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신대원에 다닐때, 읽었던 글인데, 도움이 될 것같아서 올립니다. 예정론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정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출처 : [목회와 신학]1995.6월호
김명용 / 장신대교수
오늘은 예정론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어려운 문제죠. 하여간 공부해 봅시다.
예정론은 전통적으로 크게 두 개의 기둥으로 구축되어 있는 신학적 체계입니다. 이 두 개의 기둥은 선택의 교리와 유기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이 선택과 유기는 모두 창세 전에 일어난 인간의 참여없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결정된 하나님의 결의인데, 이 결정대로 예정된 자는 예수를 믿어 구원받고, 유기로 작정된 자는 예수 믿는 데 실패하고 결국 멸망을 당한다는 교리입니다.
그런데 이 예정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수많은 반대에 부딪혀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반론들을 언급하면 이렇습니다. 그 첫째로 예정론은 운명론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모순된다는 반론입니다. 또한 예정론에 의하면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가 된다는 주장이 있고 예정론은 노력하려는 인간의 모든 동기를 낙심시킨다는 이유로 반대하기도 합니다. 또한 예정론은 개인을 불공평하게 대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예정론은 선한 도덕에 비호의적이다는 것이고 진지하게 복음 전하는 것을 막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예정론은 보편구원을 가르치는 성경구절과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정론은 잘못된 교리일까요, 여러분! 상당수의 사람들은 예정론은 사변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과연 예정론은 복음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 만든 어떤 추상적인 사변에 불과할까요?
그런데 20세기의 최대의 신학자로 알려져있는 칼 바르트(K. Barth)는 예정론은 사변이 아니고 복음의 총화라고 주장했습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정론은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복음의 핵심인데 이것이 전통적 예정론에서는 잘못 가르쳐져서 그 핵심이 상당부분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르트가 비판한 전통적인 예정론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그가 말하고자 했던 예정론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칼 바르트의 예정론의 중요 내용
20세기 신학의 불후의 업적을 남긴 바르트는 예정론에도 불후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1936년 헝가리와 루마니아 지방을 방문하면서 데브레센(Debrecen)과 클라우젠부르크(Klausenburg)에서 행한 예정론에 관한 그의 유명한 강연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Gottes Gnadenwahl)"에서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빈, 베자로 연결되는 전통적인 예정론은 이미 규정된 운명만 강조되는 기계적 예정론으로 인간을 향한 회개에로의 진지한 부름을 해치고 있고 이에 상응하는 현존하는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을 해친다고 비판했습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예정을 고정된 어떤 체계로 바꾸는 것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복음 전파의 절박성이 희생되는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바르트는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사람 곁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개혁교회 목사를 비꼬는 반칼빈주의적 만화를 이 유명한 강연에서 예로 들면서 복음전파의 절박성이 희생되는 예정론의 오용을 경고했습니다. 1936년의 이 유명한 강연에서 드러난 바르트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예정된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저주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이 우리의 예정의 확실한 보증입니다. 바르트는 1936년의 강연에서 하나님의 예정을 믿음의 사건으로 규정하는. 예정론에 있어서의 획기적인 발전을 시도했습니다.
1942년 바르트는 그의 교의학 제 2권 2(KDⅡ,2)를 출간시키면서 예정론에 관한 새로운 거대한 신학적 체계를 발표했습니다. 1942년에 발표된 그의 예정론은 예정론의 역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업적이었습니다. 이 기념비적인 업적은 예정론을 은총의 총화로 이해한 것과 예정론을 믿음의 사건으로 이해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1942년 그의 교의학 제 2권 2에 발표된 그의 예정론의 핵심적인 내용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찾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찾아진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고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영원 전에 일군의 무리를 지옥에 가도록 예정한 그런 하나님은 없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들의 이빨가는 소리가 하나님의의를 찬양한다는 가공할 만한 교리는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찾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 가공할 만한 교리를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로 변호하고 미화하면 안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영원 전에 일어난 하나님의 예정은 먼저 하나님의 자기규정(Selbstbestimmung Gottes)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기로 작정했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나신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십자가에서 계시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 죄의 형벌을 대신 지시고 심판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십자가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이 극명하게 계시됐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버리기로 작정하는 전통적 예정론의 어두컴컴한 하나님의 결의는 십자가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는 인간을 버리기 위한 결의가 아니고 영원한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선택하시기 위한 결의였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을 참고하세요.
