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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 명상록에 대한 독자의 비판글을 보고 답변올린 것을 여기 제시해 봅니다!
우연히도 저의 책에 대한 독자의 비판글을 'yes 24'라는 곳에서 발견을 하였습니다.
저자의 입장에서 독자가 오해하는 것에 대해서 친절하게 답변을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되어
저도 답글을 적었습니다. 그 답글을 여기 올려 봅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있으시면 답글로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독자의 비판 글=
이 책을 읽으려 마음을 먹은 것은 ‘눈물’, 그것도 ‘성인들의 눈물’때문이었습니다. 성인들께서 흘리시는 눈물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다는 이야기인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제목 앞에 붙여둔 ‘종교철학의 명상록’이라는 전제의 의미를 알았더라면 책읽기를 머뭇거렸을 수도 있습니다. 저자가 서문에서 인간적인 삶 안에서 ‘종교적인 것과 관련된’ 혹은 ‘종교적 지평에서 본’ 인간현상들을 해명하고 그 원리들을 설명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종교철학의 명상이라고 정의하였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저자는 이 책에서 제시되는 명상들은 그리스도교의 사상이 배경이 되고 있다는 점을 전제하면서도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해명하거나 그 세계관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그리스도교 신앙인만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의 근본이라 할 천지창조의 개념을 확고히 하고, 지금까지 과학적으로 규명된 사실에 대하여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공고히 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책은 모두 24개의 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책의 기획의도라 할 수 있는 명상에 관하여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장들은 대부분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검토되고 있는 화두들이라고 보았습니다. 저자는 ‘명상한다는 것’은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카오스 같은 인생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명상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시간에 대한 명상은 인생의 신비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하였습니다.
세계와 존재들의 아름다움이 신의 현존의 특성이라고 이해한다는 것은 곧 아름다움이 인간과 신 사이의 매개체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아주 주관적인 것입니다. 누구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라도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아름다움이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그리스도교적 교리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인들 말고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논리라고 보입니다.
수학이나 과학을 형이상학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형이상학은 철학적 개념이지 과학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인 것을 과학은 설명할 수 없다는 것도, 과학의 입장에서는 아직까지 초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론이 등장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판단을 유보하는 것 뿐입니다. 신이나 초월적 존재에 대하여 과학자와 철학자의 인식에 차이가 있는 것을 과학자의 잘못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접근법이라는 생각입니다. 차이를 인정할 필요와 이유는 분명히 있다고 할 것입니다.
저자는 신비가나 성인의 실존을 ‘눈물’이라는 문학적 표현을 끌어와 설명합니다. 문학적 표현을 빌리지 않고서는 결코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라는 이유입니다. 신비가나 성인에게는 네 종류의 눈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눈물은 너무나 극명한 세상의 비극과 슬픔을 보면서 자신이 이 비극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에 있고, 두 번째 눈물을 세상 사람들이 부도덕한 만큼이나 신의 자녀들이 진정으로 신의 뜻을 추구하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고 합니다. 세 번째 눈물은 보다 신의 음성이 분명할수록, 신성한 명령을 이행할 내적인 힘이 부족하다고 느끼는데 있으며, 마지막 눈물은 신의 현존이 자신을 가득 채울 때, 이 모든 고뇌들이 해결되고 있음을 느끼면서 흘리는 감사의 눈물이라고 합니다.
제가 신에 대한 앎이 부족한 탓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듯합니다. 신의 현존은 믿음을 근본으로 하여 증명한다고 하는 것도 옳은 접근방식인가에 대하여도 아직 확실한 바가 없습니다. 명상이 반드시 종교에 기반한 것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 듯합니다. 삶에 대하여 혹은 생에 대하여 명상을 하고 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은 굳이 종교에 몸을 담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 독자의 비판글에 대한 저자의 답변
※ 저자의 입장에서 어떤 독자가 저의 책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을 때. 특히 그것이 오해하거나 잘못된 이해에 비롯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답변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내용을 비판하고자 할 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구체적인 구절이나 문구를 말해주는 인용구를 제시하고, 이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이 올바른 비판의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독자는 전혀 저의 책에 대한 ‘구체적인 인용구’를 제시하지 않아서 다분히 일방적이고 오해의 소지를 가지고 비판하고 있는 듯합니다. 즉 독자가 막연히 이해하는 내용을 가지고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구체적인 인용구를 제시하는 것이 없어서, 저 역시 이 책을 쓴 기본적인 입장에서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① “(독자의 주장) 천지창조의 개념을 확고히 하고 (...)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그리스도교적 교리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인들 말고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논리라고 보입니다.”
