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강 청춘과 깨달음
1. 청춘이란 무엇인가?
화이트 헤드가 '관념의 모험'이라는 어려운 책을 73세에 썼는데, 그 중에 짧게 청춘에 대해 이야기 한 게 있다.
The deepest definition of Youth is, Life as yet untouched by tragedy.
관념의 모험(화이트 헤드 72세 作)
‘청춘에 대한 가장 심오한 정의는 아직 비극에 노출되지 않은 생명이다.’
인생은 어짜피 희극이 아니라, 비극이다. 부처는 일체개고라고 했다. 인생은 고통과 고해이다.
사상가의 사상은 계보가 있다. 저의 스승 중에는 방동미라는 세계적인 대가가 계시다. 남경 중앙대 교수셨고, 중일전쟁 당시, 일본의 총성이 들리는 가운데 방송을 통해, 중국인생철학이라는 유명한 강연을 한다.
@ 도올의 스승, 方東美는 1937년 봄, 南京 國立中央大學 철학교수로서 중앙방송을 통해 전국의 청년들에게 [中國人生哲學]을 강의. 항일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후에 The Chinese View of Life라는 세계적 명저가 되었다.
방동미 선생은 乾坤一戱場 人生一悲劇라고 설파했다. 천지는 하나의 drama stage이고 인생은 하나의 비극이라는 말이다.
청춘은 아름답다고 작가들이 거짓말을 한다. 그건 거짓말이다. 청춘의 특징은 절망이다.
In youth despair is overwhelming.
절망이 넘치는 것이 젊음이다. 젊었을 때는 모든 게 답답하고 절망적으로 보인다. 청춘은 아름답지 않다. 청춘에 대한 추억이 아름다울 뿐이다.
The memories of youth are better to live through than is youth itself.
기억은 아름다운 것만 저장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청춘의 현실은 비극이다.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돌아가고 싶은 곳은 청춘의 기억뿐이다.
청춘은 절망뿐이지만, 청춘의 힘은 절망을 절망으로 느끼지 않는다. 그게 청춘의 힘이다. 노인에게 그런 절망이 오면, 그냥 죽을텐데, 젊음은 매일매일 그런 절망이 닥쳐도 절망으로 느끼지 않는다.
청춘의 특징은 희노애락에 대한 반응이 전폭적이라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웃고, 순간적으로 운다. 희노애락을 빨리 흡수한다. 희노애락의 기폭이 크다.
Youth is distinguished for its whole-hearted absorption in personal enjoyments and personal discomforts.
늙으면 굳어버린다. 잘 웃지도 못하고, 잘 울지도 못한다.
청춘의 특징은 또한 아름다운 것에 민감하다. 예쁜 옷을 입으려고 한다. 청춘의 가장 위대한 순간은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문학이나 소설 같은 문헌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삶의 체험을 통해서 아름답다고 여가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Youth is peculiarly susceptible to appeals for beauty of conduct.
청춘은 자기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에 무조건 헌신한다. 그렇게 헌신하는 순간이 청춘의 평화이다. 그것이 바로 불교가 말하는 해탈이라고 생각한다. 해탈은 감정을 다 죽이는 게 아니다.
아름다움의 발견이 바로 해탈이다. 젊음은 문학작품이나 다른 무엇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발견해내고 그것에 무조건 헌신하는 순간 거기에 평화가 깃든다. 젊음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거기에 몰두한다.
우리의 역사는 다시 젊어져야 한다. 우리 역사는 다시 청춘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色身은 늙어져도 法身은 영원히 청춘으로 살고 싶다.
우리의 역사는 다시 젊어져야 한다.
2. 중국의 선(禪)
禪이라고 하는 것은 당나라 때 나온 것이다. 그전에는 교학 불교가 성행했다. 이 교학 불교는 대장경과 같은 것을 이론적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대장경은 인도에서 나온 것이다. 인도인들은 말을 어렵게 한다. 말이 많다. 간단한 것도 복잡하게 말한다. 지금의 서양 사람도 같다.
우리는 20세기를 통해, 체질화되지 않은 철학을 배우느라, 학문이 되지 않은 것이다. 독일의 관념철학도 마찬가지다. 쉬운 것도 어렵게 말하는 것이 그들의 특성이다. 독일은 촌사람들이다.
