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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잡기 東京雜記
해제
1. 동경잡기(東京雜記)의 서지사항
동경잡기로 간행된 판본들의 계통과 전승 양상을 살펴보면 대체로 1670년 초간본(初刊本), 1711년 중간본
(重刊本), 1712년 간오본(刊誤本), 1845년 개간본(改刊本), 1845년 보판본(補板本),
그리고 조선광문회본 등이 있다.
이중 신연활자본인 조선광문회본을 제외하면 모두 목판본이다.
이것들은 간행관련 인물의 기록, 발문의 유무 등에 따라 구분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목판본 동경잡기의 판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초간본은 1670년 경주부사 민주면(閔周冕, 1629~1670)이 간행한 것으로 1670년 이후부터 1711년 중간되기
이전까지 인쇄된 것을 말한다. 권말에 경주부사 민주면을 비롯하여 당시 간행에 참여한 인물의 명단이 판각되어
있다. 현재 규장각 한국학연구원(奎1255)과 고려대 만송문고(B10 A146B)에 소장되어 전해진다.
1711년에 나온 중간본은 경주부윤 남지훈(南至熏)이 1670년 초간본을 내용 변화 없이 새롭게 판각하여 중간한
것인데, 권말에 중간하게 된 경위를 밝힌 남지훈의 발문이 있다.
초간본에 비하여 현전본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주요 소장처로는 규장각(奎1375, 奎3273), 국립중앙도서관 일산문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B15BB-4C),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도서관 등이 있다.
1712년에 나온 판본은 잘못된 부분을 교정한 간오본(刊誤本)이다. 1712년에 경주부윤 권이진(權以鎭)이 1711
년 판각한 책판 뒤에 자신이 간행에 따른 오류를 추가한 것으로 그 경위를 밝힌 발문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B15BB-4D)에 현전본이 있다.
1845년 개간본은 1845년 경주부윤 성원묵(成原默)이 1711년 중간본의 내용을 일부 첨삭하여 부분적으로 개간
하고 나머지는 모두 번각하여 개간한 것으로 권말에 성원묵 등 당시 간행에 참여한 인물의 명단이 판각되어
있다.
현전본으로는 규장각(奎5458), 장서각(2-4232), 고려대 경화당문고(B10 A146A), 연세대(951.95경주16),
성균관대 존경각(B16BB-11), 동국대 경주캠퍼스도서관 등 여러 기관 및 개인에 소장되어 있다.
1845년 보판본은 당시 개간본 중에 훼손이 심한 판을 새롭게 판각 보판하여 인출한 것이다.
□ 편저자 : 閔周冕등
□ 간행년도 : 1669년(현종 10)
□ 소장처 : 동국대 경주캠퍼스 도서관, 규장각, 장서각 등
□ 판본, 크기, 수량 : 동국대 경주캠퍼스 도서관 木板本.3卷3冊: 四周雙邊半郭19.5 ×16.6 cm, 有界,10行16字,
上下白口, 上下內向花紋魚尾; 30.3×21.7cm
2. 동경잡기(東京雜記)의 구성과 내용
책머리에 목록이 있고,
권1에 진한기(辰韓紀) ․ 신라기(新羅紀) ․ 경주지계(慶州地界) ․ 건치연혁(建置沿革) ․ 관호연혁(官號沿革) ․
속현(屬縣) ․ 진관(鎭管) ․속임(屬任) ․ 인리(人吏) ․ 노비(奴婢) ․ 읍명(邑名) ․ 성씨(姓氏) ․ 풍속(風俗) ․
산천(山川) ․ 승지(勝地) ․ 토산(土産) ․ 성곽(城郭) ․ 관방(關防) ․ 봉수(烽燧) ․궁실(宮室) ․ 창고(倉庫) ․
학교(學校) ․ 역원(驛院) ․ 교량(橋梁) ․ 사묘(祠廟) ․능묘(陵墓) ․ 기우소(祈雨所)가 있다.
권2에 불우(佛宇) ․ 고적(古蹟) ․ 숲[藪] ․호구(戶口) ․ 군액(軍額) ․ 전결(田結) ․ 제언(堤堰) ․ 각방(各坊) ․
각동(各同) ․명환(名宦) ․ 인물(人物)이 있고,
권3에 우거(寓居) ․ 과목(科目) ․ 음사(蔭仕) ․효행(孝行) ․ 우애(友愛) ․ 충의(忠義) ․ 정렬(貞烈) ․ 기예(技藝) ․
서적(書籍) ․제영(題詠) ․ 잡저보유(雜著補遺) ․ 이문(異聞)이 있으며, 권말에 남지훈의 발문이 실려 있다.
이 책은 신라의 고도 경주의 읍지라는 점에서 다른 읍지에 비해 신라 시대의 사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신라기· 불우 · 고적 · 인물 조항이 그 예이다.
동국여지승람의 편목을 토대로 하면서 조선 후기 일반 읍지의 항목을 많이 설정하였다.
각방· 각동 조항은 경주부의 읍 ․ 면 ․ 이 ․ 동의 구획과 면리임(面里任)의 명칭 및 수령의 하부 행정체계를 구명
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호구(戶口)조는 기유식(己酉式)을, 전결(田結)조는 갑술양안을 각각 따르고 있다. 제영(題詠)조에는 회소곡
(會蘇曲)을 비롯한 신라의 가곡(歌曲)이 실려 있고, 이문(異聞)조에는 신라의 설화(說話) ․ 전설(傳說) ․ 기담
(奇談)이 수록되어 있다. 신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고려와 조선의 경주 지역을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참고문헌
柳富鉉, 東京雜記의 書誌的硏究, 書誌學硏究7, 1991, p.63~81
金致雨, 東京雜記 書籍條의 書誌的分析, 書誌學硏究22, 2001, p.5~30
동경잡기 東京雜記 권 1
진한기 辰韓紀
경상도는 본래 진한(辰韓)의 땅인데, 뒤에 신라(新羅)의 소유가 되었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나온다. 진한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스스로 말하기를, “망명한 진(秦)나라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한(韓)으로 들어오니 한이 동쪽 경계를 분할하여 주었으므로 성책(城栅)을 세웠다.”
하였다. 그 언어가 진나라 사람과 비슷하다.
혹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항상 마한 사람으로 군주를 삼았는데 통치한 바가 무릇 열 두 나라였다.
땅은 오곡을 심기에 적합하며, 민간에는 누에와 뽕이 풍요하여 비단과 베를 잘 짰으며, 소와 말을 탔으며,
혼례는 예로써 하였으며, 길을 가는 자는 길을 양보하였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나온다.
慶尙道本辰韓之地後爲新羅所有出輿地勝覽1) 辰韓在馬韓之東自言秦之亡人避役入韓韓割東界以與之立城栅其言
語有類秦人或謂之秦韓常用馬韓人作主所統凡十有二國地宜五穀俗饒蠶桑善作縑布乘駕牛馬嫁娶以禮行者讓路出
東國通鑑
신라기 新羅紀
신라 시조 원년(기원전 57년) 여름 4월 병진에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즉위하였다. 이보다 앞서 조선(朝鮮)
의 유민(遺民)들이 동해 바닷가의 산곡(山谷)사이에 흩어져 살면서 육촌(六村)을 이루었으니,
알천(閼川)의 양산(楊山), 돌산(突山)의 고허(高墟), 자산(觜山)의 진지(珍支), 무산(茂山)의 대수(大樹),
금산(金山)의 가리(加利), 명활산(明活山)의 고야(高耶)이다.
이것이 바로 진한의 육부(六部)인데, 육부의 우두머리가 함께 박혁거세를 세워 군주를 삼았다.
동국통감에 나온다. 상세한 내용은 고적(古蹟)에 보인다.
新羅始祖元年夏四月丙辰始祖朴赫居世立先是朝鮮遺民分居東海濱山谷間爲六村曰閼川楊山曰突山高墟曰觜山珍
支曰茂山大樹曰金山加利曰明活山高耶是爲辰韓六部六部長共立赫居世爲君出東國通鑑詳見古蹟
시조 始祖
성은 박(朴)이요 이름은 혁거세(赫居世)로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원년 갑자(甲子, 기원전 57)에 즉위
하였다. 호는 거서간(居西干)이다.
거서간은 진한 사람들이 왕을 일컫는 말이다. 혹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이라고
하였는데, 라자(羅字)는 나자(那字)로 쓰기도 하고 야자(耶字)로 쓰기도 한다. 또 서벌(徐伐)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경자(京字)를 새겨 서벌(徐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또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로(斯盧)
라고 하기도 한다. 재위 기간은 61년이다.
姓朴名赫居世漢宣帝五鳳元年甲子即位號居西干居西干辰人稱王之語或云呼貴人之稱國號徐羅伐羅一作那一作耶
又云徐伐俗訓京字云徐伐以此又云斯羅又云斯盧在位六十一年
남해차차웅 南解次次雄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이 이르기를, “차차웅은 방언으로 무당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무당은 귀신을 섬기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드디어 존장(尊長)을 자충이라 일컬었다.
남해차차웅은 혁거세의 태자로 신장이 장대하고 성품이 신중하고 지략이 많았다.
원년 갑자(甲子, 4년)는한나라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이다.
或云慈充金大問云次次雄方言謂巫也世人以巫事鬼神故畏敬之遂稱尊者爲慈充赫居世太子身長大性沉厚多智略元
年甲子漢平帝元始四年
유리이사금 儒理尼師今
이름은 유리(儒理)요 남해차차웅의 태자이다. 남해차차웅이 장차 훙서(薨逝)하려 할 적에 유리와 석탈해(昔脫解)
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뒤에 너희 박씨(朴氏) 석씨(昔氏) 두 성 중에서 나이가 많은 자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라.” 하였다.
남해차차웅이 훙서하기에 이르러 유리가 탈해가 평소에 덕망이 있다고 하여 왕위를 양보하였다.
이에 탈해가 말하기를, “왕위는 큰 보배인지라 보통 사람이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내가 들으니 성덕과 지혜를
가진 사람은 이[齒]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한 번 떡을 깨물어 봅시다.” 하였다. 이에 떡을 깨물어 보니 유리의
잇자국이 많았다. 이에 곧 즉위하고 호를 이사금(尼師今)이라고 하였다. 또 잇금[尼叱今]이라고도 하니, 잇금
이라는 칭호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원년 갑신(甲申, 24년)은 한나라 경시(更始) 2년이다. 5년 무자에 이웃 나라의 백성들이 유리왕이 인정(仁政)을
베푼다는 소문을 듣고 와서 귀의하는 자가 많았다. 이 해에 민간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비로소 도솔가(兜率歌)
를 지으니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초이다.
名儒理南解太子南解將薨謂儒理及昔脫解曰吾死後爾朴昔二姓以年長嗣位焉及薨儒理以脫解素有德望推讓其位脫
解曰神器大寶非庸人所堪吾聞聖智人多齒試以餠噬之儒理齒理多乃立之號尼師今又云尼叱今尼叱今之稱自此始元
年甲申漢更始二年五年戊子隣國之民聞王行仁政來歸者衆是年民俗歡樂始制兜率歌此歌樂之始也
탈해이사금 脫解尼師今
성은 석(昔)이요 이름은 탈해(脫解)이다. 유리가 장차 훙서하려 할 적에 말하기를, “선왕[남해차차웅]의 고명
(顧命)에 ‘내가 죽은 뒤에 아들과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가 많고 어진 자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라.’ 하셨다.
이 때문에 과인이 먼저 즉위하였으니, 이제 의당 왕위를 탈해에게 전하여야 한다.” 하였다. 이에 탈해가 유명
(遺命)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였다. 원년 정사(丁巳, 57년)는 한나라 명제(明帝)중원(中元) 2년이다.
姓昔名脫解儒理將薨曰先王顧命曰吾死後母論子壻以年長且賢者繼位是以寡人先位今也宜其傳位焉脫解從遺命嗣
位元年丁巳漢明帝中元二年
파사이사금 婆娑尼師今
성은 박(朴)이요 이름은 파사(婆娑)이다. 유리의 둘째 아들이다. 원년 경진(庚辰, 80년)은 한나라 장제(章帝)
건초(建初) 5년이다.
姓朴名婆娑儒理第二子元年庚辰章帝建初五年
지마이사금 祇摩尼師今
이름은 지마(祇摩)이니 파사의 태자이다. 원년 임자(壬子, 112년)는 한나라 안제(安帝) 영초(永初) 6년이다.
名祇摩婆娑太子元年壬子安帝永初六年
일성이사금 逸聖尼師今
이름은 일성(逸聖)이니 유리의 장남이다. 지마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즉위하였다. 원년 갑술(甲戌, 134년)은
한나라 순제(順帝) 양가(陽嘉) 3년이다.
名逸聖儒理長子祇摩無子故立元年甲戌順帝陽嘉三年
아달라이사금 阿達羅尼師今
이름은 아달라(阿達羅)이니 일성의 장남이다. 원년 갑오(甲午, 154년)는 한나라 환제(桓帝) 영흥(永興) 2년이다.
3년 병신(丙申, 156)에 계립령(雞立嶺)의 길을 열었으니, 바로 지금의 새재[鳥嶺]이다. 5년 무술(戊戌, 158년)에
죽령(竹嶺)의 길을 열었다.
名阿達羅逸聖長子元年甲午桓帝永興二年三年丙申開雞立嶺路即今鳥嶺五年戊戌開竹嶺路
벌휴이사금 伐休尼師今
성은 석(昔)이요 이름은 벌휴(伐休)이다. 발휘(發揮)라고 된 곳도 있다. 탈해의 아들 각간(角干) 구추(仇鄒)의
아들인데 아달라가 훙서할 적에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벌휴이사금은 바람과
구름[風雲]을 점쳐 수재(水災)와 한재(旱災) 및 풍년과 흉년을 미리 알았고, 또 사람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성인이라고 일렀다. 원년 갑자(甲子, 184년)는 한나라 영제(靈帝) 중평(中平) 원년이다.
姓昔名伐休一作發揮脫解子角干仇鄒子阿達羅薨無子國人立之王占風雲預知水旱及年之豐儉又知人邪正人謂之聖
元年甲子靈帝中平元年
내해이사금 奈解尼師今
이름은 내해(奈解)니 벌휴의 둘째 아들인 이매(伊買)의 아들이다. 용모(容貌)와 의표(儀表)가 웅위(雄偉)하고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원년 병자(丙子, 196년)는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원년이다.
名奈解伐休第二子伊買子容儀雄偉有俊才元年丙子獻帝建安元年
조분이사금 助賁尼師今
이름은 조분(助賁)이니 벌휴의 장남인 골정(骨正)의 아들이다. 원년 경술(庚戌,230년)은 촉한(蜀漢) 후주(後主:
유선(劉禪)) 건흥(建興) 8년이다.
名助賁伐休長子骨正之子元年庚戌蜀漢後主建興八年
점해이사금 沾解尼師今
이름은 점해(沾解)니 조분의 동복(同腹) 아우이다. 원년 정묘(丁卯, 247년)는 촉한 후주 연희(延熙) 10년이다.
名沾解助賁母弟元年丁卯後主延熙十年
미추이사금 味鄒尼師今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미추(味鄒)니 알지(閼智)의 7대손이다. 조분이 그 딸을 주어 아내 삼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점해가 후사가 없이 훙서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소유한 시초이다. 원년 임오(壬午, 262년)는 촉한 후주 경요(景耀) 4년이다.
姓金名味鄒閼智七代孫助賁以其女妻之至是薨無嗣國人立之此金氏有國之始也元年壬午後主景耀四年
유례이사금 儒禮尼師今
성은 석(昔)이요 이름은 유례(儒禮)니 조분의 장남이다. 원년 갑진(甲辰, 284년)은 진(晋)나라 무제(武帝) 태강
(太康) 5년)이다.
姓昔名儒禮助賁長子元年甲辰晋武帝太康五年
기림이사금 基臨尼師今
이름은 기림(基臨)이니 조분의 손자이다. 원년 무오(戊午, 298년)는 진나라 혜제(惠帝) 원강(元康) 8년이다.
10년 정묘(丁卯, 307년)에 국호를 신라라고하였다.
名基臨助賁孫元年戊午惠帝元康八年十年丁卯國號新羅
흘해이사금 訖解尼師今
이름은 흘해(訖解)니 내해의 아들 각간 우로(于老)의 아들이다. 기림이 훙서할적에 아들이 없었으므로 군신
(群臣)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흘해는 어리나 노성(老成)한 덕이 있다.” 하고, 곧 그를 왕으로 세웠다.
원년 경오(庚午, 310년)는 진나라 회제(懐帝) 영가(永嘉) 4년이다.
名訖解奈解子角干于老子也基臨薨無子群臣議曰訖解幼有老成之德乃立之元年庚午懐帝永嘉四年
내물이사금 奈勿尼師今
일명 내밀(奈密)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이요 이름은 내물(奈勿)이니,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손자이다.
흘해가 아들이 없이 훙서하였으므로 그를 왕으로 세웠다. 원년 병진(丙辰, 356년)은 동진(東晉) 목제(穆帝) 영화
(永和) 12년이다.
一云奈密姓金名奈勿仇道葛文王之孫訖解薨無子立之元年丙辰穆帝永和十二年
실성이사금 實聖尼師今
이름은 실성(實聖)이니 알지의 후손이다. 내물이 훙서할 적에 아들이 어렸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원년 임인(壬寅, 402년)은 동진 안제(安帝)원흥(元興) 원년이다.
名實聖閼智裔孫奈勿薨子幼國人立之元年壬寅安帝元興元年
눌지마립간 訥祇麻立干
김대문(金大問)이 이르기를, “마립(麻立)은 방언(方言)으로 말뚝[橛]을 이른다. 말뚝은 정성스럽게 잡고 위치를
조준(照準)하여 고정시키는 것인데 왕의 말뚝이 위주가 되고 신하의 말뚝은 그 아래 벌려 세운다. 인하여 마립간
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름은 눌지(訥祗)인데 실성을 시해하고 자립하였다. 원년 정사(丁巳, 417년)는 동진
안제(安帝) 의희(義熙) 13년이다. 22년 무인(戊寅, 438년)에 백성들에게 우거(牛車)의 법을 가르쳤다.
金大問云麻立方言謂橛也橛謂諴照2)準位而置則王橛爲主臣橛列於下因以名之名訥祇弑實聖而自立元年丁巳安帝義
熙十三年二十二年戊寅敎民牛車之法
자비마립간 慈悲麻立干
이름은 자비(慈悲)이니 눌지의 장남이다. 원년 무술(戊戌, 458년)은 송(宋)나라 효무제(孝武帝) 대명(大明) 2년
이다.
名慈悲訥祗長子元年戊戌宋武帝大明二年
소지마립간 炤智麻立干
이름은 소지(炤智)이니 자비의 장남이다. 어려서 효행이 있었고 겸양과 공손으로 스스로를 지켰다.
원년 기미(己未, 479년)는 송나라 순제(順帝) 승명(昇明)3년이다. 12년 경오(庚午, 490년)에 처음으로 시장을
열어 사방의 재화를 유통시켰다.
名炤智慈悲長子幼有孝行謙恭自守元年己未順帝昇明三年十二年庚午初開市肆以通四方之貨
지증마립간 智證麻立干
이름은 지대로(智大路)이니 내물왕의 증손이다. 지대로는 옥체가 장대하였고 담력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는데
전왕(前王)이 훙서할 적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원년 경진(庚辰, 500년)은 제(齊)나라
폐제(廢帝: 동혼후(東昏侯)) 영원(永元) 2년이다. 3년 임오(壬午, 502년)에 순장(殉葬)을 금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이 훙서하면 남녀 각각 5인을 순장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금하였다. 주군(州郡)의 장관에게 명
하여 농사를 권장하게 하니, 비로소 소를 이용하여 경작하였다. 4년 계미(癸未, 503년)에 군신들이 상언(上言)
하기를, “시조(始祖)가 창업(創業)한 이후로 국호가 일정하지 않아 사라(斯羅)라고 일컫기도 하고 사로(斯盧)
라고 일컫기도 하고 신라(新羅)라고 일컫기도 하였습니다.
신(新)이라는 것은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羅)라는 것은 사방을 망라(網羅)한다는 뜻이니,
신라로 국호를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국가를 소유한 자는 모두 제(帝)라고 일컫거나
왕(王)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세운 지 지금 22세(世)가 되었는데 다만 방언으로 왕을 칭호하고
아직 존호(尊號)를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군신들이 의논을 정하여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호를
올립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5년 갑신(甲申,504년)에 상복법(喪服法)을 제정하였다.
15년 갑오(甲午, 514년)에 왕이 훙서하자 시호를 지증(智證)이라 하였다. 시법(諡法)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名智大路奈勿王曾孫王體鴻大膽力過人前王薨無子故繼位元年庚辰齊廢帝永元二年三年壬午禁殉葬前此王薨殉以
男女各五人至是禁焉分命州郡主勸農始用牛耕四年癸未群臣上言始祖創業以來國號未定或稱斯羅或稱斯盧或稱新
羅新者德業日新羅者網羅四方之義則其爲國號宜矣又觀自古有國家者皆稱帝稱王自我立國至今二十二世但稱方言
未定尊號今群臣定議謹上號新羅國王王從之五年甲申制喪服法十五年甲午王薨諡曰智證諡法始此
법흥왕 法興王
이름은 원종(原宗)이니 지증의 장남이다. 신장이 7척이고 관후(寬厚)하여 사람을 사랑하였다.
원년 갑오(甲午, 514년)는 양(梁)나라 고조(高祖) 천감(天監) 13년이다. 7년 경자(庚子, 520년)에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비로소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23년 병진(丙辰, 536년)에 비로소 연호를 건원(建元)
원년이라 칭하였다. 25년 무오(戊午, 538년)에 외관(外官)이 가솔을 거느리고 임지에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名原宗智證長子身長七尺寬厚愛人元年甲午梁高祖天監十三年七年庚子頒示律令始制百官公服二十三年丙辰始稱
年號建元元年二十五年戊午許外官挈家之任
진흥왕 眞興王
이름은 실맥종(彡麥宗)이니 삼(彡)은 음(音)이 실이다. 법흥의 아우 입종(立宗)의 아들이다.
원년 경신(庚申, 540년)은 양나라 고조 대동(大同) 6년이다.
名彡音失麥宗法興弟立宗之子元年庚申梁高祖大同六年
진지왕 眞智王
이름은 금륜(金輪)이니 진흥의 차남이다. 원년 병신(丙申, 576년)은 진(陳)나라 선제(宣帝) 대건(大建) 8년이다.
名金輪眞興次子元年丙申陳宣帝大建八年
진평왕 眞平王
이름은 일정(日浄)이니, 진흥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다. 원년 기해(己亥,579년)는 양나라 선제 대건 11년
이다.
名日浄眞興太子銅輪之子元年己亥宣帝大建十一年
선덕왕 善德王
이름은 덕만(德曼)이니 진평의 장녀이다. 관인(寬仁)하고 명민(明敏)하였다. 전왕이 훙서하였는데 아들이 없었
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원년 임진(壬辰, 632년)은 당(唐)나라 태종(太宗) 정관(貞觀) 6년이다.
9년 경자(庚子, 640년)에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名德曼眞平長女寬仁明敏前王薨無子國人立之元年壬辰唐太宗貞觀六年九年庚子遺子弟於唐請入國學
진덕왕 眞德王
이름은 승만(勝曼)이니 진평왕의 동복 아우 국반(國飯)의 따님이다. 자질(姿質)이 풍려(豐麗)하고 신장이 7척이
었는데 손을 드리우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올 정도였다. 원년 정미(丁未, 647년)는 당나라 정관 21년이다.
2년 무신(戊申, 648년)에 동사(冬使) 함질허(邯帙許)를 차견하여 당나라에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이에 당 태종(太宗)이 칙문(勅問)하기를, “신라는 대조(大朝: 당나라)를 섬기는데 무엇 때문에 연호를 별도로
칭하는가?” 하자, 질허가 아뢰기를, “천조(天朝)가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조 법흥왕 이후로
사사로이 연호를 기록하였습니다. 만약 대조에서 명령을 내린다면 소국(小國)이 어찌 감히 사사로이 연호를
사용하겠습니까?” 하니, 태종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3년 기유(己酉, 649년)에 비로소 중국 제도에 의거하여
관복(官服)을 만들었다. 4년 경술(庚戌, 650년)에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백제의 군사를 대파한 일을 고하
였는데, 왕이 스스로 태평송(太平頌)을 짓고 비단을 짜서 무늬를 놓아서 당나라에 바쳤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名勝曼眞平母弟國飯之女姿質豐麗長七尺垂手過膝元年丁未貞觀二十一年二年戊申差冬使邯帙許朝唐太宗勅問新
羅臣事大朝何以別稱年號帙許言天朝未頒正朔故先祖法興王以來私有紀年若大朝有命小國又何敢焉太宗然之三年
己酉始依華制爲冠服四年庚戌遣使大唐告破百濟之衆王自製太平頌織錦爲文以獻唐其詞曰
위대한 당나라 대업을 세우니 大唐開鴻業
거룩한 제왕의 모책이 창성하도다 巍巍皇猷昌
전란을 끝내어 천하를 평정하고 止戈戎衣定
문치를 닦아 백왕을 계승하였네 修文契百王
통감에 계자(契字)가 계자(繼字)로 되어 있다. 通鑑契作繼
하늘을 대신하여 은택을 비처럼 뿌리고 統天崇雨施
만물을 다스림엔 땅의 도를 본받았네 理物體含章
인덕을 깊이 펴기를 일월과 같이하고 深仁諧日月
천운을 따라 우당3)의 치세를 힘썼네 撫運邁虞唐
통감에 일월은 일용으로 되어 있고 우당은 시강으로 되어 있다. 通鑑日月作日用虞唐作時康
깃발은 어찌 그리 찬란하며 幡旗何赫赫
북소리는 어찌 그리 우렁찬가 鉦鼓何鍠鍠
외방의 오랑캐로 황명을 어기는 자는 外夷違命者
하늘의 재앙을 받아 멸망하리라 顚覆被天殃
순후한 풍속이 곳곳에 어리니 淳風凝幽顯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를 바치네 遐邇競呈祥
사시의 기후는 옥촉4)처럼 화창하고 四時和玉燭
칠요5)의 광명은 만방을 돌아드네 七曜巡萬方
산악의 정기는 보필할 재상을 낳고 維嶽降宰輔
황제는 충량한 신하에게 일을 맡겼네 維帝任忠良
삼황오제의 덕 하나로 이룩되니 五三成一德
우리 당나라 황도(皇道)가 빛나도다 昭我唐家皇
이에 고종이 가상히 여겼다. 이 해에 비로소 중국의 연호를 사용
하였다. 高宗嘉焉是歲始行中國年號
태종무열왕 太宗武烈王
성은 김이요 이름은 춘추(春秋)이니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伊飡) 용춘(龍春)의 아들이다. 의표(儀表)가 영위
(英偉)하고 어려서부터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었다. 원년 갑인(甲寅, 654년)은 당나라 고종(高宗) 영휘(永徽)
5년이다. 7년 경신(庚申, 660년)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 등과 더불어 백제(百濟)를 치니 백제가 망
하였다.
姓金名春秋眞智王子伊飡龍春之子儀表英偉幼有濟世志元年甲寅高宗永徽五年七年庚申與唐將蘇定方等共伐百濟
百濟亡
문무왕 文武王
이름은 법민(法敏)이니 태종의 태자이다. 의표가 영특하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 무열이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평정할 적에 법민이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원년 신유(辛酉, 661년)는 당나라 고종 용삭(龍朔) 원년이다. 4년 갑자(甲子, 664년)에 부인 또한 중국의 의상을
입게 하였다. 8년 무진(戊辰, 668년)에 당나라 병사와 함께 고구려를 치니 고구려가 망하였다.
14년 갑술(甲戌, 674년)에 대내마(大奈麻) 덕복(德福)이 당나라로 들어가 숙위(宿衛)하고 역술(曆術)을 배워
돌아와 새로운 역법(曆法)으로 고쳐 사용하기를 청하였다. 15년 을해(乙亥, 675년)에 모든 관사와 주군의 인장
을 주조하여 나누어 주었다.
名法敏太宗太子姿表英特聰明多智略武烈與蘇定方平百濟法敏從之有大功至是即位元年辛酉高宗龍朔元年四年甲
子令婦人亦服中朝衣裳八年戊辰與唐兵共伐高句麗高句麗亡十四年甲戌大奈麻德福入唐宿衛傳學曆術而還請改用
新曆法十五年乙亥鑄百司州郡印頒之
신문왕 神文王
이름은 정명(政明)이니 문무왕의 장남이다. 원년 신사(辛巳, 681년)는 고종 개요(開耀) 원년이다.
6년 병술(丙戌, 686년)에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가 예전(禮典)과 사장(詞章)을 청하니, 측천무후(則天武后)
가 담당 부서로 하여금 길흉(吉凶)에 관계된 중요한 예(禮)를 베끼게 하고, 아울러 규계(規誡)에 관계되는 문사
(文詞)까지도 채집하여 50권으로 엮어서 하사하였다.
名政明文武王長子元年辛巳高宗開耀元年六年丙戌遣使入唐請禮典幷詞章則天令所司寫吉凶要禮幷采文詞涉於規
誡者勒成五十巻賜之
효소왕 孝昭王
이름은 이홍(理洪)이니 신문의 태자이다. 원년 임진(壬辰, 692년)은 측천무후 사성(嗣聖) 9년이다.
名理洪神文太子元年壬辰武后嗣聖九年
성덕왕 聖德王
이름은 흥광(興光)이니 효소의 아우이다. 효소가 훙서하였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원년 임인(壬寅, 702년)은 측천무후 사성19년이다. 17년 임자(壬子, 712년)6)에 처음으로 누각(漏刻)
을 만들었다.
名興光孝昭弟也孝昭薨無子國人立之元年壬寅嗣聖十九年十七年壬子始造漏刻
효성왕 孝成王
이름은 승경(承慶)이니 성덕의 둘째 아들이다. 원년 정축(丁丑, 737년)은 현종(玄宗) 개원(開元) 25년이다.
6년 임오(壬午, 742년)에 왕이 훙서하였는데, 유명(遺命)에 따라 법류사(法流寺) 남쪽에서 관을 태워 뼈를 동해
에 뿌렸다.
名承慶聖德第二子元年丁丑玄宗開元二十五年六年壬午王薨以遺命燒柩於法流寺南散骨東海
경덕왕 景德王
이름은 헌영(憲英)이니 효성의 아우이다. 효성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를 세워서 태자를 삼았는데, 이에 이르러
왕위를 계승하였다. 원년 임오(壬午, 742년)는 현종 천보(天寶) 원년이다.
名憲英孝成之弟孝成無子立爲太子至是嗣位元年壬午天寶元年
혜공왕 惠恭王
이름은 건운(乾運)이니 경덕의 적자(嫡子)이다. 원년 을사(乙巳, 765년)는 대종(大宗) 영태(永泰) 원년이다.
16년 경신(庚申, 780년)에 이찬(伊飡) 김지정(金志貞)이 무리를 모아 왕궁을 에워싸자 상대등(上大等) 김양상
(金良相)이 이찬 경신(敬信)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 등을 죽였으나 왕과 후비(后妃)는 난병(亂兵)에게
해를 당하였다. 양상이 자립하여 왕이 되어서 전왕에게 혜공이란 시호를 올렸다.
名乾運景德嫡子元年乙巳代宗永泰元年十六年庚申伊飡金志貞聚衆圍王宮上大等金良相與伊飡敬信擧兵誅志貞等
王與后妃爲亂兵所害良相自立爲王諡王曰惠恭
선덕왕 宣德王
이름은 양상(良相)이니 내물의 10대손이다. 원년 경신(庚申, 780년)은 덕종(德宗) 건중(建中) 원년이다.
6년 을축(乙丑, 785년)에 왕이 훙서하였는데 유명에 따라 불교의 제도에 의하여 화장하여 뼈를 동해에 뿌렸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상대등 경신(敬信)을 왕으로 세웠다.
名良相奈勿十世孫元年庚申德宗建中元年六年乙丑王薨遺命依佛制燒火散骨東海無子國人立上大等敬信
원성왕 元聖王
이름은 경신(敬信)이니 내물의 12세손이다. 원년 을축(乙丑, 785년)은 덕종 정원(貞元) 원년이다.
4년 무진(戊辰, 788년)에 비로소 독서출신법(讀書出身法)을 정하였다. 14년 무인(戊寅, 798년)에 왕이 훙서하
였는데 유명에 따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관을 태웠다.
名敬信奈勿十二世孫元年乙丑德宗貞元元年四年戊辰始定讀書出身法十四年戊寅王薨以遺命燒柩於奉德寺南
소성왕 昭聖王
이름은 준옹(俊邕)이니 원성의 손자이다. 원년 기묘(己卯, 799년)는 당나라 덕종 정원 15년이다.
名俊邕元聖之孫元年己卯德宗貞元十五年
애장왕 哀莊王
이름은 청명(清明)인데 중희(重熙)로 개명(改名)하였다. 소성왕의 태자이다. 원년 경진(庚辰, 800년)은 당나라
덕종 정원 16년이다. 3년 임오(壬午, 802년)에 가야산(伽耶山) 해인사(海印寺)를 창건하였다.
名淸明更名重熙昭聖太子元年庚辰德宗貞元十六年三年壬午創伽耶山海印寺
헌덕왕 憲德王
이름은 언승(彥昇)이니 소성왕의 동복 아우이다. 왕을 시해하고 자립하였다. 원년 기축(己丑, 809년)은 헌종
(憲宗) 원화(元和) 4년이다.
