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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
1. 불교미술
불교는, 인간이 스스로 진리를 깨닫는 것을 최고의 이상(理想)으로 삼는 종교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미술 같은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교가 일반 민중의 구제를 가장 큰 사명으로 삼는 이상, 그들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불교의 진리를 이해시켜야 한다. 민중들에게 불교의 심원(深遠)한 교리를 쉽게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시청각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고졸하고 숭고한 아름다움이든지 또는 우아하고 고상한 아름다움이든지 간에 어떤 식의 미를 형태로 조형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이를 통해 불교의 진리를 자연스럽게 터득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불교미술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불교미술의 출발은 재가 신자들의 신앙과 깊은 관계가 있다. 출가한 스님들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본받아 엄격한 계율 아래서 수행에 힘써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 때문에 부처님 열반 후 출가 수행자들은 조형미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재가 신자들은 석가모니부처님과 관계 있는 성스런 것을 예배하고 공양함으로써 공덕을 쌓고, 석가모니부처님의 세계에 가까이 가려 하였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석가모니부처님에 대한 숭배의 마음이 더 깊어져서 단순히 교주라기보다는 그를 신격화하는 데에 중점을 두기도 하였다.
교세의 팽창과 더불어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짙어졌고, 따라서 탑(塔), 불상(佛像) 등과 같은 숭배 대상의 미술품이 조성되어 불교미술의 주류를 이루었다.
불교미술은 세계 문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이자 제일 아름다운 미술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고, 세계 곳곳에 폭넓게 분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걸작들이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장대한 대작에서부터 아주 작은 소품에 이르기까지 역대 미술품 가운데 가장 수가 많아 어느 분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불교미술은 장식용이나 교화용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진리의 상징인 불상에 대한 지극한 숭앙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예배용으로도 필요했다. 그래서 역대 제왕들은 국력을 기울여 불사(佛事)에 온 힘을 쏟았고, 귀족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남신녀(信男信女)들도 다투어 불사에 동참했다. 그 때문에 수많은 불교미술이 제작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교미술의 성황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민족문화 유산 가운데 불교미술품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미술이라기보다 예술성과 가치를 공인받은 우리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지정된 문화재 가운데 불교미술이 차지하는 비율은 국보와 보물 등 국가가 지정한 문화재가 약 42%, 시와 도에서 지정한 문화재가 33%(표1 참조)에 이른다.
이는 불교미술이 우리 문화의 바탕이자 큰 줄기임을 확연히 보여주는 증거다.
불교미술은 인도 마가다왕국 때인 부처님 생존 당시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부처님 입멸 뒤에 조성된 탑에서부터다. 탑은 전생설화나 불전도들이 조각이나 회화로 표현되어 있고, 각종 무늬나 장식 등이 아름다운 부조(浮彫)로 장엄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소카왕 때에 이 불탑들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칙령을 새긴 돌기둥들도 함께 퍼졌는데, 이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웠을 뿐 아니라 사자, 코끼리, 소 등 동물 형상과 각종 무늬들이 조각되어 위대한 미술의 전통을 세웠다.
이 당시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교주이자 예배 대상인 불상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대신 보리수, 불족적(佛足跡), 삼보(三寶) 등으로 상징한 점이다. 불상이 없던 이 시기를 무불상시대 또는 초기 불교미술시대라 부르고 있다. 대승불교의 흥기와 더불어 불교미술은 획기적으로 변모하게 된다.
보리수나 족적, 삼보 대신 그 자리에 불상을 표현했으며, 급기야 단독 불상을 조성해 예배 공양하기에 이른다. 불상은 간다라지방과 마투라지방에서 처음 조성되었으며, 뒤에 두 지방의 불상 양식이 크게 성행해서 수많은 걸작들을 만들어냈다. 인도의 불교미술은 북방불교권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 크게 번창했다.
특히 중국의 불교미술은 각 시대마다 위대한 불교미술의 전통을 확립했다. 중국은 한(漢)나라 때부터 불교미술을 받아들였지만,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이르러 더욱 성행했다. 이 시기를 흔히 중국 제1기의 불교미술 황금시대라고 부른다. 수나라와 당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미술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특히 세계적인 수준으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당나라 불교미술을 중국 제2의 황금시대라 부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초원지대나 그 너머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를 서역이라 부르는데, 이곳에서도 일찍부터 불교미술품이 많이 조성되었다. 호탄(중앙아시아 타림분지 남부의 오아시스 도시)의 화엄종 미술이나 쿠처(중국의 자치구)와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등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불교미술품이 성황을 이루었다.
우리나라 불교미술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함께 조성되었는데, 수도 국내성에서 성문사와 이불란사가 건립되면서 성황을 이루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평양 천도와 더불어 더욱 발전해서 전국으로 퍼져 나갔으며, 초기에는 강건미가 주류를 이루다가 후기로 갈수록 온화한 분위기로 변한다.
백제는 384년 한산에 처음 절을 창건했으며, 공주와 부여의 수도 시절부터 본격적인 불교미술 시대로 접어들었다. 특히 부여시대에는 부드럽고도 세련된 풍조가 주를 이루어 일본에까지 전파된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가 들어와 법흥왕 때인 6세기 전반기부터 불교미술시대로 접어들지만, 고구려나 백제에 못지않게 성황을 이룬다. 명랑하고 쾌활한 미가 주류를 이루는 신라의 불교미술은 우리의 심성과 정서를 맑고 아름답게 해주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7세기 후반부터 삼국의 불교미술이 융합된 위에 새로운 인도의 굽타(Gupta)와 중국의 성당(盛唐)의 불교미술을 받아들여 세련되고 사실적인 양식이 크게 유행하면서 황금기를 이룬다.
고려는 왕조 내내 불교국가였으므로 역대 어느 시대보다 불교미술이 성황을 이루었다. 현재 남아 있는 찬란하고 화려한 고려불화가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봉정사 극락전 등의 건축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건축물도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불교공예 또한 청자와 함께 은입사향로, 금고, 동종, 사리기 등의 예술성이 국제 수준을 능가한다.
한편 조선시대의 불교미술은 비록 숭유배불정책으로 불교가 탄압받았으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세조와 명종 등 호불 국왕과 조선 후기 사찰 중창의 호기를 맞아 어느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걸작들이 풍성하다. 이처럼 불교미술품은 인류 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세계적 또는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강렬한 정신성을 내재한 인류의 영원한 미를 구현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불교미술은 다른 불교국과 어깨를 나란히할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이들을 훨씬 능가한다고 말할 수 있다.
불상
부처님을 상(象)으로 만들어 모시는 일은 처음에는 금지된 일이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거의 5-600년 동안은 부처님을 상으로 만들어 모시지 않았다.
이 기간에 부처님이 바퀴(법륜), 의자, 족적, 수건 등으로 표현된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하며, 이러한 시대를 인도의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라고 한다.
불상제작의 최초기록은 우전왕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하지만, 기록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남아있지 않다. 처음에는 불상을 만드는 일보다는 부처의 사리를 나누어 탑을 세우는 사리신앙이 대세인 인도의 아쇼카왕 시대에는 부처의 성적지에 기념주를 세우는 일이 유행하다가 실제로 불상을 만드는 일은 인도의 슝가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게 바로 1세기 무렵의 일이다. 이러한 불상의 발생지는 바로 서북 인도의 간다라와 중인도의 마투라 지역이다. 이곳에서 불상이 만들어지면서 중국으로 전파되고 바로 우리나라에 전파되어, 한국의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불상을 조성하는 일은 부처님을 유형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과정에는 일련의 법칙과 규칙이 존재하였다. 그것이 바로 32상80종호이다. 인도에서는 전통적으로 대각자인 부처님이나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사람은 서른 두 가지의 신체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32상이라는 특출한 대인상을 타고 태어난다는 내용이 브라만교의 베다성전에 기록되어 있고 이것이 불교의 초기경전으로 옮겨지면서 80종호가 더 추가된 것이다. 사실상 32상80종호의 내용들에 의해 상을 만들어야 되기보다는 그만큼 신격화된 존재로서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부각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더욱이 32상80종호의 세세한 내용들에 의거해서 불상을 제작하고자 하는 경우 사실상 조형적으로 불가능하다.
불상을 대부분 금(金)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32상80종호에 부처님의 피부를 부드럽고 곱고 매끄러워 자금색이라 한데서 연유한다. 그래서 금동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이외에도 상황에 맞게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흙으로 제작한 소조불, 건칠불, 철로 제작한 철불, 목조불상, 석불상 등의 다양한 재료로 만든 불상이 제작되었다.
현존하는 한국 최고(最古)의 불상은 뚝섬출토금동불상이다. 중국에서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일단은 현존하는 최고의 불상으로 금동으로 제작된 소형의 불상이다.
금동불은 소형에서부터 대형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제작된다. 시기가 올라가는 불상의 경우는 휴대가 용이하게 소형으로 제작된 금동의 불상이 많으며, 더불어 석조로 제작된 경우도 많이 전해진다.
소조불은 흙으로 빚어 자연적으로 건조시키는 방법과 굽는 방법이 있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소조불로는 원오리사지에서 출토된 것이 대표적인 예로서 구운 경우에 해당된다.
향나무, 은행나무, 육송, 적송 등의 목재로 제작되어지는 목조불상은 화재에 약하다는 단점 때문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목조불상은 1274년의 하한선을 가지고 있는 개운사(開運寺) 아미타목조불상이다.
건칠불(乾漆佛)은 흙으로 기본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옻칠한 종이로 형태를 감싸면서 만든 후에 처음의 소조상을 제거하면 남은 종이 형태가 불상이 되는 제작방법을 말한다.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걸쳐 많이 제작된 방법으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건칠불좌상은 보물1544호로 지정된 고려후기에 제작된 나주 심향사 건칠불좌상이다.
석불은 아마도 제작 조건과 내구성이 강했던 이유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특히 한국에는 전국에 걸쳐 순백 양질의 화강석이 대량으로 분포되어있는 자연조건의 혜택을 입어 일찍 석조기술이 발달한데 있다. 이것은 마애불, 즉 바위에 저부조나 고부조, 혹은 선각으로 새겨진 마애불이 산천에 있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시기가 앞선 석불로는 부여 시내 군수리 탑의 심초석(心礎石)에 발견된 석불좌상이다. 부여에 이어 삼국시대의 수많은 석불들과 석굴사원의 개착에 이어 통일신라, 고려, 조선까지 사실상 한국의 석불조각은 성황을 이루고 있어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석조불상이 많은 편이다.
철불(鐵佛)은 시대성과 지역성을 수반하여 제작된 종류이다. 특히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초 지방의 호족들을 배경으로 하고 중앙보다는 강원도와 같은 지방을 중심으로 한 같은 양식과 계보를 갖는 철불이 많이 제작되었다. 밀랍주조법으로 제작되어지는 금동불과는 달리 철불은 분할주조법으로 제작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위와 같이 다양한 재료에 의해 제작되는 불상을 구분하는 방법은 손의 표현, 즉 수인을 기준으로 구분된다. 석가모니부처님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 하여, 한 손은 바닥을 내어 무릎위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은 땅을 가리키는 수인이다. 비로자나부처님은 한손의 엄지를 다른 손이 감싸안는 지권인(智拳印)으로서 구분한다. 아미타여래의 수인은 흔히 구품인(九品印)이라고 하는데, 각 손의 엄지와 나머지 네 개의 손가락 중 어느 손가락을 잇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9개의 구분된 손갖춤을 말한다. 이는 중생을 구제할 때 그 중생의 근기에 따라 9가지로 나누어 구제할 수 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러한 수인 말고 손에 들고 있는 지물로 부처님을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흔히 약사여래는 약합을 들고 있으며, 보살상의 경우 관음보살은 정병(靜甁)을 들고 있거나 머리의 보관에 화불(化佛)이 표현된 경우가 그 예라 하겠다.
불교회화
종교화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종교가 갖고 있는 교리나 내용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풀어 대중을 교화시키는데 있다.
불교회화 역시 종교화로서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부처님에서부터 여러 부처님들을 시각화하거나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풀어 대중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의 불교회화는 시대에 따라서는 크게 고려불화와 조선불화로 나누어 볼 수 있고, 그려지는 재료 등에 의해서 벽화(壁畵), 탱화(幀畵), 사경화(寫經畵)로 나눌 수 있고, 야외의식용불화인 괘불(掛佛) 등이 있다.
우선 시대구분에 의해 간략히 살펴보면, 고려시대의 불교회화는 현재 고려시대의 사찰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전각과 연결시켜 설명할 순 없지만, 현존하는 대부분의 불화들은 내세의 왕생과 구제를 기원하는 아미타여래도, 수월관음도, 지장보살도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2-3점이지만 석가모니불도, 비로자나불도, 오백나한도, 16나한도, 제석천도 등이 전하고 있다. 화려한 색채와 기법 등의 이유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평가받는 작품이 많다.
조선시대의 불교회화는 전각과 연결시켜 설명할 수 있다. 사찰의 전각 안에는 불상(佛像)과 불상의 바로 뒤나 전각의 내부 좌우벽면에 걸리는 불화(佛畵)가 있다.
전각 안에서 가장 중요한 불화는 바로 불상의 뒤에 모셔지는 것으로 불상의 뒤에 걸리는 그림이라 하여 흔히 후불탱화(後佛幀畵)라 한다.
‘탱화(幀畵: ’幀‘자를 불교에서 ’탱‘으로 읽음)’는 불교의 그림을 가리켜 흔히 부르는 명칭으로, 대부분 전각에 그림이 걸려있게 되어있어 ‘걸려진 그림’이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찰의 전각은 그 전각이 어느 부처님을 모셨는가에 따라 전각의 이름이 달라지는데, 마찬가지로 전각에 모셔진 부처님이 누구냐에 따라 후불탱화나 전각 내부의 그림의 종류와 성격이 달라진다. 즉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시는 경우라면 석가모니후불탱이 그려지고, 아미타부처님을 모시는 경우라면 아미타후불탱화가 그려진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전각 내부를 불상을 모신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상단(上壇)·중단(中壇)·하단(下壇)으로 나누어 각 단에 걸리게 되는 그림의 종류와 성격을 달리한다.
즉 상단인 주불단에 메인이 되는 불화가 그려지고, 호법신을 그린 신중탱 등과 같은 그림들이 중단에 걸리고, 하단에는 영단(靈壇)이나 명부전(冥府殿) 등에 걸리는 그림이 모셔진다. 이처럼 어떤 부처님을 모시느냐에 따라 불화의 종류는 달라지며, 우선 부처님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과 보살을 그린 그림, 그리고 불교의 신들을 그린 신중탱, 의식그림인 감로탱 정도로 격에 따라 다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의식을 중시하게 된 조선시대 사찰에서 드러나는 특징으로 고려시대의 불교회화에까지 적용된다고는 볼 수 없다.
이처럼 현존하는 불교회화들은 전각 안에 모셔지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그림의 종류와 성격이 달라진다. 석가모니부처님을 주존으로 모시는 전각인 대웅전(大雄殿), 대웅보전(大雄寶殿), 영산전(靈山殿), 팔상전(八相殿), 나한전(羅漢殿) 등이 있다. 이러한 전각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영취산에서의 설법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석가모니후불탱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전각의 차이에 따라 팔상전에는 영산회상도와 더불어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가 그려지며, 나한전 등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걸리기도 한다.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이나 비로전(毘盧殿) 등에는 비로자나불회도가 모셔진다.
약사부처님을 모신 약사전(藥師殿)에는 약사불회도가, 아미타부처님을 보신 극락전(極樂殿), 무량수전(無量壽殿), 미타전(彌陀殿)에는 아미타불회도 등이 모셔진다.
보살이 주존인 전각에는 관음전에는 관음도(觀音圖)가 그려지고, 지장보살이 모셔진 명부전(冥府殿)이나 지장전(地藏殿)에는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가 그려진다. 주불이 누구냐에 따라 모셔지는 그림은 다르지만,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중단에는 그 전각을 지키는 호법신을 그린 신중탱이 대부분 걸리게 된다.
벽화는 전각의 내벽이나 외벽 등에 그려지는 그림을 말한다. 전각의 구조에 따라 그려지는 장소가 달라지지만, 시기가 올라가는 벽화는 전각 내부의 공간이 상단을 중심으로 ‘ㅁ’자형인 경우 후불탱화가 걸리는 바깥벽에 그려지기도 하고, 좌우측 내벽에 그려지기도 한다. 또한 전각외벽에 그려지는 경우에는 선종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자유롭게 표현된다.
대규모의 그림을 조성하는 것 외에도 불교회화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사경(寫經)의 조성이다. 사경을 조성하는 것을 사성(寫成)이라고 하는데, 즉 손으로 경전의 내용을 베껴쓰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불교 자체가 워낙 경제력 있는 계층에 의해 신봉되었기 때문에 불상, 불화 조성의 불사를 넘어서서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 자체를 직접 사서하여 조성하는 것은 실로 큰 공덕이라 여겼다. 실제적으로 현재 전해지는 고려시대 사경의 수는 100여점이 넘는다. 특히 종이를 쪽이나 도토리 등으로 염색한 감지나 상지에 금은자로 사서하거나 머리그림을 금니로 그려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경들은 고려불화의 그 유려하고 섬세한 미감과 같은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불화의 성격과는 또 다른 불화로는 괘불(掛佛)이 있다. 괘불은 ‘거는 그림’이란 뜻으로 야외의식에서 사용하던 불화를 지칭한다. 고려시대에는 그 예가 없는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의식이 공공연히 야외에서 행해지면서 제작된 것이다. 야외의식의 규모 정도를 감안한 전각 안에 걸리던 불화의 크기와는 사뭇 다른 엄청난 규모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사찰
1) 사찰의 이해
정사(精舍), 가람(伽藍), 사원(寺院), 사찰(寺刹), 절, 절간, 산사(山寺)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우는 사찰은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한 불상(佛像)이나 불화(佛畵) 등을 모신 곳이다. 더불어 스님들의 수행처이자,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찾아가 수행을 하고 설법을 듣는 곳이다.
이러한 의미의 장소를 여러 단어로 불리는 까닭은 바로 불교가 인도에서 건너오면서 중국을 거쳐 한자로 음역되고 다시 우리나라로 받아들여지면서 단어가 상황에 맞게 변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불리우는 이름만 달라질 뿐 사찰이 갖고 있는 본연의 기능과 의미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찰이 어떤 곳인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나열한 단어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만큼 단어 자체에 깃든 사연과 의미가 깊다.
정사(精舍)라는 말은 인도에서 사찰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인도에 있어서 최초의 사찰은
죽림정사(竹林精舍)이다. 부처님이 녹야원(鹿野園)에서의 최초의 설법 후에 마갈타국의 수도인 왕사성을 향하여 떠나게 되었다. 그 당시 마갈타국의 빔비사라왕이 부인 위제휘와 함께 왕사성 북쪽의 가란타 장자의 소유인 죽림(竹林)을 희사받아 그곳에 집을 지어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다. 이것이 불교의 역사상 최초의 정사인 죽림정사인 것이다.
또한 범어 상가라마(samgharama)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한자로 음역하면서 승가람마(僧伽藍摩), 가람(伽藍)이라 불리우게 되면서 가람이란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중원(衆園) 또는 승원(僧園)이라고 의역되기도 하는데, 이 모두를 총칭하여 정사(精舍)라고 번역한다. 중원이라는 말은 불교를 신봉하고 수행하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사나 상가라마가 승가(僧伽)의 거주처이지만, 정사는 주로 부처님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계신 곳을 말하고, 상가라마는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그의 제자들만이 거처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 즉 정리하자면 우리가 말하는 사찰을 인도에서는 정사나 가람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사원(寺院)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인도에서 정사나 가람(상가라마)이라고 불리던 것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사(寺)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자(漢字)의 사(寺)는 공공기관의 뜻이 있어서, 중국에서는 사찰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기 이전에 관아에 붙여 쓰던 말이었다. 유래를 살펴보면 후한명제(後漢明帝) 연평(永平) 10년(67)에 인도의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라는 두 스님이 흰말에다 장경(藏經)을 싣고 후한의 서울인 낙양(洛陽)에 왔을 때, 후한에서는 두 스님이 외국인이므로 관례에 의해 외국인을 위한 외무부 소속 관아(官衙)인 홍려사(鴻廬寺)에 머물도록 했다. 그러나 그 후 두 스님이 계실 마땅한 곳이 없어 그대로 그곳에 머물도록 하면서 홍려사라는 이름을 두 스님이 타고 오신 흰말을 기념하여 백마사(白馬寺)라고 고쳐부르게 되었다. 이것이 중국에 있어서 사찰의 효시이다. 그 뒤로 중국에서는 불도를 수행하는 승가(僧伽)들의 거처를 사(寺)로 부르게 되었다. 이 사라는 말과 더불어 원(院)이라는 말은 원래 주위에 둘러친 담을 말하는데 이것이 변하여 주원(周垣), 회랑(回廊)이 있는 건물을 의미했으며, 관사의 이름에도 쓰였다고 한다. 당나라 시대에 칙명에 의하여 대자은사(大慈恩寺) 등에 번경원(飜經院)을 세웠는데 이것이 불교와 관련된 건물에 원(院)이라는 이름을 붙인 효시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사찰은 범어로 비하라(vihara)라고 하고 비하라(毘訶羅)라고 음역하며, 수행을 하는 도량이라는 뜻으로 주처(住處), 유행처(遊行處) 등으로 번역한다. 사찰이란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지만, 다음의 설이 가장 유력하다.
고구려의 최초의 사찰인 성문사(省門寺, 또는 肖門寺), 이불란사(伊弗蘭寺)와 더불어 신라에서도 제19대 눌지왕 때에 묵호자(墨胡子-아도)가 일선군(一善郡)의 모례의 집에 와 머물면서 몰래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였다고 한다.
모례는 원래 국어의 ‘털례’를 한자로 음사한 것으로 ‘털례’의 집에 불상이 모셔져 있고, 불교인들이 모여서 믿음을 행할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털례의 집은 가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부처님을 모시고 불교를 행할 수 있는 집을 ‘털례’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털례’가 절 즉 사찰로 변한 것이다.
절은 사찰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로, 그 연원에 대해서도 많은 설이 있지만, 위의 텔례를 간단하게 부른 것이 절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절간은 절과 건물을 뜻하는 한자 간자가 합해져서 불리우는 단어이다.
이처럼 사찰은 많은 단어로 불리우지만, 기본적인 의미는 부처님과 스님, 불자들의 도량이란 뜻이다. 부처님을 상(象)이나 그림으로 모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승려들이 수행정진하며, 불자들이 더불어 종교생활을 할 수 있는 수행처란 의미가 가장 본연의 의미인 것이다.
2) 사찰의 구조
사찰은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한 불상(佛像)이나 불화(佛畵) 등을 모신 곳이다. 더불어 스님들의 수행처이자,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찾아가 수행을 하고 설법을 듣는 곳이다.
