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이사야 33장1~24절
제목 : 이제 내가 일어나며
유다의 탄식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침묵을 깨고 일어나시며, 강포한 앗수르를 심판하신 후에 시온의 재판장과 왕이 되어 다스리실 것입니다.
1. 시온의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1~6절)
1) 화의 선언(1절)
“[1] 너 학대를 당하지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이고도 속임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여 화 있을 진저 네가 학대하기를 그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
앞에서 유다에게 내려진 '화'(호)가 본장에서는 '유다를 학대하며 속이는 자', 곧 앗수르에게 선고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애굽)의 도움을 의뢰하는 자의 결국은 파멸이나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결국은 구원이다'는 선지자의 일관된 확신에서 기인한 것입니다(Oswalt).
이것을 구체적인 역사의 배경 속에서 고찰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히스가야 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은 군대를 이끌고 유다를 공격하였습니다. 히스가야 왕은 막대한 양의 공물을 받쳐 그 침입을 저지하려 하였습니다,
산헤립을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약을 깨고 재차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왕하 18:13-17).
이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서 히스가야 왕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했으며 하나님은 그 종 이사야를 보내어 응답하셨습니다.
스미스(G. A. Smith)는 그것이 본장에 기록된 것이라 합니다.
선지자는 언약을 파기한 앗수르에 대해 재앙을 선포하는데, 그 내용은 '악인은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는 한마디로 요약 가능합니다.
2) 구원의 간구(2~4절)
(1)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2절)
“[2]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에 대한 깨달음은 기도를 통해서 주어질 수 있으므로 선지자는 문득 예언을 중단하고 기도를 삽입시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성도의 기도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⓵ 스스로에게 아무런 공적도 없음을 겸손히 시인하고,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의지하듯이 참으로 무력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은혜를 베푸소서').
⓶ 하나님의 도우심을 소망하고 믿음으로 인내해야 합니다('주를 앙망하오니').
(2) 민족들이 큰 소동을 벌리며 흩어집니다(3절)
“[3] 요란한 소리로 말미암아 민족들이 도망하며 주께서 일어나심으로 말미암아 나라들이 흩어졌나이다 ”
'요란한 소리'와 '주께서 일어나심'은 성도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현재의 위기 상황에 개입하셔서 그 원수들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청각적, 시각적으로 묘사한 말입니다.
'요란한 소리'에 대하여는 30:30;삼상 2:10;7:10;욥 37:4,5;40:9;시 18:13; 29:3-9; 77:18;104:7;단 10:6;계 1:10을 '주의 일어나심'에 대하여는 민 10:35;시 68:1을 참조하라.
본문은 아마도 산헤립의 군대가 여호와의 사자에 의해서 하룻밤에 궤멸된 사건과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37:36)
(3) 여호와를 대적하던 자들이 멸망합니다(4절)
“[4] 황충의 떼 같이 사람이 너희의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가 뛰어오름 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오르리라”
'황충'이라고 번역된 '하실'은 '잘라 먹다', '탐식하다'는 뜻의 '하살'에서 파생된 명사로, 메뚜기의 일종을 의미합니다(신 28:38;왕상 8:37;시 78:46;욜 1:4).
이들은 떼로 몰려다니면서 곡식을 남김없이 갉아먹었습니다.
비유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 메뚜기 떼가 들판을 휩쓸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앗수르군의 노략을 또한 그처럼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유다 백성들에 의해 노획될 것입니다.
3) 찬양(5~6절)
(1) 여호와께서 시온의 보호자로 찬양을 받으실 것입니다(5절)
“[5] 여호와께서는 지극히 존귀하시니 그는 높은 곳에 거하심이요 정의와 공의를 시온에 충만하게 하심이라 ”
승이의 결과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아지실 것을 묘사한 말로 본장의 서론부(1-6절)는 일단락됩니다
(Delitzsch,Oswalt).
'지존하시다'로 번역된 '니스가브'는 '사가브'동사의 수동 분사형으로, 높아지신 상태만이 아니라 높임을 받으시게 된 변화를 또한 암시합니다(Alexander).