프랑스나 영미는 조금 나은 편이어서 가볍게 touch할 줄을 안다. 그러나 독일의 관념철학가들, 예를 들어 칸트의 경우 그렇게 쉬운 것을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 존경스럽게 할 정도다.
일본사람들은 모두 독일계통의 철학을 배웠다. 일본하고 독일이 친했다. 데칸쇼와 같은 관념론 철학이 우수해서, 우리나라까지 그걸 배웠다.
인도사람은 쉬운 말도 꽈서 한다. 8만대장경이 다 성경이었다. 성경만해도 신구약 다 읽으려면 골치가 아프다. 결국 중국 사람들은 나중에는 질려버렸다. 그래서 8만대장경이고 뭐고 싹 쓸어버리자고 한 것이다. 그게 소위 불립문자(不立文字)다. 학문으로 불교를 말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禪은 ‘깨달으면 그만 아니냐, 고해에서 벗어나면 되는 거 아니냐?’라는 태도를 가진다. 경전은 무슨 경전이냐는 태도이다. 禪佛敎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反佛敎다. 불교를 부정하는 것이다. 스님 중에는 계율을 어기는 사람도 많다. 선은 특수한 것이다.
禪은 反佛敎다.
그런데 당나라의 선사들은 교학의 대가들이었다. 교학의 대가니깐 불립문자를 말할 때, 위대하게 보이는 것이다. 교학은 모르면서 선(禪)만 이야기하는 것은 웃기는 것이다. 깊이가 다른 것이다.
3. 선종의 계보
당나라의 고승은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선(禪)을 중국에서 처음 만든 사람은 혜능(慧能)이라는 분이다. 역사적 실존 인물로, 광동 근처의 조계산에서 득도를 했다.
혜능 밑에는 두 제자가 있다. 한 명이 청원행사(靑原行思)고, 다른 한 명은 남악회양이다. 여기서부터 계보가 갈린다. 청원에서 석두희천(石頭希遷), 용담, 덕산이 나오고, 남악에서는 마조도일(馬祖道一), 백장회해, 황벽, 임제가 나온다.
慧能 - 靑原--> 石頭--> ------德山
南嶽--> 馬祖--> ------臨濟
혜능 밑에서 이렇게 쌍벽을 이루는 덕산과 임제가 나온다.
德山棒, 臨濟喝 덕산방, 임제할
‘방’은 몽둥이고, '할'은 고함이다. 방은 직접적인 행동이고, 할은 언어를 거부다는 뜻이다. 덕산문중에 들어가면 몽둥이로 맞기 쉽고, 임제문중에 들어가면 큰소리로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선종은 고려말부터 들어온다. 우리의 적통은 태고보우(1301-1382)로부터 시작하는데, 보우는 원나라에 유학 가서 임재선사의 계보로 들어갔다고 한다.
@ 太古普愚(1301-1382)
46세에 元에 들어가 임제의 제자인 石屋淸珙에게 인가를 얻었다. 海東臨濟宗의 시조.
우리 선종의 적통을 태고보우로 잡느냐, 보조지눌로 잡느냐에 따라 복잡하다. 우리나라 선종은 기본적으로 임제종이다.
4. 덕산(德山)의 일화
德山宣鑑(780-865)
사천성 簡州 사람. 속성은 周氏
덕산이라는 사람은 원래 戒律에 밝은 사천성 간주 사람이다. 사천 사람은 매운 걸 잘 먹는데, 한국사람과 기질이 같다. 덕산은 북방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 결국 대단한 스님이 되었는데, 금강경의 대가였다. 속성이 주씨여서, 별명이 주금강이었다. 靑龍疏鈔라는 금강경을 해설한 유명한 책을 썼다.
@ 靑龍疏鈔
덕산이 금강경을 해설한 책. 득도 후 태워버림.
당시만 해도 선종은 남방에서 올라온 것이라서, 북방에서는 생소했다. 조주스님 같은 분이 나와서 나중에는 북방에서 성립하지만 당시는 낯선 것이었다.
@ 조주스님(趙州, 778-897)
南泉의 제자로서 唐의 선을 완성시킴. 山東省 曺州 사람.
덕주는 남방의 선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났다.
“금강이란 정(定)을 말함이니 후득지 가운데 천 겁(千劫)을 부처님 위의(威儀)를
배우고, 만 겁을 부처님의 세밀한 행동을 배운 뒤에야 성불한다고 했거늘 저 남방의 마구니들은 감히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고, 이 마음이 곧 부처라 한다.“
@ 南方魔子, 敢言直指人心, 見性佛性.
