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윤-함양상림숲에서 고운을 만나다.hwp
문화탐방
함양 上林숲에서 「고운」을 만나다.
최 정 윤(전.부경대학교수)
지난 4월 중순 경남 함양군 함양읍 상림숲 동편 산자락에서는 고운 최치원을 기념하는 큰 행사가 있었다.
총 면적 18,521㎡(5,600평) 넓은 부지에 조성된 「최치원역사공원」준공식이었다. 고운제향관, 역사관, 상림관, 고운루의 4개 건물이 전통한옥으로 지어져 있었고, 고운루(孤雲樓) 아래에는 푸른 잔디밭과 넓은 주차장을 조성해 각종 기념행사를 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총 12억 원의 국비와 지방세를 들여 지난 2013년에 시작해 5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친 것이라고 한다. 우연히 알게 된 이 지역 젊은 정치 지망생 S씨의 초청으로 참석하였는데, 각지에서 온 관계인들과 관광객을 합쳐 500여 명이 참석한 성대한 준공기념식이었다. 아마 이 역사공원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 바로 맞은편에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함양 상림숲」과 더불어 전국으로부터 관광객을 유치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관광자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고운 최치원에 대해서는 다 잘 아는 바로, 통일신라시대에 당나라에 유학해 세계에 문장을 떨친 대유학자였다.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임금의 신임을 받아 신라의 중앙 정계에 발을 디뎠으나 얼마 있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왕을 둘러싼 귀족들과 부패한 신하들의 시기와 질투를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중앙정계에서 밀려나 태산군태수(전북 옥구)와 부성군태수(충남 서산), 천령군태수(경남 함양)라는 외직으로 떠돌게 되었다. 지금의 <함양 상림숲>은 그의 마지막 관직인 천령군태수(天嶺郡太守)로 와 있을 때 조성한 위천(渭川) 강변의 인공조림공원이다.
895년(진성여왕9) 39세에 방로태감(防虜太監) 겸 천령군태수(天嶺郡太守, 지금의 함양군수)직을 제수받아 천령을 다스릴 때에 함양읍성 위천(渭川)의 물줄기를 바깥으로 돌리고 긴 제방을 쌓아 매년 거듭되는 고을의 홍수를 막게 하였다. 제방 바깥쪽에는 쌀 수천 석을 생산할 수 있는 넓은 농경지를 간척해 고을을 살찌게 했다.
그리고 위천 고수부지 넓은 땅에는 갖가지 수목을 가져다 심어 공원을 조성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유명한 함양 상림(上林)숲의 유래이다. 실사구시의 애민정신(愛民精神)으로 이뤄낸 고운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고운이 이 숲의 이름을 상림(上林)이라 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중국 진나라 때 천자의 공원으로 알려진 함양성(咸陽城) 서쪽의 상림원(上林苑)에서 따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시 진나라 수도 함양성 주위 3백리 안에는 36개의 공원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갖가지 수목과 좋은 짐승들이 뛰놀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공원인 상림원(上林苑)이었다는 것이다.
마침 시간이 넉넉하여 상림숲을 자세히 살피기로 하였다. 안내판이 서있는 숲의 입구에서부터 북쪽 끝 물레방아가 있는 곳까지는 약 1.4km이다. 공원의 폭은 200여 미터, 전체 면적은 약 12ha(36,000여 평)이다. 물기가 한창 오른 신록의 산책길이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게 느껴진다.
100년에서 500년 된 여러 종류의 활엽수가 울창하고 공원 안으로 정다운 실개천이 흐르며 고운의 전설을 품고 있는 돌다리가 놓여있다. 숲속 곳곳에는 문화재급 유적도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고운상(孤雲像)과 문창후 최선생신도비(文昌候崔先生神道碑)이다. 고운을 추모하는 사운정(思雲亭)과 옛날 함양읍 남문 망루를 그대로 옮겨놓은 함화루(咸化樓)도 지나칠 수 없다.
천년의 숲으로만 이름나 있는 것이 아니라 함양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숲속의 박물관과 같은 곳이기도 하다.
사운정은 고종46년(1906)에 고운을 추모하는 경상도 유림이 세운 정자로, 매년 함양의 유림들이 여기에 모여 천령제(天靈祭)를 지내면서 시문을 자랑하는 데, 정자에는 천령제에 입선한 어느 시인의 시가 아래와 같이 걸려 있었다.