지극히 '높은 곳'에 거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스스로 높은 자로 자처하실 뿐 아니라, 한편 그 백성에 대하여는 당신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셔서 시온 곧 예루살렘에 의와 공의를 충만하게 하십니다(Calvin).
(2) 여호와를 경외함이 보배입니다(6절)
“[6] 네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네 보배니라”
선지자는 계속해서 히스가야 왕의 통치하에서 백성들은 '안정감'(에무나)을 잃지 않고 '구원과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향유하게 되리라고 말하는데, 이 모든 것은 '여호와의 경외함이 너의 보배'라는 결론적인 말속에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 경외'(이르아트 야훼)는 하나님을 무서워한다기보다는 그의 본성을 바르게 인식함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기꺼이 복종하고 공경하려는 마음으로 그를 예배하고자 하는 내적인 자세를 가리킵니다.
다른 곳에서 이것은 '지혜의 근본(실체)'이라 불리기도 합니다(시 111:10;잠 1:7;9:10).
이같이 영적으로 개화되는 시대에 있어서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이지 않을 뿐더러 금과 은 같은 보물 대신 하나님 경외함을 그 즐거움으로 삼게 됩니다.
메시야 시대의 영적 속성들을 기록한 11:2과 비교하라.
2. 높은 곳에 거하시는 분(7~16절)
1) 탄식 절망적 현실(7~9절)
(1) 현재의 비참함을 슬퍼하는 용사의 애가로 시작합니다(7절)
“[7] 보라 그들의 용사가 밖에서 부르짖으며 평화의 사신들이 슬피 곡하며”
선지자는 앞에서 간략한 형태로 본장의 주체를 소개한 뒤에 다시 그것을 세부적으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진술합니다.
그는 먼저 아무데서도 도움 받을 길 없는 현재의 비참함을 슬퍼하는 용사의 애가로 시작합니다(7-9절).
언급된 '용사'(에르엘람)는 평행하는 '평화의 사신들'과 동의어로서, 평화 협상을 위해서 산헤립이 평화의 조건으로서 내세운 금과 은을 가지고 갔으나(왕하 18:14), 산헤립은 평화의 조건으로서 다시 예루살렘의 완전 항복을 요구하면서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습니다.
(2) 앗수르의 침공으로 인해 유린당하는 유다의 형편을 묘사합니다(8절)
“[8]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어지며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사람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
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치며 - 대로가 황폐하여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자 끊기고 여행객도 보이지 않으며 장사하는 이들의 자취도 찾아볼 수 없는 것(삿 5:6)은 전쟁 상황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 어떤이는 '성읍들'(아림)을 '중인들'(아딤)로 수정해서 읽을 것을 제안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언약을 파기했다'는 말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Duhm, Oswalt, J. Watts).
그러나'성읍들'로 읽어도 뜻이 통하는 터에 굳이 맛소라 본문을 바꿀 필요는 없는 듯이 보입니다.
(3) 유다의 참상이 땅에 반영됩니다(9절)
“[9]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레바논은 부끄러워하고 마르며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을 떨어뜨리는도다”
가장 비옥한 땅으로 일컬어지던 대표적인 네 곳들-레바논, 사론, 바산, 갈멜-이 하나같이 황폐해집니다.
백향목과 전나무로 꽉차 있어서 언제나 울창한 이스라엘 북쪽의 레바논은 바짝 말라 볼 품 없는 모양이 될 것이며(2:13), 감멜 산 남쪽 기슭에서 욥바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의 넓은 평원으로서 아름다운 들풀과 목초지를 자랑하던 사론(대상 27:29)은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사막과 같이 될 것이며, 동과 서에 위치한 비옥하고 기름진 땅들로서 과일 나무와 삼람으로 유명한 바산 (2:13;렘 50:19;미 7:14;슥 11:2)과 갈멜은 나뭇잎들을 떨어뜨리게 될 것입니다.
