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두 의학박사의 요양병원 이야기(49)
진정한 이웃
지금은 남강댐으로 수몰된 진양군 대평면의 산골마을에 예배당이 들어서고 전도사님 한 분이 오셨다. 농사짓는 것 외엔 아무런 일도 없는 마을에 전도사님이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는 가뭄 끝에 단비처럼 어린이들에게 축복의 시간이었다.
자기 아기라고 서로 주장하는 두 여인에게 아기를 칼로 잘라 나누어주라는 솔로몬 왕의 판결을 들었을 때 숨이 막힐 듯이 긴장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한 상인이 길에서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었을 때 지나가던 사제나 레위 사람(열심 종교인)은 얼른 피해 가버리는데 멸시당하던 한 사마리아인이 다가와 구해주고 여관에까지 데리고 가 치료해 준 이야기를 하며 ‘누가 이 사람의 진정한 이웃입니까?’하고 전도사님이 물었을 때 어린이들이 모두 ‘사마리아인요’하고 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진정한 이웃이란 바로 사랑을 몸소 베푸는 사람이라는 것을 예배당에서 배우게 되었다.
내가 만난 한 재활의학과 의사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요양병원에는 여러 가지 재활치료가 이루어진다. 노인인구의 증가와 각종 산업재해, 교통사고 등 재활치료의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1997년 IMF가 터지고 몇 년 후였다. 인근 건물에 한 여의사가 개업하여 안내장을 보내왔다. 가보니 재활의학과 의원이었다. 물리치료실에 많은 운동기구가 비치되어 있었다. 당시로서는 재활의학과가 생소하여 어떤 치료를 하는지 물어보니 ‘각종 질병과 사고로 장애가 생긴 사람을 치료하거나 훈련시켜 정상에 가깝거나, 또는 남의 도움을 받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의료분야’였다. 재활의학에서 치료하는 분야는 뇌졸중, 사지마비, 하지마비(척수손상), 요통, 어깨와 목부위 및 족부통증, 각종 관절염, 의수족 보조기, 스포츠 손상 등이었다.
몇 달 후 일이 있어 그 재활의원을 찾았다. 오전 9시경이었는데 간호사에게 물으니 원장님은 병실에서 자고 있다고 했다.
“원장님이 병실에서 잔다고요? 입원환자가 있습니까?”
“입원환자는 없습니다만 원장님이 최근부터 매일 병실에서 주무십니다.”
원장이 잠에서 깨어나 옷을 입고 나왔길래 차를 한잔하며 그분의 얘기를 들었다.
“저는 30평 아파트에 혼자 살았습니다. 인근 교회에 나가는데 교회에 나가보니 집이 없어 고생하는 교인이 있었지요. 그래서 생각한 끝에 제 아파트의 방 한 개를 내어주었어요.“
“아니,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방을 내어준단 말입니까?”
“아파트가 제 혼자 쓰기엔 너무 크지 않습니까? 그런데 또 집이 없는 교인이 있길래 비어있는 다른 방을 내어 주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과 집을 같이 쓰면 불편하지 않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 소문이 나서 집 없는 사람 몇 사람이 더 들어올 수 없느냐고 사정을 하길래 아예 제방까지 다 내어주고 저는 병원 치료실의 침상에서 잡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뒤통수를 크게 맞은 듯이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다니…. 바보인가, 아니면 참 그리스도인인가?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독실한 그리스도교인이라도 자기 집 빈 방을 집 없는 교우에게 내어주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더욱 마음을 안타깝게 한 것은 이 선한 여의사가 경영난으로 1년 만에 병원 문을 닫고 이 동네를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집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집까지 내어주는 것을 보면 아마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치료비도 받지 못한 것 같다. 직원과 간호사 월급도 못 주었을 것이고…. 결국 폐업한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경영난으로 망해 나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분은 이 하늘 아래 어디선가 헐벗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살고 있을 것이다.
요양병원 입원환자들은 기본적인 공통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고통을 덜어주길 원하고, 자녀들이 자신을 잊지 않고 자주 찾아오기를 바라고, 사랑받기를 원하고…. 모두가 사랑과 관심에 굶주린 사람들이다. 일반 병원에서는 신체적인 병의 치료에 주안점을 두지만 요양병원에서는 신체와 정신적인 면 모두를 같이 치료해야 효과가 있다는 마음으로 환자를 대한다.
사오십 대 젊었을 때에는 가족도 부양해야 하며 한창 자라나는 자녀들 학교 문제, 입시나, 취업, 결혼 등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등 온전히 환자에게 집중할 여유가 부족했던 것을 느꼈다. 예순이 지나 이제는 자녀들도 다 떠나고 오롯이 환자들에게 전념할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가 생긴다.
젊었을 때에는 미처 읽지 못한 환자들의 절실한 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나이가 드니 보호자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공감 능력도 커지고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지기 때문에 요양병원에서 나이든 의사를 만나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일본에서는 20년 전부터 ‘노노(老老)케어’라는 용어를 써왔는데 이젠 우리의 문제가 되었다. 노인이 노인을 케어(간병과 돌봄)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