「천 년 전에 학을 타고 내려온 신선이 있었는데 / 우거진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구나 / 고을 원들의 칭송이 자자하고 / 정자에서 보는 경치는 예나 지금이나 아름답도다 / 꾀꼬리 우는 소리 들으면서 시를 짓는데 / 이 모든 풍경이 선정의 덕으로 오래토록 전해지리라.」
함양 역사인물 11위의 이름을 새긴 비석도 눈에 띈다. 맨 위에는 단연 고운 최치원이 위치하며, 2위가 김종직이고, 정여창, 박지원 등의 이름이 차례로 새겨져 있다. 모두 함양을 거쳐 간 태수(太守), 현감(縣監), 군수(郡守) 등 역사에 기록을 남긴 이들이다. 이 밖에 신미양요 때에 세운 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 윤(尹)씨가의 화수정(花樹亭), 밀양박씨 비석, 성종대의 문인 임계 유호인(兪好仁)을 기념하는 임계공원과 연대미상의 한 점 석불도 유심히 살펴야 할 유적들이다.
고운의 흔적은 상림숲 밖에서도 만날 수가 있다. 상림공원 입구 위천 강변에는 운임정(雲林亭)이 있고, 함양군청 앞에는 학사루(學士樓)가 서있다. 상림숲 북쪽 끝자락 필공산에 마련된 고운산책길도 감회를 새롭게 한다. 운임정 앞에 서있는 수백 년 거목이 고운을 기리고 있으며, 거목 아래에서는 2005년부터 함양물레방아축제가 열리고 있다.
학사루는 고운의 별칭인 학사(學士)의 이름을 따서 세운 것으로, 정면 5칸의 목조건물에 난간이 있으며, 8작 지붕의 중후한 기상을 지닌 누각이다. 건립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고운이 자주 여기에 올라 시문을 읊고 여가를 즐겼다하므로 대략 신라 진성여왕 9년 전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상림숲 안에 서 있는 고운선생 신도비문 말미에 “선생이 군청을 옮기고 학사루를 세웠으며 긴 제방을 쌓아 손수 여기에 나무를 심었다(行移郡建學士樓 手植林於長堤)”라는 기록에 근거하면, 학사루의 창건자는 고운 최치원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학사루에 걸려 있는 작자미상의 7언 율시는 함양의 풍광과 고운 학사(學士)의 추억을 음미하기에 충분하다.
七月蟬聲滿一樓(칠월선성만일루) 칠월의 매미 소리 누(樓)에 가득 찬데
登臨回顧又傷秋(등임회고우상추) 누각에 올라 회고하니 감회가 깊구나.
長林上下高城出(장림상하고성출) 상하림 긴긴 숲에 옛 성이 높이 솟아있고
大野東南二水流(대야동남이수류) 한들(大野)의 동과 남에는 두 냇물이 흐르네.
學士己乘黃鶴去(학사기승황학거) 학사(學士)는 이미 황학을 타고 가 버렸는지
行人空見白雲留(행인공견백운류) 행인은 우두커니 백운(白雲)만 바라보는구나.
可憐風物猶今昔(가련풍물유금석) 애닲구나. 풍물은 예나 이제나 다 같은데
常有詩編揭軒頭(상유시편게헌두) 난간에 걸려있는 시편은 변함이 없네.
시에서 학사(學士)는 고운을, 백운(白雲)은 함양의 진산 백운산을 가리킨다. 한들 동남이수(大野東南二水)의 하나는 함양읍에서 동으로 흐르는 남계천을 말하고, 또 하나는 남서로 흐르는 위천을 지칭한다.
그러나 학사루는 고운에 대한 향수 못지않게 역사의 아픈 기억도 안고 있다. 조선 성종대에 예문관을 지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로 부임하였다. 그가 어느 날 고운을 추억하며 학사루에 올랐는데, 여기에 전조의 세도가 유자광(柳子光)의 시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을 떼어내어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 이 일로 하여 훗날 유자광의 훈구파에 의해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 그를 따른 사림파 문신들이 무참히 탄핵당하는 무오사화(戊午士禍)를 겪기까지 하였다.
김종직은 마흔이 넘는 시절 함양군수로 나왔는데, 이때 5살짜리 아들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죽은 아들의 이름이 김목아(金木兒)였다. 나무아이라는 뜻이다. 자식이 태어난 해가 목성(木星)이어서 지은 이름이다. 현재 함양초등학교 교정에는 그때 김종직이 아들 목아를 얻은 기념으로 심은 느티나무가 500년 세월을 넘기면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기이한 것은 나무의 뿌리가 지상으로 올라와 마치 옆으로 세워놓은 책이 나무를 받치고 있는 것 같은 거대한 판자 모양의 판근(板根)이다. 여기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모습이다.
