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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재 이상설선생 기념사업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재용
일 자 |
지 역 |
교통편 |
시 간 |
여 행 일 정 |
비고 |
제1일 (금요일) 8/2 |
속초 |
스테나 대아라인 |
07;20 08:00 14:00 16:00 |
전주공설운동장 익산 앞 출발 속초 국제 여객 터미널 1층 대합실 집결 속초 출발 / 블라디보스톡 행발 < 소요시간 약 21시간 > |
석:뷔페식 |
호텔 : 스테나 대아라인 | |||||
제2일 (토요일) 8/3 |
블라디보스톡 |
스테나 대아라인
전용버스 |
17:00
19:00
21:00 |
블라디보스톡 도착 후 입국수속 ( 약 1시간 소요 ) 석식 후 현지 가이드 미팅 후 “극동을 정복하다” 뜻의 블라디보스톡 시내관광 ◆혁명광장 ◆잠수함박물관 (외부) ◆영원의 불꽃 ◆개선문 호텔 이동 투숙 (6-9월 일몰시간 저녁 9시 - 10시) |
조:뷔페식 중:뷔페식 석:현지식 |
호텔 : 블라디보스톡 호텔 리모델링 룸 <★★★> 시차 : +2시간 | |||||
제3일 (일요일) 8/4 |
블라디보스톡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톡 |
시베리아 횡단열차 구간체험
전용버스 |
전일 |
극동 고려인 1만명이 사는 우수리스크이동 ◆블라디보스톡 역사 9288KM의 시발역이자 종착역인 블라디보스톡 역사 방문 시베리아 횡단열차 구간 체험 ◆1937년 스탈린 고려인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강제이주 시발역인 라즈돌리예역 방문 우수리스크 도착 후 중식 ◈최재형 거주지 첫 번째집 : 우수리스크시 수하노바 32번지 ◈최재형 거주지 두 번째집 : 우수리스크시 보로다르스카 야 38번지 ◈추풍 뿌찔로프카(육성) 농민청년학교 : 우수리스크 뿌질로 프카 ◈고려(조선)교육전문학교 : 우수리스크시 아게예바 거리 75 번지 ◈이상설선생 유허지 : 우스리스크시 교외. 레르몬토바 거리 를 향해 외곽으로 나가 솔다트스코예 호수를 지나 라즈돌리 노예강가, 우쪼스노예 마을 주변, 라즈돌리노예 강변 ◈연해주 기타지역(그로데코보 마을) : 포크라니치나야 외곽 세베르뉘 고로도크 ◈조선사범전문학교 : 우스리스크 치체리나 거리 54번지 ◈전로한족회대표자회의 개최지 및 전로한족중앙총회 본 부 대한국민의회(고려국민회) 결성지 : 우스리스크 블로다 르스카야 15번지 앞, 우수리스크시 체체리나 15번지 일대, 거 북이공원에서 가까움, 현재 러시아 초등학교 기숙사로 사용, ◈전로한족회중앙총회, 청구신문사, 한인회관 건물 : 우수리스크 체체리나거리 31번지 주변 일대 블라디보스톡 귀환 호텔 이동 투숙 |
조:호텔식 중:현지식 석:한 식 |
호텔 : 블라디보스톡 호텔 리모델링 룸 <★★★> 시차 : +2시간 |
일 자 |
지 역 |
교통편 |
시 간 |
여 행 일 정 |
비 고 |
제4일 (월요일) 8/5 |
블라디보스톡 |
전용버스
스테나 대아라인 |
07:00 08:00
09: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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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조식 후 블라디보스톡 시내관광 ◆ 블라디보스톡 전망대 ◈조명희 문학비 :블라디보스톡 악싸꼬브스카야 12A번지 박물관 밖 공원 ◈독립문터 : 블라디보스톡 하바로브스카야 5번지 ◈한민학교 : 블라디보스톡 하바로브스카야 7번지 일대(추정) 관광 후 블라디보스톡 항구로 이동 출국수속 및 승선 중식 블라디보스톡 출발 / 속초 향발 (23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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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텔식 중:뷔페식 석:뷔페식 |
호텔 : 스테나 대아라인 | |||||
제5일 (화요일) |
속초 |
스테나 대아라인 |
08:00 |
속초 도착 후 익산향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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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일(8월 2일)
우리가 다녀오게 되는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지역은 발해시대 15부 중의 하나인 솔빈부 지역이며 우수리스크가 행정의 중심이었다.