이러한 다기능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각 기능에 따른 여러 시설물이 함께 어우러진 종합적인 건축공간을 형성한다. 여기서 공간 배치 문제가 발생하는데, 단순히 건축적인 면에서만 배치가 문제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면에서 더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각 기능과 위격이 다른 건조물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할 것인가 하는 점에 그것이다. 그리하여 평면적인 배치 계획이 고안되었는데, 이를 가람배치라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가람배치의 대표적인 형식은 탑원(塔院), 금당원(金堂院), 승원(僧院)의 복합배치 형식이다. 이처럼 탑을 모신 곳과 불상을 모신 곳, 그리고 스님이 거주하는 곳으로 나누어 구분하기도 하고, 탑과 금당의 배치형식에 따라 다르게 구분하기도 한다. 1탑 1금당, 2탑 1금당, 1탑 3금당의 형식이 대표적이다. 또, 탑이 없는 예배원과 승원의 복합 배치 형식도 있는데 이것은 드문 편이나 조선시대의 가람배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여러 전각(殿閣)과 종루(鐘樓), 고루(高樓), 경루를 포함한 수많은 부속건물과 천왕문, 일주문 등이 어우러져 매우 다양한 배치 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구조로 이루어진 사찰을 들어가기 위해 통과하는 문들이 있다. 바로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불이문 등이다.
일주문(一株門)에서 시작하는 사찰의 경계를 통해 우리가 세속의 때를 벗고 부처의 길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문이다. 산문(山門)이라고도 하는데, 산사에 들어서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문으로 절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게 된다.
천왕문(天王門)은 불국토를 지키는 동서남북의 사천왕을 모시는 문으로 불법을 수호하고 사악한 마군을 방어한다는 뜻에서 세워졌다. 동방 지국천왕(칼.주먹), 남방 증장천왕(용.여의주), 서방 광목천왕(삼지창.보탑), 북방 다문천왕(비파)을 모시고 있다.
금강문(金剛門)은 사찰에 따라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의 가람과 불법을 수호하는 왼쪽에는 입을 다문 훔형금강인 밀적금강, 오른쪽에는 입을 벌린 아형금강인 나라연금강인 두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는 문이다.
불이문(不二門)은 불이(不二)란 둘이 아닌 경계를 말하며 절대 차별없는 이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승속(僧俗)이 둘이 아니요,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니며, 중생계와 열반계 역시 둘이 아니니, 일체중생이 개유불성(皆有佛性)하여 이 문을 들어서면서 부처님의 이치를 깨우치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문을 해탈문(解脫門)이라고 한다.
이러한 문들을 통과하면, 앞서 이야기한 법당들이 위치한다. 이러한 법당들에는 불상이나 불화를 모시게 되는데, 이것을 일컬어 전각(殿閣)이라고 한다. 즉 ‘OO殿’, ‘OO閣’이라고 하는 건물들이 모여서 사찰을 이루게 되는데, 흔히 전(殿)은 각(閣)보다 계위가 높은 건물을 가리킨다. 이처럼 사찰의 구조물들에는 각각 나름의 의미가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전각은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전(大雄殿), 팔상전(八相殿), 영산전(靈山殿), 나한전(羅漢殿), 응진전(應眞殿)이라고 하며,
비로자나부처님이나 삼신불·삼세불을 모신 전각은 대적광전(大寂光殿), 비로전(毘盧殿), 화엄전(華嚴殿)이라고 한다.
아미타부처님을 보신 전각은 극락전(極樂殿), 무량수전(無量壽殿), 미타전(彌陀殿)이라고 한다.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은 약사전(藥師殿), 만월보전, 유리광전, 보광명전이라고 한다.
다음 보살(菩薩)을 모신 전각으로는 관음보살을 모신 관음전(觀音殿), 원통전(圓通殿)이 있고,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冥府殿), 지장전(地藏殿) 등이 있다. 각(閣)으로는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獨聖閣), 치성광여래를 모신 경우는 북극전(北極殿)이라고 하나 후기로 갈수록 칠성신에 대한 민간신앙이 강해지면서 칠성신을 모신 칠성각(七星閣), 산신이나 가람신을 모신 산신각(山神閣), 가람각(伽藍閣) 등과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 화상을 모신 삼성각(三聖閣), 스님들의 영정을 모신 영각(影閣) 등이 있다. 그 외에도 경전을 모신 장경각(藏經閣), 판전(版殿) 등이 있기도 한다.
이와 같은 법당이나 금당의 의미인 전각 말고도 스님들의 수행처이자 거주처가 있게 된다. 수행처로는 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이 존재하고 거주처로는 우리가 흔히 요사라고 하는 노전(爐殿), 향로전(香爐殿), 수선당, 해행당, 선불당, 염화실 등이 있다.
불구(佛具)
사찰의 전각 안, 그리고 경내에는 여러 의식을 위하거나 공양을 위한 불구들이 있다.
흔히들 이것을 불교공예의 일종으로 간주하고 미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기도 하는데, 본연의 의미는 의식과 공양을 위한 불구(佛具)라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구 혹은 공양구라고 지칭한다.
먼저 의식구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불전사물(佛殿四物)로 묶어 지칭되는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이다.
범종(梵鐘)은 본래는 대중에게 시간을 알리는 도구로 사용하여 왔으나 예불시에 범종을 치면서 모든 지옥중생이 이 종소리를 듣고 깨우침을 얻도록 원하게 된 것이다. 범이란 바로 우주만물이며 진리이고 맑고 깨끗함이며 한없이 넓고 크고 좋다는 뜻이다. 종송(鐘誦)을 하는 이유는 미몽에 빠진 중생의 깊은 잠을 깨워주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극락세계의 장엄을 일러주고 귀의 발원하도록 하는 것이다.
법고(法鼓)는 불법을 북에 비유하여 법을 설하는 것을 북을 울린다고 한다. 이 말은 부처님의 교법이 널리 세간에 전하는 것을 북소리가 널리 퍼지는데 비유한 것이며 교법이 중생의 번뇌를 없애는 것이 마치 진치고 있던 군대들이 전진하라는 북소리가 울리면 적군을 무찌르는데 비유한 것이다. 또 북을 치는 뜻은 축생들의 영혼을 위하여 법고를 친다고 한다.
목어(木漁)는 나무를 깎아서 물고기 생긴 모양을 새겨 그 속이 비게 만들어서 송경할 때와 그 밖의 불사(佛事)에 치는 것이다.
운판(雲板)은 선종에서 제당이나 부엌에 달고 대중에게 공양시간을 알리던 기구이다. 청동으로 구름모양으로 주조하며 운판이라고 이름한다. 또 운판을 치는 뜻은 공중에 있는 고혼과 날아다니는 조류계의 중생의 이고득락과 해탈을 위하여 친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의식구 말고도 비슷한 기능으로 쳐서 시간을 알리고자 대중을 모으는 기능으로 사용되는 금고(金鼓), 반자 등도 있으며, 금강령(金剛鈴)과 같은 요령, 목탁, 죽비, 바라, 징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의식에 부처님을 모셔오기 위한 ‘연’인 가마도 의식구에 포함되며, 부처님의 명호를 적어놓는 불패(佛牌) 등도 의식구에 속한다.
공양구로는 초를 피우는 촛대, 향을 피우는 향로(香爐)나 깨끗한 물을 공양하기 위한 정병(靜甁) 등이 있다. 특히 고려시대의 은입사향로나 청동이나 청자로 만들어진 정병은 당시 공예수준을 유감없이 발휘해 만들어진 것이다.
2. 가람과 건축
가람
‘伽藍(가람)’은 부처님이 태어나신 인도에서 오래 전부터 ‘절’이란 뜻으로 써오던 말이다.
옛날부터 사용해오던 고대 인도어를 ‘범어(梵語)’ 또는 ‘산스크리트(Sanskrit)’라고 하는데 ‘가람’은 바로 산스크리트의 ‘상가람마(Sam·gha-ra-ma)’를 소리나는 대로 한자어로 번역한 ‘승가람마(僧伽藍摩)’를 줄인 말이다. 즉 ‘승가’는 ‘대중’을 의미하며, ‘람마(藍摩)’는 ‘원(園)’이란 뜻인데 이를 줄여 ‘가람’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가람'은 승가[大衆佛子]들이 한데 모여 불도를 닦는 사찰(寺刹)을 의미하며, '승원(僧園)'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초기의 사찰은 부처님께서 생전에 기거하시던 기원정사(祇園精舍)나 죽림정사(竹林精舍)였다고 볼 수 있으며, 부처님이 입적하신 뒤에는 부처님의 탑을 중심으로 불교 가람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커다랗고 둥근 탑과 탑을 두른 담장 그리고 사방의 탑문 등, 웅장한 규모와 성스러운 장식으로 세워졌다. 사방의 탑문에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나 생전의 행적을 일러주는 여러 가지 조각 그림이 등장하고, 담장 안의 탑 둘레에는 계단과 탑돌이 길을 마련하여 그 당시부터 ‘우요삼잡(右繞三餓)’ 즉, 탑을 오른쪽으로 세 번 도는 관습이 생겨났다.
그리고 탑은 사찰의 중심건물로 계속 세워지면서 하나 둘씩 부속건물을 갖추어 이른바 가람을 형성했다. 탑과 가람의 형태도 불교를 받아들인 지역과 나라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했다. 이렇게 탑과 승원이 어우러진 종합 사원이 형성되었으며, 탑과 승원이 복합된 형식은 대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원래 승원만 있던 곳에 불탑을 조성한 경우와 원래 불탑이 세워진 곳에 승원을 덧붙인 경우, 그리고 처음부터 탑과 승원을 함께 설계해서 완전한 종합 불교사원으로 건립한 경우이다.
후대에는 처음부터 종합 사원으로 출발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반드시 탑이 있어야만 가람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 말부터 특히 산지의 가람에서는 탑 없이 배치하다가, 고려 이후 조선시대에는 탑이 사원에서 자취를 감추거나 외곽지대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았다. 탑이 예배의 주요 대상일 때부터 탑은 사원의 중심이 되었고, 그 뒤 불상이 예배 대상으로 출현하자 불상을 봉안한 불전(佛殿), 즉 금당(金堂)도 탑과 같이 중시되어 탑과 금당이 병립했다.
그러나 불상이 불교신앙의 주체로 존숭받게 되면서부터는 금당이 주가 되고 탑은 종이 되는 식으로 사원 형식이 변한다. 가람의 형식을 구분하는 데 가장 많이 쓰이는 방식은 탑을 이용한 방법이다.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의 가람배치는 고구려 사찰에서 볼 수 있다. 현재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평양의 청암리 사지(靑岩里寺址), 정릉사지(貞陵寺址) 등에서 그 유형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일탑일금당식(一塔一堂式)의 가람배치는 백제 사찰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들 백제 사찰 가운데 군수리 사지(軍守里寺址), 정림사지(定林寺址), 금강사지(金剛寺址) 등에서 정연한 일탑일금당식의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가람배치 또한 일탑일금당식이 기본이었으리라고 추정한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에는 탑이 법당 앞 양쪽에 짝을 이루고 서 있는 이른바 쌍탑가람(雙塔伽藍)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중국의 궁궐이나 사찰에서 대칭으로 건물을 배치하는 관습이 우리나라로 전해온 것이다. 이러한 쌍탑가람으로 대표적인 사찰이 감은사지(感恩寺址), 실상사, 보림사 등이다.
이 때부터는 탑보다 법당의 규모가 훨씬 커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불자들의 불보(佛寶)에 대한 인식이 탑뿐만 아니라 불상으로까지 확대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는 거대한 불상을 주조할 수 있는 능력과 그러한 불상을 모실 대규모 법당을 지을 수 있는 건축술을 이미 축적해놓았기 때문에, 탑 못지않게 실제로 부처님 모습을 보여주는 불상과 불상을 모신 법당을 짓는 데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이 무렵부터 석탑이 크게 유행했는데, 재질이 무거워 목탑처럼 크게 세울 수 없었으므로 자연히 탑보다 법당 건물을 웅장하게 세웠다고도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기본 가람배치는 전통적인 일탑일금당식을 답습했다. 과거의 엄정한 질서에서 자유로워지고 포용하는 흐름을 보여주었다. 별도의 법당과 부속건물들을 전체 배치와 관계 없이 적절한 장소에 세웠고, 탑도 마찬가지로 절 한가운데가 아니라 절 안을 벗어난 곳에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성주사나 운주사 등에는 여러 개의 탑을 세우는 다탑가람(多塔伽藍)이 조성된 적도 있으며, 이와는 정반대로 송광사와 같은 명찰(名刹)에서는 탑을 조성하지 않기도 하였다. 이처럼 가람배치면에도 우리 민족 특유의 자연친화적인 요소를 많이 곁들이는 등,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불교가 한국식 민족종교로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 불교가람 분위기는 비록 활발하지는 못했지만 조선시대의 불교가람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가람의 배치와 구조면에서 볼 때, 우리나라 사찰은 평지가람(平地伽藍)과 산지가람(山地伽藍)의 두 종류로 크게 나뉜다.
평지가람은 평지에 세워진 사찰을 말하는데 고대에서부터 중요한 사찰들은 왕도(王都)나 고을 한복판의 평지에 주로 세워졌다. 따라서 평지가람 중에는 대규모 사찰들이 많았다.
경주의 황룡사터, 익산의 미륵사터 등이 대표적인 평지가람이다. 또한 평지가람은 건물 배치방식이 궁궐건축의 중문(中門), 정전(正殿), 회랑(回廊) 등과 비슷해서 궁궐만큼이나 질서 있고 당당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산지가람은 산중에 터를 잡은 사찰을 말한다. 산지가람은 기본적인 가람의 질서를 존중하되, 산세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 안에 부속건물을 조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축대를 여러 단으로 쌓아 높낮이가 서로 다르게 터를 다지고, 적절히 건물을 배치한다. 그러므로 때로는 진입로가 꺾이거나 휘어지기도 하고, 사찰 전경도 똑바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한 평지가람처럼 법당 주위로 회랑을 배치하는 경우는 드물다. 반면에 절 입구에서부터 일주문, 천왕문, 문루 등을 거칠 때마다 절 안의 광경이 새롭고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특징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 사찰 대부분은 이러한 산지가람 형태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건물 규모와 공간 배치형식을 결정할 때는 산세와의 조화를 중시했다. 따라서 산중에 이름난 가람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부석사, 화엄사 등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지가람이다. 이러한 산지가람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전통 건축양식과 주변 환경을 잘 보존해온 문화유산이며, 고귀하게 보전해야 할 성보(聖寶)다.
불교건축
불교 사원의 모든 구조물을 불교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건축 공간인 사원의 대지에서부터 건조물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건축적인 모든 것을 통틀어 '불교건축'이라 한다.
(1) 산문(山門) 체계
산문 체계는 한 번에 깨닫는 것보다는 단계적으로 깨우쳐 나아가는 논리를 조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동일한 산문이 단순하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논리를 점증시켜가는 등 다양한 산문이 연속되어 있다. 사찰의 산문은 대부분 사찰의 신앙, 창건, 역사 등에 따라 편차가 있으나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① 일주문 (一柱門)
산사에 들어서면 맨 먼저 만나는 문이며, 개방적이고 표식적인 문이다. 일주문이란 실제로 기둥이 하나가 아니라 옆에서 볼 때 기둥이 일렬로 늘어섰다는 의미다. 이렇게 기둥을 일렬로 배열하는 건축물을 지을 수 있다는 것으로 당시 목수들의 뛰어난 기술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문의 뜻은 ‘하나(一)’라는 데에 있다. 이 문을 경계로 문 밖을 속계(俗界)라 한다면, 문 안은 진계(眞界)인 것이며, 이 문을 들어설 때 일심에 귀의한다는 결심을 갖도록 하는 데 그 뜻이 있다. 일주문을 기준으로 해서 승과 속의 경계가 이루어지며 세간과 출세간, 생사윤회의 중생계와 열반적정의 불국토로 나누어진다. 대표적으로 범어사 일주문과 해인사 일주문을 들 수 있다.
② 천왕문 (天王門)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인 사천왕을 모신 건물이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의 종교에서 숭앙받았던 신들의 왕이었으나, 부처님께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천왕문이 일주문과 불이문의 중간에 있는 이유는,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지닌 구도자의 일심이 숱한 역경에 의해 한풀 꺾이려 할 때, 수미산 중턱에 자리한 사천왕이 힘을 내어 수미산 정상까지 오르도록 구도자를 독려하기 위해서다.
사천왕문 대신 금강문(金剛門)이 서 있는 곳도 있다. 금강문 안에는 금강역사가 자리잡고 불법을 수호하고 있으며, 사찰에 따라 금강문과 사천왕문이 같이 있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천왕문은 법주사 천왕문과 완주 송광사 천왕문이다.
③ 불이문 (不二門)
‘불이(不二)’는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선과 악이 둘이 아니며, 유와 무가 둘이 아니며, 공과 색이 둘이 아니라는, 깊고도 오묘한 뜻을 가지고 있다. 불이문은 사찰에 따라 해탈문, 또는 극락문이라고도 한다. 불이문은 곧 불국토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문을 지나면 불국토가 열린다는 뜻이다. 도갑사 해탈문과 건봉사 불이문이 대표적이다.
(2) 전각(殿閣)
주불전(主佛殿)은 그 사찰의 중심이 되는 신앙 대상인 부처님을 모신 불전을 말하며, 흔히 금당이라고 불린다. 부처님은 ‘금인(金人)’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부처님을 모신 집을 금당이라고 한 것이다. 금당은 탑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사원 건물의 하나로, 대승불교시대에는 탑보다 금당이 절의 중심 건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에는 부처님의 이름에 따라 금당의 명칭이 정해졌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금당이면 대웅전, 아미타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은 무량수전 또는 극락전, 약사불을 모시면 약사전, 관음보살을 모시면 원통전 등으로 고유의 이름을 붙였다. 이 밖에도 주불전은 아니지만 수많은 불전들이 있다. 부처님과 보살을 모신 곳은 전(殿)이라 하며, 그 외에는 각(閣)이라 한다.
①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거룩한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법당이란 뜻이다. 자연히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불상이 봉안의 대상이 된다. ‘대웅(大雄)’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큰 영웅, 즉 대웅이라고 한 데서 유래했으며, ‘위대한 영웅인 석가모니부처님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대웅전은 법화천태종(法華天台宗)의 금당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법화 계통의 전통이 남아 있는 사원에서 주불전으로 사용했다. 불국사 대웅전, 통도사 대웅전, 관룡사 대웅전 등 많은 걸작이 남아 있다. 구례 화엄사는 각황전이라는 현판을 가지고 있다.
② 대적광전(大寂光殿), 대광명전(大光明殿)
대적광전 또는 대광명전, 줄여서 적광전(寂光殿), 대광전(大光殿)이라 부른다. 이것은 비로자나부처님이 두루 비치는 빛, 즉 광명이나 적광의 성질을 갖고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비로자나부처님을 봉안한 집이라는 뜻이다. 큰 불전일 경우 비로자나·석가모니·노사나 등 삼신불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으며, 해인사 주불전 등이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비로자나부처님은 화엄경의 주불로서 화엄종 사찰의 주불전일 경우에 이 이름을 붙였고, 주불전이 아니면 비로전(毘盧殿)이라고 했다. 대광전은 마곡사, 적광전 월정사 등에 있다.
③ 극락전(極樂殿), 무량수전(無量壽殿)
극락전은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법당이다. 아미타부처님은 임금의 지위와 부귀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 비구로서, 부처님의 덕을 칭송하고 보살의 온갖 행을 다 닦아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을 세웠으며, 마침내 아미타부처님이 되었다.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은 끝이 없어 백천억 불국토를 비추고, 수명이 백천억 겁으로 셀 수 없다고 해서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곳을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또는 주불의 이름을 따서 미타전(彌陀殿)이라고도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무량사 극락전이 유명하다.
④ 미륵전(彌勒殿)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부처님을 모신 법당의 이름이다. 미륵부처님이 정화하고 펼치려는 새로운 불국토 ‘용화세계’를 상징한다고 해서 용화전(龍華殿)이라고도 한다. 또는 ‘미륵’의 한문 의역인 ‘자씨’를 취해서 자씨전(慈氏殿)이라고도 부른다. 미륵전을 대표하는 건물로는 전북 김제의 금산사 미륵전을 들 수 있다. 미륵부처님은 현재 오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대부분 법당 밖에 크게 조성해서 모시는 것이 우리나라의 관례이나 금산사와 같이 법당 안에 모신 곳도 있다.
⑤ 원통전(圓通殿)
관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주불전일 때 원통전이라 부르며, 부속 전각일 때는 관음전이라고 부른다. 송광사 관음전, 통도사 원통전, 법주사 원통보전, 낙산사 원통보전 등이 대표적이다.
⑥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약사유리광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약사부처님은 동방 유리광세계의 교주로서 대의왕불(大醫王佛)이다. 약사전을 만월보전, 유리광전, 보광전이라고 다르게도 부른다. 약사부처님은 현세 중생의 모든 재난이나 질병을 없애고 고통을 구제하는 부처님이며,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은 약사부처님 좌우에서 진리 광명을 두루 비추어 중생의 모든 고통을 제거해주신다고 한다.
⑦ 팔상전(八相殿)
팔상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가지로 나누어 그린 그림을 봉안한 곳이다. 법주사 팔상전이 대표적이다.
⑧ 나한전(羅漢殿), 응진전(應眞殿)
나한은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은 불제자로, 소승불교 수행의 가장 높은 지위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자를 말한다. 나한을 모신 전각을 나한전, 응진전이라 한다. 나한신앙은 대승불교의 삼보(三寶) 가운데 승보(僧寶)에 대한 숭배의 결과로 크게 성행해왔다. 특히 중국 전통의 선종이 유행하자 그 영향으로 중국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문화권에서 크게 숭앙받았다. 나한은 중생에게 복덕을 주고 중생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해서 우리나라 사찰에는 나한전이 많다.
⑨ 명부전(冥府殿)
명부전 안에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며, 지옥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조선 후기에는 지장신앙이 크게 유행해서 어느 사찰에나 이 전각이 있었다. 개심사, 화엄사, 금산사, 동화사 등 많은 사찰에 남아 있다.
⑩ 대장전(大藏殿)
대장전은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축조한 전각을 말한다. 대장전이라는 편액을 단 건물로는 경북 예천군 소재의 용문사 대장전과 전북 김제군 소재의 금산사 대장전을 예로 들 수 있다. 해인사는 고려대장경을 모신 곳 현판은 팔만대장경, 장경각, 수다라전(남) 법보전(북) 등으로 되어 있다. 통도사나 부석사도 장경각이라는 현판이 있다.
⑪ 적멸보궁(寂滅寶宮)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전을 가리켜 적멸보궁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낙을 누리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곳에는 예불의 대상으로 불상을 따로 봉안하지 않고 불단만 있는 것이 다른 불전과 다르다. 우리나라에는 5대 적멸보궁이 있으며, 이들은 신앙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설악산 봉정암이 그곳이다.
⑫ 조사당(祖師堂)
조사당은 한 종파를 세운 스님이나 후세에 존경받는 큰스님, 절의 창건주, 역대 주지 등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신 당우를 말한다. 국사가 배출된 절에는 조사전 대신 국사전이 있다. 대표적으로 순천 송광사의 국사전을 들 수 있다.
⑬ 삼성각(三聖閣)
법당의 뒤쪽 한켠에는 작은 규모의 전각이 있다. 이 전각에는 우리 민족 고유의 토속신들을 불교적으로 수용해서 모시고 있다. 즉 산신, 독성, 칠성 등을 모신 곳이 삼성각이다. 그 신상을 각기 다른 건물에 모실 때에는 그 전각의 이름도 신상에 따라 달라진다. 산신을 모시면 산신각, 칠성을 모시면 칠성각, 독성을 모시면 독성각이라고 부른다.
