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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열왕기상19장1~21절
제목 : 포기할 수 없는 사명
아합이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야기하니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려 합니다.
이에 엘리야는 이세벨의 보복을 피해 광야로 도망처 자기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은 실의에 빠진 그를 회복하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1. 이세벨의 추격과 엘리야의 도피(1~3절).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합니다(1절).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말하니.('나가드')는 '알게 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넌지시 알리다'는 뜻의 어감(語感)이 들어 있습니다.
때문에 보통 이 동사로 설명되는 관계란 마치 공범자(共犯者)들끼리 갖는 동료의식처럼 친밀한 관계입니다.
따라서 아합이 어느 정도로 이세벨과 밀착되어 있었는지를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본절은 아합이 앞장에서 목도한 이적과 바알 선지자 모두를 칼로 죽인 엘리야의 위업(18:30-467)에 질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일국(一國)의 통치자인 아합은 줏대 없이,
그 모든 사실을 왕후 이세벨(Jezebel)에게 고하고 맙니다.
이러한 아합의 유약한 면은 본서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이세벨의 과단성(果斷性)과 극명하게 대조됩니다(21:7).
*21:7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이르되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내일 이맘때에 반드시 엘리야의 생명을 선지자와 같이 죽이겠다고 엘리야에게 알립니다(2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내일 이맘때에는. – 본절은 우리들에게 의문점을 갖게 해줍니다.
즉 진노한 이세벨은 왜 오늘 당장 엘리야를 처단하려 들지 않았을까?
이에 대하여 많은 주석가들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위협하여 멀리 쫓아내려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으로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갈멜산상의 승리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환호에 싸인 엘리야(18:30-40)를 직접적으로 처단하기는 어렵다고 이세벨이 판단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세벨의 잔인하고 과감한 성격을 감안할 때 그 같은 설명은 설득력이 적어 보입니다.
도리어 이세벨은 엘리야를 공개 처형할 의사를 전했다고 봐야 합니다.
즉 이세벨은 다음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엘리야를 처형함으로써,
전날백성들이 받은 충격을 무효화하려 한 것입니다.
아무튼 본장은 적어도 이세벨의 위협이 실제적인 생명의 위협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3, 10, 14절).-“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 여기서 '저 사람들'이란 앞서 엘리야가 처단한 450인의 바알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18:22, 40).
따라서 이 말에는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이세벨의 극심한 증오와 비장한 각오가 들어 있습니다.
그녀가 아합으로 부터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대하여 이야기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처럼 더욱 강퍅해진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 이세벨의 맹세 속에 담긴 이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특히 엘리야가 한 분 하나님을 두고 맹세한 것과 비교하면 그 부정적이고 잡다한 인상은 두드러집니다(18:15).
*18:15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
그런데 참신이신 한 분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이처럼 주위의 모든 것,
특히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것들을 신격화하게 마련입니다.
어쨌든 인간은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눅 16:13).
*눅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따라서 한 분 하나님께 굳건히 헌신하든가 아니면 다른 모든 것에 굴복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하여야할 것입니다.
3) 엘리야가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합니다(3절).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이 형편(形便)을 보고. - 본절에 해당하는 원어 '라아'는 단순히 '바라보다'는 뜻입니다.
한편 어떤 영역본들은 이를 '두려워했다'(he was afraid)로 번역하였습니다.
한글 공동 번역도 같은 경우도 '두려워 떨며'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을 위하여...브엘세바에 이르러. - 이세벨의 단호한 경고에 부딪친 엘리야는 할 수 없이 도피 길에 오릅니다.
이적과 능력의 종으로서의 모습을 온 백성들에게 떨쳐 보였던 엘리야(18:30-46)가 불과 하루 만에 이처럼 황망히 도피 길에 오르는 모습은 실로 아이로니칼(ironical)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와 동일하게 연약한 성정(性情)을 지닌 엘리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행한 이적적 권능이란 오직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한편 브엘세바(Beersheba)는 유다 네겝(Negeb) 지방의 한 성읍입니다.
