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활산성
통일신라의 서라벌은 당시 세계 4대 도시로 손꼽힐 정도로 100만명이 넘는 인구와 화려한 문화를 자랑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우리 삶이 그러하듯 천년을 이어온 신라의 역사 또한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신라가 부족국가에서 하나의 국가로 성장하고 다시 통일신라로 전성기를 누리다 망국의 길을 걸을 때까지 내적 갈등도 많았지만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 특히 일본의 노략질에서부터 전쟁이라 불릴 정도의 침략은 신라 천년동안 지속되어왔다. 결국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한일합방이라는 국치는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오욕이요 치욕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신라 수난의 역사는 명활산성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본인들의 수없는 침략과 노략질에 맞서기 위해 명활성을 쌓고 또 쌓았던 기록들이 많은 역사서로 전해지고 있다. 명활성은 소지왕 등 5세기 말엽에 13년간 왕궁이 이전해 궁성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이어 상대등이었던 비담과 염장 등이 선덕여왕 때에 명활산성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반역을 도모하다가 김유신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명활산성은 신라가 태동하게 된 주역 6부촌 중 하나인 고야촌으로 불리며 신성시되던 땅이기도 하다. 명활산성은 신라의 태동에소부터 일본인들의 외침을 막아낸 국방요새로 소지왕 당시 13여년간의 궁성이 되었던 것이다. 이어 비담과 염장이 명활산성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획책했던 내적 갈등이 집적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켜켜이 쌓인 신라 수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경주시가 명활산성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보문단지와 연계해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자 명활성 발굴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신라의 태동과 내적갈등, 외적의 침략, 신라천년사 중 13여년간의 왕궁이동 역사를 명활산성 탐방을 통해 해부해 본다.
◆명활산성
명활산성은 경주 시가지에서 보문단지로 올라가다보면 보문호 허리의 서남쪽산을 에워싸고 있으며 허물어진 곳까지 합해 9.5㎞ 정도의 둘레로 조사됐다. 산성이 에워싸고 있는 봉우리는 해발 259m의 낮은 산이지만 동해에서 신라로 침범하는 세력을 방어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특히 왜병과 자주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삼국사기 등의 역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명활성이 자리하고 있는 명활산은 신라를 옹립한 6부촌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한기부 배씨의 시조가 된 금산 가리촌의 지타 촌장이 하늘에서 처음 내려온 곳이 명활산이라 한다. 또 습비부 설씨의 시조가 된 호진은 명활산의 고야촌에서 마을을 형성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명활산은 신라의 존립에 많은 영향을 미친 땅이었다. 명활산은 신라사람들이 신성시 했던 곳 중의 하나로 짐작된다.
삼국사기는 ‘실성이사금 4년(405년)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왕이 기병을 거느리고 쳐부쉈다’는 내용이 명활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명활성은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분석한다. 현재 돌로 쌓은 산성의 흔적은 4.5㎞ 정도이나 토성은 거의 5㎞에 이르는 것으로 흔적이 남아 있다.
1988년 북쪽 성벽에서 석성을 처음 쌓을 때의 내용이 기록된 ‘명활산성작성비’가 발견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높이 68㎝ 크기의 돌에 148자의 글씨로 성벽쌓기의 책임자와 실무책임자의 이름, 담당한 성벽의 길이, 공사기간, 글쓴 사람이름 등이 기록돼 있다. 제작연대는 진흥왕 12년(551년)으로 추정된다. 이 비문은 남한산성신성비와 함께 당시 사회상과 금석문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신라의 궁궐
신라 천년을 지탱해온 왕궁은 반월성으로 불리기도 하는 월성이다. 그러나 내내 월성만이 궁궐터였던 것은 아니다. 신라 최초의 궁궐은 남산의 서쪽 창림사지였다는 기록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월성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사서와 실록, 지리지, 문집류 등에서 확인된다. 고려시대 기록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대표적이다. 조선시대 동국통감, 동사강목 해동역사, 속연려실기술 정조실록 고종실록, 진증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 등에도 월성의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신라 5대 파사왕때 22년 봄 2월에 성을 쌓고 월성이라 하고 7월에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부터 월성은 천년 신라의 궁궐터로 자리매김 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라 20대 자비왕은 고구려군의 공격을 피해 월성을 버리고 명활산성으로 옮겼다. 이때가 475년이다. 자비왕의 아들 신라21대왕 소지왕이 백제와 결혼동맹을 맺고 우의를 다지며 고구려에 대항했다. 소지왕이 나라의 힘을 길러 488년 다시 월성으로 궁궐을 옮겨가기 까지 명활성은 13년간 신라의 궁궐이 되었던 곳이다. 명활성으로 신라의 궁궐을 옮긴 것에 대해서는 고구려군의 침입을 피해 옮겼다는 설과 왕궁을 보수하기 위한 이궐이라는 내용이 엇갈려 전해지기도 한다.
