 누룩은 삼복에 보리 10되, 밀가루 2되로 만들었다. 녹두즙
에 여뀌와 함께 반죽한 뒤 밟아서 떡처럼 만들어 연잎, 도꼬마리잎으로 싸서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걸어놓고 말렸다. 반죽을 단단히 하고 강하게 밟아야만 좋은 누룩이 된다
고 하였는데 이렇게 만든 것이 막누룩이다.
한글로 쓴 장씨 부인의『 음식디미방』(1680년경)에서는“ 누룩은 밀기울 5되에 물 1되
씩을 섞어 꽉꽉 밟아 디디고 비오는 날이면 더운 물로 디딘다. 시기는 6월과 7월 초순이
좋으며, 이 시기는 더울 때이므로 마루방에 두 두레씩 매달아 자주 뒤적거리고 썩을 우
려가 있을 때는 한두 차례씩 바람벽에 세운다. 날씨가 서늘하면 고석(짚방석)을 깔고 서
너 두레씩 늘어놓고 위에 또 고석을 덮어놓고 썩지 않게 자주 골고루 뒤집어가며 띄운
다. 거의 다 뜬 것은 하루쯤 볕에 쬐어 다시 거두어 더 뜨게 한다. 이것을 여러 날을 두
고 밤낮으로 이슬을 맞히는데 비를 맞추지는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만든 것도 막
누룩이다.
조선 후기에 실학파 학자들이 여러 농서를 발간했다. 영조 때(1766) 발간된 『증보산
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 수재된 누룩 제조법을 보면, 신미(辛未), 을미(乙未), 경자(庚
子)일을 누룩 만들기 길일로 보았다. 삼복에 만들면 벌레가 생기지 않는데 초복 이후가
가장 좋으며, 중복 뒤나 말복 전이 다음으로 좋고, 매월 초하룻날 만들면 좋다고 되어 있
다.『 증보산림경제』에 나타난 누룩 종류에는 진면곡, 요곡, 녹두곡, 미곡, 추모곡, 이화
주법의 곡 등이 있다.
진면곡(眞麵麯)은 밀가루를 단단히 반죽해 원판상으로 작게 만들되 도랑이 있는데, 이
것은 통풍과 과열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는 조곡(粗麯), 즉 밀가루, 밀기울을
섞어 만든 막누룩과 밀가루 막누룩인 분국을 구별하지 않았다. 요곡(蓼麯)은 쌀알맹이
에 밀가루를 부착하여 종이주머니에 넣어 띄우는데, 곰팡이 균사가 주머니 속이라는 제
한된 환경에서 자라기 때문에 약간 단단한 덩이 모양이 된다. 낱알 모양으로 부스러지므
로 준 흩임누룩(산국)이라 할 수 있다. 녹두곡은 백미와 녹두 각각 1되씩 갈아서 누룩을
만들되 원판은 작고 얇아야 한다. 미곡(米麯)은 쌀가루를 약간 쪄서 누룩을 디디고 솔잎
에 묻어 띄운다. 추모곡은 가을보리로 누룩을 디딘 것으로 술맛이 세지 않다고 한다.
이화주의 누룩은 쌀가루를 달걀만 하게 만들어 솔잎으로 켜를 지으며 독 안에 넣는
다. 7일이 지나면 꺼내어 반나절 말리는 일을 되풀이해서 잘 건조되면 종이 주머니에 넣
어둔다. 배꽃 필 때 만들기 시작해서 여름이 지난 뒤 사용한다.
누룩 재료로는 밀이 가장 많이 쓰이고 그다음이 쌀이며 녹두와 보리가 약간 쓰인다.
밀은 거칠게 빻아 쓰고, 쌀은 곱게 가루 내어 사용하며, 쌀알맹이에 밀가루를 부착한 것
도 있다. 녹두는 불려서 갈아 쓴다. 재료는 가볍게 찌기도 했으나 거의 날로 썼다. 누룩
성형은 간신히 뭉쳐지도록 반죽한 것을 헝겊, 짚, 풀잎 등으로 싸서 누룩틀에 넣어서 발
로 밟는 방법이 표준이었다. 조선시대 누룩의 형태는 막누룩이 90% 정도로 가장 많고,
흩임누룩이 10% 정도였다. 도수가 높은 술을 얻고자 덧술을 할 때는 대개 고두밥만 넣
었으며 누룩과 함께 넣는 경우가 드물고 물을 넣지 않았다.