2) 응답 파괴자들의 심판(10~13절)
“[1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아지리니[11]너희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할 것이며 너희의 호흡은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것이며 [12]민족들은 불에 굽는 횟돌 같겠고 잘라서 불에 사르는 가시나무 같으리로다 [13]너희 먼 데에 있는 자들아 내가 행한 것을 들으라 너희 가까이에 있는 자들아 나의 권능을 알라”
그분의 의지에 거슬러 행동하는 자들은 생명력 없는 겨(마른 플)를 잉태하여 부소시개로 쓰이는 지푸라기를 낳고, 이들의 거친 숨은 멸망의 불을 더 지필 뿐입니다.
이들은 등에 마른 지푸라기를 지고 불구덩이로 달려드는 자들과 같습니다.
계획 자체가 실패를 잉태하고 있기에 받드시 멸망합니다.
이들은 불에 타고 남은 횟돌(재)처럼, 불에 던져진 가시나무처럼 될 것입니다(12절).
멸망에서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흔적도 없이 완저히 사라집니다.
너희 먼 데에 있는 자들아 내가 행한 것을 들으라 너희 가까이에 있는 자들아 - '먼데 있는 자들'과 '가까이 있는 자들'은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모든 곳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Alexander).
앗수르를 파멸시킨 하나님의 권능에 너무나 놀랍고 위대한 것이어서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족하다는 말입니다.
3) 시온에 거주 할 수 있는 자(14~16절)
(1) 거룩하신 분의 현존은 불의한 자들에게는 치명적입니다(14절)
“[14]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시온의 죄인들'곧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 거하면서도 그 행위와 습성이 앗수르와 별로 다를 바 없는 불법하고 불의한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앗수르를 삼킨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그들 또한 삼킬 줄 모른다는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2) 구원받은 시온에 살 수 있는 자의 자격 조건으로 여섯 항목이 제시됩니다(15절)
“[15]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
앞절에서 제기된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선지자는 그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 보입니다. 시 15편; 24:3-6과 유사한 내용입니다.
토색한 재물을 가중히 여기는 자. - '토색한 재물'(베차 마아솨코트)은 다른 사람을 착취함으로 해서 얻어지는 부당한 소득을 가리키며, '가중히 여기다'(마아스)는 말은 '거절하다', '멸시하다'는 뜻입니다.
의로운 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연약한 자를 이용하거나 억누르지 않으며 더 나아가 재물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으므로 그의 손은 언제나 깨끗합니다.
(3) 악에서 떠난 의인은 외부의 위협에서 벗어나 풍족하게 살게됩니다(16절)
“[16]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경건한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로부터 풍족한 사랑을 호흡하며 복된 삶을 영위해 나갑니다.
선지자는 그것을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⓵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 모든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몸소 그의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높은 곳'(메로밈)은 적의 위협이나 어떠한 자연의 재해도 접근 불가능한 난공 불락의 요새 곧 가장 안전한 장소를 가리킵니다(25:12).
⓶ 하나님께서 일상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양식'(레헴)과 '물'(밈)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으로 구비해야 할 필수품들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축복은 오직 하나님으로 주인을 삼고 그 보시기에 의롭고 경건하게 살기를 힘쓰는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입니다.
그럴진대, 성도가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마 6:33)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3. 시온의 왕 여호와(17~24절)
1) 아름다운 모습의 왕(17절)
“[17]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 광활한 땅을 눈으로 보겠고”
선지자는 계속해서 앞에서 말한 경건한 신자들을 향해 그들이 누릴 풍요한 미래의 모습을 말합니다(17-24절).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여기 언급된 '왕'(멜렉)이 히스가야 왕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히스가야 왕은 유다의 위기 상황에서 찢긴 의복과 삼베옷을 입은 수치스런 모습을 보였으나(37:1) 위기가 끝나고 적들이 물러간 이후에는 다시 존귀의 위엄을 회복한 영광스런 모습으로 백성들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Delitzsch, Alexander).
그러나 이것을 배타적으로 히스가야 왕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다. 왜냐하면
(1) 동일한 문맥 속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분명히 묘사하고 있으며(22절),
(2) '왕' 앞에 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는 사살은 선지자가 역사상의 특정한 왕뿐 아니라 이상적인 왕을 염두 해 두고 있음을 시사하며,
(3) 히스가야 왕이 다스렸던 협소한 영토와 본문에 언급된 '광활한 땅'과는 문자적인 의미에서는 잘 조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히스가야 왕은 메시야의 모형으로서 거론되었다는 견해를 취합니다(Calvin).