名彥昇昭聖同母弟弑王自立元年己丑憲宗元和四年
흥덕왕 興德王
이름은 수종(秀宗)인데 경휘(景徽)로 개명하였다. 헌덕의 동복 아우이다. 원년 병오(丙午, 826년)는 경종(敬宗)
보력(寶曆) 2년이다.
名秀宗改名景徽憲德母弟元年丙午敬宗寶曆二年
희강왕 僖康王
이름은 제륭(悌隆)이니 원성왕의 손자인 이찬 헌정(憲貞)의 아들이다. 원년 병진(丙辰, 836년)은 문종(文宗)
개성(開成) 원년이다. 3년 무오(戊午, 838년)에 김명(金明)과 이홍(利弘) 등이 난을 일으키자 왕이 목을 매어
자진하였다. 김명이 자립하였다.
名悌隆元聖王孫伊飡憲貞之子元年丙辰文宗開成元年三年戊午金明利弘等作亂王自縊金明自立
민애왕 閔哀王
이름은 명(明)이니 원성의 증손이다. 원년 무오(戊午, 838년)는 문종 개성 3년이다. 김양(金陽)이 우징(祐徵)을
받들고 쳐들어가 공격하니 왕은 병사들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달아나 월유댁(月遊宅)으로 들어갔다가 인
하여 해를 당하였다. 군신들이 예로써 안장하였다. 우징이 즉위하였다.
名明元聖曾孫元年戊午文宗開成三年金陽奉祐徵入擊王聞兵至奔入月遊宅因被害群臣以禮葬之祐徵立
신무왕 神武王
이름은 우징(祐徵)이니 원성의 손자인 상대등 균정(均貞)의 아들이다. 원년 기미(己未, 839년)는 문종 개성 4
년이다.
名祐徵元聖孫上大等均貞子元年己未文宗開成四年
문성왕 文聖王
이름은 경응(慶膺)이니 신무의 아들이다. 원년 기미(己未, 839년)는 문종 개성4년이다. 19년 정축(丁丑, 857년)
9월에 왕이 병이 들자 유조(遺詔)를 내려 숙부인 의정(誼靖)에게 왕위를 전하게 하였다.
名慶膺神武子元年己未文宗開成四年十九年丁丑九月王不豫遺詔傳位於叔父誼靖
헌안왕 憲安王
이름은 의정(誼靖)이니 신무왕의 이복(異腹) 아우이다. 원년 정축(丁丑, 857년)은 선종(宣宗) 대중(大中) 11년
이다. 5년 신사(辛巳, 861년)에 왕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 좌우에게 이르기를, “나의 사위 응렴(膺廉)이 어려
서부터 노성한 덕이 있었으니 의당 왕으로 세워야 할 것이다.” 하였다.
名誼靖神武王異母弟元年丁丑宣宗大中十一年五年辛巳王寢疾謂左右曰甥膺廉幼有老成之德宜立之
경문왕 景文王
이름은 응렴(膺廉)이니 희강왕의 아들인 아찬(阿飡) 계명(啓明)의 아들이며, 헌안왕의 사위이다.
원년 신사(辛巳, 861년)는 의종(懿宗) 함통(咸通) 2년이다.
名膺廉僖康王子阿飡啓明之子憲安王之壻元年辛巳懿宗咸通二年
헌강왕 憲康王
이름은 정(晸)이니 경문왕의 아들이다. 왕은 성품이 총민하고 책 보기를 좋아하여 한 번 보면 모두 암송하였다.
원년 을미(乙未, 877년)는 희종(僖宗) 건부(乾符) 2년이다.
3년 정유(丁酉, 877년)에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송악군(松岳郡)에서 태어났다.
名晸景文王子王性聰敏喜看書一覽皆誦元年乙未僖宗乾符二年三年丁酉高麗太祖王建生於松岳郡
정강왕 定康王
이름은 황(晃)이니 헌강의 아우이다. 원년 병오(丙午, 886년)는 희종 광계(光啓) 2년이다.
名晃憲康之弟元年丙午僖宗光啓二年
진성왕 眞聖王
이름은 만(曼)이니 정강의 누이이다. 원년 정미(丁未, 887년)는 희종 광계 3년이다. 왕은 평소에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사통(私通)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항상 궁 안으로 불러들여 용사하였다.
홍이 죽기에 이르러 연소한 미장부(美丈夫)를 몰래 끌어들여 음란한 짓을 행하였다. 어떤 사람이 시정(時政)을
비방하는 글을 지어 조정의 길에 방을 붙였다.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아마 이는 대야주(大耶州)의 은자(隱者)
인 거인(巨仁)의 소행일 것이다.” 하였다. 이에 왕이 거인을 잡아서 옥사에 가두고 장차 형벌을 가하려 하였다.
이에 거인이 옥사의 벽에 다음과같은 시를 썼다.
우공7)이 통곡하자 삼년 동안 가뭄이 들었고 于公慟哭三年旱
추연8)이 슬픔을 머금자 오월에 서리가 내렸나니 鄒衍含悲五月霜
지금 나의 깊은 근심이 도리어 옛날과 같건만 今我幽愁還似古
황천은 아무 말 없이 푸르디 푸를 뿐이로구나 皇天無語但蒼蒼
그날 저녁에 갑자기 번개와 우레가 치고 비와 우박이 쏟아지니 왕이 두려워하여 그를 풀어주었다.
5년 신해(辛亥, 891년)에 북원(北原)의 적장(賊將) 양길(梁吉)이 그 보좌관 궁예(弓裔)를 파견하여 병사를 거느
리고 10여 군을 습격하여 주현(州縣)을 겁략(劫掠)하였다. 그 무리가 5천 명에 이르렀다.
名曼定康妹也元年丁未僖宗光啓三年王素與角干魏弘通至是常入內用事及弘死潛引年少美丈夫滛之有人譏謗時政
榜於朝路或告曰殆是大耶州隱者巨仁所爲王命拘巨仁獄將刑之巨仁書於獄壁曰于公慟哭三年旱鄒衍含悲五月霜今
我幽愁還似古皇天無語但蒼蒼其夕忽震雷雨雹主懼而釋之五年辛亥北原賊帥梁吉遣其佐弓裔率兵襲十餘郡劫掠州
縣衆至五千
효공왕 孝恭王
이름은 요(嶢)이니 헌강의 서자이다. 진성이 양육하여 세워서 태자로 삼았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원년 정사(丁巳, 897년)는 소종(昭宗) 건녕(乾寧) 4년이다.
名嶢憲康庶子眞聖養之立爲太子至是即位元年丁巳昭宗乾寧四年
신덕왕 神德王
성은 박이요 이름은 경휘(景暉)이니 아달라(阿達羅)의 원손(遠孫)인 대아찬(大阿飡) 예겸(乂兼)의 아들이다.
효공이 훙서하였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원년 임신(壬申, 912년)은 후량
(後梁) 태조(太祖)건화(乾化) 2년이다.
姓朴名景暉阿達羅遠孫大阿飡乂兼之子孝恭薨無子國人立之元年壬申後梁太祖乾化二年
경명왕 景明王
이름은 승영(昇英)이니 신덕의 태자이다. 원년 정축(丁丑, 918년)은 후량 말제(末帝) 정명(貞明) 3년이다.
2년 무인(戊寅, 917년)에 궁예의 휘하가 왕건(王建)을 추대하자 궁예는 달아나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왕건이 즉위하여 원년이라고 일컬었다.
名昇英神德太子元年丁丑末帝貞明三年二年戊寅弓裔麾下推戴王建弓裔出奔爲下所殺建即位稱元
경애왕 景哀王
이름은 위응(魏膺)이니 경명의 동복 아우이다. 원년 갑신(甲申, 924년)은 후당(後唐) 장종(莊宗) 동광(同光) 2년
이다. 견훤(甄萱)에게 피살되었다.
名魏膺景明母弟元年甲申後唐莊宗同光二年爲甄萱所殺事見古蹟
경순왕 敬順王
성은 김이요 이름은 부(傅)이니 문성의 후손인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이다. 견훤이 왕으로 세웠다.
원년 정해(丁亥, 927년)는 후당 명종(明宗) 천성(天成) 2년이다.
전왕의 시신을 모셔다가 서당(西堂)에 빈렴하고 군신들과 통곡하고 시호를 올렸다. 5년 신묘(辛卯, 931년)에
왕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다.
고려의 왕이 50기(騎)를 거느리고 신라의 서울에 이르니, 왕이 백관과 더불어 교외에서 맞이하여 임해전(臨海殿)
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술기운이 얼큰해지자 왕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견훤이
망쳐 놓았습니다.” 하고, 인하여 줄줄 눈물을 흘리며 우니 좌우 사람들이 오열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고려의
왕도 또한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였다. 고려의 왕이 인하여 수십 일을 머물다 돌아갔는데 왕이 혈성(穴城)까지
이르러 전송하였다.
고려의 왕이 처음 이르렀을 적에 군사들을 엄히 단속하여 털끝만큼도 범하지 않았다. 이에 서울 사람들과 사녀
(士女)들이 서로 경하하여 말하기를, “지난번에 견훤이 왔을 적에는 승냥이나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이제
왕공(王公)이 이르매 부모를 만난 것 같다.” 하였다.
9년 을미(乙未, 935년)에 왕이 국력이 쇠약해지고 형세가 고립되어 스스로 보전 할 수 없다고 하여 군신들과
더불어 고려에 항복할 것을 모의하였다. 왕자가 말하기를, “마땅히 충신(忠臣) 의사(義士)들과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힘이 다한 뒤에 그만두어야 합니다. 어찌 의당 1000년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내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처럼 위태로워 형세상 보전할 수 없다.
백성들로 하여금 간뇌도지(肝腦塗地)하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에 시랑(侍郞) 김봉휴
(金封休)로 하여금 국서를 가지고 고려에 가서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왕자는 통곡하며 왕을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바위를 의지하여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
를 캐서 먹으며 지내다 일생을 마쳤다.
11월에 고려의 왕이 국서를 받고 교외에 나와 왕을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유화궁(柳花宮)에 머물게 하고서 장녀
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삼아주고 정승(政丞)을 삼아 낙랑왕(樂浪王)에 봉해 주었다. 이에 나라는 없어
져 경주(慶州)가 되고 신라는 망하였다.
신라는 박씨로 왕이 된 사람이 10분, 석씨로 왕이 된 사람이 8분, 김씨로 왕이 된 사람이 38분이니 도합 56세
992년이다. 이상은 동국통감에나오는데 삼국사(三國史)를 겸하여 상고하였다.
姓金名傅文聖之後伊飡孝宗之子爲甄萱所立元年丁亥後唐明宗天成二年擧前王屍殯於西堂與群下慟哭上諡五年辛
卯王遣使高麗請相見麗王以五十騎至京王與百官郊迎宴於臨海殿酒酣王曰小國不天甄萱椓喪因泫然泣下左右莫不
鳴咽麗王亦流涕慰藉之因留數旬而還王送至穴城麗王之初至肅隊而行不犯秋毫都人士女相慶曰昔甄氏之來也如逢
豺虎今王公之至也如見父母九年乙未王以國弱勢孤不能自安乃與群下謀降高麗王子曰當與忠臣義士收集民心力盡
而後已豈宜以一千年社稷一朝輕以與人王曰孤危若此勢不能全至使無辜之民肝腦塗地吾不忍也乃使侍郞金封休賚
書請降王子慟哭辭王入皆骨山倚巖爲屋麻衣草食以終其身十一月麗王受書出郊迎勞館于柳花宮妻以長女樂浪公主
拜爲政丞封樂浪王國除爲慶州新羅亡新羅朴氏十王昔氏八王金氏三十八王合五十六世九百九十二年以上出東國通
鑑兼考三國史
경주지계 慶州地界
동으로 울산부계(蔚山府界)까지 62리, 장기현계(長鬐縣界)까지 83리이며, 남으로 언양현계(彥陽縣界)까지 62리
이며, 서쪽으로 청도군계(淸道郡界)까지 76리, 영천군계(永川郡界)까지 53리이며, 북으로 영일현계(迎日縣界)
까지 36리, 청송부계(靑松府界)와 영덕현계(盈德縣界)까지 150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783리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나온다.
至蔚山府界六十二里至長鬐縣界八十三里南至彥陽縣界六十二里西至淸道郡界七十六里至永川郡界五十三里北至
迎日縣界三十六里至靑松府界盈德縣界一百五十里距京都七百八十三里出輿地勝覽9)
건치연혁 建置沿革
본래 신라의 옛 도읍이다. 한(漢)나라 오봉(五鳳) 원년(기원전 57년)에 시조 혁거세(赫居世)가 개국(開國)하여
도읍을 세우고 국호(國號)를 서야벌(徐耶伐)이라고 하였는데, 혹 사라(斯羅)라고 하기도 하고 혹 사로(斯盧)라
고 하기도 하다가 뒤에 신라라고 일컬었다. 탈해왕 9년(65년)에 시림(始林)에 괴이한 닭의 일이 있어 이름을
계림(雞林)으로 고치고 인하여 이를 국호를 삼았다.
기림왕(基臨王)10년(307년)에 다시 신라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 18년(935년)에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가
와서 항복하니 나라는 없어지고 경주(慶州)가 되었다가 23년(940년)에 승격하여 대도독부(大都督府)가 되었다.
성종(成宗) 6년(987년)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고쳤다가 14년(996년)에 유수사(留守使)라 일컫고 영동도(嶺
東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3년(1012년)에 강등되어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가 되고, 5년(1015년)에 안동
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고쳤다가 21년(1030년)에 다시 동경유수가 되었다. 그 당시에 예방(銳方)이 올린
삼한회토기(三韓會土記)에 고려삼경(高麗三京)이라는 글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동경유수를 둔 것이다.
신종(神宗) 5년(1202년)에 동경야별초(東京夜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주(州)ㆍ군(郡)을 겁략하므로 군사를 보내
평정하였다. 7년(1024년)에 동경(東京) 사람들이 신라가 다시 성한다는 말을 만들어 상주(尙州)ㆍ청주(淸州)ㆍ
충주(忠州)ㆍ원주도(原州道)에 격문을 보내 반란을 도모하였으므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시키고,
관내(管內)의 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ㆍ향(鄕)ㆍ부곡(部曲)을 빼앗아 안동과 상주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고종(高宗) 6년(1219년)에 다시 유수(留守)로 고쳤으며, 충렬왕(忠烈王) 34년(1308년)에 계림부(雞林府)로 고쳐
일컬었으며, 신우(辛禑)가 낙랑(樂浪)이라고 별도로 일컬었다. 본조(本朝)에서는 태종조(太宗朝)에 다시 경주라
는 옛 이름을 회복하였고, 세종조(世宗朝)에 진(鎭)을 두었다.
여지승람에 나오는데 고려사(高麗史)의 지리지(地理志)를 겸하여 상고하였다.
本新羅古都漢五鳳元年始祖赫居世開國建都國號徐耶伐或稱斯羅或稱斯盧後稱新羅脫解王九年始林有雞怪更名雞
林因以爲國號基臨王十年復號新羅高麗太祖十八年敬順王金傅來降國除爲慶州二十三年陞爲大都督府成宗六年改
爲東京留守十四年稱留守使屬嶺東道顯宗三年降爲慶州防禦使五年改安東大都護府二十一年復爲東京留守時銳方
所上三韓會土記有高麗三京之文故復置之神宗五年東京夜別抄作亂攻劫州郡遣師討平之七年以東京人造新羅復盛
之言傳檄尙淸忠原州道謀亂降知慶州事奪管內州府郡縣鄕部曲分隷安東尙州高宗六年復爲留守忠烈王三十四年改
稱雞林府辛禑別號樂浪本朝太宗朝復慶州舊號世宗朝置鎭出輿地勝覽兼高麗史10)地理志11)
관호연혁 官號沿革본부(本府)에 전해 내려오는 선생안(先生案)을 상고해 내어 아래와 같이 차례로 나열하
지만 고려사와 같지 않으니 어느 것이 옳은 지는 자세하지 않다. 以本府流來先生案考出列序如左而與麗史
不同未詳孰是
고려 태조(太祖) 23년 경자(庚子, 940년)에 신라를 없애고 경주사(慶州司)라고 불렀으며 안동대도호 도독부
(安東大都護都督府)를 두었다. 성종(成宗) 13년 갑오(甲午, 994년)에 안동대도호를 고쳐 동경유수관(東京留守官)
을 삼았다. 목종(穆宗) 5년 임인(壬寅, 1002년)에 이를 고쳐 안동금주대도호부(安東金州大都護府)를 삼았다.
현종(顯宗) 3년 임자(壬子, 1012년)에 동경유수(東京留守)를 고쳐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를 삼았고,
현종 5년 갑인(甲寅, 1014년)에 경주방어사를 고쳐 안동대도호부를 삼았고,
현종 9년 무오(戊午, 1018년)에 안동도호부를고쳐 경주대도호부를 삼았고, 현종 18년 정묘(丁卯, 1027)에 목(牧)
을 삼았고, 현종 21년 경오(庚午, 1030년)에 목을 고쳐 동경유수관을 삼았다. 이하 동경유수관을고쳐 동경지관
(東京知官)을 삼고, 후에 지관을 고쳐 상서(尙書)를 삼고, 또 대판(大判)ㆍ사록(司錄)ㆍ법조(法曹)ㆍ기실(記室)
등의 관원을 두었는데 어느 해에 그렇게 하였는지 자세하지 않다. 지관의 일은 야별초(夜別抄)의 반란으로 인
하여 강등되어 지주(知州)가 된 듯하다.
충렬왕(忠烈王) 11년 을유(乙酉, 1285년)에 대판을 고쳐 시랑(侍郞)을 삼았다가 4년 뒤인 기축(己丑,1289년)에
다시 대판이라 불렀다. 충렬왕 21년 을미(乙未, 1295년)에 대판을 고쳐 판관(判官)을 삼았다가 정유년(丁酉年,
1297년)에 다시 시랑이라 불렀다. 충렬왕 34년 무신(戊申, 1308년)에 상서를 고쳐 부윤(府尹)을 삼았으며 시랑
을 고쳐 판관을 삼았다. 신우(辛禑) 4년(1378) 무오에 부윤으로서 원수(元帥)를 겸하였고, 고려말에는 부윤으로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겸하였고 판관으로 권농방어사(勸農防禦使)를 겸하였다.
우리 태조조(太祖朝)에 권농방어사를 폐지하였다.
효종(孝宗) 원년 경인(庚寅, 1650년)에 예천(醴泉)의 역적이 달아나 기계촌(杞溪村)에 거접(居接)하여 주인을
시해하였기 때문에 윤(尹)을 강등하여 목(牧)을삼았다. 금상조(今上朝헌종(憲宗)) 기해(己亥, 1839년)에 다시
승격하여 윤(尹)을 삼았다가 을사(乙巳, 1845년)에 적자(賊子)가 아비를 시해하였기 때문에 강등하여 부사(府使)
를 삼았다. 역대 부관(府官)의 성명은 선생안에 자세히 보인다.
麗太祖二十三年庚子除羅號爲慶州司置安東大都護都督府成宗十三年甲午改安東大都護爲東京留守官穆宗五年壬
寅改爲安東金州大都護府顯宗三年壬子改東京留守爲慶州防禦使顯宗五年甲寅改慶州防禦使爲安東大都護府顯宗
九年戊午改安東都護爲慶州大都護府顯宗十八年丁卯爲牧顯宗二十一年庚午改爲東京留守官此下改爲東京知官後
改知官爲尙書又置大判司錄法曹記室等官而未詳在於何年知官事疑因夜別抄之亂而降爲知州也忠烈王十一年乙酉
改大判爲侍郞四年己丑復號大判忠烈王二十一年乙未改大判爲判官丁酉復號侍郞忠烈王三十四年戊申改尙書爲府
尹侍郞爲判官辛禑四年戊午以府尹兼元帥高麗末以府尹兼兵馬節制使判官兼勸農防禦使我太祖朝廢勸農防禦使孝
宗元年庚寅以醴泉逆奴逃接杞溪村弑主故降尹爲牧今上朝己亥復陞爲尹乙巳以賊子弑父故降爲府使歷世府官姓名
詳見先生案
속현 屬縣
안강현(安康縣) 부의 북쪽 45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비화현(比火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의창군(義昌郡)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의창은 지금의 흥해(興海)이다. 고려 현종 때에 경주에 예속되었다.
공양왕(恭讓王)이 감무(監務)를 두었다. 우리 태조조에 다시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
신증 新增그곳에 토성(土城)이 있는데 그 토성 안에 엎드린 거북이 같은 산의 형세가 있기 때문에 구성(龜城)이
라고 한다.
기계현(杞溪縣) 부의 북쪽 7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모혜현(芼兮縣)인데 화계현(化雞縣)이라고도 하였다.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의창군의 영현으로하였다. 고려 현종 때 경주에 예속되었다. 신증 新增이 현의
남쪽 5리쯤에 읍(邑)의 기지(基址)가 있고, 현의 서쪽 지명은 북관촌(北館村)인데 향교(鄕校)의 기지가 있다.
자인현(慈仁縣) 부의 서쪽 11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노사화현(奴斯火縣)인데 기화현(其火縣)이라고도 한다.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장산군(獐山郡)에 예속되었다. 지금의 경산(慶山)이다.
고려 현종 때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
신증 新增숭정(崇禎) 정축년(1637, 인조 15) 인조조(仁祖朝)에 현인(縣人) 이창후(李昌後)와 김응명(金應鳴) 등이
상소하여 나누어 설치하기를 청하였다.
신광현(神光縣) 부의 북쪽 8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동잉음현(東仍音縣)인데 신을현(神乙縣)이라고도 한다.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의창군의 영현으로 하였고, 뒤에는 일어진(昵於鎭)이라고도 일컬었다.
고려 태조 13년(930년)에 태조가 친히 행행하여 성을 쌓고 이름을 신광진(神光鎭)이라고 고쳤다.
현종 때 경주에 예속되었다. 신증 新增그곳에 토성이 있는데 둘레가 230보이다. 구사부곡(仇史部曲) 부의 서쪽
10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마진량현(麻珍良縣)이다. 경덕왕이 여량현(餘粮縣)으로 고쳐 장산군에 예속되었다.
뒤에 강등되어 부곡(部曲)이 되었다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신증 新增우리 효종조 계사년(1653, 효종 4)에
자인현으로 옮겨 예속되었다.
죽장부곡(竹長部曲) 부의 북쪽 110리 지점인 청송부계(靑松府界)에 있다. 본래 신라의 장진현(長鎭縣)이다.
고려 때 강등되어 부곡이 되었다.
북안곡부곡(北安谷部曲) 부의 서쪽 100리에 있는데 영천(永川)의 동남촌(東南村)으로 넘어 들어간다.
安康縣在府北四十五里本新羅比火縣景德王改今名爲義昌郡領縣義昌今興海高麗顯宗時來屬恭讓王置監務我太祖
朝復屬之新增有士城城中有山形如伏龜故號龜城
◦杞溪縣在府北七十里本新羅芼兮縣一云化雞景德王改今名爲義昌郡領縣高麗顯宗時來屬新增縣南五里許有邑基
縣西地名北館村有鄕校基址
◦慈仁縣在府西一百十里本新羅奴斯火縣一云其火景德王改今名屬獐山郡今慶山高麗顯宗時來屬新增崇禎丁丑仁祖
朝縣人李昌後金應鳴等疏請分設
◦神光縣在府北八十里本新羅東仍音縣一云神乙景德王改今名爲義昌郡領縣後稱昵於鎭高麗太祖十三年親幸城之改
名神光鎭顯宗時來屬新增有土城周二百三十步
◦仇史部曲在府西百里本新羅麻珍良縣珍一作彌景德王改餘粮縣屬獐山郡後降爲部曲改今名新增我孝宗朝癸巳移屬
慈仁縣
◦竹長部曲在府北一百十里靑松府界本新羅長鎭縣高麗時降爲部曲
◦北安谷部曲在府西百里越入永川東南村
진관 鎭管
군(郡)이 넷이니, 울산(蔚山)ㆍ양산(梁山)ㆍ영천(永川)ㆍ흥해(興海)이다.
신증新增지금은 울산이 부(府)로 승격되었다.
현(縣)이 여섯이니, 청하(淸河)ㆍ영일(迎日)ㆍ장기(長鬐)ㆍ기장(機張)ㆍ동래(東萊)ㆍ언양(彥陽)이다.
신증 新增지금은 동래는 따로 독진(獨鎭)을 설치하였고 기장은 전선(戰船)을 설치하여 속오군(束伍軍)을 혁파
하였기 때문에 모두 경주의 진관(鎭管)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郡四蔚山梁山永川興海新增今則蔚山陞爲府縣六淸河迎日長鬐機張東萊彥陽新增今則東萊別設獨鎭機張置戰船革
罷束伍故皆不在於鎭屬中
속임 屬任
유향소(留鄕所) 좌수(座首) 1인, 별감(別監) 3인
대동(大同) 유사(有司) 2인
관청(官廳) 감관(監官) 2인
상평창(常平倉) 감관(監官) 1인
군기(軍器) 감관 2인
향약(鄕約) 도약정(都約正), 부약정(副約正), 직월(直月) 각 1인 각 면(面)에 또한 모두 약정과 직월 1인을 두었다.
향교(鄕校) 도유사(都有司) 1인, 장의(掌議) 1인, 행유사(行有司) 2인, 전곡(典穀) 1인
서악서원(西岳書院) 원장(院長) 1인, 유사 1인, 전곡 1인
옥산서원(玉山書院) 원장 1인, 유사 1인, 전곡 2인
지소(紙所) 감관 1인
신라시조묘(新羅始祖廟) 수호관(守護官) 1인
경순왕영당(敬順王影堂) 유사 1인
의국(醫局) 도감(都監) 1인, 도약정 예겸유사(都約正例兼有司) 1인, 감제(監劑)3인
무학당(武學堂) 교수(敎授) 1인, 유사 1인
양무당(養武堂) 중군(中軍) 1인, 영장 예겸천총(營將例兼千摠) 1인, 파총(把摠)
2인, 기고관(旗鼓官) 1인, 지구관(知彀官) 15인, 기패관(旗牌官) 16인, 초관(哨官)16인
留鄕所座首一人別監三人
◦大同有司二人
◦官廳監官二人
◦常平倉監官一人
◦軍器監官二人
◦鄕約都約正副約正直月各一人各面亦皆有約正直月一人
◦鄕校都有司一人掌議一人行有司二人典穀一人
◦西岳書院院長一人有司一人典穀一人
◦玉山書院院長一人有司一人典穀二人
◦紙所監官一人
◦新羅始祖廟守護官一人
◦敬順王影堂有司一人
◦醫局都監一人都約正例兼有司一人監劑三人
◦武學堂敎授一人有司一人
◦養武堂中軍一人營將例兼千摠一人把摠二人旗鼓官一人知彀官十五人旗牌官十六人哨官十六人
인리노비 人吏奴婢부(附)
향리(鄕吏) 16인, 가리(假吏) 166인, 관노비(官奴婢)는 모두 88명
鄕吏十六人假吏一百六十六人官奴婢並八十八口
읍명 邑名
진한(辰韓), 서야벌(徐耶伐), 신로(新盧), 사라(斯羅), 낙랑(樂浪), 계림(雞林),월성(月城), 동경(東京),
금오(金鰲), 문천(蚊川)
辰韓徐耶伐新盧斯羅樂浪雞林月城東京金鰲蚊川
성씨 姓氏
본부(本府) 박(朴)ㆍ석(昔)ㆍ김(金) 모두 신라의 종성(宗姓)이다.
이(李), 급량(及梁)최(崔), 사량(沙梁) 정(鄭), 본피(本彼) 손(孫), 모량(牟梁) 배(裴), 한저(漢柢) 설(薛),습비(習比)
◦이상 6부의 성씨에 대해서는 고적(古蹟)에 상세히 보인다.
강(康), 동주(洞州) 설(偰), 회골(回鶻) ◦인물 하(人物下)에 상세하다, 양(楊) 속성(續姓)이다.
안강(安康) 안(安), 노(盧), 김(金), 황(黃), 염(廉), 소(邵), 변(邊), 모두 당성(唐姓)이다. 윤(尹) 송생(松生)
기계(杞溪) 유(兪), 양(楊), 익(益), 맹(孟)이라고도 한다. 김(金) 김해(金海)
자인(慈仁) 박(朴), 한(韓), 정(鄭), 주(周), 임(任), 진도(珍島) 변(邊) 가은(加恩)
신광(神光) 서(徐), 진(陳), 윤(尹), 신(申)
구사(仇史) 정(鄭), 석(石), 조(曹), 전(全) 장산(章山)
죽장(竹長) 갈(葛), 속성이다. 이(李), 김(金), 송(宋) 모두 내성(來姓)이다.
성법이(省法伊) 김(金), 최(崔) 모두 속성이다.
북안곡(北安谷) 이(李), 송(宋), 갈(葛)
本府朴昔金並新羅宗姓李及梁崔沙梁鄭本彼孫牟梁裴漢柢薛習比◦已上六部姓詳見古蹟康洞州偰回鶻◦詳人物下楊續
◦安康安盧金黃廉邵邊並唐尹松生
◦杞溪兪楊益一作孟金金海
◦慈仁朴韓鄭周任珍島邊加恩
◦神光徐陳尹申
◦仇史鄭石曹全章山
◦竹長葛續李金宋幷來
◦省法伊金崔幷續
◦北安谷李宋葛
풍속 風俗
군자의 나라 君子之國
삼국사(三國史)에 “당나라 태종이 김춘추(金春秋)의 말을 듣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참으로 군자의 나라로다.’
하였다.” 하였다. 三國史云唐太宗聞金春秋之言嘆曰誠君子之國也
의복의 빛깔은 흰 것을 숭상한다. 服色尙素
수서(隋書)에, “의복의 빛깔은 흰 것을 숭상하며, 부인들은 머리털을 땋아서 머리에 틀어 올리고, 여러 가지
비단과 구슬로 장식한다.” 하였다. 隋書服色尙素婦人辮髮繞頭以雜綵及珠爲飾
혼인에는 술과 음식만 있을 뿐이다. 婚嫁唯酒食
수서에 “혼인의 예절에는 다만 술과 음식만 있을 뿐이며, 많이 장만하고 적게 장만하는 것은 빈부(貧富)의
정도에 따라 한다.” 하였다. 同上婚嫁之禮唯酒食而已輕重隨貧富
정월 초하루에는 서로 경축한다. 元日相慶
당서(唐書)에, “정월 초하루에는 서로 경축하는데, 이날은 해와 달의 신(神)에게 절한다.” 하였다.
唐書元日相慶是日拜日月神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꿇어앉는다. 見人必跪
당서(唐書)에,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꿇어앉는데 손으로 땅을 짚는 것으로 공손함을 삼는다.” 하였다.
同上見人必跪則以手据地爲恭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제사지낸다. 糯飯祭烏
신라 소지왕(炤智王)이 이미 금갑(琴匣)의 화(禍)12)를 면하자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만약 까마귀와 쥐와
용과 말과 산돼지의 공(功)이 아니었더라면 임금께서는 화를 입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정월의 첫 자일(子日), 첫 진일(辰日), 첫 오일(午日), 첫 해일(亥日)에는 모든 일에 조심하고 감히 함부로
행동하지 않아 신일(愼日)로 삼았다. 이날을 속담으로 달도(怛忉)라고 하는데, 슬퍼하고 근심하여 금기(禁忌)
한다는 뜻이다. 또 정월 16일을 오기일(烏忌日)로 정하고, 찰밥으로 제사하였다.
나라의 풍속이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서출지(書出池) 주(註)에 보인다.
新羅炤智王旣免琴匣之禍國人以爲若非烏鼠龍馬豬之功則王之身戚矣遂以正月上子上辰上午上亥等日忌愼百事不
敢動作以爲愼日俚言怛忉言悲愁而禁忌也又以十六日爲烏忌之日以糯飯祭之國俗至今猶然詳見書出池註
을야13)의 길쌈 乙夜績麻
유리왕(儒理王) 때 육부(六部)를 두 편으로 나누어 왕녀(王女)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부내(部內)의 여자를
거느리고 편을 나누어,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일찍 대부(大部)의 뜰에 모여 길쌈을 하다가 을야(乙夜)가 되어
서야 파하곤 했다.
8월 보름이 되어 그들이 해놓은 일의 많고 적음을 살펴서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게 사례
하였다. 이때 노래와 춤과 온갖 유희를 다하는데 이를 가배(嘉俳)라 하였다. 이때 진 편의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며 탄식하기를, “회소(會蘇) 회소”라고 하였는데 그 소리가 슬프고도 운치가 있었다. 후세 사람이 그소리를
본떠 노래를 짓고 ‘회소곡(會蘇曲)’이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그런 풍속이행하여지고 있다.
儒理王時中分六部爲二使王女二人各率部內女子分朋自秋七月旣望每日早集大部之庭績麻乙夜而罷至八月望考其
功之多少負者置酒食以謝勝者於是歌舞百戲皆作謂之嘉俳是時負家一女起舞嘆曰會蘇會蘇其音哀雅後人因其聲而
作歌名會蘇曲國俗至今行之
풍월주 風月主․ 화랑 花郞
법흥왕(法興王) 원년(元年, 514년)에 동남(童男)으로 얼굴과 풍채가 단정한 자를 뽑아서 풍월주(風月主)라
부르며, 착한 선비를 구하여 무리를 만들어 효(孝) ․제(悌) ․ 충(忠) ․ 신(信)을 장려하였다.