이곳은 팔레스틴 최남단 지역으로서 곧 헤브론 서남쪽 55km 지점입니다.
따라서 엘리야는 이세벨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남왕국 유다의 남쪽 국경 지대로 피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극도의 고립감을 엘리야는 자신의 사환조차 동행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표출하고 있는 것입니다(Lange).
2. 엘리야의 탈진과 하나님의 치유(4~8절)
1) 광야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 죽기를 원합니다(4절).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 이스라엘 역사상 '광야'는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이교도의 우상 숭배 영향을 받아야 했던 가나안 정착 시기와 달리, 과거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 시절(민 33가1-49)은 그들 역사에 있어 가장 순수한 신앙을 보존했던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에게는 흔히 도시 문화에 대한 협오와 함께 광야에 대한 동경이 발견된다고 합니다(Talmon).
더구나 엘리야가 들어간 광야는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나아가는 첫 문턱입니다.
즉 처음부터 엘리야는 호렙 산을 목적으로 하고 여정을 출발하였던 것입니다.
하룻길.-구약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이 거리를 나타내던 관용적 표현입니다.
정확한 수치로 환산하기는 어려우나 '하룻길'(Day's Joumey)은 약32-40km입니다.
로뎀나무. - 로뎀나무(broom tree)는 사막의 메마른 골짜기나 하상(河床)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콩과의 관목으로 잎은 작고 바늘 모양이면서 많지도 않아서 잎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이며, 키는 2~3m로 작고 우리나라의 싸리나무처럼 땅 위에서 부터 가느다란 잔가지들이 많이 자라므로 그늘이 빈약하지만 한 사람이 앉아 잠시 더위를 피할 정도의 그늘은 되기 때문에 사막에서는 그나마 고마운 그늘이 됩니다.
히브리어로는 “로뎀”, 헬라어로는 “라드멘” 금작화(金雀花-콩과에 딸린 늘푸른 떨기나무, 일명 대싸리나무)로 불립니다.
꽃은 하얀 꽃이 이른 봄에 피는데 1cm 정도의 작은 흰 나비 모양이며, 꽃잎 안쪽에 빨간 줄무늬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희게 보이며, 줄기에 붙어서 많이 핍니다. 꽃의 향기는 살구꽃 향과 비슷하게 향기가 좋습니다.
이 나무는 광야에서 바람과 햇볕을 잘 막아 주기 때문에 대상(隊商)들에게 매우 환영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막에 거주하는 족속들은 이를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 불과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18:30-46)가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선지자 요나도 이와 비슷한 탄원을 하나님께 드린 적이 있습니다(욘 4:8)!
*욘4: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큰 기적과 역사를 이룬다고 할지라도 항상 우리는 인간의 연약성을 생각하며 늘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넉넉하오니.('라브')는 '충분하다'(enough)는 뜻입니다.
그러나 본절은 희망을 상실한 사람의 체념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공동 번역은 "이제 다 끝났습니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 '낫다'('토브')는 보통 '선하다', '좋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질이나 가치에 있어 상대적으로 우수한 경우를 가리켜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야가 자신이 선조들에 비해 나을 바가 없다고 한 말은 구체적으로 무얼 의미하는가?
우선 본절은 엘리야가 자신을 '못난 놈'으로 자조하는 비애 섞인 말입니다.
그 다음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여호와께 돌아 오도륵 하는 일을 필생의 사명으로 삼았던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명이 성공한 듯 보이는 순간에 닥친 위기(1, 2절)는 그로 하여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의 좌절과 허탈감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비탄 속에서 이제 엘리야는 지금까지 선조들이 겪은 이스라엘 역사의 성공과 실패에서 자신 역시 한걸음도 더 나가지 못했다는 실망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2)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잘 때에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합니다(5절).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 70인역(LXX)에는 '천사'가 '어떤 이'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7절에서 다시 언급된 바와 같이 여기 언급된 '천사'는 '여호와의 사자' 곧 구약 시대 당시 이 땅에 현현(顯現)하신 그리스도 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한편 앞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4절)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로 하여금 땅 위에서 더 살도록 격려하며 기적적으로 음식물을 공급해 주셨습니다(6절).
