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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왜 인간이 되셨나?
길희성(2014년 12월)
예수는 누구인가?
오늘은 성탄절. 겨울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날씨가 푸근해서 오래 간만에 심도학사 뒷산에 산행을 하고 와서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엄청 무거운 주제지만, 날이 날인만큼 내가 평소에 생각해오던 예수 탄생의 의미를 정리해보는 것도 뜻이 있겠다 싶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우선 예수는 나에게 과연 어떤 존재이기에 이렇게 평생 그에게 매달려 살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부터 생각해 본다. 누가 나에게 예수가 과연 어떤 존재이기에 기독교인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예수 타령’을 하는가 묻는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평생 예수를 믿는답시고 살아 온 사람, 더군다나 신학, 종교학, 철학을 두루 공부하면서 교회에서 설교도 제법 많이 한 사람인데, 누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과연 내가 의미 있는 대답을 할 수 있을지, 나의 말에 동의는 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일리는 있다고 고개를 끄덕일 답을 할 자신이 있는지 자문해본다.
평생 예수와 인연을 맺고 산 사람이 이렇게 다소 곤혹스럽게 느끼게 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없지는 않다. 그것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 그리스도교가 전통적으로 제시해온 ‘정답’들이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고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참으로 하느님이자 참으로 인간(vere deus et vere homo)이신 분, 하느님의 말씀(로고스, Logos)으로서 2000년 전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신 분(成肉身, Incarnation), 하느님을 보여주신 계시자, 세상 죄를 대신 지고 가신 하느님의 어린양(속죄양, scapegoat),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보혈을 흘리시고 돌아가신 우리의 구속주(redeemer),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나신 분, 부활하신 주님(Lord) 등 교회가 가르쳐온 귀에 익은 정답들은 무척 많고, 나도 이런 개념들에 대해서 들을 만큼 들었고 배울 만큼 배운 사람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어느 것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없고 모두가 공허하고 무의미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기독론의 두 형태
그리스도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논의를 ‘기독론’(Christology)이라고 부르며, 신론과 더불어 신학의 중심 문제다. 기독론은 두 가지 문제를 다룬다. 첫째는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라는 예수의 인격(person)에 관한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가 우리 인간을 위해 하신 일 혹은 사역(使役, work)이 무엇이냐는 문제다. 후자는 구원론이라고도 부른다. 여하튼 위 기독론의 양대 주제는 구별되지만 분리될 수는 없게끔 연결되어 있다. 예수가 인류를 위해 구원의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정체성이 보통 사람과 달리 처음부터 신성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나 하느님의 말씀(Logos)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Incarnation) 사상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처음부터 예수의 신성을 전제로 한 전통적인 <하향적 기독론>과는 달리, 현대 신학에서는 인간 예수의 삶과 행위, 신앙과 사상으로부터 출발해서 그의 초월적 성품이나 정체성을 밝히려는 <상향적 기독론>의 방식이 많이 시도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신성을 말한다 해도 그가 인간으로서 이룬 위대한 일을 도외시 하면 추상적이고 공허한 도그마일 뿐이라는 견해가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물론 이 경우에는 예수가 어떻게 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구원하는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문제를 다시 안게 된다.
하지만 이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전통적 하향식 기독이 제시하는 답, 즉 예수는 처음부터 하느님의 말씀이 성육신된 하느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신학자들, 그리고 나 자신도, 인간 예수로부터 출발하는 상향식 그리스도론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정녀 탄생이든 성육신이든, 예수는 날 때부터 신성을 가지고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도그마를 전제로 한 기독론은 예수의 인격의 비밀을 설명하는 일이나 그가 한 인류 구원의 사역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나, 현대인들에게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로 들리고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예수가 인간으로서 한 일이 과연 무엇이기에 우리가 그의 신성을 논할 수밖에 없고 그를 신앙고백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라도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나마 하향식 기독론도 현대인들에게 좀 의미 있게 다가올 수 있다. 처음부터 예수의 신성을 전제로 하고 거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기독론은 하나의 은유나 신화라면 몰라도 우리 같은 인간으로서는 현실감도 없고 의미도 없는 공허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간 예수가 인류를 위해 하신 일은 과연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통적인 복음주의의 입장 - 가톨릭이나 개신교에 공통적이지만, 전자가 성찬의 전례를 강조하는 데 반해 후자는 말씀의 전례 즉 설교를 강조하는 차이가 있다 - 에 따르면, 예수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은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은 것이다. 예수가 세상에 오신 이유는 오로지 인류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이미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지닌 심각한 문제점을 논했으며, 예수의 죽음의 의미는 대속보다는 대고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밝혔다. 무엇보다도, 예수가 하실 일을 유독 그의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어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의 가르침과 삶 전체를 통해서 그가 한 일, 그의 삶과 가르침이 지니고 있는 의의를 폭넓게 논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설득력이 있다. 십자가 사건도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떠나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대리자 예수