⇒ 이 세계가 존재하는 데 있어서 처음 시작이 있거나, 없거나 하겠지요. 그런데 ‘질서’를 가지기 위해서는, 시작점이 있다는 것이 정상적이겠지요. 아니면 질서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따라서 시작점이 있다면 저절로 생겼거나 누군가 만든 이가 있겠죠. 둘 중 하나일 것인데 종교적 관점에서 ‘만든이가 있다’라는 것이고, 과학적 관점에서는 ‘빅뱅’일 것이죠. 따라서 ‘세계는 창조되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질서’를 추구하는 이 책에서는 논리적 귀결이지, 크게 문제가 되는 사항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세계의 종교 인구가 80%에 육박하고 그 중 그리스도교는 약 30%가 됩니다. 종교 중에서 ‘세상이 창조되었다’라고 믿는 종교는 반 이상은 되겠지요. 중국 신화에도 창조 설화가 있고, 이집트 고대 종교에서도 창조설이 있지요. 이슬람도 창조론을 믿고 있습니다. 전통적이거나 현대적이거나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인이 아니겠지요. 독자는 너무 주관적인 자신의 판단만으로 비판하는 듯합니다.
② “(독자의 이해) 지금까지 과학적으로 규명된 사실에 대하여는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공고히 하고”에 대해
⇒ 어디에서 이러한 내용을 이해하셨는지요. 이 책의 기본 입장은 과학은 물리적, 현상학적 입장에서 많은 진리들을 알려주고 있지만, 그러나 최종적인 목적이나, 형이상학적인 차원에 도달할 수 없기에 단적으로 ‘진리’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뉘앙스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오해라고 보입니다. 아니면 이런 비판은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③ “(독자의 관점) 사실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아주 주관적인 것입니다.”에 대해
⇒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주장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차원이 높을수록 주관적인 특성을 가진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먼저 보편적(일반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형수술을 왜 하며, 자동차나 집을 살 때 왜 ‘디자인’을 고려하는 것일까요? 추함이 있으면, 아름다움도 있겠지요.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질서를 가지기 때문이겠지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코가 비뚤어졌거나 눈이 하나 없어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닐 수 있을까요? ‘아름다움은 주관적인 것이다’라는 말은 사실 현대 이후 ‘상대주의자’나 ‘물질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생각이라 여겨 집니다.
④ “(독자의 주장) 아름다움이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에 대해
⇒ 아름다움이 신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이 이 책의 입장이 아닙니다. 자연과 세계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참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그 아름다움의 근원을 생각할 수 있겠지요.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의 ‘이 아름다움’이 어디서 왔을까?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면, “그 근원은 곧 ‘신’일 것이다”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죠. 물론 그 근원이 불성이거나 알라이거나 빅뱅이라고 생각해도 틀린 것은 아니겠지요. 명상에 맞고 틀린 것은 없겠지요. 모두가 가능한 생각이고, 또 저자가 신일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것은 저자의 생각으로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⑤ “(독자의 주장) 수학이나 과학을 형이상학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형이상학은 철학적 개념이지 과학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인 것을 과학은 설명할 수 없다는 것도, 과학의 입장에서는 아직까지 초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론이 등장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판단을 유보하는 것 뿐입니다.”에 대해
⇒ 이 책에서는 수학이나 과학을 형이상학이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세계를 수학적으로만 고려할 때, 형이상학적이 되는 것이죠. 과학도 ‘세계의 원인(예를 들어 빅뱅)’을 진리처럼 믿게 되면 그것이 곧 형이상학이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무엇이건 근원, 최초 원인, 궁극목적 등을 추구하면 그것이 형이상학입니다. 초자연적인 것이 말 그대로 ‘자연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그것은 과학의 영역 바깥입니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란 ‘실증학문’ 즉 실제로 감각 할 수 있거나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을 다루는 학문이니까요! 형이상학은 근본적으로 과학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시작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형이상학이나 과학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모호한 개념을 지니고 있으니 이러한 생각을 하신 듯합니다.