이는 곧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긍휼과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루만지며. - 이에 해당하는 '나가'는 특별히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에 대해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단 8:18;10:16).
*단8:18 “그가 내게 말할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어 깊이 잠들매 그가 나를 어루만져서 일으켜 세우며”
*단10:16 “인자와 같은 이가 있어 내 입술을 만진지라 ”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만지심은 상황을 변하게 하며 새 힘을 주는 능력으로 작용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만지심은 그 대상이 자신에게 속한 존재라는 의미를 주기도 합니다(7절).
3)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어 먹고 다시 누웠습니다(6절).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숯불에 구운 떡. –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과는 달리 '뜨거운 돌 위에 놓인 떡'이란 뜻입니다.
당시 초장(草場)을 찾아 이리저리 유랑 생활을 하던 사막의 유목민들은 돌을 달구어 그 위에서 떡을 구워 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와 같은 떡이 엘리야에게 제공된 것입니다.
4)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으라 권면합니다(7절).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 원문 상으로는 '네가 가야할 길이 너무도 크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엘리야가 여행해야 할 거리가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표현에서 엘리야의 광야행은 처음부터 행선지가 정해진 것이었음이 다시금 암시됩니다.
아마도 엘리야는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의 전개에 실망한 나머지 하나님께 매달리는 심정으로 길을 출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호렙 산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과 비탄에지친 엘리야는 여행을 지속할 여력도 의욕도 없었습니다. 천사의 도움은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엘리야가 침체를 이겨내도록 음식과 휴식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5절 주석 참조.
5)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릅니다(8절).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사십 주(晝) 사십 야(夜). - 브엘세바에서 호렙 산까지는 대략 350km으서 정상적으로 꾸준히 걸을 경우 십여일 정도면 당도 가능한 거리입니다.
따라서 엘리야의 광야 40일은 행진만을 위한 기간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엘리야는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때로는 금식도 하며 때로는 기도에 침익(沈溺)하기도 하면서 호렙 산을 향해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간이 40일이었다는 것은 곧장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를 연상시켜줍니다(신 9:9;마4:2).
*신9:9 “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마4:2 “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
특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40일 동안 바로 호렙 산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여호와 앞에 엎드려 있었습니다(신9:18).
그러므로 엘리야의 광야 40일도 모세의 경우에 비추어서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즉 일대 40은 인내의 한계를 채우는 수로서 그 이후엔 상황의 변화를 초래하게 하는 수입니다.
사실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 받야야 마땅할 백성들이 계속 보존하게 된 것은 모세의 40일간 중보기도 덕분입니다(신 9:18, 19).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스라엘의 배교(왜냐하면 갈멜 산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변화가 없었으므로)에 대해 엘리야가 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짐을 지고 하나님을 찾은 기간이 바로 본절의 사십 주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산 호렙. - 호렙산(Mount Horeb)은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그 밑에서 장막을 쳤으며 모세가 여호와와 대화를 나누었던 신성한 산 시내(Mount Sinai)와 동일시됩니다(출 19장).
그러나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 없으며 단지 오늘날의 예벧 무사(Jebel Musa)가 아닐까 추정할 뿐입니다.
여하튼 이제 엘리야는 일찍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던 바로 그 장소로 실의에 빠진 채 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3. 엘리야의 불평과 하나님의 설득(9~17절)
1)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머물더니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묻습니다(9절)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 굴에 해당하는 원어 '메아라'앞에는 정관사 '하'가 붙어 있으므로 '그 굴'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엘리야가 들어가 유(留)한 굴은 호렙산에서 흔히 발견되어지는 일반적인 굴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광이 지날 때에 모세가 피해 있었던 반석
틈(출33:22)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이 말은 '무엇이 너를 여기 있게 하느냐'는 뜻입니다.