⑭ 범종각(梵鐘閣)
일주문과 천왕문을 거쳐 불이문을 통과해서 경내에 들어서면 범종각이 자리잡고 있다. 범종각은 범종을 달아놓은 곳으로 범종의 보호각 구실을 한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범종 외에 법고(法鼓)·운판(雲板)·목어(木魚) 등의 불전사물(四物)을 함께 놓기도 한다.
⑮ 누각(樓閣)
사찰의 주불전과 마주하는 곳에는 보통 누각이 세워져 있다. 누각의 좌우에는 마당을 둘러싸고 요사채가 있다. 즉 뜨락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누각은 글자 그대로 이층의 다락집 형태다. 누각은 사찰에 대중이 많이 운집하는 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중문이 누각의 형태로 변하는 것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부석사 안양루가 대표적이다.
(1) 기초공사
불전의 건축공정에서는 우선 불전과 부속건물이 들어설 수 있는 터를 잡아 터닦기를 한 다음 건물을 세우기 위해 기단을 쌓는다. 이 때 기단은 막돌 쌓기, 바른 돌 쌓기, 허튼층 쌓기, 바른층 쌓기 등의 축조법으로 이루어지는데 축조법의 선택에 따라 구성미가 다양하게 드러나게 된다.
터 다지기와 기단 쌓기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건물을 짓게 되는데 고전적인 방식에서는 질서정연한 석조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로는 석조 기단을 석축기단으로 대체하거나 기단을 간략하게 하고 바로 낮은 토단 위에 기초공사를 하고 주춧돌을 놓기도 했다.
주춧돌도 고려시대까지는 방형 또는 원형의 주춧돌을 사용했으며 특히 조선시대 후기 이후로는 ‘덤벙주초’라 하는 자연석 주춧돌을 대강 다듬어 쓰는 방식이 유행했다.
(2) 기둥과 지붕
기둥은 대체로 둥근 기둥을 썼으며 통일신라 이후에는 기둥의 중간부가 두툼해지는 이른바 배흘림기둥이 선보이기도 했다. 현재 통일신라시대의 기둥이 남아 있는 건물은 없으나 당시의 승탑(부도)에서 배흘림 기둥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으로 증명이 된다. 이러한 기둥 양식이 다시 페르시아, 중앙 아시아, 중국 등지를 거쳐 신라에 전래됐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기둥이 탄탄해보이는 시각적 효과가 있다.
기둥을 세운 다음에는 기둥과 기둥을 위쪽 부분에서 꿰뚫고 연결하는 창방(昌枋, 넓적한 도리)이 결구되고, 각 기둥 위에는 커다란 주두(柱頭)가 놓이며 그 위로 지붕을 떠받는 부재(部材)들이 놓인다. 지붕은 여러 부재들을 대규모로 결합한 구성물이므로 중량과 부피가 상당하다. 뿐만 아니라 지붕을 구성하는 각 부재들은 역학적으로 치밀하게 짜맞추어져 지붕의 모양을 이루고, 동시에 육중한 지붕의 무게가 공평하고 안전하게 기둥으로 전달되도록 되어 있다.
(3) 공포의 구조
주두 위에서 지붕을 안전하게 떠받치는 첫번째 부재들의 뭉치를 공포(蛋包)라고 하는데 여러 개의 첨차(察遮)와 소루(小累)로 구성된다. 첨차는 처마 밑에서 지붕의 무게를 받아내는 여러 겹의 받침부재이며 소루는 이 받침부재들 사이에서 서로의 틈을 괴어주는 작고 납작하며 네모난 부재들이다.
주심포식(柱心包式) 건물은 기둥 위에만 공포를 놓는 형식이고, 다포식(多包式) 건물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공포를 놓는 발달된 형식이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 건축물로는 수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등으로 주심포식 건물이 더 많이 남아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다포식이 중요한 건물에 주로 사용되었다.
(4) 대들보, 도리, 서까래
공포의 구조를 이루는 첨차는 지붕 대부분의 무게를 지탱하는 대들보[大樑]와 도리(道里)를 받게 되고, 대들보는 지붕 전체를 가로받치게 된다. 도리는 서까래를 가로받쳐주는 긴 부재다. 그 가운데 지붕 내부의 맨 위쪽 한가운데를 받는 것을 종도리(宗道里), 중간 부분을 받는 것을 중도리(中道里), 기둥 안쪽을 받치는 것을 내목도리(內目道里), 기둥 위에서 서까래를 받는 것을 주심도리(柱心道里), 기둥 바깥쪽에서 받는 것을 외목도리(外目道里)라고 한다.
서까래는 지붕꼴을 이루는 뼈대로서 통나무를 세로로 벌여 구성하며, 통상 지붕 위에서 처마 끝까지는 두 개의 통나무를 엇걸기로 연결해서 한 골의 서까래를 이룬다. 또한 처마 끝을 길게 내어 햇볕이나 빗물을 차단하고, 아울러 처마의 맵시를 더하기 위해서는 한 토막씩의 서까래를 덧대는 덧서까래[附椽]를 설치하기도 한다. 처마의 네 귀는 서까래가 부챗살처럼 퍼지면서 살짝 위로 들려 지붕 모양에 곡선미를 줌으로써 더욱 우아하게 보인다.
(5) 기와
서까래 위에는 산자를 얹고 진흙과 짚을 버무려 덮은 뒤에 기와를 얹어 지붕을 마무리한다. 이 때 덮는 기와는 대부분 두 종류다. 그 가운데 지붕 바닥에 놓여 기왓골을 이루는 넙적기와를 ‘암키와’라 하고, 암키와와 암키와 사이를 덮는 반원형의 길쭉한 기와를 ‘수키와’라 한다. 그리고 지붕의 가장자리인 처마 끝을 마감하는 기와를 ‘막새기와’라 하는데, 여기에도 ‘암막새’와 ‘수막새’기와가 사용된다. 특히 막새기와에는 연꽃무늬, 당초무늬 등 여러 가지 장식무늬가 새겨지므로 무늬를 보고 기와 제작시기를 밝혀내기도 한다.
(6) 바닥과 창호
건물 내부의 바닥에는 전돌 또는 마루를 깔게 된다.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원래 중앙에 설치되고 좌우에는 살창만이 있었는데, 조선시대 이후로는 건물 앞면에 온통 창호(窓戶)를 달아 건물 내부가 밝아졌다. 창호는 띠살, 빗살, 꽃살 등으로 장식한다. 뒤에는 창문들을 좌우로 접히고 위로 들리도록 해서, 건물 내부가 훤히 개방되는 문달기 방식이 발전한다. 한편 앞쪽 전체에 창호문을 달면서, 가운데 칸은 부처님을 위한 상징적인 출입 통로가 되고, 실질적으로 신도들은 좌우 벽채의 앞쪽 출입문을 이용하게 되었다. 문은 뒷벽에도 설치된다. 뒷벽 중앙에는 출입문을 설치하고 양 옆면에는 창호를 내는데, 예부터 건물 사방에 사문팔창(四門八窓)을 내던 조영법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뒷벽의 창과 문의 사용례가 줄어들어 오늘날에는 그 자취만 남아 있다.
(7) 불단(佛壇), 단청(丹靑)
불단은 불전 내부의 중간부 약간 뒤쪽에 설치된다. 불단 위에는 불상을 안치하고 불상 뒤에는 후불탱화를 건다. 마지막으로 불전 내외부의 벽채와 천장에 화려한 단청과 벽화 장식을 조성함으로써 건물이 완공된다. 기둥이나 천장 등과 같은 부재에 용, 연꽃 등 도안적인 그림을 그려 장엄하는 것을 단청(丹靑)이라고도 한다. 단청은 전각을 아름답고 숭고한 분위기로 장엄하는 구실을 하지만, 채색과 기름을 덧입혀 목재를 보호하고 조악한 면을 감추는 기능도 겸하고 있다.
(1) 탑의 기원
탑이란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의 ‘스투파(stupa)’ 또는 팔리어인 ‘투파’(thupa)를 한자음으로 옮긴 것인데 원래 ‘무덤’이란 뜻이다. 많은 가르침을 후세에 전하고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시신을 제자들이 다비했더니 수많은 신골(身骨)과 사리들이 나투었다고 한다. 이 때 제자들이 부처님 사리를 서로 더 많이 가져가 탑을 세우려고 했는데, 나중에는 공평하게 나누어 가져가서 8기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불경에 전해오는 탑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전해오는 말에는 나중에 도착한 두 제자가 다비한 재를 가져다 탑을 세워 처음에는 10기의 탑이 있었다고도 한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이러한 최초의 탑을 ‘근본 팔탑(根本八塔)’ 또는 ‘근본 십탑(根本十塔)’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 때부터 탑은 탑을 부처님의 무덤으로 여기는 신도들에 의해 생전의 부처님을 대신하는 숭배의 대상으로 모셔졌다고 한다. 당시는 탑만이 부처님과 동등한 숭배의 대상이었고, 사원의 공간 배치에서도 탑이 항상 중심부를 차지했다. 이러한 시기는 불상이 등장하기까지 약 5백 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 불상이 만들어진 뒤에도 탑은 여전히 신앙의 핵심 대상물로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2) 탑의 종류
탑 자체의 구조는 인도의 산치탑처럼 복발탑(覆鉢塔)일 때와 목탑(木塔)이나 석탑(石塔) 등 여러 층일 경우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탑의 재료나 형식에 따라서도 구조가 다양하다. 공통적으로 탑은 기초가 되는 기단부(基壇部)와 중심인 탑신부(塔身部), 그리고 꼭지를 장식하는 탑두부인 상륜부(相輪部)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에서는 벽돌로 된 전탑이 유행했지만 금, 은, 동, 나무, 돌 등 다양한 재료로 탑을 만들 수 있다고 경전에 나와 있으며, 실제로 갖가지 재료로 만든 탑들이 남아 있다. 중인도에는 석재나 목재보다 벽돌이 알맞았기 때문에 전탑을 많이 만들었고, 중국에서는 이러한 영향을 받아 목탑보다 벽돌탑을 훨씬 더 많이 만들었다. 그곳 역시 중심부인 황하 일대가 황토지대여서 목재는 희귀하고 벽돌 재료인 흙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중국 전탑의 영향을 받은 모전탑(模塼塔)은 634년 분황사에서 최초로 만들어졌으며, 그 뒤 순벽돌탑은 신라 통일기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목탑은 인도에서는 드물었고 중국에서 크게 성행했다. 중국 건축의 특색이 바로 나무를 주재료로 했기 때문이다.
비록 소실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선덕 여왕 때 세워진 높이 80m의 황룡사 9층탑이 대표적이다. 현재는 법주사 팔상전과 쌍봉사 대웅전만이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목탑이 많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석탑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탑이다. 일찍부터 양질(良質)의 화강함이 풍부하게 생산되었기 때문에 웅장하고 아름다운 석탑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부여 정림사 5층석탑, 익산 미륵사 석탑, 감은사 쌍탑 등 수많은 석탑들이 있다.
① 복발탑(覆鉢塔)
인도 탑의 초기 형태가 복발탑이다. 탑신이 마치 밥그릇을 엎어놓은 모양과 같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탑신 밑은 기단부이며, 탑신 위는 네모꼴의 석감(石龕), 그 위에 산개를 안치하는데 모양은 약간씩 다르다. 신라 고분과 모양이 매우 비슷해서 신라 고분에다 상륜부를 안치하면 거의 복발탑과 같은 모양이 될 것이다.
② 중층탑(重層塔)
다층 건물 모양을 탑에 응용한 것으로 짐작하며, 탑신의 모양은 다층 건물과 비슷하다. 중국의 기념비적 탑에서 유래한 목탑에서부터 다층탑이 크게 성행한 것으로 생각하며, 이것이 다층 전탑을 발생시켰고 우리나라에서는 다층 석탑으로 번안되었다. 다층탑은 영원한 생명의 숫자인 3~13층까지의 홀수(3, 5, 7, 9, 11, 13) 탑이 보편적이었지만, 2층이나 10층 등 짝수도 진리를 상징할 경우에는 조성되었다.
■ 3층탑 : 우리나라 석탑의 대부분이 3층탑이다. 이유는 그다지 웅장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은 크기의 사찰에 가장 알맞고 만들기도 손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 5층탑 : 5층탑의 예는 꽤 많은 편이며, 우리나라의 정림사지 5층석탑이 유명하다.
■ 7층탑 : 저명한 중국의 자운사 대안탑이 있다.
■ 9층탑 : 신라 황룡사 9층목탑은 신라 삼보의 하나로 당대에 가장 큰 탑이었다. 중국 북위 영령사 9층탑도 유명하다.
■ 10층탑 : 우리나라 원각사 석탑이 이에 속하는데, 원각 사상을 상징하기 때문에 10층으로 조성했다.
■ 13층탑: 우리나라 경천사 13층석탑 등이 대표적이다.
③ 특이형 탑
앞의 두 형태와 다른 특이한 모양의 탑을 통틀어서 말한다. 이미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에는 우리나라 역사상 석탑의 조탑 수준이 절정기에 이르렀다. 이 때부터는 석탑의 형태에도 새롭게 응용한 것을 자유자재로 고안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불국사 다보탑(佛國寺 多寶塔),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華嚴寺 四獅子 三層石塔) 등은 수준 높은 조탑술로 창작된 새로운 양식의 석탑이다. 탑 속에 《보협인 다라니경》을 봉안한 보협인탑도 이 부류에 속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천안에서 발견된 석탑 한 예만 있을 뿐이다.
(3) 탑 안에 넣는 보물
탑에는 여러 가지 보물을 봉안한다. 원래는 부처님의 사리, 즉 신골(身骨)만을 봉안했지만 신골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리 외에도 머리칼, 손톱, 발톱, 이(齒)는 물론, 법사리(法舍利)인 불경과 법신사리(法身舍利)인 깨끗한 모래, 수정, 금, 은 등의 보배까지 봉안했다. 사리는 작은 병이나 합에 넣고 이 병을 다시 내함(內函)과 외함(外函)에 차례로 넣어 사리공(舍利孔)에 봉안한다.
불교에서는 세 가지 성스러운 보배인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를 숭배하고 있다. 그 가운데 승보(僧寶)로 공경받는 많은 고승들은 백성의 스승인 국사(國師)와 국왕의 스승인 왕사(王師)의 칭호를 받았고, 이들은 교화는 물론 불법 탐구에도 정진해서 외국에까지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이리하여 덕망 높은 스님이 일생을 마치면 평소에 스님을 받들던 제자와 신도들이 스승의 묘탑(墓塔)인 승탑(僧塔)과 탑비(塔碑)를 세웠다.
또한 승탑과 탑비는 왕명으로 탑호(塔號)를 받았다. 탑비의 비문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가 글을 짓고 명필가가 글을 써서, 명공이 비석에 행적을 새겼다. 이같이 지극한 정성으로 세워진 승탑과 탑비는 특히 신라 하대부터 장엄하게 조형되어 우리나라 석조미술의 진면목을 이루었다. 승탑은 탑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인도에서 사리불, 목건련 등 성제자(聖弟子)들의 묘탑으로 조성되기 시작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부도(浮屠)’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부도는 ‘붓다(Buddha)’의 음역이라고 하며, 원래는 부처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고승을 부처님처럼 존경해서 부도라 일컬었다. 나아가 고승의 묘탑이 곧 불탑과 대등한 부도라는 뜻으로 굳어진 듯하다. 우리나라 승탑은 절 외곽에 따로 마련한 탑원(塔園)에 탑비와 함께 안치되어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승탑들은 대부분 통일신라 하대 이후에 조성된 것들로, 이 시기의 승탑은 중국에서 크게 일어난 선종불교(禪宗佛敎)의 전래와 관련이 있다. 당시에는 상당한 지위와 덕망을 갖춘 고승에 한해 승탑이 조성되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승탑 중 가장 먼저 조성된 것은 신라 선종산문(禪宗山門)의 하나였던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시조 도의 국사(道義國師)의 탑으로 알려진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지 부도(浮屠)이다. 통일신라 하대부터 고려 전기까지 유행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승탑은 계속 후대로 이어져 조선시대까지 계승되는데, 기본 형식은 변함 없지만 기단과 탑신의 조각은 승탑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 승탑은 조선시대 전까지는 대부분 불탑과는 다른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극히 일부의 승탑만이 석탑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후기 이후로는 석종형 승탑(石鍾形僧塔)과 석탑형 승탑(石塔形僧塔)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조선시대 후기에는 간단한 석종형 승탑이 크게 유행했다.
원래 비석은 중국에서 장례를 치를 때 무덤 안에 관을 쉽게 내리기 위해 세우는 무덤 앞의 돌기둥에서 비롯되었다.
한(漢)나라 때에는 이 돌기둥에 죽은 이의 행적을 기록했으며 일설에는 주(周)나라 때부터 이미 목비(木碑)가 있었다고 한다. 후한시대부터는 비의 머리가 지붕 꼭대기처럼 뾰족하거나 둥글게 만들어지고, 비신(碑身)의 한가운데에는 구멍을 뚫어 관을 내리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 비의 테두리에는 용(龍), 꽃, 사신(四神) 등을 새겼는데, 현무(玄武)를 새겼던 아래쪽과 용을 새겼던 위쪽은 각각 댓돌과 머릿돌에 해당하는 귀부(龜趺)와 이수(栗首)로 발전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거북돌과 용머리를 갖춘 비석이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부터 등장하고, 당나라 때에 들어서는 일정한 신분의 귀족들이 거북비를 사용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비들 가운데 큰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고승비(高僧碑)와 사찰의 내력을 새긴 사적비(寺蹟碑)들이 압도적으로 많아 불교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석비의 발자취를 볼 때, 석비는 원시적인 석각(石刻)에서 출발해서 자연석을 사용한 비석을 거쳐 예술적인 비석으로 정착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당나라 문화의 영향으로 예술적인 석비가 조성되기 시작했으며, 신라 하대에 들어 선문 조사(禪門祖師)들의 비를 세우면서 석비 문화가 눈부시게 발전했다.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석비 형태는, 지상의 영물인 거북을 받침돌로 해서 비신을 받치게 하고, 거북의 등 위에는 구름무늬를 장식해 비석의 주인공이 천상에 존재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또한 비신의 윗부분에는 여러 마리의 용을 장식해서 역시 천상의 영물을 표현했으며 때로는 불교와 관련 있는 구룡(九龍)을 표현하기도 했다. 화순 쌍봉사 철감 선사비(雙峰寺 澈鑒禪師碑)는 대표적인 통일신라 석비인 동시에 우리나라 석비 예술의 대표작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석비의 위용이 더욱 당당해지고 규모 또한 매우 장중해진다.
다만 머릿돌에 새겨진 활기에 찬 용무늬 조각이 자유분방한 양식에서 틀에 박힌 형식으로 바뀌고, 거북돌의 등가죽에는 왕(王)자, 만(卍)자, 꽃무늬 등을 새겨 장식이 다양해진다.
한편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는 간략한 댓돌 위에 비석을 세우고, 빗돌 위에는 가옥형(家屋形) 지붕돌을 얹는 새로운 형식이 나타나 오늘날까지 가장 보편적인 석비의 형식으로 유행하고 있다.
석등의 일반적인 구조는 땅 위에 댓돌을 놓고, 중간부에는 기둥을 세우고, 상단에는 연꽃 받침대를 장식하고, 그 위로는 불발기집[火舍石]을 얹게 되어 있다. 기본적인 평면 형태는 팔각형을 이루며, 기둥은 팔각기둥, 사자모양, 장구모양 등으로 표현된다. 고려시대부터는 사각형과 육각형 석등도 등장한다.
불발기집은 양면(兩面)이나 사면(四面) 또는 팔면(八面)으로 불빛창[火窓]을 내고, 테두리에는 비비람을 막기 위해 종이나 베를 씌운 창틀을 고정할 수 있는 못구멍을 내었으며, 창 주위에는 사천왕이나 보살상을 조각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팔각기둥형 석등인데,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부석사 석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3. 불상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지 5백여 년이 지나서야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불상이 없었던 시기의 초기 불교미술을 일반적으로 불상이 없는 시대의 불교미술이라 하여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라 부른다. 불상이 없었던 시기에는 보리수·법륜·불족·탑 등이 예배 대상이었다. 고대 인도 중기에 해당하는 쿠샨왕조 시기, 즉 기원후 1세기경에 간다라와 마투라 지방에서 불상이 탄생했다. 이 두 지역의 당시 역사가 분명하지 않아 불상 제작 시기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즉 불상의 간다라설과 마투라설이 팽팽하게 맞서왔다. 다행히 요즘은 학계에서 간다라와 마투라 동시설로 견해가 일치되고 있다. 간다라와 마투라 지역에서 제작된 불상은 그 모습이 전혀 달라 각각 독자적으로 불상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미술에는 탑이나 불상을 조성하거나 불화를 봉안할 때 갖추어야 할 일정한 형식이 있다. 예를 들면 불상을 조성할 때 부처님의 모습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경전에서 규정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32상 80종호이다. 이러한 일정한 틀을 우리는 도상(圖像)이라 한다. 따라서 불교미술에서는 이 도상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불상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부처님이 앉는 대좌(臺座), 부처님의 몸인 불신(佛身), 부처님의 몸을 장엄하는 광배(光背)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부처님 몸과 광배에 대해서만 32상 80종호에 규정되어 있고, 대좌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한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32상 80종호는 부처님이 갖춘 관상(觀相)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32상은 대상(大相)이라 하여 기본적인 특상(特相)을 말한다. 80종호(種好)는 소상(小相)이라 하여 대상을 전제로 한 세부의 특징으로 80수호(隨好)라고도 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 제4권에서 이르기를 “대왕의 태자께는 실로 32상이 있습니다. 만일 집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요, 집을 떠나면 반드시 부처님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따라서 32상은 원래 대인(大人) 즉 대장부(大丈夫)의 특수한 상으로서, 세간에서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출세간에서는 여래(如來)가 갖추어야 하는 상이다. 이것은 불상을 조성하는 데 하나의 모범이 되었다.
(1) 불신(佛身)
32상 80종호가 모든 부처님의 형상에 그대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을 가진 부처님의 모습을 규정한 것을 조각이나 그림에 모두 적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32상 80종호의 규정이 불상을 만드는 기본 도상이 된 것은 사실이고, 이에 따라 조성된 불상은 어느 시대, 어느 곳을 막론하고 비슷한 모습이 된 요체인 것이다.
① 머리카락
부처님의 머리 모양은 원래 비구들과 마찬가지로 머리털을 깎은 형태였을 것이 분명하지만 불상이 조성되던 당시에는 다르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머리의 정상에 높은 육계(肉髻)가 표현되고, 머리카락은 나선형의 나발으로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가게 했다. 이것은 원래 성자들이 긴 머리카락을 위로 틀어 올려 묶던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② 백호(白毫)
부처님의 이마에 난 흰 털을 말한다. 원래는 ‘중도일승의 법(中道一乘의 法)’을 상징한다고 한다. 불상에는 수정 같은 보석을 끼우거나 도드라지게 새기기도 하며, 흰 털을 직접 그려넣기도 한다.