대한제국시대에는 곡자를 분류하는 방법이 매우 다양했다. 제조 시기별로 춘곡, 하
곡, 절곡, 동곡으로 나누었다. 용도별로 탁주용, 약주용, 소주용, 과하주용이 있었다. 원
료처리 방법으로 조곡과 분곡이 있는데, 분곡은 밀가루로 만들고 주로 약주, 과하주용
으로 쓰였다. 기울을 빼고 밀가루만으로 만든 백곡(白麯)이 있다.
조곡은 밀을 세 조각으로 타개서 얻은 가루와 밀기울을 함께 그대로 써서 만드는 것
을 말하며 주로
탁주나 소주용으로 사용되었다. 소주용 조곡에는 밀 말고도 옥수수, 콩,
팥, 보리 등을 섞은 것과 귀리로 만든 것, 소주지게미에 쌀 등을 섞어 만든 것 등이 있었
다. 충청도와 경상도에는 조곡, 밀가루를 조곡의 20~40% 섞어 체에 받쳐낸 나머지로
만든 조국도 있으며, 함경도에는 귀리, 겉보리, 피 등을 술지게미(주박)와 섞어서 찐 것
을 원료로 한 것도 있었다.
누룩을 띄우는 방법에는 퇴적 방법과 매어달기가 있었다. 형상과 용량은 크고 두꺼운
것과 작고 얇은 것이 있으며, 편원형, 원주형, 만두형, 각형, 컵형, 장방형, 방형, 모자형,
월(月)형, 원판형 등 매우 다양하였다. 누룩 제조에 쓰이는 기구는 간단한데, 원료나 물
의 양을 가늠하는 바가지, 혼합용 나무통, 반죽한 것을 싸는 포목, 누룩틀이 전부였다.
누룩을 제조할 때 원료 분쇄에는 물레방아나 소와 말의 힘을 이용하였다.
분쇄한 밀은 적당량 바가지로 떠서 누룩틀에 넣고 발로 밟는다. 이어 포목천을 제거하
고 누룩방이나 온돌 또는 헛간에 적당히 배열한다. 틀을 쓰지 않고 생 누룩을 부엌 천장
에 매달기도 했다. 짚이나 쑥으로 덮고 누룩곰팡이가 자연히 자라서 발열하기를 기다렸
다가 덮었던 짚이나 쑥을 치우고 배열 간격을 넓힌 뒤 차차 건조시키면서 누룩을 만들었
다. 짧은 것은 1주일, 긴 것은 40일 이상 걸리는데 지방, 모양, 제조법, 계절 등에 따라 일
정하지 않았다. 또 서울과 영남의 조곡 제조법을 보면 원료를 반죽해 헝겊에 싸서 틀에
넣고 단단히 밟아 청초(靑草) 또는 짚으로 싸서 온돌에 퇴적하여 만들었는데, 모양은 편
원형이라 했다. 호남지역이나 충청지방에서는 실내에 매달아두었다. 분곡은 보통 조곡
보다 저온 발효시키는 것이니 퇴적하는 것보다 매달아 만드는 것이 쉽고 품질이 좋다.
조선시대는 누룩 제조 방법이 다양해지고 찹쌀이 양조 원료로 사용되었으며, 떡, 죽,
밥 등 원료처리 방법이 다양해지고 단양주(속성주), 이양주(일반주), 삼양주(저온장기
주) 외에 십양주까지 덧술을 통한 중양주 양조법이 적용됨으로써 우리 역사상 가장 찬
란한 술 문화가 번성했던 전통주 전성시대였다. 조선시대 명주로는 경기의 삼해주·약
산춘, 충청의 소곡주·노산춘, 평안도의 벽향주·감홍로, 영남의 과하주·송엽주, 호남
의 호산춘·두견주 등이 있었다.
5) 일제강점기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술에 세금을 물게 한 적이 없었고, 자가양조(自家釀造)가 발달
하였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술을 담갔을 뿐만 아니라 상업적인 양조장 수가 많았고 술
의 종류가 다양하였다. 1904년 8월 한일조약으로 일제는 본격적으로 내정간섭을 시작
했고 일본인 재정고문이 취임하였다. 1906년에 통감부를 설치해 모든 분야에서 통제를
가했다. 이어 1909년 2월 법률 제3호로「 주세령(酒稅令)」을 발포했다.