공동 번역은 이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로 번역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도 그러합니다(What are you doing here?).
그런데 이 질문은 새로운 사실을 묻는 물음이 아니고 도리어 질문 받는 자를 일깨우는 물음입니다.
즉 하나님은 엘리야의 실망과 체념을 이미 알고 계시면서 물으신 것입니다. 바로 이 질문은 엘리야 자신을 냉정히 성찰하게 하는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종의 전환과 갱신의 계기를 마련하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러한 대화의 과정을 통해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또한 자신에게도 할일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Keil & Delitzsch).
2)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를 죽여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빼앗으려 합니다(10절)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 18:15 주석참조.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호칭하는 경우는 구약에서 261회나 됩니다.
본래 이 명칭은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하시는 하나님(삼상 17:45)을 뜻하였으나 후에는 점차 천군 천사를 다스리는 하나님(22:19)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이 말은 강한 군사적 의미와 함께 온 세계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열심(熱心)이 유별 하오니. - 이 말( 칸느 키느티)은 '질투하다'는 뜻의 '카나'가 두번 반복된 말입니다.
즉 이는 '질투하고 질투하더니'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신들을 숭배하는 작태에 엘리야가 심히 분노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때 그의 질투는 바로 질투하시는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는 데서 나온 열정입니다(출 20:5).
*출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오직 나만 남았거늘. - 원문은 '나, 나만 남았다'는 식의 표현입니다. 이는 곧 엘리야의 탄식과 하소연이 그 호흡까지 느껴질 정도의 표현입니다. 더군다나 '나만'.('바드')(alone)는 '분리되어 고립되다'는 개념이 강조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에서 우리는 당시 엘리야가 얼마만한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이는 엘리야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 당사 이세벧의 박해 가운데서도 오바댜가 숨겨 놓은 100명의 선지자(18:4)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7천 명의 순결한 자가 남아 있었습니다(18절).
3) 하나님께서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강한 바람, 지진이 지나갑니다(11절).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 본절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런데 공동 번역의 경우 이를 "야훼(여호와) 앞에 있는 산 위에 서 있거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문장의 전후 관계상 "여호와의 앞에서"는 나가서 산 위에 서는 행동 전체를 받습니다.
즉 엘리야가 산 위에 서는 행동이 곧 여호와 앞에 서는 행동과 동 일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본절은 과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셨듯이(출 33:17-23) 이번에는 엘리야에게도 당신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엘리야의
주목(主目)을 촉구하는 말임에 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 '여호와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은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한다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출 33:19).
즉 이는 여호와께서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한 방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점은 '지나가다'는 뜻의 '아바르'는 움직이의 개념이 강하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고정된 사물을 관찰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대상을 관찰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바람은 그 움직임을 볼 수 있으되 형상을 볼 수는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요 3:8).
*요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을 알리시는 방식에서도 인간의 수중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선포하십니다.
강한바람...지진. - 비단 이것들 뿐 아니라 다음절에 나오는 '불' 등은 여호와께서 현현(顯現)하실 때 일반적으로 수반되는 현상입니다(출 19:16-20). 그러나 정작 본절에선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바람, 지진,불 따위는 표적을 구하는 종교가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굉장한 증거임에 틀림없었지만 선지자 엘리야의 마음을 압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대신 엘리야의 마음을 압도한 것은 그러한 현상들 다음에 들려온 '세미한 소리'(12절)였습니다.
즉 이것이야말로 엘리야에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분명한 증거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성경을 통해 들려주시는 그 세미한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4) 불이 지나간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습니다(12절)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세미(細微)한 소리. - '세미한'에 해당하는 '데마마 다카'는'고요하다'(다맘)와 '곱다'(다크)의 결합어입니다.
