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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이 낳은 기녀 매창
梨花雨 흣날릴 제 울며 잡고 離別한 님 秋風落葉에 저도 날을 생각는가 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괘라
어느 문학회 특별무대에서 들은 시조 <이화우>는 그야말로 내 혼을 빼 가는 듯했다. 일찍이 시조의 내용은 알고 있었으나 그 시조를 직접 들어보지는 못했는데 그날 시조의 맛을 제대로 느껴 보았던 것 같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음률 사이사이로 읊조리는 가사는 가슴을 오려내는 슬픔이 배어 나왔다. 저리도 애절한 이별가였던가. 숱하게 들어 본 이별의 노래 어떤 것에서도 그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었다. 이후로 매창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새롭게 솟아났다. 우리 고장이 낳은 빼어난 기녀의 흔적을 좀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생각이 잠재하고 있던 중, 어느 날 부안 일대를 돌아보았다.
이 공원이 조성되기 전에는. 마을의 나무꾼들이 벌초를 해주며 보살피고 가극단이나 유랑극단이 부안 읍내에서 공연할 때면 으레 찾아와 한바탕 굿을 벌이며 그 혼을 기렸다. 매창은 1573년 부안현의 공동묘지의 숱한 무덤 중 한 자리에 불과한 초라한 무덤이었다 한다. 그러나 그녀가 기녀였다는 이유에서일까아전이던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계유년에 태어났다 해서 계성, 또는 계랑이라 하였다. 거문고의 실력이 대단하며 한문을 공부한 지성인으로서 품위를 지닌 여성이며 시와 가무가 능한 기생이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탓에 어린 나이에 어쩔 수 없이 기생이 되었지만 조선 시대에 크게 이름을 날리는 기생이 되었다. 또한 여느 기생들은 없는 천향이라는 자字와 매창梅窓이라는 호를 가졌다. 그녀가 비록 기생이지만 황진이, 허난설헌 못잖은 조선 시대의 시인이며 유희경과의 사랑과 허균과의 연정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회자된다. 황진이의 송도 3절(황진이, 서경덕, 박연폭포)이 있다면 매창의 부안 3절(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이라지 않던가.
贈醉客 증취객 (취한 손님에게) 이매창 醉客執羅衫 취객집나삼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羅衫隨手裂 나삼수수열 不惜一羅衫 부석일나삼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但恐恩情絶 단공은정절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라)
이렇듯 지조가 강했던 기녀 매창이 마음을 준 남자로는 촌은 유희경을 첫손가락으로 꼽는다. 유희경은 유명한 시인이었으며 아내 외에는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는 군자였다. 그런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기녀의 지조와 군자의 위엄이 파계 되는 순간이었다. 매창이 유희경에 반해 넋을 잃었고 유희경 역시 매창을 보는 순간 감격해서 그녀에게 시를 지어 주었다. 20여 세와 40세 중반의 나이는 결코 벽이 되지 않았다.
贈癸娘 증계랑 (처음 만난 날 계랑에게) 유희경 曾聞南國癸娘名 증문남국계낭명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詩韻歌詞動洛城 시운가사동락성 (글재주 노래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今日相看眞面目 금일상간진면목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 각의신녀하삼청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彈琴 탄금 이매창 幾歲鳴風雨 기세명풍우 (몇해 동안이나 비바람 소리를 내었던가) 今來一短琴 금래일단금 (여지껏 지녀 온 작은 거문고) 莫彈孤鸞曲 막탄고란곡 (외로운 난새의 노랠랑 뜯지를 말자더니) 終作白頭吟 종작백두음 (끝내 백두음 가락을 스스로 지어서 타네)
행여 짝 잃은 외로운 새가 되지 않을까 염려되어 비바람 견뎌 내며 지냈는데 좋은 임이 생겨 결국은 백두음을 타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시이다. 백두음이란 검은 머리가 흰머리 되도록 해로하자는 약속을 주제로 한 노래로 사마상여가 무릉의 여인을 첩으로 데려오려고 하자 그 아내 탁문군이 백두음을 지어서 첩 데려오기를 그만 두게 하였다는 고사이다. 이처럼 깊은 학문이 배어 나오는 시와 거문고 솜씨에 유희경은 오십 년을 지켜온 위엄이 꺾였다. 매창으로서는 가히 그 어느 것에도 견줄 수 없는 환희였으리라. 그렇게 사랑은 익어 갔던가. 서로 향하는 마음을 쏟아내는 시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밤을 새워 운우지정을 나눴다.
