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 소태면 덕은리 산골에서 어현중의 무남독녀로 출생. 아버지는 전통 선비 출신으로 어윤희가 9살 되면서부터 한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특히 "言忠信 行篤敬"(말은 충성되고 미쁘게 하며 행실은 착실하고 남을 공경하라)이란 글귀를 강조하여 이것이 어윤희 일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6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낯모르는 남자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결혼한 지 3일 만에 동학군이 되어 집을 나갔고, 얼마 안 있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또한 2년 후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고향을 떠나 황해도 평산ㆍ해주 등지를 전전하다가 경기도 개성에 정착하였다.
나이 30세가 되던 1909년 우연히 개성북부교회 예배에 참석했다가 정춘수(鄭春洙)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한 어윤희는 스스로 신앙을 고백하여 1909년 6월 갬블(F.K. Gamble)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갬블의 추천으로 당시 주로 과부나 기생, 기혼 여성들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던 미리흠(美理欽)여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교육을 받았으며 1915년 3월에는 호수돈여숙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 그는 전도부인이 되어 개성 동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고, 1917년부터 토산(兎山)지역에 파송되어 주로 농어촌, 산간벽지의 교회들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벌였다. 어윤희는 1919년 개성에 있는 여자성경학원 사감으로 봉직하던 중 3.1운동을 겪었다. 만세운동을 맞이해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정춘수가 독립선언서를 개성북부교회 담임목사였던 강조원(姜助遠)에게 전달하였으나 그가 직접 처리하지 못하고, 호수돈여학교 졸업생이자 교회 유치원 교사로 있던 권애라(權愛羅)에게 전달했으며, 권애라는 호수돈여학교 상급생 최옥순(崔玉順)을 통해 어윤희에게 전달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박희도(朴熙道)의 밀명으로 서울에서 내려온 안병숙(安丙淑)은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을 포섭하고 서울에서 진행되는 독립선언식과 만세운동 계획을 알려주었고 이들 학생들은 어윤희를 찾아가 상의하여 어윤희를 중심으로 개성 만세시위가 일어나게 되었다. 드디어 3월 3일 오후 2시를 거사시간으로 잡고 그는 교회 청년들을 동원하여 독립선언서를 배부하였고,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로 개성의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어윤희는 군중을 제일선에서 이끌었다. 그날 저녁 어윤희는 식사하던 중에 일본 경찰에 연행되었고, 신관빈과 함께 경성지방법원 재판에 회부되어 "(독립)선언서 2천 매를 동(개성) 읍내 만월정ㆍ북본정ㆍ동본정의 각 거리에서 조선 독립선언서임을 알리면서 지나가는 조선인과 부근의 주민들에게 배부함으로써 모두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언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치안을 방해한 자들"이란 판결을 받고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았다. 어윤희는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 수감되어 유관순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계속적으로 투쟁하여 일본인 간수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을 전향시켰고, 옥중에서 전도하는 일과 1920년 3월 1일, 만세운동 1주년을 기념으로 옥중 만세시위를 벌였다.
만기 출옥한 후 그는 보다 조직적인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는데, 그 방법은 교회의 여성을 조직화하여 이를 통한 민족계몽과 교육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바로 감리교회의 여선교회였다. 1920년 남감리회 여선교회 전국연합회가 결성되었는데 이때 어윤희는 부회장으로 피선되었다. 한편 그의 집은 무장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 겸 연락처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개성경찰서 폭파를 목적으로 밀파된 세 청년을 집에 숨겨두었다가 발각되어 경찰에 잡혀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고, 몇 차례의 가택 수색을 당하기도 하였다. 1927년 여선교회에서 일본으로 파송하는 선교사로 결정되었지만 일본 당국에 의해 불온사상가로 낙인 찍혀 출국 길이 막히는 한편 그에게는 항상 일경의 감시와 통제가 따랐다.
1937년 어윤희는 개성 유지 한철호와 오기환의 도움을 얻어 고려정에 "유린보육원"이란 고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고아들을 돌보며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았다.
"저의 할머님은 저의 동무들의 할머니와 달라요. 안락의자에 앉아 계시지도 않으시고 방 안에 누우셔서 낮잠도 주무시지 않으시고 보육원 아이들과 함께 계시어 그들을 돌보아주십니다. 할머님은 밤에도 편히 주무시지도 못하시지요. 제일 작은 아이 9명을 한 방에 같이 데리고 쉬시면서 몇 번이고 일어나시어 아이들을 돌보아주십니다. 우리 할머님은 예수님 그대로라고 생각하였습니다."(《久遠의 횃불》, 중앙여자고등학교, 1971).
해방 후 그는 공산당을 피해 월남하여 서울 마포의 서강에 유린보육원을 재건하여 죽는 날까지 고아들을 돌보았다. 1952년 서강교회 장로로 피택되었고, 1953년 사회사업가로 보건사회부 장관의 공로표창을 받았으며 1959년 법무부장관에게서 인권옹호공로표창을 받았다. 1961년 11월 18일 유린보육원에서 8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그와 의남매로 지냈던 의료선교사 스코필드(F.W. Schofield)의 표현대로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이었던 그의 일생을 기념하기 위해 1962년 3월 1일 "장로 어윤희 여사 기념비" 건립식이 서강교회 마당에서 베풀어졌다. 그후 정부는 어여사의 애국 공로를 기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