나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 한 일을 한 마디로 '변호인' 혹은 '대리자' 역할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관점을 나는 대속신앙에 대해 고심하고 있던 젊은 시절 진보적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을 통해 얻게 되었다. 나는 당시 그의 저술을 통해서 대속 신앙이 지닌 문제점 - 특히 그것이 예수 자신의 생각과 너무 어긋나다는 것 - 에 대한 그의 비판에 공감하면서 대안을 모색하던 중,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대고(代苦) 사상으로 풀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큉과 대화하던 중 대리자/대표자/대변인이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그와 자세한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나는 그 후로 이 개념이 예수가 그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인간의 구원을 위해 행한 사역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는 우선 인간 앞에서 하느님을 대변하신 분이다. 그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진정 어떤 분인지를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하느님은 백성을 노예처럼 닦달하고 괴롭히는 절대군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 하느님은 무상(無償)의 은총과 한없는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것, 그래서 자식들을 항시 감시하며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하는 엄한 가부장 같은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무조건적인 신뢰로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이시라는 것, 세세하고 엄격한 규율로 인간을 얽매는 율법의 하느님이 아니라 모두를 품으시고 조건 없이 용서하는 하느님이라는 것, 그 앞에서는 아무도 의인을 자처할 수 없고 아무도 죄인이기 때문에 다가갈 수 없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 비천한 자를 높이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는 하느님이심을 가장 확실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대변해준 하느님의 진정한 대변자였다.
예수는 동시에 하느님 앞에서 참사람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줌으로써 우리 모두를 대표하고 대변해준 사람이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의 본래 모습을 왜곡하고 저버렸지만, 예수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 모두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대변해 주신 사람이었고, 우리가 실현해야 할 진정한 인간의 모습인 하느님의 모상을 완벽하게 보여준 사람이었다.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한 참사람으로서,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체면과 위신을 세워준 우리의 진정한 대변인이었다.
결론적으로, 예수는 인간에게는 참 하느님의 모습을, 하느님께는 참사람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준 분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로 하느님(vere deus)이고 진실로 인간(vere homo)이었다는 칼케돈 공의회의 기독론에 담긴 참 뜻이라고 생각한다. 공의회는 예수의 신성과 인간성의 문제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점을 간과했다. 예수는 참다운 하느님의 모습을 인간에게 보여 주심으로 하느님을 대변하신 존재이며, 하느님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참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를 대표하고 대신해준 우리의 진정한 대리자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굳이 <신성>과 <인간성>이라는 전통적인 본성 개념을 사용해서 표현하자면, 예수의 <신성>은 그가 참다운 인간으로서 하느님 앞에서 인간을 대변했다는 것이고, 예수의 <인간성>은 그가 우리들에게 참다운 하느님의 모습을 대변해 주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예수의 신성은 그의 진정한 인간성이며, 그의 인간성은 그가 하느님을 닮은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신성과 인간성은 일치한다. 신성이 인간성이고 인간성이 신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한 분에게만 실현된 진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서도 실현되어야 할 진리다.
나는 예수가 참 하느님이며 참 인간이라는 칼케돈 기독론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한다. 이런 새로운 이해의 핵심은 예수가 어떤 의미에서 우리 인간에게 하느님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대변한 <하느님의 아들>이었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다. 나는 예수가 후세 교회의 교리가 만들어 놓은 의미에서의 하느님의 아들, 즉 삼위일체의 제2격인 성자 하느님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고 확신한다. 예수는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지극히 존엄한 존재임을 가르치고 실천하신 분이다. 그는 하늘 아버지를 자신의 참 아버지로 모시고 산 사람이었고, 자신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그렇게 사람들을 대접하면서 살았다.