연해주지역은 한말 이래 우리 동포들의 망명지가 되어 이곳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여 1919년에는 손병희를
이번 여행이 원래 우리 해우회 단독행사로 치러지기로 하였으나 갑자기 김선동 선생팀과 합동으로 가게 되었다. 모두 전주와 익산에 사는 분들이며 이수남 사장까지 35명이 일행이 되어 전주덕진운동장에서 7시 30분, 익산에서는 8시에 출발하였다. 휴가철이이어서 고속도로가 밀려 출항지인 속초에 오후3시 30분에 겨우 도착하다. 1만 5천톤 급 스테나 대아라인은 550여명의 승객을 싣고 4시 40분 부두를 떠난다. 도착은 내일 오후 5시라니 마치 크루즈여행처럼 회원들이 충분히 함께 즐길 수 있는 기회다. 배를 이용하는 여행은 값도 저렴하지만 이처럼 회원들이 여유로운 시간을 함께 하는 점도 큰 장점이다. 배안에서의 식사는 아침과 저녁은 1만 원짜리, 아침은 7천 원짜리 한식 뷔페다. 저녁식사는 모두에게 아주 만족스러웠다.
제2일(8월 3일)
새벽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 갈매기들이 나른다. 가까이 고기잡이 어선들도 보이는데 아주 작은 배에 두어 명이 타고서 일을 하는 모양으로 가까운 곳에 몇 십톤은 됨직한 母船도 보인다. 열악한 북한 어선이라고 하는데 확인은 안 되는 말이나 배의 모양새를 보면 그럼직도 하다.
오전 내내 엘레이 다저스의 류현진이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10승을 달성하는 시합과 이어 추신수의 신시내티가 세이트 루이스팀과 싸우는 경기를 관람하며 오후 5시에 항구인근에 도착하다. 그런데 예고 없는 태평양함대의 훈련으로 인하여 입항이 내일아침까지 늦어진다는 방송이 나오니 많은 걱정이 생기다. 내일 아침에 들어가게 되면 오후 블리디보스톡에서의 답사일정에 차질이 생기고 호텔에서 겨우 1박밖에 못하게 되면 여행사에서도 문제가 생기지만 우리도 답사여행 재미가 덜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행이 8시에 입항이 허가되고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상당히 큰 식당으로 1층에서는 생일파티가 벌어져 부부들이 춤을 즐기고 있고 2층에서는 결혼식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보는 데에도 아무 부끄러움 없이 춤을 즐기는 모습에서 역시 동양속의 서양임이 느껴진다. 느닷없이 덩치도 크지 않은 청년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안고 식당 문밖에 서있던 우리 앞을 쏜살같이 달려 나가 간이 떨어질 뻔 했다. 길이 고르지도 못한데 100m달리듯 하니 행여 넘어져 신부가 다칠까 여간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연해주는 우리 한반도와 국경이 맞닿아 있음에도 불과 100여년 사이에 서양이 되어버린 곳이 이곳이 아닌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에서 동쪽 끝까지 걸친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이고 인구는 1억 5천만 명의 대국이다. 소련이 해체(1991)되고 현재는 행정구역은 46개 주(oblast), 21개 공화국(republic), 4개 자치 오크룩(autonomous okrug), 9개 크래이(kray), 2개 연방시(gorod;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1개 자치주(autonomous oblast';예브레이)로 이루어져 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海蔘威로 불리던 연해주는 46개주중 하나이며 면적은 16만 6천여 제곱킬로미터로 우리 대한민국의 1.5배이며 인구는 220여만 명이고 그 州都인 블라디보스톡은 인구가 약 60여만 명이다. 블라디보스톡은 1860년 러시아가 치지한 이후 1890년대부터 무역항으로 크게 발전하였고 1903년 시베리아 철도가 완전히 개통되어 모스크바와도 이어지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출발하여 모스크바까지 9,288km를 운행하는 시베리아열차는 세계에서 가장 긴 직통열차로 유명하여 한국인들은 언젠가 한번은 꼭 이루고 싶은 열차여행의 로망이기도 하다.