③ 귀
귀인(貴人)의 상호에서 긴 귀는 빠뜨릴 수 없는 특징이기 때문에 이것을 불상에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한다.
④ 손
초기 불상에는 손바닥에 바퀴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불법의 전도를 뜻하는 이 바퀴무늬는 후대에 이르면서 점차 사실적인 손금으로 표현된다. 우리나라 불상은 이러한 특징을 받아들여 선운사 금동 지장보살상 등 몇몇 불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손금으로 표현되어 있다.
(2) 광배(光背)
32상 80종호의 규범에는 “한 길이나 되는 빛이 비친다.”라는 항목이 있는데, 이것을 형상으로 나타내면 광배가 된다. 부처님의 신비함과 위대함을 장엄하게 드러내기 위해 빛의 발산을 표현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빛은 머리에만 비칠 수도 있고 전신에 모두 비칠 수도 있다. 즉 두광(頭光)과 전신광(全身光)이 그것이며, 이것을 형상화하면 머리광배와 전신광배가 된다.
(3) 대좌(臺座)
대좌는 앉는 자리를 말하며, 좌(座)또는 좌대(座臺)라고 한다. 불상은 불신, 광배, 대좌가 하나를 이루어야 완성되기 때문에 불상에서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그러나 불상의 규범인 32상 80종호에는 대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대좌는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참선할 때 앉았던 풀방석이 유래가 된다. 이것이 부처님을 신격화함에 따라 금강보좌(金剛寶座)로 변하는데, 불상이 다양해지면서 보살상, 신장상 등이 등장하고, 대좌는 한층 더 다채롭게 변한다. 대좌의 종류는 《대지도론》에서 언급한 사자좌(獅子座)와 연화좌(蓮華座)가 보편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손가짐[印契]
불상을 보고 무슨 부처님인가를 판단할 경우, 대개 몇 가지를 종합해서 정의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손 모양이다. 사실 불상의 손을 보면 제각기 달라서 가히 천차만별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러한 여러 모양의 손 모양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고 특정한 모양을 나타낸 것과,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것이다. 전자를 수인(手印)이라 부르고, 후자를 계인(契印)이라 한다. 수인과 계인을 합쳐서 ‘인계(印契)’라 부르고, 산스크리트로는 ‘무드라(Mudra)’라고 부르기도 한다.
① 수인(手印)
수인은 석가모니부처님의 근본 5인에서부터 아미타부처님의 9품인, 비로자나부처님의 지권인 등 다양하다. 이들을 다시 모든 불상에 다 사용되는 통인(通印)과 한 불상에만 쓸 수 있는 별인(別印)으로 구별한다. 선정인과 여원인, 시무외인 등은 통인이며,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천지인 등은 석가모니불상의 별인이고, 아미타불상의 별인은 9품인이다. 비로자나불상은 지권인, 약사불상은 약기인, 미륵불상은 용화수인이 별인이다.
■ 천지인(天地印)
천지인은 부처님의 탄생과 관련 있는 수인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고 “하늘 위와 아래에 오직 나 홀로 존귀하도다. 모든 세상이 고통 속에 잠겨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天上天下唯我獨尊 一切皆苦我當安之).”라고 외쳤다. 이 때 아기부처님의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향하고 있다. 부처님 오신 날 아기 부처님 목욕시키는 의식[灌浴式, 灌頂式] 때 볼 수 있는 부처님의 모습이다.
■ 선정인(禪定印)
선정인은 결가부좌 상태로 참선 즉 선정에 들 때의 수인이다. 왼손 손바닥을 위로 해서 배꼽 앞에 놓고, 오른손도 손바닥을 위로 해서 그 위에 겹쳐 놓으면서 두 엄지손가락을 맞대어 놓은 형식이다. 부처님은 출가 후 여러 스승을 찾아 다니며 가르침을 구했다. 그 가운데는 오랜 기간에 걸친 고행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뒤에 부처님은 고행을 그만두고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에 들어 깨달음을 얻었다. 이 때의 손 모양이 바로 선정인이다.
■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항마촉지인은 부처님이 마왕 파순의 항복을 받기 위해 자신의 수행을 지신(地神)에게 증명해보라고 말하면서 지은 수인이다. 선정인에서 왼손은 그대로 두고 위에 얹은 오른손을 풀어 손바닥을 무릎에 대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습으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 이 날이 바로 12월 8일 성도절(成道節)로 불교가 시작된 역사적인 날이다. 성도절은 부처님이 수많은 마왕의 군대를 항복받고 깨달은 날이며, 인간의 몸으로 신의 세계를 뛰어 넘어 대자유인의 시대를 연 날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불상 가운데도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부처님이 가장 많다. 석굴암 부처님의 손 모양이 바로 그것이다. 보통 불전(佛傳) 미술에서는 이 항마의 장면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 설법인(說法印) 또는 전법륜인(轉法輪印)
설법인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뒤 다섯 비구에게 첫 설법을 하며 지은 수인이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경지가 너무 심오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를 주저했지만, 범천(梵天)의 간청으로 법을 설할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전에 함께 고행하던 다섯 사람의 수행자들을 찾아나섰다. 녹야원에 도착한 부처님은 다섯 사람의 수행자를 위해 처음 법을 설했는데, 이것을 일컬어 ‘초전법륜’이라고 한다. 진리의 수레바퀴를 처음으로 돌렸다는 의미다.
현재 바라나시 녹야원에 있는 사르나트박물관의 초전법륜상이 유명하다. 우리나라에는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불상이 대표적이나, 그 예가 많지 않다.
■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
시무외여원인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합친 것으로,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것을 상징하는 수인이다. 시무외인은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위로 뻗치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 높이까지 올린 형태다. 여원인은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손가락은 펴서 밑으로 향하며, 손 전체를 아래로 늘어뜨리는 모습이다. 이 두 수인은 처음에는 달리 표현되었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시무외여원인으로 함께 표현되고 있다.
시무외여원인은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삼국시대의 불상에 나타난다. 석가모니불상뿐만 아니라 다른 불상에도 표현된다. 따라서 어느 부처님이나 두루 취하는 수인이기 때문에 별인(別印)과 구별해서 통인(通印)이라고 한다.
■ 아미타정인(阿彌陀定印)과 구품인(九品印)
아미타정인은 선정인을 약간 달리한 것으로 두 손을 배쪽에 가까운 다리 위에 올려놓고, 두 손의 엄지는 끝을 맞대고 다른 손가락은 펴서 서로 깍지낀 모양이다. 부처님의 가장 큰 바람은 모든 중생을 자비로 구제하는 것인데, 중생들의 근기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그들에게 맞는 설법이 필요했다. 구품인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품[根機]과 생[往生]을 상배·중배·하배로 나누고, 다시 각각 상중하 3품으로 구분하는 구품왕생(九品往生)으로 이루어져 있다.
■ 지권인(智券印)
지권인은 밀교 가운데 태장계의 주존불인 마하비로자나부처님, 즉 대일여래가 짓는 손가짐이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서 각각의 엄지손가락을 손바닥으로 감추고 다른 손가락들로 감싸 주먹을 쥔다. 이런 두 손을 아래 위로 겹치고, 왼손의 검지는 세워서 오른손의 주먹 속으로 넣는 모양이다. 이것은 이(理)와 지(智), 중생과 부처, 미(迷)와 오(悟)가 본래 하나라는 것을 상징하는데, 손 모양을 통해서 이러한 진리를 즉시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 약기인(藥器印)
약사불상의 가장 큰 특징은 수인(手印)과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인 지물(持物)에 있다. 먼저 지물인 약기(藥器)에 대해 살펴보면, 우리나라 약사불상은 보주(寶珠) 형태와 약그릇[藥器] 형태로 구분된다. 대부분의 약사불상은 약그릇으로 보주형의 지물을 가지고 있는데, 이처럼 둥근 보주형으로 만든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보주의 의미로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제10에 의하면 “사람의 질병을 치료해주고 빈궁에서 벗어나게 하며, 아울러 어떠한 독(毒)도 침투하지 못하게 하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성질을 갖는 보주는 현세구복 신앙의 성격이 강한 관음보살, 지장보살, 약사불의 지물로 사용된다. 둘째로는 약호(藥壺)나 약합(藥盒)을 단순화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② 계인(契人)
계인은 손에 물건을 든 수인을 말한다. 약사부처님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상이 계인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주로 보살상, 신장상, 나한상들이 계인을 하고 있다. 수많은 보살상과 신장상과 나한상들은 각각 다른 지물을 들고 있기 때문에 종류는 그만큼 다양하다. 법구(法具), 무구(武具), 약기(藥器), 동물, 식물, 옥류(玉類), 건축물, 장신구, 별, 자연현상 등 모든 것이 그 대상이 된다.
불보살상, 나한상, 조사상 및 천부신장상
(1) 불상(佛像)
불교의 상(像)은 일반적으로 여래상, 보살상, 신장상, 나한상 및 조사상으로 구분된다. 불상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이고 최고의 경지인 깨달음을 얻은 이를 상징하는 것이고, 보살상은 깨달음은 얻었지만 아직 중생제도를 위해 부처가 되는 걸 잠시 미룬 이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불상과 보살상은 시각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불상은 32상 80종호라는 규범에 따라 조성되었고 전륜성왕이 모델이기 때문에 남성의 모습이다. 이에 반해 보살상은 중생들의 다양한 원(願)에 귀 기울이기 위해 남성의 모습보다는 여성의 모습에 가깝다. 불상과 달리 보살상은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寶冠)을, 몸에는 영락(瓔珞)이라는 장신구를 하고 하늘거리는 천의(天衣)를 입었다.
나한상은 깊은 산속에서 수행에 전념하는 나이 많은 수행자, 즉 노스님을 연상하면 맞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신선의 모습이 바로 나한의 모습에 가깝다. 신장상은 주로 무장한 모습인데, 사천왕상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불상은 무수하게 많고, 매우 다양하게 나뉜다.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삼신불상(三身佛像)과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三世佛)이 있다. 이것이 각각 천불(千佛)로 확대되어 모두 삼천불이 되기도 한다. 또한 방위를 나타내는 사방불(四方佛), 오방불(五方佛) 등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부처님 가운데 석가모니불상, 비로자나불상, 아미타불상, 약사불상, 미륵불상 등이 많이 조성되었다.
① 영산회상의 교주, 석가모니부처님
부처님은 2천6백여 년 전에 중인도의 카필라성에서 태어났으며,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분이다. 출가해서 6년의 힘든 수행 끝에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번뇌를 단숨에 끊어버리고 위대한 승리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큰 영웅, 즉 대웅(大雄)이라 하였으며, 그를 모신 전각을 대웅전(大雄殿)이라 부르게 되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좌우에 약사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 또는 아미타부처님과 미륵부처님을 봉안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는 대부분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부른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좌우 협시보살(協侍菩薩)은 반야(般若)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중생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수행하는 행원(行願)을 상징하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대표적이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대웅전에 주존불(主尊佛)로 봉안하거나 응진전, 나한전, 영산전, 팔상전 등에도 주존불로 봉안했다. 응진전 등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좌우에 미륵과 제화갈라 보살 등 수기삼존(授記三尊)을 봉안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② 서방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아미타부처님
아미타부처님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로서 죽음의 고통에서 중생을 구제하고자 오는 분이다. 산스크리트로 아미타바 붓다(Amita-bha Buddha) 또는 아미타유스 붓다(Amita-yus Buddha)로도 불린다. 아미타바는 한량없는 빛을, 아미타유스는 한량없는 수명을 의미한다. 그래서 전자를 무량광불(無量光佛), 후자를 수량수불(無量壽佛)이라 한다.
아미타부처님은 서방극락(西方極樂)에 계시면서 뭇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분이다. 누구든지 아미타부처님을 지극 정성으로 부르면 서방극락의 정토(淨土)로 맞아가신다.
아미타부처님에 대해서는 정토 삼부경, 즉 《무량수경(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아미타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을 무량수전, 극락전, 미타전이라고 한다. 좌우 협시보살은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가장 보편적이나, 고려시대부터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배치되기도 했다. 도상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신앙형태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③ 중생의 병고를 다스리는 약사부처님
인간의 근본 고(苦)는 생로병사(生老病死)다. 그 가운데 가장 현실적인 고(苦)를 들라면 병고(病苦)를 들 수 있다. 이처럼 인간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질병문을 불교에서는 약사신앙으로 해결하려 했다. 약사신앙은 약사유리광여래 또는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 하는 약사불이 보살이었을 때 서원한 12대원(大願)을 뼈대로 한 것이다.
이 12대원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된다. 하나는 중생들이 갖는 현세의 소망을 이루게 한 후 궁극적으로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이루게 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중생들의 병고를 치료해주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약사신앙은 중생들의 병고 내지는 질병 치료뿐만 아니라, 그들이 갖는 현세의 소망을 성취케 하고 마침내는 해탈하고자 하는 기대에서 이루어진 신앙체계였다.
약사부처님을 모신 전각을 약사전 또는 유리보전(琉璃寶殿)이라 하며, 좌우 협시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다. 이와 함께 약사 12대원을 상징하는 약사 12신장을 거느리고 있다.
④ 용화수(龍華樹) 꽃을 든 미륵부처님
미륵부처님은 메시아로 널리 알려진 미래불(未來佛)이다. 미륵신앙과 관련된 대표적인 경전이 여섯 종류가 있는데, 이 가운데 《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미륵상생경), 《불설미륵하생경》(미륵하생경), 《불설미륵대성불경》(미륵대성불경)을 미륵 삼부경이라 한다.
미륵 경전의 내용은 주로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인 미륵보살이 도솔천에 상생(上生)해 있다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56억 7천만 년 뒤에 내려와 [下生] 용화수 아래에서 설법하여 고통받는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것이다. 미륵부처님(미륵보살)의 세상은 어떤 고통도 없는 낙원이며, 인간의 수명은 8만 8천 살이며, 생각만 해도 모든 것이 저절로 생기는 곳이라고 한다.
불교미술에서는 각 시대마다 미륵신앙을 근거로 한 미륵보살과 미륵부처님을 만들어 정성껏 봉안해왔다. 삼국시대에는 미륵상생경을 기초로 사색에 잠긴 모습의 미륵보살상을 만들었다. 국보 78호와 83호 금동 미륵반가사유상은 도솔천에서 끊임없이 수행에 전념하고 있는 보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2) 보살상
보살상은 대승불교의 특징을 상징하는 보디사트바(Bodhisattva)를 도상화한 상이다. 보살은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上求菩提 下化衆生)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대승불교에는 수많은 보살상이 등장하고 있다.
보살상은 대부분 머리에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머리칼[寶髮]을 드리우며, 몸은 장신구로 장엄하고 옷은 천의를 걸치고 있다. 보통 보살상에는 독존상도 있지만 거의 부처님 좌우의 협시상으로 조성된다. 불상이 주연이라면 보살상은 조연으로 주연 배우의 성격을 드러내주고 곁에서 보좌하는 구실을 한다. 즉 본존(本尊)은 불상이고, 협시(協侍)는 보살인 것이다. 때로는 보살상이 홀로 주연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보살이 바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문수보살이다. 보살상은 주로 손에 든 물건에 따라 구분하기도 하고, 보관의 형태에 따라 구분하기도 한다.
① 지혜의 상징 - 문수보살
문수보살은 산스크리트로 ‘만주슈리(Man~jus´ri)’며 이 말 전체를 묘길상(妙吉祥)·묘덕(妙德) 등으로 번역한다. 문수사리와 만수실리는 이 만주슈리를 소리나는 대로 쓴 것이며, 문수(文殊)란 문수사리(文殊舍利)를 생략한 말이다. 문수보살은 불교의 실천[行]을 상징하는 보현보살과 함께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의 협시보살로 사자를 탄 형상으로 나타난다.
문수보살상은 사자를 타고 있는데 이렇게 사자를 탄 문수를 언급한 최초의 경전이 초기 밀교 경전인 《다라니집경》이다. “문수의 몸은 온몸이 흰색이며 정수리 뒤에 빛이 있다. 칠보의 영락과 보관(寶冠), 천의(天衣) 등 갖가지로 장엄하고 사자에 올라타고 있다.”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문수 신앙처는 오대산과 금강산이다. 오대산 상원사 청량선원의 문수보살상과 문수동자상이 유명하다.
② 지혜의 실천자 - 보현보살
보현보살은 산스크리트로 ‘사만타바드라(samantabhadra)’이다. ‘사만타’란 ‘완전한’ ‘보편적인’이라는 뜻으로, 보(普)·편(遍) 내지는 보편(普遍)으로 한역된다. ‘바드라’란 ‘행복한’, ‘좋은’,‘아름다운’이라는 의미로 현(賢)·현선(賢善)·선(善)·묘(妙) 등으로 의역된다. 이 의미대로 본다면 보현보살은 이 세계 곳곳에서 어질고 아름다우며 완벽하게 나타나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바로 문수보살의 지(智)와 대응하는 실천적이고 구도적인 행(行)의 보살이다.
보현보살은 여섯 개의 상아를 지닌 흰 코끼리를 타고 모든 장소에 몸을 나투어 청량한 빛으로 중생을 길러내는 자비를 상징한다. 따라서 불교미술에서는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의 좌우 협시보살로서 늘 함께 표현된다.
③ 깊은 명상에 잠긴 미륵보살
미륵보살은 미륵불과 마찬가지로 즐거움을 준다는 산스크리트 ‘마이트리(maitri)’에서 파생된 ‘마이트레야(Maitreya)’로서 자씨보살(慈氏菩薩)로 의역된다. 석가모니불도 이 세상에 태어나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도솔천 내원궁(內院宮)에서 살았던 것으로 설해져 있다. 미륵보살은 56억 7천만 년 동안 도솔천에 머물면서, 여러 중생들을 위해 법을 설하고 깊은 사유에 잠기기도 하면서 수행에 몰두한다.
《미륵하생경》과 《미륵대성불경》에 따르면, 미륵보살이 지상에 하생(下生)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륜성왕이 통치하는 이상사회가 구현되어 있어야 한다. 실제로 백제와 신라의 지배층은 이 미륵하생신앙을 미륵보살이 하생할 만한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주체로서 자신들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반가사유상을 삼국시대인 6세기부터 통일신라 초기까지 약 1백 년간 집중적으로 조성했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국보 제78호와 제83호 미륵반가사유상이 대표적인데,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고류지(廣隆寺)와 츄코지(中宮寺)의 반가사유상과 같은 많은 예를 남기고 있다.
④ 대자비의 화신 - 관세음보살
대승불교의 꽃인 관음보살은 산스크리트 명칭으로 ‘아바로키테슈바라(Avalokites´vara)’라고 하며, 여러 종류가 있다. 《법화경》 <보문품>에서는 그 변화의 모습을 33가지로 나열하고 있다. 그 가운데 성관음(聖觀音)·천수관음(千手觀音)·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불공견삭관음(不空寇索觀音)·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마두관음(馬頭觀音)·준제관음(准提觀音) 등이 가장 유명하다.
관음보살상이 다른 보살상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보관에 표현된 화불(化佛)과 손에 연꽃 가지나 연꽃 봉오리, 또는 정병(淨甁)을 들고 있는 점이다. 보관 속의 화불은 《관무량수경》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미타불의 화신이다. 정병은 물 가운데서도 가장 깨끗한 물[淨水]를 넣는다는 뜻이다. 깨끗한 물은 감로수(甘露水)라는 말과도 통하는데, 감로수는 중생들의 고통이나 목마름을 없애준다. 특히 관음보살이 이 감로수로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주어 감로병이라고 했다. 관음보살 외에도 미륵보살이나 제석천 등도 이러한 병을 들고 있다.
⑤ 지옥 중생의 구제를 서원한 지장보살
명부(冥府)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할 때까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룬 분이 지장보살(Ks·itigarbha)이다. 지장보살은 전생에 장자의 아들이었고, 또 다른 전생에서는 한 바라문의 딸이었다. 지장보살의 도상 특징인 보주(寶珠)와 석장(錫杖)의 의미가 이로써 설명된다. 지장보살은 협시로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를 거느린다.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을 지장전(地藏殿), 명부세계의 재판을 담당하는 왕과 함께 봉안하면 명부전(冥府殿), 시왕전(十王殿)이라 한다. 지장보살의 도상 특징은 화려한 보관(寶冠) 대신 삭발한 스님의 머리를 하고 있거나 때로는 두건을 쓰기도 한다. 아마 여기저기 중생들의 다양한 바람에 부응하려면 몸에 장신구를 두르는 것이 거추장스러웠을 것이다. 손에는 석장과 보주를 쥐고 있다. 지장보살이 들고 있는 보주(寶珠)를 여의주(如意珠, cinta-man·i)라고도 한다.
⑥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불교에서 인간의 수명과 관련이 깊은 부처님은 약사여래와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다. 이 두 부처님의 좌우 협시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다. 《약사여래본원공덕경》에서는 일광과 월광보살이 약사불의 협시로 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불교미술에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은 해와 달을 가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때로는 보관(寶冠)에다 해와 달을 표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손에 들고 나타나기도 한다.
(3) 나한상과 조사상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가섭 존자와 아난 존자같이 훌륭한 분들의 상을 표현한 것이 나한상이고, 한 종파의 큰스님을 조각한 것을 조사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조각으로 표현될 경우, 세속을 초탈한 스님 모습을 하고 있다. 나한상은 가섭과 아난 존자 등 십대제자를 중심으로 5백 나한, 1천2백 나한 등 많이 있다.
조사상은 용수, 무착, 세친, 현장, 원효, 의상, 지장 등 인도와 중국, 또는 우리나라의 고승상이다. 해인사의 목조 희랑 조사상이 대표적이다.
(4) 천부신장상(天部神將像)
불교에는 불보살 외에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을 비롯해서 사천왕, 팔부중 등 수많은 호법신(護法神)들이 있다. 이들은 부처님이 설법하실 때 여러 성중(聖衆)과 함께 불법을 찬양하며 불법의 외호(外護)를 맹세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들을 신중(神衆)이라고 한다. 특히 무장형의 여러 존상(尊像)을 외호신중(外護神衆) 또는 신장이라고 부른다. 곧 무력으로 적을 항복받으며, 불법(佛法)을 옹호하고, 불경(佛經)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는 사람들을 외호하는 신들을 말한다.
①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인왕상
■ 제석천
인도에서 제석은 ‘인드라(Indra)’이며, 범천은 ‘브라만(Brahman)’ 신으로 고대 인도 최고의 신들이다. 제석천은 수미산 꼭대기 도리천(瀟利天)의 주인으로 불교화하면서 부처님을 수호하는 최고의 수호신이 되었다. 그래서 불상의 좌우에 많이 묘사되었고, 후에는 사리기(舍利器)나 탑신 같은 데에도 자주 새겨졌다.
■ 범천
범천은 제석천 인드라와 더불어 불법 수호의 쌍벽을 이루는 범천 브라만이다. 근본불교 경전을 보면 대범천은 이 사바세계의 주인으로서 상당히 교만한 존재였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을 듣고 교만심을 없애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특히 항상 법을 설해줄 것을 청하고, 항상 그 설법이 이루어지는 자리에 참석해서 법을 듣고 묻는다. 나아가 제석천과 더불어 불법을 수호할 것을 서원한다.