예수와 하느님의 합일은 니케아 회의나 칼케돈 회의가 제정한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적 신인합일, <본성과 본질상의 일치>는 아니었다. 예수는 그의 의지와 뜻, 행위와 삶, 의식과 인식, 사랑과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완벽한 <관계적 일치>를 이루고 사신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나는 동정녀 탄생 이야기나 하느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 사상도 본래는 예수와 하느님 사이의 본질상의 합일을 의미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만약 누군가가 예수의 신성을 거론하거나 그가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예수가 들었다면, 경건한 유대 청년 예수는 그것을 신에 대한 모독으로 느끼고 강하게 반발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성육신 개념의 이해
그러면, 예수는 과연 어떤 존재였기에 이런 대변자 역할을 그토록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었을까 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그가 만약 우리와 같이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다면, 그는 결코 그런 삶을 살 수 없었을 것 아닌가? 이러한 문제의식이 결국 예수의 신성을 거론하고 인정하게 된 배경이다. 성육신 사상이나 칼케돈공의회에서 제정된 기독론은 모두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예수는 한 인격체(one person)지만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two natures)을 동시에 지닌 존재라는 칼케돈 기독론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아무리 교묘한 논리를 동원해서 설명한다 해도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성육신한 예수에게 문자 그대로 신적 본성이 있었다면, 예수는 반쪽짜리 '괴물' 인간이든지 아니면 인간의 탈을 쓰고 땅위를 걸어 다닌 신이고, 결국 우리와 같은 진정한 의미의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아무런 인간적 고민이나 노력도 없이 모든 일을 성취했을 것이며, 십자가를 앞에 두고 보였던 그의 인간적 고뇌와 절규도 일종의 ‘쇼’에 불과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그렇다, 신성과 인성이 한 인간 안에 제아무리 모순 없이 교묘하게 결합되었다 하더라도, 예수의 신성은 결국 그의 인간성을 무력화시킬 수밖에 없다. 그가 인간으로서 행한 모든 일은 바로 그의 신성 때문에 가능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 예수에게서 모든 공을 박탈해버리는 셈이며, 예수를 우리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의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당연한 결론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예수처럼 신이 아니니까! 실제로 복음주의자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이처럼 예수의 인간성을 무력화하고 희화화하는 전통적 기독론이다.
칼케돈 공의회의 기독론과 니케아 공의회의 삼위일체 신론의 기저에는 물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요한복음 1장의 성육신 사상이 깔려 있다. 그리스도교 사상사에서 이 성육신 사상이 지닌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나는 성육신 사상도 칼케돈공의회의 기독론처럼 전통적인 본성상의 신인합일로 이해하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사실 칼케돈 기독론은 성육신 개념을 더 다듬고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 성육신이란 하느님이 인간 예수가 됨으로써 그에게서 완벽한 신성과 인성의 결합 즉 신인합일(神人合一)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이해다.
“하느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라는 물음에 대한 교부시대 이래의 고전적인 대답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인간이 정말 신이 된다는 말인가? 인간의 죄를 강조하는 개신교 복음주의 신앙에 젖은 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하겠지만, 엄연한 정통 그리스도교 사상이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하지만, 엄격히 말해서 삼위일체의 제2격인 성자 하느님, 즉 로고스가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지 성부 하느님의 이야기는 아니다. 인간이 하느님이 되기 위해서라는 신화(神化)개념도 엄밀히 말해서 인간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뜻, 혹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뜻이지, 문자 그대로 인간이 하느님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완벽한 일치가 이루어졌듯이 우리 모두에서도 그와 같은 신인합일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예수에게 이루어졌다고 믿는 신인합일의 성격과 그 의미에 대한 전통적 해석이다. 우선, 전통적 성육신 사상에서는 신인합일은 전적으로 하느님 편에서 취한 행위의 결과지 인간 예수의 영적 자각이나 체험 같은 것과는 무관하다. 예수의 신성은 탄생의 순간부터 자동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인간 예수의 삶의 경험이나 노력과는 무관하게 하느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성육신의 신인합일은 또 예수의 타고난 본성에 근거한 것이기에, 오직 예수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기적이다. 인간 예수의 노력과는 무관한 신인합일, 다른 인간들에게는 불가능한 신인합일이 과연 모든 인간에게 의미가 있는 보편적 진리가 될 수 있을까?
어느 왕비의 슬픔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 사건은 높으신 하느님이 스스로를 낮추고 비운 자기 비하의 사건이고, 전능하신 하느님이 자신을 부정하여 우리와 같이 무력한 인간이 된 사건이다. 성육신은 하느님의 자기부정, 자기 비움, 자기초월로서, 그의 사랑의 표현이고 결과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러한 성육신 사건의 의미를 하나의 감동적 이야기로 설명한다. 어느 왕비가 있었는데 사고로 한쪽 눈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왕비는 이 때문에 왕의 사랑을 잃을까봐 근심에 싸여 있었는데, 왕비를 지극히 사랑하던 왕은 왕비를 달래고자 묘안을 생각해냈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한쪽 눈을 뽑은 다음 왕비에게 나타나 말하기를, “보시오, 나도 당신과 같아졌소.” 라고 하면서 왕비의 슬픔을 달래주었다는 이야기다.
성육신은 하느님이 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어서 우리 인간과 같아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성육신은 하느님이 자신을 낮추어 인간성을 취한 사건으로서, 이로 인해서 단지 예수 한 사람의 지위만 높아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지위가 함께 높아지게 되었다는 것이 전통적 견해다. 예를 들어, 한 집안에서 누군가가 출세하면 식구들 모두의 명예가 덩달아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에크하르트는 설명한다. 특히 고대나 중세 시대에는 사람, 사과, 책상, 삼각형과 같은 보편 개념들(universals)이 구체적인 개별자들보다 더 우선하는 실재라는 사고가 지배했기 때문에, 하느님이 보편적 인간성을 취해서 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인간 모두에 해당되는 보편적 사건, 보편적 진리로 이해했다.