일제가「 주세령」을 제일 먼저 시행한 것은 대한제국의 재정권을 쥐기 위한 것은 물론
전통문화 파괴 전략의 하나였다. 한국인의 조상숭배나 두레 같은 문화의식에는 술이 필
수품이었는데 이를 통제하는 것은 한민족 문화를 말살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전통 가
양주(家釀酒)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자가용주세(自家用酒稅, 면허세)와 기본 제조량
(제한 석수)을 급격히 상향 조정해 소규모 주조업체를 본격적으로 정리·축출했다. 이
로써 대자본이 주류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주세도 급증했다. 그 결과 주조업이 대
규모화했는데, 이러한 업계 개편을 선도한 주종은 소주, 청주 등이었다. 특히 소주 부문
에는 일본인 자본이 대거 진출해 탁주의 대규모화를 압박했다. 조선주(朝鮮酒), 특히 탁
주에 대한 기본방침은 세무 행정 효율화라는 명목으로 새로운 검사방법이나 설비를 도
입하게 해서 심하게 통제하는 것이었다. 일부 지방에서는 탁주업 자체를 강제적으로 도
태시키려고 했다.
일제는 일본 술이 위생적·과학적이라는 명목으로 획일적인 방식을 강제로 도입하도
록 함으로써 일본식 술이 제조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민간에서는 암암리에 밀주가 성
행했다. 그러자 일제는 1916년 1월「 주세령」을 발포하여 주류 단속을 더욱 강화하고,
모든 주류를 약주, 소주, 탁주로 획일화했다.
1917년에 주류 제조업이 정비되면서 자가용술 제조면허제도는 1934년 폐지되었다.
게다가 1920년을 기점으로 제조방식에 일제식 개량 주조법을 의무화해 흑국(黑麴), 황
국(黃麴) 배양균을 사용하는 방법이 보급됨과 동시에 황국은 사케(청주) 제조에 이용되
었고, 흑국은 소주 제조에 이용되었으며 1960년대 이전까지는 탁주, 약주 제조에 누룩
이 여전히 사용되었다. 일제는 「주세령」을 5회 개정하면서 제조 방법을 점점 획일화하
였다. 1932년에는 자가용 술 면허자가 단 한 명만 남게 되었으며, 1934년에는 그것마저
완전히 없어지기에 이르렀다. 일제의 주세는 종가세(從價稅) 제도였는데 주세관리 행정
편의를 위하여 주종과 제조방법을 규격화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 지역의 독특하고,
다양한 명주(名酒)가 사라지는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전통 누룩 제조방법에 대하여는 1930년 일본인이 저술한『 농산제조학』
에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곡자는 밀을 거칠게 빻아 물을 가하고 일정한 형틀로 압착한 뒤 적당한 온도에서 곰팡
이류, 기타 미생물을 번식시킨 것인데 청주의 국(麴)과 같은 작용을 함과 동시에 또 한 가
지 중요한 역할은 주모 작용을 하는 것이다. 곡자의 형상은 대소, 품질 등 각양각색이고
원료 소맥의 분쇄 정도에 따라 크게 분곡과 조곡으로 나뉜다(혹은 분국, 조국이라고도
함). 분곡은 소맥을 갈아서 분쇄한 분말로 만든 것으로, 밀기울을 포함하지 않고 소맥분
만으로 만든 것을 백곡이라고 한다. 이것들은 주로 약주나 탁주에 사용한다. 조곡은 소맥
을 3개 정도로 빻는 소위 뇌쇄(雷碎)를 하여 제조한 것으로 탁주, 소주에 널리 사용한다.
곡자는 제조 계절에 따라 춘곡(1, 2, 3월), 하곡(4, 5, 6, 7월)이라고 한다. 소맥을 수확하
는 8, 9월에 가장 많이 생산한다. 그 밖에 대맥(보리), 나맥(裸麥) 또는 대두(大豆)분을 혼
합한 것을 원료로 하는 것, 귀리(龜梨), 나맥(裸麥) 등의 주요박(酒燿粕)과 혼합한 것 중
강한 것을 원료로 하는 희귀한 방법이 있다. 원료처리 방법을 보면 소맥을 물로 씻어 충
분히 건조한 것을 돌절구로 연쇄(硏碎)하고 필요한 분의 세조(細粗)에 따라 연쇄 정도를
가감한다. 동력은 우마(牛馬) 아니면 체로 쳐서 곡자 원료로 한다.