■ 인왕상
인왕은 금강역사(金剛力士)라고도 불리며, 문을 지키는 수문장 구실을 한다. 금강역사상은 문 외에도 석탑과 부도의 탑신부 또는 사리기, 불감(佛龕, 불상을 모셔놓는 작은 집), 신중탱화 등에도 등장해서 불보살과 사리를 수호하고 있다. 금강역사의 산스크리트 이름은 ‘바즈라파니(Vajrapa-n·i)’ 또는 ‘바즈라다라(Vajradhara)’이다. 금강저, 즉 바즈라의 주인 또는 그 금강저를 들고 있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집금강(執金剛) 또는 금강수(金剛手)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우리나라 금강역사상은 대부분 맨손이며, 간혹 왼손에 칼을 들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보통 사찰 출입구[金剛門]의 오른쪽에는 입을 벌리고 있는 아형(阿形: ‘아’하고 입을 벌린 채 공격하는 모습을 취함) 금강역사, 왼쪽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 훔형(‘훔’하고 입을 다문 채 방어하는 자세를 취함) 금강역사가 배치되어 사찰을 수호한다. 아형 금강역사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 훔형 금강역사는 밀적금강(密蹟金剛)이라 부른다. 나라연금강은 천상의 역사(力士)로서 힘이 코끼리의 백만 배나 된다고 한다. 밀적금강은 언제나 금강저를 들고 부처님을 호위하며, 온갖 비밀스러운 사적(事跡)을 알고 있다고 한다.
이들 인왕상의 도상 특징은 상체를 벗은 반나체에 손은 권법(拳法)을 짓거나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② 사천왕상(四天王像)
사천왕은 인도 신화시대부터 전해오는 호세신(護世神) 또는 방위신(方位神)으로,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의 중복(中腹)에 사는데, 그 정상의 도리천에 사는 제석천의 권속이다. 사방사주(四方四洲)를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많은 경전에 설해져 있다.
사천왕신앙은 사악한 것으로부터 신성한 것을 보호하고 침략자로부터 약한 자를 수호하는 구실을 한다. 그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는 호국사상(護國思想)과 연결되었고, 종교적으로는 사찰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사천왕상은 그 생김새 때문에 무서운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사찰 초입의 천왕문에 모셔진 사천왕상은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한다. 이처럼 사천왕상이 무서운 형상으로 변한 것은 실크로드를 통해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인도 귀족형의 온화한 모습이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분노상으로 변했다.
사천왕상이 무서운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은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식을 불러일으켜 깨닫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우리 내면의 번뇌를 끊게 하고 불법을 수호하기 위해,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무서운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거나 북방민족이 사용하던 털 목덮개가 달린 투구를 쓰고 있기도 하다. 특히 북의 다문천왕이 탑을 든 것은 다른 상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사천왕이 담당하는 방위는 동방은 지국천왕(持國天王), 남방은 증장천왕(增長天王), 서방은 광목천왕(廣目天王), 북방은 다문천왕(多聞天王)이다. 이 사천왕은 손에 갖가지 물건을 들고 있는데 시대에 따라 물건이 달라진다. 대부분의 경우 양쪽 발 밑에 악귀(惡鬼)를 밟고 있다.
③ 팔부중상(八部衆像)
팔부중상은 인도 재래의 여덟 신을 불교가 습합해서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의 선신(善神)으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신의 이름도 일정하지 않고 모습 또한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팔부중은 대개 무장을 한 모습이 많고, 손에 들고 있는 지물이나 자세도 여러 가지이다. 주로 불탑이나 승탑의 기단부에 팔부중이 많이 조각되어 있다.
4. 불화
불화는 넓은 의미로는 불교와 관련된 모든 그림을 일컫는다.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여러 존상들, 예를 들어 부처님·보살·신중을 나타낸 그림, 그리고 고승대덕을 기리기 위해 그린 그림 곧 진영(眞影)은 물론 부처님의 전생이야기, 부처님의 일대기, 법회의 모습을 그린 그림, 경전에 그려진 그림, 전각(殿閣)의 벽에 그려진 벽화 등을 일컫는다. 그리고 여러 전각을 오색(五色)을 기조로 갖가지 문양을 베풀어 장엄하는 이른바 단청(丹靑)도 불화의 범주에 포함하고 있다.
한편 좁은 의미로는 불화(佛畵)라는 말뜻 그대로 직접적으로 예배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佛陀]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불화라고 하면 불교 그림을 총칭한다.
(1) 불화의 의의
불화가 지니고 있는 의의는 크게 종교성과 예술성의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불화가 일반 그림과 다른 이유는 바로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단순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불교의 이념이나 사상을 알기 쉽고 아름답게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화를 통해 감명을 받아 불교의 세계를 이해하고 나아가 종교적인 실천을 유발하는 것이 불화의 진정한 의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불화는 한 화폭에 다양한 존상을 담을 수 있고, 교리 내용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어서 불상보다 휠씬 설명적이다. 그러므로 불교를 이해하거나 교화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2) 불화의 기원
불화가 언제부터 그려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경전에서는 부처님이 살이 계시던 불교 성립 초기부터 법당을 장엄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有部毘那耶雜事)》 제17권에서는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문 기원정사(祇園精舍)에 불화를 그린 사실이 나오며, 이 내용으로 보아 불화는 기원정사에서부터 그렸고, 건물의 각 용도에 따라 그림의 내용을 달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화로 장엄한 당시의 사원 모습을 지금은 볼 수 없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불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인도 아잔타(Ajanta)석굴의 벽화이다.
불화를 그려 모시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쓰임새로 볼 때 예배용, 교화용, 장엄용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특정한 불화를 한 가지 용도로 제한할 수는 없다. 예배용 불화이면서 장엄하는 기능도 있고, 또한 교화의 구실도 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류는 불화가 봉안되는 위치, 또는 그것이 지니는 내용 등을 살펴서 가장 핵심적인 용도를 중심으로 구분한 것이다.
불화의 종류
(1) 예배용(禮拜用) 불화
오늘날 사찰에서 주된 예배 대상은 불상이다. 우리나라 법당에는 그 성격에 따라 다양한 불상들이 봉안되며, 불상 뒤에는 그 성격과 용도에 맞는 불화를 봉안해서 함께 예배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상과 영산회상도, 극락전에는 아미타불상과 극락회상도,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 삼신불상과 비로자나 삼신불회도(三神佛會圖) 등을 함께 봉안하는 것이 통례다. 이렇게 불상 뒤에 봉안하는 불화를 후불탱화(後佛幀畵)라고 하는데, 불상과 함께 예배의 대상이다. 이들 예배용 불화는 불교의식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사찰의 전각에 장엄된 불화는 불교의식의 구성 내용과 절차에 알맞게 조성되고 예배를 받기 마련이다. 또한 실외에서 거행하는 의식에는 불상이 없으므로 괘불탱(掛佛幀)을 모셔 예배한다. 괘불탱은 대체로 10m 안팎의 거대한 불화이며, 법당 앞에 괘불대를 설치하고 봉안한다. 그러나 항상 봉안하는 것이 아니고 규모가 큰 의식에만 주로 봉안하므로 자주 내걸지는 않는다. 괘불탱 가운데는 연대가 오래되고 우수한 불화가 많다. 우리나라에는 흔하지 않지만 티베트 등지에서 밀교의식 때 사용하는 만다라(曼茶羅)도 예배화로 볼 수 있다.
(2) 교화용(敎化用) 불화
불교 경전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해서, 교리의 이해를 돕고 나아가 감동을 불러일으켜 교화하는 불화를 일컫는다.
예를 들어 부처님의 일대기인 불전도(佛傳圖)나 전생의 이야기를 그린 본생도(本生圖)는 불교의 기본적인 설화이다. 이러한 설화 그림은 인도의 초기 불교미술에서부터 가장 많이 그려져 대중 교화에 큰 구실을 했다. 이러한 불화 가운데 팔상도(八相圖)는 조선시대에 널리 유행한 대표적인 불전도이다. 또한 죄를 지으면 그 업장(業障)에 따라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내용을 그린 시왕도(十王圖), 반대로 선업(善業)을 쌓고 열심히 염불하고 수행하면 극락으로 인도된다는 내용을 그린 아미타래영도(阿彌陀來迎圖), 성반(盛飯)을 차려 부처님께 재를 올려 죽은 이의 영혼을 천도하는 내용을 그린 감로왕도(甘露王圖)와 같은 불화는 불교사상을 쉽게 풀이한 그림으로 대표적인 교화용 불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경전에 포함되어 있는 경변상도(經變相圖)는 교리 내용을 그림으로 알기 쉽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교화용 불화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3) 장엄용(莊嚴用) 불화
법당 본존불상 뒤에 봉안하는 후불탱화는 불상과 함께 예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불상이 상징하는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장엄하는 구실을 하는 면에서는 예배화인 동시에 교화용 불화이자 또한 장엄용 불화라고 할 수 있다. 장엄용 불화의 대표적인 예는 천장이나 기둥, 문 등에 그리는 단청(丹靑)이라고 할 수 있다.
단청은 원래 건물에 그리는 그림을 총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벽화를 곧 단청이라고 일컬었으나 요즘은 후불벽, 좌우 측벽 등과 같은 주요 벽면에 그린 특정한 주제의 불화를 벽화라고 부르고, 단청은 주로 건물의 나무 부재에 그리는 도안적인 그림을 일컫는다. 이러한 단청은 용이나 호랑이와 같은 서수(瑞獸), 봉황이나 가릉빈가와 같은 서조(瑞鳥), 연꽃이나 당초문과 같은 식물무늬를 주요 소재로 한다. 특히 천장에는 연꽃을 도안적인 형태로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꽃이나 향을 공양하는 비천(飛天) 등을 그려 법당의 종교적인 분위기를 한층 높여준다.
(1) 탱화(幀畵)
우리나라에 현재 남아 있는 불화 대부분은 비단이나 삼베, 모시, 또는 면포(綿布)나 종이를 바탕으로 해서 그리고, 족자나 액자 형태로 표장(表裝)해서 불단(佛壇)을 비롯한 의식단(儀式壇)의 벽에 봉안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그림을 일러 탱화 또는 후불탱, 삼신탱, 약사탱 등 ‘○○탱’이라 일컫고 있다.
한편 티베트에서는 비단이나 삼베, 모시 등에 그림을 그려 사원의 바깥 벽에 걸거나 경사진 언덕 등에 펼쳐놓는데 이것을 탕카(thangka)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초파일과 같이 많은 대중들이 모여 큰 의식을 거행할 때 법당 앞에 괘불대를 세우고 모시는 그림을 일러 괘불탱(掛佛幀)이라고 부른다. 직접 그리는 벽화는 이동할 수 없지만, 탱화는 액자나 족자 형태로 별도의 화폭에 그리므로 이동이 가능하다. 다양한 성격의 전각마다 각각의 성격에 맞는 탱화를 그려 봉안한다.
(2) 벽화(壁畵)
벽화는 전각을 장엄하기 위해 그 안팎 벽면에 직접 그리는 그림을 말한다. 전각은 부처님을 봉안하는 곳, 다시 말해 부처님의 정토를 인간 세상에 형상화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분위기가 충만하도록 아름답고 숭고하게 장엄한다. 벽화는 벽면의 재질에 따라 토벽화(土壁畵), 석벽화(石壁畵), 판벽화(板壁畵)로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 사찰의 전각은 나무로 가구(架構)를 엮고, 이들 사이에 생긴 공간에 흙으로 벽을 만들고 그 위에 벽화를 그리므로 대다수가 토벽화다. 벽화는 건물의 수명과 연관되므로 건물이 훼손되면 벽화도 손상을 입게 마련이다. 우리나라는 여러 차례 전란을 겪어서 연대가 오래된 전각과 벽화가 그다지 많지는 않다. 기원정사를 그림으로 장엄했다는 기록에서 불화가 처음에는 벽화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도 조선 초기까지는 법당의 불화를 대부분 벽화로 제작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는 제작공정이 어려운 벽화를 제작하기보다는 탱화를 그려 벽에 거는 방식이 유행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찰의 벽화 가운데 주목받는 것은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 조사당에 그려져 있는 범천과 제석천도, 사천왕도가 고려시대의 벽화로 유명하다. 안동 봉정사 대웅전의 영산회상도(1435년경)와 강진 무위사 극락전의 아미타 후불 벽화(1476년)·아미타래영도·설법도·관음도 등도 널리 알려져 있다. 양산 통도사 영산전의 보탑도, 양산 신흥사 대광전의 아미타여래도와 약사삼존도, 고창 선운사 대웅전의 후불 벽화(1840년) 등도 유명하다.
(3) 경전화(經典畵)
경전에는 손으로 직접 베껴 쓴 사경(寫經)과 나무와 같은 판에 새겨서 찍어낸 판경(版經)이 있다. 이러한 경전에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나 본문을 압축한 그림이 실려 있어 경전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그림들은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했으므로 흔히 변상도(變相圖)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경 변상도는 심오하고 양이 많은 경전 내용을 한 장 또는 몇 장의 그림에 압축해서 표현해 경전의 세계로 인도하고 교화한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사실 방대한 내용을 좁은 지면에 함축적으로 그린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 변상도 중에는 경의 내용 가운데 여러 장면을 한 화면에 설명적으로 표현해서 보기에 매우 복잡한 것도 있다. 반면 구체적인 내용을 생략하고 부처님의 설법장면으로 변상을 대표하는 것도 있다. 경전화는 재료와 기법을 기준으로 해서 사경화와 판경화로 나눌 수 있다. 주제별로 경전의 종류만큼 다양하고, 또한 같은 경전이라도 사경화와 판경화의 도상이 같은 것이 있고 다른 것도 있어, 경전 변상의 도상은 실로 무수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예로 보아, 사경과 판경을 통틀어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가장 많이 간행되었다. 법화경은 대승경전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경전이고, 또한 법화경에서 경전 간행의 공덕을 크게 강조했기 때문이다. 경전에 그림이 배치되는 형식은 권수화(卷首畵)형식, 삽도(揷圖)형식, 병렬전개(竝列展開)형식의 세 가지가 있는데 이는 사경과 판경 모두에 해당한다. 권수화형식은 경전의 첫머리에 그 경의 내용을 압축하거나 대표적인 내용을 묘사한 것이다. 경전화의 대부분이 이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삽도형식은 경전의 본문 가운데 필요한 부분에 그림을 삽입하는 형식을 말한다. 병렬전개형식은 경전의 모든 장마다 본문과 그에 해당하는 그림을 동시에 전개하는 형식이다. 대체로 글과 그림이 상하 또는 좌우로 배치된다. 경전화의 도상에서 불화와 다른 것은 화면이 가로로 길기 때문에 도상이 주로 횡적인 구도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또한 우리나라 경전화의 특징은 사경화건 판경화건 간에 채색이 없는 선묘화(線描畵)라는 점이다. 경전 변상도의 양식은 바로 이 선의 성격으로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각 전각에 설치된 의식단(儀式壇)은 불교의식의 분단법(分壇法)에 따라 크게 삼단(三壇)으로 나누기도 한다. 삼단이란 상단·중단·하단을 일컫는데, 각 단을 다시 상중하로 나누기도 한다. 대체로 삼단을 나누면, 상단은 불단(佛壇)으로 불보살을 모신 단이며, 중단은 신중단(神衆壇)이라 하여 신중을 모신 단이며, 하단은 영가를 모신 영단(靈壇)이 된다.
따라서 각 단에 따라 장엄하는 불화의 유형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금당의 경우, 상단인 불단의 뒤벽을 장엄하는 탱화를 후불탱이라 한다. 이는 ‘불상의 뒤를 장엄하는 탱화’라는 뜻에서 붙인 명칭이다. 그러므로 후불탱의 그림 내용은 전각에 봉안된 상설(像設)의 내용에 따른다. 다시 말해 주존(主尊)에 의해 구분되고 그 명칭도 그에 알맞게 붙인다. 중단은 신중단이므로 장엄되는 탱화는 신중탱이다. 하단은 영가의 위패를 모신 영가단이므로 영가를 천도하는 내용을 담은 그림, 곧 감로탱을 모신다.
(1) 부처님 계열의 그림
여기서 부처님 계열의 그림이라 함은 금당의 상단에 모셔진 주존에 따라 석가모니부처님, 비로자나부처님, 아미타부처님, 약사부처님, 미륵부처님 등 우리나라에서 널리 신앙되는 각 부처님에 속하는 그림을 통틀어서 말한다.
① 석가모니부처님 그림(釋迦牟尼佛畵)
■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대웅전(大雄殿)에는 석가모니불상과 불화를 봉안한다. 석가모니불화는 부처님이 영취산(靈鷲山)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법회 장면을 그린 불화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라고도 한다. 도상은 본존인 석가모니부처님이 수미단의 연화좌에 결가부좌하고 있는 모습이며 중앙에 자리하고,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본존을 중심으로 협시인 문수(文殊)와 보현(普賢) 보살을 비롯한 보살중(菩薩衆), 십대제자(十大弟子)와 분신불(分身佛)이 좌우에 배치되며, 아래에는 사천왕(四天王), 위쪽에는 팔부중(八部衆)이 역시 좌우로 배치되어 법회를 외호하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이들 권속들은 대체로 본존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좌우 대칭의 구도를 이룬다. 여기에 법화경에서 질문자로 나오는 사리불(舍利弗)이 본존의 대좌 앞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질문하는 장면이 첨가되기도 한다.
또한 대웅전에는 이러한 영산회상도 외에 중앙에 석가모니부처님, 왼쪽에 약사부처님, 오른쪽에 아미타부처님의 삼불회도(三佛會圖)를 봉안하기도 한다. 석가모니불화는 대웅전 외에도 영산전, 팔상전, 응진전, 나한전 등에 후불화로도 봉안된다.
■ 팔상도(八相圖)
석가모니부처님의 전기를 여덟 장면으로 압축 묘사한 그림으로, 팔상전(八相殿)에 봉안한다. 본존은 석가모니부처님이므로 석가모니후불화를 봉안하고, 팔상도 8폭을 좌우 각 4폭씩 배치하는데, 본존의 왼쪽(향해서 오른쪽)에는 도솔래의상, 사문유관상, 설산수도상, 녹원전법상, 오른쪽에는 비람강생상, 유성출가상, 수하항마상, 쌍림열반상을 봉안한다.
② 비로자나부처님 그림(毘盧遮那佛畵)
■ 삼신탱(三身幀)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대광명전에 봉안하며, 주로 세 폭으로 이루어진 비로자나삼신불화(毘盧遮那三身佛畵)를 봉안한다. 삼신은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을 일컫는다. 법신은 부처님의 진신(眞身), 즉 영겁토록 변치 않는 만유의 본체(本體)로서의 진리를 말하고, 보신은 인연에 따라 나타난 불신, 화신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스스로 몸을 바꾸어 중생의 모습이 된 불신을 말한다. 이 삼신을 그린 삼신불화에서 법신은 비로자나부처님(毘盧遮那佛), 보신은 노사나부처님(盧舍那佛), 화신은 석가모니부처님으로 표현한다.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은 지권인(智拳印)을 취하며, 협시보살은 석가모니부처님과 마찬가지로 문수와 보현 보살이다. 보신 노사나부처님은 양손을 벌리고 설법인(說法印)을 취하며, 주로 보관을 쓴 보살형으로 표현된다. 화신 석가모니부처님은 항마촉지인을 취하며, 영산회상도와 같은 도상이다.
■ 화엄탱(華嚴幀) = 화엄경변상도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내용을 표현한 그림으로, 화엄전에 봉안한다. 우리나라에서는 80권으로 번역된 80화엄이 주로 유통되었는데, 내용은 크게 일곱 군데에서 행하는 아홉 번의 법회로 구성된다. 화엄탱은 일곱 군데에서 행한 아홉 번의 법회의 장면을 그린 그림이라 하여 ‘칠처구회도(七處九會圖)’라고도 한다. 화엄경 변상도는 크게 상부와 하부로 구성되는데, 화면의 상부에는 천상에서 행하는 네 번의 법회, 하부에는 지상의 법당에서 행하는 다섯 번의 법회 장면, 그리고 화엄경의 마지막 품인 <입법계품>(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의 내용인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찾는 장면이 묘사된다. 최하단부에는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의 연화장세계도가 그려져 있다.
③ 아미타부처님 그림(阿彌陀佛畵)
■ 극락회상도(極樂會相圖=彌陀會幀)
아미타부처님이 서방극락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불화다. 화면의 중앙에 아미타부처님이 설법하고 있고 그 주위에 권속이 배치되는 방식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의 영산회상도와 구성이 비슷하다. 아미타부처님의 협시보살은 관음(觀音)과 세지(勢至) 보살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이 오른쪽 협시보살이 되기도 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존상의 수에 따라 독존도(獨尊圖), 삼존도(三尊圖: 아미타부처님과 관음·세지 보살, 또는 아미타부처님과 관음·지장 보살), 오존도(五尊圖: 아미타부처님과 관음·세지·지장·용수 보살), 칠존도(七尊圖: 아미타부처님과 관음·세지·문수·보현·금강장·제장애 보살), 구존도(九尊圖: 아미타부처님과 관음·세지·문수·보현·금강장·제장애·미륵·지장 보살), 군도 형식인 아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 아미타부처님과 8대보살, 사천왕, 십대제자, 범천·제석천, 타방불·팔부중 등) 형식 등으로 분류한다. 고려시대에는 아미타독존도, 아미타삼존도, 아미타구존도가 많이 제작되었고, 조선시대 사찰의 극락전에는 극락회상도가 주로 봉안되었다. 또한 대웅전의 삼불회(三佛會) 중 왼쪽에 아미타극락회상도를 봉안하기도 한다.
■ 아미타래영도(阿彌陀來迎圖)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외는 염불수행을 열심히 하면 아미타부처님이 내려와서 서방극락으로 맞이해간다고 한다. 이렇게 아미타부처님 등이 왕생자를 서방극락으로 맞이해가는 모습을 그린 것을 '아미타래영도'라고 한다. 아미타래영도에도 설법도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형식이 있다. 아미타부처님이 단독으로 맞는 아미타독존래영도, 아미타삼존이 맞이하는 아미타삼존래영도, 아미타부처님과 8대보살이 맞이하는 아미타구존래영도, 여러 성중(聖衆)들이 함께 맞이해가는 아미타성중래영도, 그리고 왕생자들을 용선(龍船)에 싣고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과 관음보살 등이 아미타부처님에게 인도해가는 용선래영도(龍船來迎圖) 등이 있다.
■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 = 觀無量壽經變相圖)
아미타사상의 기본 경전인 정토 삼부경 가운데 가장 발달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관무량수경》의 내용을 그린 것이다.
관경변상도는 서분(序分)의 내용을 그린 서분변상도(序分變相圖)와 본분변상도(本分變相圖)로 구분된다.
