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잠잠하게 하심
마가복음 4장 39-40절『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표면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에서 창조주였으나,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권능을 부여받고, 자연을 통제하는 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글에서 영적인 의미를 생각해야만 한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큰 놀이 일어나는 이유는 바람 때문이다. 바람은 성령을 의미한다. 바람 때문에 파도가 일어났다. 그래서 큰 파도가 배를 덮치게 되었다. 배 안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었다. 배는 방주다. 방주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있다. 바다는 율법을 나타낸다. 바다에 큰 물결이 일어났다는 말은 율법 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므로, 사람들이 파도에 의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깨우게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여기서『어찌하여』라는 말은『어떤 것들을』이라는 말이다. 비록 제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오랫동안 율법 속에서 지내왔던 것 때문에,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마음이 그들을 두렵게 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이『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여기서『꾸짖다』라는 말은『에피티마오』라는 말인데, 전치사 에피(~에)와 동사 티마오(가격을 정하다, 비난하다)가 합성된 말이다. 스가랴 11장 10-13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세운 언약(율법)을 폐하기 위해 은총(새언약:그리스도)이라는 막대기를 잘라서, 언약을 폐했는데, 청중(가련한 양들)이 듣고 좋게여겨서 값(은 30)을 쳐주었다. 이 때 값을 쳐준다는 말이『티마오』라는 단어다. 가롯 유다가 예수를 은 30에 제사장에게 팔았다. 여기에서『에피티마오』라는 말은 청중이 은 30에 값을 매긴 바로 그 인자(구세주)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구세주가 바람과 바다에 드러났다는 것을 말해주신다. 예수님이 오셨으므로 바람과 바다가 잠잠해지는 것이다.
마태복음 14장 25-32절『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성경이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이유는 베드로(유대인)가 예수님을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율법이 그들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율법 속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결국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베드로를 발견하게 된다. 율법을 다시 바라보므로서 율법 속에서 두려워하는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바라보면 율법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데, 자신의 힘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베드로가 세번 부인한 것과 같은 이야기가 된다. 십자가에서 죽는 에수를 바라보지 않고, 예수와 연합되지 않는다면, 결국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결과가 된다는 말씀이다. 베드로가 구한 것은 십자가의 예수가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였으며, 여전히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그런 율법주의적 사람이었다.
베드로는 그 날 오병이어의 떡을 먹었다. 그리고 물 위에 주님이 서 있는 것을 보고,『주여 만일 주님이라면 나를 명령하여 오라고 하소서』라고 말했다.『주여』라고 하지만『만일 주님이라면』이라고 조건을 달았다. 믿음은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께 드리는 것이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예수님이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지시고『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믿음은 에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믿음이 되어야만 한다.
이 말씀과『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베드로가 추구한 것은 기적의 예수였다. 그리고 병을 치유받고자 하는 자의 간절한 마음도 치유다. 구원받지 못하는 자는 기적과 같은 믿음의 결과 만을 추구한다. 오직 천국가는 것만을 추구한다. 예수가 목적이 아니라 예수가 방법이 된다. 예수가 목적이 되는 자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지만, 예수가 방법이 되는 사람은 예수의 죽으심을 의지하여 구원받으려고 만 한다.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을 붙잡는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되는 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