하지만 중세 말부터 이러한 실재론(realism)적 사고가 설득력을 잃어가면서 - 실재하는 것은 오히려 개채들 즉 개별 사물들뿐이고 보편자들은 추상적 이름에 불과하다는 윌리암 오캄의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을 필두로 해서 - 성육신의 보편성은 오늘날 실감이 나지 않는 추상적 관념이 되어 버렸다. 더욱이 예수의 탄생은 한 개인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성육신 사건이 예수의 신성은 담보할지언정 모든 인간에게 신성을 부여한 사건은 아니다. 성육신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예외적인 개별적 사건, 즉 기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 일반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인합일이 인간 모두에 해당하는 보편적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성육신 이해와는 다른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미 대리인/대변인 예수의 역할을 논하는 가운데 예수에게서 실현된 신인합일의 성격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즉 그것이 본성상의 합일이기보다는 관계적 합일이라는 것, 굳이 신성과 인간성의 개념을 사용한다면 예수에게는 그의 신성이 그의 참다운 인간성이며, 그의 인간성이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진리가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인간 모두에게도 타당성을 지닌다고 믿는다. 조금 후에 이 문제를 더 상세하게 논할 것이다.
어쨌든, 성육신이 예수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예외적 사건이라 해도, 그것이 예수에서 실현된 신인합일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될지는 의문이다. 성육신은 전통적으로 하느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일으킨 기적으로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느님이 성육신 사건을 통해 인간성을 취했다 해도, 예수의 인간성 자체에 신성을 수용하고 발휘할 만한 능력 내지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리고 실제로 그런 능력을 발휘한 그의 삶이 없었다면, 예수에게 주어진 신성은 예수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우리와 같은 사람들 모두에게도 추상적이고 공허한 사건일 뿐이다. 초자연적 기적이지만 무의미한 기적이다.
그렇다면 첫째, 예수가 신성을 수용하도록 한 인간성, 우리 모두에게도 의미 있는 인간성은 무엇이며, 둘째, 예수는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 어떤 삶을 통해 실제로 신인합일의 경지에 도달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첫째 문제는 기독신앙의 이해에 토대가 되기 때문에 다소 상세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인간: 하느님의 모상
나는 성육신을 통해 예수에게 주어진 신성을 그가 신성을 수용하고 발휘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인간성이라고 보며, 이 인간성은 물론 우리 모두의 보편적 인간성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 모두의 본연의 성품, 성리학에서 말하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같은 인간의 본성이다. 아담 이래 우리 모두가 본성으로 타고나는 하느님의 모상이다.
하지만 나는 이 본성을 결정론적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에 내재하는 어떤 성향(inclination) 내지 능력(capacity)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타고나는 하느님의 모상은 하느님의 아들이 지닌 완성된 신성이기보다는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가능성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타고난 가능성으로서의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본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 알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성향과 능력으로서의 <영성>이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는 성향과 능력으로서의 <도덕성>이다. 하느님의 모상은 또 무엇보다도 이러한 영적, 도덕적 성향과 능력을 <자각>하고 <자유> 가운데 실현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타고난 능력을 가리킨다. 이러한 영성과 도덕성의 성향과 능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원천적으로 죄를 못 짓도록 하는(non posse peccare) 결정론적인 힘이 아니라, 죄를 지을 수도 있고(posse peccare) 안 지을 수도 있는(posse non peccare) 자유에 기초한 성향이고 능력이다.
자유는 진정한 영성과 도덕성의 필수 조건이다. 강요된 영성과 강요된 도덕성은 진정한 영성도 도덕성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에 기초한 인간 본연의 성향과 능력으로서의 영성과 도덕성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아무리 많은 죄를 짓는다 해도 결코 파괴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아우구스티누스나 루터 같은 신학자들과 달리, 현실적 인간이 모두 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지의 예속성>을 믿지 않는다. 또 이와 밀접하게 연관된 <원죄설>도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의 신성이 죄를 지을 수 없는 본성적 필연성이 아닌 것처럼, 나는 우리의 현실적 인간성 역시 죄의 본성적 필연성을 뜻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본성이든 유전이든, 선이든 악이든, 나는 결정론적으로 이해되는 성선설이나 성악설 같은 것은 인정할 수 없다.
여하튼 나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나 성육신 사건이 ‘사실’이라 해도, 예수가 이러한 온전한 인간성, 즉 자유 가운데서 하느님의 아들 됨을 자각하고 실현할 수 있는 성향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임을 말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예수가 처음부터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완벽한 존재, 그야말로 ‘죄를 지을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또 예수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로 보았을 때 역시, 우리가 <실제로>(de facto) 하느님의 아들답게 사는 존재이기보다는 그렇게 살 수 있고 <될 수 있는> 가능성 내지 능력을 본성으로 가지고 태어난 존재라는 것, 즉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임을 의미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실제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존재들임을 뜻했다고 본다. 예수 자신이 이러한 구별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예수가 다소 모호하게 사용한 하느님의 아들 개념에 두 가지 뜻, 즉 사실과 당위로서의 의미가 함께 있다고 믿는다.