◦처음에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인재를 알 수 없음을 근심하여, 무리를 지어 모여 놀게 하여 그들의 행의
(行義)를 살펴본 뒤에 등용하려고 하였다. 마침내 아름다운 여자 두 사람을 뽑아서 받들어 원화(源花)를 삼아
남모(南毛)라고 하고 준정(俊貞)이라고 하였는데, 모인 무리가 300여 명이었다. 그러나 두 여자는 미모를 서로
다투어 질투하였다. 준정이 자신의 집에 술을 준비한 다음 남모에게 억지로 권하여 취하자 물에 던져 죽였다.
남모의 무리들이 그 시체를 찾아가지고 고발하여 준정은 복주(伏誅)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원화(源花)의 제도를 폐지하였다. 그 뒤에 다시 미모의 남자를 모아 단장하고 꾸며 화랑(花郞)
이라 일컬으니, 많은 무리가 운집(雲集)하였다. 도의(道義)로써 서로 권면(勸勉)하기도 하고 노래와 풍악으로
서로 즐기기도 하면서 산수(山水)를 찾아다니며 노닐어 아무리 먼 곳이라도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간사한 사람과 바른 사람을 알게 되어 가려서 등용하였다.
法興王元年選童男容儀端正者號風月主求善士爲徒衆以勵孝悌忠信◦初新羅君臣患無以知人欲使類聚群遊以觀行
義然後擧而用之遂簡美女二人奉爲源花曰南毛曰俊貞聚徒三百餘人二女爭娟相妬俊貞置酒私第強勸南毛酒至醉投
河殺之其徒得其屍以告俊貞伏誅遂廢源花其後更聚美貌男子粧飾之名花郞徒衆雲集或相磨以道義或相悅以歌樂
遊遨山水無遠不至因此知人邪正擇而用之
칼춤의 유희 舞劒之戲
황창랑(黃倡郞)은 신라 사람이다. 속설에 전하기를, “나이 일곱 살 때에 백제(百濟)에 들어가서 시가에서 칼춤을
추니, 구경꾼들이 담처럼 둘러섰다. 백제의 왕이 그 소식을 듣고 그를 불러다 보고는 마루에 올라와서 칼춤을
추라고 명령하였다. 창랑은 기회를 타서 백제왕을 찔러 죽였다. 이에 백제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 신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겨 그의 얼굴 모습을 본떠서 가면(假面)을 만들어서 칼춤 추는 형상을 하였는데, 지금도 그 탈춤이 전해
지고 있다.” 한다.
◦신라에는 또 향악(鄕樂)으로 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 준예(狻猊) 다섯 가지의 가면극이
있다. 문창(文昌) 최치원(崔致遠)이 금환(金丸)을 읊은 시(詩)는 다음과 같다.
黃倡郞新羅人也諺傳年七歲入百濟市中舞劍觀者如堵濟王聞之召觀命升堂舞劍倡郞因剌王國人殺之羅人哀之像其
容爲假面作舞劍之狀至今傳之◦新羅又有鄕樂金丸月顚大面束毒狻猊五技崔文昌致遠金丸詩
몸 돌리고 팔 흔들어 금환을 희롱하니 回身掉臂弄金丸
달 구르듯 별 뜨듯 눈 가득히 보이네 月轉星浮滿眼看
의료14)가 있다 한들 이보다 낫겠는가 縱有宜僚那勝此
넓은 바다에 파도 잔잔해짐을 알겠어라 定知鯨海息波瀾
월전(月顚)을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月顚詩
어깨 높고 목 움츠리고 머리털은 꼿꼿한데 肩高項縮髮崔嵬
팔을 걷어 부치고 선비들 술잔을 다투누나 攘臂群儒鬪酒盃
노랫소리 듣고서 사람들 모두 웃으니 聽得歌聲人盡笑
저녁에 세운 깃발 새벽까지 재촉하네 夜頭旗幟暁頭催
대면(大面)을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大面詩
황금빛 얼굴을 가진 바로 그 사람이 黃金面色是其人
손에 구슬 채찍 잡고 귀신을 부리네 手抱珠鞭役鬼神
빨리 닫고 천천히 걷고 운치 있는 춤을 추니 疾歩徐趨呈雅舞
완연히 요 임금 시대에 단봉이 춤추는 듯 宛如丹鳳舞堯春
속독(束毒)을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束毒詩
봉두난발에 쪽빛 얼굴 사람과는 다른데 蓬頭藍面異人間
무리를 거느리고 뜰에 와서 난새처럼 춤추네 押隧來庭學舞鸞
둥둥둥 북을 치매 바람은 선들선들 打皷鼕鼕風瑟瑟
남으로 달아남 북으로 뜀 까닭이 없네 南奔北躍也無端
준예(狻猊)를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狻猊詩
멀리 유사를 건너 만리 길 오느라고 遠涉流沙萬里來
털옷은 해어지고 흙먼지만 붙었어라 毛衣破盡着塵埃
머리 흔들고 꼬리 치며 인덕에 길이 드니 搖頭掉尾馴仁德
웅장한 그 기운 어찌 뭇 짐승과 같겠는가 雄氣寧同百獸才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목욕한다. 浴東流水
김극기(金克己)의 문집(文集)에, “동도(東都)의 풍속에 6월 보름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목욕하고,
인하여 계음(禊飮)을 하는데 이를 유두연(流頭宴)이라고 한다.” 하였다. 이는 하삭(河朔)15)에 피서(避暑)하는
술잔치를 잘못 알고 계음(禊飮)이라고 한 것이다.
金克己集東都遺俗以六月望浴東流水因爲禊飮謂之流頭晏蓋以河朔避暑之飮誤爲禊飮耳
가게를 벌여놓고 교역을 한다. 列肆交易
물건을 싣는 데는 수레를 사용한다. 任載用車
백성의 풍속은 질박하다. 民俗質朴
관풍안(觀風案)에, “신라시대의 유풍(遺風)이 있다.” 하였다.觀風案云云有羅代之遺風
토지는 비옥하고 풍속은 순박하다. 土厚風淳
이첨(李詹)의 기(記)에, “백성들이 예의과 겸양을 안다.” 하였다.李詹記云云民知禮讓
번화하고 아름다움이 남쪽 지방에서 으뜸이다. 繁華佳麗甲於南方
정인지(鄭麟趾)의 기문에 이런 말이 있다. 이상은 여지승람에 나온다. 鄭麟趾記以上出輿地勝覽
신증 新增
여자는 쪽을 찐다. 女子北髻
신라 때 국도(國都)의 북방이 허전하게 텅 비었으므로 여자들이 뒤통수에다 쪽을 쪘다. 인하여 북계(北髻)라고
명명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오히려 그러하다. 꼬리가 짧은 개를 세상에서 동경구(東京狗)라고 하는데 또한 북방
이 허전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新增羅時以國都北方虛缺女子結髻於腦後因名北髻至今猶然狗之短尾者世謂之東京狗亦以北方虛故也
선배는 남자를 통칭하는 명칭이다. 先輩男子通稱之號
산천 山川
낭산(狼山) 부(府)의 동쪽 9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명활산(明活山) 부의 동쪽 11리에 있다.
신증 新增이 산 아래 언덕이 있어 한지원(閑地原)이라고 명명하였는데 곧 부성(府城)의 내맥(來脈)이다.
예로부터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었다. 가정(嘉靖) 임오년(1522, 중종 17)부터 백성들이 대부분 함부로 경작하여
산맥을 잘라 끊어 물을 끌어 전답에 댔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 1)에 사리역(沙里驛)의 역졸(驛卒)이 마위전(馬位田)으로써 민전(民田)과 바꾸어
이곳으로 옮겨와 거처하였다. 금년에 읍인(邑人)이 소장(訴狀)을 관청에 올려 내맥을 손상시켰다고 하였으므로
감사(監司)에게 신청하여 사리(沙里)의 옛 역을 철수하여 다른 곳으로 옮겼다.
지금 살펴보니, 명활산에서 뻗어 나온 한 줄기가 낭산이 되고 낭산으로부터 월성(月城)이 되며, 또 뻗어 나온 한
줄기가 부룡(府龍)이 된다.
여지승람에서 낭산을 진산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토함산(吐含山)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동악(東嶽)이라고 부르고, 중사(中祀)를 거행하였다.
금강산(金剛山) 부의 북쪽 7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북악(北嶽)이라고 불렀다.
비월동산(非月洞山) 부의 서쪽 67리에 있다.
선도산(仙桃山) 부의 서쪽 7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서악(西嶽)이라고 불렀다.
혹은 서술(西述), 서형(西兄), 서연(西鳶)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함월산(含月山) 부의 동쪽 50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남악(南嶽)이라고 불렀다.
狼山在府東九里鎭山
◦明活山在府東十一里新增山下有原名曰閑地原乃府城來脉也自古種樹成藪自嘉靖壬午年間民多冒耕而鑿斷山脉
引水灌田天啓癸亥年間沙里驛卒以馬位田換得民田移居於此今年因邑人呈狀爲其有傷來脉申請監司撤移沙里舊
驛今按明活山一枝爲狼山自狼山爲月城而一枝爲府龍輿地勝覽以狼山爲鎭山者非也
◦吐含山在府東三十里新羅稱東嶽爲中祀
◦金剛山在府北七里新羅號北嶽
◦非月洞山在府西六十七里
◦仙桃山在府西七里新羅號西嶽或稱西述或稱西兄或稱西鳶
◦含月山在府東五十里新羅號南嶽
금오산(金鰲山) 일명 남산(南山)이라고도 한다. 부의 남쪽 6리에 있다.
◦당 나라의 고운(顧雲)이 최 문창(崔文昌)16)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주었다.
◦金鰲山一名南山在府南六里◦唐顧雲贈崔文昌詩
내 들으니 바닷가에 세 마리의 금오가 있어 我聞海上三金鰲
머리 위에 높디높은 산을 이었다 하네 金鰲頭戴山高高
산 위엔 구슬궁 진주대궐 황금전이요 山之上兮珠宮貝闕黃金殿
산 아래엔 천리만리 끝없이 넓은 물결 山之下兮千里萬里之洪濤
그 곁에 한 점의 계림이 푸른데 傍邊一點雞林碧
금오산이 정기 모아 빼어난 인재 낳았네. 鰲山孕秀生奇特
형산(兄山) 안강현(安康縣) 동쪽 21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북형산(北兄山)이라 부르고 중사(中祀)를 거행
하였다.
울개산(蔚介山)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복안산(伏安山)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묵장산(墨匠山) 부의 남쪽 40리에 있다.
지화곡산(只火谷山)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단석산(斷石山)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한다. 부의 서쪽 23리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신라의 각간(角干)
김유신(金庾信)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고자 하여 신검(神劒)을 구해가지고 월생산의 석굴 속에 숨어들어가
검술(劍術)을 수련(修鍊)하였다. 시험삼아 큰 돌을 잘라서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창건하고 단석사(斷石寺)라 명명하였다.” 한다.
자옥산(紫玉山) 안강현(安康縣)의 서쪽 13리에 있다.
달성산(達城山) 안강현 남쪽 20리에 있다.
비학산(飛鶴山) 신광현(神光縣) 서쪽 5리에 있다.
인박산(咽薄山)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각간 김유신이 보검(寶劍)을 지니고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서 향(香)을 사르고 하늘에 고유(告由)하여 병법(兵法)을 기도하던 곳이다.” 한다.
사라현(舍羅峴)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건대령(件代嶺) 부의 동쪽 36리에 있다.
여근곡(女根谷) 부의 서쪽 41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백제의 장군 우소(亏召)가 이곳에 병사를 매복시켜
두었는데, 신라의 선덕여왕(善德女王)이 각간(角干) 알천(閼川)에게 습격하도록 명하여 한 사람도 남김없이
엄습하여 다 죽였다.” 한다.
성현(成峴) 부의 북쪽 58리에 있다.
팔조령(八助嶺) 부의 동쪽 65리에 있다.
마북산(馬北山) 신광현(神光縣) 북쪽 26리에 있다.
시령(杮嶺) 부의 동쪽 65리 장기현(長鬐縣)의 경계에 있다.
추령(楸嶺)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성령(荿嶺)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치술령(鵄述嶺) 부의 남쪽 50리에 있다. 곧 박제상(朴堤上)의 아내가 바라보며 곡하다가 자진한 곳이다.
바다[海] 부의 동쪽 70리에 있다.
팔조포(八助浦) 부의 동쪽 70리에 있다. 어량(魚梁)이 있다.
형산포(兄山浦) 안강현 동쪽 20리에 있다. 굴연(堀淵)의 하류이다.
동천(東川) 북천(北川)이라고도 하고 알천(閼川)이라고도 한다. 부의 동쪽 5리에있다. 추령에서 발원(發源)하여
굴연으로 흘러 들어간다. 신증 新增세상에 전하기를, “시내가 동북으로부터 흘러나와 곧장 읍의 거주지로 뚫고
들어오므로 고려 현종조(縣宗朝)에 전라, 충청, 경상 3도의 군정(軍丁)을 징발하여 돌로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어서 수해를 방지하였다.” 한다.
서천(西川) 부의 서쪽 4리에 있다. 발원지가 셋인데, 하나는 인박산(咽薄山)에서 발원하며 하나는 묵장산(墨匠山)
에서 발원하며 하나는 지화곡산(只火谷山)에서 발원한다. 합류(合流)하여 형산포(兄山浦)로 들어간다.
온지연(温之淵) 안강현 동쪽 24리에 있다. 용당(龍堂)이 있는데 가물 때 비가 내리기를 빌면 감응이 있다.
굴연천(堀淵川)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어량(魚梁)이 있다.
사등이천(史等伊川) 황천(荒川)이라고도 한다.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토함산(吐含山)에서 발원하여 서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兄山在安康縣東二十一里新羅稱北兄山爲中祀
◦蔚介山在府西三十里
◦伏安山在府南三十里
◦墨匠山在府南四十里
◦只火谷山在府西四十里
◦斷石山一云月生山在府西二十三里諺傳新羅角干金庾信欲伐麗濟得神劒隱入月生山石窟鍊劍試斷大石疊積如山
其石尙存創寺其下名曰斷石
◦紫玉山在安康縣西十三里
◦達城山在安康縣南二十里
◦飛鶴山在神光縣西五里
◦咽薄山在府南三十五里諺傳金角干携寶劒入深壑燒香告天祈禱兵法處
◦舍羅峴在府北三十里
◦件代嶺在府東三十六里
◦女根谷在府西四十一里世傳百濟將軍于召伏兵于北新羅善德王命角干閼川掩殺之無孑遺此王知幾三事之一也
◦成峴在府北五十八里
◦八助嶺在府東六十五里
◦馬北山在神光縣北二十六里
◦杮嶺在府東六十五里長鬐縣界
◦楸嶺在府東三十里
◦筬嶺在府東四十里
◦鵄述嶺在府南五十里即朴堤上妻望哭自盡處
◦海在府東七十里
◦八助浦在府東七十里有魚梁
◦兄山浦在安康縣東二十里堀淵下流
◦東川一云北川一云閼川在府東五里出楸嶺入堀淵新增俗傳川流自東北直衝邑居故高麗顯宗朝發全羅忠淸慶尙三
道軍丁築石爲堤成植林藪以防水害云
◦西川在府西四里有三源一出咽薄山一出墨匠山一出只火谷山合流
入兄山浦
◦温之淵在安康縣東二十四里有龍堂禱雨有應
◦堀淵川在府北三十五里有魚梁
◦史等伊川一云荒川在府東三十里源出吐含山入西川
문천(蚊川)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사등이천의 하류이다. ◦김극기(金克己)의 시(詩)는 다음과 같다.
◦蚊川在府南五里史等伊川下流 ◦金克己詩
동황17)이 한 손으로 내려준 은택 東皇一手恩
만물이 골고루 받았도다 萬彙均沾被
꽃 마음은 따스한 바람에 놀라고 花心驚惠風
새 소리는 화창한 기운에 감응하네 鳥聲感和氣
붉디붉은 빛은 복숭아꽃에 오르고 朱朱上緋桃
희디흰 빛은 오얏꽃을 찾았도다 白白尋練李
꾀꼬리 혀는 노래하는 아이와 다투고 鶯舌鬪歌童
제비 허리는 춤추는 기녀를 기만하네 燕腰欺舞妓
고운 봄날을 맞이하여 占斷艶陽天
그윽한 승경 찾아가네 追攀幽勝地
토령의 정상에 올라보고 將升兎嶺巓
문천의 물가를 따라가네 却並蚊川涘
공중을 우러러 아득히 바라보고 仰空遙送目
언덕에 올라 고요히 귀 기울이네 臨岸靜傾耳
첩첩한 산은 병풍처럼 둘러있고 屛開簇簇山
출렁이는 물은 거울처럼 반짝이네 鏡轉溶溶水
구름 끝엔 황곡이 붙어 날고 雲端帖黃鵠
수면에는 붉은 잉어 뛰어 오르네 浪面跳紫鯉
그윽한 향기는 혜초 난초에서 움키고 幽馨掬蕙蘭
빼어난 빛은 연과 마름에서 맛보겠네 秀色飡荷芰
아름다운 경치는 만나기 어렵거니 美景苦難逢
덧없는 인생을 어찌 오래 믿겠는가 浮生寧久恃
세상 밖 놀음을 하려 할진댄 要成域外遊
인간 세상 누를 모두 버려야 하리 都遣人間累
붓을 놀려 미친 듯 시를 써보고 走筆縱狂吟
술잔을 들어 흠뻑 취함을 자랑하네 飛觴誇爛醉
시비는 통발을 잊은18) 듯하고 是非兩忘筌
영욕은 헌신짝 벗 듯하네 榮悴俱脫屣
푸른 술 아직도 다하지 않았는데 綠醅猶未闌
붉은 해는 홀연히 서산에 지누나 紅晷忽將墜
오늘 저녁이 어떤 때이며 今夕是何時
이내 몸은 누구의 아들인가 此身誰氏子
만약 봉래산의 신선이 아니라면 若非蓬島仙
참으로 칠원의 관리19)이리라 眞箇漆園吏
삶과 죽음도 외려 마음에 잊었거니20) 浮休尙忘情
감과 머묾을 어찌 개의하겠는가 去住寧介意
머리 들어 연하를 하직하고 擧頭謝煙霞
부축 받으며 발길을 돌리노니 扶腋回杖履
다만 두려워라 거마가 내달리는 세상에서 但恐車馬場
아침 일찍부터 명리를 따르는 것이 晨興趁聲利
또 불계시(祓禊詩)는 다음과 같다. 又祓禊詩
금년 봄에 날씨 궂어 갠 날 적고 今年濕蟄少開霽
열흘 동안의 장맛비 강물을 엎어놓은 듯 十日愁霖如倒河
즐거워라 홀연히 씻은 듯 구름 걷히니 忽喜陰雲淨似掃
남산에 만 줄기 푸른 산이 드러나네 南山萬朶開靑螺
빼어난 산세 오백 리를 치달리다가 逸勢橫奔五百里
중도에 구부러져 비스듬히 솟았어라 中塗拗怒成坡陀
그 아래 한 줄기 문천이 있으니 下有蚊川一帶水
천만 번 서리고 꺾여 구불구불 흐르네 千盤萬折流逶蛇
월정교 어귀로 흘러 내려가니 走向月精橋口過
놀란 물결 부서져 옥을 울리는 듯 驚瀾崩碎響鳴珂
엄장루 아래 이르러선 점점 질펀해져 嚴莊樓下漸汗漫
물결 잔잔 모래 평평 비단을 펼친 듯 浪息沙平鋪蜀羅
낙읍의 제생 십 일만 명이 洛邑諸生十一萬指
물에서 불계하니 어깨 서로 닿는구나 臨流祓禊肩相磨
좋은 때 아름다운 경치 예부터 얻기 어렵나니 良辰美景古難必
성대히 모여 영화21)를 따름 누가 사양하랴 盛集誰辭追永和
더구나 나는 젊어서부터 방광하였으니 而予况又少放狂
붉은 놀잇배 끌고 흰 물결 따르리라 擬拖紅船隨素波
어찌하여 총총히 학사로 향하겠는가 胡爲忩忩向學舎
자리를 맞대고 함께 금잔을 기울이세 促席共倒金叵羅
포도 같은 푸른 물빛 움킬 만하여라 蒲萄綠漲色可掇
통쾌히 마셔 붉은 안색 된 줄 몰랐네 痛飮不省朱顔酡
맑게 즐겨 반쯤 취해도 객은 흩어지지 않았건만 淸歡半酣客未散
대숲 저 편에서 붉은 해가 먼저 지는구나 竹外紅日先蹉陀
취기에 의기가 갑자기 마구 솟아나니 乘酣意氣忽橫出
청천에 올라가서 노양22)의 창 휘두르고파라 欲上靑天橫魯戈
토상지(吐上池)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고위산(高位山) 부의 남쪽 25리에 있다. 천룡사(天龍寺)의 주산(主山)이다.
이상은 여지승람에 나온다.
◦吐上池在府東四十里
◦高位山在府南二十五里天龍寺主山也以上出輿地勝覽23)
신증 新增
표암(瓢巖) 부의 동북쪽 5리에 있다. 이알평(李謁平)이 내려와 살던 곳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때 이 바위
가 국도(國都)에 해를 끼친다 하여 박을 심어 이 바위를 덮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한다.
어을어산(於乙於山) 안강현의 진산이다. 현의 서북을 가로 지르고 있다.
삼승산(三勝山) 안강현 서쪽 20리에 있다. 골짜기 가운데의 물과 돌이 깨끗하고 기이하다. 사부(師傅) 정극후
(鄭克後)가 서당을 지었다.
도덕산(道德山) 안강현 서쪽 10리에 있다. 자옥산(紫玉山)의 서북 봉우리다. 위에 장암(場巖)이 있고 중간에
두덕암(斗德菴)이 있다. 자세한 것은 불우조(佛宇條)에 보인다.
화개산(華蓋山) 옥산서원(玉山書院)의 주산이다. 모양이 화개(華蓋)와 같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설창산(雪倉山) 안강현 동쪽 8리에 있다. 양좌촌(良佐村)의 주산이다.
무학산(舞鶴山) 안강현 서쪽 15리에 있다.
무릉산(茂陵山) 안강현 서남쪽 10리에 있다.
곤제산(昆弟山) 안강현 남쪽 15리에 있다. 두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 있는 모습이 형제와 같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봉서산(鳳棲山) 사성산(四聖山) 부의 동쪽 50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때 성승(聖僧) 네 명은 남쪽
봉우리에 살고 봉황은 북쪽 봉우리에 모여 들었기 때문에 남쪽 봉우리를 사성산이라고 명명하고 북쪽 봉우리를
봉서산이라고 명명하였다.” 한다.
형제산(兄弟山)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두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 있는 모습이 형제와 같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
한 것이다.
아미산(峨眉山) 부의 남쪽 70리에 있다. 날씨가 가물 때 비가 내리기를 빌면 감응이 있다.
승삼산(僧三山)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 때 중 셋이 관가의 뜰에 들어와 호랑이로 변하
였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한다 .
봉좌암(鳳坐巖) 기계현 서남쪽 10리에 있다. 이 바위 서쪽에 석굴이 있고, 그 아래 진기암(鎭氣菴)의 옛터가 있다.
태화산(太華山) 기계현 북쪽 15리에 있다.
운주산(雲住山) 기계현 서쪽 15리에 있다. 안국사(安國寺)의 주산이다. 산세가 높고 험준하고 구름이 항상 머무
르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설창산(雪倉山) 부의 서쪽 5리 쯤에 있다.
사산(蛇山) 기계현 동쪽에 있다. 그 위에 신라시대의 태봉(胎峯)이 있다.
비장산(臂長山)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금곡사(金谷寺)의 주산이다. 그 북쪽에 신라 시대의 태봉이 있다.
생아현(生鵝峴) 기계현 북쪽 40리에 있다.
대현(大峴) 기계현 북쪽 15리에 있다.
화내현(火乃峴) 기계현 서쪽 20리에 있다.
마조현(磨造峴) 기계현 동쪽 10리에 있다.
안현(鞍峴) 기계현 남쪽 5리에 있다.
용암(龍巖) 신광현 동쪽 5리에 있다. 이 바위 위에 누워 있는 용[臥龍]의 형상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독산(獨山) 향교산(鄕校山)이라고도 한다. 신광현 동쪽 2리에 있다. 넓은 들 가운데 하나의 조그마한 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그 위에 토성이 있다. 그 토성의 모양이 두 겹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우물이 있는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세상에 전하기를, “향교의 터이다.” 한다.
안지산(安趾山) 신광현 북쪽 3리에 있다. 그 위에 토성이 있는데 모양이 세 겹으로 되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때 진평왕(眞平王)이 유람하던 곳이다.”한다.
부산(富山)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품상촌(品上村)의 주산이다. 그 산 위에 옛터가 있는데 속칭 장자(長者)의
터라 한다. 또 용정(湧井)이 있고 산허리에 석굴이 있는데 그 안에는 10여 명을 수용할 수가 있다.
귀존애(貴尊崖) 부의 서쪽 45리에 있다.
구미산(龜尾山)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그 위에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 있다.
인애산(仁崖山)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연적봉(硯滴峯) 부의 서쪽 55리에 있다. 모양이 연적과 같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석두산(石頭山) 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동경부(東京阜) 부의 서쪽 80리에 있다. 경계가 청도(淸道)와 접하였다.
독표령(禿瓢嶺)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마질령(麻叱嶺) 부의 서북쪽 50리에 있다.
여현(礪峴) 안강현 서쪽 30리 영천(永川)의 경계에 있다.
화절현(花折峴) 부의 서쪽 17리에 있다.
마전현(馬轉峴)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검단산(檢丹山) 안강현 남쪽 20리에 있다. 사방촌(士坊村)의 서쪽이다.
차령(車嶺) 부의 동쪽 55리에 있다.
호혈굴(虎穴窟) 묵장산(墨匠山) 동쪽에 있다. 그 안에는 3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시산(匙山)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망산(望山)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그 위에 기우제 지내는 곳이 있다.
한천(寒川) 발원지가 셋인데, 하나는 옥산동(玉山洞)에서 나오며 하나는 여현(礪峴)에서 나오며 하나는 두리동
(豆里洞)에서 나와 합류하여 굴연천(堀淵川)으로 들어간다.
달성천(達城川) 발원지가 둘인데, 하나는 대현곡(大峴谷)에서 나오며 하나는 성
법곡(省法谷)에서 나와 합류하여 굴연천으로 들어간다.
호읍천(虎邑川) 비학산(飛鶴山)에서 발원하여 흥해(興海)의 곡강(曲江)으로 흘러 들어간다.
우박천(牛朴川) 발원지가 셋인데, 하나는 토상(吐上)에서 나오며 하나는 신원(新院)에서 나오며 하나는 석을지
(石乙只)에서 나와 합류하여 울산(蔚山)의 태화강(太和江)으로 들어간다.
의곡천(義谷川) 발원지가 둘인데, 하나는 감존(甘存)에서 나오며 하나는 노곡(蘆谷)에서 나와 합류하여 청도의
공암천(孔巖川)으로 들어간다.
죽장천(竹長川) 청송(靑松) 경계의 유현(柳峴)에서 발원하여 영천(永川)의 장항천(獐項川)으로 들어간다.
모량천(牟梁川) 발원지가 일곱인데, 하나는 우징동(雨徵洞)에서 나오며 하나는
달천동(達川洞)에서 나오며 하나는 선동동(仙童洞)에서 나오며 하나는 아화(阿火)에서 나오며 하나는 도이동
(道伊洞)에서 나오며 하나는 고천(古川)에서 나오며 하나는 단석산(斷石山)에서 나와 합류하여 서천(西川)으로
들어간다.
新增
◦瓢巖在府東北五里李謁平所降處俗傳新羅時以此巖有害於國都種瓢以覆故名焉
◦於乙於山安康縣鎭山也橫截縣西北
◦三勝山在安康縣西二十里谷中水石淸奇師傅鄭克後構書堂
◦道德山在安康縣西十里紫玉山西北峯也上有場巖中有斗德菴詳見佛宇
◦華蓋山玉山書院主山也形如華蓋故名焉
◦雪倉山在安康縣東八里良佐村主山也
◦舞鶴山在安康縣西十五里
◦茂陵山在安康縣西南十里
◦昆弟山在安康縣南十五里有雙峯並峙形如兄弟故名
◦鳳棲山四聖山在府東五十里俗傳新羅時四聖僧住于南峯鳳鳥常集于北峯故名其南曰四聖名其北曰鳳棲
◦兄弟山在府東二十里雙峯並峙如兄弟故名
◦峨眉山在府南七十里天旱禱雨有應
◦僧三山在府北十里俗傳高麗時三僧入公庭化爲虎故名
◦鳳坐巖在杞溪縣西南十里巖西有石窟其下有鎭氣菴舊址
◦太華山在杞溪縣北十五里
◦雲住山在杞溪縣西十五里安國寺主山也以山勢高峻雲氣常住故名
◦雪倉山在府西五里許
◦蛇山在杞溪縣東上有羅代胎峯
◦臂長山在府西三十里金谷寺主山也其北有羅代胎峯
◦生鵝峴在杞溪縣北四十里
◦大峴在杞溪縣北十五里
◦火乃峴在杞溪縣西二十里
◦磨造峴在杞溪縣東十里
◦鞍峴在杞溪縣南五里
◦龍巖在神光縣東五里巖上有臥龍形故名
◦獨山一云鄕校山在神光縣東二里廣野中有一小山㞳起上有士城形二重其內有井大旱不渴俗傳鄕校基云
◦安趾山在神光縣北三里上有土城形三重俗傳新羅眞平王所遊處也
◦富山在府西三十里品上村主山也山上有舊基俗稱長者基又有湧井山腰有石窟中可容十餘人
◦貴尊崖在府西四十五里
◦龜尾山在府西三十里上有祈雨處
◦仁崖山在府西四十里
◦硯滴峯在府西五十五里形如硯滴故名
◦石頭山在府西五十里
◦東京阜在府西八十里境接淸道
◦禿瓢嶺在府西四十里
◦麻叱嶺在府西北五十里
◦礪峴在安康縣西三十里永川界
◦花折峴在府西十七里
◦馬轉峴在府西二十里
◦檢丹山在安康縣南二十里士坊村西
◦車嶺在府東五十里
◦虎穴窟在墨匠山東中可容三十餘人
◦匙山在府南三十里
◦望山在府南二十里上有祈雨處
◦寒川有三源一出玉山洞一出礪峴一出豆里洞合流入于堀淵川
◦達城川有二源一出大峴谷一出省法谷谷流入于堀淵川
◦虎邑川源出飛鶴山流入于興海曲江
◦牛朴川有三源一出吐上一出新院一出石乙只合流入于蔚山太和江
◦義谷川有二源一出甘存一出蘆谷合流入于淸道孔巖川
◦竹長川源出靑松界柳峴流入于永川獐項川
◦牟梁川有七源一出雨徵洞一出達川洞一出仙童洞一出阿火一出道伊
洞一出古川一出斷石山合流入于西川
승지 勝地
봉황대(鳳凰臺) 부의 남문 밖에 있다.
부운대(浮雲臺) 부의 서쪽 45리에 있다. 봉황대와 같으나 약간 높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의 왕이 유람하던
곳이다.” 한다.
독락당(獨樂堂) 옥산서원(玉山書院) 북쪽 1마장 정도에 있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 선생의 별장이다.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이 독락당 주인 이준(李浚) 바로 선생의 서손(庶孫)이다. 에게 증별(贈別)한 시는
다음과 같다.
鳳凰臺在府南門外
◦浮雲臺在府西四十五里如鳳凰臺而差高俗傳羅王所遊處也
◦獨樂堂在玉山書院之北一馬場許晦齋李先生別墅也◦五峯李好閔贈別獨樂堂主人李浚即先生庶孫也詩
예전 자옥산 지날 적에 昔過紫玉山
천석의 기이함 보지 못했었지 不見泉石奇
천석을 보지 못해도 괜찮지만 泉石可不見
도맥은 실로 여기에 있도다 道脈賓在斯
이 사람이 또 남쪽으로 돌아가 斯人又南歸
나에게 깊은 슬픔을 더하게 하는구나 使我增長悲
봉황대엔 누런 국화 피어 있을 테고 鳳臺黃菊開
개울가엔 붉은 단풍 드리웠으리라 河岸丹楓垂
내 길에 올라도 늦지 않았으니 吾道亦未晚
필마를 몰아 지금 응당 따르리라 匹馬今當隨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시는 다음과 같다. 柳西厓詩
이군은 신실하고 후덕한 선비로 李君信厚士
늙을수록 기이함 많은 나를 위로하였지 憐我老多奇
봄바람 불제 한번 들렀었고 春風一見過
가을날에 다시 이곳에 왔도다 秋日復來斯
진퇴가 오래전에 이미 정해졌으니 行藏久已定
세상일을 어찌 슬퍼할 것 있으랴 世事安足悲
장차 술 한 잔의 기쁨을 다하고 且盡一盃懽
두 줄기 눈물을 떨구지 마시게나 莫遣雙淚垂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淸風與明月
이때에 또한 서로 따르는구려 此時又相隨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시는 다음과 같다. 旅軒張先生詩
백두산에서부터 자옥산에 이르니 白頭至紫玉
산악의 정기 모여 가장 기특하네 融結方最奇
우리나라 현인은 회재에 이르러 東賢至晦齋
도맥이 여기에서 바로 잡혔다오 道脈正於斯
어이하여 먼 변방에서 별세하여 如何終絶徼
길이 산하의 슬픔이 되고 말았는가 永作山河悲
다행히도 저술이 남아 있어 幸賴有著述
훌륭한 가르침 일성처럼 드리워졌어라 的訓日星垂
즐거워하시던 바를 스스로 찾을 만하니 所樂自可尋
지팡이 짚고 신 신고 따를 필요 없다오 不須杖屨隨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시는 다음과 같다. 東岳李安訥詩
사람도 좋고 새도 또한 좋은데 人好鳥亦好
더구나 시내와 산이 기이함에랴 况乃溪山奇
산중에 한가로운 땅이 있으니 山中有閑地
내 이곳에서 늙고 파라 我欲老於斯
양기24)를 진실로 울 만한데 楊岐良可泣
묵사25)를 어이 슬퍼하지 않으랴 墨絲詎無悲
길이 어진 마을 거처하며 永依仁里居
남기신 밝은 가르침 받들리라 仰承明訓垂
선철이 떠난 지 이미 오래이니 先哲去已遠
이분을 놔두고 누구를 따를손가 捨子孰追隨
서애 유성룡의 시는 다음과 같다. 柳西厓詩
여기서 도화동까지의 거리는 此去桃花洞
아득하여 칠사26) 남짓이나 되는데 迢迢七舍餘
잔설을 밟고 홀로 와서 獨來殘雪後
멀리 벗의 거처를 방문하였네 遙訪故人居
옛 의리는 지금도 오히려 남아있고 舊義今猶在
사귀던 정은 깊어 소원하지 않누나 交情病未踈
봄바람에 한번 서로 이별하려니 春風一相別
시름겨운 눈물 각자 줄줄 흐르오 危涕各漣如
양직암(養直菴) 독락당 북쪽에 있는데 지금은 계정(溪亭)이라고 부른다. 앞쪽은 시냇물을 대하였는데 물이 고여
소용돌이를 이루고 밑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다. 선생이 손수 심은 소나무와 대나무가 좌우에 빽빽이 늘어서
있다.