서분변상도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이 경전을 설법하게 된 동기인 위데휘 왕비와 빔비사라 대왕, 그리고 아들인 아사세 태자 사이에 얽힌 마가다왕국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본분변상도는 16관변상도라고도 하며 석가모니부처님이 16가지 극락세계의 장엄함을 관상(觀想)하고 수행하게 하여 위데휘 왕비와 그 일행을 구제하는 내용이다. 16관은 아미타부처님을 관상하는 13단계의 관상법[定善觀]과 근기에 따라 3품으로 분류한 왕생자들이 극락왕생하는 모습이다[散善觀]. 보통 화면 중앙에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세계가 전개되고, 그 위쪽과 좌우에 13관이 배치되며, 하단에는 상중하 3품의 중생들이 왕생하는 모습을 표현한다. 16관은 제1일상관(日想觀), 제2수상관(水想觀), 제3지상관(地想觀), 제4보수관(寶樹觀), 제5보지관(寶池觀), 제6보루관(寶樓觀), 제7화좌관(華座觀), 제8상관(像觀), 제9진신관(眞身觀), 제10관음관(觀音觀), 제11세지관(勢至觀), 제12보관(普觀), 제13잡상관(雜像觀), 제14상배관(上輩觀), 제15중배관(中輩觀), 제16하배관(下輩觀)이다.
④ 약사부처님 그림(藥師佛畵)
■ 약사회탱(藥師會幀=藥師琉璃如來說法圖)
약사부처님의 도상은 왼손바닥 위에 약사부처님의 상징인 약그릇을 올려놓고, 오른손으로는 설법인이나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자세를 취하며, 협시보살은 일광(日光)과 월광(月光) 보살이다. 약사부처님 그림에는 약사부처님과 협시보살을 그린 약사삼존도, 여기에 12신장 등의 권속을 첨가한 약사불회도 등의 형식이 있다. 12신장은 갑옷을 입고 각기 칼, 추, 도끼 등의 무기를 든 무장형이며, 각각 몸의 색을 달리하고 있다. 약사부처님은 약사전에 봉안되거나 대웅전에 삼불회의 한 폭으로 봉안된다.
⑤ 미륵부처님 그림(彌勒佛畵)
미륵불화는 도솔천의 미륵천궁을 묘사한 미륵정토 변상도(彌勒淨土變相圖), 용화수 아래서 미륵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는 미륵하생도(彌勒下生圖), 미륵보살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미륵래영도(彌勒來迎圖)의 형식이 있다. 이와 같이 미륵부처님을 주제로 한 그림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으나,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것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미륵하생경 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 두 점뿐이고, 조선시대 그림으로는 통도사 용화전에 봉안되었던 미륵여래탱뿐이다. 미륵하생경 변상도를 보면 미륵부처님이 용화수 아래서 설법하는 장면과, 미륵부처님이 부처가 되어 하생한 시두말대성(翅頭末大城)의 풍려하고 비옥한 모습, 미륵부처님에게 귀의하는 전륜성왕 부부의 모습 등이 묘사되어 있다. 보살화로는 조선시대에 그려진 괘불들이 전해온다.
(2) 보살 계열 그림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관음전의 상단 그림으로 관음탱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 밖에 명부전의 상단 그림으로 지장탱이 많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지장탱은 따로 명부중 그림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①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
관음보살도는 단독으로도 많이 그려진다. 특히 고려시대 이래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매우 많이 제작되어 현존하는 고려불화 중에는 관음보살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수월관음도는 《화엄경(華嚴經)》의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선지식 가운데 한 분인 관음보살을 찾아가 법문을 구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즉 관음보살이 보타락산의 바위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합장하며 우러러보는 선재동자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자비로우면서 원만한 상호로 아름다운 천의와 영락장식 등을 걸치고 있다. 관음보살 주위에는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이 있고,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 있으며, 파랑새가 날고 있다. 수월관음도는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서정적인 불화다.
(3) 나한 계열 그림
나한을 주제로 그림 그림으로는 십육나한도와 오백나한도가 널리 유행했다. 여기에서는 나한도의 개념을 넓혀서 십대제자나 한 종파를 처음으로 연 조사(祖師)를 비롯한 고승대덕을 기리기 위해 그린 그림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① 나한도(羅漢圖)
우리나라에서 16나한도를 많이 그린다. 응진전이나 나한전에 석가모니 후불화와 함께 봉안한다. 나한도는 이국적인 모습, 탈속한 모습, 자유자재한 다양한 자세, 용 같은 신령스러운 동물을 자유로이 다루는 도인의 모습 등, 도상이 다양하고 자유로워 회화성이 강한 불화다. 16나한도 외에 빈두로 존자만을 그린 나한도를 독성도(獨聖圖)라고 한다. 천태산을 배경으로 늙은 비구가 석장을 짚고 앉아 있는 모습을 주로 그린다. 독성도는 독성각을 지어 봉안하거나 또는 주불전 입구에 봉안하기도 한다.
② 진영(眞影)
고승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진영(眞影)이라고 한다. 진영은 고승 숭배사상과 선종의 영향으로 많이 제작되었는데, 각 종파의 개산조(開山祖)나 국가에 공을 세운 고승, 또는 문파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스님들의 초상을 그렸다. 진영의 형식은 의자에 앉은 의좌상(倚坐像)과 화문석 등이 깔린 바닥에 앉은 좌상으로 구분되며, 의좌상에는 답대(踏臺)에 발을 올려놓고 의자에 걸터앉은 형식과 답대에는 신발만 놓고 의자에 결가부좌로 앉은 형식이 있다. 정면보다는 약간 측면의 자세를 취하고, 스님의 정신이 배어나도록 얼굴에 가장 중점을 두어 정성들여 묘사한다. 진영은 조사당(祖師堂) 또는 진영각(眞影閣) 등에 봉안하는데, 역대 16국사의 진영을 봉안한 송광사의 국사전(國師殿)이 대표적이다.
(4) 신중 계열 그림
① 신중탱(神衆幀)
신중도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제석천과 천부중을 그린 제석도(帝釋圖), 범천과 제석천에 천부중을 그린 제석범천도(帝釋梵天圖), 위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한 천룡팔부중과 사천왕 등 무장의 신중을 그린 천룡도(天龍圖), 제석도와 천룡도를 함께 그린 제석천룡도(帝釋天龍圖), 제석과 금강역사를 그린 제석금강도(帝釋金剛圖), 그 외에 화엄경에 등장하는 39위 신장을 묘사한 39위신중도(39位神衆圖), 104위신중도 등이 있다.
② 사천왕탱(四天王幀)
사천왕은 수미산의 사방을 지키는 호법신으로 동방의 지국천왕(持國天王), 남방의 증장천왕(增長天王), 서방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다. 갑옷을 입은 무장형으로 비파, 칼, 활, 탑과 같은 지물을 들고 있으며, 사찰 입구 천왕문(天王門)에 봉안한다.
③ 칠성탱(七星幀)
칠성도는 북두칠성을 불교화한 그림으로 칠성각에 봉안한다. 본존은 북극성(北極星)을 불교식으로 여래화한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로서, 자연적인 재해나 적의 침략 등의 재앙을 소멸해주고 자손 번성과 수명 연장을 이루어주는 부처로서 조선시대에는 특히 자식 낳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열렬히 받들었다. 치성광여래의 도상은 왼손에 금륜(金輪)이나 약합(藥盒)을 들고 있고, 협시는 일광과 월광 보살이다. 그 밖에 북두칠성을 여래화한 7여래, 필성(弼星), 14성군(星君), 28숙(宿), 삼대육위(三臺六位) 등 도교적 존재들을 불교화해서 배치한다.
④ 산신탱(山神幀)
산신은 호랑이를 불교적으로 신격화한 것이다. 산신도의 도상은 심산유곡을 배경으로 백발이 성성한 신선 같은 산신이 호랑이를 깔고 앉아 있거나 기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며, 산신각에 봉안한다.
(5) 명부중 계열 그림
①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지장보살은 아미타삼존도에서 아미타불의 오른쪽 협시보살로도 표현된다. 지장독존도, 도명 존자와 무독귀왕과 함께 그리는 지장삼존도, 지장삼존도에 범천, 제석천, 사천왕 등을 첨가한 지장권속도, 여기에 시왕을 첨가한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지장시왕도 아래에 지옥 장면을 첨가한 지장경 변상도 등의 형식이 있다.
②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
지장보살신앙이 확대된 것이 삼장보살이다. 이는 천장(天藏)·지지(地持)·지장(地藏) 보살을 일컫는 것으로, 법신불·보신불·화신불로 이루어진 비로자나 삼신불과 같은 삼신불의 논리를 지장보살에게 적용함으로써 성립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삼장보살도의 도상은 중앙에 천장보살과 권속, 오른쪽에 지지보살과 권속, 왼쪽에 지장보살과 권속을 그리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도상의 불화이다.
③ 시왕도(十王圖)
명부에서 죽은 자의 죄업을 심판하는 열 명의 대왕인 시왕을 그린 그림으로, 명부전에 봉안한다. 명부전에는 본존으로 지장보살상과 지장보살도를 봉안하며, 그 좌우에 시왕도를 배치한다. 시왕은 명부의 재판관인 염라대왕이 중국에서 도교와 결합되어 십대왕으로 확대된 것이다.
죽은 중생들이 1·7일에서 7·7일까지와 백 일, 1년, 3년 등 열 차례에 걸쳐 각 왕 앞에 나아가 재판을 받는데, 3년 안에 태어날 세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경전에 따르면 열 명의 대왕은 관장하는 지옥이 따로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시왕탱은 상단에 자리한 대왕과 하단에 그려진 지옥 장면이 경전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5. 불교 공예
공예란 일반적으로 인류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생활용품 및 도구를 말하는데, 그 가운데 미술적으로 아름답고 뛰어난 것들만에 한정해서 이른바 공예(품)라고 일컫고 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불교공예 역시 사찰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종교의례에 쓰이는 것부터 수행자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갖가지 용품과 도구를 말한다. 불교공예는 일반 공예가 지닌 쓰임새와 아름다움에 종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점이 크게 다르다.
다시 말해서 불교공예란 불교라는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이른바 법구(法具) 또는 불구(佛具)라는 신앙의 의미를 지니고 조성되지만, 일반 공예품과 같이 조성 시기에 공통적으로 존재했던 일반적인 미적 감각과 미술 양식이 반영되기도 한다.
불교공예는 조각, 회화, 건축을 제외한 온갖 것을 다 포함할 정도로 범위가 넓으며, 종류 또한 다양하다. 따라서 불교공예의 유형을 분류하는 일은 쉽지 않으며 분류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서는 주로 쓰임새에 따라서 크게 의식법구와 공양구, 장엄구로 구분해보았다.
(1) 의식법구(儀式法具)
의식법구는 불교의식을 행할 때 사용하는 여러 가지 법구를 말한다. 사실 불교 공예품 가운데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간에 불교의식이나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수행에 쓰이지 않는 것은 없겠지만, 여기서 의식법구라 함은 그 쓰임새가 불교의식에 직접 쓰이는 법구를 일컫는다. 사찰의 4보(四寶)라고도 하는 ‘사물(四物)’은 절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종, 북, 운판, 목어 네 종류의 법구를 말한다.
① 범종(梵鍾)
절에서 사용하는 종을 범종(梵鍾)이라 부르는데, 범(梵)이 불교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결국은 불교의 종(佛敎鍾)이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옛날 큰 불교사원에는 대중들이 많이 모여 살았으므로 단체생활의 필요상 어떠한 약속된 소리로써 하루의 일과를 알려주어야만 했을 것이다. 따라서 종이 사찰의 필수품이 될 수밖에 없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오히려 그 소리의 신묘함이 종소리를 듣는 중생들의 마음을 깨우쳐 모든 감각기관으로 공덕을 쌓고, 그 공덕으로 인해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까지도 함께 구제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을 행할 때마다 종을 울려서 종교적(불교적)인 장엄한 분위기를 북돋고자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범종의 모양은 크게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 종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 종은 이른바 ‘조선종(朝鮮鍾)’이라는 학술 명칭까지 얻고 있다. 형태상 악기로 쓰였던 중국 고동기(古銅器)에서 비롯된 중국이나 일본의 종과는 달리, 옛 청동기시대의 동탁(銅鐸)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 종이 형태나 소리에서 중국과 일본 종보다 훨씬 뛰어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기 725년에 만들어진 상원사 종을 시작으로 해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들이 남아 있다.
먼저 우리나라 범종의 전형을 이루는 신라 종의 형태를 보면, 중국이나 일본 종과 달리 종 꼭대기에 한 마리 용으로 된 종고리(鍾鄙:單龍鄙)와 소리를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다. 몸통은 물항아리를 거꾸로 세워놓은 것처럼 배에 비해 입 부분이 좁아서 소리를 천천히 토해내는 효과가 있다. 음통은 우리나라 범종에만 있는 특징적인 요소다. 종 윗부분과 아래 종구(鍾口)에 잇대어 테두리에는 보상화나 연꽃무늬, 당초무늬,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 등이 새겨져 있다.
종의 어깨 네 곳에는 네모꼴의 연곽(蓮廓) = 유곽(乳廓)을 마련하여 그 안에 각 9개씩의 연봉우리 모양 = 유두(乳頭)을 달았다. 종 몸체에는 양쪽으로 서로 대칭을 이루며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상과 종 치는 자리인 당좌(撞座)가 배치되어 있어 공간 구성이 뛰어나고 회화성이 넘쳐난다.
② 법고(法鼓)
법고(法鼓)는 ‘법을 전하는 북’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북소리를 빌어 부처님이 깨치신 진리를 중생에게도 전해주려는 뜻이 담겨 있다. 북소리를 들음으로써 인간을 포함한 모든 축생(畜生)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기쁨을 만끽한다고 믿기 때문에 더 없이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북을 종과 함께 아침과 저녁 예불 또는 종교의식이 있을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치는데, 이 때에는 반드시 법도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절에서 북을 왜 치는지에 대해 《법화경》 <서품(序品)>에서는 “번뇌와 망상, 집착과 오욕의 마군들을 쳐부수고자 설법(說法)의 대군을 몰고 나갈 때, 진군을 독려하기 위함이다.”라고 했다. 이 내용으로 보아 북은 일찍부터 수행정진을 독려하는 데 쓰이는 중요한 의식법구였음을 알 수 있다.
북이 종과 더불어 귀중한 성물로서 그 진가가 높았음은 예부터 항상 법당 앞에 종루(鐘樓)와 고루(鼓樓)가 상대적으로 배치되었고, 두 누각을 따로 세울 수 없을 때에는 종과 북을 한 전각에 두었음을 보아서도 충분히 짐작된다. 북은 크기에 따라 큰북[大鼓], 중간북[中鼓], 작은북[小鼓]으로 나뉘는데, 절의 사물이라고 할 때는 이 가운데 큰북을 말한다. 중간북은 조선시대 이후 제사의식 때 범패나 노래와 함께 장단을 맞추던 일종의 악기로 흔히 사용했다고 한다.
③ 목어(木魚)
사찰 사물 가운데 하나로, 주로 중국 선종(禪宗) 사찰에서 쓰였던 목어는 나무를 깎아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고 안을 텅 비게 파내어, 두드리면 소리가 나도록 되어 있다. 물고기를 비롯한 수중동물들에게까지도 부처님의 가르침[法音]이 전달되어 깨우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다.
목어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물고기 형상을 충실하게 묘사한 것이고, 또 하나는 몸은 물고기이나 머리 모양이 용머리 형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든 간에 이는 물고기가 잠을 잘 때도 늘 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수행하는 사람 역시 물고기처럼 졸지 말고 오직 정진에만 힘쓰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목어는 오늘날에도 게으름을 쫓는 하나의 상징물이 되고 있다.
④ 운판(雲板)
장판(長板), 화판(火板), 또는 판종(板鍾)이라고도 한다. 운판(雲板) 역시 중국의 선종 사찰에서 애용하던 사찰 사물 가운데 하나로, 주로 청동이나 철을 판판하게 한 다음 구름 형태로 만든 이른바 운형 금속판(雲形金屬板)을 말한다. 운판의 본래 기능은 참선할 때 시작과 끝을 알리고 잠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과 함께 점차 기능이 확대되어 공양시간을 알릴 때와 대중들을 불러 모을 때, 그리고 재(齋)가 있을 때에 널리 사용했다고 한다. 운판의 형태는 구름 모양이라고 하지만, 이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변해서 형태미가 돋보이는 불교 공예품의 하나라고 하겠다. 운판의 생김새를 구름 모양으로 만든 것은, 구름이 비를 머금고 있으므로 불을 다루는 부엌에 걸어둠으로써 화재를 막고자 하는 주술적인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⑤ 쇠북[金鼓]
금고는 금구(金口, 禁口), 반자(飯子) 등으로 불리는 쇠북으로, 형태는 마치 농악에 쓰이는 징 모양을 하고 있다. 쇠북은 쇠, 즉 금속으로 만든 북이라는 뜻으로 보통 구리와 금, 은 세 가지 재료로 만드는데, 집결하고자 하는 사람의 숫자에 따라 각기 다른 재료가 쓰였다고 한다. 이는 《현우경(賢愚經)》 권10에 “쉬라바스티(舍衛國)에는 18억의 인구가 살았는데, 동고(銅鼓)를 치면 8억이 모이고, 은고(銀鼓)를 치면 14억이 모이며, 금고(金鼓)를 치면 모든 사람이 다 모인다.”라는 기록이 있어 확실히 알 수 있다. 즉 구리, 은, 금의 순서에 따라 모이는 사람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빠른 예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865년에 만들어진‘시공사금구(時供寺禁口)’다. 고려시대 이후에 이르면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들이 많이 나온다.
⑥ 경(磬)
경 또는 경자(磬子)라고 하며, 현재 절에서는 경쇠라고 부른다. 예불을 올릴 때나 경전을 독송할 때 쓰는 법구의 하나다. 예불을 올릴 때 엎드리거나 일어서도록 유도하기 위해 경쇠를 치고, 법당에서 독경하면서 부처님 주위를 도는 행도(行道) 의식을 행할 때에도 사용한다. 경쇠를 칠 때는 목탁은 치지 않는다. 생김새에 따라 곡형(曲形)·소라형[螺]·구름형·연화형 등이 있다. 몸통 위쪽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손잡이를 달고 채로 친다. 받침대 위에 놓고 칠 때도 있고 선반에 매달아놓고 치기도 한다. 채는 노루뿔을 주로 사용한다.
⑦ 바라
바라는 사찰에서 의식을 행할 때 쓰는 법구의 하나이다. 발자(津子)·동반(銅盤)·요발(琵津)이라 부르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바라라고 부른다. <백장청규(百丈淸規)>에 따르면 불전에 향을 올릴 때, 설법할 때, 장례의식을 할 때, 새 주지를 맞이하는 진산식(鎭山式)을 할 때에 바라를 울렸다고 한다. 생김새는 서양 악기인 심벌즈와 비슷하다. 놋쇠로 만들며 둥근 원반이 한 쌍을 이룬다. 각 원반의 중심에 구멍을 내어 폭이 넓은 끈을 꿰어 손잡이로 사용하며, 양손에 나누어 잡고 두 개의 원반을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낸다. 바라를 치면서 추는 춤을 바라춤이라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바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곡성 태안사에 있는 것으로 1477년에 만들었다.
⑧ 금강저
산스크리트 바지라(Vajra)를 금강(金剛) 또는 금강저(金剛杵)라고 뜻 옮김한 것이다. 금강지저(金剛智杵), 견혜저(堅慧杵)라고도 한다. 금강저는 원래 제석천의 번개에 붙은 이름이나 점차 여러 신이나 역사(力士)가 지니는 무기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인도 고대에서부터 무기로 사용했으며, 제석천이 아수라를 쳐부쉈다는 전설을 불교에서 수용해서 중생의 무명번뇌를 굳세고 날카로운 지혜로 부숴버리는 것에 비유했다. 금강저는 금, 은, 동, 철 등의 재료를 써서 만든다. 그 형태를 보면,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자루를 중심으로, 양쪽 끝에 날카롭게 뻗은 갈고리처럼 갈라진 끝의 가닥 수에 따라 하나면 독고(獨納), 세 개면 삼고(三納), 다섯 개면 오고(五納), 일곱 개면 칠고(七納), 아홉 개면 구고(九納)라고 부른다. 끝 가닥이 하나인 독고가 가장 오래된 형식이다. 자루 부분의 생김새에 따라 이름을 부르기도 하는데, 자루의 중심부 좌우에 불꽃 모양을 새긴 것은 보저(寶杵)라 하고, 탑을 새긴 것은 탑저(塔杵)라 한다. 밀교의 의식에서는 의식단(儀式壇)에 금강저를 봉안하는데, 그 배치법은 탑저를 가운데 두고 사방에 배치하며 이를 오종저(五種杵)라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삼고저나 오고저가 많이 남아 있으며, 칠고저나 구고저 그리고 보저나 탑저 같은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금강저는 번뇌뿐만 아니라 악마를 물리치고 사악한 것을 몰아낸다는 벽사의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만다라나 사경화 등 불화 테두리에 금강저 무늬를 그려넣어 수호신장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⑨ 금강령 = 요령
금강령은 금강저(金剛杵)와 함께 불교의식에 쓰이던 법구의 하나다. 그 생김새는 자루를 중심으로 아래쪽에는 추가 달린 조그만 종이 있고, 위쪽은 금강저의 반쪽 부분을 닮았다. 종신(鍾身)에는 주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을 많이 새기는데, 고려시대의 금강령에 가장 널리 쓰인 무늬는 사천왕상이다. 그 밖에 용을 새긴 것도 있다. 금강령도 자루 위쪽에 달린 갈고리 형태에 따라 독고령, 삼고령, 오고령, 구고령 또는 보주령, 탑령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삼고령과 오고령만을 볼 수 있다. 현존하는 금강령으로는 순천 송광사에 있는 금동 금강령(보물 제176호)을 최고로 꼽는다.
⑩ 목탁
목탁은 사물의 하나인 목어가 변해서 생겨난 법구다. 때문에 그 생김새도 물고기 모양을 하고 있다. 다만 목어는 물고기 모양 그대로 몸체가 길쭉한 편이지만, 목탁은 방울 모양으로 둥글넙적하고 추상적이다. 머리 쪽은 가로로 길게 벌어진 입이 끝나는 가장자리에 둥근 구멍이 뚫려 있는데, 물고기의 두 눈을 연상시킨다.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는 둥글게 안을 깎아내 둥근 손잡이를 만들었으며, 물고기에 대비하면 꼬리지느러미를 추상화한 듯 싶다.
(2) 공양구(供養具)
공양구는 불보살께 공양할 때 음식이나 향, 꽃, 차, 불[燈]을 담는 갖가지 그릇을 말한다. 불보살께 올리는 공양그릇이므로 온갖 정성을 들여 최고의 기술과 최상의 재료로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대부분이 당대의 공예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① 향로(香爐)
향로(香爐)는 향을 사르는 데 쓰는 법구다. 불보살께 올리는 공양은 원래 향, 꽃, 등불을 으뜸으로 삼았다. 따라서 이 세 종류의 공양물을 담아 올리는 공양구인 향로, 화병, 촛대를 불단 삼구족(三具足)이라 하고, 향로와 한 쌍의 꽃병과 촛대를 일러 오구족(五具足)이라 한다. 뒷날에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이 이 세 종류에다 차, 과일, 쌀을 더해서 모두 여섯 가지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으뜸가는 공양물은 향이었다.