셋째로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본질이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행위는 없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자유도 사랑을 행하는 자유이지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과 위배되는 일은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군의 무리를 지옥으로 예정하는 천상의 폭군은 폭군일 뿐이지 십자가에서 계시된 자비로운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넷째로 하나님의 이중예정은 십자가의 사건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을 선택하시고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교회교의학 제 2권 2의 예정론에서 바르트에 의하면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단 한 분 버림받으신 분(Der einzige Verworfene)' 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시고 대신 인간을 선택하시고 인간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자들은 현실적으로 선택된 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선택은 믿음을 통해 구현화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은 고정된 체계가 아니고 지금 일어나고 구현화되고 있는 사건입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영원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한 하나님의 선택은 시간 속에서 만남을 통해 구현화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은 믿음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믿는 자들은 선택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역사 속에는 버림받은 자들이 존재합니다. 이들의 존재는 하나님이 버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언제나 은총이고 선택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의 하나님의 행위는 두 개의 결과를 초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은 믿음의 사건을 필요로 합니다. 이 믿음의 사건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곳, 즉 하나님의 자비로운 부르심이 거부당하는 곳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폐기된 버림의 그늘이 존재합니다. 이 그늘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상과 같은 바르트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예정을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동떨어진 어떤 추상적이고 어두컴컴한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결의에 그 기초를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가 명백하게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경륜을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는 많은 성경기자들의 사상과 상응하는 신학적 관점으로 큰 의의가 있습니다.
예정론은 바르트라는 거대한 신학자를 통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예정론으로 그 방향이 크게 선회하는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바르트의 예정론은 예정론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하고 이것을 복음의 총화로, 믿음의 사건으로 이해한 점에서 큰 공헌을 남겼습니다
예정론에 대한 바른 신학적 이해
한국교회는 잘못된 예정론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로 말미암아 피해도 상당히 심각하다고 생각됩니다. 장로교회 성도들 가운데 일부는 전도할 때 예정론을 전해서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정론은 과연 무엇을 언급하고자 하는 교리일까요?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이중예정 교리는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의 토기장이 비유는 무시무시한 이중예정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로 작정하셨다는, 그래서 이방인을 선택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을 위한 말씀입니다.
전통적인 예정론은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이중예정을 위한 성경적 근거로 로마서 9장의 토기장이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토기장이의 비유는 일군의 무리를 지옥으로 예정했다는 잘못된 예정론의 근거로 사용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임에는 틀림없지만 로마서 9장을 쓴 바울은 일군의 무리가 지옥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비유를 저주의 백성이었던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전적으로 그분의 주권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삼기로 작정했다고 해서 감히 하나님을 힐문할 수 있느냐는 의도의 비유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 본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아닌 자를 자기 백성으로 부르시기로 작정했는데 이에 대해 아무도 항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녀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예정하시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된 약속의 자녀로 작정했다고 해서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로마서 9장을 쓴 바울의 의도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9장은 전통적 예정론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무시무시한 이중예정을 전하려는 본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되고 영원한 예정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민을 구원하고자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본문입니다.
로마서 9장의 내용을 더욱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초대교회가 처해있었던 매우 중요한 문제를 깊이 고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초대교회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심각하게 직면해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돼 있는 욥바 성에서 베드로가 경험한 환상은 이 문제의 중요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환상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큰 보자기 속에는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나는 것들이 들어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속되고 깨끗치 않는 것은 먹을 수 없다고 버티고 있었고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는 하나님께서 깨끗케 한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면 안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직후에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접하게 되었고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는 성령이 고넬료를 비롯한 이방인들에게 임하는 것을 똑똑히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세요.하여간 이 사건은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 사건이 계시될 필요가 있었고 또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것을 왜 길게 보도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너무나 파격적인 일이었고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일이었고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주권적 결단에 기인한 것으로 특별히 오랫동안 선민사상에 젖어있었던 유대인들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바로 이 하나님의 주권적 결단에 기인한 파격적인 은총의 사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결단에 따라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로마서 9장 12절을 보세요 그분이 그렇게 하셨다고 해서 아무도 그분의 주권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토기장이의 주권에 전적으로 속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 20절과 그 다음절을 묵상해보세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분의 주권으로 이방인들을 사랑하기로 작정했다고 해서 누가 감히 하나님을 반문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에 의하면 이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육신의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믿음으로 태어나는 약속의 자녀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 6절에서 8절을 볼까요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김을 받느니라." 또 로마서 9장 24절과 25절을 봅시다. 누가 읽어주세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아닌 자를 자기 백성으로 부르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백성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는데 육신의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약속에 의해서 생겨나는 새로운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지만 그러나 바로 이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이 하나님의 주권적 결단에 의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이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 내용은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에 의해 일어난 은총의 사건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고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의 그릇으로 삼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로마서 9장 뒷부분과 로마서 10장에 걸쳐 자세히 기록돼 있는 것입니다. 한 번 볼까요 9장 30절을 봅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또 9장33절을 보죠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10장 4절도 읽어봅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또한 6절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이라고 시작됩니다.
바울에 의하면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받는 길은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하나님 자신에 의해 이룩된 놀라운 구원의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의 몇 절을 봅시다. 11절에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또 9절에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니라"라고 적혀있습니다. 13절 한 군데를 더 볼까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로마서 9장에서 10장은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이중예정을 전하기 위한 본문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본문입니다. 이 본문은 운명론적이고 기계론적인 예정론을 뒷받침하는 본문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결단을 호소하는 본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된다는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은총의 총화를 전하는 본분인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바르트의 예정론은 전통적 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보다 바울의 정신에 더 깊이 접맥되어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예정론은 복음의 총화라는 주장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정론은 복음의 총화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지옥에 갈 사람의 명단을 작성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고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살리기 위한 위대한 역사를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작정된 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자비를 의미하는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건지는 위대한 역사를 영원 전에 이미 예정하고 계셨습니다. 영원 전에 일어났던 이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통해 만민의 죄를 담당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정론의 핵심은 복음이고 복음의 총화가 예정론입니다. 즉 예정론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는 에베소서 1장 4절과 5절의 복음중의 복음을 전하려는 교리입니다. 예정론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속죄함을 주시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설명하는 교리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과 9절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그 다음으로 예정론은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는 교리라는 바르트의 지적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정론에 대한 매우 잘못된 이해는 예정론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해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해치기 위한 교리가 아닙니다. 예정론은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려는 데 핵심이 있는 교리입니다.