“내가 마땅히 그놈들 소굴에 들어가서 씨를 말려서,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겠다”라고 말하고, 남방을 향했다.
@ 我當樓其窟穴, 滅其種類, 以報佛恩.
그래서 호남성 예주의 龍潭崇信이라는 스님을 찾아간다. 이 사람이 당대 최고의 선사였다.
덕산이 처음 도착한 곳은 풍주인데, 그는 길에서 빈대떡을 파는 노파를 보고는 [靑龍疏鈔]가 담긴 걸망을 내려놓고 점심으로 요기할 떡을 팔라고 하였다.
그러자 노파가 물었다.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 무엇이오?"
"靑龍疏鈔입니다."
“그래 뭘 소초한 것이오?”
“금강경입니다.”
"그래요. 내가 한 가지 묻겠는데 만약 제대로 답을 하면 떡을 보시하여 점심 요기를 시키겠으나 만약 답을 못한다면 다른 데 가서 사 자시오."
"그럼 물으시오."
노파가 여기서 ‘施與點心’이라는 말을 쓴다. 점심을 한국말로 알고 있는데, 점심은 중국말이다. 중국말 點心은 마음의 불을 킨다는 뜻이다. 배가 고프면, 마음이 흐리멍텅해진다. 밥을 먹으면 마음이 확 켜진다.
@ 점심 : 點心(띠엔 신)
@ refreshments.
보통 복수 형태로 쓰인다. 간식의 의미
중국 사람은 간식의 의미로 쓴다.
노파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상좌는 점심을 한다니 어느 마음에 점심을 하려 하는고?"
@ 未審上座點那個心?
이 말은 금강경 제18분 體同觀分에 나오는 말이다.
갠지스 강의 모래 숫자만큼 갠지스 강이 있고, 그 강의 모래들만큼 사람의 마음이 각각 다르다. 그런데 그 마음을 다 아나니, 그걸 알 수 있는 건. 그것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말하길,
過去心 不可得 과거의 마음은 얻을 수 없고
現在心 不可得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未來心 不可得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네
라고 하고 있다.
노파의 질문은 재미있는 pun이다. 금강경에 과거심도, 현재심도, 미래심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點心을 어찌 얻으려 하냐는 질문이다. 간식인 빈대떡과 금강경의 심(心)이 겹쳐 있다.
pun(펀): 같은 발음에 두 개의 다른 의미가 겹쳐있다.
덕산은 경학은 밝은지 모르지만 선에 관해서는 아직 생짜배기라 답을 못하자 노파가 용담에게 가라고 지시하였다.
이건 꾸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 절간 앞에도 이런 수준의 할머니가 많다.
기질이 대단한 덕산은 용담사에 이르러, 용담 화상의 처소에 이르러 큰 소리를 쳤다.
"용담을 들어온 지 오래 되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못도 보이지 않고 용도 또한 나타나지 않는구나."
@ 潭又不見, 龍又不現!
이때에 용담 화상이 병풍 뒤에서 나타나며 말했다.
“네가 친히 용담에 이르렀구나.”
@ 子親到龍潭
덕산이 예배하고 밤이 이슥하도록 모시고 법문을 들었다.
“날이 어둡다. 왜 내려가지 않느냐?”
@ 更深, 何不下去?
덕산이 밖으로 나가니 밖이 어두웠다.
그래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밖이 어둡습니다.”
@ 門外黑
그 말을 듣고, 용담이 촛불을 켠다. 그리고 그 불을 덕산에게 준다. 그런데 덕산이 그 촛불을 받으려는 순간에 훅 불어서 불을 꺼버린다.
그 순간에 덕산이 득도를 한다.
덕산은 큰절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이에 용담선사가 물었다.
“자네는 무슨 도리를 보았는가?”
덕산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오늘 이후로는 천하 노화상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선사들의 언어는 어렵다. 해석하면 원래 안 된다.
여기서 밖이 어둡다고 한 것은 무명의 세계라는 뜻이다. ‘못살겠다’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깨달음을 주십시오, 내 마음의 불을 켜주십시오”하고 덕산이 매달리는 순간, 깨달음(촛불)을 준다.
그런데 용담은 그 촛불을 꺼버린다.
그 의미는 깨달음이 있다는 네 마음의 생각 그 자체를 없애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