향로는 쓰임새에 따라서 크게, 불단이나 탁자에 봉안하는 완형향로와 들고 다니면서 의식하는 병향로로 나눌 수 있다. 완향로는 이른바 완이라는 그릇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 보편적이었는데, 손잡이가 달리지 않고 굽과 뚜껑이 있는 매우 날씬한 형태이다. 병향로는 완 모양에 손잡이가 있는 것으로, 주로 의식행렬에서 스님이 향을 피워 들고다니는 것이다. 병향로는 삼국시대 마애불 등에 자주 등장한다. 고려시대에는 금속의 표면 장식기법으로 은입사가 널리 유행했는데, 이 은입사로 향완의 표면을 화려하게 장식해서 더욱 품격을 높였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향로를 꼽아보면, 최근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 대향로를 비롯해서 밀양 표충사의 청동은입사 향완, 통도사 청동은입사 향완 등이 있다.
② 정병(淨甁)
정병은 물을 담는 물병의 하나지만, 형태가 독특하고 관음보살이 지니는 지물로 정착해서 따로 정병이라고 부른다. 이 정병은 산스크리트 ‘쿤디카(Kun·d·ika-)’의 뜻을 새겨 번역한 말이며, 그냥 소리나는 대로 적어 군지(軍持)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법화경에 따르면 정병은 승려가 반드시 지녀야 할 18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 뒤로 불교의식이 진행될 때 쇄수게(灑水偈)를 행하면서 의식을 인도하는 승려가 솔가지로 감로수를 뿌림으로써 모든 마귀와 번뇌를 물리치는 데 사용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에 만든 정병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점토를 구워 만든 토기나 도자기로도 정병을 만들었지만, 오동(烏銅: 검붉은 빛이 나는 구리)으로 만들고 그 표면에 금이나 은을 박아 무늬를 새긴 입사(入絲)기법을 베푼 작품이 크게 유행했다. 무늬는 대개 물가에 부들이나 버들이 늘어져 있고, 물새가 노닐거나 하늘을 나는 한 폭의 그림 같은 무늬, 곧 포류수금문(蒲柳水禽文)이라 이름 붙인 것이 가장 많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청동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국보제92호)과 청자양각 포류수금문 정병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③ 등(燈)
촛대를 포함하는 등은 어둠을 밝히는 데 반드시 필요한 필수품이다. 등불이야말로 인간의 문명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등불을 매우 귀중하게 여겨왔으며, 심지어는 경외심까지 가졌던 것이다. 대승경전 중의 하나인 《화엄경》에서는 등을 공양구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고 했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삼국유사》 권5 <선율환생조(善律還生條)>에는 “망덕사 선율 스님이 지옥에서 환생하여 돌아올 때 한 여자의 부탁으로 불등(佛燈)에 불을 밝혀주어 명복을 빌었더니, 그 여자는 고뇌를 벗어나 극락왕생했다.”라는 전설이 나올 정도까지 되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연등회라든가 초파일 때 대대적으로 등불을 밝히는 행사를 해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보통 등을 광명등(光明燈)이라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다. 등은 만드는 재료에 따라 종이등, 베등, 나무등, 구리등, 석등, 자기등, 옥등으로 나뉘며, 쓰임새에 따라서는 수등(手燈), 현등(懸燈), 고정등(固定燈)으로 나뉜다. 그리고 모양에 따라서는 사모·육모·팔모·원형 등과 수박등, 팔각석등, 고복석등, 이형석등으로 구분한다. 이들 가운데 부처님에 대한 공양구면서도 문화재 가치가 있는 것은 옥등(玉燈)이나 고정된 석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④ 사리기(舍利器)
사리(舍利)는 산스크리트 ‘사리라(s´arira)’를 줄여서 쓴 한자말이다. 그 뜻은 사람의 몸인 신체(身體) 또는 뼈[身骨]를 말하며, 몸을 태워[茶毘] 남는 뼈인 유골(遺骨)을 가리킨다. 따라서 불사리(佛舍利)라 함은 부처님의 신체와 유골을 의미하며, 승사리(僧舍利)는 스님의 신체와 뼈를 말한다. 본래 사리를 묻는 곳은 탑으로 탑신(塔身)·기단(基壇)·상륜(相輪), 그리고 심초석(心楚石) 아래 땅 밑에 모시기도 하나, 그 안에 사리만을 넣지는 않는다. 사리는 곧 부처님의 몸이자 믿음을 나타내는 상징물로서 겹겹으로 차림새를 갖추고 공들여 모신다. 아울러서 장엄을 겸한 여러 부장 공양물들도 함께 넣는다. 이와 같은 부장 공양품들과 사리 그릇을 함께 일러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또는 사리장치라고 한다. 사리를 넣는 사리기는 대개 외함(外函)과 내함(內函), 그리고 그 안의 사리병이나 사리호(舍利壺)가 한 세트를 이루고 있다. 외함과 내함은 금, 은, 동 등의 귀중한 재료로 가마 모양이나 4각 및 6각형 모양으로 만든다. 여기에는 불·보살·천녀·신장·주악비천·당초·보상화·연꽃 같은 온갖 무늬를 조각해서 매우 세련되고 우아한 모습이다. 사리병이나 사리호는 금, 은, 동, 돌, 자기, 유리, 수정의 칠보를 중심으로 한 보배로 만든다. 사리병은 주둥이가 없는 물병 모양과 흡사한데, 불국사 석가탑 사리병이나 왕궁탑 사리병 같은 것은 날씬한 그릇 모양과 청정한 푸른색 등 신비스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 장엄구(莊嚴具)
장엄구란 불보살이 머물고 계시는 법당을 종교적 분위기가 나도록 장엄하게 꾸며주는 여러 가지 불구들을 말한다. 특히 사찰 법당은 예배 대상을 모시는 성스러운 곳[聖殿]으로, 언제나 오색구름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미고자 최선을 다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요즈음에도 절을 크게 지어 내부와 외부를 치장하고, 단청을 화려하게 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것에서도 짐작해볼 수 있다. 불단(佛壇)과 천개(天蓋) 같은 내부 치레에서부터 불감(佛龕), 법상(法床), 목패(木牌), 번(幡) 등에 이르는 모든 불구들이 이에 해당하며, 이것들은 곧 사원의 분위기를 부처님의 세계답게 꾸며주는 구실을 한다.
① 불단(佛壇)
불단의 기원은 부처님이 앉으셨던 자리, 곧 불좌(佛座)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불단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들이다. 그 기본 구조를 보면 상대·중대·하대의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대는 불단의 몸체를 받드는 부분이다. 상(床)에 대비하면 족대에 해당한다. 중대는 불단의 몸체에 해당하며, 다시 상·중·하단으로 나뉜다. 이 3단으로 나뉜 몸체에는 여러 가지 장식무늬가 베풀어져 불단을 한껏 장엄하고 있다.
상대의 중심부에는 물론 불보살상을 모시지만, 앞쪽에는 공양물인 불기, 향로, 촛대, 화병 등을 놓기 위해 턱을 덧대기도 했다. 곳에 따라서는 이렇게 불상이 놓이는 부분과 공양물이 놓이는 부분을 구별하기 위해 가리개를 설치하기도 했다. 현재 불단 가운데 국가가 지정한 문화재로 경북 영천의 백흥암 주불전인 극락전 불단이 있다.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이란 이름으로 지정된(보물 제486호) 이 불단은 세부 장식무늬의 화려함과 투각기법이 한층 돋보여 조선시대 불단 가운데 으뜸가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② 천개(天蓋) = 닫집
법당의 본존불 머리 위 천장에 머리 장엄을 하기 위해서 치레한 것을 천개 또는 보개라고 한다. 모양은 4각, 6각, 8각, 원형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구름이 피는 듯하게 나무를 중첩해서 지붕 모양을 이루고, 각 모서리에는 번(幡)을 내려뜨렸다. 또한 구슬을 달고 장막이나 보망(寶網)을 치며, 갖가지 무늬를 채색하는 등 화려하게 꾸민 것이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천개 모습이다.
③ 불감(佛龕)
집[堂]의 축소형으로 보각(寶閣)이나 주자(廚子)와 비슷하다. 불감은 안에 불상을 봉안하기 위한 것인데, 작은 것은 이동하기 쉽도록 닫으면 동그랗게 되는 것도 있고, 집 모양으로 된 것도 있다. 재료로는 동이나 나무가 많이 쓰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나무로 된 불감이 많았다. 송광사의 불감 등은 매우 정교하다.
④ 번(幡)
일종의 깃발로 여러 형태가 있다. 당번(幢幡)은 긴 장대에 매단 깃발을 말하며, 옥번(玉幡)은 옥으로 꾸민 것이다. 권정 때 쓰는 권정번 등도 있는데, 갖가지 수를 놓기도 하고 여러 가지 보배 등으로 구슬을 만들어 늘어뜨리는 등 화려하게 장식했다.
6. 불교 문학
문학이 문장으로 쓰인 모든 인간의 사유와 감정과 체험을 이야기한다고 할 때, 불교문학이란 삼장과 십이분교 등 부처님의 가르침 전반을 포함한다. 특히 경전 가운데 《법구경》이나 《화엄경》, 《본생담》, 《법화경》 등은 표현에 있어 섬세한 문학적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이 경전들이 문학적 감동보다는 종교적 가르침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불교문학의 영역에서 언급되기는 부적절하다. 한국문학에서 본격적인 불교문학은 통일신라시대의 향가에서 비롯된다.
작가가 대부분 승려나 신도들이고 내용도 불교적인 소재를 주로 차용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신라시대의 <제망매가>나 <도솔가>, <도천수관음가>, <원왕생가> 등이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균여 대사의 <보현십원가> 11수가 있다. 이 가운데 <제망매가>는 죽은 누이를 그리워하며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나 살 것을 기약하는 내용으로, 불교적 내세관이 애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보현십원가>는 화엄학의 대가였던 균여 대사가 실천적 화엄사상을 노래로 지어 대중에게 부르게 한 것이다.
향가의 주요한 내용은 이렇듯 정토사상, 미륵사상, 관음사상, 화엄사상 등이 바탕이 되었다. 이후 고려가요나 민요, 설화, 구전문학 등에도 불교문학이 폭넓게 자리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각종 불교설화들은 대표적 불교설화문학으로 손꼽힌다. 또한 사찰의 창건 또는 큰스님의 행장과 관련 있는 설화문학도 많은 수가 전해오고 있다.
특히 한시의 경우, 삼국시대 이래 근대까지 지식층의 많은 작가들이 꾸준히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 가운데 스님들도 많다. 깨달음의 희열을 선적 언어로 표현한 오도송이나 깨달음을 인가하며 내렸던 전법게 등은 문학사적 가치뿐 아니라 불교사적 의미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작품들이다.
스님들의 작품으로는 서산 대사와 사명 대사 등의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왕명으로 지어진 <석보상절>이나 세종 자신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월인천강지곡〉, 그리고 최초의 불경언해서인 <월인석보> 등은 한글로 쓰인 불교문학 작품의 효시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심청전>과 <흥부전> 등 불교적 세계관에서 쓰인 근대화된 소설작품이 대표적이며, 가사와 한문소설, 선시 등도 많은 수가 전해온다. 불교문학은 구전이나 설화 등의 형식으로 많이 남아, 한문을 즐겨 썼던 식자층보다는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민족의 심성 속에 깊이 자리잡은 불교는 근대 이후 문학에도 깊이 내재해서 현대시의 비조로 꼽히는 만해 스님의 <님의 침묵>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이후로도 서정주, 조지훈 등의 시는 물론, 김동리, 이광수 등의 소설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언어라는 하나의 수단을 통해 부처의 말씀을 전하는‘불교’와 언어를 통해 그 예술적 가치를 실현하는‘문학’이 결합된 불교문학은 크게 불교경전문학과 불교창작문학으로 나뉜다.
전자는 예부터 저작물의 의미가 희소한 예부터 전해져오는 불교경전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후자는 불교란 종교를 소재로 순수창작의미가 적용된 저작물의 의미로 간주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종의 종교문학이기 때문에 대중을 교화하고 올바른 가치를 심어주는 종교의 기능을 불교문학 역시 구현해야 된다. 수많은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경전들은 표현하는데 있어서 문학적 완성도를 보이나 궁극적인 목적이 종교적 가르침이기 때문에 순수한 불교문학의 영역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이러한 경전이나 경전에서 말하는 불교의 가르침 등을 소재로 창작된 저작물을 불교문학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대표적 시는 게송(偈頌)이다.
이는 불교의 가르침을 함축하여 표현하는 운문체의 짧은 시구를 말하는 것으로, 흔히 경전에서 긴 서사체의 장행(長行) 후에 다시 장행의 내용을 요약하여 반복하는 형태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게송이다. 짧은 운문체 시구로 리듬감과 반복, 역설, 비유를 통한 전달력이 뛰어나 주제의식을 부각시키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큰 효과가 있다.
대표적인 게송은 법을 전할 때 하는 전법게(前法揭), 깨달음의 순간을 읊은 오도송(悟道頌), 입적에 드는 순간에 남기는 임종게(臨終揭)와 열반송(涅槃頌), 공양할 때 읊게 되는 공양게(供養揭), 오관게(五觀偈) 등이 있다.
計功多小量彼來處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忖己德行全缺應供 부족한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防心離過貪等爲宗 마음 속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
正思良藥爲療形姑 다만 여윈 육신을 지탱하는 양약으로 삼아
爲成道業應受此食 깨침의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 오관게(五觀偈)-
또 하나의 시의 형태는 선시(禪詩)이다. 게송이 불교의 전통적인 형식이라면 선시는 주제와 그 표현방식에 있어 좀 더 문학적인 성격이 강하다. 어떠한 문자로도 설명될 수 없는[不立文字] ‘선(禪)’의 세계를 언어와 시란 형식을 통해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 설명적 기능보다는 상징적 기능을 중요시해 화두를 던지는 형식으로 쓰여진다. 이러한 독특한 성격 때문에 선시는 불교의 독특한 시의 형태로 위치하며, 문학적 이해보다는 선적 이해가 우선 요구되기도 한다.
불교한시(佛敎漢詩)는 불교적 사상과 그 상상적 세계를 통한 시화적 기능이 강조된 것으로 선시가 대부분 선승에 의해 지어지는데 반해 불교한시는 선승에 국한되지 않고 유학자 등의 저술도 가능하기 때문에 그 시의 주제가 불교적 교리나 취의성을 반영하고 있는 경우이다.
불교가사(佛敎歌辭)는 불교적 내용을 담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불려지던 가사의 형식을 통해 불교사상과 교리를 설파하는 노래를 가리킨다. 입으로 읊조리는 기능이 강조되기 때문에 대중교화와 포교의 기능이 크다. 가사의 저술층 대부분은 승려이며, 내용은 부처의 덕을 기리고 불교 수행에 힘쓰도록 권하는 것이며, 종교적인 교훈을 읊은 가사여서 내용이 비슷하고 개성적인 작품이 극히 드물고, 주로 절에서 판각(板刻)한 목판본과 항간에 전하는 필사본 및 포교용 책자에 게재된다.
불교가사는 한국 가사문학의 연원이 된 것으로서, 꾸준히 발전되어 내려오다가 20세기 초 개화기에 이르러 개화가사의 형태를 갖추게 되며, 대표적인 불교가사에는 가사문학의 연원이 되는 고려시대 나옹(懶翁)의《서왕가(西往歌)》,《심우가(尋牛歌)》, 휴정(休靜)의 《회심곡(回心曲)》등이 있으며, 이 밖에도 많은 찬불가(讚佛歌)들이 조선 중기의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악장가사(樂章歌詞)', '악학궤범(樂學軌範)'(`1493년) 등에 실려 있다.
이러한 불교시는 현대에 들어와서도 계속되는데 선시나 불교한시와는 달리 자유시의 형식과 주제를 통해 불교의 사상을 전하는 경우이다. 대표적인 현대불교시의 작가로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 최남선의 시조집 '백팔번뇌'·수필집 '심춘순례', 조지훈의 '승무' 등이 있다.
석가모니부처의 큰 깨달음은 부처의 열반 이후에 제자들의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옮겨적게 되면서 경전이란 일정한 형태를 갖춘 불전문학이 탄생하게 된다.
처음의 경전에는 수많은 부처와 관련된 전생의 설화들에서부터 본생의 수많은 설화들이 실려 있다. 이러한 석가모니부처님과 관련된 설화와 더불어 부처님의 설법을 전하는 과정에서 대중의 쉬운 이해를 위해 많은 비유와 역설을 위시한 설화도 실려 있다. 이러한 설화들은 인도고유로부터 전해진 본생설화와 한국이라는 자생적 환경에 뿌리를 두고 만들어진 비유설화, 인연설화 등이 있다. 외래설화는 즉 경전으로서, 중국을 통해 한역된 경전이 다시 우리나라로 들어온 경우이다. '생경(生經)', '육도집경(六度集經)', '잡보장경(雜寶藏經)', '현우경(賢愚經)' 등이다. 자생적으로 발전한 설화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삼국유사(三國遺事)'이다. 이를 통해 삼국시대의 불교설화가 대상과 내용에 있어 얼마나 다채로운지를 알 수 있으며, 나아가 일반 서사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음을 더할 나위없다. 불교설화는 승사(僧事)와 불교철학, 설화미학의 세 가지 요소로 지탱되는 것이기에 어느 한쪽에 초점을 맞추어 말하기 어려운 복합적 성격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기준을 통해서 이해 할 수 있는 유연함과 다양함이 큰 특징이다. 즉 대중교화라는 구술적 측면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불교소설의 장르를 탄생시킨 디딤으로서 불교설화의 문학적 가치와 파급효과는 크다.
불교산문의 하나로서 독특한 형태는 바로 승려의 전기를 다룬 승전(僧傳)이다. 승려는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종의 선교자 역할로서 그 위치와 역할의 중요한 만큼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낸 승려의 일대기는 후세에 큰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승려를 존중하고 경외하던 사회분위기와 일조하여 승려의 일대기가 하나의 산문문학으로 정착될 만큼 유행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불교의 위치가 쇠락해진 만큼 승려 역시 마찬가지였고 승려와 관련된 문집이 저술되는 것은 그 전시대에 비하면 질적으로 수준이 떨어지지만 조선후기에 들어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승전이 저술된다. 조선 철종(哲宗)기에 저술된 한국의 역대 고승(高僧)들의 전기집(傳記集)인 '동사열전(東師列傳)'과 신라부터 조선전기까지의 고승 60여 명의 행장(行狀)과 사상을 약술한 '동국승니록(東國僧尼錄)' 등이다.
설화 등을 바탕으로 드디어 조선 초기에는 본격적으로 불교소설이 등장한다. 여기에 한글의 활용여부를 실험키 위한 '석보상절(釋譜詳節)'과 같은 책이 저술되면서 불교소설은 자극을 받게 되고, 주요한 한글소설의 독자층이었던 민중과 부녀자층의 홍교(弘敎)나 경전의 이해에 주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과는 달리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구운몽(九雲夢)' 등과 같은 순수한 창작소설이 등장하기도 한다. 현대의 불교소설은 뷸교사상과 불교사상을 소재로 한 고대의 불교설화에서 소재를 찾아 소설로 발전시킨 예가 생겨난다. '삼국유사'의 조신, 이차돈, 원효대사 등의 설화가 이광수에 의해 '꿈', '이차돈의 사', '원효대사'로 쓰여진다. 특히 이광수의『무명』, 김동리의『등신불』등은 그러한 불교사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예이다. 불교사상이 소재가 되어 소설이라는 장르를 빌려 하나의 창작물인 불교문학으로 자리잡는 계기가 된 것이다. 또한 김원일의 '파라암', 김성동의 '만다라', 한승원의 '포구의 달', 고은의 '화엄경', 조정래의『대장경』등의 작품들이 출간되면서 불교소설영역이 더욱 확대되고 다양한 작가들에 의해 불교사상이 소설이라는 장르와 결합해 발전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불교산문의 또 주목해야 되는 장르는 수필이다. 수필이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유연함과 일상생활과의 친연함은 불교라는 범주 안에서도 승려들 간의 편지, 일기 뿐만 아니라 사찰에서 통용되었던 서(書), 기(記), 발(跋), 표(表), 설(說), 행장(行長), 소(疏), 논(論), 제문(祭文), 찬(讚), 명(銘), 권선(勸善)문, 사적기(寺積記), 기도문(祈禱文), 축문(祝文) 등 실용적이고 행정적인 기능을 담당했던 여러 텍스트들이 바로 수필이 범주로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이다. 고대의 이러한 글들이 사라지고 현대의 불교수필은 고대의 실용성이 배재된 일상성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유연함을 통해 각박한 사회속에서 현대인들에 정신적인 안식처나 자기성찰의 한 방편으로 불교수필이 적극적으로 쓰여지고, 읽혀지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저술층이 스님으로서, 대표적으로 법정스님의『무소유』 등과 같은 수필을 들 수 있다.
시와 산문의 중간 형태인 승비(僧碑)의 새겨진 글들은 불교문학에서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이다. 그것을 총칭하여 불교금석문이라고도 하는데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승려의 비에는 당대 출중한 문장가의 글이 쓰여졌던 만큼 중요시된다. 또한 승려의 전기를 기록하고 마지막에 게송의 형태인 시로서 마무리를 하고 있어 산문과 시의 독특한 형태의 불교문학으로 정의할 수 있다.
7. 불교 음악
모든 불교예술은 지극한 신심의 표현이다. 그 가운데 불교음악은 그러한 신심이 정형화되어 각종 의식 속에 남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불교음악은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의식음악인 범패(梵唄)로 주로 영산재 등 의식 때 스님들이 음성공양으로 부처님께 올리던 음악이다.
둘째, 대중교화를 위해 부르던 화청(和請)으로, 민속음악 형식을 띤다.
셋째, 근대 이후에 발생한 찬불가(讚佛歌)로 서양음악 기법에 불교적 내용을 가사로 붙였다.
범패는 부처님의 명호나 부처님 공덕을 찬탄하는 게송을 가사조로 부르는 일종의 창(唱)을 말하며, '범성(梵聲)이나 어산(魚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인도에서 발생했으며 중국과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시대에 전래해온 후 다양하게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범패의 유형에는 안채비소리(염불)와 겉채비들이 부르는 홋소리 및 짓소리 등이 있다. 범패는 높고 낮거나 길고 짧은 선율이 잘 어우러지는 장식음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장식음은 의식을 장엄하게 꾸미는 데 도움이 되며, 듣는 사람의 신심을 돋운다.
대표적인 범패는 영산재 때 부르는 영산회상곡으로 ‘영산회상 불보살’이란 가사에 관현악 반주의 성악곡인 범패가 조화를 이룬다.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대중에게 《법화경》을 설해주신 기쁨을 표현한 곡으로 불교음악의 장엄미가 극치를 이룬다.
화청은 일반 백성들에게 불교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 우리말로 된 가사를 민요조의 곡에 얹어 부르는 불교 가요다. 백성을 상대로 불교 교화를 위해 불렀던 화청은 30여 종이 전해오는데, 많이 불리는 것들은 회심곡(回心曲), 축원화청(祝願和請), 백발가(白髮歌), 왕생가(往生歌) 등이다. 화청의 주요 내용은 불교에 귀의함, 속세의 인간 생활 묘사, 인과응보의 가르침 등이다.
찬불가는 해방 직후 서양 종교음악의 영향을 받아 만들기 시작한 음악이다. 운문스님에 의해서 시작되어 지금은 다양한 찬불가들이 보급되고 의식곡으로도 쓰이고 있다. 서양음악의 음계를 따르고 있다는 비판에 따라 최근에는 국악으로 만든 찬불가도 많이 제작되어 보급되고 있다.