에베소서 1장 1절이 언급하는 그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정을 입었습니다. 이 예정은 에베소서 1장 13절에 의하면 “구원의 복음을 듣고" 또 “믿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 구현됩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예정이 구현되는 것은 운명론적으로 기계적으로 일어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통적 예정론은 이 과정을 거의 운명적으로 또 기계적으로 설명했는데 바로 그곳에 근본적인 잘못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예정이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알기 위해 다음의 예를 생각해봅시다.
어떤 초라한 시골에 한 처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덕망있고 용모가 수려해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그 나라의 왕자가 이 처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처녀를 사랑하게 된 왕자는 임금님과 의논해서 이 처녀를 아래로 맞이하기로 했습니다. 어느날 왕자는 이 초라한 시골로 그 처녀를 찾아가서 사랑을 고백하고 왕궁으로 갈 것을 청했습니다. 이때 이 처녀는 어떠한 반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왕자의 청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왕궁으로 따라가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자의 청을 거절하고 왕자에게 무안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거절당한 왕자는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격과 덕망이 높은 분이기 때문에 처녀를 기다리며 계속 그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는 동안 마침내 처녀는 왕자의 사랑에 감동하고 그의 인격과 수려한 용모에 사로잡혀 왕자를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 왕자의 아래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처녀가 왕자비가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처녀가 어느 날 결정을 잘했기 때문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처녀에 대한 선행하는 왕자의 사랑과 왕궁에서 작정된 결정 때문입니다
예정론은 바로 이처럼 선행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전하려는 교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어느 날 우리가 결정을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고 찾아오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선행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부르심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 예정론입니다
이번에는 예정론은 신앙의 우연성과 무상성을 반대한 교리라는 바르트의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에 의하면 예정론은 신앙의 우연성. 독일어로 쭈펠리그카이트(Zufaelligkeit)와 무상성, 즉 힌펠리그카이트(Hidaelligket)를 반대하는 교리입니다. 예정론은 우리의 신앙이 기계적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기계론적인 관점에서 언급되면 절대로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그 근원에서부터 파괴하는 심각한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예정론은 우리가 우리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 신앙을 갖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리의 우연한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님을 밝히는 교리입니다. 즉 선행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 때문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은총의 부르심 때문에 결국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는 교리입니다.
예정론은 결코 우리의 신앙이 우연한 것이거나 원래 우리 안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히는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 안에 근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예정은 결코 기계론적으로 발행하는 어떤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의 불가항력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기계적인 수수작용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앞서 언급한 비유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불가항력적 은혜란 왕자의 사랑의 깊이의 불가항력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왕자의 사랑이 너무나 지극하고 깊기 때문에 이 사랑이 너무가 불가항력적이기 때문에 마침내 그 처녀는 그 사랑에 감동되어 자신의 자유의지로 왕자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또한 예정론은 신앙의 무상성을 반대하는 교리입니다. 전통적 예정론에서 강하게 강조되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개념도 기계론적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성도의 견인이란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음’을 표현하는 교리입니다. 몰트만에 의하면 예정론은 신앙의 우연성과 무상성을 반대하는 교리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성을 표현하는 교리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과 39절을 봅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예정론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성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성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무상하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정론은 우리에게 어떠한 위급한 상황이 닥친다 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실 것이라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표현하는 교리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성에 대한 표현이 전통적 예정론에서 기계론적 경향을 많이 나타내게 된 게 잘못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명용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신학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그는 일반대학에서 공부한 다음 신학을 하라는 지도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해 서울대 영문과(B.A)를 나와 장신대(M. Dlv., Th.M)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이어 독일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의 장학후원으로 튜빙겐대학교 신학부(Dr. theol.)에 입학,위르겐 몰트만 밑에서 공부했고 칼 바르트의 신론에 관한 논문을 씀으로 5년 동안의 유학을 마감했다. 1985년에 귀국한 뒤로는 줄곧 장신대에서 교회론, 종말론, 칼 바르트신학, 현대신학 등을 강의해오고 있다. 자신의 신학 선생으로는 한국에서는 이종성 박사를, 독일에서는 몰트만을 꼽고 싶다고, F. D. 부르너의 「성령신학」 큄멜의 「약속과 성취」 등을 번역했고 “예수의 십자가형은 정치형인가" 등의 논문을 써왔던 그는 지금 연구학기를 갖게 돼 학교 강의를 쉬면서 미국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톤에서 연구에 몰입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