◦養直菴在獨樂堂北今稱溪亭前臨澗水渟滀爲匯淥浄徹底先生手植松竹森列左右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의 시는 다음과 같다. 灌圃魚得江詩
일찍이 자옥산 가운데가 좋은 것을 보고 曾看紫玉山中好
공이 서당을 지음은 이 시내 때문이지 公作書堂爲此溪
오늘 영령이 문득 놀라 괴상히 여기니 今日英靈却驚怪
생전에 일찍이 해계서27)를 보지 못했도다 生曾不見駭鶏犀
태초의 시내와 산이 나의 늙음을 용납하여 混沌溪山容我老
청년 때부터 이곳에 살아 까마귀 머리 희어졌구나28) 青年住此白烏頭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내가 가난한 귀신인 줄 아나 世人皆識吾貧鬼
만 섬의 연하는 부유한 이 부끄럽게 할 수 있으리 萬斛煙霞富可羞
선생이 차운한 시는 다음과 같다. 先生次曰
서툴고 게으름 은거에 합당함을 스스로 알아 自知踈懶合幽棲
복축한 이래 자옥산의 계곡을 사랑하였다오 卜築由來愛紫溪
지휘에 비로소 참을 잃은 까치29)임을 指揮始悟忘眞鵲
처세에 오히려 서각으로 물 비춰봄30) 혐의하였소 處世猶嫌照水犀
뛰어난 공은 일찍이 시내와 산의 형승 차지해서 多公早占溪山勝
맑은 조정에 벼슬 그만두고 백발에 이르렀구려 投紱淸朝至白頭
평소의 심사 어긋남을 스스로 탄식하노니 自歎平生心事謬
양진과 경세 둘 다 몹시도 부끄럽다오 養眞經世兩堪羞
용주(龍洲) 조경(趙絅)의 시는 다음과 같다. 龍洲趙絅詩
자옥산 남쪽 기슭이 은거할 곳을 제공하니 玉山南麓供幽棲
구름은 송림 애워 싸고 달은 시내에 비취누나 雲擁松林月印溪
백년이 뒤인 지금 선생을 상상하니 存想先生百年後
마음이 통하여 영서31)가 필요치 않도다 心通不必待靈犀
오도가 동방에 와서 어둡다가 다시 밝아졌나니 吾道東來暗復明
염락32)으로 연원을 거슬러 올라감이 선생에서 시작 되었네 遡源濂洛自先生
험난함을 겪게 함은 하늘의 뜻이었나니 試看險阻天心在
드디어 훌륭한 문장이 택반33)에서 이루어지게 하였도다 遂使玄文澤畔成
관어대(觀魚臺) 곧 계정(溪亭) 아래에 있는 반석(盤石)이다. 갈아 놓은 듯이 평탄하니 30~40명이 앉을 만하다.
영귀대(詠歸臺) 곧 관어대 동쪽 언덕에 우뚝 솟아 평평하게 펼쳐져 있는 것이다.
탁영대(濯纓臺) 정혜사(浄惠寺) 동쪽 시냇가 언덕에 있다.
징심대(澄心臺) 또한 정혜사 동쪽 시냇가 언덕에 있다. 탁영대와 짝을 이루어 우뚝 솟아 있다.
세심대(洗心臺) 서원의 행단(杏壇) 아래에 있다. 반석으로 평평하게 펼쳐 있는데 주위가 매우 넓으며 남쪽 면에
퇴계 선생(退溪先生)이 큰 글자로 쓰신 세심대(洗心臺)라는 세 글자를 새겨 놓았다. 시냇물이 산골짜기로부터
반석 사이를 휘감아 흘러 폭포를 이루고 있고, 그 아래는 깊은 못이 있어 용추(龍湫)라고 한다. 양면이 깎은 듯
한데 길이가 4,5장(丈)이나 되고 넓이가 1장 쯤 된다. 여기에도 또한 용추의 서쪽면 석벽 위에 퇴계 선생이 큰
글자로 쓰신 용추라는 두 글자를 새겨 놓았다. 물이 불어나 부딪히는 바람에 용자(龍字)의 오른쪽이 이지러졌다.
이 용추 가에는 늙은 느릅나무가 줄을 지어 그늘이 반석을 덮고 있다. 이상의 대명(臺名)은 모두 회재 선생이
명명한 것이고 퇴계 선생이 또한 편액을 썼는데 그 필적이 독락당에 보관되어 있다.
하룡추(下龍楸) 곧 세심대의 하류이다. 좌우에 암석이 빽빽이 솟아 있고 폭포가 흘러 못을 이루었는데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
쌍벽정(雙碧亭) 용추 남쪽 언덕에 있다. 반송(盤松) 몇 그루가 그 위를 비스듬히 가리고 있다.
사자암(獅子巖) 징심대 북쪽 1마장 쯤에 있다.
침류정(枕流亭) 부의 서쪽 50리 의곡촌(義谷村)에 있다. 겹겹의 봉우리가 깎은듯이 평평하고 흐르는 물이 굽이
돈다. 진사(進士) 최기남(崔起南)이 지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가연호정(駕淵湖亭)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높고 평평한 봉우리가 있어 아래로 깊은 못을 대하고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왕이 유상(遊賞)하던 곳이다.” 한다. 만력(萬曆) 연간에 진사 김득지(金得地)가 바위 위에
정자를 지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반구대(盤龜臺) 부의 남쪽 70리에 있다. 3층으로 대(臺)를 이루었는데 그 모양이 엎드린 거북과 같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큰 시내가 굽이 돌아 흘러 아래에 맑은 못이 이루어지니 그 천석(泉石)의 빼어남은 진실
로 별천지이다.
봉림대(鳳臨臺) 안강현 동쪽 굴연(堀淵) 하류에 있다. 끊어진 기슭이 우뚝 솟아 물을 대하고 있다.
회재 선생이 명명하였다.
수운정(水雲亭) 안강현 동쪽 설창산(雪倉山) 남쪽 기슭에 있다. 큰 들이 평평하게 펼쳐지고 흐르는 냇물을 굽어
보고 있다. 참봉(叅奉) 정엽(鄭曄)이 그 위에다 정자를 지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설천정(雪川亭) 수운정 왼쪽에 있다. 형승(形勝)이 수운정과 병칭된다. 군수 이의활(李宜活)이 지은 것이다.
육의당(六宜堂) 부의 동쪽 30리 토상호(吐上湖) 가에 있다. 아름다운 경치는 또
한 하나의 별천지이다. 현감 최계종(崔繼宗)이 지은 것이다.
◦觀魚臺即溪亭下盤石也平坦如練可坐三四十人
◦詠歸臺即觀魚臺東岸巖石斗起平鋪
◦濯纓臺在浄惠寺東溪岸
◦澄心臺亦在浄惠寺東溪岸與濯纓臺雙峙
◦洗心臺在書院杏壇下盤石平鋪周圍甚廣刻退溪先生所書洗心臺三大字於石南面澗水自山谷縈流於盤石間爲瀑布
下有深潭名曰龍湫兩面如削成長可四五丈廣可一丈許亦刻退溪先生所書龍湫二大字於湫西面石壁上水漲衝激缺
龍字右邊湫岸老楡成行蔭覆盤石以上臺號皆晦齋先生所命而退溪先生亦皆書額筆跡藏在獨樂堂
◦下龍湫卽洗心臺下流也左右巖石矗立瀑流成潭深不可測
◦雙碧亭在湫南岸盤松數株偃蓋其上
◦獅子巖在澄心臺北一馬場許
◦枕流亭在府西五十里義谷村層巒削平流水彎廻進士崔起南所構而今廢
◦駕淵湖亭在府南二十里有峯高平俯臨深淵俗傳羅王遊賞處萬曆中進士金得地作亭于巖上今廢
◦盤龜臺在府南七十里三層爲臺狀如伏龜故名大川彎廻下爲澄潭其泉石之勝眞別區也
◦鳳臨臺在安康縣東堀淵下流斷麓斗起臨水晦齋先生命名焉
◦水雲亭在安康縣東雪倉山南麓平臨大野俯瞰川流叅奉孫曄作亭其上今廢
◦雪川亭在水雲亭左形勝與水雲亭並稱君守李宜活所構
◦六宜堂在府東三十里吐上湖上佳致亦一別區縣監崔繼宗所構
부윤(府尹)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시는 다음과 같다. 府尹鄭文翼詩
천 년의 오랜 세월동안 아끼고 감추더니 慳秘千年久
그윽한 은거지 그대를 기다려 열렸구나 幽居待子開
산의 형세 나는 봉황이 춤추는 듯하고 山形飛鳳舞
물의 기세 누운 용이 휘감아 도는 듯하네 水勢臥龍廻
돌이 늙었으니 소나무 의당 오래되었고 石老松宜古
모래사장 맑으니 백로 또한 오는도다 沙明鷺亦來
돌아감을 잊고 다시 술잔을 드니 忘歸更把酒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진다 하지 말라 休道日西頹
여러 봉우리가 겹겹으로 트인 곳에 群巒重坼處
한 골짜기가 마을을 안고 열렸어라 一壑抱村開
인근에 시선들이 집을 짓고 사니 隣近詩仙築
뜰에는 세속의 수레 돌아옴이 없어라 庭無俗駕廻
발을 뚫고 구름 그림자가 스며오고 透簾雲影落
장막을 헤치고 물빛이 비쳐 오네 侵幔水光來
다만 임천의 흥취만 있을 뿐이니 只有林泉興
세도가 무너짐을 어이 알겠는가 何知世道頹
부윤 전식(全湜)의 시는 다음과 같다. 府尹全湜詩
정자가 탁 트이니 봄의 모습이 아름답고 亭敞春容媚
호수가 평평하니 거울처럼 펼쳐졌어라 湖平鏡面開
옛적에 산간의 표일함을 듣고서 舊聞山簡逸
지금에야 습지의 굽이로 향하네34) 今向習池廻
모든 근심이 말끔히 사라지나니 萬慮都消去
삼공의 벼슬도 기꺼이 바꾸어 오리라35) 三公肯換來
올라보니 무한한 정취가 있어 登臨無限意
더딘 해 먼저 기울어질까 두렵구나 遲日恐先頹
늦은 봄 띠풀로 엮은 정자 따뜻하여 春晚茅亭暖
높은 대에 비단 자리를 펼쳤어라 臺高綺席開
한가한 정서로 노래 몇 곡 부르고 閑情歌數闋
호방한 기운으로 술 세 순배 돌렸네 豪氣酒三廻
취하여 혼연히 돌아감을 잊었다가 取醉渾忘返
헤어질 때에 다시 올 약속 하노라 臨分更約來
내일 아침 부서의 업무 있더라도 明朝有簿牒
옥산이 무너짐36)을 애석해 하지 않으리 不惜玉山頹
정랑(正郞) 전극항(全克恒)이 고인의 시구를 모아 그 뒤를 다음과 같이 이었다.
正郞全克恒以集句次曰
텅빈 집에는 시골 정취가 있고 고적 虛院野情在高適
멀리 보니 물상이 오는도다 동인 遐觀物象來同人
임천을 마음 내키는 대로 찾아다녀 낙빈왕 林泉恣探歷駱賓王
거마를 매어두고 서성거리노라 두심언 車馬繫遲廻杜審言
멀리 있는 물은 하늘과 겸하여 맑고 두보 遠水兼天浄杜甫
길게 부는 바람은 달을 전송하러 오네 한유 長風送月來韓愈
근심을 잊는 데는 오직 술이 있을 뿐이니 장언천 忘憂惟有酒張言川
옥산이 기울어짐을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노조린 不怪玉山頹盧照隣
만귀정(萬歸亭) 안강현 동쪽 20리에 있다. 그 고을 사람 장유랑(蔣惟亮)이 지었다. 형강(兄江)을 굽어보고 넓은
들판이 평평히 펼쳐지는데 크고 트이고 깨끗하고 수려함이 동도(東都)에서 제일이다.
동해의 상선(商船)들이 모두 이 정자 아래에서 정박한다. 사부(師傅) 정극후(鄭克後)가 기문을지었다.
잡저보유(雜著補遺)에 보인다.
이락당(二樂堂) 금오산 동쪽 기슭에 있다. 그 고을 사람 임적(任勣)이 지은 객당(客堂)이다. 앞쪽은 연못을 대하고
있는데 돌을 쌓아 층계를 만들고 인하여 누정(樓亭)을 지었다. 그 위에 올라가 보면 완연히 물 가운데 서있는 것
같다. 연못에 연꽃을 가득 심어 놓았는데 가을이면 무성하게 피어 만 떨기의 붉은 꽃이 찬란히 난간까지 비친다.
◦萬歸亭在安康縣東二十里鄕人蔣惟亮所構府壓兄江平臨大野宏豁明麗甲於東都東海商船皆泊於亭下師傅鄭克後
爲記見雜著補遺
◦二樂堂在金鰲山東麓鄕人任勣所構客堂也前臨池湖築石爲階仍構樓亭登臨則宛在水中種蓮滿湖當秋盛開萬朶紅
萼輝映軒楹
토산 土産
백반(白礬) 사라현(舎羅峴)에서 산출된다.
사철(沙鐵) 부의 동쪽 팔조보(八助浦)에서 산출된다.
석류황(石硫黃) 비월동산(非月洞山)에서 산출된다.
◦전복[鰒] ◦연어(鰱魚) ◦광어(廣魚) ◦은구어(銀口魚) ◦대구어(大口魚)◦홍합(紅蛤) ◦청어(靑魚) ◦방어(魴魚)
◦황어(黃魚) ◦홍어(洪魚) ◦김[海衣]◦미역[藿] 바다 속에 나물이 있으니 속명(俗名)으로 미역이라 한다.
그 종류는 곤포(昆布), 다시마[塔士麻]와 같은 것으로 통틀어 미역이라 한다.
◦송이[松蕈] ◦잣[海松子] ◦꿀[蜂蜜] ◦칠(漆) ◦산무애뱀[白花蛇] ◦천문동(天門冬) ◦하수오(何首鳥)
◦오수유(吳茱萸) ◦산수유(山茱萸) ◦왜저(倭褚)◦농어[鱸魚] ◦문어(文魚) ◦송어(松魚)
이상은 여지승람에 나온다.
신증 新增◦조협(皁莢) ◦조각자(皁角刺) ◦마황(麻黃) ◦인삼(人蔘) ◦맥문동(麥門冬) ◦수문호(水璊瑚) ◦수정(水晶)
白礬出舎羅峴
◦沙鐵出府東八助浦
◦石硫黃出非月洞山
◦鰒◦鰱魚◦廣魚◦銀口魚◦大口魚
◦紅蛤◦靑魚◦魴魚◦黃魚◦洪魚◦海衣
◦藿海中有菜俗名爲藿其類如昆布塔士麻通謂之藿
◦松蕈◦海松子◦蜂蜜◦漆◦白花蛇
◦天門冬◦何首烏◦吳茱萸◦山茱萸
◦倭褚◦鱸魚◦文魚◦松魚以上出輿地勝覽37) 新增◦皁莢◦皁角刺◦麻黃◦人蔘◦麥門冬◦水璊瑚◦水晶
성곽 城郭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4075척, 높이가 12척이다. 그 안에 우물 80개가 있다.
징례문(徴禮門) 읍성의 남문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탔는데 숭정(崇禎) 임신년(1632, 인조 10)에 부윤(府尹)
전식(全湜)이 중수(重修)하고 동 ․ 서 ․ 북의 세 곳의 문도 차례로 이어서 세웠다.
금성(金城)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박혁거세 21년 갑신(甲申, 기원전 37년)에 서울의 성을 건축하고 금성이라
하였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2407척이다. 26년 기축(己丑, 기원전 32년)에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월성(月城) 부의 동남쪽 5리에 있다. 파사왕(婆娑王) 12년 신축(辛丑, 91년)38)에 쌓았다. 모양이 반달과 같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혹 재성(在城)이라고도 한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2023보(步)이다.
여지승람에는 둘레가 3023척이라고 하였다. 그해 가을에 왕이 이곳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처음 탈해왕(脫解王)이 젊은 시절 토함산(吐含山)에 올라가 성 안에 살 만한 곳을 찾았는데 일월의 형세와 같은
양산(楊山)의 한 봉우리를 보고, 곧 내려와서 찾으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그 집 곁에다 몰래 숫돌과 숯을
묻어 놓은 다음 호공에게 이르기를, “이 집은 우리 조상의 집이다.” 하니, 호공이 쟁변하다가 드디어 관가에 소송
하였다. 관가에서 말하기를, “무엇으로 너의 집이라는 사실을 징험하겠는가?”하니, 탈해가 말하기를, “나는 본래
대장장이인데 잠깐 이웃 고을에 나간 사이에 남에게 빼앗겼습니다. 땅을 파서 징험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과연 숫돌과 숯을 찾아내었는지라 드디어 탈해에게 주어 거처하게 하였다. 이곳이 바로 월성의 터이다.
유례왕(儒禮王) 7년 경술(庚戌, 290년)에 큰 홍수가 나서 월성이 무너졌다. 8년 신해(辛亥, 291년)에 보수하여
쌓았다. 소지왕(昭智王) 9년 정묘(丁卯,487년) 에 지붕을 이고, 10년 무진(戊辰, 488년)에 이곳으로 옮겨 거처
하였다.
邑城石築周四千七十五尺高十二尺內有井八十
◦徴禮門邑城南門也火於壬辰兵亂崇禎壬申府尹全湜重修東西北三門次第繼建
◦金城在府東四里赫居世二十一年甲申築京城號曰金城土築周二千四百七尺二十六年己丑營宮室於金城
◦月城在府東南五里婆娑王十二年辛丑築形如半月故名或稱在城土築周一千二十三步輿地勝覽周三千二十三尺秋
王移居于此初脫解王少時登吐含山望城中可居之地見楊山一峯如日月勢乃下尋之即瓠公宅也潛埋礪炭于其側謂
瓠公曰此是吾祖家屋瓠公爭辨遂訟于官官曰何以驗汝家脫解曰我本冶匠乍出隣鄕爲人所奪請掘地以驗果得礪炭
遂與脫解居之此即月城之址儒禮七年庚戌大水月城頹毀八年辛亥補築炤智九年丁卯葺之十年戊辰移居于此
이인로(李仁老)39)의 시는 다음과 같다. 李仁老詩
외로운 성 약간 굽어 반달 닮았는데 孤城微彎象半月
가시덤불 다람쥐 굴을 반쯤 가리웠네 荆棘半掩猩㹳穴
곡령의 푸른 소나무 기상이 울창한데 鵠嶺靑松氣鬱蔥
계림의 누른 잎은 가을에 쓸쓸하여라40) 雞林黃葉秋蕭瑟
태아의 자루를 거꾸로 잡은 뒤에41) 自從太阿倒柄後
중원의 사슴은 누구 손에 죽었던고42) 中原鹿死何人手
강가의 여자들은 속절없이 옥수화43)를 전하는데 江女空傳玉樹花
봄바람은 몇 번이나 금제의 버들을 떨쳤던가44) 春風幾拂金堤柳
만월성(滿月城) 월성 북쪽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945척이다.
명활성(明活城) 월성 동쪽에 있다. 진흥왕(眞興王) 15년 갑술(甲戌, 554년)에쌓고 진평왕(眞平王) 15년 계축
(癸丑, 593년)에 개축(改築)하였다. 둘레가 3000보이다. 여지승람에는 둘레가 7818척이라고 하였다.
자비왕(慈悲王) 16년 계축(癸丑, 473년)에 지붕을 이고 18년 을묘(乙卯, 475년)에 이곳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남산성(南山城) 월성 남쪽에 있다. 진평왕 13년 신해(辛亥, 591년)에 쌓았다. 둘레가 2054보이다.
여지승람에는 둘레가 7544척이라고 하였다. 문무왕(文武王)19년 기묘(己卯, 679년) 증축(增築)하였다.
부산성(富山城) 부의 서쪽 32리에 있다. 문무왕 3년 계해(癸亥, 663년)에 쌓았다. 돌로 쌓은 성인데 둘레가
3600척이고 높이가 7척이다. 지금은 반이 무너졌다.
그 안에는 네 개의 시내와 하나의 연못과 아홉 개의 샘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관문성(關門城) 부의 동쪽 45리 울산 경계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799척이다. 지금은 만리성(萬里城)
이라 부른다. 이상은 여지승람에 나오는데 사이사이에 빠진 것을 보충하였다.
◦滿月城在月城北土築周四千九百四十五尺
◦明活城在月城東眞興王十五年甲戌築眞平王十五年癸丑改築周三千步輿地勝覽周七千八百十八尺慈悲王十六年
癸丑葺之十八年乙卯移居于此
◦南山城在月城南眞平王十三辛亥築周二千五十四步輿地勝覽周七千五百四十四尺文武王十九年己卯增築
◦富山城在府西三十二里文武王三年癸亥築石城周三千六百尺高七尺今半頹圮內有四川一池九泉有軍倉今廢
◦關門城在府東四十五里蔚山界石築周六千七百九十九尺今稱萬里城以上出輿地勝覽45) 而間補其遺
관방 關防
감포영(甘浦營) 부의 동쪽 72리에 있다.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을 둔다. 정덕(正德) 임신년(1512, 중종 7)에
돌로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736척이고 높이가13척이다. 그 안에 네 개의 우물이 있다. 여지승람에 나온다.
신증 新增지금은 동래(東萊)로 진(鎭)을 옮겼다.
甘浦營在府東七十二里◦水軍萬戶一人正德壬申石築城周七百三十六尺高十三尺內有四井出輿地勝覽46) 新增今
移鎭于東萊
봉수 烽燧
형산봉수(兄山烽燧) 부의 북쪽 45리에 있다. 동쪽으로 영일현(迎日縣) 사화랑산(沙火郞山)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영천군(永川郡) 소산(所山)에 호응한다.
하서지봉수(下西知烽燧) 부의 동쪽 70리에 있다. 남쪽으로 울산군(蔚山郡) 유포(柳浦)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독산에 호응한다.
독산봉수(禿山烽燧) 부의 동쪽 54리에 있다. 남쪽으로 하서지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장기현(長鬐縣) 복길(卜吉)
에 호응한다.
대점봉수(大岾烽燧) 부의 동쪽 57리에 있다. 남쪽으로 울산군 가리산(加里山)에호응하고, 북쪽으로 동악에
호응한다.
동악봉수(東岳烽燧) 부의 동쪽 57리에 있다. 남쪽으로 대점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고위산에 호응한다.
고위산봉수(高位山烽燧) 부의 남쪽 25리에 있다. 동쪽으로 동악에 호응하고, 남쪽으로 소산(蘇所)에 호응하며,
서쪽으로 내포점에 호응한다.
내포점봉수(乃布岾烽燧) 부의 서쪽 26리에 있다. 동쪽으로 고위산에 호응하고서쪽으로 주사산에 호응한다.
주사산봉수(朱砂山烽燧) 부의 서쪽 42리에 있다. 동쪽으로 내포점에 호응하고 서쪽으로 영천군 방산(方山)에
호응한다. 신증 新增지금은 도음곡촌(道音谷村)의 앞산으로 옮겼다.
소산봉수(蘇山烽燧) 부의 남쪽 75리에 있다. 남쪽으로 언양현(彥陽縣) 부로산(夫老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고위산에 호응한다. 이상은 여지승람에 나온다.
兄山烽燧在府北四十五里東應迎日縣沙火郞山西應永川郡所山
◦下西知烽燧在府東七十里南應蔚山柳浦北應禿山
◦禿山烽燧在府東五十四里南應下西知北應長鬐縣卜吉
◦大岾烽燧在府東五十七里南應蔚山加里山北應東岳
◦東岳烽燧在府東五十七里南應大岾西應高位山
◦高位山烽燧在府南二十五里東應東岳南應蘇山西應乃布岾
◦乃布岾烽燧在府西二十六里東應高位山西應朱砂山
◦朱砂山烽燧在府西四十二里東應乃布岾西應永川郡方山新增今移于道音谷村前山
◦蘇山烽燧在府南七十五里南應彥陽縣夫老山北應高位山以上出輿地勝覽47)
궁실 宮室
집경전(集慶殿) 객관(客館)의 북쪽에 있다.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의 화상[睟容]을 봉안하였다.
세종조(世宗朝)에 전우(殿宇)를 개조하고 임진왜란 때 강릉(江陵)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부의 기지(基址)와
계체(階砌)는 모두남아 있다.
객관(客館)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동헌기(東軒記)에, “신라가 계림(雞林)에 도읍하였더니,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자, 나라가 없어지고 경주(慶州)로 되었다. 얼마 뒤에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승격
하였으며, 성종(成宗)은 동경유수(東京留守)를 두었고, 현종(顯宗)은 유수를 폐지하고 경주 방어사(慶州防禦
使)로 강등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유수를 두었으며, 중간에 변고(變故)를 겪어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하였다. 고종(高宗)은 다시 유수로 하였고, 충렬조(忠烈朝)에 계림부(雞林府)로 고쳐 일컬었다.
우리 태종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 15년(1415년)에 다시 경주부로 하고, 세종장헌대왕조(世宗莊憲大王朝)에
태조강헌대왕의 화상을 집경전에 모셨다.
경주부는 경상도(慶尙道)에서 가장 크다. 토지는 비옥하고 백성과 물화가 풍부하다. 인심은 순박하여 옛날
신라 때에 유풍(遺風)이 있다. 여기저기에 기이한 승경지(勝景地)와 옛 현인(賢人)들의 유적(遺跡)이 있어 전대
인물들의 풍류를 넉넉히 상상할 수 있다. 거정(居正)이 젊은 시절 영남(嶺南)을 유람할 적에 여러 이름난 곳을
거쳐 경주에 이르니, 번성하고 화려함이 실로 동남(東南) 여러 고을 중에 으뜸이었다. 다만 객관이 누추하고
좁아서 비록 의풍루(倚風樓) 한 채가 있었으나, 올라가 조망(眺望)하며 답답한 심회를 펴기에는 부족하였다.
이것이 이 고을의 큰 결점이었다. 가만히 생각건대, ‘경주가 주(州)가 된 것이 고려 때부터 이미 500년이 된다.
이 고을에 원으로 온 이 중에 어진 이가 몇 사람이며, 유능한 이가 몇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어찌 한 사람
도 퇴락(頹落)한 객관을 수리한 사람이 없어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던 말인가.’ 하였다. 임오년(1462, 세조 8)
겨울에 내가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경주에 오니, 나의 벗 자헌대부(資憲大夫) 김담(金淡)이 부윤(府尹)이었
으며, 승의랑(承議郞) 신중린(辛仲磷)이 통판(通判)이었다. 감사(監司) 복천(福川) 권개(權愷) 공이 나를 위하
여 의풍루 위에 주연을 마련하였다. 그 자리에서 내가 전에 생각했던 바를 거론하니 부윤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가 내 마음을 먼저 알았네 그려. 이미 통판과 의논하여 장차 객관을 중수하기로 하고 재목을 쌓아놓고
기와를 구우면서 시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뿐일세.’ 하였다. 감사가 그 말을 듣고 또 가상히 여겼다.
거정이 말하기를, ‘경주 객관이 중수되어 새롭게 됨은 운수가 있는 것이로군. 어진 부윤이 있고 어진 통판이
있으며 또 감사가 있어, 뜻이 같고 의논이 합치하였으니 일은 기일을 지정하여 할수 있게 되었군.’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김 부윤은 이조 판서가 되어 소환되고, 계미년(1463, 세조 9) 여름에 봉원(蓬原) 정흥손(鄭興孫)
공이 이어 부윤이 되었다. 신 통판이 일의 유래를 자세히 아뢰고 객관의 옛터에 그 규모를 늘려 크게 경영하여
지으려 하니, 그 고을의 대족(大族)인 지금의 영의정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申叔舟) 공과 대사성
(大司成) 김영유(金永濡) 공이 또 그 일을 가상히 여겨 목수 서휴(徐休)를 보내어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먼저 대청(大廳) 5칸을 세우니 앞뒤에 툇마루가 있고, 크고 시원하고 널찍하다. 동쪽과 서쪽에헌(軒)이 있는데
각각 상방(上房)과 곁방[挾室]이 있어 서늘하고 따뜻함이 알맞게 되었다.
단청을 하니 무늬와 광채가 눈부시게 빛나서 보는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갑신년(1464, 세조 10) 겨울에 신 통판이 감찰(監察)로 소환되니, 양석견(楊石堅) 공이 와서 이를 이어 수선하여
낭무(廊廡)를 날개처럼 붙이고 담을 둘러쌓아 공사가 이미 완성되었다. 병술년(1466, 세조 12) 봄 1월에 정 부윤
이 임기가 차서 소환되고, 화성(和城) 최선복(崔善復) 공이 이어 부윤이 되었으며, 2월에는 양 통판이 체직되고
정란손(鄭蘭孫)이 이어 통판이 되었다. 아직 마치지 못한 공사는 두 분 후(侯)가 필시 조치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하루는 신공(辛公)이 나에게 말하기를, ‘경주의 동헌(東軒)이 장차 새롭게 되려는데 의풍루가 또 불타 버려서
선유(先儒) 가정(稼亭) 이곡(李穀) 선생의 기문도 따라서 없어졌으니, 경주의 지나간 문적을 증거할 길이 없네.
그대만큼 일의 시말을 잘 아는 이가 없으니, 부디 기문을 써 주시게.’ 하였다. 거정이 말하기를, ‘내가 지난날
경주의 부족한 점이라고 여기던 것을 몇몇 군자의 힘으로 한 번에 크게 새로 중수하였으니 어찌 기쁜 마음으로
쓰지 않겠는가. 더구나 춘추(春秋)에도 공사를 일으킨 것은 반드시 기록하였으니 이는 민사(民事)를 중요
하게 여겼기 때문이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요즘 수령이 된 자는 거의 다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많은
사람을 동원하며, 시기는 적당치 못한데 공사를 지나치게 벌려서 누각(樓閣) 하나를 세우고 청사(廳舍) 하나를
영조(營造)하는 데에도 정사를 방해하고 백성을 해침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 김 부윤과 신 통판이 앞에서 일을
처음 시작해서는 목재 하나와 돌 하나도 비용을 백성에게 부담시키지 않았으며, 뒤를 이은정 부윤과 양 통판은
급히 서두르지도 않고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면서 백성을 부리기를 때에 맞추어 하였으니,
이 몇몇 군자는 춘추의 예(例)를 보더라도 포장(褒獎)하고 기록할 만하다. 거정은 직책이 예원(藝苑)에
참여하여 있으니 문사에 능하지 못하다고 하여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우선 일의 대강을 써서 돌려보낸다.
최(崔)ㆍ정(鄭) 두 분 후(侯)의 명성에 관해서는 계속하여 쓸 사람이 또한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였다.
