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5일 일요일
미국에 사는 친구가 강력 추천한 <파친코> 를 순식간에 다 읽었다. 두 권의 소설책이 술술 읽어가서 작가의 능력을 실감했다. 작가 이민진은 진정한 이야기꾼이었다.
<파친코> 는 너무나 가난해서 기형(언청이, 소아마비) 으로 태어난 훈이에게 시집가는 양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양진의 딸 선자는 다행히 정상적인 아이로 태어나긴 했지만, 후에 오사카에서 온 야쿠지 고한수의 유혹에 넘어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한수가 기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선자가 절망에 빠지자, 하숙집에 손님으로 와 있던 목사 이삭이 선자와 결혼해서 그녀를 절망의 나락에서 구해내고 자신의 형 요셉 가족이 살고 있는 오사카에 더려간다.
오사카로 간 선자는 고한수의 아들 노아를 낳은 후, 이삭의 아들 모자수도 낳는다. 공부를 잘하는 노아는 와세다대학에 들어가지만, 결국은 일본사회에서 출세를 포기하게 된다. 한편 공부에 소질이 없던 모자수는 바로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어 두각을 나타낸다.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은 미국 유학을 통해 국제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으로 자라지만 결국에는 솔로몬 역시 아버지의 파친코 사업을 물려받겠다고 선언한다.
파친코는 운명을 알 수 없는 도박이라는 점에서 재일교포들의 삶을 상징하는 좋은 은유라고 할 수 있다. 뜻밖의 횡재를 할 수 있지만 일시에 모든 것을 잃고 파멸할 수 있으나 야쿠자와 연관성 때문에 폭력적 이미지가 강했다. 당연히 지역사회에서 좋은 인상을 받을 수 없었지만 재일교포들은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기에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들에게 파친코는 돈과 권력과 신분상승을 가셔다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파친코> 를 읽으며 한국의 근대사가 얼마나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최대의 피해자는 국민이지만, 아무도 국민이 당하는 고난에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나라를 잘못 운영해서 나라를 빼앗기고, 국민을 일본이나 중국이나 러시아로 떠나보낸 우리의 무능한 정치가들은 그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파친코> 는 "역사가 우리를 망쳐놓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곧 어려운 시기에 문제가 많은 나라에 태어났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나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가 우리를 망치고 정치가들은 나라를 망쳐도 국민들은 고난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것이라는 것이다. 희망과 극복이 이 소설의 메시시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선자는 남편 이삭의 묘를 찾아간다.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평생을 살아온 그녀는 먼저 간 남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큰아들은 자살하고 둘째 아들은 파친코 운영자가 되었으며 손자도 파친코 사업업을 물려받게 된 현실은 이상주의자 목사였던 이삭이 원했던 삶이었을까?
그녀가 죽은 남편의 무덤에서 흘리는 눈물은 모든 재일교포들의 눈물의 상징일 것이다.
나는 깨복쟁이 친구의 언니가 일본으로 시집을 간 것이 정말 부려웠다. 시시때때로 화장품이나 건강식품이 도착하기도 했다. 텔레비젼이나 전화기가 왔을 때는 도대체 어떤 복이 친구의 집에 내린 것인지~~ 어른이 된 지금 뿔뿔이 흩어져 사는 친구의 친정집의 운명에 일본으로 시집간 그애 언니는 지금 어찌 되었을까?
역사를 전공하고 변호사를 하고 일본계 미국인 남편을 만나 일본에서 사 년정도 살면서 많은 재일교포를 만난 작가. <파친코> 는 무려 이십 년의 교정을 거쳐 완성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 편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예전같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은 강제 이주나 민족 이산, 즉 디어스포라 시대가 아니라, 국민/국가 간의 경계를 넘는 트랜스내셔널리즘 시대다. 해외교포들이 이민간 나라에만 의리를 지킬 필요가 없고 두 나라 모두의 충성심을 가져도 되는 시대, 즉 두 나라를 오가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한국을 포함해 많은 나라들이 다문화시대를 인정하고 있고, 다문화 가정을 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민족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여전히 남아있다. 재일교포들의 감동적인 이야기인 <파친코> 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소수민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근절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