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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야사(般若寺)
백화산을 흘러내리는 큰 물줄기가 태극문양으로 산허리를 감아 돌
면서 연꽃 모양의 지형을 이루는 곳에 반야사가 있습니다. 절 마당
에 들어서면 요사채 너머 산기슭에 꼬리를 곧추 세운 호랑이 모양
의 너덜지대가 시선을 압도합니다.
신라 문성왕 13년(851) 무염국사가 황간 심묘사에 계실 때 사미
승 순인을 이곳에 보내 연못의 악룡을 몰아내고 창건하였다고 합
니다. 조선 세조 때 신미대사의 주청으로 크게 중건하였으며, 현재
는 한국전쟁으로 불탄 것을 최근에 새로 지은 절집입니다.
¤ 반야사 문수전
대웅전 뒤편 가파른 계단을 땀 두 방울 정도 흘리고 올라가면 천
길 낭떠러지 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문수전이 있습니
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백화산 풍경이 안 올라왔으면 어쨌나 싶을
정도로 '엄지 척 '입니다.
외벽에는 청사자를 탄 문수보살을 알현하는 임금이 그려져 있습니
다. 세조와 연관된 벽화입니다.
세조가 신미대사의 주청으로 중건한 절의 모습도 살피고 참배도
할 겸 이곳에 행차하셨을 때 문수동자가 나타났습니다. 동자는 세 조를 절 뒤쪽 계곡인 망경대 영천(靈泉)으로 따라오게 하고는 목 욕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왕의 불심이 갸륵하여 부처님 의 자비가 따른다.'는 말을 남기고 사자를 타고 홀연히 사라졌습니 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피부병이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기쁜 마음에 지혜를 뜻하는 '반야(般若)'라는 어필을 절에 하사하였습니다. 지 혜의 상징이 문수보살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어필은 지금
전하지 않습니다.
세조가 목욕했다는 백화산 계곡물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넌덜머
리나는 코로나19도 싹 날려버렸으면 좋겠습니다.
¤ 반야사 삼층석탑(보물 제1371호)
지대석 위에 단층의 기단을 올리고 3층의 탑신을 쌓은 탑입니다.
원래 반야사 북쪽의 석천계곡 '탑벌'에 있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기단부는 4매의 석재로 구성되었으며 각 면에 양 우주와 탱주가
있습니다. 탑신에도 각각 우주를 새겼습니다. 1층 지붕돌받침은 5
단이고, 2,3층은 4단입니다. 꼭대기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습
니다. 고려 전기 작품으로 추정합니다.
석탑 옆에는 배롱나무 두 그루가 있습니다. 조선 건국 무렵 무학대
사가 주장자를 꽂아 둔 것이 둘로 쪼개지면서 쌍배롱나무가 생겼
다는 이야기를 품고 있는 나무입니다.
¤ 중식 (도리뱅뱅이, 빙어튀김, 어탕국수)
¤ 중봉 조헌 묘소, 사당 표충사, 신도비(충북유형문화재 제183호)
조헌(趙憲. 1544~1592)의 본관은 배천(白川)이고, 호는 중봉(重
峯)이며, 시호는 문렬(文烈)입니다. 고경명, 김천일, 곽재우와 함께
임진4충신(壬辰四忠臣)의 한 분입니다. 경기 김포에서 태어나 15
67년(명종 22)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옥천에서 거병하여 그해 9월에 청주성을 탈환하였
습니다. 왜군이 호남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으로 달려가
싸우다가 700여명의 의병과 함께 장렬히 순국하였습니다.
묘소는 마을 뒷산 중턱의 무성한 노송 사이에 있습니다.
표충사는 조헌의 위패와 조헌과 함께 순절한 아들 조완기(趙完基)
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608년(선조 41)에 처음 세워졌으며, 여
러 번 수해를 입자 1721년(경종 1) 묘소 아래에 다시 세운 것입니
다.
신도비는 묘소 앞 큰길가에 큼지막한 돌을 다듬어 그 위에 세웠습
니다. 비문의 글은 김상헌이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김상용이 전액
(篆額)을 썼습니다.