현재 러시아의 경제는 상당히 안정되어 국민소득이 1만 달러 정도 되므로 생활이 어려운 모습은 느껴 볼 수 없다. 비록 공산국가였지만 그래도 서양 선진국민이어서인지 도시의 건물이나 사람들의 옷차림, 거리의 환경과 질서가 선진국 다름없다.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 인들이 많지만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도 있다하고 특히 노동자로 보이는 사람들은 전형적인 러시아인이 아닌 사람들로 보인다.
저녁식사 후 늦었지만 가이드는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재촉한다. 가이드는 23세의 대학생 박근호 학생인데 자칭 러시아 유학생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스크바에서 만나 낳은 최초의 모스크바 출생 한국국적인이라 한다. 현재 부모는 부산에 살지만 박군은 고등학교 때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고 현재 대학 1년을 수료한 휴학생으로 모든 학비는 스스로 벌어서 감당한다하니 그 자립심이 대단하다. 부모의 경제력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그는 능히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자생력이 넘침을 보여주고 있다. 훌륭한 청년이다. 항구근처에 있는 이차대전 참전용사 기념비와 참전 잠수함, 영원의 불꽃을 보고 근처 태평양 함대 사령부(과거 극동함대 사령부)건물을 보다. 한국인들은 현대호텔과 블라디보스톡 호텔을 주로 이용한다는데 이 블라디보스톡 호텔은 건물 외관은 썩 괜찮고 위치는 해상공원부근에 있어 아주 좋지만, 시설은 우리나라 시골 여관만도 못하다. 함포사격을 하는지 11시 야밤중에 대포소리가 요란하였다. 한국여행객들과 중국인들이 호텔에 가득한데 전북 청소년 연맹학생들과 함께 온 전주여상에 근무하는 최명순 선생을 만나다. 무주고에서 6개월을 함께 근무했고 당시 실과부장이었다.
제 3일(8월 4일)
모닝 콜이 없다. 시설 노후 때문이다. 우리나라보다 두 시간이 빨라 핸드폰에 알람을 4시부터 여러 개 저장했으나 미처 요일을 지정하지 않아 소용이 없었는데 다행이 양드리 핸드폰에 월드 컵팀 친선경기를 보기 위해 예전에 3시에 저장해 놓은 알람이 있어 미리 일어날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이곳 시간으로 5시이니 오히려 잘 된 일이 되었다.
아침 식사는 간단한 뷔페식으로 내 입맛에 딱이다. 햄, 소시지, 호박무침, 계란, 빵, 음료, 커피 등이 있어 아주 가볍게 먹기 좋다.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먼저 8시 30분에 출발하여 신한촌 기념비를 찾았다. 항구에서 불과 버스로 5분 거리이니 우리 교민들이 살았던 신한촌 마을이 중심지에서 아주 먼 변방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신한촌은 없어졌으나 이곳 현지의 교민들이 기념비를 세운 것이며 공원처럼 우리 영사관에서 잘 관리하고 있다. 바로 뒷 건물이 한인학교라고 하는데 이곳 해삼위에 200여명의 韓國人이 살고 있으며, 연해주 전 지역에는 약 400여명의 韓國人들이 산다고 한다.
핏빛 공원내에 있는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장 큰 러시아정교회를 찾았다. 가이드가 아직 대학생이라 세계사와 러시아사에 미숙하므로 내가 대신 러시아정교회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 드리다.
블라디보스톡역이다. 역사가 아주 근사하고 시베리아 열차의 시발점이다. 역내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열차에 올랐는데 열차여행은 맛 뵈기로 40여분 가고는 시골역인 오골라야역에 내린다. 가는 동안 철로 양변은 마을이 줄지어 나타난다. 오른쪽은 낮은 산이 이어지고 마을이 많고 왼편은 바다와 해안마을이 종종 나타난다. 작은 역임에도 작년에 개최한 에이펙 회담을 준비하면서 이곳 역에도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고 최신식 고가다리도 설치되어 있다. 선진국의 모습이다. 역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우리 교민들이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당한 쓰라린 아픔의 역사를 지닌 첫 번째 역인 라즈돌라역을 찾았다. 당시 이곳 다섯 개의 역에서 우리 교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강제로 열차에 태워져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恨의 驛舍다. 이곳 블라디보스톡의 자가용들은 대부분 일본산으로 운전석은 당연히 왼편이다. 통행은 오른편이니 운전석이 왼편이고 오르내리는 차문은 오른쪽이어야 하는데 일본차가 그 반대여서 불가피 버스만큼은 우리 한국산을 수입하여 운행하므로 도어에 우리 한글로 <자동문>이라는 글씨가 그대로인 차들도 있다.