集慶殿在客館北太宗朝奉安我太祖康獻大王睟容世宗朝改造殿宇壬辰兵亂移安于江陵府基址階砌俱在
◦客館徐四佳居正東軒記新羅氏都雞林麗祖統三爲一國除爲慶州俄陞大都督府成宗置東京留守顯宗廢留守降爲慶
州防禦使未幾復置之中更變故降知慶州事高宗復爲留守忠烈朝改稱雞林府我太宗恭定大王十五年復爲慶州府世
宗莊憲大王朝安太祖康獻王大睟容於集慶殿府於慶尙一道最鉅土地豐衍民物富庶人心淳朴有古新羅氏之遺風往
往有奇形勝地古賢遺跡前代人物之風流亦足想見矣居正少遊嶺南歷名區抵于慶繁華佳麗實東南諸郡之冠第恨館
宇湫隘雖有倚風一樓不足以登眺暢叙湮鬱是一州之大欠也竊以謂慶爲州自高麗氏已五百年吏于州不知賢幾人能
幾人何無一人修擧廢墜至於如是哉壬午冬奉使至于慶吾友金資憲淡爲尹辛承議仲磷爲通判監司福川權公愷觴余
倚風樓上予擧前說而告之尹笑曰子先得我心矣已謀諸通判將重新客館積材陶瓦以待歲月耳監司聞而亦嘉之居正
曰慶之重新其有數乎得賢尹賢通判又得賢監司志同議合事可指日爲也未幾金尹以吏曹判書召還癸未夏蓬原鄭公
興孫繼尹辛通判具白事由因客館舊址增大其規模將經營締構矣而鄕之大族今領議政高靈府院君申公叔舟大司成
金公永濡又嘉其事遣梓人徐休董其役先起大廳五間前後有楹宏敞廣濶東西有軒各有上房俠室涼燠得宜施之丹雘
文彩眩耀觀者韙之甲申冬辛通判以監察召還楊公石堅繼之修繕翼以廊廡繚以垣墻事旣告成丙戌春正月鄭尹秩滿
召還和城崔公善復繼尹二月楊通判見遞鄭通判蘭孫繼之功之未訖者兩侯措置亦必有餘裕矣一日辛公語余曰慶之
官廨將新而倚風樓又火先儒稼亭李先生記亦隨以亡慶之往牒無文可徵知事之終始莫如子幸記之居正曰僕前日所
欠於慶者得數君子一大重新豈不可喜而可書也况春秋興作必書重民事也予觀今爲守令率皆勞民動衆時屈擧贏建
一樓營一廨妨政害民多矣今金尹辛通判創始於前一材一石費不及民繼而鄭尹楊通判勿亟勿勞使民以時如數君子
者在春秋之例亦可褒而可書也居正職參藝苑不可以不文辭姑書大槩而歸之若崔鄭兩侯之聲繼而書者亦必有人矣
신증 新增연우(延祐) 7년 경신(1320, 충숙왕 7)에 화재를 당하여 천순(天順)8년 갑신(1464, 세종 10)에 중창
하였다. 가정(嘉靖) 임자년(1552, 명종 7)의 화재에 100여 칸이 탔는데, 신라시대부터 전해오던 325근 15냥
무게의 청동(靑銅)으로 된 큰 화로도 함께 타버렸다. 4년이 지난 을묘년(1555, 명종10)에 중창하였다.
만력 경인년(1590, 선조 23)에 화재를 당하였으나 구기(舊基)와 계체(階砌)가 오히려 남았다.
임인년(1602, 선조 35)에 남청방(南廳房)의 유지(遺址)에 정청(正廳)과 동서의 헌(軒)을 경영하여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객사이다.
新增延祐七年庚申灾天順八年甲申重創嘉靖壬子灾百餘間燒燼羅代所傳三百二十五斤十五兩重靑銅大火爐並燒
越四年乙卯重創萬曆庚寅灾舊基階砌尙在壬寅就南廳房遺址營建正廳及東西軒即今所謂客舎也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의 시는 다음과 같다. 五峯李好閔詩
천고에 왕업이 일어난 지역인지라 千古興王地
산의 형상 봉황이 춤추며 오는 듯 山形鳳舞來
내일 아침엔 해가 남쪽으로 이르리니 明朝日南至
어젯밤에 적이 동쪽으로 물러났도다 昨夜賊東回
풍월 속에 시선은 갔는데 風月詩仙去
관하의 옥피리 소리 슬퍼라48) 關河玉笛哀
평소에 옛일에 감회가 일어 平生感舊意
길게 휘파람 불며 억지로 대에 오르노라 長嘯強登臺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시는 다음과 같다. 東嶽李安訥詩
새재 너머 계림부에 嶺外雞林府
오산49)이 바다 위로 올라와 鰲山海上來
하나는 성 북쪽을 따라 지나가고 一從城北過
다섯은 북두의 서쪽을 보고 도네 五見斗西回
자주 빛 인끈의 영광 뽐낼 만하나 紫綬榮堪詑
창안의 늙음은 슬퍼할 만하여라 蒼顏老可哀
임금을 연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니 戀君心更切
어느 곳이 고향을 바라보는 누대인가 何處望鄕臺
북악은 구름에 잇닿아 우뚝 솟았고 北嶽連雲起
서천은 성곽을 감돌아 흐르는구나 西川繞郭來
성이 황폐하니 탑만 외로이 섰고 城荒塔孤立
들이 넓으니 새가 쌍쌍히 돌아오네 野廣鳥雙回
마정은 그 터가 신이하고50) 馬井基神異
어정엔 취한 경치 슬프도다51) 魚亭醉景哀
삼성52)은 물을 데가 없고 無憑問三姓
구성53)은 다만 누대를 비웠어라 九聖但空臺
이민구(李敏救)의 시는 다음과 같다. 李敏求詩
옛 나라엔 의관이 없어지고 故國衣冠盡
거친 성에는 세월이 오누나 荒城歲月來
봄기운 이니 아득한 들이 변하고 春生遙野變
날 저무니 큰 강이 돌아 흐르네 日暮大江回
고운 돌은 외롭고 분함을 품고 錦石含孤憤
구슬 언덕은 칠애54)를 일으키네 珠陵起七哀
교외의 옛터를 바라볼 수 없으니 郊墟不可望
가장 높은 누대에 올라가지 말라 莫上最高臺
영청(營廳) 경주부가 옛날에는 관찰사의 본영(本營)이었기 때문에 영청(營廳)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다만
빈터만 남아 있다.
빈현루(賓賢樓) 객관 동쪽에 있다. ◦하동(河東) 정인지(鄭麟趾)의 기문에, “금상(今上세종(世宗)) 23년(1441년)에
추밀부사(樞密副使) 김익생(金益生) 공이 경주(慶州)에 부윤이 되었다. 경주는 신라 천 년의 옛 도읍으로, 번화
하고 아름다움이 남방의 으뜸이다. 김공이 정사를 본 지 두어 달 만에 해이하였던 정사가 경장(更張)되고 적체되
었던 소송(訴訟)이 처리되니, 덕화(德化)는 펴지고 명성은 드러났다. 이듬해 관계(官階)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니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하루는 공이 통판에게 말하기를, ‘이 고을은 경내(境內)의 수읍(首邑)으로서
매년 봄가을에 감사(監司)와 원수(元帥)가 반드시 여기에서 무예를 시험하는데, 성 밖에 장막을 쳐서 시험장을
삼는다. 그러나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위의(威儀)와 형식이 걸맞지 않게 된다. 어찌 고칠 바를 도모하지
않는가?’하였다. 여러 아전들에게 의논하니 아전들이 그 계획에 찬동하였다.
이에 성안 객관의 동편에 터를 잡으니 그 지형이 구불구불 뻗어 면세(面勢)가 매우 적합하였다.
그 전면을 개척하니 화살이 멀리 날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 가운데를 시험장으로 만드니 말이 힘껏 달릴 수 있게
되었다. 흙을 쌓아서 대(臺)를 만드니 높이가 두어 길[仞]이나 되었다. 그 위에 누(樓)를 세우니 다섯 칸이었다.
바라보면 날아갈 듯하다. 아래로는 수많은 인가를 굽어보고 사면의 여러 산들을 마치 자리 아래에 둔 듯하다.
한 달쯤 되는 동안에 웅장하게 한 고을의 장관을 이루었으니 그 기쁨을 짐작할 수 있다. 김공이 임기가 차서 떠나
가고, 영가(永嘉) 권극화(權克和) 공이 대신하여 부윤이 되어 와서 기둥에 단청을 하여 김공의 뜻을 이어 완성
하였다. 권공(權公)은 그 위에 다시 더 빛나게 하려고 안평대군(安平大君)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를 청하여,
큰 글자로 쓴 빈현루(賓賢樓) 세 글자를 얻어 편액으로 걸었다. 이 얼마나 경주의 다행인가.
공은 또 나에게 빈현루라고 명명(命名)한 뜻을 자세히 풀이하라고 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정사는 성주(成周)55)보다 더 융성함이 없었다. 대사도(大司徒)가 향삼물(鄕三物)56)로써 어진
이와 능(能)한 이를 천거할 때에 활 쏘고 말 달리는 것으로 재예(才藝)를 고시(考試)하는 과목을 삼았으며,
시경(詩經) 「행위편(行葦篇)」에, ‘화살을 발사하자 모두 적중하니 손님을 차례하되 화살을 많이 명중함으로
써 하도다.’57) 하였으니, 연회로 술 마실 때에도 반드시 사례(射禮)로써 우선을 삼았다. 대체로 활을 쏜다는 것은
그 방도는 덕행을 살필 수 있으며58) 그 효용(效用)은 천하에 위엄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간성(干城)59)의 장수와 조아(爪牙)60)의 무사(武士)도 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다. 임금이 이것을
서두르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군사는 천일(千日)을 쓰지 않을 수 있지만 하루라도 준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하였다.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경계하기를, ‘병기(兵器)를 잘 정비하여 문왕(文王)의
빛남을 우러러보게 하며, 무왕(武王)의 큰 공(功)을 선양(宣揚)하소서.’ 하였고, 소공(召公)이 강왕(康王)에게
고하기를, ‘육사(六師)61)를 크게 베풀어 우리의 덕 높은 조상의 명령을 무너뜨리지 마소서.’ 하였다.
성왕과 강왕은 예(禮)를 제작하고 음악을 일으켜서 잘 수성(守成)한 임금이다. 그런데도 주공과 소공이 이처럼
경계하였으니, 성인의 뜻을 알 수 있다.
고려는 중엽 이후로 문관은 안일에 빠지고 무관은 놀기를 즐겨하여 누대(樓臺)는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장소가 되었고 꽃과 달은 유람하고 완상하고 읊조리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상하의 사람들이 서로 취한
꿈속에서 잊어버려 깨어 있는 이가 없었으니, 점차로 쇠미하고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마침내 왜구가 기세를
떨쳐 아무런 두려움과 거리낌 없이 백성들을 도륙하고 살해하여, 개와 닭까지도 모두 절멸(絶滅)되고 사직(社稷)
은 이로 인하여 폐허가 되어 버렸다. 어찌 오늘날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옛날부터 국세(國勢)의 강약(强弱)과 백성들의 휴척(休戚)은 군비(軍備)의 득실(得失)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 국가는 열성(列聖)이 서로 이어 안팎이 태평하다. 그러나 또 편안할 때에 위태한 것을 잊지 않으며 잘 다스
려질 때 혼란함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무사(武士)를 등용하는 과거제도를 설치하여 3년마다 한 번 시험을
통해 그 준수하고 걸출한 무사를 얻고, 훈련하는 법을 갖추어 봄가을로 훈련하여 그 정예(精銳)를 뽑는다.
이것이 어찌 위무(威武)를 떨치고 선양하여 길이 다스리고 오래 편안하게 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경주의 부윤을 지낸 사람이 많으나 누(樓)를 세운 것은 공에서 시작되었으니, 공은 국가의 대체(大體)를 안다 할
수 있겠다. 후일의 군자들은 힘쓸지어다.” 하였다. 신증 新增정통(正統) 임술년(1442, 세종 24)에 조성(造成)되었
는데 지금은 철폐되었으니, 바로 이른바 군기청(軍器廳)이다. 그래도 오히려 빈현으로써 편액을 삼았다.
◦營廳府舊爲觀察使本營故有營廳今廢但有空址
◦賓賢樓在客館東◦鄭河東麟趾記上之二十三年樞副金公益生尹于慶慶是新羅千年舊都繁華佳麗甲於南方公視事數
月政之弛者張訟之滯者理德化行名聲著越明年陞階爲資憲特恩也一日公謂通判曰是州爲界之首每春秋監司元戎必
於是焉而試武藝張幕於城外以爲場或風或雨之日儀形不稱盍圖所以改之耶詢于群吏吏協厥謀乃卜地于城中客館之
東偏厥地紆餘面勢甚宜闢其前矢可以及遠場其中馬足以騁力累土爲臺高可數仞起樓其上而五其楹望之翼如也俯壓
千家四面衆山如在席下旬月之頃奐焉爲一州之壯觀喜可知也公告滿而來永嘉權公克和代尹迺丹楹而畢公之志焉公
更欲侈之而求名於安平大君得大書賓賢樓三字以揭之慶之幸何如也公又使予衍其命名之義予惟治莫盛於成周大司
徒以鄕三物賓興賢能射御爲考藝之目行葦之詩曰射矢旣均序賓以賢燕飮之際亦必以射禮爲先夫射也者其道可以觀
德行其用可以威天下干城之將爪牙之士皆由此擧宜乎王者之是急故曰兵可千日不用不可一日不修周公之戒成王曰
克詰戎兵以覲文王之耿光以揚武王之大烈召公之告康王曰張皇六師無壞我高祖寡命成康制禮作樂持盈守成之主而
周召之告戒如此聖人之意可見矣其在高麗中葉以後文恬武嬉樓臺焉管絃歌舞之場花月乎遊賞玩詠之席上下相忘於
醉夢之中無有醒寤駸駸乎衰微不振卒之海寇鴟張屠害生靈無所畏忌雞犬爲之一空社稷因以丘墟豈不爲今日之殷鑑
歟自古國勢之強弱生民之休戚皆係乎武備之得失我國家列聖相承中外昇平然且安不忘危理不忘亂立武擧之科三年
大比以求其俊傑設備習之法春秋訓鍊以選其精銳此豈非奮揚威武長治久安之道乎慶之尹積幾人矣樓之建始於公公
其知國家之大體乎後之君子其勉旃焉新增正統壬戌造成今廢即所謂軍器廳也猶以賓賢爲扁
의풍루(倚風樓) 객관의 서쪽에 있다. ◦가정 이곡의 시서에, “내가 동경(東京)의 객사(客舍)에 도착한 뒤에 동루
(東樓)에 올라가 보았더니 아름다운 경치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서루(西樓)에 올라가 보았더니 꽤나
장려(壯麗)하였음은 물론 앞이 툭 틔어서 성곽과 산천이 한 눈에 모두 들어왔다. 그런데 삼장법사(三藏法師)
선공(旋公)62)이 의풍루라고 큰 글자로 쓴 현판만 붙어 있을 뿐, 제영(題詠)한 것은 볼 수 없었다.
생각건대, 이 계림부는 천년을 이어 온 왕도(王都)로서 고현(古賢)의 유적이 가는 데마다 남아 있고, 본국(本國)
에 편입되어 동경이 된 뒤로 또 장차 500년이 되려고 하니, 번화(繁華)하고 가려(佳麗)한 면에서 동남(東南)
지방의 으뜸이 되는 곳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부절(符節)을 나누어 받고 이곳에 와서 풍속을 관찰하고 교화를
선양한 자들 또한 시인(詩人) 묵객(墨客)이 많았을 것이니, 짐작건대 홍벽(紅壁) 사롱(紗籠)63)과 은구(銀鉤)
옥저(玉筯)64)가 그 사이에서 휘황하게 비쳤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것으로는 빈헌(貧軒)에 걸린
절구(絶句)한 수가 유일한데, 이 시는 선유(先儒) 김군수(金君綏)가 수창(首昌)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말하기를, ‘과거에 관사에 화재가 났을 적에 시판(詩板)도 함께 없어지고 말았다.’라고 한다.
그러나 김공의 시만 어째서 유독 불타지 않았으며, 화재가 난 뒤의 시들은 또 어째서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이렇게 본다면 혹자의 말도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향교의 어떤 유생이 말하기를, ‘김공의 시가 우연히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백 년
전의 풍류인물(風流人物)을 상상해 볼 수가 있다. 대개 그 당시에는 백성이 순박하고 정사가 간편해서 일이 생기면
선뜻 처리하고 흥이 일면 곧장 풀곤 하였다. 그래서 심지어는 문서를 앞에 벌여 놓고 이와 함께 악기를 뒤에 진열
해 놓더라도 남들이 그르게 여기지 않았고 자기 자신도 혐의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백 년이 지난 뒤에는 스스로
겉모양을 닦는 데에만 급급한 나머지 한번 찡그리고 한번 웃는 것조차 때에 맞지 않을까 겁내고 있으니,
어떻게 감히 등림(登臨)하여 소영(嘯詠)함으로써 부유(腐儒)의 시비 거리를 제공하려고 하겠는가. 지금 선생으로
말하면 풍속을 관찰하고 교화를 선양할 책임도 없이 자연의 승경을 찾아다니는 것으로 일을 삼고 있다.
그리하여 만 길 높이의 풍악(楓岳)과 설산(雪山설악산(雪嶽山))을 마음껏 관람하고, 다시 철관(鐵關)65)을 넘어
동해로 들어와서 국도(國島)66)의 기이한 비경(秘境)을 끝까지 돌아보았으며, 마침내는 해안을 따라 남하(南下)
하여 총석정(叢石亭)의 옛 비갈(碑碣)67)과 삼일포(三日浦)의 단서(丹書) 여섯 글자68)를 어루만져 보았다.
그리고는 영랑호(永郞湖)와 경포(鏡浦)에 배를 띄우고 사선(四仙)의 유적을 탐방하였는가 하면, 성류굴(聖留窟)
을 촛불로 밝혀 그 유괴(幽怪)한 모습을 빠짐없이 구경한 뒤에 드디어 이곳에 이르렀으니, 선생의 유람이야말로
원하는 대로 실컷 구경했다고 이를 만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신라 고도(古都)의 장관(壯觀)과 조망(眺望)이 모두
이 누대 안에 모여 있는데,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난다면 이는 선생에게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응답하여 말하기를, ‘그래서 내가 이미 앞에서 운운하지 않았던가. 다만 나는 시인 묵객의 무리가 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생(諸生)의 말에 깊이 느껴지는 점이 있었고, 또 이를 통해서
세상의 변천도 살펴 볼 수 가 있었으므로, 장구(長句) 사운(四韻)의 시 한 수를 지어서 이 누대에 오르는 자들에게
보여주기로 하였다.” 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倚風樓在客館西◦稼亭李穀詩序予至東京客舎登東樓殊無佳致乃陟西樓頗壯麗軒豁城郭山川一覽而盡三藏法師旋
公大書倚風樓三字而無題詠者惟是府千年舊都古賢遺跡往往而有自入本國爲東京亦將五百載其繁華佳麗冠於東南
而仗節觀風剖符宣化者又多詩人墨客意必有紅壁紗籠銀鉤玉筯輝暎其間以今所見惟賓軒所題一絶句在耳先儒金君
綏首唱也或言曩館舎灾詩板隨以亡然金詩何獨不火火後之作亦何不見或者之言不足徵也有一鄕校生曰金詩偶存可
以想見百年前風流人物也蓋於其時民醇政簡遇事輒裁遇興輒發至於簿領陳於前絲竹列於後人不爲非而自不爲嫌也
百年之後促促然務自修飭一嚬一笑恐或不時安敢登臨嘯詠以取腐儒之誚今先生無觀風宣化之勞以尋眞探勝爲事縱
觀楓岳雪山萬仞又踰鐵關入東海以窮國島之奇秘遂遵海而南摩挲叢石亭之古碣三日浦之丹書六字舟泛永郞湖鏡浦
以訪四仙之遺躅燭照聖留窟以極其幽怪而卒至於斯其於遊觀可謂厭飫矣然新羅古都壯觀遐眺萃於此樓而無一語而
去爲先生羞余應之曰吾豈不云云乎哉但不能爲詩人墨客之流耳然於諸生之言深有所感而且得以觀世變因成長句四
韻以示登斯樓者云詩曰
동도의 풍물이 아직도 번화하건만 東都文物尙繁華
다시 고루 일으켜 자하를 떨쳤네 更起高樓拂紫霞
성곽은 천년을 이은 신라 때 세웠고 城郭千年羅代樹
여염은 태반이나 부처 모신 집들일세 閭閻一半梵王家
구슬 발 다 걷으니 마치 그림 같은 산 珠簾捲盡山如畵
옥피리 불어도 아직 기울지 않은 해 玉笛吹殘日未斜
기둥에 기대 시 읊노라니 도로 우습나니 倚柱吟詩還自笑
다시 와도 벽사롱은 필요치 않다오 重來不必要籠紗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에, “새재[鳥嶺] 이남은 본래부터 명승지가 많다고 일컫는다.
거정은 젊은 시절 사마자장(司馬子長)의 뜻69)이 있어 새재를 넘어 상주(尙州)에 들르고 상주를 거쳐 선산
(善山)에 갔으며 화산(花山)을 경유하여 성주(星州)에 이르고 김해(金海)와 진주(晉州)를 지나서 함안(咸安)과
밀양(密陽)을 찾은 다음 경주에 도착하였다. 경주는 곧 옛적의 계림(雞林)으로 신라의 수도였던 곳이다.
산수는 빼어나고 풍경은 기절(奇絶)하며 옛 어진 이들의 유적이 많아서 멀리 유람하는 사람의 질탕(跌宕)한
기운을 채워주기에 충분하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객관이 누추하고 좁은 것이다. 비록 의풍루가 있으나 사면의
처마가 낮게 처져 시루[甑] 속에 앉은 것 같아서 사람을 갑갑하게 하였다.
임오년(1462, 세조 8) 겨울에 봉명사신이 되어 다시 이르니 부윤 김담(金淡) 공이 나를 맞아 누에 올라 조용히
술 마시며 시를 읊었다. 내가 말하기를, ‘등왕각(滕王閣)은 천하에 이름난 명승으로 이 누각에 올라 조망하는
사해(四海)의 호걸(豪傑), 문인(聞人), 재사(才士)들이 매우 많았지만, 왕중승(王中丞)을 만나 비로소 중수되고
한퇴지(韓退之)를 만나 기문이 지어졌다. 이 누를 중수하고 기를 쓰는 일을 누구에게 부탁할 것인가?’ 하니,
김 부윤이 빙그레 웃었다.
두어 해를 지난 뒤에 객관이 중수되고 통판(通判) 신중린(辛仲磷)이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으므로 대략 전말을
써서 돌려보냈다. 조금 있다가 들으니 의풍루가 또 불에 탔다고 하였다. 불에 탄 뒤에 새로 짓지 못한 지가 2년이
되었다. 정해년(1467, 세조 13) 봄에 이후(李侯) 염의(念義)가 부윤으로 와서 정사는 잘 닦아지고 폐해는 제거
되었다. 이에 누를 새로 지을 것을 계획하고 곧 누의 옛터에 그 규모를 더욱 확대해서 경영하여 세우니, 우뚝
솟아 한 도(道)의 장관(壯觀)이 되었다. 이를 이어 부윤 전동생(田秱生)과 통판 유자빈(柳子濱)이 더욱 아름답게
꾸며서 공사가 비로소 완성되자, 거정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사물이 흥하고 폐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이다. 그러나 한번 성하고 한번 쇠하게 되는 것은 또한 시운(時運)에 관계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신라의 시초에는 하늘이 이인(異人)을 내려 보내 원시(原始)의 생활을 개화시키고 나라를 세워 임금과 신하가
서로 도와 어질고 후하게 정치하고 삼성(三姓)이 서로 전하여 거의 천년 만에 마침내 능히 고구려를 평정하고
백제를 병합하여 동방의 땅을 넓게 차지하였다. 이것이 바로 당사(唐史)에서 인인(仁人)과 군자(君子)와
시서(詩書)의 나라라고 칭찬한 바로 인물의 번화함이 성대하였음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경순왕(敬順王)이 국토를 바치고 고려에 항복하기를 오월(吳越)의 전왕(錢王)70)과 같이 하였으니, 이때부터
이후로는 주(州)로 되기도 하고 부(府)로 되기도 하고 현(縣)으로 되기도 하여 연혁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고려가 쇠하자 섬나라 오랑캐가 침범하여 누관(樓觀)들은 불타버리고, 풍경은 시들고 손상되었으니,
가정(稼亭)71) 이 선생(李先生)의 기문을 읽어보면 당시에 변고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성조(聖朝조선(朝鮮))가 천지처럼 함육(涵育)하여 변방이 안정된 지 이제 백년이 되었다. 경주는 땅은 넓고
민가는 조밀하여 물산은 풍부하고 재화(財貨)는 넉넉하여 동남(東南) 부고(府庫)의 제일이 되고, 관원도 또한
인재를 얻어서 일이 폐하거나 실추된 것이 없어서 관각(館閣)과 누대(樓臺) 같은 것조차도 다 일신(一新) 되었
으니, 하늘이 전일(前日)에 아낀 것이 바로 오늘을 기다린 것인 줄 어찌 알겠는가.
이제 이 누각에는 첨유계극(幨帷棨戟)72)이 순림(巡臨)하고 시인묵객이 유람할 때 난간에 기대서서 옛날과
지금을 생각하고 고도(古都)의 흥폐(興廢)를 느끼며, 시대와 사물의 변천을 살펴서 편안하고도 너그러운 마음
으로 성정(性情)을 쏟아내어 누에 올라 글을 짓던 옛 사람의 기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태평시대의
성대한 일이며 물리(物理)의 흥하고 폐하는 기틀이 아니겠는가. 오호라, 평양(平壤)은 삼조선(三朝鮮)과 고구려
의 옛 도읍으로서 산하와 인물의 훌륭함이 경주와 더불어 서로 갑을(甲乙)을 다툰다.
목은(牧隱) 선생73)이 일찍이 평양의 풍월루(風月樓)의 기문을 썼는데 거정이 그 중수기(重修記)를 썼고, 가정
(稼亭)선생이 의풍루의 기를 썼는데 거정이 또 그 중수기를 쓰게 되었다. 거정처럼 재주없는 몸으로 동경(東京)
과 서경(西京)의 두 곳에서 가정ㆍ목은 부자(父子)의 이름을 잇게 되었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글이 졸렬하다고 하여 사양하지 못하고 즐거이 기문을 짓는다.” 하였다.
徐四佳記嶺以南素稱多名區勝地居正少有司馬子長之志踰嶺而尙而善由花而星歷金晉訪咸密抵于慶慶即古之雞林
而新羅氏之所都也山河秀異雲物奇絶多有古賢遺跡足以償遠遊跌宕之氣第恨館宇湫隘雖有倚風一樓四簷低垂如坐
甑中使人悶悶然壬午冬奉使再至府尹金公淡邀予登樓從容觴詠予曰滕王閣天下之名勝四海豪傑聞人才士登臨眺望
者不知幾人乃得王中丞而重新韓退之而作記斯樓之修之記當屬之何人乎金尹莞然越數載館宇重新辛通判仲磷倩予
記略書顚末歸之俄聞倚風樓又火火而未新者再稔丁亥春李侯念義來尹政修斃袪謀所以重新乃即樓之舊址增大其規
模經營締構巋然爲一道之壯觀繼而得田府尹秱生柳通判子濱又加賁飾功乃就緖索記於居正予惟物之興廢物之理也
而其所以一盛一衰者亦莫不關於時運當新羅之初天降異人闢淳厖建邦國君臣相濟仁厚爲政三姓相傳幾於一千年卒
能平麗合濟富有東土此正唐史所稱仁人君子詩書之國足以想人物繁華之盛矣敬順王納土降麗如吳越錢王自是以後
或州或府或縣隨沿革不同高麗之衰島夷侵軼樓觀灰燼雲物凋喪讀稼亭李先生記可見當時之多故矣聖朝天地涵育邊
陲妥帖百年于玆矣慶地廣民稠物阜財殷爲東南府庫之最吏又得人事無廢墜雖館宇樓榭亦皆一新是寧知天之靳於前
日者乃所以待今日耶今斯樓也幨帷棨㦸之巡臨騷人墨客之遊賞憑欄徙倚俛仰古今感古都之興廢覽時物之惟遷夷然
豁然陶寫性情有古登樓作者之氣像此豈非太平之盛事而物理興廢之機耶嗚呼平壤三朝鮮高句麗之古都山河人物之
勝與慶相爲甲乙牧隱先生甞記風月樓而居正記重新稼亭先生記斯樓而居正又記重新以居正之不材名繼稼牧父子之
名於東西二京豈非幸耶故不以文拙辭而樂爲記
이달충(李達衷)의 시는 다음과 같다. 李達衷詩
당시에는 스스로 소중화라 일렀더니 當時自謂小中華
반월성 텅 비어 저녁노을에 잠겼어라 半月城空鎻晚霞
마을엔 금불찰에 청태 낀 비석 있고 里有苔碑金佛刹
지경은 봉래섬 신선 집에 이어졌네 境連蓬島玉仙家
북천에 물이 줄어 여울 소리 목 메이고 北川水落灘聲咽
서악에 구름 달리니 빗발이 비끼네 西岳雲奔雨脚斜
많은 일들 일순간에 흥망하나니 一瞬興亡多少事
헌함에 기대어 시 읊으며 오사모74) 젖히노라 憑軒朗詠岸烏紗
신증 新增연우(延祐) 7년 경신년(1320, 충숙왕 7)에 화재가 났는데, 그 후에 중수하였다. 천순(天順) 갑신년(1464,
세조 10)에 화재가 났는데, 성화(成化) 무자년(1468, 세조 14)에 개수하였다. 가정(嘉靖) 임자년(1552, 명종 7)에
화재가 났는데, 그 후에는 어느 해에 중수했는지 어느 해에 도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 옛터가 오히려
남아있다.
新增延祐七年庚申灾厥後重修天順甲申灾成化戊子改修嘉靖壬子灾厥後未知某年重修某年還廢而即今舊址猶在
남정(南亭) 주(州)의 남쪽 5리 오릉(五陵) 북쪽에 있다. 부윤 김담이 세웠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동정(東亭) 부의 동남쪽 5리에 있다. 지금은 없어졌다.
◦南亭在州南五里五陵北府尹金淡所建今廢
◦東亭在府東南五里今廢
전록생(田祿生)의 시는 다음과 같다. 田祿生詩
반월성 비었는데 강에 비췬 달은 밝고 半月城空江月白
고운75)이 신선되어 간 뒤 들의 구름 한가롭네 孤雲仙去野雲閑
다시 왕찬의 등루부76)를 지으려 하나 更尋王粲登樓賦
마음속 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아라 方寸詩情未易寬
이견대(利見臺) 부의 동쪽 70리 해안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왜국(倭國)이 자주 신라를 침범하니 문무왕(文武王)이 이를 근심하여 죽으면 용(龍)이 되어
나라를 수호하고 도적을 방어하겠다고 맹세하였는데, 장차 훙서(薨逝)하려 할 때에 유명(遺命)을 내리기를,
‘나를 동해 가의 물속에 장사지내라.’ 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이 유명을 따라 장사지낸 뒤에 추모하여 대(臺)를
쌓고 바라보았더니 큰 용이 바다 가운데 나타났다. 이로 인하여 이견대(利見臺)77)라고 명명하였다.” 한다.
대 아래 10보 쯤 되는 바다 가운데 네 뿔이 우뚝 솟은 돌이 네 문과 같은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안장한 곳이다.
지금까지 대왕암(大王巖)이라고 일컫는다.
◦利見臺在府東七十里海岸◦世傳倭國數侵新羅文武王患之誓死爲龍護邦國而禦冠盗將薨遺命葬于東海濱水中神文王
從之葬後追慕築臺望之有大龍見于海中因名曰利見臺臺下十步海中有石四角聳出如四門是其葬處至今稱爲大王巖
이문화(李文和)의 시는 다음과 같다. 李文和詩
신라 때 군왕의 효자대에 羅代君王孝子臺
지금 올라보니 이끼 이미 짙었네 如今登眺已封苔
예정우개78)는 창자가 끊어질 듯하고 霓旌羽蓋膓堪斷
높은 집 아로새긴 담은 터가 절로 무너졌네 峻宇雕墻址自頹
은하수 가에 또렷이 북두를 보고 雲漢分明看北斗
안개 속에 어렴풋이 동래를 바라보네 煙濤髣髴望東萊
가련쿠나 물결 위의 흰 갈매기는 可憐波上白鷗鳥
조수가 오고 갈제 의구히 돌아오네 潮去潮來依舊廻
금장대(金藏臺) 서천(西川) 언덕 위에 있다.
함벽정(涵碧亭) 의풍루 남쪽에 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이상은 여지승람에 나오는데 사이사이에 빠진 것을 보충하였다.
신증 新增
부아(府衙) 객관 서북쪽에 있는데 부윤이 집무하는 곳이다.
금학헌(琴鶴軒) 부아의 동쪽에 있다.
제승정(制勝亭) 금학헌 남쪽에 있다.
좌이헌(佐貳軒) 객관 북쪽에 있다. 판관의 관아이다.
광풍루(光風樓) 금학헌 동쪽에 있다. 부윤 박수홍(朴守弘)이 창건하였다. 누 앞에는 돌을 쌓아 연못을 만들었
는데 연못 안에는 작은 대를 지었으며 자미화(紫薇花) 한 그루를 심었다.
군기청(軍器廳) 객관 동남쪽에 있다. 바로 빈현루의 옛터이다. 남쪽계단 아래 연지(蓮池)가 있다.
양무당(養武堂) 부아의 북쪽에 있다.
무학당(武學堂) 성 서문 밖에 있다. 지금은 영장(營將)의 호수헌(虎睡軒)이다.
향사당(鄕射堂) 성 동문 밖에 있다.
의국(醫局) 부아의 북쪽에 있다.
영선청(營繕廳), 연리청(掾吏廳), 교방(敎坊), 약방(藥坊) 모두 성 안에 있다.
종각(鍾閣) 징례문(徵禮門) 밖의 봉황대(鳳凰臺) 아래에 있다. 봉덕사(奉德寺)의 종(鍾)을 매달았다.
고적(古蹟)에 상세히 보인다.
◦金藏臺在西川岸
◦涵碧亭在倚風樓南今廢以上出輿地勝覽79) 而間補其遺
新增
◦府衙在客館西北府尹衙舎也
◦琴鶴軒在府衙東
◦制勝亭在琴鶴軒南
◦佐貳軒在客館北判官衙舎也
◦光風樓在琴鶴軒東府尹朴守弘所創樓前築石爲池池中築小臺樹紫薇花一株
◦軍器廳在客館東南即賓賢樓舊基南階下有蓮池
◦養武堂在府衙北
◦武學堂在城西門外今之營將虎睡軒也
◦鄕射堂在城東門外
◦醫局在府衙北
◦營繕◦掾吏廳◦敎坊◦藥坊俱在城中
◦鍾閣在徵禮門外鳳凰臺下縣奉德寺鍾詳見古蹟
창고 倉庫
부창(府倉) 부아(府衙)의 남쪽에 있다.