예수는 우리 모두가 하늘 아버지를 모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 자기 형제자매라고 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에게 직설법적(indicative)인 의미, 즉 “We are”라를 뜻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실제로 그렇게 되라고 촉구하고 명하는(imperative) 의미, 즉 “We ought to be”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둘의 의미를 굳이 구별하자면, 전자는 가능성의 의미, 즉 타고난 성향과 능력이라는 면에서 우리 모두가 본래적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후자의 측면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뜻이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이해처럼, 그에게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니(not yet)의 긴장 속에 있는 진리다. 인간은 영적/도덕적 성향과 능력을 본성으로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이런 뜻에서 하느님의 자녀지만, 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현실적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산다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명령법 아래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영적, 도덕적 가능성을 본성의 성향과 능력으로 갖추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자신의 본성을 망각하고 배반하는 죄를 지으며 산다. 하지만 우리의 죄가 우리의 본래적인 영적, 도덕적 능력으로서의 인간성을 파괴하지는 못한다. 우리의 본성이 죄로 덥히고 손상될 수는 있지만, 영적으로 살고 싶은 성향과 도덕적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법은 없다. 죄는 결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 도덕적 성향과 능력을 파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를 짓도록 결정되어 있는 존재도 아니고 죄를 짓지 못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존재다 아니다. 우리의 도덕적, 영적 가능성으로서의 본성적 성향과 능력은 본성적 자유 가운데서 행사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모상은 하느님이 인간 영혼에 찍어놓은 인장과도 같아서 결코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본성상 하느님의 모상이며 하느님의 자녀다.
예수는 죄를 지을 수 없는 분?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은 우리가 죄를 지을 수도 짓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말이다. 이는 예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예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의 유혹을 받았으며,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자유로운 존재였다. 예수와 우리의 차이는, 우리는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만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런 점에서, 우리와 같이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인간 본연의 영성과 도덕성의 성향과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일 뿐 아니라, 실제로 그 능력을 완전하게 발휘함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고>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로 사신 분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 모두도 본성상 이미 하느님의 아들로 살 수 있는 능력을 가능성으로 가진 존재이며, 동시에 그렇게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신 분이다.
예수는 무엇보다도 하늘 아버지를 모시고 철저하게 자신을 비운 삶을 산 하느님의 진정한 아들이었다. 하느님의 ‘효자’였다. 첫째 인간 아담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하느님의 모상을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의 죄를 범하는 데 오용했다면, <두 번째 아담> 예수(롬 5:12-14)는 오히려 하느님의 모상으로 부여 받은 자유를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낮아지는 데(kenosis) 사용하심으로써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룬(빌 2:4-11) 새로운 존재(new being)였다.
예수의 신성은 그가 원천적으로 죄를 범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이 아니라, 죄를 범할 수 있는 자유에도 불구하고 범하지 않은 완전한 사람임을 가리킨다. 예수는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무죄성(sinlessness)의 교리 역시 예수가 죄를 범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죄를 범할 수 있지만 우리와 달리 하늘 아버지와의 강력하고 지속적인 연합과 자기 비움을 통해 죄를 범하지 않는 새로운 인간, 참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그의 신성과 무죄성의 참 의미며, 이것이 그가 이룬 진정한 신인합일의 의미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수의 신성은 그의 인간성을 무력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가 참사람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실현함으로써 그의 인간성을 <완성>했음을 가리킨다. 예수의 신성은 유혹을 받을 수 있고 죄를 지을 수도 있는 그의 인간성을 폐기하거나 원천적으로 무력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의 인간성을 실현해주고 완성해 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신성은 그의 완전한 인간성이다.