이곳의 자연은 우크라이나 부근에는 산이 있지만 우스리스크로 가는 길은 온통 평원이다. 산이 없는 것은 만주와 같은데 그곳은 논으로 개발이 되었지만 이곳은 초원 그대로의 상태이다. 산에는 주로 활엽수로 자작나무가 많다.
이곳 교사들의 월급이 22만원이고 의사는 15만원, 교수는 약 50만 원 정도이나 중장비 기사나 선원이 월급이 많고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하면 연봉이 수 천 만원씩이라 하니 아직 공산국가의 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교수들은 자부심이 강하여 수업을 철저히 하고 지각생을 입실을 시키지 않을 정도로 강한 지도권한을 행사한다고 한다. 월급이 적으므로 대부분 맞벌이를 하고 아르바이트로 통역이나 학생들 리포트작성을 도와주어 수입을 올린다로 한다. 중국어학과나 한국어학과가 인기가 있고 학생들의 학구열이 대단하고 학교폭력은 거의 없다니 참으로 부러운 일이다. 하교와 교사들이 권위가 있고 학생들의 비위가 드러나면 학교에서 학부형을 소환하며 학부모들은 당연히 따른다고 하니 또한 부러운 일이다.
가이드가 갑자기 김정일 생가 방문을 제안하여 놀랐다. 여행계획에는 전혀 없던 일인데 근처에 있으니 원하면 들른다는 반가운 말이다. 김일성은 1937년 6월 국내조직과 연계하여 압록강 상류인 혜산진의 보천보(普天堡)를 습격하였으나 두만강 일대의 국경지대에서 유격활동, 그 뒤 소조활동으로 전환하면서 일본토벌군의 추격으로 연해주 지방으로 이동, 1945년 8월 소련군의 진격과 함께 대원들을 인솔하고 원산으로 상륙한다. 연해주이동 첫 시기에 이곳에서 살았고 김정일은 이곳에서 출생한 것이 틀림없는 것으로 국내 사학자들이 단정하고 있다 한다. 김일성은 1912년생이고 김정일은 1942년 4월생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하바로부스크로 이동한 것이 틀림없는데 북한은 김정일이 백두산 밀림에서 태어났다고 신격화하여 선전하며 우상화 놀음을 여전히 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집은 큰 길에 가까운 붉은 벽돌집으로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러시아는 건축 내구연한을 보통 200여년으로 삼기에 여전히 그 건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 근처가 군 부대였다니 만주에서 소련의 보호를 받기 위해 이동한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부대가 이곳에 주둔한 것이리라.
우수리스크에 도착하여 3시에 2009년에 개관한 고려인 문화센타를 방문하였다. 우수리스크에는 한인들이 무려 1만 8천여 명이 살고 있어 20만 전체인구의 약 10%라고 한다. 한인회에서 운영하는 이 문화센타에는 박물관을 비롯하여 각종 우리 문화를 배우는 연수가 이루어지고 있고 한국에서 강사들이 파견되기도 한다.
水分河(수이푸네) 옆에 있는 발해토성과 이상설(1870-1917)선생 유허비를 찾았다. 발해토성은 그냥 나무들이 있는 토성이기에 지나면서 보기만하고 부근의 유허비에서 내린다. 이상설 선생이 유언으로 자신을 화장하여 이곳 水分河에 뿌리라 하셨으므로 이곳으로 추정하고 비를 세운 것이다.
시내에 들어와 독립운동가이신 최재형(1858-1920)선생의 생가)와 활동하신 건물을 찾았다. 사업으로 성공하신 선생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독립운동에 힘쓰시다가 무장투쟁 중 돌아가셨다.