2) 사라지는 이방 압제 자들(18~19절)
“[18] 네 마음은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해 내리라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공세를 계량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19] 네가 강포한 백성을 보지 아니하리라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하며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니라 ”
구원 받은 백성들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그들이 겪었던 두려웠던 순간들을 회고하게 될 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희열과 감격 속에서 승리의 환호성을 터트리게 될 것입니다 : '지난날 우리를 그토록 괴롭히던 자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어디있느냐?'(고전 1:20;15:55 참조).
한때 공물과 전리품들을 계산하고 장부에 기입하던 서기들(소페르)과 그 공물을 저울에 달아 무게를 재던 관리들(쇼켈)과 탑 (망대)을 세워 도성을 습격하려던 계획을 세우던 앗수르 관리들(소페르 에트-하미그달림)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더불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들을 지껄이며 길길이 날뛰던 '강포한 백성'(암 노아즈) 곧 앗수르인들 또한 꿈과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
3) 시온의 샬롬(20~24절)
(1) 하나님의 백성은 예루살렘에서 안전과 풍요를 즐기며 영원히 살게 됩니다(20절)
“[20]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결코 정복되지 않는 도성 예루살렘은 그곳에서 하나님과 백성의 만남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축제(절기)의 성읍'(키르아트 모아테누)이라 불립니다.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란 말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소가 고정되기 전, 즉 광야를 떠들며 대적과 싸우던 불안정한 시절에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장막'(성막)이라는 협소하고 유동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장막은 본래 하나님의 거주하심을 상징하는 처소로 세워졌습니다(출 25:8; 29:44,45).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 '거주하심'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거주 한다'는 말은 성경적 의미에서 '친밀하게 연합함을 뜻합니다(창 30:20; 시 5:4).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는 자력으로는 건널 수 없는 깊은 심연이 놓여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제사 드리는 행위를 통하여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백성의 참 교제는 그런 연후에라야 허락되었습니다.
이 경우 성막은 동물의 피를 뿌려 백성의 만남이 실현되는 '친교의 공간'(오헬 모예드)으로 기능하였습니다(출 40:2).
성막은 언제나 12지파의 한 가운데 위치하였으며 그들과 더불어 진퇴(進退)를 같이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하시며(임마누엘의 원리), 왕으로서 그들을 다스리심(신정의 이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장막은 하나님의 통치(하나님의 나라)의 모형론적인 표현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새것이 옛것을 대신하고 실재가 그림자를 대신하는 그때에는 응당 폐기되어야 할 것입니다(히 11:9,10).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적들로부터 구원하시는 미래의 그날에는 '임마누엘의 원리'(21절)와 '신정의 이상'(22절)은 더욱 완전한 형태로 구현될 것입니다(G. Vos,Biblical Theology).
(2) 여호와께서 적들이 침입할 수 없게 해주십니다(21절)
“[21] 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 곳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으나 노 젓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하리라 ”
참으로 '권능 있는 자'는 예루살렘을 위협하는 앗수르가 아니라 예루살렘과 함께하시며 그 도성을 지키시는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함께하시면 그 도성은 큰 강이 빙 둘러서 아무라도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천혜의 요새들처럼 그 영구한 안전을 보장받게 될 것입니다(시 46:4-5;겔 47:1-12;슥 14:8).
선지자는 아마도 유브라데 강에 둘러싸인 바벨론이나 나일 강에 둘렀진 애굽의 테베를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3) 여호와께서 우리의 재판장으로 왕으로 우리를 직접 통치하십니다(22절)
“[22]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이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라 ”
예루살렘과 함께하시며 그 권능으로써 도성을 방비하시는 여호와가 본문에서는 거의 동일한 뜻을 가진 세 가지 칭호로 불려집니다.
⓵ 그는 우리의 재판장이시다(쇼푸테누).