이런 사실을 좀 더 철학적 개념을 빌어 표현하면, 우리에게는 죄로 인해 본래성과 현실성, 본질과 실존 사이에 괴리와 소외가 존재하는 반면, 예수는 본질과 실존이 완전히 일치하는 새로운 존재, 새로운 인간이 <된> 사람이라는 말이다.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 모두 ‘되어가는 그리스도’며, 그리스도는 ‘다 된 인간’, 즉 인간성을 제대로 발휘하고 완성한 인간이다. 죄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괴리와 분열을 가져와 인간을 하느님으로부터 소외시키며, 인간 내부적으로는 본질과 실존 사이의 괴리와 분열을 일으키고 인간의 자기소외를 초래한다. 이렇게 하느님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인간들은 동시에 서로 소외되고 분열된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의 자기 비움, 인간의 자기 비움
다시 성육신과 신인합일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인간 예수의 삶을 무시한 성육신이나 신인합일은 우리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는 추상적이고 공허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의식한 예수의 깊은 자각과, 온갖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자신을 비워 죽기까지 하늘 아버지께 순종한 그의 삶을 도외시한 추상화된 교리적 성육신 개념은 인간 예수의 구체적 모습을 사상해버린 잘못된 성육신 이해다. 인간 예수의 인격과 행위와 삶을 오직 그의 동정녀 탄생과 성육신 '사건'의 기적으로 주어진 신성에 돌리는 것은, 예수의 진정한 인간성과 그가 인간으로서 행한 모든 사역과 성취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성육신 이해는 예수에서 이루어진 진정한 신인합일을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무의미하다.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는 성육신 자체가 설명해야 할 신인합일을 이미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이유는, 예수의 진정한 인간성을 도외시함으로써 우리와 같은 인간에게 지니는 가능성과 희망을 앗아가는 공허하기 짝이 없는 신인합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기부정은 인간의 자기부정과 만나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신인합일이 될 수 없다. 예수에게도 우리들에게도 그렇다. 신인합일이 예수 자신의 경험이 되고 우리 모두의 가능성이 되는 의미 있는 진리가 되려면, 적어도 복음서들이 전하고 있는 인간 예수의 아빠 하느님 신앙과 삶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예수의 신인합일은 하느님의 자기 비움 못지않게 인간 예수의 자기 비움의 삶이 수반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례자 요한에게 나아가기까지 그가 겪었던 고뇌와 고민, 방황과 좌절, 기도와 금식 등 배움과 성장의 과정과 수행의 노력을 통해 얻은 그 자신의 경험적 진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의 신인합일은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자각하고 모든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로 인식하고 산 그의 삶의 <결과>지, 탄생과 더불어 자동적으로 주어진 <완결된 사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의 성욕신과 신인합일은 탄생과 더불어 <단박에> 주어진 기적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통해 <점차적으로> 실현된 것이었다.
보편적 성육신
성육신 사건이 몇 백번 일어난들 우리 영혼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은 불경한 언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말이다. 그렇다, 성육신의 신인합일을 인간 예수의 노력 없이 단지 하느님 편에서 일방적인 자기부정을 통해 이루어진 사건으로만 보는 견해나, 오직 예수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예외적 사건으로 보는 견해나 모두 불충분하고 무의미하기는 마찬가지다. 신인합일의 성육신은 우리 모두에 내재하는 성향과 능력에 기초하는 우리 모두의 본성적 가능성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에게서도 실현될 수 있고 실현되어야만 하는 보편적 진리다. 우리 모두가 자기 비움과 자기 부정의 수행과 노력을 통해서 우리 영혼에 하느님의 아들을 탄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은 모두 본래부터 하느님의 아들/딸이라는 것, 그리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할 존재라는 것이 예수 자신이 대담하게 선언하고 실천하신 진리임을 기억하자. 성육신은 우리 모두의 보편적 사건, 우리 모두에게서 실현되고 확인되어야 할 보편적 진리다.
우리는 성육신의 보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야를 좀 더 넓혀서 하느님의 자기 비움과 자기비하를 근본적으로 다시 조명하고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하느님의 자기 비움은 단지 예수에게서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자기부정과 자기 비움은 그가 자신의 넘쳐흐르는 존재와 선을 온 피조물에게 나누어주는 창조의 과정 전체를 통해 일어나는 현상이며, 사랑의 하느님 자신의 본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자신을 부정하고 비우는 창조주 하느님의 성품 자체에 기인하는 보편적 성육신의 일환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보편적 자기부정, 자기제한, 자기초월은 138억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경과한 진화적 창조의 과정을 통해 출현한 인간 존재에 이르러 첫 번째 정점에 도달했다. 하느님의 자기 비움은 자신의 모상을 지닌 인간의 출현과 더불어 질적으로 심화되었다. 하느님이 자신의 존재와 생명뿐 아니라 자신의 존엄성과 자유까지도 인간과 나누었기 때문이다. 자유가 있기에 선과 악이 가능한 존재, 자유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찾고 그의 뜻을 따를 수도 있고 어길 수도 있는 불확실한 존재 인간의 출현은 실로 하느님으로서는 일대 모험과도 같았다. 인간은 바로 이러한 모험의 산물이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비워 하느님께 순종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자기 비움과 자기부정의 극치를 보인 존재다. 그는 철저한 자기 비움을 통해 하느님과 완벽한 일치를 이룬 새로운 존재, 새로운 인간으로서, 바울이 말하는 ‘두 번째 아담’이다. 하느님은 자기 비움을 통해 인간이 되었고, 예수는 자기 비움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이 되셨다. 이것이 그에게서 실현된 진정한 신인합일이며, 동시에 모든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고 의미다. 이러한 신인합일을 이룬 예수에 이르러, 138억년에 걸친 우주와 생명의 기나긴 진화적 창조의 과정은 두 번째 정점이자 그 꼭지 점을 찍었다는 것이 기독신앙의 관점이다.