곡자제조에는 특별한 구조를 갖춘 시설은 필요치 않으나 대개 보통집의 온돌에 가마니
나 덕석을 깔아 사용한다. 규모가 큰 공장에서는 이중벽의 천장 높이를 9자 정도로 하고
환기가 잘되게 지창(地窓)과 천창(天窓)을 둔다.
곡자제조의 조작은 성형, 발효실 입실, 갈아 쌓기, 집 빼기, 출곡으로 구성된다. 곡자실
의 구조와 제곡 계절, 지방에 따라 제조 경과가 반드시 일정치 않고 대략 8, 9월 출곡된
다. 우선 분쇄된 소맥을 곡자실에 운반하여 덕석 또는 아연 함석판 위에 원료당 40% 정
도 물을 뿌리면서 교반 혼합하고 1시간 정도 방치하여 점성이 충분히 생겼을 때 일정량
씩 단괴(團塊)로 하여 삼베로 싸서 형틀에 넣고 발로 밟아 단단하게 평원판(平圓板)으로
성형한다. 곡자 모양의 대소(大小)는 지방에 따라 다르고 형상은 편평(扁平)한 원판상 또
는 각판상(角板狀)이 가장 보편적이나 모자 모양이 있고 크기는 1.3 내지 3.4톱 등 각양
각색이다.
성형한 소맥은 서로 밀착되지 않게 짚으로 된 새끼로 나선상으로 두르거나(지름 8.6
cm) 둘레는 새끼끈을 부치고 뒷면과 주변은 짚으로 싸서 온돌에 15~16개씩 막대기 모
양으로 위로 싸서 전면에 쌓아올려 그 위를 가만히 덮어둔다. 이와 같이 한 다음 날 미생
물이 번식한 듯 온도가 올라가고 탄산가스가 집적되기를 기다리며 때때로 품온이 균일하
도록 자리를
이동하는 적채(積債)를 하여 통풍이 되게 한다. 제2일부터 제3일까지 보통 3
회 적채를 한다. 제4일 품온이 47~48도가 되면 각기 사이와 주위에 감아두었던 짚을 빼
내어 이것으로 위를 덮고 갈아 싸준다. 제5일째는 각 단괴(團塊) 사이의‘ 새끼’를 빼내고
또 갈아 싸준다. 제6일 이후는 그대로 방치하면 차차 건조하고 품온은 내려간다. 9일째
출곡한다. 이 기간 사이에 발효실 실온을 유지하기 위하여 난로로 보온한다.
6) 현대
1945년 해방 이후 극도의 혼란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일본식 제도는 청산되지 못
한 채 대부분 그대로 계승되었다. 일제의 주세정책을 그대로 계승한 정부는 술의 사회
문화적 역할을 무시한 채 술을 세원으로만 인식하였다. 쌀을 원료로 하던 탁주와 약주
도 1964년부터 쌀 이용이 금지되면서 밀가루 80%, 옥수수 20%의 도입 양곡을 이용한
술만 양조하게 되었으며, 알코올 도수나 첨가물 종류, 술을 담는 용기까지 철저하게 규
정해 제한했다. 이와 같은 제도적 규제와 더불어 양조장에서는 대부분 대량 양조를 안
전하게 하기 위하여 산 생산능이 강한 아스페르길루스 가와치(Asp. kawachii)를 배양한
입국을 발효제로 사용함으로써 제조 방법의 획일화가 불가피하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쌀 자급이 실현됨과 동시에 1980년대 이후 경제개발로 전통문
화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고조되면서 전통주의 식문화적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통주에 일련의 정책적 지원이 이루어지면서 약주와 탁주 원료 규제 완화, 식
물성 약재와 주정 등 다양한 첨가물 사용 허용, 알코올 도수 제한과 공급구역 제한 철폐
등 제도 개선을 통한 제조방법의 준거가 마련되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개선과 함께 포
장재 개선, 저온살균 기술과 탄산가스주입 기술 등의 적용으로 다양한 상품이
소개되면서 탁주와 약주가 하나의 브랜드로 정착하게 되었다.
2009년에는 비살균탁주의 유통 안정성을 개선하기 위해 발효제어기술이 적
용된 상품이 소개되었다. 이러한 제품이 세계 최대 규모의 식품과학기술학술
대회인
IUFoST (International Union of Food Science & Technology) 2010에서
Global
Food Industry Awards를 수상함으로써 전통주가 글로벌 푸드로 성장할 가능성이 입증
되기도 하였다(그림 1-1).