상평창(常平倉) 부창(府倉)의 남쪽에 있다.
대동청(大同廳) 제승정(制勝亭)의 남쪽에 있다.
관청(官廳) 부아의 북쪽에 있다.
안강창(安康倉) 부의 북쪽 45리 안강현 토성(土城) 가운데 있다.
형산창(兄山倉) 부의 북쪽 45리 형산강 가에 있다. 옛날에 창고가 없어 전세(田稅)로 받아들이는 미곡을 위로
바칠 때는 충주(忠州)의 가흥창(可興倉)으로 수송하였고, 아래로 운송할 때는 양산(梁山)의 감동창(甘同倉)
으로 운송하였는데, 백성들이 이를 매우 괴롭게 여겼다. 이 창고를 설치한 것은 위로 바칠 때와 아래로 운송할
때의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동해창(東海倉) 부의 동쪽 70리에 있다. 예전에는 창고가 없었다. 또한 조운의 편리함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
신광창(神光倉) 부의 북쪽 80리 신광현 토성 가운데 있다.
기계창(杞溪倉) 부의 북쪽 70리 기계현에 있다.
죽장창(竹長倉) 부의 북쪽 110리 죽장현에 있다.
북안곡창(北安谷倉) 부의 서쪽 100리 북안곡현에 있다. 이상의 각창에는 모두 감관(監官) 1 , 모두 부(府)와
현(縣)의 좌수(座首)로 예겸(例兼)하게 하였다. 오직 북안곡창과 형산창과 동해창에만 별도로 감관을 두었다.
빙고(氷庫) 월성(月城)에 있다.
府倉在府衙南
◦常平倉在府倉南
◦大同廳在制勝亭南
◦官廳在府衙北
◦安康倉在府北四十五里安康縣土城中
◦兄山倉在府北四十五里兄山江邊古無倉舎田稅米穀上納則輸運于忠州
可興倉下運則輸運于梁山甘同倉民甚苦之此倉之設所以便上下漕運也
◦東海倉在府東七十里古無倉舎亦因漕運之便而置之
◦神光倉在府北八十里神光縣土城中
◦杞溪倉在府北七十里杞溪縣
◦竹長倉在府北一百十里竹長縣
◦北安谷倉在府西百里北安谷縣以上各倉皆置監官一人而並以府縣座首例兼惟
北安谷兄山東海倉別置
◦氷庫在月城
학교 學校
향교(鄕校) 부의 남쪽 4리 계림 서쪽 문천(蚊川) 북쪽에 있다. 신라 신문왕 2년 임오(壬午, 682년)에 비로소
국학(國學)을 세웠다. 고려 이후로는 향학(鄕學)이 되었으나 터는 예전대로였다.
우리 성묘조(成廟朝) 홍치(弘治) 임자년(1492, 성종 23)에 부윤 최응현(崔應賢)이 중수하였는데 제도는 성균관
을 모방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임시로 도덕산(道德山) 두덕암(斗德菴)에 위패(位牌)를 봉안하였다.
그러나 교사(校舎)가 불에 타 오래도록 석채례(釋采禮)를 행하지 못하였다. 만력(萬曆) 경자년(1600, 선조 33)
에 이시발(李時發)이 부윤으로 있을 때 중건하였는데 성전(聖殿)이 3칸이고 전사청(典祀廳)이 3칸이다.
위판(位板)을 도로 봉안하였다. 갑진년(1604, 선조 37)에 윤성(尹腥)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동무(東廡)와 서무
(四廡) 각 12칸과 전사청 각 2칸을 중건하였다.
대성전(大成殿)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동배(東配) 연국복성공(兗國復聖公) 안씨(顔氏)80),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공씨(孔氏)81).
서배(西配) 성국종성공(郕國宗聖公) 증씨(曾氏)82),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
맹씨(孟氏)83) 이상은 오성(五聖)이다.
전내(殿內)의 동쪽에 종향(從享)된 분 비공(費公) 민손(閔損), 설공(薛公) 염옹(冉雍), 여공(黎公)
단목사(端木賜), 위공(衛公) 중유(仲由), 위공(魏公) 복상(卜商)이다.
전내(殿內)의 서쪽에 종향(從享)된 분 운공(鄆公) 염경(冉耕), 제공(齊公) 재여(宰予), 서공(徐公) 염구(冉求),
오공(吳公) 언언(言偃), 영천후(穎川侯) 전손사(顓孫師)
이상은 십철(十哲)이다.
동무(東廡)에 종향된 분 금향후(金鄕侯) 담대멸명(澹臺滅明), 임성후(任城侯)원헌(原憲), 여양후(汝陽侯)
남궁괄(南宮适), 내무후(萊蕪侯) 증점(曾㸃), 수창후(須昌侯) 상구(商瞿), 평여후(平輿侯) 칠조개(漆雕開),
휴양후(睢陽侯) 사마경(司馬耕), 평음후(平陰侯) 유약(有若), 동아후(東阿侯) 무마시(巫馬施), 양곡후(陽穀侯)
안신(顔辛), 상채후(上蔡侯) 조술(曹卹), 지강후(枝江侯) 공손룡(公孫龍), 풍익후(馮翊侯) 진상(秦商),
뇌택후(雷澤侯) 안고(顔高), 상규후(上邽侯) 양사역(壤駟亦), 성기후(成紀侯) 석작촉(石作蜀), 거평후(鉅平侯)
공하수(公夏首), 교동후(膠東侯) 후처(后處), 제양후(濟陽侯) 해용점(奚容蒧), 부평후(富平侯) 안조(顔祖),
부양후(滏陽侯) 구정강(句井疆), 견성후(甄城侯) 진조(秦祖), 무성후(武成侯) 현성(縣成), 즉묵후(即墨侯)
공조구자(公祖句玆), 견원후(汧源侯) 연급(燕伋), 완구후(宛句侯) 안지복(顔之僕), 건성후(建城侯) 악해(樂欬),
당읍후(棠邑侯) 안하(顔何), 임려후(林慮侯) 적묵(狄墨), 운성후(鄆城侯) 공충(孔忠), 서성후(徐城侯)
공서점(公西蒧), 임복후(臨濮侯) 시지상(施之常), 화정후(華亭侯) 진비(秦非), 문등후(文登侯) 신정(申棖),
제음후(濟陰侯)안쾌(顔噌), 사수후(泗水侯) 공이(孔鯉)
이상은 공문(孔門)의 제자이다.
난릉백(蘭陵伯) 순황(荀況), 휴양백(睢陽伯) 곡량적(穀梁赤), 내무백(萊蕪伯) 고당생(高堂生), 악수백(樂壽伯)
모장(毛萇), 팽성백(彭城伯) 유향(劉向), 중모백(中牟伯)정중(鄭衆), 구씨백(緱氏伯) 두자춘(杜子春),
양향후(良鄕侯) 노식(盧植), 영양백(榮陽伯) 복건(服虔), 사공(司空) 왕숙(王肅), 사도(司徒) 두예(杜預),
창려후(昌黎侯) 한유(韓愈), 예국공(豫國公) 정호(程顥), 신안백(新安伯) 소옹(邵雍), 온국공(温國公)
사마광(司馬光),건녕백(建寧伯) 호안국(胡安國), 화양백(華陽伯) 장식(張栻), 위국공(魏國公) 허형(許衡)
이상은 주(周)나라 말기부터 송(宋) ․원(元)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유현(儒賢)이다.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신라 도성 사람이다.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 초명은 유(裕)이고 고려 흥주인(興州人)이다. 흥주는 지금의 풍기(豊基)이다.
호는 회헌(晦軒) 선생이다.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현풍인(玄風人)이다. 호는 한훤당(寒暄堂) 선생이다.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한양인(漢陽人)이다. 호는 정암(靜菴) 선생이다.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예안인(禮安人)이다. 호는 퇴계(退溪)선생이다.
이상은 본국(本國)의 유현이다.
서무(西廡)에 종향된 분 단보후(單父侯) 복부제(宓不齊), 고밀후(高密侯) 공야장(公冶長), 북해후(北海侯)
공석애(公晳哀), 곡부후(曲阜侯) 안무요(顔無繇),공성후(共城侯) 고시(高柴), 수장후(壽張侯) 공백료(公伯寮),
익도후(益都侯)번수(樊須), 거야후(鉅野侯) 공서적(公西赤), 천승후(天乘侯) 양전(梁鱣), 임기후(臨沂侯)
염유(冉孺), 목양후(沐陽侯) 백건(伯虔), 제성후(諸城侯) 염계(冉季), 복양후(濮陽侯) 칠조치(漆雕哆),
고원후(高苑侯) 칠조도보(漆雕徒父), 추평후(鄒平侯) 상택(商澤), 당양후(當陽侯) 임부제(任不齊),
모평후(牟平侯) 공양유(公良孺), 신식후(新息侯) 진염(秦冉), 양보후(梁父侯) 공견정(公肩定), 요성후(聊城侯)
교단(鄡單), 기향후(祈鄕侯) 한보흑(罕父黑), 치천후(淄川侯) 신당(申黨), 염차후(厭次侯) 영기(榮旂),
남화후(南華侯) 좌인영(左人郢), 구산후(胊山侯) 정국(鄭國), 악평후(樂平侯) 원항(原亢), 조성후(胙城侯)
염결(廉潔), 박평후(博平侯) 숙중회(叔仲會), 고당후(高堂侯) 규손(邽巽), 임구후(臨胊侯) 공서여(公西如),
내황후(內黃侯) 거백옥(蘧伯玉), 장산후(長山侯) 임방(林放), 남돈후(南頓侯) 진항(陳亢), 양평후(陽平侯)
금장(琴張), 박창후(博昌侯)보숙승(步叔乘)
이상은 공문(孔門)의 제자이다.
중도백(中都伯) 좌구명(左丘明), 임치백(臨淄伯) 공양고(公羊高), 승씨백(乘氏伯) 복승(伏勝), 고성백(考城伯)
대성(戴聖), 강도상(江都相) 동중서(董仲舒), 곡부백(曲阜伯) 공안국(孔安國), 기양백(岐陽伯) 가규(賈逵),
부풍백(扶風伯) 마융(馬融), 고밀백(高密伯) 정현(鄭玄), 임성백(任城伯) 하휴(何休), 언사백(偃師伯) 왕필(王弼),
신야백(新野伯)범녕(范寧), 도국공(道國公) 주돈이(周敦頤), 낙국공(洛國公) 정이(程頤), 미백(郿伯) 장재(張載),
휘국공(徽國公) 주희(朱熹), 개봉백(開封伯) 여조겸(呂祖謙), 포성백(蒲城伯) 진덕수(眞德秀), 숭안백(崇安伯)
채침(蔡沈), 임천군공(臨川郡公) 오징(吳澄)
이상은 주(周)나라 말기부터 송(宋) ․ 원(元)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유현(儒賢)이다.
문창공(文昌公) 최치원(崔致遠) 신라인이다.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고려 영일인(迎日人)이다. 호는
포은(圃隱) 선생이다.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함양인(咸陽人)이다. 호는 일두(一蠹) 선생이다.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彥迪) 경주인(慶州人)이다. 호는 회재(晦齋) 선생이다.
이상은 본국의 유현이다.
만력(萬曆) 갑진년(1604, 선조 37) 이안눌(李安訥)이 부윤으로 있을 때 중건하였는데 명륜당(明倫堂)이 5칸이고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각 5칸이고 명륜당 동쪽 담 밖에 제독청(提督廳) 4칸이 있다. 그 제독청 동쪽에 연못
을 파고 그 안에 연꽃을 심었으며 돌을 쌓아 작은 누대를 만들고 자미화(紫薇花) 한 그루를 심었다.
숭정(崇禎) 후 을미년(1655, 효종 6)에 명륜당 북쪽에 송단(松壇) 쌓고 사부(師傅) 정극후(鄭克後)가 기문을 지
었다. 보유(補遺) 에 보인다.
성전(聖殿) 전면에 옛날에는 계단과 정로(正路)가 없었다. 기유년(1669, 현종10) 가을에 동무와 서무에 비가
새는 곳이 있어 개수하여 공사를 마치고, 부사(府使) 주면(周冕)이 유생(儒生)들과 상의하여 안압지(鴈鴨池)
임해전(臨海殿)의 옛터에 있던 돌계단을 가져다가 성전의 계단 아래에 깔고 또 정로도 쌓았다.
또 송단 동쪽 가에 존경각(尊經閣)을 건립하였다.
鄕校在府南四里雞林西蚊川北新羅神文王二年壬午始立國學高麗以後爲鄕學而基則仍舊我成廟朝弘治壬子府尹
崔應賢重修制度倣成均館壬辰之亂權奉位板于道德山斗德菴而校舎灰燼久闕釋采萬曆庚子府尹李時發時重建聖
殿三間典祀廳三間還安位板甲辰府尹尹腥時重建東西廡各十二間典祀廳各二間
◦大成殿大成至聖文宣王
◦東配兗國復聖公顔氏沂國述聖公孔氏
◦西配郕國宗聖公曾氏鄒國亞聖公孟氏以上五聖
◦殿內東從享費公閔損薛公冉雍黎公端木賜衛公仲由魏公卜商
◦西從享鄆公冉耕齊公宰予徐公冉求吳公言偃穎川侯顓孫師以上十哲
◦東廡從享金鄕侯澹臺滅明任城侯原憲汝陽侯南宮适萊蕪侯曾點須昌侯商瞿平輿侯漆雕開睢陽侯司馬耕平陰侯有
若東阿侯巫馬施陽穀侯顔辛上蔡侯曹卹枝江侯公孫龍馮翊侯秦商雷澤侯顔高上邽侯壤駟赤成紀侯石作蜀鉅平侯
公夏首膠東侯后處濟陽侯奚容蒧富平侯顔祖滏陽侯句井彊甄城侯秦祖武成侯縣成即墨侯公祖句玆汧源侯燕伋宛
句侯顔之僕建城侯樂欬棠邑侯顔何林慮侯狄黑鄆城侯孔忠徐城侯公西蒧臨濮侯施之常華亭侯秦非文登侯申棖濟
陰侯顔噌泗水侯孔鯉以上孔門弟子蘭陵伯荀况睢陽伯殼梁赤萊蕪伯高堂生樂壽伯毛萇彭城伯劉向中牟伯鄭衆緱
氏伯杜子春良鄕侯盧植榮陽伯84)服虔司空王肅司徒杜預昌黎侯韓愈豫國公程顥新安伯邵雍温國公司馬光建寧伯
胡安國華陽伯張栻魏國公許衡以上自周末至宋元儒賢弘儒侯薛聰新羅國都人文成公安珦初名裕高麗興州人今豐
基號晦軒先生文敬公金宏弼玄風人號寒暄堂先生文正公趙光祖漢陽人號靜菴先生文純公李滉禮安人號退溪先生
以上本國儒賢
◦西廡從享單父侯宓不齊高密侯公治長北海侯公晢哀曲阜侯顔無繇共城侯高柴壽張侯公伯寮益都侯樊須鉅野侯公
西赤千乘侯梁鱣臨沂侯冉孺沐陽侯伯虔諸城侯冉季濮陽侯漆雕哆高苑侯漆雕徒父鄒平侯商澤當陽侯任不齊牟平
侯公良孺新息侯秦冉梁父侯公肩定聊城侯鄡單祈鄕侯罕父黑淄川侯申黨厭次侯榮旂南華侯左人郢胊山侯鄭國樂
平侯原亢胙城侯廉潔博平侯叔仲會高堂侯邽巽臨胊侯公西如內黃侯蘧伯玉長山侯林放南頓侯陳亢陽平侯琴張博
昌侯步叔乘以上孔門弟子中都伯左丘明臨淄伯公羊高乘氏伯伏勝考城伯戴聖江都相董仲舒曲阜伯孔安國岐陽伯
賈逵扶風伯馬融高密伯鄭玄任城伯何休偃師伯王弼新野伯范寧道國公周敦頤洛國公程頤郿伯張載徽國公朱熹開
封伯呂祖謙蒲城伯眞德秀崇安伯蔡沈臨川郡公吳澄以上自周末至宋元儒賢文昌公崔致遠新羅人文忠公鄭夢周高
麗迎日人號圃隱先生文獻公鄭汝昌咸陽人號一蠹先生文元公李彥迪慶州人號晦齋先生以上本國儒賢◦萬曆甲辰府
尹李安訥時重建明倫堂五間東西齋各五間明倫堂東墻外有提督廳四間廳東鑿池種蓮其中築石作小臺樹紫薇花一
株崇禎後乙未築松壇于明倫堂北師傅鄭克後作記見補遺
◦聖殿前面古無階級正路己酉秋東西廡雨漏處修改訖工府使周冕與儒生相議仍取鴈鴨池臨海殿舊基石砌安於殿階
下且築正路又建尊經閣於松壇東畔
서악서원(西岳書院) 부의 서쪽 선도산(仙桃山) 일명 서형산(西兄山)이다. 아래 태종릉(太宗陵) 북쪽에 있다.
가정(嘉靖) 신유년(1561, 명종 16)에 부윤 귀암(龜巖)이정(李楨) 공이 신라의 각간(角干) 김유신(金庾信)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기를 논의하였는데, 부의 유생들이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과 문창공(文昌公)
최치원(崔致遠)도 아울러 제향(祭享)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귀암이 퇴계 이 선생에게 아뢰었다.
계해년(1563, 명종 18)에 세 현인을 한 사당에 봉안하고 퇴계 선생이 서악정사(西岳精舎)라고 명명하고 강당을
시습당(時習堂)으로, 동재(東齋)를 진수재(進修齋)로, 서재(西齋)를 성경재(誠敬齋)로, 동하재(東下齋)를 절차
재(切磋齋)로, 서하재(西下齋)를 조설재(澡雪齋)로, 전루(前樓)를 영귀루(詠歸樓)로, 문을 도동문(道東門)이라
하였다.
누미(樓楣) 사이에 퇴계 선생의 필적을 게시했는데 모두 임진왜란 때 타버렸고 위판(位板)은 산곡(山谷) 가운
데 옮겨 보관하였다. 만력 경자년(1600, 선조 33) 이시발(李時發)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옛터에다 초가집을
짓고 위패를 도로 봉안하였다. 임인년(1602, 선조 35) 이시언(李時彥)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묘우(廟㡰)를 중건
하였으나 오히려 옛 모습을 다 회복하지 못하였다. 경술년(1610, 광해군 2) 최기(崔沂)가 부윤으로 있을 때에
강당과 재사(齋舍) 및 전사청(典祀廳)과 장서실(藏書室)을 중건하였다. 천계(天啓)계해년(1623, 인조 1) 여우길
(呂祐吉)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부의 유생인 진사 최동언(崔東彥) 등이 소장을 진달하여 사액(賜額)을 청하였으
므로 사악서원이라고 사액하였다. 편액은 원진해(元振海)의 글씨이다. 병술년(1646, 인조 24) 이민환(李民寏)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영귀루(詠歸樓)를 중건하였다. 묘우(廟宇)의 제도는 동향인데, 홍유후 설총, 개국공 김유신,
문창공 최치원을 차례로 배향하였다. 정극후(鄭克後)의 서악지(西岳志)에 삼현(三賢)의 사적(事蹟)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西岳書院在府西仙桃山下一名西兄山太宗陵北嘉靖辛酉府尹龜巖李公楨議以新羅角干金庾信立祠享之府儒請以弘
儒侯薛聰文昌公崔致遠並享龜巖禀於退溪李先生歲癸亥奉安三賢于一祠退溪先生命名曰西岳精舎講堂曰時習東齋
曰進修西齋曰誠敬東下齋曰切磋西下齋曰澡雪前樓曰詠歸門曰道東樓楣間揭先生筆而俱燬于壬辰位板則移藏于山
谷中萬曆庚子府尹李時發時構草舎于舊址還安位板壬寅府尹李時彥時重新廟宇而猶未盡復庚戌府尹崔沂時重創講
堂齋舎及典祀廳藏書室天啓癸亥府尹呂祐吉時府儒進士崔東彥等陳疏請額賜額曰西岳書院扁額則元振海筆也丙戌
府尹李民寏時重建詠歸樓廟制東向弘儒侯開國公文昌公以次並享鄭克後西岳志備記三賢事蹟
귀암 이정 공이 서악정사에 제한 시는 다음과 같다. 龜巖李公楨題西岳精舍詩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어 물색이 은성한데 柳綠花紅物色殷
꽃과 버들 완상하며 즐겨 배우는 소년들85) 傍隨肯學少年群
천 년 세월 대지에 풍속이 고아하지 않으니 千年大地俗非古
일개 오활한 선비 마음이 타는 듯하여라 一箇迂儒心似薫
소식은 못 가운데 기러기를 거의 놀라게 하고 素食幾驚中澤鴈
두건 젖혀 쓰고 속절없이 산에서 나오는 구름을 바라보네 岸巾空望出山雲
선도동 안에 새로 정사를 짓고서 仙桃洞裹新開宇
승경 구경하고 돌아와 속세의 때를 씻네 探勝歸來滌垢紛
우가의 몇 마디 말86)이 서로 전해진 뒤에 虞家數語相傳後
만고의 사문이 대낮처럼 밝았나니 萬古斯文白日明
일유삼호87)는 마음으로 묵묵히 계합한 것이고 一唯參乎心黙契
재현회야88)는 도가 거듭 형통한 것이라네 再賢回也道重亨
동락의 광풍89)은 조용한 뜻이요 光風東洛從容意
서림의 추월90)은 감개한 정이로다 秋月西林感慨情
벗을 모아 탁마할 곳 지금 있으니 會友琢磨今有地
정녕 이 당의 이름을 저버리지 말지어다 丁寧無負此堂名
퇴계 선생이 차운한 시는 다음과 같다. 退溪先生次曰
맥수91)의 신라 터전 망국 슬픔 얼마이더냐 羅墟麥秀幾悲殷
이곳에 정사 지어 물의를 일으켰도다 創置仍遭物議群
영재를 선으로 인도하려 한다면 欲使英才欣式穀
학문을 익힐 처소를 마련해야 되지 않겠는가 可無遊處善相薫
천년의 밝은 해는 빛이 가려질 리가 없고 千年白日元無翳
만고의 푸른 산은 구름이 오건 말건 萬古靑山一任雲
진중한 그 가운데 참된 즐거움 있으니 珍重箇中眞樂事
외인들의 분분함을 가지고 교계하지 마소 莫將餘外較紛紛
기자 홍범 우리 동방 일찍이 좋은 나라 箕敎吾東曾善國
지금은 하늘 운수 문명에 속하였다오 至今天步屬文明
많은 인재 성인이 일으키매 근본 없지 않나니 多材聖作非無本
지극한 도 사람이 행하지 어찌 절로 형통하랴 至道人行詎自亨
적막한 묵은 책에 보결을 찾으려 하니 寥落塵編尋寶訣
분발한 호걸들은 보통 생각에서 벗어나리 奮興豪傑出常情
유궁이 선산의 경내에 좋이 열렸으니 儒宮好闢仙山境
늙은 나도 당의 이름에 걸맞길 더욱 생각노라 老我增思實趁名
팔계(八溪) 정종영(鄭宗榮)이 차운한 시는 다음과 같다. 八溪鄭宗榮次曰
우리나라 문교 은나라 기자로부터 시작되어 大東文敎自箕殷
신라시대 명현이 제제92)하게 무리를 이루었네 羅代名賢濟濟群
흥망은 백번 변하여 산과 바다에 남았고 興亡百變餘山海
치란은 천추에 악취와 향기를 뒤섞었어라 治亂千秋混臭薫
정별93)은 사람의 의표를 마침내 바르게 하였고 旌別終歸人正表
지휘는 구름 같은 선비를 거듭 보게 하였네 指揮重見士如雲
학문 닦음을 서산 아래에 의탁할 만하나니 藏修可托西山下
추로94)에 일찍이 분분한 외부의 의논 많았어라 鄒魯曾多外議紛
남중의 주군이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으니 南中州郡如棊布
분섬95)은 성명을 저버릴 수가 없어라 分陜無能負聖明
문옹96)이 치화를 진작시킴을 이미 기뻐하고 已喜文翁治化振
중자97)의 도심이 형통함을 도리어 사랑하노라 還憐中子道心亨
동도에서 거듭 서산98)의 학문을 보겠노니 東都重見西山學
성경에 겸하여 조설99)의 정이 많아라 誠敬兼多澡雪情
함께 청금100)을 방문하여 수작하고 물으니 共訪靑衿酬且問
의연히 기수 가 영귀101)란 이름이 있구나 依然沂上詠歸名
퇴계 선생의 서악정사 시는 다음과 같다. 退溪先生西岳精舎詩
동도라 현사는 비방 어이 잦은가 東都賢祀謗何頻
변경하여 새로운 학궁을 만들었네 變置眞成學舎新
다만 청아102)를 잘 길러 육성한다면 但使菁莪能長育
성상의 깊은 은혜 유림에 미치리라 涵游聖澤屬儒紳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서악서원을 배알하고 원생들에게 보인 시는 다음과 같다. 金鶴峰謁西岳示院生詩
서형산 아래의 정사 그 이름 예전에 들고서 西兄精舎舊聞名
먼 곳 나그네 처음으로 만 리 길을 돌아왔네 遠客初回萬里程
귀옹103)이 서원을 세운 뜻 누가 알리오 誰識龜翁開院意
계림의 잎마다 풍성을 다하는도다 雞林葉葉盡風聲
옥산서원(玉山書院) 안강현 서쪽 자옥산(紫玉山) 동쪽 화개산(華蓋山) 아래에있다.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 선생의 서원이다. 융경(隆慶) 6년 임신년(1572, 선조 5)에 부윤 이제민(李齊閔)이 고을의 사림(士林)을 거느
리고 터를 정한 다음 곧 묘우(廟宇)를 건립하였다. 계유년(1573, 선조 6)에 서악(西岳)의 향현사(鄕賢祠)로부터
위판을 옮겨 봉안하였다. 묘우는 3칸인데 서향으로 만들었고 체인묘(體仁廟)라고 하였으며, 그 왼쪽에 전사청
(典祀廳) 2칸이 있다. 묘 앞에 강당 3칸이 있는데 구인당(求仁堂)이라 하였으며, 동재(東齋)를 양진재(兩進齋),
서재(西齋)를 해립재(偕立齋), 동하재(東下齋)를 민구재(敏求齋), 서하재(西下齋)를 암수재(闇修齋)라 하였으며,
전루(前樓)를 무변루(無邊樓), 외문(外門)을 역락문(亦樂門)이라 하였다. 강당 동쪽에 경각(經閣) 3칸이 있다.
◦대궐에서 선사(宣賜)한 서책 및 서원에서 구비한 서책 수 백여 권이 보관되어 있다. 강당 북쪽에 비각(碑閣) 1칸
이 있는데, 비는 곧 신도비(神道碑)이다. 관찰사 박소립(朴素立)이 묘가 멀리 있어 수호하기가 어렵다고 하여
이곳에 옮겨 세운 것이다. 만력 갑술년(1574, 선조 7)에 관찰사 김계휘(金繼輝) 공이 사액(賜額)해주기를 계청
(啓請)하였으므로 옥산서원이라고 사액하였다. 편액은 이산해(李山海) 공의 글씨이다.
◦玉山書院在安康縣西紫玉山東華蓋山下文元公晦齋李先生書院也隆慶六年壬申府尹李齊閔率鄕中士林以定其基
仍建廟宇癸酉自西岳鄕賢祠移安位版廟則三間其制西向號體仁其左有典祀廳二間廟前有講堂三間號求仁東齋曰
兩進西齋曰偕立東下齋曰敏求西下齋曰闇修前樓曰無邊外門曰亦樂講堂東有經閣三間◦宣賜書册及院備書册累百
餘巻藏焉講堂北有碑閣一間碑乃神道碑也觀察使朴素立以墓在遐遠難於守護移竪焉萬曆甲戌因觀察使金公繼輝
啓請賜額曰玉山書院扁額則李公山海筆也
축문(祝文)은 다음과 같다.
학문은 심오하고 學問淵深
도덕은 고상하여 道德高厚
후인을 계도 하였으니 啓佑後人
향사가 더욱 오래리라 享祀悠久
체인묘명(體仁廟銘)은 다음과 같다.
만물을 낳는 봄이 生物之春
나에게 있어서는 인이니 在我爲仁
자신으로써 체득한다면 體之以身
어찌 사람을 자라게 하지 않으리오 何不長人
구인당명(求仁堂銘)은 다음과 같다.
마음의 덕이 어찌 줄어들겠는가 心德何損
놓아두고서 멀다고 하는도다 放而曰遠
한 번 생각하여 돌이킬 줄 알면 一念知反
곧 이것이 바로 근본이니라 即此是本
양진재명(兩進齋銘)은 다음과 같다.
선을 가림은 밝게 하여야 하고 擇善惟明
자신을 반성함은 성실하게 하여야 하나니 反身惟誠
어느 것이 중대하고 어느 것이 가벼운가 孰重孰輕
성인과 현인이 함께 행하느니라 聖賢同行
해립재명(偕立齋銘)은 다음과 같다.
경직하고 의방하여104) 敬直義方
안과 밖이 서로 도움을 內外交相
굳게 잡아 잊지 않아야 惟操不忘
하늘로부터 받은 덕이 빛나리라 天德之光
무변루명(無邊樓銘)은 다음과 같다.
부족하지도 않고 남지도 않으며 靡欠靡餘
끝도 없고 처음도 없도다 罔終罔初
광풍제월(光風霽月)이여 光歟霽歟
태허에 노니는도다 遊于太虛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무변루시(無邊樓詩)는 다음과 같다.
만고에 자옥이란 산 이름 전하리니 萬古山傳紫玉名
해동의 부자는 회재 선생이로다 海東夫子晦先生
무변105)루 아래 오동나무에 달이 비치니106) 無邊樓下梧桐月
당시에 선생의 맑은 의미107)를 상상할 수 있네 想得當年意味淸
역락문명(亦樂門銘)은 다음과 같다.
풍성을 듣고 곧 돌아오고 聞風即回
도를 바라보고 왔으니 望道而來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不亦樂哉
나라의 영재들이여 邦之英材
이명(銘)은모두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지은것이다. 銘皆盧蘇齋守愼所題也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서원(書院)의 기문을 지었는데, 그 기문에, “합천 군수(陜川郡守) 권덕린(權德麟) 공은
회재 이 선생의 제자이다. 융경(隆慶) 6년(1572, 선조 5) 늦가을에 편지를 보내와서 말하기를, ‘선생을 위하여
서원을 지었는데 그 시말을 기록하고 또 재사의 이름을 지어 주시오.’ 하였다. 허엽이 이 편지를 받아 간직해두
고는 병을 앓아 시일만 끌면서 즉시 초를 잡지 못하였다. 만력 계유년(1573, 선조 6) 겨울에 선생의 손자 이준
(李浚)이 와서 권군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였으므로 이를 위해 애도하였다. 권군은 소싯적부터
학문에 뜻을 둔 선비였는데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아!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죽은 벗의 부탁에
감회가 있어 삼가 졸렬한 말을 써서 이군이 돌아가는 편에 부친다.
가만히 생각건대, 선생의 덕용(德容)을 다행히 엽이 성균관에 드나들 때 뵈었고, 선생의 덕행(德行)을 또 퇴계
선생이 지은 행장(行狀)에서 자세히 보고서 선생을 경모(敬慕)하며 우러러 찬탄한 지가 오래되었다.
일찍이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보니,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지나가면서 한 번 말을 쉬거나 한 번
읊조린 곳마다 서원을 세우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는 어진 이를 좋아함이 이러한 점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선생이 머물며 학업을 닦은 곳이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부윤 이제민(李齊閔)이 그 고을의 13가지 소원
을 채택하여 그 터를 정해 놓은 다음, 감사에게 보고하여 서원을 건립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창고의 남는 것
을 출연하여 그 비용을 주로 채우고 향로(鄕老)와 유사(儒士) 또한 그 힘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임신년(1582,
선조 15) 2월에 일을 시작하여 8월에 공사를 마쳤는데, 사우(祠宇)와 강당 및 동재와 서재, 전루(前樓)에 이르기
까지 도합 40여 칸이니, 아 성대하도다.
경주 안강현의 양좌동(良佐洞)은 바로 선생이 거쳐하셨던 곳이다. 그 동네 서쪽15리에 자옥산이 있으니, 선생이
별장을 짓고 유식(遊息)과 장수(藏修)의 처소로 삼은 곳이다. 거기에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관어대
(觀魚臺), 세심대(洗心臺) 등이 있는데 모두 선생이 이름을 붙이고 항상 소요하며 스스로 즐기시던 곳이다.
지금의 서원은 바로 세심대 위쪽에 있으니, 상하로 용추(龍湫)의 맑고 깊음이 사랑할 만하다.
내가 비록 그곳을 답사하지 못하고 권공이 보여준 것에만 의거하였으나 이미 송연히 흥기하였다.
내가 비록 선생의 문하에서 제자의 예를 갖추고 선생의 말씀을 듣지는 못하였으나 심경에 부주(附註)한 것
을 보고 가만히 스스로 존경하여 나의 스승으로 여겼다. 드디어 동재를 민구재(敏求齋)라고 이름 하였으니,
공자가 가르친바 ‘옛것을 좋아하여 급급히 그것을 구하였다.’는 뜻을 취한 것이며, 서재를 암수재(闇修齋)라고
하였으니 주자의 자찬(自贊) 중에 ‘잠잠히 날마다 수양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누를 납청루(納淸樓)라 하였
으니 청(淸)이라는 것은 기(氣)이고 기는 양(陽)이다. 이 누각에 오르는 자는 청을 받아들여 양을 보양하고 양을
보양하여 도(道)를 응결되게 함이 여기에 갖추어져 있을것이다.