⑥ “(독자의 주장) 신이나 초월적 존재에 대하여 과학자와 철학자의 인식에 차이가 있는 것을 과학자의 잘못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접근법이라는 생각입니다. 차이를 인정할 필요와 이유는 분명히 있다고 할 것입니다.”
⇒ 이 책에서 신에 관한 생각에 대해서 누구의 잘못이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에 관한 생각은 누구나 어떻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과학자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게 되면, 이는 “이미 과학의 지평을 넘어서는 주장”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 책의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최초의 근원이나 궁극적인 목적이나 이러한 것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학자가 빅뱅을 발견했다고 해도, 과학은 그것이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추정할 뿐이고, 언제든 부정될 수 있는 것이 과학의 관점이지요. 일체의 ‘반론 가능성’을 부정하면 그것은 이미 과학이 아니지요. 과학자가 개인적으로 신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그것은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과학이 신을 있다, 없다 추정은 할 수 있으되, 강하게 주장할 할 수는 없겠지요.
⑦ “(독자의 견해) 저자는 신비가나 성인의 실존을 ‘눈물’이라는 문학적 표현을 끌어와 설명합니다. 문학적 표현을 빌리지 않고서는 결코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라는 이유입니다.”
⇒ 어디에서 이러한 표현을 발견하였는지요. 이 책에서 ‘성인들의 눈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시적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일반인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성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현대 사회가 너무나 비참하다는 것이며, 고통과 한숨이 너무나 많아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⑧ 성인들의 4가지 눈물을 언급한 뒤 “(독자의 생각) 제가 신에 대한 앎이 부족한 탓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듯합니다. 신의 현존은 믿음을 근본으로 하여 증명한다고 하는 것도 옳은 접근방식인가에 대하여도 아직 확실한 바가 없습니다.”라는 생각에 대해
⇒ 현대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증명할 수 있는 신은 이미 진정한 신이 아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증명이란 논증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논증은 이성의 논리적인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지요. 중세 철학자들이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한 것은, 이를 통해 인간의 지성을 초월적인 것에까지 확대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겠지요. 진정한 신은 체험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됩니다. 믿음으로 신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현존을 체험하게 되면 ‘신의 존재’나 ‘신의 섭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겠지요.
⑨ “(독자의 생각) 명상이 반드시 종교에 기반한 것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 듯합니다. 삶에 대하여 혹은 생에 대하여 명상을 하고 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은 굳이 종교에 몸을 담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명상은 하나의 방법론이지 어떤 특정한 범주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추론이 과학이나 철학 나아가 신학에서도 필요한 학문의 방법이듯이 명상도 삶을 이해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한 방법론이지요. 이 책은 ‘종교철학 명상록’입니다. 즉 종교에 대해 철학적으로 다룰 때,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인데, 그중에도 ‘명상’이라는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명상이라는 방법으로 종교나 종교적 삶에 관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심지어 ‘과학적 명상록’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자께서는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진실인가 하는 이원론적인 사유에 너무 집착하고 있으며, 아직 종교를 접해보지 않아서 지나치게 종교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고 있는 듯 합니다. 우선적으로 종교라는 것도, 과학, 문학, 예술 등과 같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문화이다라고 생각하시면 좋은 듯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종교에 대해 생각하시려면 우선 최소한의 종교적인 체험이란 것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