3. 동서양 술의 기원
1) 중국 술의 기원
하나라 시조 우왕 때 의적이 처음 곡류로 술을 빚어 왕에게 헌상하였는데, 나중에 그는 주
신(酒神)으로 숭배되었다. 은나라 유적에서 술 빚는 항아리가 발견되었으며(그림 1-2), 진
나라 강통은「 주고(酒誥)」에서“ 술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천지개벽과 함께 태어난 사
람으로 알려진 상황 때부터이다”라고 하였으니 인류가 시작되면서 술이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2) 일본 술의 기원
일본의 천지천왕 시절 죽유가 대나무를 베어낸 그루터기에서 이상한 향기가 나서 자세
히 살펴보니, 새들이 물어다 놓은 쌀이 발효되어 술이 되어 있었다. 이것이 일본 술의 시
초가 되었다.『 대화사시』에 따르면 미잔오존이 신라국 춘성군 산복면 우두리에서 술 빚는
방법을 배워왔다는 설도 있다.『 고사기(古事記)』에 따르면 목화소비매라는 사람이 쌀을
입으로 씹어서 술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원시적인 술 빚는 방
법이었다.
3) 맥주의 기원
BC 4000년경, 오늘날 중동지역의 수메르 민족이 최초로 술을 빚었다는 설이 있다. 이
들은 보리를 말려 가루로 만든 뒤 그 위에 물을 부어 자연적으로 발효시키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맥주를 빚었다. BC 3000년경, 이집트 나일강변에서 수확한 보리로 맥주를 빚
기 시작하였고, 그리스·로마시대를 거쳐 중세에는 약초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수도사
들이 품질이 우수한 맥주를 빚었다.
4) 포도주의 기원
인류가 언제부터 포도주를 마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포도가 저장 중에 야생효모에 자
연스럽게 발효된 것을 우연히 인간이 음용하면서 포도주가 발전하게 되었다. 문헌상으
로 포도주 역사는 지금부터 약 7,000년 전 페니키아인이 이집트, 유럽 등에 알리면서 더
욱 발전하게 되었다.
BC 4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포도주를 담는 항아리 뚜껑 등이 발견되었고,
고대 이집트 벽화와 아시리아 유적을 통해 BC 3500년경에 이미 포도주가 널리 보급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는 BC 600년에 페니키아인이 포도와 포도주를 전해준 유럽 최
초의 포도주 생산국으로, 이 기술을 로마에 전해주었다. 로마는 유럽 전역을 지배하면
서 프랑스, 독일 등 식민지 국가에 포도를 재배해 포도주를 빚게 하였다.
포도주의 발생과 전파
메소포타미아문명과 이집트문명의 발상지인 중동지역은 다양한 술의 보고(寶庫)이자 근원지이다. 이 지
역에서 포도주 양조법을 그리스와 로마에, 맥주 양조법을 유럽에 보급했다. 그리스신화에서 디오니소스
로 불리는 주신(酒神) 바쿠스(Bacchus)는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대지의 풍작을 관장하는
신으로 포도 재배법과 양조법을 전파하였다. 또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이 노아에게 포도 재배법과 포도주
제조법을 전수했다고 한다.
5) 위스키의 기원
위스키의 기원은 확실제조의 변천사 29하지 않지만 1170년 헨리 2세가 아일랜드를 원정하기 전부터
증류주가 빚어졌다고 한다. 15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증류주를 제조하였다는 기록이 있
지만 오늘날 같은 스카치위스키 제조기술이 제대로 정립된 것은 19세기 중반이다. 18세
기 초, 엿기름에 대한 세금과 증세정책으로 작은 가마 사용이 금지되면서 소규모 생산
자는 산속에 숨어서 우스케보를 만들었다. 이 술이 오크통에서 숙성되면서 몰트 위스키
로 발전하였다.
막걸리(Makgeolli )
탁주(濁酒), 농주(農酒), 재주(滓酒), 회주(灰酒)라고도 하며 문헌상 『양주방(釀酒方)』에 ‘혼돈주’라는 이름
으로 처음 등장하였다. 쌀과 누룩으로 술을 빚은 뒤 숙성되면 술밑을 채로 받아 버무려 걸러낸 것으로 쌀
이외에 찹쌀, 멥쌀, 보리, 밀가루 등을 찐 다음 이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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