물질에서 생명이 출현하는 장구한 진화적 창조 과정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영적 존재,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갖춘 인간 존재의 출현에서 일단 정점에 이르렀다. 나는 우주 138억년의 진화적 창조의 엄청난 진통 끝에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호모 사피엔스)이 출현했다는 사실이 2000년 전에 일어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나 성육신 사건보다도 훨씬 더 놀라운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전개된 인류 역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출현한 인간이 본성으로 주어진 영적, 도덕적 성향과 능력을 완벽하게 구현함으로써 진정한 신인합일을 이룬 참사람 예수에 이르러서 창조의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 데서 또 하나의 꼭지점을 찍었다. 예수에서 실현된 신인합일은 전 진화적 창조 과정의 종점이며, 인류 역사의 궁극적 목적이고 의미다. 진화적 창조의 전 과정은 결국 한 마디로 말해서, 하느님이 인간 영혼에 자기 아들을 낳기 위한 진통의 역사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대로, 하느님은 왜 인간이 되셨냐는 고전적 물음에 대한 현대적인 답이다. 인간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말의 참 뜻이다.
누군가는 이에 대해 물을지도 모른다. 이건 시대착오적인 지구중심적 세계관이 아니냐, 철 지나고 용도 폐기된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냐고. 그렇다. 우리가 세계와 인생에 대해 '의미'라는 것을 묻을 수 있고 물어야만 하는 존재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생명체들 가운데서 의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의미, 목적 같은 개념 자체가 이미 인간이 사용하는 개념이고 인간만의 관심이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실로 특별한 존재이며, 인간중심주의는 불가피하다. 세계 138억년의 역사는 바로 의미를 찾고 물을 수 있는 존재 인간의 출현에 귀결되었고, 이러한 인간이 펼친 역사는 하느님을 닮아 신인합일을 이룬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하느님 아들의 출현에 귀결되었다.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뿐 아니라 세계 종교사에서 한 획을 그은 동서고금의 모든 성인(saint)도 인류 역사의 궁극적 의미며 목적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인류의 역사뿐 아니라 우주 138억년을 통해 이루어진 하느님의 진화적 창조 과정이 완성되는 때,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우주적 화해의 공동체를 신앙의 비전으로 가지고 있다. 인류의 역사뿐 아니라 우주의 진화적 창조의 전 과정이 완결되는 우주적 종말의 비전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new creation)의 비전이다. 이 새로운 창조야말로 인간의 출현과 성인의 출현을 넘어서서 우주와 역사의 전 과정을 완결하고 완성하는 최종 목적이며 종점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는 소소한 의미도 있고 거대한 의미도 있다. 인생의 소소한 사적 의미들에 관한 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나의 삶의 의미라고 말해도 오늘날처럼 개인주의 사회, 가치가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누가 뭐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인생 자체에 어떤 보편적 의미, 어떤 <거대 의미>를 묻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는 세계 자체의 성격에 관계된 문제이며, 또 신앙적 관점에서 보면 세계를 창조하신 하느님과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인간 존재의 출현,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을 실제로 완벽하게 실현한 하느님의 아들의 출현은 이러한 세계와 인생의 거대 의미를 묻는 물음에 대한 기독신앙의 답이다. 진화적 세계 창조의 과정은 결국 하느님이 자기를 닮고 자기와 하나가 되는 아들딸들을 낳기 위한 진통의 과정이다.
수행인가 은총인가?
그렇다면 예수는 과연 어떻게 해서 우리들과 달리 그토록 철저하게 자신을 비울 수 있었고 하느님과 그토록 완벽한 일치를 이룰 수 있었을까? 그런 힘이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전통적 성육신 개념은 물론 이에 대한 대답이었다. 예수는 처음부터 우리와 달리 신성을 가지고 태어난 분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분이었다는 말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추상적이고 단순한 논리에 동의할 수 없고 만족할 수도 없다. 도무지 공허하게 들리고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의 자기 비움과 신인합일을 단지 그가 타고난 신성에 돌리는 추상적이고 공허한 도그마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견해를 이미 누차 밝혔다. 인간 예수도 우리와 같이 죄를 질 수 있는 존재였지만, 그는 우리와 달리 죄를 짓지 않았다. 예수의 신성(神性)은 예수가 ‘죄를 지을 수 없는’ 성품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우리처럼 죄를 지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그의 자유로운 성품과 능력을 가리킨다.