즉 섬세한 것을 표현하는 단어 둘이 동원되어 이는 대단히 미세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강한 바람과 지진, 불이 있은 후의 '세미함'이란 뚜렷한 대조를 보여 줍니다.
한편 '소리'(콜)는 신약에서의 '포네'와 마찬가지로 '음성'이라 함이 더욱 적절합니다(계1:10;4:1 등).
그런데 '하나님의 소리'로서 사용되는 경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란 외적인 것이기 보다 성령에 의해 듣는 자의 의식에 각인(刻印)되는 내적 감화(感化)입니다(고전 2:10-14).
그 결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영적 깨달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5)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묻습니다(13절)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겉옷으로 엎굴을 가리우고. - 이것은 엘리야가 마침내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음을 식별하고 취하는 행동입니다.
즉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경우 살 수 없기 때문에 엘리야는 겉옷으로나마 자신의 얼굴을 가리운 것입니다. 출 33:20 주석 참조.
한편 모세가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지나가심을 경험할 때는 여호와께서 친히 손으로 모세를 가리우셨습니다(출 33:22, 23).
6) 하나님의 물으심에 엘리야는 10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답변합니다(14절)
“[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이것은 아직도 두려움과 절망의 심경을 역력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즉 엘리야는 하나님의 위엄과 임재를 체험하고서도(11,12절) 여전히 부정적인 심경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엘리야를 위로하며 앞으로의 구체적 사명에 대하여 일러주셨습니다(15-18절).
그러자 비로소 엘리야는 용기를 회복하고 과단성 있는 결단을 내리는데(19-21절) 인간은 연약하나 하나님은 강하시다는 사례틀 보여 주는 한 표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7)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신 사명입니다(15~17절)
(1)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하라(15절)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네 길을 돌이켜. – 이 말은 단순히 왔던 경로를 되밟아 돌아가라는 말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엘리야가 명령받은 행로는 다메섹으로 가는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돌이키라'는 말은 보다 내적인 태도와 의식의 전환을 지시하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즉 이는 실망과 낙담을 안고 왔던 길을 새로운 사명과 과제를 받아 들고 돌아가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에 할 일이 남아있다는 의식이야말로 낙담과 무의미를 극복하게 하는 첩경입니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 하사엘(Hazael)은 본래 아람 왕 벤하닷(Benhadad)의 군대장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벤하닷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후 줄곧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혔습니다(왕하 8:13-29;13:1-3).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께서 하사엘을 이스라엘 징계의 채찍으로 사용하실 계획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문제는 엘리야가 언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었는가입니다.
실상 16절까지에서 언급되는 하사엘, 예후, 엘리사 중 그 누구도 엘리야의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습니다(왕하 8:12-15;9:1-10).
그러나 이 난점은 '기름부음'을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이 폭넓게 해석 할 때 해결됩니다.
즉 여기서 '기름 붓다'라는 말은 꼭 문자적으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어떤 사명을 부여하는 것(시105:15;사45:1)이나 따로 구별하는 것(출 30:26)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견해입니다.
(2)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가가 되게하라(16절)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님시의 아들 예후. – 사실 예후(jehu)는 님시의 손자이고 여호사밧의 아들입니다(왕하9:2).
본절과 같은 오역(誤譯)은 히브리어의 '아들'(벤)이 '자손'을 의미하기도 하는데서 온 실수입니다.
따라서 정확히는 '님시의 자손 예후'가 옳습니다.
한편 본래 이스라엘 군대장관 중 하나였던 예후는 훗날 라못 길르앗 출정시 반란을 일으켜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립니다(왕하 9:1-10"17),
이때 예후는 무자비한 학살과 숙청으로 아합 가문을 진멸(盡滅)하였으니
이로써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은 성취되었습니다.
아벧므홀라. - 이 지명의 뜻은 '춤추는 초장'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벧산 남쪽 16km 지점의 한 유적지를 아벧므홀라(Abel-meholah)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삿7:22주석 참조.