我有一仙藥 能醫至頰嚬 아유일선약 능의지협빈 (나에게 신기로운 선약이 있어 찡그린 얼굴도 고쳐 줄 수 있으니) 梁臟錦囊裏 慾與有情人 양장금남리 욕여유정인 (금낭 속에 간직한 그 약을 정다운 그대에게 아낌없이 주리라) - 유희경 -
我有古奏箏 一彈百感生 아유고주쟁 일탄백감생 (내게는 옛날의 거문고가 있어 한 번 타면 온갖 시름이 다 생긴다오) 世無知此曲 遙和緱山笙 세무지차곡 요화구산생 (세상사람 이 곡을 못 알아주니 그 임의 피리에나 맞추어 보리) - 이매창 -
두 사람의 열정이 부안의 곳곳에 스며들었다. 긴 여행길을 따라서 나누는 정이 그 얼마나 깊고 정겨웠을까. 수없이 많은 시를 남기며 추억을 만들어 갔으니 어디엔들 그들의 숨결이 닿지 않은 곳이 있으랴. 그렇게 한 2년여를 함께 하다가 유희경은 의병활동을 위해 매창 곁을 떠난다. 사랑이 깊은 만큼 슬픔도 깊었을 것이다. 더는 다른 남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기생으로 살아가는 매창의 생활은 고통의 나날이었다. 늘 애절한 그리움과 처절한 고독 속에서 임을 그리는 시들을 읊으며 보냈다. 이때 남긴 시조 한 수가 세상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명작으로 남게 되었으니 <이화우>는 세인의 가슴에 저마다 다른 상처를 달래는 노래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매창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라
간단한 이 시조 한 수가 그렇게 높은 가치를 받는 이유는 보통의 시와는 다르게 만남과 이별의 계절을 묘사했다는 점이라 한다. 보통 꽃피는 계절에 만나 낙엽 지는 가을에 이별하는 공간으로 처리하는데 <이화우>는 배꽃 피는 계절에 이별하고 추풍낙엽 시절에 임을 생각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이 시조는 《가곡원류》에 실려 전해 내려오면서 수많은 정인의 가슴 속에 깊은 시름을 자아내고 또 동시에 상처를 치료하는 이별가이다.
懷癸娘 회계랑 유희경 娘家在浪州 낭가재낭주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아가주경구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상사부상견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腸斷梧桐雨 장단오동우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매창은 그리 빼어난 인물은 아니었다 한다. 그러나 깊은 학문과 예리한 통찰력을 겸비한 우수한 시재와 탁월한 거문고 실력, 그리고 꿋꿋이 지킨 절개로 많은 풍류객의 사랑을 받았다. 그들과 교류를 나누면서 잠시 잠깐 마음을 주고받은 일들이 있기도 했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마음을 준 사람은 유희경이었고 그 다음으로 기억되는 남자는 허균이라 할 수 있다. 매창과 허균의 관계 또한 세인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내용이다. 33세의 허균과 29세의 매창이 만나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즐겼다. 그러나 따로 운우지정을 나누지는 않은 사이로 지내 왔다. 매창은 물론 유희경에 대한 절개를 지키고자 함이었고 허균은 그런 그녀의 절개를 아껴 주고 싶은 배려였다. 유교의 굴레를 벗어나 남녀의 본능에 충실하며 살았다는 허균으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고 정신적인 교감만 가진 것은 매창을 천한 기생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은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해 주었던 것이다. 허균과 매창의 이런 관계는 매창의 나이 38세까지 이어졌다. 정말 고고한 감정이어서 함부로 사랑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는 정신적인 연인이었다. 허균은 이를 우정이라 칭했다.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에는 매창에 대한 글과 매창에게 보낸 2통의 편지가 남아 있다. “계생은 부안의 창녀라, 시에 밝고 글을 알고 노래와 거문고를 잘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정의가 막연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얘기도 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다.”