예수도 우리와 같이 고민하고 아파했으며 방황하고 성장했다. 예수는 광야에서만 사탄의 유혹을 받은 것이 아니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길에서만 비틀거리고 쓰러지신 것이 아니다. 그가 광야에서 받은 마귀의 유혹과 시험의 이야기는 아마도 그가 청년 시절에 겪었던 수많은 정신적 방황과 시련이 압축되고 도식화된 형태로 전해지는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예수도 우리들과 같이 많은 방황 끝에 마침내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고 그 자신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개시했다. 이런 인간적 과정을 거치지 않은 신인합일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예수도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예수의 신성과 신인합일은 그의 삶의 과정 전체를 통해서 도달한 결과다.
나는 예수가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고 아빠 하느님의 효자로 살 수 있었던 사실을 전통적인 성육신 개념보다는 성령의 은총으로 이해하는 성령 기독론을 선호한다. 사실 복음서는 예수의 삶과 활동을 조명하면서 성령의 힘을 많이 강조하고 있다. 그의 잉태, 그가 광야에서 받은 시험, 그가 요한에게서 받은 세례, 하느님 나라의 복음 전파, 아빠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자비심, 수많은 치병 활동, 지혜의 말씀과 권위 있는 가르침, 기도와 금식, 십자가의 고난, 그리고 부활 등은 모두 성령의 힘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 기독론도 자칫하면 성육신 기독론과 유사한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성령의 힘을 예수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특별하고 차별적인 은총으로 간주하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노력 없이 주어지는 은총으로 여기는 견해다.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배타주의적인 편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육신의 진리가 유독 예수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듯, 성령의 힘도 유독 예수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하느님의 영 성령이 결코 특정인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할 수 없다. 성령이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는 주어지고 누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차별적 은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적어도 자신을 비우려는 진지한 노력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하느님의 영의 도움을 받는다고 나는 믿는다. 예수도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과 인간의 영적 노력을 배타적 관계로 볼 필요가 없고, 그렇게 보아서도 안 된다. 자기를 비우려는 인간의 노력이든 성령의 도우심이든 본질적으로는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성령의 은총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듯이, 자신을 비우는 영적 수행도 성령의 힘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수행의 노력과 성령의 도움이 언제나 함께 가고 함께 작용한다는 협동론(synergism)을 믿는다. 은총이냐 수행이냐를 묻는 것은 잘 못된 문제 설정이다.
우리나라의 성령 파 신자들, 특히 개신교 신자들 가운데는 영적 생활에서 인간의 노력을 도외시하고 성령의 은총만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많은 신자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못한다고 자신을 한탄하고 변명하는가 하면, 이렇다할만한 성령 체험이 없는 신자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나는 한국 그리스도교가 이제 이러한 ‘성령 콤플렉스,’ ‘성령 타령’을 과감하게 털어버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신을 비우고 포기하는 노력이 없는 자에게 성령이 어느 날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다는 것을 믿지 않으며, 진심으로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비우고 내려놓는 겸손한 신앙인에게 성령의 도움이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성육신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이 영적, 도덕적 성향 내지 능력을 실현한 결과로 도달한 신인합일이듯이, 성령의 도움 역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려는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보편적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성육신이 하느님의 자기 비움과 인간의 자기 비움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신인합일이듯이, 성령의 역사 또한 하느님의 모상으로 출현해서 예수처럼 자신을 비우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 모두에게 열려 있는 하느님의 도우심이다.
사실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령의 도움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주어지는 보편적 은총이라고 믿는다. 만물을 창조하고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생명의 영, 인간으로 하여금 이기적 자아를 극복하여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보편적 사랑의 하느님을 편협하게 만드는 일이고 비신앙적인 견해다. 하느님의 영의 바람은 결코 그리스도교의 울타리 안에 가둘 수 없다. 성육신이 모든 인간의 보편적 사건과 보편적 진리이듯이, 성령의 힘 또한 종교 간의 장벽을 넘어서 자기 비움의 수행을 통해 신비적 합일(unio mystica) 또는 신인합일을 추구하는 세계의 모든 구도자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지금도 세계 각처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수많은 작은 그리스도들 모두에 주어지는 보편적 은총이다.
*원장 글 모음방에 이 글이 누락되어 있는 것을 알고 늦게나마 올립니다.
3년 전 크리스마스 날에 썻던 글로, 심도학사 회원들과 나누고 싶어 올립니다.
복된 성탄절과 기쁜 새해를 맞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첫댓글 늦게나마 읽게되어 기쁨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인간의 참모습을 이룬분이 예수그리스도이니. 모든인간은 종교를 떠나서. 참인간 곧 신의형상을 회복한 본보기인 예수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에 역점을 둔다면 기독교도 진일보 할수 있겠단 생각도 드는군요.
그리스도가되신 예수님처럼 인간은 신이 되어야 하는데 타락하여 정신을 소유한 존재밖에 못됐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하나님의 맏아들이되셨듯이 우리는 그뒤를잇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