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신의 난(1352년)과 본 안우
공민왕 즉위
1351.12 공민왕 즉위. 왕과 공주가 원(元)으로부터 이르렀는데, 황제가 시투르태자를 보내어 보호하면서 가도록 하였다. 경령전에 배알하고 강안전에서 즉위하였다.
1352년 조일신의 난 (제2의 부원배 조일신)
1월 1일: 공민왕은 정동행성에서 신년하례 거행하다.
행성의 최고품계는 평장정사(정2품)이지만 공민왕은 원나라 승상의 대우를 받음.
6월1일; 원나라 호종공신 조일신 등 36인에게 녹훈하다
(응양군상호군 김용, 판시복시사 차포온, 대호군 정세운, 중랑장 목인길 포함)
참고) 조일신은 원간섭기의 약한 왕권을 좌지우지하려는 제2의 부원배이다. 기황후를 배경에 두고 설치는 제1의 부원배 일당인 기철세력을 제거하고 왕정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고 싶어했다.
9월 29일: 조일신이 그 일당인 정천기와 최화상, 장승량을 모아서 기원(奇轅)을 죽이고 시어궁(時御宮)를 포위하여 숙위(宿衛)하던 판밀직사사 최덕림 등 여러 명을 살해하였다.
9월 30일: 조일신이 왕을 협박하여 어인(御印)을 꺼내 자신을 우정승으로 임명하게 하고 그 일당인 정천기 등에게 차등을 두어 관직을 주었으며 또 의성창(義成倉)과 덕천창(德泉倉)을 봉쇄하였다. 왕과 공주가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호위군사가 매우 적었고 수행하는 자들은 모두 적당의 무리이기에 나라사람[國人]들은 왕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날 밤에 공주가 몰래 태비의 시어궁(時御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10월 1일 10월 조일신이 자신의 지나친 행동이 지탄을 받을까봐 최화상을 살해하고 왕에게 권하여 장승량 등 8~9명을 참수하여 저자거리에 효수하였다.
10월 2일: 송서를 우정승으로, 조일신을 좌정승 판군부감찰사로 임명하고 찬화안사공신의 호를 더 주었다. 홍언삼사사) 유탁·정을보·조유(찬성사), 김보·김일봉·최천택(평리), 강득룡·홍원철(삼사우·좌사), 안진(정당문학), 김신(지도첨의사사), 강지연(첨의평리상의), 한가귀(판개성부사), 유진(밀직사), 강천유(지밀직사사(), 고충절·이성서·황순(동지밀직사사), 김구년(밀직부사상의), 이종·홍개도·손불영(밀직부사(), 이제(밀직제학), 김규·신집(개성윤), 임군보(밀직사지신사), 전대유·원송수(우·좌대언), 이군상·박희(우·좌부대언).
10월 3일 왕이 단양대군 왕후(王珛)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10월 5일: 왕이 행성(行省)에 행차하여 조일신을 베어죽이고 그 일당인 정을보와 이권, 나영걸, 고충절, 이군상 등 28명을 가두었다.
참고) '최영장군 약전'을 보면 최영, 안우, 최원등이 반도들을 토벌하였다고 나옴. 최영관련 기록은 당대의 기록임으로 정확하다고 추정됨.
10월 6일: 이제현 등 20인을 임명하다. 이제현(우정승), 조익청(좌정승), 유탁(판삼사사), 홍언박·김승택(찬성사), 조유(도첨의평리), 이공수(삼사우사), 문백·김광현(동지밀직사사), 김용·최원·박수년(밀직부사), 안보(밀직제학), 김규·전대유(우·좌대언), 원송수·김광리(우 · 좌부대언), 홍탁(회원현령), 정을보(광양감무), 이권(제주목사)
10월 12일: 고중서 등 7인을 임명하다. 고중서(개성윤), 이달충·전보문(전리판서), 차포온·안우(군부판서), 이에센테무르·허희(판도판서).
참고) 군부판서 임명 이유
- 군부판서는 문관 1인과 무관 1인이며, 안우는 무관이므로 군부판서 응양군상호군.
- 역사학자들은 조일신란에서 김용이 호위업무를 회피하는 바람에 큰 위협을 느낀 공민왕이 군부에서 가장 신뢰성이 높은 안우장군을 군부판서 응양군상호군으로 임명한 것같다고 평가함.
10월 18일: 원에 한가귀를 신년하례 하정사로 보내다.
11월 16일: 밀직부사 박수년을 원으로 파견하여 병기를 하사해준 것을 사례하고, 겸하여 백관이 조일신을 논죄한 글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12월 4일: 원에서 양렬테무르와 부카테무르를 보내어 조일신의 변란을 국문하다.
1353년 조알신 잔당 처리
3월 6일: 원(元)이 종정부단사관 합아장(哈兒章, 카르쟝)과 병부낭중 강승(剛升) 등을 보내 조일신의 일당인 정천기와 고충절, 염백안첩목아(염바얀테무르), 곽윤정, 이군상, 이구룡을 목베어 죽이고 그 가산을 적몰(籍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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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장군 약전에서 본 안우의 행적
도서 <문충공 안우-고려말 국난극복의 영웅>, 290쪽
조일신은 난을 저지른 뒤 그 죄를 왕의 최측근 최화상을 죽인 다음 왕을 강제로 끌어내어 영을 내리게 하고 장승량 둥 8~9인을 목베어 저자거리에 참수하였다. 이와 같이 조일신에게 협박을 당하던 왕은 최영, 안우, 최원의 더움을 받아 조일신을 목베이고 그 일당을 모조리 처단하였다.
9월에 조일신이 반란을 일으키자 최영은 안우, 최원 등과 함께 반도들을 토벌하여 그 공으로 최영은 호군(장군)에 특진되었다. 공민왕 3년 39세 때 7월 원나라의 출병 요청이 있어 최영은 대호군(종3품)이 되어 유탁, 염제신 등과 함께 정병 2천묭을 선발하여 원나라로 갔다. 8월에 연경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다시 재원 고려인 중에서 23,000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고우의 장사성의 군사를 쳤다.
참고) 조일신의 난의 반도들을 토벌할 당시 안우는 최영과 같은 고려의 무관임을 알 수있고 최영보다는 직급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호군 직급.
군부판서 응양군상호군 임용의 의미
조일신의 난을 토벌하여 일등공신 되었다. 반면에 김용은 이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디. 김용의 안우에 대한 악 김정의 시작이다.
조일신의 난은 기철 형제를 죽이는게 목적이었으므로 기횡후 입장에서는 반란이다. 공밈왕의 위치가 위태롭다. 공민왕 수종공신들도 마찬가지. 안우는 원나라 어향시로 임명된 적이 있어 원나라 신임이 두텁다. 사건 후 원나라 문책을 무마해줄 인물이 필요했다.
그해 12월 원나라 국문은 잘 마무리 되었고 이듬해에 안우는 원나라에 가서 황제와 기횡후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참고문헌
고려시대 사료 DB (https://db.history.go.kr/goryeo.main.do) → 고려사, 고려사 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