계랑에게 계랑에게 - 기유년 9월 허균 -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등극한 후 공부 목사 허균은 품행이 바르지 못하다 하여 파직되었다. 그래서 그는 평소에 여생을 보내려고 했던 부안현 골짜기로 들어갔는데 그것은 매창 가까이에 있고 싶어서 이기도 했다. 우반동 선계폭포 근처에 있는 부사 김청택의 별장 정사암(靜思菴)에 기거하면서 『국조시산』과 『홍길동전』을 쓰는 동안 그들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10여 년을 지내는 동안 정욕을 넘어선 이들의 사귐은 진정한 벗이었다. 그 긴 세월을 그토록 순수한 만남으로 이어질 수 있기까지 두 사람 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에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흔적만 남아 있는 정사암 터엔 수북이 쌓인 낙엽만큼이나 돈독했던 그들의 연정이 바람소리로 속살거리고 있으리라. 그렇기에 지금도 그들을 닮아 보고자 몸부림치는 연인들이 있지 않던가. 그러나 누구든 자기 앞에 닥치는 운명을 비켜가지 못하는 법.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허균은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 2편의 시를 써 주었다.
1수 哀桂娘 애계랑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妙句土甚擒錦 묘구토심금금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 청가해주운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 유도래하계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藥去人群 약거인군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등암부용장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향잔비취군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 명년소도발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 수과설도분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2수
凄絶班姬扇 처절반희선 (처절한 반첩여의 부채라) 悲涼卓女琴 비량탁여금 (비량한 탁문군의 거문고로세 飄花空積恨 표화공적한 (나는 꽃은 속절없이 한을 쌓아라) 衰蕙只傷心 쇠혜지상심 (시든 난초 다만 마음 상할 뿐) 蓬島雲無迹 봉도운무적 (봉래섬에 구름은 자취가 없고) 滄溟月已沈 창명월이침 (한바다에 달은 하마 잠기었다오) 他年蘇小宅 타년소소택 (다른 해 봄이 와도 소소의 집엔) 殘柳不成陰 잔류불성음 (낡은 버들 그늘을 이루지 못해)
조선 시대 역사 기록에 명기로 이름 지어진 우리의 매창은 1573년에 태어나 1610년까지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부안이 낳아 부안을 세상에 알렸던 여인, 그러나 살붙이 하나 세상에 남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기에 돌보는 이 하나 없는 초라한 무덤 속에 누워 있었다.
그 후 세월이 지나 비석의 글이 마모되자 1917년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에서 다시 세우고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겼다. 1974년 매창기념사업회에서는 성황산 기슭 서림 공원에다 매창의 시비를 세웠다. 이 공원은 본디 선화당 후원이니 매창이 자주 불려 갔던 곳이라 한다. 그곳에는 매창이 앉아서 임을 그리워하며 거문고를 타던 너럭바위가 있는데 금대(琴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세월의 더께가 입혀 잘 알아보기 어렵지만 그 글자 한획 한획에 시리디시린 설움이 묻어 있었다. 시를 읊다가 목마르면 목을 축였다던 우물에는 혜천(惠泉)이라는 이름표를 새겨 놓았다.
부안 일대에는 매창의 숨결이 곳곳에 어려 있다. 이성계가 찾아 와 물을 먹었다는 어수대, 부안 댐의 발원지가 된다는 그곳에도 매창이의 발길이 닿았던 곳이라 하여 시 한 수가 새겨져 있다. 그 외에도 월명암과 낙조대, 직소폭포를 오가며 풍류를 즐기며 시를 지었다는 기록을 보면 매창이야 말로 부안에서 태어나 부안을 위해 살다 간 여인이라 할 수 있겠다.
< 부안군 상서면에 있는 어수대>
그녀가 자신의 고장 부안을 사랑하고 아꼈던 만큼 부안도 그녀를 영원히 흙 속에만 묻혀 두지는 않았다. 그녀의 향기를 잊지 못하는 고을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던 시들을 모아 매창 집을 만들었다. 부안 개암사라는 절에서 목판에 새겨 만들었는데 한 여인의 시집이 그렇게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었다 한다. 그 시집은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이 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서서히 발행이 중지되고 말았다. 어느 스님의 마음이었을까. 긴 세월 비바람에 흩날려 그 흔적 찾기가 어렵겠지만 행여 그 절 어느 구석에라도 그때 흥행했던 매창의 체취가 남아 있을까 싶어 찾아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 어느 곳에도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절 마당 한구석 작은 바윗돌 하나에 희미한 붓 자국이라도 남겨 있을 법한 사연이 없음을 알고 왠지 허전한 마음이 되어 절문을 나섰다. 아쉬운 마음에 뒤돌아보는 절 지붕 뒤로 울금바위가 웅장하다. 아마도 천 년이 가도 변하지 않을 저 바위 속에 담겨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아 본다.
