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일관성과 자기의식
“죄로 인하여 생긴 일은 오직 죄에 의해서만 힘과 강함을 얻는다.”
셰익스피어, 『맥베스』, <제3막, 제2장> 중에서
“죄를 범하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지만 죄에 머무는 것은 악마적인 것이다.”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중에서
♣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젊은 시절 한 번쯤 이런 질문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러한 질문을 다시 던지는 순간이 온다. 삶이 참으로 어렵거나 인생에 대해 회의를 느끼거나 혹은 삶이 무의미해지거나 하는 순간이 오면 이러한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되는 것이다. 왜 사는가? 하는 질문은 너무나 막연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이러한 질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이러한 질문이 잘못된 질문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이나 매우 힘든 순간에 혹은 삶이 끝장나려고 하는 순간에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는 것은 이러한 질문이 매우 중요하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이라는 반증이 아닐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존해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이러한 질문은 사치스러운 질문이거나 답이 없는 질문처럼 생각하고 말겠지만, 많은 철학자나 문호들은 이러한 질문이야 말로 인생에 있어서, 인생 전체에 걸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라고 즉 인생의 마지막에 혹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던지게 되는 질문처럼 그렇게 고려하였다.
♣ 정신적으로 산다는 것은 일관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산다는 것은 일관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나의 행위나 삶이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자기에 대한 의식’ 혹은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동일성’이라는 말은 단순히 ‘나는 남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동일성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나’가 달라지지 않고 계속하여 연속되고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적으로 산다, 자기의식을 가지고 산다, 혹은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곧 ‘삶의 일관성’을 가지고 산다는 것을 말한다. 사회적인 죄(crime)는 법을 어기는 것이겠지만, 종교적인 죄(sin)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상태를 말한다. 즉 일관된 삶, 자기 동일성을 부정하는 것이 곧 죄라는 말이다. 사상이나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살아갈 수 있는 어떤 정신적인 신념이나 일관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바로 이러한 사상이나 신앙이 그의 모든 삶의 선택들에 있어서 지반이 되고 있고 원인이 되기 때문에 그의 삶은 일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정신적인 지반이 없는 사람에게는 일관성이 결여 되어 있다. 어제는 좋은 일을 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잘못을 저지르고, 며칠 동안이나 절망에 빠져 있다가 이윽고 생기를 되찾고 그리고는 또 절망에 빠진다. 철학적으로 볼 때 이렇게 일관성이 결여된 삶은 곧 정신이 빈약한 상태라고 할 수 있으며, 종교적으로 볼 때 이는 곧 ‘죄 중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확고한 신념에 의하지 않는 모든 행위는 죄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일관성이 결여된 사람들은 결코 어떤 고상한 생의 목적이나 숭고한 하나의 가치를 위해서 인생 전부를 바쳐서 승부를 보고자 하는 진정한 투혼과 일관성을 기대할 수가 없다. 세상의 위대하다는 사람들, 링컨, 베토벤, 고흐, 슈바이처, 셰익스피어, 아인슈타인, 마더 데레사, 이순신 등이 가진 공통적인 특성 그것은 삶의 일관성을 일찍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기철학을 가지고 있거나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비록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위대한 사람들인 것이다.
♣ 인간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
심리학적으로 볼 때 ‘거짓’이라는 것은 곧 일관성의 결여를 말한다.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다르고, 오늘 한 말과 내일 한 말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동일한 말도 자신이 말할 때는 ‘진실’이라고 하고 타인이 말하면 ‘헛소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관성이 결여된 사람에게는 진정한 신념이나 사상이나 혹은 신앙심이 있을 리가 없다. 오직 그때그때의 이익을 위해서 계속하여 말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일관성이 전혀 없는 이러한 사람이 사상가나 신앙인이라고 자처한다면 이러한 사람이 곧 ‘거짓 사상가’ ‘거짓 예언자’의 표징일 것이다. 사실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혹은 일반인들이 어느 정도 정신적으로 빈약하고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볼 때, 누구나가 죄인이며, 누구나가 가끔은 죄를 지으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죄를 짓는 행위’는 ‘인간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이 ‘정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일관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러한 ‘죄의 행위’를 잘못된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 즉 죄를 짓고 나면 언제가 뉘우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에게 양심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양심은 신의 음성을 대변 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 진정으로 뉘우치고 있다면 용서 못할 죄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죄를 짓고도 뉘우침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보다 더 큰 죄를 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죄로 인하여 생긴 일은 오직 죄에 의해서만 힘과 강함을 얻기 때문(셰익스피어)”이다. 사람들이 ‘뻔뻔하다’고 하는 ‘뉘우침 없는 상태’는 철학적으로 볼 때, 일관성의 부정을 의미한다. 인생에 있어서 일관성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자아를 부정한다는 것이며, 강하게 말해 영혼을 팔아버린다는 것을 말한다. 만일 자아를 부정하는 사람이 선한 행위를 하였다면 그것은 ‘우연의 일치’이거나 ‘위선’일 뿐이다. 그가 행하는 것은 오직 더 큰 죄를 짓는 것뿐이다. 파우스트 교수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고 얻은 온갖 좋은 것들, 금은보화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말라빠진 낙엽으로 변해 버렸다는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일화이다. 사람들은 하나의 죄가 다른 하나의 죄를 낳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죄인이 새로운 죄를 짓는 것은 이전의 죄 때문이 아니라, 실상은 그에게 있는 ‘악마적인 것’ 때문이다. 악마적인 것이란 자기 자신의 부정을 의미하며 이에 따른 질서의 파괴, 삶의 파괴를 의미한다. 악마적인 것이란 그의 삶의 기초가 ‘죄에 머물고 있는 상태’인 그러한 실존적 상황을 지칭한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죄를 범하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지만 죄에 머무는 것은 악마적인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영화 맥베스의 한 장면 : 왕이 될 것이라는 마녀의 예언으로 인해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한 맥베스 장군은 자신의 왕위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엄청난 숙청을 단행하지만 결국 자신의 아내마저 죽이고 미처버리고 만다. 사진출처 : 맥스 영화>

<파우스트 박사를 유혹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 파우스트는 은퇴를 앞둔 노학자인데
긴장감을 더하기 위해서 그림에는 젊은 학도로 그려져 있다. 사진 출처 : 독서신문>
♣ 나의 인생이라는 큰 그림
인생에 있어서 일관성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전체적으로 본다, 하나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전체적으로 하나로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진정한 자아의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보다 일찍 이러한 지혜를 깨달은 사람은 ―사회적 성공 뿐 아니라― 인생의 성공에 보다 한 발짝 나아간 사람이다. 그는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순간순의 이해득실을 헤아리지 않고, ‘나의 인생’이라는 큰 그림을 보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무엇으로 살 것인지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자기모순’이나 ‘위선’이나 ‘비-상식’이나 ‘뻔뻔함’이나 ‘범법행위’ 따위는 좀처럼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생전체를 일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살고 있기 때문이며, 훌륭한 자아를 가지기 위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