불교에서의 무용, 음악 등은 의식인 재(齋)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의식을 어떤 방법과 절차를 가지고 행하느냐에 따라 무용 및 음악의 성격과 종류도 달라지며, 그 의식을 장엄하고 보다 의식의 의미를 배가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이용되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불교음악은 옛 경전에서부터 부처님과 스님께 올리는 음악의 공덕을 인정하고 있어, 불보살을 장엄하고 찬탄하는 의식에서 공양음악으로서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불과 수행을 중심으로 한 독경(讀經), 염불(念佛) 형식의 의식음악이 형성되었으며, 여기에 기악반주가 덧붙여져 점차 불교의식음악으로서의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불교의식과 관련된 불교음악을 총칭하여 범패(梵唄)라고 한다.
범패의 기원에 대해서는 영산회상(靈山會上) 기원설, 묘음보살(妙音菩薩)의 음악공양설, 중국 조식(曺植)의 창작설 등이 있으며, 그 전승에 대해서는 중국 오(吳)나라의 지겸(支謙)이 범패삼계(梵唄三契)를 짓고, 강승회(康僧會)가 니항범패(泥恒梵唄)를 만들어 중국의 강남지방에 범패성명(梵唄聲明)을 크게 유생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범패는 당시 당(唐)에 유학갔었던 신라 진감국사(眞鑑國師)에 의해 한국 범패로 이어지게 된다.
불교 전래와 더불어 이어진 한국의 범패는 진감국사의 의한 전래 이전에도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한 내용이 '삼국유사'의 '월명사(月明師) 도설가(兜率家)'에서 엿볼 수 있고, 또한 일본의 승려 자각대사(慈覺大師)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적산에서 불리는 범패가 당풍(唐風), 향풍(鄕風;신라풍), 고풍(高風;일본풍)의 세 종류로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범패가 오래전부터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불교는 국교로서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가 국가의 대표적인 행사로 자리매김하고, 백좌도량(白座道場) 등이 왕궁에 설치되었으며, 특히 의종(1147-1170) 이 각(角)을 부는 취각군사(吹角軍事)와 소라를 부는 취라군사(吹螺軍事)를 세워 연등회에 참석하였던 사실 등을 볼 때, 범패 또한 상당히 성행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억불숭유정책으로 인해 범패는 적극적으로 행해지진 않았으나, 세종13년(1431) 8월에 범패가 행해졌던 사실이 문헌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범패의 기록은 '범음종보(梵音宗譜)'(1478), '신간책보범음집(新刊冊補梵音集)'(1713), 백파(白坡)스님의 '작법귀감(作法龜鑑)'(1828) 등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영조24년(1748년) 범패의 대가 대휘(大煇) 화상의 '범음집(梵音集)'이 저술되기도 하였으며, '범음족파(梵音族派)'에 많은 수의 범패승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볼 때 민간신앙의 주체로서 범패가 꾸준히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11년 6월 사찰령과 더불어 각 본말사법(本末寺法)이 제정되자 조선승려의 범패와 작법이 금지되었고, 의식은 간소화되면서 맥이 끊어지는 듯했으나 1931년 안진호(安震湖) 스님이 불교의식을 모은 '석문의범(釋門儀範)'을 펴내게 되면서 이후 불교의식예법의 필독서가 되었다.
근대에는 서양음악의 도입으로 오선보로 제작 및 편찬된 찬불가가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권상로스님의 1925년에 제작된 찬불가집 '은듕뎐', 조학유스님의 '불교'에 게재한 24곡의 찬불가(1926-1927) 등이 있으며, 특히 백용성스님은 자신의 '대각교의식'에 찬불가 등을 수록하여 찬불가 운동을 통해 대중의 교화를 시도하였다.
해방 이후 불교의 권공의식이 점차 쇠퇴하여 갔지만 영남, 호남, 경기를 중심으로 이어졌던 범음이 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지정과 더불어 전승되어가고 있다.
근대의 맥을 이어 해방 이후 찬불가의 제작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김정묵 스님의 '찬불가(讚佛歌)', 정운문 스님의 '불교동요집'(1964), '행복의 문'(1979), '어린이찬불가'(1985), '불교성가집'(1983) 등을 들 수 있다.
1970년대 이후로는 점차 불교계의 공식적인 관심을 받으면서 찬불가가 확고히 자리잡게 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불교음악은 범패를 중심으로한 전통불교음악과 새롭게 창작된 다양한 찬불가가 서로 공존하면서 발전한다.
불교음악 부분에서 불교음악사와 관련하여 큰 범주의 범패의 의미를 알아보았다면, 좁은 의미의 범패는 전문적 스님들에 의해 불려지는 안채비소리, 바깥채소리, 화청(和靑) 이 세 가지를 의미한다.
범패의‘범’은 천상의 소리를 말하며,‘패’는 산스크리트어의 Phasa의 음역으로 찬탄의 의미이다. 범패는 가곡, 판소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성악곡 중에 하나이며, 어산(魚山)이라고도 한다. 범패는 장단(長短)과 화성(和聲)이 없는 단성시율(單聲施聿)이며, 또한 일정한 악보가 없이 입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전승이 어려워 배우기 힘들다.
범패를 위의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 안채비는 본사의 큰 스님이나 재(齋)의 진행을 맡은 법주(法主)에 의해 불리는데, 권공(權共) 이유가 담겨있는 4·6체 형식이나 산문형식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찰 안에서 불리우는 일반적인 염불(念佛)이 여기에 해당되며 유치성(由致聲), 착어성(着語聲), 편게성(偏偈聲), 개탁성(開鐸聲) 등이 있다.
바깥채비는 홋소리, 반짓소리, 짓소리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범패는 홋소리를 가리키기도 하며, 범음(梵音)은 짓소리의 별칭이기도 하다.
훗소리는 오언사구(五言四句), 칠언사구(七言四句) 등 한문으로 된 사설과 범어로 된 진언(眞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독창 또는 대중창으로 부른다.
반짓소리는 일부만 짓소리로, 나머지 소리는 훗소리나 평염불로 불리는 곡을 말한다.
짓소리는 훗소리에 비해 소리가 청아하며 짧은 게송으로 되어있지만 연주시간이 길고 장엄하다. 현재 짓소리는 과거 72곡(曲) 중에서 15곡만이 전해진다. 이러한 홋소리, 짓소리를 모두 하는 스님을 어장(魚丈)이라고 하며, 어장은 모든 소리를 자유자재로 하는 것은 물론 의식의 전반적 흐름과 이론에도 밝아야 하므로 말강(末講), 중강(中講), 상강(上講)의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안채비와 바깥채비 등은 의식의 규모에 따라 구별되는데, 간단한 불공과 시식은 안채비소리로, 그 외 영산재 등은 안채비와 바깥채비소리가 모두 불리워진다.
화청(和靑)은 재를 지내는 여러 절차 사이에 어장이 징·북·목탁 등의 타악기를 치며 부르는 것으로서 화청과 회심곡(回心曲)으로 나눌 수 있다. 사설형식의 가사를 개개인의 독특한 음성으로 부르기 때문에 일반인들도 그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음이 쉬워 대중적인 특징이 있다.
화청의 내용은 불보살을 청하여 공덕을 찬탄하며 재를 지내는 신도의 소원성취를 기원하거나 영가의 극락정토왕생을 발원하는 의식적 내용으로 되어있다.
회심곡은 인간의 권선징악과 희로애락 그리고 생로병사와 관련된 내용으로 구성된 것과 '부모은중경' 중 덕담 부분을 뽑아서 한글로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축원화청을 부르기전에 독창으로 부르며, 실로 종류가 매우 다양한 편이며《왕생가》,《열반가》,《몽환가》 등이 있다.
불교에서의 무용, 음악 등은 의식인 재(齋)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의식을 어떤 방법과 절차를 가지고 행하느냐에 따라 무용 및 음악의 성격과 종류도 달라지며, 그 의식을 장엄하고 보다 의식의 의미를 배가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이용되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중에서 불교무용으로 이해되는 것이 바로 작법(作法)이다. 그러나 작법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불교의식의 형식과 절차를 총칭하는 법식을 뜻하며, 두 번째는 그 의식에서 춤을 추는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같은 작법이라 할지라도 불교법식을 이야기하는 경우 불교의식을 진행해나가는 승려의 행위나 행동을 의미하고 춤으로서의 작법은 무용이라는 예술적 성격을 강조한 의미이다.
두 번째 의미의 작법이 바로 불교의식인 재(齋)를 올릴 때 추는 모든 춤의 총칭으로 불교무용을 대표하는 것이다. 불교음악을 대표하는 범패(梵唄)가 입을 통해 소리를 내어 부처님께 공양드리는 것이라면, 작법은 몸으로 동작을 취해 공양을 드리는 것이다. 더욱이 작법이 범패의 음률에 맞추어 추는 춤이므로 범패에 대응되는 말로 범무(梵舞)라고도 한다.
작법의 역사는 유래가 정확하지 않으나 우리나라에서 8세기경 범패가 수용된 사실을 보아 그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지만, 어떤 형태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시대에는 불교의식이 성행하였고 수많은 범패를 하는 의식승이 있었다는 기록 등을 통해 이 당시에도 작법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작법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석혜공전(釋惠空傳)', '원효전(元曉傳)', '경흥우성전(憬興遇聖傳)' 등에서 살펴볼 수 있으나 구체적인 작법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전해지는 작법의 구체적 모습을 담은 자료는 조선 숙종(1675∼1720) 때에 간행된 불교의식집(佛敎儀式集)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에는 많은 불교의식집이 정비되어 출간되었는데, 억불정책에 의하여 상류층에 기반을 잃은 불교계는 일반대중에게 기반을 내리기 위해 무엇보다도 신앙의례를 통한 불교의 전교(傳敎)가 절실히 요청되었기 때문에 염불 위주의 범패에 초점이 맞춰져 의식집이 정비되었다.
18세기에 간행된 '범음집(梵音集)'이 그와 같은 것이며, 그 뒤 몇 번이나 증보판이 나오고 이어 19세기의 '작법귀감(作法龜鑑)', 20세기의 '석문의범(釋門儀梵)'에 이르기까지 재편된 불교의식집에서 작법은 범패의 중흥과 더불어 불교의식무용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작법은 1911년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으로 인해 범패와 함께 금지되면서 해방 후에는 불교분쟁과 더불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태고종 봉원사, 백련사, 안정사를 중심으로 몇몇 사찰에서 맥이 이어지는 형태이며, 1973년에 영산재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작법이 함께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춤의 동작과 형식 등에 따라 나비춤· 바라춤· 법고춤· 타주춤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나비춤은 나비 모양의 의상을 입고 춤추는 것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착복무(着腹舞)라고도 한다. 나비춤을 출 때 입는 도포는 육수가사(六垂袈裟)라 하여 앞으로 세 가닥 뒤로 세 가닥의 총 여섯 가닥으로 육바라밀(六波羅密)을 의미하는데, 사바세계(괴로운 것)에서 극락세계(좋은 곳)로 건너간다는 뜻을 갖는다. 장삼과 고깔 차림으로 겉에 붉은 가사(袈裟)를 걸친 여러 명의 무용수들이 반주 없이 큰 법고(法鼓)를 치며 추는 춤으로, 보통 2인이 하지만 때로 4인이 하는 수도 있다. 손에는 연꽃을 들고 마치 나비가 꽃에 내려앉는 듯한 느낌과 고기가 움직이는 것 같이 추는 것으로 춤동작은 완만하고 느린 동작으로 일관된다. 나비춤은 쓰이는 용도에 따라 도량게작법(道場偈作法), 향화게(香花偈)작법 등의 15가지 작법이 있으며 범패 중의 ‘흣소리’나 태징을 사용하여 춤을 추거나 경우에 따라서 반주 없이 추기도 한다.
바라춤은 양손에 바라를 들고 마주치면서 빠른 동작으로 전진, 후퇴, 회전하며 소리를 내어 추는 춤이다. 바라춤은 노래가 없이 추는 막바라춤과 내림게로 추는 내림게바라춤, 천수경에 맞추어 추는 천수바라춤, 사다라니에 맞추어 추는 사다라니바라춤이 있으며, 춤추는 사람에 따라 평바라(1인무), 겹바라(2인무), 쌍바라(4인무) 또는 많은 승려들이 합세한 잡바라춤이 있다. 의상은 고깔에 장삼을 입으며, 반주는 태징, 북, 목탁, 호적 등 삼현육각(三絃六角은 피리2, 대금1, 해금1, 장구, 북, 박으로 구성된 악기편성을 말하며, 동시에 그 악기 편성으로 연주하는 음악을 지칭)이 모두 어우러져 타령 비슷한 장단으로 반주한다. 이 춤은 모든 악귀를 물리치고 도량(道場)을 청정(淸淨)하게 하며, 마음을 정화하려는 뜻에서 춘다고 하며 부처님을 찬양하고 중생을 천도하는 뜻도 있다고 한다.
법고춤은 불전사물(佛殿四物, 범종(梵鐘), 운판(雲板), 목어(木魚), 법고(法鼓)) 중 하나인 법고(法鼓)를 두드리며 추는 춤으로, 대개 일정한 장단 없이 범패를 반주로 하여 춘다.
이것은 법고를 두드리는 것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추는 춤이기 때문이다. 법고를 치는 동작을 내용으로 하는 법고춤과, 복잡한 리듬을 내용으로 하는 홍구춤의 두 가지로 나뉜다. 법고춤이 법고를 치는 동작에 치중한다면 홍구춤은 복잡한 리듬에 역점을 두는 것이 다르다. 법고춤은 장삼을 걸치고 양 손에 쥔 북채로 북을 힘껏 울리면서 추는데, 대부분 느린 동작으로 추나 장단에 맞추어 빨라지기도 한다.
타주춤은 영산재 가운데 식당작법(食堂作法)에서만 하는 의식으로 불교에 있어 수행을 다짐한다는 의미를 상징하는 춤이다. 불교의 중요한 수행법인 팔정도(八正道)를 각각 팔각의 기둥 위에 보이도록 표시하여 오른손에 채를 잡고 이 채로 팔정도의 기둥을
두드리며 주위를 돌며 추는 춤이다. 이 춤은 동작으로 보아서는 춤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춤의 사위가 단조로우나 나비춤과 같은 의상을 입고 추는 춤이자 팔정도의 교의를 깨우치기 위해 추는 의미가 있어 불교의식무용으로서 중요시된다.
수행생활
불가에서의 생활은 수행(修行)으로 정의된다. 이는 모든 의식주 생활 자체가 수행이라는 개념에서 시작하여 끝난다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복 역시 이러한 수행의 개념을 철저히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대표적인 의복이 가사(袈裟)로, 장삼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로 걸쳐 입는다.
원래는 버려진 누더기 옷을 꿰매어 입는 것을 인도에서 받아들인 것이며, 잡색(雜色)으로만 물들여 입도록 한데서 붙여진 산스크리트어 카사야(kasya)를 음역하여 가사라고 부른다. 가사는 잘린 옷감 조각을 이어 만든 것이 인간의 모든 번뇌를 깨트리는 것이라 하여 해탈복(解脫複), 복전의(福田衣)라고도 하며, 가사를 입고 다른 이의 공양을 받거나 다른 이에게 교법(敎法)을 전해주어 다른 이와 함께 복덕(福德)을 받는 것이 마치 밭에서 곡식이 나는 것과 같다하여 전답의(田畓衣)라고도 한다. 하지만 무더운 인도에서 생겨난 가사의 착용만으로는 우리나라의 추위를 견디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승복(僧服)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 현대의 의복에 대한 관심 역시 사회적 트렌드에 맞물려 친환경적이고 몸에 자연스런 의복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또한 스님의 수행과 전진을 위한 일종의 맞춤복인 승복은 연한 회색빛으로 염색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승복에 내재된 수행과 정진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승복 자체의 천연염색의 친환경적인 요소는 현대를 살아가는 일반인들에겐 충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침염과 날염의 기법으로 섬유에 물을 들이는 일을 염색(染色)이라 한다. 염색은 불교에서 파생된 것이다. 출가자들이 입던 아름답지 않은 흐린 빛깔의 가사 색을 ‘염색’이라 했던 것이 변해 ‘물들이다’는 의미로 사용됐다. 일찍이 부처님은 마하승기율에서 업에 따라 옷을 지어 입을 것을 권하며 5색과 5간색 등의 화려한 색을 지양하고 대신 황적색, 진흙색, 목란색 등 3가지 색으로 물들여 입을 것을 허락한 바 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전부터 사용되던 염색은 19세기에 이르러 인공 합성염료가 만들어지기면서 그 맥이 끊겼다. 하지만 다시 인간은 식물과 동물 또는 흙으로부터 아름다운 색소를 구하며,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삶의 지혜를 이어왔기에 현재에 선 인간은 다시 천연염색을 통해 자연과의 그리고 자신과의 합일점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천연염색이란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사람의 손을 거쳐 원하는 색상을 만들어내 우리 생활 속에 멋과 맛을 한층 더 높이는 역할을 하는 모든 활동이다. 그렇다보니 재료는 자연스럽게 과일이나 야채, 식물 등 자연에서 얻어지는 것들로 사용된다. 자연계의 곳곳에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아름다운 빛깔들이 숨어있다. 전통염색은 그 갖가지 자연의 빛깔들을 우리의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이다. 천연 염색을 통해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도리를 경험할 수 있다. 오늘날의 염색은 과거와 달리 우리의 미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삶의 질을 고양하기 위한 측면이 더 크다. 특히
사찰에서 공양할 때 읊조리는 오관게(五觀偈)의 한 구절처럼, 음식은 욕구의 대상이 아니라 여윈 육신을 지탱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으로 정의되어있다.
이는 불가에서의 생활 자체가 수행이기 때문에 식생활 역시 수행의 일부로 인식된다. ‘식(食)’이란 산스크리트어로 아하라(Ahara)로, ‘끌어당겨 보존해간다’라는 의미로 몸을 존재하는 상태로 유지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로 먹기 위한 생산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탁발(托鉢)을 통해서 얻어지는 음식의 섭취가 식생활의 전부였다. 부처님 당시는 탁발에 의해서 얻어지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는 것을 권하였으며, 말린 밥, 콩과 보리를 섞어 지은 밥, 미숫가루, 고기, 떡 등이 주로 주식이었으며, 부식으로는 식물의 가지, 잎사귀, 꽃과 과일, 우유, 꿀 등이었다. 하지만, 대승불교의 발달로 마늘·파·부추·달래·흥거의 오신채(五辛採)를 삼갈 것을 권하고, 술, 고기는 성도(成道)를 가로막는다하여 점차 소식위주의 식생활로 바뀌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왕실에 의해 불교가 수용되었으므로 궁중음식과 사찰음식이 어우러져 발달하였으나 이후 사찰음식은 종교적 상황으로 인해 구전으로 전해졌으므로 사찰이나 지역마다 조리법이 다르나 공통적으로 고기와 오신채를 사용하지 않는다. 신라시대 정월 대보름에 찰밥과 약과, 유밀과 등을 불전에 올리던 육법공양(六法供養)이 한과로 발전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상추쌈, 약밥, 약과 등이 발전하여 다른 나라로 퍼져나갔다. 조선시대 이후부터는 지역이나 사찰마다 고유의 음식을 갖게 되었다.
음식을 얻는 방법을 탁발이라고 하는데, 흔히 걸식이라고도 한다. 탁발이란 산스크리트어로 핀다파타(賓茶波多, Pindapata)를 번역한 것이다. 이는 가루나 쌀로 둥글게 만든 음식, 주먹밥을 뜻하는 핀다라는 단어와 ‘떨어진다’라는 의미인 파타의 결합어로 주먹밥을 발우 안에 떨어뜨린다는 뜻이다. 한자로 번역된 탁발은 ‘발우에 의탁한다’는 뜻으로 불교고단의 중요한 생활방식이다. 어떠한 생산활동에도 참여할 수 없는 수행자들의 현실적 필요와 청정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라는 수행 방편의 의미인 것이다. 후일 중국 선종(禪宗)에서는 불교 선종에서 지켜야 할 수행승의 규칙인 청규(淸規)가 제정되어 걸식의 의미는 희소해졌으나 발우공양은 전승되고 있다.
탁발을 하거나 탁발을 통해 얻은 음식을 먹는 그릇이 바로 발우이다. 발우(鉢盂)는 스님들이 사찰에서 사용하는 그릇을 총칭하며, 발(鉢)은 산스크리트어로 발다라(鉢多羅, patra)의 약칭이고 우(盂)는 한자로 그릇이라는 뜻이다. 보통 밥, 국, 청수, 반찬을 담게끔 4-6개의 그릇으로 이루어지며, 모두 큰 그릇에 포개지도록 되어있으며, 발우보로 싸뒀다가 공양시 펼쳐서 공양한다.
발우공양이란 큰 방에서 식당작법(食堂作法)에 따라 공양을 하는 것으로,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수행의 한 과정이므로 법공양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1205)에서는 “공양할 때, 마시고 씹는 소리를 내지 말며, 잡고 놓을 때는 반드시 조심하고 얼굴을 들고 돌아보지 말며, 맛있고 맛없는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말며, 묵묵히 말하지 말며, 잡념이 일어나지 않게 하며, 밥을 먹는 것이 다만 몸이 마르는 것을 치료하여 도업을 이루기 위함인 줄 알아야하며, 반야심경을 염하되 삼륜이 청정함을 관하며 도용을 어기지 말라”고 하여 공양이 곧 수행임을 강조하였다.
발우공양에 담겨있는 불교의 수행정신은 첫째, 음식에 담겨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시주의 은덕, 음식의 재료가 되는 생명에 대해 감사하고, 두 번째로는 음식의 질과 양에 따른 차별로 인한 음식의 은혜를 망각함을 반성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수행자가 음식을 먹는 이유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을 통해 삼독(三毒)을 없애기 위함이며, 네 번째로는 수행정진을 위한 육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인 사찰은 정사(精舍), 가람(伽藍), 아란야, 도량(道場) 등의 다양한 말로도 불리우고 인도에서는 수행자들이 사는 곳을 비하라[精舍], 차이티야[支提], 승가람[伽藍], 아란야[阿蘭若] 등 4가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수행의 형태에 따라 선원(禪院)·율원(律院)·강원(講院)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스님들이 수행과 정진을 위해 기거하는 곳인 만큼 사찰에서의 생활 역시 수행과정의 일부이다. 사찰에서는 공동생활이 이루어지므로, 서로의 수행과 정진을 방해하지 않고 공동생활이 잘 영위되도록 일종의 역할과 기능을 사찰의 구성원인 스님들이 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역할과 기능을 소임(所任)이라고 하는데, 그 소임을 맡은 스님의 이름을 적어놓은 적은 방을 선원의 큰 방에 붙여놓았는데 이것을 용상방(龍象榜)이라고 한다.
용상방은 중국 당나라 때 백장선사(百丈禪師)가 총림을 개설하면서 그 운영과 통솔을 위해서 각종 직무를 정한 것이 시초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선종의 전래와 함께 채택되었다.
-방장(方丈): 총림에서의 정신적인 최고 어른 스님
-부방장: 방장이 유고시에 방장의 임무를 대신함.
-조실(祖室): 총림이 아닌 일반 큰 사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