그는 공의에 입각하여 백성들의 옳고 그름을 준열하게 판단하십니다(11:3,4).
⓶ 그는 우리의 율법 수여자이시다(메호케케누).
그는 하나님으로서 마땅히 따라야만 되는 삶의 규범을 제정해 주십니다(신 33:21).
⓷ 그는 우리의 왕이시다(말루케누).
그는 이스라엘을 통치하십니다(삼상 12:12).
그에게 현대적 의미의 입법권, 사법권, 행전권이 모두 속해 있습니다.
이는 그분만이 인생과는 질적으로 다른 완전한 분이시며, 우리의 참된 주관자이시며, 우리의 유일무이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4) 홀로 싸우시기에 전쟁을 준비하거나 싸움에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23절)
“[23] 네 돛대 줄이 풀렸으니 돛대의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고 돛을 달지 못하였느니라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
옛 주석가들은 물론 현대의 많은 주석들까지도 21절의 '배'(앗수르를 가리킴)의 표상이 본문에서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데는 큰 난점이 따르니, 다른 데서 앗수르가 항상 남성형으로 취급되는 반면, 본문의 '하발라이크'(너의 돛대줄)의 어미는 여성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앗수르가 아니라 유다가 언급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Delitzsch, Oswalt).
앞에서 승리자로 묘사되었던 유다가, 여기서는 정비조차 제대로 안 된 낙후한 배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아즈) 모든 것이 뒤바뀝니다.
유다의 결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앗수르에게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간명합니다 : 승리는 외적인 조건에 달려 있지 않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달려 있습니다.
(5) 구원받은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은 죄에서 용서함을 받았기에 그곳에서 병든 자나 연약한 자가 없습니다(24절)
“[24] 그 거주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에 사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여호와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니 생명을 위협하는 어떤 학한 세력도 예루살렘에 발붙일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외부의 위협에서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질병이나 사고나 재앙과 같은 모든 부정적 세력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4절 이웃을 학대한 앗수르를 심판하십니다.
세상은 이미 힘의 균형이 무너졌기에, 약자는 늘 일방적인 피해자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불의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나셔서 학대받는 이들과 학대를 일삼는 이들의 처지를 뒤바꾸십니다.
2절 날마다 삶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매일 살아갈 힘을 주시며, 환난 때에 피할 바위와 구원의 능력이 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사소한 일상에서 삶의 중요한 순간까지 ‘하나님만 나의 힘’이라는 결연한 고백이 있어야겠습니다.
5,6절 시온을 통치하시는 왕입니다.
지금 시온에 불어닥친 위기도 하나님이 그들을 징계하시는 과정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로 시온을 다스리시고 자기 백성을 적으로부터 보호하시며, 그들로 지식과 지혜가 풍성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알고 경외하는 백성은 그들의 시대를 평안히 보내게 될 것입니다.
7-13절 유다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예루살렘 멸망이 초읽기에 들어간 그때, 극적으로 일어나셔서 상황을 바꾸실 것입니다.
아무리 막강한 앗수르 군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바람의 겨처럼 흩어질 것입니다.
이로써 멀고 가까운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권능을 알게 됩니다.
악의 권세 앞에 실망치 말고,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비교할 수 없는 위엄과 영광을 바라봅시다.
14-16절 시온을 정결케 하십니다.
시온의 경건치 않은 자들을 삼키는 불에 태우시고, 정직하고 의로운 자들을 견고한 산성에 두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안과 밖을 가리지 않고 불경건하고 불의한 자들을 태울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자신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 있는지 자신을 돌아봅시다.
17-24절 회복될 시온의 왕이 되셔서 다스리십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그들을 압제하는 나라도, 병든 자도, 고통도, 정죄함도 없을 것입니다.
그 나라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고, 지금 그리스도의 통치가 펼쳐지는 곳마다 그 이상이 실현되고 있습니다.
[기도]
공동체-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주님을 경외하는 백성으로 살게 하소서.
열방-현재 세계 기독교 선교사는 42만 명 정도인데, 그 증가율은 세계 인구 증가율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세계 각국에서 선교사들이 많이 배출되어 복음이 곳곳에 전파되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