*** 정사암터에 관한 문헌자료 *** 정사암은 부안 보안면 우반동에 있었던 조그만 암자였다. 정확한 위치를 알아낼 수는 없지만 지금의 성계안골 산의 중턱이 아닌가 짐작된다고 한다. 이곳은 허균의 산문,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에 기록되어 있다.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 부안현 바닷가에 변산이 있고, 산 남쪽에 우반(愚磻)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그곳 출신인 부사 김청(金淸)이 그중 아름다운 곳을 골라 암자를 짓고는 정사암(靜思菴)이라고 이름 지었다. 늘그막에 즐기며 쉴 곳을 마련해 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왕명을 받고 호남을 다니며 정사암의 아름다운 경치는 실컷 들었지만, 여태껏 구경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평소부터 영화와 이욕을 즐기지 않았는지라 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올해에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어 남쪽으로 돌아갈 뜻을 정하고, 장차 우반이란 곳에 묻혀 살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사에 급제한 김공의 아들이 나에게 말했다. "저의 아버지께서 지으신 정사암이 너무 외따로 있어, 제가 지키기 어렵습니다. 공께서 다시 수리하시고 지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기뻤다. 즉시 고달부와 이재영 등을 데리고, 말고삐를 가즈런히 하여 그곳에 가보았다. 포구에서 비스듬히 나있는 작은 길을 따라서 골짜기에 들어가자 시냇물이 구슬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졸졸 흘러 우거진 풀덤불 속으로 쏟아졌다. 시내를 따라 몇 리 들어갔더니 산이 열리고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좌우로 가파른 봉우리들이 마치 학이 나는 것처럼 치솟았고, 동쪽 등성이론 수많은 소나무와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있었다. 나는 세 벗과 함께 터 잡아둔 곳으로 곧장 갔다. 동․서로 세 언덕이 있었고 그 가운데 수백이나 되는 대나무가 뒤 섞여 있었다. 푸릇푸릇 우거진 모습에서 아직도 사람이 살았던 집터를 분간할 수 있었다. 남쪽으로 큰 바다를 보니 물결에 부딪치는 금수도가 있었고 그 가운데 숲이 펼쳐진 속에 서림사가 있었다. 시냇물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 올라가다가, 늙은 당나무를 지나서 정사암에 이르렀다. 암자는 겨우 네 칸 남짓 되었는데, 낭떠러지 바위 위에 지어졌다. 앞으로는 맑은 연못이 내려다 보였고, 세 봉우리가 우뚝 마주 서 있었다. 폭포가 푸른 바위벽 아래로 깊숙하게 쏟아지는데, 마치 흰 무지개가 뻗은 것 같았다. ( 하략 ) 허균의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 중에서
*** 참고 문헌 *** 1. 매창 시집 : 허경진 역. 2007년 개정판. 평민사. 2. 홍길동전․ 허균 산문집 / 허균 [저] ; 허경진 역. 1995. 한양출판사.
************************************************************************************** 2012년 하늘이 유난히 맑은 어느 가을 날. 부안 군청 종합민원실에서 매창을 기리는 '매창집 원본 사진전'이 있었다. 매창집은, 매창이 지은 한시들을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오다가 주위 사람들 몇몇이 기록해 두었던 것으로서 1668년에 개암사에서 발간돼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그것을 더 만들어 낼 자본이 부족한 탓에 더 이상 인쇄 되지 못하고 중단되어 버린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은 그 매창집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으나 유일하게 미국하버드대학 엔칭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그곳에 보존된 원본을 잠시 빌려와 전시하게 되었다 한다. 참으로 귀중한 자료이기에 시간을 내어 찾아가 보았다. 수록 된 한시 사진 33점을 한 눈에 살필 수 있었다. 비록 본인의 필체는 아니지만 막연히 전해 듣는 시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웠다. 재치 있고 정감 넘치는 한국적 여성 특유의 성정이 풍만한 작품들이다. 귀한 자료이기에 여기에 사진 몇 편을 옮겨본다. 사진을 찍으려 하니 액자 유리 때문에 후레쉬 터뜨리기가 쉽지 않았다. 후레쉬 불빛 반사 때문에 정면에서 찍지 못하고 측면에서 찍었더니 내용을 분석하는데 미흡하다. 다만 이런 전시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올려본 사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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