삼국사기는 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기원전 57년 개국하고 궁성을 쌓아 금성이라고 했다. 파사왕이 금성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이라고 했다. 신월성 동쪽에 명활성이 있고, 시조 이래로 금성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 두 월성에 거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담과 김유신의 전쟁
신라 선덕여왕때 왕의 권한을 견제하거나 왕의 업무를 집행하는 최고의 권좌인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염종과 함께 명활성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647년 비담 등이 귀족회의를 열어 여왕의 무능함을 부각시키며 폐위를 결정하고 왕궁으로 쳐들어가 여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려 했던 것이다.
선덕여왕은 조카이자 오른팔이었던 김춘추가 왜국으로 파견되었던 때인지라 지금의 경산지역에 주둔해 있던 김유신 장군을 월성으로 불러들여 난을 진압케 했다. 여왕을 지지하는 왕당파와 여왕을 폐위시키려는 귀족파의 싸움으로 왕권을 둘러싼 내전이 벌어진 것이다.
전쟁이 벌어진 시기에 월성에 큰 별이 떨어졌다. 여왕이 패전할 징조라며 비담 군사들의 사기는 충천한 반면 월성의 군사들은 사기가 떨어졌다. 이때 김유신이 “덕은 요사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별의 변괴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면서 걱정하는 여왕을 달랬다. 이어 “비담이 신하로서 임금을 모해하며 아랫사람이 웃사람을 범하니 신령이 미워할 일이요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할 일”이라며 “하늘이 위엄으로 인간을 다스린다면 선을 선으로 여기고 악을 악으로 여기게 하여 신령을 탓하는 일이 없게 할 것”이라며 연을 만들어 불을 붙여 하늘로 보내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며 신하들을 독려해 비담의 난을 10일간의 전쟁 끝에 진압했다.
이때 김유신 장군이 별을 만들어 하늘로 날린 것이 최초의 연 제작 기원이 되었다는 것으로 전하고 있기도 한다. 김유신 장군은 패하여 달아나는 비담 등을 추격해 목을 베고 구족을 멸했다는 기록이다.
선덕여왕은 전쟁이 진행중이던 8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별이 떨어지면 큰 인물이 죽음에 이른다는 속설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월성에 큰 별이 떨어지고 선덕여왕이 죽음을 맞았으니 그런 셈이다. 그러나 선덕여왕의 죽음을 두고 여러 설이 있다. 난을 일으킨 비담의 세력들이 시해했을 것이라는 것과 선덕여왕의 나이가 노령에다 큰 일을 당해 화가 치밀어 자연사 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내란의 시기를 틈타 김춘추 세력이 비담에게 권력이 넘어가기 전에 왕권을 잡기 위해 미리 손을 썼을 것이라는 추측도 역사가들 사이에 제기되고 있다.
◆선덕여왕의 사랑
신라 27대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딸로 신라 최초의 여왕이다. 632년부터 647년까지 1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여자의 나이는 묻지 않는다고 하지만 여왕의 나이를 밝힌 기록을 찾아볼 수 없어 신기하기도 하다. 비담의 난이 진행중일 때 목숨을 다한 선덕여왕은 당시 50대 중후반이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학자들의 의견이 많다. 일설은 60대 초반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선덕여왕은 혼자 살았던 독신이었을까? 여기에 대한 의문은 여러 기록으로 풀린다. 김춘추의 아버지 용춘이 선덕여왕이 공주 신분이었을 때 남편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용춘의 형 용수가 먼저 선덕여왕의 짝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여왕으로 등극하고 용춘이 왕의 남편이자 정치참모 역할을 하는 자리를 사양했다고 한다. 이때 신라 대신들은 여왕의 후사를 위해 세명의 남자를 천거했다는 기록이다. 실제 용춘이 부왕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여왕이 허락하고 진평왕을 모셔왔던 ‘을제’가 용춘의 자리를 대신했다고도 전한다. 진평왕이 그의 신하 조계룡을 점찍어 아들 삼아 덕만공주의 남편으로 내정했다는 내용도 전하고 있다.
김춘추와 함께 여왕의 오른팔, 왼팔 역할을 했던 김유신 장군도 여왕의 남자로 등극하기도 한다. 김유신은 선덕여왕에 비해 10살 정도 연하남인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방영된 드라마에서는 여왕이 김유신과 극적인 사랑을 이어가는 사이로 소개되기도 했다. 선덕여왕은 현시대에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의 기록이 있지만 황룡사 9층목탑을 세우고, 지혜로 여근곡에 잠입중이던 백제군사를 물리치고, 첨성대를 세워 백성들의 평안을 위한 정치를 베풀었다. 15년간의 왕위에서 영원의 안식에 들기까지 업적에 대한 칭송이 천년이 지나도록 끊이지 않는 위정자로 남은 선덕여왕의 발길을 따라 걷는 역사기행은 명활산성으로 이끌기도 한다.
수십년째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는 경주시의 명활산성 발굴 복원사업은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다. 고야촌의 복원과 사당 건립 등의 주문이 이어지기도 하는 역사터전으로 명활산성 복원사업에 기대가 크다.
(2016.06.27)
첫댓글 명활산성은 한때 임금이 거주했던 궁궐이 있었던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던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