만력 계유년(1573, 선조 6)에 옥산서원이라고 사액하니 의연히 주자가 강의(講義)하던 지명과 같다. 명호(名號)
의 아름다움과 사문(斯文)의 빛남이 지극하다하겠다. 아! 나는 쇠약하고 병이 들어 한 번도 이 서원으로 가서
사우(祠宇)를 우러러 절하고 그 고을 선비들과 더불어 선생의 바른 학문을 강론하여 밝혀 진작(振作)하고 경각
(警覺)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고 한갓 동쪽을 바라보며 서글퍼할 따름이다. 오직 바라건대, 이 서원에 거처하는
선비들은 부윤이 이 서원을 세운 뜻에감격하고 선생이 머무르던 곳임을 생각하여 선생의 도덕이 고후(高厚)함
을 사모할 뿐만 아니라 그 심원하고 치밀한 공부를 배우며 그 심원하고 치밀한 공부만 배울 것이 아니라 그 독실
하고 견고한 뜻을 힘쓴다면 선생의 고향은 영원히 훌륭한 선비들이 많은 추로(鄒魯)가 될 것이며 우리 국가에서
인재를 취하여 세상을 경륜하는 것이 더욱 유원하고 무궁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어찌 선생에게 영광이
되지 않겠는가. 오호라! 힘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납청(納淸)은 노 소재(盧蘇齋)가 무변(無邊)으로 고쳤다.
소학당(小學堂) 부의 동쪽 2리에 있다. 언제 창건했는지 알 수 없으나 성화(成化) 을미년(1475, 성종 6)에 부윤
양순석(梁順石)이 중수하였다. 학술이 있는 자를 가려 스승을 삼고 어린아이를 모아 가르쳤는데 지금은 없어
졌다.
사마소(司馬所) 향교의 남쪽 문천(蚊川) 가에 있다. 언제 창건했는지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주춧
돌과 섬돌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매월당(梅月堂) 사우는 금오산(金鰲山) 남변(南邊)의 동구에 있다. 바로 용장사(茸長寺)의 옛터로 김시습(金時
習) 공이 유식(遊息)하던 곳이다. 공의 사적은 율곡(栗谷) 선생이 교지를 받들어 지은 공의 전기(傳記) 중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공의 평소 발자취는 국내의 명산에 두루 펴져 있는데 유독 금오산에 거처한 것은 장차 임종하려는 듯한 뜻이
있었으니, 사유록(四遊錄)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유록에 “금오산에 거처함으로부터 멀리 유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다만 해변에 한가로이 거닐며 교외
에 유유자적 노닐며 매화를 찾고 대숲을 물으면서 항상 읊조리고 취하여 스스로 즐겼다.”고 한 것은 바로 공이
스스로 기록한 말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매월로써 당을 명명한 것도 또한 금오산의 매화와 달의 뜻의 취한 것이
라고 한다. 금오신화를 제한 시[題金鰲新話詩]에 이른바 “나직한 집의 푸른 담요엔 온기가 넉넉한데, 창에
가득한 매화 그림자엔 달이 처음 밝게 비취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용장사(茸長寺) 언제부터 황폐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섬들은 아직 남아 있다. 경술년(1670, 현종 11) 봄에
부사 주면(周冕)이 관찰사 민시중(閔蓍重) 공에게 품의(稟議)하고 경내(境內)의 인사들과 도모하여 이곳에 사우
를 창건한 다음, 장차 공이 손수 그린 진상(眞象)을 모사하여 봉안하고 중을 모아 수호하려 하였으나, 공사를
마치지 못하고 체직(遞職)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윤색(潤色)하는 책임은 자연 후일의 군자에게 있게 되었으므로
우선 전말을 비워둔다.
許草堂曄作書院記曰陜川郡守權公德麟晦齋李先生之學徒也隆慶六年季秋以書來曰爲先生起書院其記始末且名齋舎
哉曄受而藏之疾病遷延未即起草萬曆癸酉冬先生之孫浚來傳權君已下世爲之驚悼少年志學之士遽至於是噫是何司
命也感念亡友之囑謹寫拙詞以付李君之還竊惟先生之德容幸及瞻睹於游泮之日先生之德行又得備聞於退溪所撰行
狀景慕而仰歎者久矣嘗見大明一統志程朱所過一憩馬一嘯咏之地無不起書院好賢之無已有如是者況先生之所棲遲
做業者乎府尹李侯齊閔採鄕十三之願躬卜定其基告于監司請建書院出其庫餘以主其費鄕老儒士亦盡其力壬申二月
始事八月訖功則祠宇與講堂曁東西兩齋及乎前樓摠四十餘間吁盛矣哉慶州安康縣之良佐洞即先生之居也洞之西十
五里有紫玉山先生建別墅以爲遊息藏修之所有濯纓澄心觀魚洗心等臺皆先生所題目而常逍遙自樂者也今之書院正
當洗心臺之上上下龍湫澄泓可愛予雖未得躡斯境而據權公之示已竦然興起矣予雖未及摳衣於先生之門而聞先生之
語得見心經附註竊自尊之以爲吾之師矣遂名其東齋曰敏求取孔子所訓好古敏以求之之義也其西齋曰闇修取朱子自
贊中闇然而日修之義也樓曰納淸淸者氣也氣者陽也登斯樓者納淸而養陽養陽以凝道斯其具也萬曆癸酉賜額玉山書
院依然朱子講義之地名號之美斯文之光可謂至矣嗟夫予衰且病無由一入院中瞻拜祠宇得與鄕士子講明先生之正學
以致提撕警覺之事徒爲東望悵悵而已惟願士子之居是院者感府尹營建之意思先生棲息之所不但慕其道德之高厚而
且學其深潛縝密之功不但學其深潛縝密之功而且礪其篤實堅確之志則先生之鄕永爲鄒魯之多士而我國家取材而經
世者益悠遠而無窮矣豈不于先生有光哉鳴呼可不勉哉納淸盧蘇齋改以無邊
◦小學堂在府東二里不知何時肇建而成化乙未府尹梁順石重修擇有學術者爲師聚童蒙訓誨今廢
◦司馬所在鄕校南蚊川上不知何時肇建而火于壬辰遺礎階砌尙在
◦梅月堂祠宇在金鰲山南邊洞口即茸長寺舊基而金公時習遊息之地也公之事蹟具載於栗谷李先生奉敎所撰傳中公之
平日足跡殆遍於國內名山而獨居金鰲有若將終焉之志觀於四遊錄可知也其曰自居金鰲不愛遠遊但優遊海濱放曠郊
廛探梅問竹常以吟醉自娛者是公自志之言也世傳以梅月名堂者亦取金鰲梅月之意題金鰲新話詩所謂矮屋靑氈暖有
餘滿窓梅影月明初者是也
◦茸長寺未知自何時荒廢而階砌尙存庚戌春府使周冕禀議于觀察使閔公蓍重謀諸境內人士草創祠宇於此將欲摹安公
手寫眞象募僧守護未及訖工而遞潤色之責自有後來之君子姑闕顚末云
역원 驛院
구어역(仇於驛) 부의 동쪽 48리에 있다.
조역(朝驛)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사리역(沙里驛) 부의 북쪽 6리에 있다. 신증 新增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 2)에 한지원(閑地原)으로 옮겼
다가 금년에 도로 옛터로 옮겼다.
노곡역(奴谷驛) 부의 남쪽 26리에 있다.
아화역(阿火驛) 부의 서쪽 45리에 있다.
仇於驛在府東四十八里
◦朝驛在府東二十五里
◦沙里驛在府北六里新增天啓甲子移居閑地原今年還移舊基
◦奴谷驛在府南二十六里
◦阿火驛在府西四十五里
김극기(金克己)의 시는 다음과 같다. 金克己詩
어느 곳이 슬퍼할 만한가 何處堪惆悵
새벽에 일어나 먼 길을 나설 때라오 晨興遠邁時
길에 오르기를 급히 서둘렀으나 登途雖促促
떠나기는 오히려 머뭇거리네 去國尙遲遲
잿마루 나뭇가지에 아침 해 솟아오르니 嶺杪新曦湧
숲 사이에 자던 안개 걷히는구나 林間宿霧披
잔을 들어도 함께 말할 이 없고 擧盃無與語
뜰의 나무는 무성하게 푸르렀네 庭樹綠猗猗
의곡역(義谷驛) 부의 서쪽 57리에 있다.
경역(鏡驛) 안강현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40리이다.
잉보역(仍甫驛) 부의 남쪽 55리에 있다.
◦義谷驛在府西五十七里
◦鏡驛在安康縣距府四十里
◦仍甫驛在府南五十五里
김극기의 시는 다음과 같다. 金克己詩
아득하고 아득한 산 아래 길에 悠悠山下路
말 가는대로 맡겨두고 서늘한 날씨 읊네 信轡詠涼天
물속엔 가시랭이 머금은 게 있는데 水有含芒蟹
숲에는 잎으로 몸 가린 매미 없어라 林無翳葉蟬
시냇물 소리는 빗소리처럼 맑고 溪聲淸似雨
들 기운은 연기처럼 담담하구나 野氣淡如烟
밤이 되어 외로운 객사에 드니 入夜投孤店
촌부는 아직도 자지 않고 있네 村夫尙未眠
인비역(仁庇驛) 기계현(杞溪縣) 서쪽 6리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76리이다.
육역(六驛) 신광현(神光縣)에 있다. 부와의 거리는 75리이다.
모량역(牟梁驛) 부의 서쪽 23리에 있다.
◦仁庇驛在杞溪縣西六里距府七十六里
◦六驛在神光縣距府七十五里
◦牟梁驛在府西二十三里
김극기의 시는 다음과 같다. 金克己詩
만리 고향 그리는 마음 오랜 세월 흔들리더니 鄕心萬里久搖㫌
홀연히 고향 향하여 채찍을 휘두르며 달려가노라 忽向家山振策行
먼 재는 점점 타향의 물색에 잠겨 가고 遙嶺漸沈他界色
어지러운 물소리는 처음으로 고향소리 울려주네 亂流初放故園聲
끊어진 나무토막이 바람을 따르는 자취 거두어 會收斷梗隨風迹
떠다니는 구름이 봉우리 그리워하는 정 위로하리 持慰浮雲戀岫情
세상의 영화와 쇠퇴는 웃음거리에 붙일 만하니 世上榮枯堪一笑
어찌 분주히 명성을 위해 괴로이 달리겠는가 何須擾擾苦馳名
정이오(鄭以吾)의 시는 다음과 같다. 鄭以吾詩
역로는 가을이라 고목에서 매미가 우는데 驛路蟬吟老樹秋
동도에 유람하는 객 홀로 누에 오르노라 東都遊客獨登樓
오후의 저택엔 잡초가 무성히 우거졌고 五侯池館蓬蒿遍
옥적 한가로운 소리에 지난일 아득하여라 玉笛閑吹往事悠
조준(趙浚)의 시는 다음과 같다. 趙浚詩
계림의 산수에 맑은 가을 깃들려 하는데 雞林山水欲淸秋
만고의 흥망에 객은 누에 기대었어라 萬古興亡客倚樓
외려 후인들 미혹하여 거울삼을 줄 모르니 尙使後人迷不鑑
하늘 동쪽 오늘날 나 홀로 근심에 잠기네 天東此日獨悠悠
보이원(甫伊院) 부의 동쪽 2리에 있다.
동원(東院)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용두원(龍頭院) 부의 동쪽 13리에 있다.
장령원(長嶺院)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혜리원(惠利院) 부의 동남쪽 32리에 있다. 하륜(河崙)의 서문(序文)에, “계림은 신라의 옛 도읍인데, 전조에 들어
와서도 큰 부[巨府]가 되었으니, 인물이 번성하고 많았던 것은 사적(史籍)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 수십 년 동안 왜구가 근심거리가 되었으니 매우 슬픈 일이다. 내가 경오년(1390, 우왕 6)봄에 울주(蔚州)
로 가려는데, 경주의 성남(城南)을 지나게 되어 천왕사(天王寺)에서 유숙하였다.
당두(堂頭주지) 연 상인(然上人)이 좋은 말로 응접하여 주었다. 이튿날 절문을 나오니 절의 동쪽은 멀리까지
인가가 없었다. 90여 리를 가서 울주에 이르렀는데 외로운 성은 바다와 거리가 채 10리도 안 되었으며 전함(戰艦)
이 포구(浦口)에 나누어 정박하여 불의의 환난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 수졸(戍卒)들은 대개 두 달에 한 번 씩 교대
하며, 생선과 소금 등을 매매하는 자들이 또한 때때로 이르렀다. 그 90리를 왕래하는 사이에 춥거나 덥거나 비가
오거나 혹 날이 저물어도 머물러 쉴 곳이 없었다. 도둑도 염려되고 맹수도 두려워서 신음하며 불안에 떨며 수풀
사이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돌아 오는 길에 또 천왕사에서 묵게 되었는데, 나그네의
고통과 수졸들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상인(上人)이 말하기를, ‘나는 비록 출가하였으나 늙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향 땅을 멀리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대가 말한 바를 나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어버이는 이미 돌아가셨으니 명복을 기원한 나머지 재물로써 그 길의 중간쯤에 조그마한 원사(院舍) 짓기를 원
하나 힘이 부족합니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의롭게 여겼다. 이튿날 상인은 나를 대비원(大悲院)까지 전송
하여 주었다.
정축년(1397, 태조 6) 봄에 내가 부윤이 되어 이르니 상인은 아직도 탈이 없이 있었다. 관청에서 퇴근한 여가에
그와 함께 예전 일을 이야기하는데, 상인이 말하기를, ‘내가 전번에 말한 그 길의 반쯤 되는 곳에서 옛 사람들이
이른바 덕방동(德方洞)이라고 하던 곳을 찾아내었습니다. 앞뒤가 다 산이며 초목이 무성하고 시냇물이 그 가운
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따뜻한 방을 만들 수도 있고 서늘한 마루를 만들 수도 있었으며, 곁에는 노는 땅이 있
어서 또 채소나 과일을 심을 수도 있었습니다. 과연 진실로 원사를 두어 나그네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에 알맞
은 곳이었습니다. 정주(靜州) 남득온(南得溫)과 절제사(節制使) 이종주(李從周)가 함께 그 비용을 도와주어서
거의 낙성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쉬는 날 함께 한 번 가보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제 내가 사신(使臣)의 명을 받들고 또 부의 경내(境內)를 지나게 되었는데, 상인이 나와서 보고 만면에 희색을
띠며 말하기를, ‘나의 원사가 이미 낙성하였습니다. 그때 그대는 바야흐로 중국에 가게 되었으므로 감히 청하지
못하였고, 양촌(陽村) 권공(權公)108)이 이미 기문을 썼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원(院)의 이름을 짓지 못하였
으니, 부디 그대가 이름을 지어서 나의 원사를 빛나게 해 주십시오.’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길가
에 원우(院宇)를 두는 것은 곧 주례(周禮)의 지관(地官) 유인(遺人)에, 10리마다 여(廬)가 있고, 여에는 음식
이 있다고 한 여숙 제도(廬宿制度)의 유의(遺意)로서 위정자(爲政者)가 당연히 힘써야 할 일이다.
이제 상인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는데 정성을 다하고, 또 그 나머지를 미루어 길 가는 나그네에게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고 사물(事物)을 이롭게 하려는 염원이 천성(天性)의 고유한 바에서 발로
되어 그만 두려 하여도 그만 둘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저 심산유곡 속의 적막한데에 앉아 마른 나무나
식은 재처럼 세상에 아무 것도 하는 바가 없는 자와 비교 한다면 그 거리가 어찌 멀지 않겠는가.
의당 그 원(院)에 이름을 지어 후인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는 바가 있도록 할 것이다. 이에 혜리원(惠利院)이라
명명하고, 이어 전후에 서로 이야기한 내용을 차례로 적어 서문을 삼는다.” 하였다.
모화촌원(毛火村院) 부의 동쪽 43리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부의 동쪽 37리에 있다.
이견원(利見院) 이견대(利見臺) 곁에 있다.
전동촌원(典洞村院) 부의 동쪽 57리에 있다.
남원(南院)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태로원(太櫓院) 부의 남쪽 6리에 있다. 신라의 김생(金生)이 쓴 태로원(太櫓院)이라는 석 자의 큰 글씨가 있다.
천룡원(天龍院) 부의 남쪽 25리에 있다.
구사원(仇沙院) 부의 남쪽 34리에 있다.
회은촌원(回隱村院) 혹은 전읍(錢邑)이라고도 한다. 부의 남쪽 38리에 있다.
구량화촌원(仇良火村院) 부의 남쪽 50리에 있다.
대비원(大悲院) 일명 두두원(豆豆院)이라고도 한다. 부의 남쪽 15리에 있다.
금장원(金藏院)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일명 금척원(金尺院)이라고도 한다.이문(異聞)에 상세히 보인다.
미륵원(彌勒院)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고원(高院)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영경원(永慶院) 부의 서쪽 60리에 있다.
과쌍원(果雙院) 부의 서쪽 35리에 있다.
감조촌원(甘助村院) 부의 서쪽 40리에 있다.
풍정원(楓井院) 부의 서쪽 7리에 있다.
신원(新院) 부의 서쪽 56리에 있다.
천은원(天恩院) 부의 동쪽 14리에 있다.
관원(館院) 부의 북쪽 7리에 있다.
화산촌원(花山村院) 부의 북쪽 15리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부의 북쪽 16리에 있다.
소야원(所也院) 안강현 동쪽 15리에 있다.
한보원(閑甫院) 안강현 남쪽 2리에 있다.
여원(礪院) 안강현 서쪽 20리에 있다.
인다원(仁多院) 기계현 서쪽 13리에 있다.
다질원(多叱院) 안강현 북쪽 11리에 있다.
죽동원(竹洞院) 신광현 남쪽 5리에 있다.
대후원(待侯院) 죽장현 남쪽 20리에 있다. 이상은 여지승람에 나온다.
◦甫伊院在府東二里
◦東院在府東七里
◦龍頭院在府東十三里
◦長嶺院在府東二十五里
◦惠利院在府東南三十二里
◦河崙序雞林新羅氏之古都入前朝爲巨府
人物之繁夥史具可見也及其叔世倭寇爲患者數十年可悲之甚矣予於庚午春將適蔚州道過城南寄宿天王寺堂頭然上
人接以良話明日出門則寺以東杳無人煙行九十餘里以至于蔚州則孤城去海不滿十里賴有戰艦分泊浦口以備不虞耳
其戍卒率兩月一更代魚鹽之貿易者亦時至其於九十里往還之間祁寒暑雨或値日暮無所於止息草竊之可慮虎豹之可
畏不能不呻吟耿耿以待曙光於林莽之間矣予將還又宿天王寺語及羈旅之苦行役之難上人曰予雖出家爲養老親不能
遠離鄕井子之所言予所悉知也親已歿願以追福之餘就於半途構一小院力不能足耳予聞而義之明日上人送至大悲院
丁丑春予尹府而至則上人尙無恙公退之暇相與之話舊上人乃曰予於向之半途卜得古之人所謂德方洞者前後皆山草
木叢茂澗水中流可以爲燠房可以爲涼軒旁有閑地又可以種蔬果誠宜置浣以便行旅而南靜州得温李節制從周共助其
費幾乎有成矣予聞而喜之欲於暇日相與一往觀之而未遂也今予奉使命又過府境上人出而見之喜滿于色曰吾之院旣
成而子方有中國之行不敢請陽村權公已記之矣予猶不得院名請子109)幸名之以光吾院予曰吾東方道途之有院宇即
周禮廬宿之遺意而爲政者之所當務也今上人孝其親以誠又推其餘以及於行路之人是其惠人利物之念發乎天性之所
固有而不容已者若此其視深山窮谷之中坐於空寂如槁木寒灰無所事於世者相去豈不遠乎是宜有以名其院而使夫來
者有所觀感也於是名之曰惠利仍次其前後之相語者以爲序云
◦毛火村院在府東四十三里
◦要光院在府東三十七里
◦利見院在利見臺傍
◦典洞村院在府東五十七里
◦南院在府南五里
◦太櫓院在府南六里有新羅金生太櫓院三大字
◦天龍院在府南二十五里
◦仇沙院在府南三十四里
◦回隱村院或云錢邑在府南三十八里
◦仇良火村院在府南五十里
◦大悲院在府南十五里一名豆豆院
◦金藏院在府西二十五里新增一名金尺院詳見異聞
◦彌勒院在府西三十里
◦高院在府西四十里
◦永慶院在府西六十里
◦果雙院在府西三十五里
◦甘助村院在府西四十里
◦楓井院在府西七里
◦新院在府西五十六里
◦天恩院在府東十四里
◦館院在府北七里
◦花山村院在府北十五里
◦廣濟院在府北十六里
◦所也院在安康縣東十五里
◦閑甫院在安康縣南二里
◦礪院在安康縣西二十里
◦仁多院在杞溪縣西十三里
◦多叱院在安康縣北十一里
◦竹洞院在神光縣南五里
◦待侯院在竹長縣南二十里以上出輿地勝覽110)
교량 橋梁
대교(大橋) 문천(蚊川) 위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효불효교(孝不孝橋) 부의 동쪽 6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때에 아들 7형제를 둔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가 사통(私通)하는 남자가 물의 남쪽에 있었으므로 그의 아들들이 잠들기를 엿보아서 가곤 하였다.
그 아들들이 서로 말하기를,‘어머니가 물을 건너 밤에 다니시니 자식된 자의 마음에 편안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돌다리를 놓으니,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겨 행실을 고쳤다. 당시 사람들이 그 다리를 효불효(孝不孝)라
명명하였다.” 한다.
굴연천교(掘淵川橋)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일명 광제원교(廣濟院橋)라고도 한다.
신증 新增금년에 큰비가 내려 시냇물의 흐름이 바뀌어 옛길을 잃어버렸으므로 부의 북쪽 15리로 옮겨서 다리를
만들었다.
신원교(神元橋) 부의 서쪽 10리에 있다. 이상은 여지승람에 나온다.
신증 新增
남정교(南亭橋)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大橋在蚊川上今廢
◦孝不孝橋在府東六里世傳新羅時有七子之母所私在水南伺其子寢往奔之其子相謂曰母涉水夜行於子心安乎乃作
石橋母慙而改行時人名其橋曰孝不孝
◦掘淵川橋在府北二十里一名廣濟院橋新增今年大雨川水變遷失其故道移就府北十五里爲橋
◦神元橋在府西十里以上出輿地勝覽111) 新增南亭橋在府南五里
사묘 祠廟
사직단(社稷壇) 부의 서쪽에 있다. 신증 新增중간에 부의 동쪽 동천(東川)으로옮겼다가 금년에 또 부의 성
서쪽 2리쯤으로 옮겼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혁거세묘(赫居世廟) 부의 남쪽 월남리(月南里)에 있다. 우리 세종 11년(1429년)에 묘를 세우고, 매년 봄과 가을
중월(仲月)에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하게 하였다.
석탈해사(昔脫解祠) 동악(東嶽) 산정(山頂)에 있다. 탈해왕(脫解王)이 무열왕(武烈王)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소천(疏川) 언덕에서 나의 해골을 파내어 소상(塑像)을 토함산(吐含山)에 안치(安置)하라.” 하였다.
무열왕이 그 말대로 하였더니, 두개골(頭蓋骨)의 둘레는 3척 2촌, 뼈의 길이는 9척 7촌이며, 치아는 하나처럼
붙었고 뼈마디는 모두 이어져 있었다. 드디어 동악에 사당을 세웠다. 지금은 없어졌다.
성모사(聖母祠) 서악(西嶽)의 선도산(仙桃山)에 있다. 성모(聖母)는 본래 중국황실(皇室)의 여자로 이름은 사소
(娑蘇)이다. 일찍이 신선되는 술법을 터득했는데, 해동(海東)에 와서 머무르며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고 드디어
신(神)이 되었다. 세상에 전하기를, “혁거세는 곧 성모가 낳았다.” 한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이 지은 찬(讚)에,
“선도성모가 어진 이를 잉태하여 나라를 창건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경순왕영당(敬順王影堂) 부의 동북쪽 4리에 있다. 절일(節日)마다 주(州)의 수석(首席) 아전이 삼반(三班)을
거느리고 제사한다. 신증 新增천계(天啓) 병인년(1626, 인조 4)에 관찰사 김시양(金時讓)이 후손으로서 순행하
다가 본부에 이르러 영당에 제사를 지내고 그 고을의 후손들을 모아 유사(有司)를 의논하여 정해서 해마다
상례(常例)로 사당을 수리하게 하였다.
신모사(神母祠) 치술령(鵄述嶺) 위에 있다. 신모(神母)는 곧 박제상(朴堤上)의 아내이다.
제상이 왜국에서 죽으니, 그의 아내가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여 치술령에 올라 일본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어서 드디어 치술령의 신모가 되었다. 그 마을 사람들이 제사지냈는데 뒤에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곳이되었다.
여단(厲壇) 부의 북쪽에 있다. 이상은 여지승람에 보인다.
신증 新增
독단(纛壇) 부의 서문 밖에 있다.
社稷壇在府西新增中移于府東東川今年又移于府城西二里許
◦文廟在鄕校
◦城隍祠在府東七里
◦赫居世廟在府南月南里我世宗十一年立廟毎歲春秋仲月降香祝幣以祭
◦昔脫解祠在東嶽頂脫解王夢於武烈王而言曰抜我骨於疏川丘塑像安於吐含山王從其言髑髏周圍三尺二寸骨長九
尺七寸齒凝如一骨節皆連鎻遂立祠於東嶽今廢
◦聖母祠在西岳仙桃山聖母本中國帝室之女名娑蘇早得神仙之術來止海東久而不還遂爲神世傳赫居世乃聖母之所
誕也故中國人讃有仙桃聖母娠賢肇邦之語今廢
◦敬順王影堂在府東北四里毎節日州首吏率三班以祭新增天啓丙寅觀察使金時讓以姓孫巡到本府行祭影堂會鄕之
姓孫議定有司以修祀事歲以爲常
◦神母祠在鵄述嶺上神母即朴堤上妻也堤上死於倭國其妻不勝其慕登嶺望日本慟哭而死遂爲其嶺神母其村人祀之
後爲祈雨之所
◦厲壇在府北以上出輿地勝覽112) 新增纛壇在府西門外
능묘 陵墓
혁거세릉(赫居世陵) 담암사(曇巖寺) 곁에 있다. 관(官)에서 전지(田地)의 개간이나 땔나무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혁거세왕이 승천한 지 7일 뒤에 오체(五體)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나라 사람들이 합쳐서 장사지내려고 하였으나 요사스런 뱀의 방해로 인하여 각각 장사지내고,
드디어 오릉(五陵)이라하였다.” 한다.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미추왕릉(味鄒王陵) 부의 남쪽 황남리(皇南里)에 있다. 유례왕(儒禮王) 때에 이서국(伊西國) 지금의 청도(淸道)
이다. 사람이 금성(金城)을 침공하였다. 우리 병사가 방어하였으나 대항할 수 없었다.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와서
도와주었는데 모두 댓잎[竹葉]으로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이에 힘을 합쳐 적을 격파하였다. 적군이 물러간 뒤에
그 군사들은 간 곳을 알 수 없었고, 다만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는 댓잎이 보일 뿐이었다.
이에 선왕(先王)이 음(陰)으로 도운 공(功)이 있었음을 알았다. 인하여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다.
또는 죽장릉(竹長陵)이라고도 한다.
법흥왕릉(法興王陵)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있다.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있다. 지금의 서악리(西岳里)이다.
赫居世陵在曇巖寺傍官禁田柴世傳王升天七日後五體散落于地國人欲合而葬因蛇妖各葬之遂號五陵亦云蛇陵
◦味鄒王陵在府南皇南里儒禮王時伊西國今淸道人來攻金城我兵禦之不能抗忽有異兵來助皆珥竹葉幷力擊賊破之
軍退後不知所歸但見竹葉積於味鄒陵前乃知先王陰隲有功因號竹現陵一云竹長陵
◦法興王陵在哀公寺北峯
◦太宗武烈王陵在永敬寺北今西岳里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시는 다음과 같다. 梅溪曺偉詩
길 가의 촌락 사이에 道傍墟落間
파릇파릇 보리가 패어났구나 靑靑麥已秀
우뚝 솟은 몇 길 산봉우리 斗起數仞峯
엎드린 짐승처럼 둥그렇네 穹窿如伏獸
부러진 비석 거친 풀 속에 쓰러져 斷碣臥荒草
높직하게 귀두를 드러내었네 昻然見龜首
우거진 초원은 길게 뻗쳤고 莽蒼原陸長
구불구불 냇물은 흘러가누나 迤邐川原走
이곳이 무열왕릉이라고 하니 云是武烈陵
인산의 제도가 누추하지 않구나 因山制非陋
말에서 내리니 머리가 쭈뼛하여 下馬髮蕭森
공손히 서서 소매를 여미네 拱立斂雙袖
비문을 어루만지며 읽어보지만 摩挲讀碑文
결락되어 실로 알기 어려워라 缺落難實究
아득하고 아득한 긴 세월에 茫茫歲月荒
버려둔 채 지키는 사람 없네 委棄無人守
생각건대 옛적에 음이 양이 되었으니 憶昔陰爲陽
이만113)은 참 임금이 아니었네 二曼非眞后
강한 이웃 제멋대로 침노하여 强隣肆侵軼
사방 국경에 병란이 많았는데 四境多兵鬪
무열왕이 들어가 왕통을 이으니 惟王入繼統
우뚝히 공덕이 성대하였네 卓焉功德茂
조아를 유신에게 맡겼으니 爪牙委庾信
무략은 하늘이 준 것이로다 武略殆天授
백제를 병합하여 패도를 열고 幷濟開霸圖
백년간의 도둑을 다 쓸어내니 剗掃百年寇
당나라 황제가 그 공훈을 가상히 여겨 厥篚堆錦繡
왕으로 책봉하는 은명 내리니 疇庸錫鴻命
영토가 길고 넓게 뻗쳤어라 鬪土綿廣袤
준걸들은 모두 등용되고 俊乂共登庸
창고는 날로 풍부해졌네 倉廥日殷富
우물 물이 갑자기 핏빛으로 변하자 井水忽爲血
아 대운을 막을 길이 없게 되어 大運嗟莫救
칼과 신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劒履就窀穸
영령은 하늘로 돌아가고 말았구나 英爽歸昻宿
옛 사기에서 대략 고증할 수 있으나 舊史粗可徵
기재가 소루함이 한스럽구나 紀載恨疏漏
인간의 일은 뜬구름과 같으니 人事如浮雲
누가 영원히 살 수 있겠는가 誰能了宇宙
가성114)은 만고에 닫혔는데 佳城萬古閉
저물녘에 족제비가 휘파람 부네 日暮嘯鼪鼬
진흥왕릉(眞興王陵) 부의 서쪽 서악리(西岳里)에 있다.
선덕왕릉(善德王陵) 낭산(狼山) 남쪽 산마루에 있다.
효소왕릉(孝昭王陵) 부의 동쪽 분남리(芬南里)에 있다.
성덕왕릉(聖德王陵) 부의 동쪽 도지곡리(都只谷里)에 있다.
헌덕왕릉(憲德王陵) 부의 동쪽 천림리(泉林里)에 있다.
흥덕왕릉(興德王陵) 안강현 북쪽에 있다. 신증 新增속칭 장릉(獐陵)이라고도 한다.
김유신묘(金庾信墓) 부의 서쪽 서악리에 있다.
김인문묘(金仁問墓) 부의 서쪽 서원(西原)에 있다.
김양묘(金陽墓) 태종왕릉에 배장(陪葬)하였다. 이상은 여지승람에 나온다.
신증 新增
괘릉(掛陵) 부의 동쪽 35리에 있다. 어느 왕의 능인지 알 수가 없다. 세상에 전하기를, “물속에 장사지내면서 돌
위에다 관을 걸어놓고 인하여 흙을 쌓아 능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하였다.” 한다. 석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남해왕릉(南解王陵), 유리왕릉(儒理王陵), 파사왕릉(婆娑王陵) 모두 사릉(蛇陵)의 원내(園內)에 있다.
탈해왕릉(脫解王陵) 성의 북쪽 양정(壤井) 언덕에 있다.
내물왕릉(奈勿王陵) 첨성대(瞻星臺) 서남쪽에 있다.
진지왕릉(眞智王陵)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있다.
진평왕릉(眞平王陵) 한지(漢只)에 있다.
진덕왕릉(眞德王陵) 사량부(沙梁部)에 있다.
신문왕릉(神文王陵)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있다.
경덕왕릉(景德王陵) 모지사(毛祗寺) 서쪽 산봉우리에 있다.
희강왕릉(僖康王陵) 소산(蘇山)에 있다.
신무왕릉(神武王陵) 형제산(兄弟山) 북쪽에 있다. 지금의 동방동(東方洞)이다.
문성왕릉(文聖王陵), 헌안왕릉(憲安王陵) 모두 공작지(孔雀趾)에 있다.
헌강왕릉(憲康王陵), 정강왕릉(定康王陵) 모두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있다.
진성왕릉(眞聖王陵) 황산(黃山)에 있다. 지금의 양산군(梁山郡) 황산역(黃山驛)이다.
효공왕릉(孝恭王陵) 사자사(獅子寺) 북쪽에 있다.
신덕왕릉(神德王陵) 죽성(竹城)에 있다.
경명왕릉(景明王陵) 황복사(黃福寺) 북쪽 기슭에 있다.