¤ 청마리 탑신제당(충북민속자료 제1호)
폐교된 동이초등학교 청마분교 뒷담에 있는 탑신제당은 마을의 풍
년과 평안을 기원하는 신당 유적입니다. 제신당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원탑, 짐대(솟대), 장승, 산신당으로 이뤄졌습니다.
원탑은 잡석을 원추형으로 쌓고 맨 위에 길쭉한 돌 하나를 올린 탑
이고, 짐대는 긴 장대 끝에 새를 깎아 앉혀 놓았는데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간(神竿)을 뜻합니다. 장승은 액을 물리치는 수문장이
고, 산신은 뒷산 깃대봉의 소나무를 신목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매년 음력 정월 초에 산신제를 올립니다. 장승과 솟대는 4년에 한
번 오는 윤년에 새로 세우고, 예전 것은 잘 썩도록 옆에 뉘어 놓았
습니다.
우리네 인생도 풍년 들고 평안하라고, 내문답도 만사형통하라고
합장 한 번 하고 떠났습니다.
¤ 정지용 생가
바람 품은 가을볕이 초가지붕으로 살포시 내려앉은 정지용의 생가
는 옥천읍 죽향리 하계마을에 있습니다. 일명 구읍(舊邑)이라 부
르는 곳입니다. 구읍이라 함은 왕년에는 복작대던 옥천의 중심지
였다는 뜻입니다. 반면 지금은 한적한 시골 마을로 전락했다는 의
미이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철도가 개설될 때 이곳 지주들
의 반대로 옥천역이 빗겨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마을 가운데로는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인가 싶은 하천이 흐
르고, 그 개천 위에 걸린 청석교를 건너면 정지용 생가가 있습니
다. 1996년 옥천군에서 복원해 놓은 것입니다. 우물과 돌담장, 사
립문을 갖춘 초가입니다. 포근한 고향집 정취를 기대하진 않았지
만 그래도 기념물 같은 복원 생가는 영 마땅치 않습니다.
소싯적에 시집 좀 끼고 다닌 적이 있어, 시심 좀 일으켜 볼 요량으
로 툇마루에 걸터앉아 봤습니다. 시상이 떠오를 리 만무합니다. 그
래도 빡빡한 삶 때문에 딱딱해진 마음이 조금은 말랑말랑해졌습
니다.
이웃해서 정지용 문학관도 있습니다.
¤ 정지용(鄭芝鎔, 1902~1950)
1902년 옥천에서 태어난 정지용은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
다니던 12세에 장가를 들었습니다. 보통학교 졸업 후 상경하여 처
가 친척으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17세에 휘문고보에 입학했습니
다. 성적이 우수해 졸업 후 휘문고보의 비용 지원으로 일본 동지사
대 영문과에서 유학했습니다. 학업을 마친 후 1929년부터 해방
때까지 휘문고보에서 16년간 교사생활을 하면서 김영랑, 박용철
과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했고, 이상의 시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문장'을 통해 청록파 시인들을 추천하는 등 정지용은 1930년대
시단의 중심이었습니다. '말씀의 요술을 부리는 시인'(박용철), '우
리 시 속에 현대의 호흡과 맥박을 불어넣은 최초의 시인'(김기림)
과 같은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1930년대 우리 문단을 '소설은
이태준, 시는 정지용'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분과위원장으로 추대되기도 하고
이화여전 교수와 경향신문 주간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가 49세이던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학
계와 가족은 여러 정황상 납북으로 보았으나 정부에서는 월북작가
로 분류하여 정지용은 한동안 금기의 인물 '정X용'으로 불렸습니
다.
1988년 드디어 정지용의 시가 풀려났습니다. 이듬해 고향 옥천에
시비가 세워졌고, 1995년에는 '지용신인문학상'이 졔정되었습니
다.
시집으로는 '정지용시집', '백록담', '지용시선'을, 산문집으로는 '지
용문학독본'과 '산문' 등을 남겼습니다.
12살에 장가를 갔다니..... 나라를 열 댓 번 구한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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