다음은 조선후기 실학의 거두 북학파(北學派) 연암 박지원(朴趾源)이 1702년에 함양안의(安義) 현감으로 와 있을 때 상림숲을 거닐면서 남긴 고운의 추억 한 토막이다.
「삼국사기에는 고운(孤雲)이 관직을 버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어느 날 아침 갓과 신발을 숲 속에 남겨 놓고 떠났으나 아직도 그가 미친 곳을 모른다고 한다. 세상에서는 아마 그가 일찍이 군주에게 열 가지 일을 간하여 올렸으나 군주가 쓰지 못하였다. 가야산은 천령(天嶺)에서 백리도 안 될 만큼 가까우니 그가 훌쩍 떠난 것은 이 군(郡)에 있을 때이다. 천하를 둘러보아도 몸을 매어 둘 곳이 없어 하늘 끝의 한자락 구름과 더불어 피곤하면 머무르다 혼자 떠나가며 무심히 피어났다가 사라졌으니, 그래서 고운(孤雲)이라고 하는 자(字)를 스스로 지은 것이요, 당시 세속의 부귀영화는 이미 낡은 신짝 따위와 같았던 것이다」
박지원의 연암집(燕巖集) 권1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몇 가지 정보가 있다. 하나는 고운이 함양을 개혁한 후 여기서 가까운 가야산을 안식처로 삼았다는 것과 그 후 가야산에서 고운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최치원의 호 고운(孤雲)은 ‘한 자락 구름같이 머물다가 혼자 떠나간다’는 뜻으로, 최치원 자신이 스스로 지은 자호(自號)였다는 것도 새로운 정보이다.
함양을 천령(天嶺)이라 부른 것은 신라 경덕왕(742~765)때이며, 그 뒤에는 속함(速含) 또는 함군(含郡)이라고도 하였는데, 고려 현종3년(1012)에 含(함)자 대신에 咸(함)자로 고쳐 쓰면서 비로소 지금의 함양(咸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함양군(咸陽郡)으로 승격된 것은 조선시대 초이다.
고운이 함양을 떠난 때는 신라가 망국의 길을 재촉한 8세기 말 무렵이다. 고려의 건국시점이 918년이며, 고운이 세상을 등진 때가 924년이고, 신라의 멸망연대가 935년(경순왕9)이므로 이 사이에 신라는 견원과 궁예의 반란으로 땅의 절반을 잃게 되었다. 왕건(王建)의 성장도 신라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다. 여기에다 경문왕 이래 6대왕을 거쳤으나 나라는 혼란을 거듭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왕실은 고운 같은 현자를 부르지 않았다.
고운은 결심했다. “난세에 선비가 뜻을 펴지 못하면 물러선다”는 난방불거(亂邦不居)의 유가적 결단을 내리기로 작정하고 천령군 태수직을 끝으로 관직에 뜻을 접고 가야산으로 들어갔다.
공자(孔子)도 벼슬을 버리고 18년을 유랑했으며, 맹자(孟子)도 벼슬에서 물러난 후 자신의 땅을 버리고 15년을 떠돌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죽지 않았는가. 전국시대에 “충신 불사이군, 열녀 불경이부”라는 말을 남기고 자결한 제(齊)나라 왕촉(王蠋)의 지조와, 굶어 죽을지언정 주왕(周王)의 곡식은 먹지 않겠다고 수양산으로 들어간 백이숙제(伯夷叔齊)의 고사를 당나라 유학시절에 수없이 읽고 느낀 것이 그였다.
이런 그가 하물며 신라의 녹을 먹은 선비로서 가야산의 고사리로 연명(延命)을 할지언정 고려조에까지 몸을 담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함양(咸陽)을 떠난 고운이 전국 강산을 떠돌다가 마지막에 가야산으로 다시 들어와 홍류동 골짜기에서 청절지사(淸節之士)로 생을 마감함으로 우리는 그를 더욱 높이 받드는 것이다(2018.4.15).
함양초등학교 앞 느티나무(수령 500년)
느티나무의 판근(板根)
함양 상림숲과 공원 안의 崔孤雲 像
상림숲의 GIS분석(경남 함양군 운임리)
자료 : 이석해 2005년 논문, 상명대학.
함양 학사루(學士樓)
(경남 함양군 함양읍 운임리 함양군청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