엘리사. - '엘리사'란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농부이긴 해도 상당한 재산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열 두 겨리 소를 부릴 수 있었던 그는 엘리야의 부름에 즉각 호응하여 예언자가 되었습니다(19-21절).
그리하여 엘리야가 승천한 이후(왕하2장) 엘리사는 약50년간(B.C. 848-797년경) 북왕국에서 활약하게 됩니다.
한편 학자들은 엘리야->엘리사의 계승이, 모세->여호수아의 계승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고 봅니다(Stek).
특히 한 사역이 대를 이어 성취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3)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17절).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본절에 보이는 하사엘-예후-엘리사의 연결은 일견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고 입장이 상충되는 세 사람이 마치 같은 목적을 위해 노력하는 동료처럼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서로 대립하는 국가의 왕들인 하사엘과 예후가 의식적으로 같은 목적을 품고 활동했을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북왕국에 재난과 죽음을 가져다 준 인물들입니다. 15, 16절 주석참조.
따라서 그러한 그들의 활동이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과 연결될 때, 본절과 같은 표현이 가능합니다.
한편 본절에서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죽이리라'는 표현은 앞서
'기름부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자적으로 취할 바가 못됩니다. 15절 주석참조.
즉 이는 엘리사가 직접 죽인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사역이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에 많은 심판을 가져다 준다는 뜻입니다.
4. 엘리야의 복귀와 엘리사의 부름(18~21절)
1) 이스라엘 가운데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천명을 남기겠다고 합니다(18절).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칠천 인을 남기리니. - '남기리니'('솨알')은 대단히 의미 심장한 말입니다. 원래 신정국가(神政國家)인 이스라엘의 정치적 운명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백성들의 신앙에 좌우되기 마련입니다(출 19:5,6).
따라서 극도로 타락하고 혼미한 시대는 하나님의 심판과 파멸을 불러 올 것이 자명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의 미래를 지속하게 할 소수의 무리를 항상남겨 놓으십니다.
이때 남은 자들(remnants)은 하나님의 주권적 택정(擇定)하심 안에서 유지되고 보존된다는 은총적 의미가 있습니다.
즉 이경우 심판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신실한 자를 남기셔서 역사를 지속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Stark, Jenni).
한편 본절에서 '칠천 인'은 실제의 수가 아니라 상징적인 수로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입니다(Keil등).
즉 이는 완전수인 7의 배수로서 미래의 역사를 담당하기에 충분한 숫자가 남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납니다(19절).
“[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토지 단위로서의 한 겨리는 8분의 5에이커, 즉 약 2,520㎡에 해당한다고 합니다(Sellers).
열 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 이 말 역시 열 둘째 쌍의 소를 부린다는 뜻일 수도 있고 열 둘째 밭을 맡아 간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20절 초반을 참고할 때 열 두 번째 쌍의 소를 맡아 부렸다는 뜻이 옳습니다.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 보통 겉옷은 그 사람의 직무를 나타내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 엘리야의 경우 그의 외모와 함께 특이한 복장은 항간(巷間)에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엘리야가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져준 것은 자신의 직무를 대신하라는 매우 상징적이고 효과적인 전달 방식입니다.
그러기에 엘리사 역시 이 동작에 담긴 의미를 즉각 알아 차렸스니다(20,21절).
3) 엘리사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한 후에 당신을 따르겠다고 합니다(20절)
“[20]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그가 소를 버리고...달려가서. –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소명자들의 비교적 공통된 특징입니다(마4:18-22;눅 5:27-29).
어부를 부르실 때에 즉시 따랐습니다.
*마4:18~22 “[18]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아마도 엘리사는 민족의 우상숭배에 대하여 깊이 탄식해 왔던 인물로서 평소부터 엘리야의 활약에 마음깊이 동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그는 엘리야의 부름에 조금도 주저함 없이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 '입맞춤'은 이스라엘인들의 일상적 인사법입니다. 창 33:1-11 강해,'구약 시대의 인사법' 참조.