경경왕릉(景京王陵)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있다. 이상은 삼국사(三國史)에 나온다.
나머지는 모두 수장(水葬)하거나 화장(火葬)하였다.
◦眞興王陵在府西西岳里
◦善德王陵在狼山南嶺
◦孝昭王陵在府東芬南里
◦聖德王陵在府東都只谷里
◦憲德王陵在府東泉林里
◦興德王陵在安康縣北新增俗號獐陵
◦金庾信墓在府西西岳里
◦金仁問墓在府西西原
◦金陽墓陪葬太宗王陵以上出輿地勝覽115)
新增
◦掛陵在府東三十五里不知何王陵俗傳葬於水中掛柩於石上因築土爲
陵故名焉石物尙在
◦南解王陵儒理王陵婆娑王陵俱在蛇陵園內
◦脫解王陵在城北壤井丘
◦奈勿王陵在瞻星臺西南
◦眞智王陵在永敬寺北
◦眞平王陵在漢只
◦眞德王陵在沙梁部
◦神文王陵在望德寺東
◦景德王陵在毛祗寺西岑
◦僖康王陵在蘇山
◦神武王陵在兄弟山北今東方洞
◦文聖王陵憲安王陵俱在孔雀趾
◦憲康王陵定康王陵俱在菩提寺東南
◦眞聖王陵在黃山今梁山郡黃山驛
◦孝恭王陵在獅子寺北
◦神德王陵在竹城
◦景明王陵在黃福寺北麓
◦景京王陵在南山蟹目嶺以上出三國史餘皆水葬火葬
기우소 祈雨所
시조묘(始祖廟) ◦김각간묘(金角干墓) ◦백률사(栢栗寺) ◦북형산(北兄山)◦온지연(温之淵) ◦구미산(龜尾山)
◦망산(望山) ◦치술령(鵄述嶺)
始祖廟◦金角干墓◦栢栗寺◦北兄山◦温之淵◦龜尾山◦望山◦鵄述嶺
1)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경상도(慶尙道)」
2) 판본에는 “操”라고 쓰였다.
3) 우당(虞唐)에서 우는 순(舜) 임금이, 당은 요(堯) 임금이 다스린 나라 이름으로 태평성세(泰平盛世)를 말한다.
4) 옥촉(玉燭)은 사시(四時)의 기운이 화창한 것으로, 태평성세를 형용한 말이다. 이아(爾雅) 석천(釋天)에
“사시의 기운이 화창한 것을 일러 옥 촛불[玉燭]이라 한다.” 하였다.
5) 칠요(七曜)는 일(日), 월(月),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일곱 개의 별을말한다.
6) 성덕왕(聖德王) 17년은 무오(戊午, 718년)이다.
7) 우공(于公)은 한(漢)나라 무제(武帝)와 소제(昭帝) 때 동해(東海)의 군결조(郡決曹)로 옥사 판결이 공평하기로
유명하였다. 동해의 효부(孝婦)가 시어머니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옥리의 심문에 못 이겨 거짓 자복하여 그의
옥안(獄案)이 이루어졌다. 우공이 태수에게 “효부가 시어머니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하였으나 태수가
말을 들어주지 않자, 그 옥안을 안고 관부에서 울었다. 마침내 태수가 효부를 논죄하여 죽였는데, 그 후에 동해군
에 3년 동안 가뭄이 들었다. 한서(漢書) 권71 「우정국전(于定國傳)」
8) 추연(鄒衍)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 사람이다. 추연이 연(燕)나라 혜왕(惠王)에게 벼슬하면서 충성을 다 바쳤
음에도 혜왕이 좌우의 참소하는 자들의 말을 믿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에 추연이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자
여름 5월이었는데도 하늘에서 서리가 내렸다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9)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10) 판본에는 “高麗史”가 “考麗史”로 되어 있다.
11) 고려사(高麗史) 권57 「지리지(地理志)」경상도(慶尙道)
12) 신라 소지왕(炤智王)이 즉위한 지 10년 되던 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다가 까마귀와 쥐가 옆에 와서 우는
것을 보았는데 쥐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어 이르기를, “저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시오.” 하였다.
이에 왕이 괴이하게 여겨 기사(騎士)를 시켜 따라가게 하였는데 피촌(避村)이라는 곳에 이르자 돼지 두 마리가
싸움을 하였다. 그것을 구경하는 동안 까마귀는 간 곳 없고 어떤 노인이 연못 속에서 나와 글을 바쳤는데,
그 외면에 쓰여 있기를 “뜯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되어있었다.
왕이 이를 보고 두 사람이란 서민을 이른 것이고, 한 사람이란 왕을 이른 것이라 여겨 열어 보니, 그 안에 이르기
를, “금갑을 쏘아라(射琴匣).” 하였다. 왕이 급히 궁중에 들어가 금갑을 쏘자, 그 안에서 몰래 간통을 하고 왕을
죽이자고 모의하던 중과 궁주(宮主)를 복주(伏誅)하였다. 이를 금갑(琴匣)의 화(禍)라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사금갑조(射琴匣條)」
13) 을야(乙夜)는 하룻밤을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의 오야(五夜)로 나누었을 때 밤 10시경에 해당
하는 시간이다. 여기서는 늦은 밤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14) 의료(宜僚)는 금환(金丸)을 잘 놀리는 사람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시남(市南)의 의료는 공놀이[弄丸]
를 함으로써 두 집안의 난리가 화해되었고, 손숙오(孫叔敖)는 우선(羽扇)을 쥐고 잠만 달게 잠으로써 초인(楚人)
이 전쟁을 그만두었으니, 나도 부리가 석자만 되었으면 좋겠다.” 하였다.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
15) 하삭(河朔)은 하삭음(河朔飮)의 준말로, 여름에 피서하면서 술을 마시는 흥취를 뜻한다. 삼국시대 위(魏)나라
광록대부(光祿大夫) 유송(劉松)이 원소(袁紹)의 군대를 진압하러 가서 원소의 자제들과 삼복(三伏) 더위에 밤낮
으로 술을 마셔서 흠뻑 취했던 데서 유래한다.
16) 최치원(崔致遠)을 말한다.
17) 동황(東皇)은 동방의 군주란 뜻으로 동군(東君)이라고도 칭하는데, 봄은 오행(五行)에 있어서 동방에 해당
하기 때문에 봄의 신(神)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18) 시비비비를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통발은 고기를 잡는 것인데 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리고, 올가미는 토기를 잡는 것인데 토기를 잡고 나면 올가미는 잊어버리는 것이다
(筌者所以在魚得魚而忘筌蹄者所以在兎得兎而忘蹄).”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19) 칠원(漆園)의 관리는 장자(莊子)를 가리킨다. 장자가 몽(蒙)의 칠원이란 곳의 관리로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20) 장자 각의(刻意)에 “그 삶은 물거품[浮]과 같고 그 죽음은 쉼[休]과 같다.” 하였는데, 이는 동정(動靜)에
무심하고 생사(生死)를 하나로 보는 자세를 뜻한다.
21) 영화(永和)는 진(晉)나라 목제(穆帝)의 연호이다. 왕희지(王羲之)의 난정기(蘭亭記)에 의하면, 영화 9년 늦은
봄에 회계(會稽)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에서 왕희지 ․ 사안(謝安) 등 42인의 명사(名士)들이 모여 계사(禊事)를
행하고는 이어 유상곡수(流觴曲水)를 하고 시를 지으며 성대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22) 노양(魯陽)은 노(魯)나라 양공(陽公)을 말한다. 노나라 양공이 한(韓)나라와 한창 전쟁을 하는데 해가 저물려
하자 창을 휘둘러 해를 걷어서 90리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한다.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
2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산천(山川)」
24) 양기(楊岐)는 다기망양(多岐亡羊)이란 고사를 차용하였다. 양자(楊子)의 이웃 사람이 양을 잃고 그 무리를 다
동원하고 다시 양자의 종까지 동원하여 찾으려 하였다. 이에 양자가 묻기를, “한 마리 양을 잃고 찾으러 가는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많은가?”하자, 그가 말하기를, “갈림길이 많기 때문입니다.”하였다. 찾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양자가“양을 찾았는가?”하고 묻자, “잃었습니다.”하였다. 양자가 다시 “어째서 잃었는가?”하자,
그가 말하기를 “갈림길 속에 다시 갈림길이 있어 나는 양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기에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이에 심도자(心都子)가 말하기를, “대도(大道)는 갈림길이 많아 양을 잃고 학자는 방도(方道)가 많아
생명을 잃는다.”하였다. 열자(列子)「설부(說符)」
25) 묵자(墨子)가 실을 염색하는 사람을 보고 탄식하기를, “푸른 물을 들이면 푸르게 되고, 누런 물을 들이면
누렇게 되니, 넣는 곳에 따라 그 색이 변하는 구나.” 하였는데 묵사(墨絲)는 이것을 차용한 것으로, 사람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심성이 바뀌는 것을 슬퍼한다는 뜻이다. 묵자(墨子) 「소염(所染)」
26) 1사(舍)가 30리이므로 칠사(七舍)는 곧 210리의 거리를 말한다.
27) 해계서(駭鶏犀)는 통천서각(通天犀角)을 말한다. 이 뿔에는 적색의 결이 있는데 마치 한가닥 줄이 밑에서 부터
끝까지 통하는 것 같다. 이 뿔에다 쌀을 담아 많은 닭 가운데 두면 닭이 가서 쪼으려 하다가 한 자 쯤 떨어진 곳에
서 놀라 물러나기 때문에 남인(南人)들이 통천서(通天犀)를 명명하여 해계서라고 한다.
포박자(抱朴子) 「등섭(登涉)」
28) 전국 시대 연(燕)나라 태자 단(丹)이 일찍이 진(秦)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는데 진왕이 그에게 예우를 하지
않았다. 이에 태자 단이 진왕에게 본국(本國)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진왕이 들어주지 않고, 속여
말하기를, “까마귀의 머리가 희어지고 말의머리에 뿔이 나게 하면 보내주겠다(烏頭白馬生角乃可許耳).” 하였다.
여기에서는 몹시 늙었음을 형용한 말인 듯하다.
29) 장자(莊子)가 조릉(雕陵)의 밤나무 동산을 지나가는데 큰 까치 한 마리가 장자의 이마에 부딪치고 날아가
밤나무 숲에 앉아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장자가 돌멩이를 집어 들고 쫓아가 살펴보니, 버마재비는 매미
를 잡으려고 정신이 팔려 자신의 형체를 잊고 있었고, 까치는 버마재비를 잡으려고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장자는 이것을 보고 ‘까치가 이익을 보고 참을 잊었다(見利而忘眞)’ 하였다. 참을 잊은 까치는 여기에서 유래
하였다.
30) 진(晉)나라의 온교(温嶠)가 우저(牛渚)를 지나다가 깊은 물속에 기괴한 물건들이 있을것이라 하여 서각(犀角)
을 태워서 물에 비췄더니 기괴한 수족(水族)들이 보이는데 혹은 붉은 옷을 입고 말과 수레를 탄 것도 보였다.
꿈에 수신(水神)이 나타나서 “남의 비밀을 비추어 보는 것은 좋지 못하다.” 하였다.
진서(晉書) 권7 「온교전(溫嶠傳)」
31) 영서(靈犀)는 영검이 있는 무소 뿔을 말한다. 무소의 뿔은 한 가닥의 흰 줄이 밑에서부터 끝에까지 통하므로,
이를 피차의 마음이 무언 중에 통하는 것을 비유한다.
32) 염락(濂洛)은 북송(北宋) 성리학(性理學)의 선구자인 주돈이(周敦頤)가 살던 곳인 염계(濂溪)와 그 제자인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살던 곳인 낙양(洛陽)의 병칭이다.
33) 택반(澤畔)은 전국 시대 촉(蜀)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회왕(懷王)에게 추방을 당한후, 못가[澤畔]에서
행음(行吟)하던 일을 말하는데, 그가 지은 어부사(漁父辭)에 자세히 보인다.
여기서는 회재가 1547년(명종, 2)에 윤원형(尹元衡)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에 유배되어 만년을 보내면서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봉선잡의(奉先雜儀) 등 중요한 저술을 남긴 것을 말한다.
34) 산간(山簡)은 진(晉)나라 때 술을 몹시 좋아하였던 사람이다. 산간이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양양(襄陽)에
있을 때 경치가 좋은 습씨(習氏)의 못을 고양지(高陽池)라 이름하고 날마다 그곳으로 가서 노닐며 흠뻑 취해서
돌아왔기에 당시 아동들이 노래하기를 “산공은 어디로 가는가? 고양지로 가는 게지. 해 저물녘 말에 거꾸로 실려
돌아오나니 술에 흠뻑 취해서 아무 것도 모르네(山公出何許往至高陽池日夕倒載歸酩酊無所知).” 하였다.
35) 삼공(三公)은 의정부(議政府)의 영의정(領議政)이나 좌 · 우의정과 같은 높은 벼슬을 말한다. “삼공의 벼슬도
기꺼이 바꾸어 오리라”는 육의당(六宜堂)이 아늑하고 경치가 좋아 높은 벼슬과도 바꿀 정도라는 뜻이다.
36) 세설신어(世說新語) 「용지(容止)」에 “진(晉)나라 혜강(嵇康)의 자태가 마치 외로운 소나무가 홀로 선 것
처럼 빼어나 그가 술이 취해서 넘어지면 옥으로 된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라고 하였고 이백(李白)의 양양가
(襄陽歌)에 “옥산(玉山)이 절로 거꾸러지는 것이지 남이 민 게 아니라네(玉山自倒非人推).” 하였다.
고문진보(古文眞寶) 전집(前集)
37)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토산(土産)」
38) 파사왕(婆娑王) 12년은 신묘(辛卯)이다.
39) 이인로(李仁老, 1152~1220)는 고려 명종 때의 학자로 자는 미수(眉叟), 호는 쌍명재(雙明齋)이다.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우간의대부를 지냈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저서에 은대집(銀臺集),
쌍명재집, 파한집(破閑集)이 있다.
40) 곡령(鵠嶺)은 개성(開城)에 있는 송악산(松嶽山)의 별칭이다. 신라 말기에 최치원(崔致遠)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일어날 것을 예측하여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글을 보내기를, “계림의 누른 잎이요 곡령의 푸른 솔이라
(雞林黃葉鵠嶺靑松).” 하였다.
41) 태아(太阿)는 보검(寶劍)의 이름이다.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상소(上疏)에, “태아를 거꾸로 쥐고서 칼자루
를 남의 손에 쥐어 주었다.”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임금이 정권(政權)을 남에게 맡긴 데 비유한 말이다.
42) 진(秦)나라의 환관 출신 승상인 조고(趙高)가 신하들의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이세 황제에게 사슴을 말이
라고 속여 바친 일에서 유래하여, 윗사람을 농락하면서 위세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사기(史記) 권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43) 옥수화(玉樹花)는 남조(南朝) 진(陳)나라의 후주(後主)가 지어 불렀다는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를 가리
킨다. 이는 모두 후주가 총애하던 장귀비(張貴妃)와 공귀빈(孔貴嬪)의 미색을 찬미한 내용이라 한다.
후주가 이 노래를 부르며 놀다가 수(隋)나라의 침공을 받고 경양궁(景陽宮)의 우물 속에 숨었다가 수나라 군사
에게 사로잡혔다. 그래서 이 노래를 망국의 노래라 한다. 이백(李白)의 금릉가(金陵歌)에 “천자가 경양궁의 우물
에 빠졌으니 그 누가 옥수후정화를 부르랴(天子龍沈景陽井誰歌玉樹後庭花).” 하였다.
44)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변하(汴河)에 행궁(行宮)을 짓고 강 언덕에 버들을 많이 심어서 음란하게 놀아,
나라가 망한 뒤에 버들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45)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성곽(城郭)」과「고적(古跡)」
46)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관방(關防)」
47)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봉수(烽燧)」
48) 시선(詩仙)은 이백(李白)을 가리킨다. 그의 춘야낙성문적(春夜洛城聞笛)에 “그 누가 몰래 옥피리를 불어서,
그 소리 봄바람에 흩어 넣어 낙양성에 가득하게 하나. 이 밤 곡조 속에 절양류 소리 들리니, 그 누군들 고향 생각
아니 일어날손가(誰家玉笛暗飛聲散入春風滿洛城此夜曲中聞折柳何人不起故園情).” 하였다.
49) 오산(鰲山)은 동해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산이다.
50) 마정(馬井)은 양산(楊山) 기슭의 나정(蘿井)을 말한다. 나정 곁 숲 사이에 백마가 꿇어앉아 절을 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살펴보니 자주 빛이 도는큰 알 하나가 있었다. 말이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육부(六部)의 사람들이 그 태어남이 신이(神異)하다고 하여 임금으로 세우니 이가 바로 혁거세왕(赫居世王)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
51) 어정(魚亭)은 포석정(鮑石亭)을 말한다. 포석정의 돌에 포어(鮑魚)를 새겨 놓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경애왕(景哀王)이 포석정에 나가 놀 적에 견훤(甄萱)의 병사가 갑자기 도성에 들이 닥쳤다. 이에 왕이 부인과
함께 성 남쪽의 이궁(離宮)으로 달아나 숨었는데, 견훤이 병사를 풀어 왕을 찾아 자진하도록 겁박하고 억지로
왕비를 욕보였다.
52) 삼성(三姓)은 신라(新羅) 때 왕위에 올랐던 박씨(朴氏), 석씨(昔氏), 김씨(金氏)를 말한다.
53) 구성(九聖)은 속설에 신라 때 아홉 명의 성인이라고 한다. 이들이 노닐던 곳이 구성대(九聖臺)인데,
금오산에 있다.
54) 칠애(七哀)는 위진(魏晉)시대 악부(樂府)의 일종인 시 제목이다. 위(魏)나라의 왕찬(王粲)과 조식(曹植),
진(晉)나라 장대(張戴) 등이 칠애시(七哀詩)를 지었는데 사회의 동란을 반영하고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오언시
(五言詩)이다. 당(唐)나라 여향(呂向)은 조식의 칠애시 주에서 “칠애는 아파서 슬프고, 의리상 슬프고, 느꺼워
슬프고, 원망스러워 슬프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슬프고, 입으로 탄식하여 슬프고, 코가 시어서 슬픈 것
이다.”라고 하였다.
55) 주(周)나라는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쳐서 이기고 천하를 빼앗았지만 얼마 안 있다가 죽고 그 아들 성왕
(成王) 때에 그의 숙부인 주공(周公)이 모든 체제를 갖추었으므로성주(成周)라고 부른다.
56) 향삼물(鄕三物)의 첫째는 육덕(六德)이니, 지(知) ․ 인(仁) ․ 성(聖) ․ 의(義) ․ 충(忠) ․ 화(和)이고,
둘째는 육행(六行)이니, 효(孝) ․ 우(友) ․ 목(睦) ․ 인(婣) ․ 임(任) ․ 휼(恤)이고,
셋째는 육예(六藝)이니, 예(禮) ․ 악(樂) ․ 사(射) ․ 어(御) ․ 서(書) ․ 수(數)이다. 주례(周禮) 「지관(地官)」
사도(司徒)
57) 원문에 사시기균(射矢旣均)으로 되어 있으나 시경 「행위편(行葦篇)」에는 사시기균(射矢旣均)의 사자
(射字)가 사자(舍字)로 되어 있다.
58) 예기(禮記) 사의(射義)에 “활을 쏘는 것은 성덕을 관찰하기 위함이다(射者所以觀盛德也).” 한 데서 온
말이다.
59) 간성(干城)은 방패와 성이라는 뜻으로,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사람을 가리킨다.시경「토저편(兎罝篇)」
에 “굳세고 굳센 무부여, 공후의 간성이로다.(赳赳武夫여 公侯干城)” 하였다.
60) 조아(爪牙)는 맹수의 발톱과 이빨로 힘과 위엄이 있는 용사(勇士)를 이른다. 시경 「기보편(祈父篇)」에
“기보야, 나는 왕의 발톱과 이빨인데, 어찌하여 나를 근심에 전전하여, 머물러 살 곳이 없게 하는고(祈父予王之
爪士胡轉予于恤靡所止居)” 하였다.
61) 육사(六師)는 육군(六軍)과 같은 말로, 1군은 1만 2500명이다. 고대에 천자국은 6군이고 제후국의 대국은
3군이었다.
62) 선공(旋公)은 승려(僧呂) 조의선(趙義旋)을 가리키는데, 순암(順菴)으로 많이 알려졌다.가정집(稼亭集)
권3 ‘조정숙공사당기(趙貞肅公祠堂記)’에 “특사정혜원통지견무애삼장법사(特賜定慧圓通知見無礙三藏法師)
주천원연성사(住天源延聖寺) 겸주본국영원사(兼住本國塋原寺) 복국우세정명보조현오대선사(福國祐世靜明普照
玄悟大禪師) 삼중대광(三重大匡) 자은군(慈恩君)”이라는 그의 명호가 소개되어 있다.
63) 홍벽(紅壁) 사롱(紗籠)은 붉은 칠을 한 벽 위에 푸른 깁으로 장식해 놓은 시문이라는 뜻이다.
당(唐)나라의 시인 허혼(許渾)의 ‘재유고소옥지관(再游姑蘇玉芝觀)’ 시에 “달빛어린 푸른 창은 오늘 밤의 술자리요,
비 자욱했던 붉은 벽엔 거년의 글씨로다(月過碧窓今夜酒雨昏紅壁去年書).”라는 구절이 있다.
64) 은구(銀鉤)와 옥저(玉筯)는 초서(草書)와 전서(篆書) 등의 멋진 필법으로 써넣은 글씨를 말한다.
진(晉)나라 색정(索靖)이 서법을 논하면서 “멋지게 휘돌아가는 은빛갈고리[婉若銀鉤]”라는 표현으로 초서를
형용하였다. 진서(晉書) 권60 「색정전(索靖傳)」옥저는 진(秦)나라 이사(李斯)가 창안한 소전(小篆)의 서체를
말한다.
65) 철령(鐵嶺)이다.
66) 국도(國島)는 고성(固城) 위에 위치한 안변(安邊) 앞 바다의 작은 섬 이름이다.
67) 총석정(叢石亭)의 옛 비갈(碑碣)은 사선봉(四仙峯) 동쪽 봉우리 위에 비면(碑面)이 떨어져 나가고 닳아 없어진
채 남아 있는 비갈을 말한다. 가정집 권6 동유록(東遊錄)에상세한 내용이 보인다.
68) 삼일포(三日浦)의 단서(丹書) 여섯 글자는 신라 시대의 이른바 사선(四仙)이 사흘 동안머물며 노닐었다는
곳의 석벽(石壁)에 새겨진 “술랑도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라는 붉은색의 여섯 글자를 말하는데, 사선의 이름과
관련하여 이 비문의 해석이 다양하여 아직정설이 없다.
69) 사마자장(司馬子長)에서 자장(子長)은 사마천(司馬遷)의 자이다. 사마천은 유람을 좋아하여 남북으로 천하의
산천을 다니면서 호한(浩瀚)한 기운을 얻어 이를 문장으로 발휘하여 사기(史記)를 지었다 한다.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後集) 상추밀한태위서(上樞密韓太尉書)
70) 전왕(錢王)은 오월왕 전숙(錢俶)을 말한다. 송(宋)나라가 중원을 차지한 뒤에 아직 통일되지 않은 다른 나라를
차례로 평정하자 전숙은 토벌 당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항복하였다.
71) 가정(稼亭)은 이곡(李穀)의 호이다.
72) 첨유계극(幨帷棨戟)은 관찰사를 말한다. 첨유는 장막이고 계극(棨戟)은 창으로, 관찰사가 관내를 순행할 때에
앞에 세우고 뒤에 따르게 하는 물건들이다.
73) 목은(牧隱)은 이색(李穡)의 호이다.
74) 오사모(烏紗帽)는 벼슬아치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관모(官帽)이다.
75) 고운(孤雲)은 최치원(崔致遠)의 호이다.
76) 왕찬(王粲)은 삼국 시대(三國時代)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이다. 그가 형주 자사(荊州刺史)인 유표
(劉表)의 식객으로 있을 때 성루(城樓)에 올라 울울한 마음으로 고향을 생각하며 지은 작품이 등루부(登樓賻)
이다.
77) 이견대(利見臺)는 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오(九五)에,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 봄이 이롭다
(飛龍在天利見大人).” 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78) 예정우개(霓旌羽蓋)는 무지개같이 찬란한 깃발과 좋은 깃으로 만든 일산으로 임금이 쓰는 물건이다.
여기서는 신문왕(神文王)을 가리킨다.
79)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누정(樓亭)」
80) 안회(顔回)를 말한다.
81) 자사(子思)를 말한다.
82) 증삼(曾參)를 말한다.
83) 맹가(孟軻)를 말한다.
8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도(京都)」상(上) 「단묘」조에는 영양백(榮陽伯)으로 되어있
으나 오례통고(五禮通考) 「길례(吉禮)」와 세종오례(世宗五禮) 「길례서례(吉禮序例)」에는 형양백
(滎陽伯)으로 나와있다.
85) 정호(程顥)의 시 ‘춘일우성(春日偶成)’에 “구름 엷고 바람 솔솔 한낮이 가까울 제, 꽃과 버들 완상하며 앞
냇가로 나가네. 사람들은 내 마음 즐거움을 알지 못하고, 장차 한가함 탐하는 배우는 소년이라 하리(雲淡風輕近
午天傍花隨柳過前川時人不識余心樂將謂偸閑學少年).” 하였다.
86) 우가(虞家)는 유우씨(有虞氏)인 순(舜) 임금으로 “우가(虞家)의 몇 마디 말”은 순 임금이 우왕(禹王)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주려 하면서 경계한 말을 가리킨다. 서경(書經)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
은 미묘하니, 오직 정밀하게 살피고 오직 전일하게 지켜야 진실로 중도(中道)를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道心惟微
惟精惟一允執厥中).” 하였다.
87) 일유삼호(一唯參乎)에서 삼(參)은 공자의 제자인 증삼(曾參)을 말한다. 논어(論語)「이인(里仁)」에
“공자가 말하기를, ‘삼아! 우리의 도는 한 가지 이(理)가 만 가지 일을 꿰뚫고 있다.’ 하니, 증자가 ‘예’ 하고 대답
하였다(參乎吾道一以貫之曾子曰唯).” 하였다.
88) 공자가 제자 안연(顔淵)을 두고 “어질도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거리에 사는
것을 남들은 그 곤궁한 근심을 견디지 못하거늘, 안회는 도를 즐기는 마음을 변치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
(賢哉回也一簞食一瓢飮在陋巷人不堪其憂
89) 광풍(光風)은 광풍제월(光風霽月)의 준말로 비가 온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말한다.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周敦頤)의 쇄락(灑落)한 인품을 형용하여 광풍제월과 같다고 하였다.
염락풍아(濂洛風雅) 권1 육선생화상찬(六先生畵像贊)
90) 추월(秋月)은 빙호추월(氷壺秋月)의 준말로 얼음으로 만든 호리병에 맑은 가을달이 비친것과 같이 티 없이
고결한 정신을 뜻한다. 주자(朱子)의 스승인 연평(延平) 이통(李侗)의 인품을 형용한 말이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87 제연평이선생문(祭延平李先生文)
91) 기자(箕子)가 주(周)나라로 조회하러 가는 길에 은(殷)나라 도성 터를 지나노라니 궁궐은 폐허가 되고 그
자리에 벼와 가장이 무성히 자란 것을 보고 슬퍼하여 이른바 맥수지가(麥秀之歌)란 노래를 지었다. 그 가사에
“보리 이삭은 이미 자랐고 벼와 기장도 무성하구나. 저 교활한 아이놈[紂王]은 어찌 나의 충고를 듣지 않았던고
(麥秀漸漸兮禾黍油油彼狡童兮不與我好兮)” 하였는데, 은나라 유민(遺民)들이 이 노래를 듣고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다. 사기(史記) 권3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92) 시경 「대아(大雅)」문왕편(文王篇)에 “제제히 많은 선비여, 문왕이 이들 때문에 편안하도다(濟濟多士文
王以寧).” 하였다.
93) 서경(書經) 「필명(畢命)」에 주(周)나라 강왕(康王)이 필공(畢公)에게 내린 책명(冊命)에 “선한 이는
정려(旌閭)로 표창하고 악한 이는 가려내라(旌別淑慝).” 라고 하였다.
94) 추로(鄒魯)는 맹자(孟子)의 출생지인 추나라와 공자(孔子)의 출생지인 노나라를 말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유학 또는 문교가 흥성한 곳을 말한다.
95) 분섬(分陝)은 섬서성 섬현(陝縣)을 분계로 삼아 다스린다는 뜻이다. 주(周)나라 초기에 주공 단(周公旦)과
소공 석(召公奭)이 섬현을 분계로 삼아서 주공은 섬현의 이동 지방을 다스리고 소공은 섬현의 이서 지방을 다스
렸다. 후세에는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데에 비유한다.
96) 문옹(文翁)은 한(漢)나라 경제(景帝)때 여강(廬江)사람이다. 촉(蜀) 땅의 군수가 되자 성도(成都)의 시장
가운데에 학관(學官)을 설치하여 입학자는 요역을 면제하고 성적이 우수한 자는 군현의 관리로 삼았다.
이에 촉군(蜀郡)에 문풍이 크게 진작되고 교화가 크게 행해졌다고 한다.
한서(漢書) 권89 「순리전(循吏傳)」문옹(文翁)
97) 중자(中子)는 수(隋)나라 용문(龍門) 사람인 왕통(王通)으로 자는 중엄(仲淹)이다. 어려서부터 독학하였고,
일찍이 장안(長安)에 노닐면서 태평(太平)에 대한 십이책(十二策)을 진달하였으나, 그 계책이 쓰이지 못할 것을
알고 하분(河分)에 물러나 살면서 사람을 교수하여 수업한 자가 1000명이나 되었다. 자주 부름을 받았으나 나
가지 않았다. 그가 죽자 문인들이 사시(私諡)하여 ‘문중자(文中子)’라고 일컬었다.
98) 서산(西山)은 남송(南宋)의 학자로 심경(心經)의 저자인 진덕수(眞德秀)를 가리킨다. 그는 주자(朱子)
를 학문의 종주로 삼으면서 이학(理學)을 계승하였으므로 소주자(小朱子)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99) 서악서원(西岳書院)의 서재(西齋)가 성경재(誠敬齋)이고 서하재(西下齋)가 조설재(澡雪齋)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100) 청금(靑衿)은 청색으로 깃을 두른 선비의 복장, 또는 선비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시경 「정풍(鄭風)」
자금편(子衿篇)에 “푸르고 푸른 그대의 옷깃이여(靑靑子衿).”라고한 말에서 유래한다.
101) 논어(論語) 「선진(先進)」에서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하라는 공자의 명에 슬(瑟)을
울리다 말고, “늦은 봄날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沂水)에 목욕
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돌아오겠다(莫春者春服旣成冠者五六人童者六七人浴乎沂風乎
舞雩詠而歸).” 하였다. 여기서는 서악서원의 전루(前樓)가 영귀루(詠歸樓)이기 때문에 이 렇게 말한 것이다.
102) 청아(菁莪)는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인 청청자아(菁菁者莪)의 준말로, 그 내용은 인재 교육을 찬미
하는 것이다.
103) 귀옹(龜翁)은 서악서원을 세운 귀암(龜巖) 이정(李楨)을 말한다.
104) 주역(周易) 「곤괘(坤卦)」문언(文言)에 “군자는 경으로 내면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면을 바르게 한다
(君子敬以直內義以方外).” 한다고 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105) 무변(無邊)은 주자(朱子)가 육선생화상찬(六先生畵像贊)에서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인품과 기상이
쇄락(灑落)함을 기려서 “맑은 바람 밝은 달은 끝없이 펼쳐지고, 뜰 가운데의 풀은 무성히 푸르렀네(風月無邊庭
草交翠).”라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106) 송(宋)나라의 학자 소옹(邵雍)의 ‘월도오동상음(月到梧桐上吟)’에 “달은 오동나무 위에 이르고, 바람은
버드나무 가로 불어오네. 서재가 깊숙하고 사람도 없어 조용하니, 이 경치 누구와 함께 말하겠나(月到梧桐上風
來楊柳邊院深人復靜此景共誰言).”라고 하였는데, 이는 성인(聖人)의 마음이 하늘의 달빛처럼 깨끗하고 봄바람
처럼 온화함을 비유한것이라 한다.
107) 소옹의 ‘청야음(淸夜吟)’에 “달이 하늘 중심에 이르고 바람이 수면에 불어올 때 일종의 맑은 의미를 짐작
건대 아는 이 적으리(月到天心處風來水面時一般淸意味料得少人知).”하였다.
108) 권근(權近)이다.
109) 판본에는 “予”로 되어 있다.
110)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역원(驛院)」
111)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교량(橋梁)」
112)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사묘(祠廟)」
113) 이만(二曼)은 선덕여왕(善德女王)과 진덕여왕(眞德女王)을 가리킨다.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진덕여왕의 이름은 승만(勝曼)이다.
114) 가성(佳城)은 무덤을 뜻한다. 한(漢)나라 등공(滕公)이 말을 타고 가다가 동도문(東都門) 밖에 이르자 말이
울면서 앞으로 나가지 않은 채 발로 오랫동안 땅을 구르기에, 사졸(士卒)을 시켜 땅을 파 보니 깊이 석 자쯤 들
어간 곳에 석곽(石槨)이 있고, 거기에“가성(佳城)이 울울(鬱鬱)하니, 삼천년 만에야 해를 보도다. 아아! 등공이여
이 실(室)에 거처하리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한다. 서경잡기(西京雜記) 권4
115)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능묘(陵墓)」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