버스로 2시간 30분을 달려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한다. 저 끝없이 펼쳐지는 대평원이 아름답기 그지없고 부럽기 그지없다. 저 넓디넓은 대 평야를 이유는 모르나 이 나라가 농사를 짓지 않고 자연 그대로 놓아두어 온통 풀들이 뒤 덮고 있을 뿐이다. 이곳에서 2천리나 떨어진 하바로부스크까지도 모두 이러할까?
구한말 우리 이주민들이 만주에서 벼농사를 시작했듯이 수 백리 북쪽에 있는 싱카이 호수 부근에도 우리교민들이 벼농사를 지었으나 구소련이 우리 교민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고 농사를 중단시켰고 최근 현대와 대순진리회에서 다시 개척하고 있다고 하니 기쁜 일이다.
저녁에는 식사 후 모처럼 시간 여유가 있어 해안공원으로 모두 산책을 나가다. 해안공원 일대에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을 비롯한 많은 호텔들이 구릉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 기후가 마치 초가을 같아 나는 내내 반팔 T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만 지내게 되니 한국의 더위를 잘도 피해 나온 것 같아 모두들 흐뭇해한다.
제 4일(8월 5일)
바쁘지 않는 일정인지 8시 2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조명희(1894-1938)문학비를 찾다. 신경향파 작가로 활동하고 KAPF 결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작가로 활약하다가 이곳으로 와서 활동중 행방불명되었다는데 이곳 대학 구내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블라디보스톡 전망대(일병 독수리 전망대)인데 보슬비와 안개로 인해 바다는 보이지 않고 기념품 센타에서 기념품을 구입하는데 그치다.
예정에 없던 율 브린너(1920-1985)생가를 찾으니 기쁜 일이다. 율 브린너가 시베리아 출신인줄은 알고 있었으나 이곳 블라디보스톡 출신인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광산기사인 아버지와 지식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데 자신의 어머니는 일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극동의 최변방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소르본느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건너가 배우가 되고 1956년에 <왕과 나>로 아카데미 주연남우상을 받았으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 아닌가?
율 브리너는 192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나 7살까지 살다 중국 하얼빈으로 이사를 했고 당시 일제 치하에 있던 조선땅에서 벌목업과 숙박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매년 여름 북한 함경도 지방에서 보내곤 했다고 아들인 록 브리너 교수가 말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혁명광장으로 간다. 1917-22년의 러시아 혁명시 이곳 블라디보스톡 볼셰비키혁명의 승리를 기리는 곳으로 거대한 동상이 참으로 일품이다. 바로옆에 연해주 청사가 있다.
오전 11시에 우리를 기다린 스테나 대아라인이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한다. 올 때보다 러시아인들이 많아졌는데 러시아인들이 우리나라를 이처럼 많이 드나드는 줄도 미처 예전에 생각지 못한 일이다. 72시간 동안 연해주는 무비자 여행이 가능하니 이미 연해주는 언제든 마음먹으면 큰 비용부담 없이 다녀가는 곳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5일(8월 6일)
아침 8시에 도착하니 23시간 걸렸다. 갈 때에는 무려 25시간이었다. 버스에 올라 집에 오는 길에 여주신륵사에 들리다. 나는 1976년 학과 단체 답사시에 처음 찾은 이후, 직원여행, 수학여행, 양드리와의 여행 등 적어도 네 번은 다녀간 절인데 다른 회원들은 모두 처음이라 한다. 남한강변에 위치한 상당히 큰 절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들 다녀가는 곳은 아님을 알았다. 나도 역시 최근 15년래에는 와보지 못한 터라, 강변 저편에는 호텔과 모텔이 들어서고 아파트 단지까지 보이니 옛 정취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진 모습이어서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하는데 처음 찾는 이들은 매우 아름답다고 말한다. 김호길 총무님, 박숙경 여사님 회원들 먹을거리 준비하시느라 수고하신 덕에 무사히 피서겸 독립운동 유적답사를 아주 잘 다녀왔다. 끝
해우회원 모두 함께
김정일 생가
연해주 평원
영원의 불꽃앞에서
선상에서 일렬횡대로
배안에서의 여유
네명은 어디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