한편 본절에서의 엘리사의 청원은 눅 9:59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즉 눅 9:59에 나오는 사람은, 부친의 생존 기간 동안은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식의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엘리사는 자신을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께 응당 드려야 할 인사를 드리려 한 것입니다.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 혹자는 이 말을 약간 힐난조의 말로 봅니다.
그러나 앞뒤 문맥으로 볼 때 이 말은 긍정의 뜻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이는 '안 될 이유가 뭐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사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행한 것은 선지자적 직무에의 초대입니다.
그런데 이 초대는 곧 부모와의 이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부모에게 입맞추고 오겠다는 엘리사의 요청은 어떤 주저함도 아닙니다.
도리어 이는 부모와의 영원한 이별을 감지하고 그 운명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결단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 역시 기꺼운 수락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Lange).
4)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습니다(21절)
“[21]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 이 경우는 당연히 '한 쌍의 소'를 도축(屠畜)하였다는 뜻입니다. 19절 주석 참조.
소의 기구(器具)를 불살라. - 이제까지 농부였던 엘리사가 농기를 불사른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결단의 상징적 표시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일종의 의식(儀式)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엘리사가 구태여 농기구를 불사를 까닭이 없었을 것입니다.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먹게 하고. - 여기서 '백성'이란 당시 엘리사와 함께 밭을 갈았던 일꾼들 뿐 아니라 그의 친척과 친구, 이읏 모두를 의미합니다.
즉 엘리사는 이제 이들과 헤어지는 마당에서 마지막 석별(惜別)의 잔치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 열왕기에서는 엘리야->여호수아의 계승과 대비하려는 의도가 있다 합니다(Stek).
그렇다면 본절은 바로 그에 해당하는 요소라 하겠습니다.
즉 여호수야가 모세의 수종을 든 것처럼,
엘리사도 엘리야의 수종을 든 것입니다.(출 24:13;수 1:1).
한편 왕하 3:11에 의하면, 엘리사를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왕하3:11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낙담한 엘리야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5~8절).
오히려 절망적인 하나님 나라의 영적 현실에 낙심하여 탈진한 그에게 천사를 보내 어루만지시고 떡과 물을 주어 위로하십니다.
그러고는 언약의 장소인 호렙으로 인도하여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나를 절망하게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변하지 않는 문제와 상황 앞에 주저앉지 말고 주 앞으로 더 나아가십시오.
2) 엘리야는 혼자만 남은 암담하고 답답한 상황을 거듭 토로합니다(9~14절).
이에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오셔서 “네가 어지하여 여기 있느냐?”고 거듭 물으십니다.
불평을 질책하지 않으시고 그가 서 있는 자리를 되돌아보게 하여 사명을 다시 붙잡게 하십니다. 혼자라고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자기 연민과 좌절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3)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맡기십니다(15~17절).
이스라엘과 아람의 왕을 세우고, 엘리야의 뒤를 이어 엘리사를 선지자로 세우는 일입니다.
그가 받은 사명이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역사의 한 부분이었듯이,
우리의 사명도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입니다.
상황이 힘겹다고 해서 마냥 손 놓고 현실만을 탓할 순없습니다.
지금 내가 일어나 수행해야 할 과업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주께서 주신 사명을 재발견하는”것입니다.
4) 사명과 함께,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믿음의 공동체와 동역자인 엘리사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십니다(18~21절).
나 혼자뿐이라는 교만과 자기 연민의 굴에서 나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수많은 동역자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최고의 영적 승리’바로 다음에 ‘최악의 영적 침체’가 찾아왔습니다(1~4절).
850명의 우상 선지자들과 홀로 맞선 엘리야가 이세벨의 보복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가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구합니다.
갈멜산의 승리는 끝이 아니라 긴 싸움의 시작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으시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역사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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