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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咸鏡道)
함흥(咸興) 문회서원(文會書院) 가정 계해년에 세웠으며, 선조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문선왕(文宣王) 화상사우(祠宇) 만력 정미년에 세웠는데 문회서원의 서쪽에 있다. : 이계손(李繼孫)ㆍ유강(兪絳) 감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숙민공(肅敏公)이다. ㆍ이후백(李後白)ㆍ한준겸(韓浚謙)ㆍ이광하(李光夏) 감사 ㆍ남구만(南九萬)ㆍ문덕교(文德敎) 호는 동호(東湖), 좌랑을 지냈고 행실이 올바름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아우 선교(善敎)가 왜병에게 살해되자 공은 의병을 수창(首倡)하였으나 자기가 지은 임진록엔 이 일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창의사(彰義祠)에 들지 못했다. 현종 정미년에 추향되었다. 영종 때에 도령(都令)에 증직되었다.
운전서원(雲田書院) 정미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송시열(宋時烈)ㆍ조헌(趙憲)ㆍ민정중(閔鼎重)
창의사(彰義祠) 현종 병오년에 세웠다. : 백응상(白應祥) 임진왜란 때에 묘파보(妙坡保) 권관(權管)으로 본부(本府) 판관에 승진되고 의사(義士)와 더불어 창의(倡義)하였다. ㆍ유응수(柳應秀) 삼수(三水) 군수를 지냈으며 판서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아버지가 적에게 살해됨을 통분히 여겨 중위장(中衛將)으로서 창의(倡義)하여 원수를 갚았다. 선조가 명을 내리어 별장(別將)을 삼았는데 영남에서 왜를 토벌하다가 전사하였다. ㆍ이유일(李惟一) 부사(府使)인데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동위장(東衛將)으로서 창의하였다. ㆍ한인제(韓仁濟) 벼슬은 우후(虞侯)이다.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방원 만호(坊垣萬戶)로서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의병을 일으켜 북진(北鎭)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여섯 번 격파하였다. ㆍ박중립(朴仲立) 벼슬은 만호이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좌기장(左騎將)으로서 창의하였다. ㆍ이희록(李希祿) 벼슬은 첨정이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 유생(儒生)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ㆍ정해택(鄭海澤) 벼슬은 만호(萬戶)이며 우윤(右尹)에 증직되었다. 우위장(右衛將)으로서 의병을 일으켰다. ㆍ박길남(朴吉男) 만호이며 참의에 증직되었다. 의분심과 지략(智略)과 훌륭한 활솜씨로 의병을 일으켰다. ㆍ박응숭(朴應嵩) 벼슬은 만호이며 군기정중위장(軍器正中衛將)에 증직되었다. 정유년에 유응수(柳應秀)를 대신하여 별장(別將)이 되었다. ㆍ이사제(李思悌) 판관이며, 부정(副正)에 증직되었다. 임진년에 나이 겨우 19세였으나 끝까지 충성을 다하였다. ㆍ한경상(韓敬商) 참봉이며 감찰에 증직되었다. 생원으로서 동위장(東衛將)이 되었고 임기응변과 지려(智慮)가 뛰어났다. ㆍ김응복(金應福) 직장(直長)이며 감찰에 증직되었다. 학식과 기절(氣節)이 있었고 격문을 전하여 적을 물리쳤다. 뒤에 문과에 올랐다.
영흥(永興) 흥현서원(興賢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이계손(李繼孫)
길주(吉州) 명천서원(溟川書院) 병오년에 세웠고 병자년에 사액하였다. : 조헌(趙憲)
향현사(鄕賢祠) : 허유례(許惟禮) 판서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효장공(孝莊公)이며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적개공신(敵愾功臣)이다. ㆍ원충서(元忠恕) 참의에 증직되었다. ㆍ허진(許珍) 유례(惟禮)의 증손인데 도사(都事)에 증직되었다. ㆍ김국신(金國信) 금부도사에 증직되었다. ㆍ허수민(許秀敏)ㆍ허대성(許大成) 유례의 5대 손이다. ㆍ허성일(許誠一) 유례의 6대 손이다.
경성(鏡城) 창렬사우(彰烈祠宇) 병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정문부(鄭文孚) 임진록에 들어 있다. ㆍ이붕수(李鵬壽) 지평에 증직되었다. ㆍ강문우(姜文佑) 판결사(判決事)에 증직되었다. ㆍ최배천(崔配天) 판관(判官)에 증직되었다. ㆍ지달원(池達源) 좌랑에 증직되었다. ㆍ이희당(李希唐) 훈련부정(訓練副正)에 증직되었다. ㆍ이기수(李麒壽) 좌랑에 증직되었다. ㆍ박유일(朴惟一) 좌랑에 증직되었다. ㆍ서수(徐遂) 좌랑에 증직되었다. ㆍ오경헌(吳慶獻) 판결사(判決事)에 증직되었다.
□□묘우(□□廟宇) 고려조에 육진(六鎭)을 개척한 공으로 사당을 세운 것이다. 부(府)의 서쪽 2리에 있다. : 윤관(尹瓘)ㆍ오연총(吳延寵) 평장사(平章事)이며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선조 16년에 창건하였다.
청덕당(淸德堂) 을사년에 세웠다. : 성하종(成夏宗) 병사(兵使)이다. 창흥군(昌興君)으로 봉해졌고 청백리(淸白吏)이다.
흥혜사우(興惠祠宇) 숙종 계미년에 세웠다. : 이광하(李光夏) 판윤(判尹)으로서 선비 양성에 공을 세웠다.
회령(會寧) 현충사우(顯忠祠宇) 숙종 계미년에 세웠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 정문부(鄭文孚)ㆍ신세준(申世俊) 첨지(僉知)였는데 참의에 증직되었다. ㆍ최언영(崔彦英) 벼슬은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이다 ㆍ오윤적(吳允迪) 벼슬은 군기시주부이다. ㆍ허관(許灌) 벼슬은 군기시주부이다. ㆍ정여경(鄭餘慶) 벼슬은 예빈봉사(禮賓奉事)이다. ㆍ윤립(尹岦) 벼슬은 예빈(禮賓) ㆍ이희백(李希白)ㆍ오준례(吳遵禮) 모두 수문장(守門將)이다.
□□사우(□□祠宇) 만력 병진년에 세웠다. : 김우옹(金宇顒)ㆍ이윤우(李潤雨)ㆍ김시양(金時讓) * 鰲山書院
*元山書院 金尙憲 鄭蘊 趙錫胤
종성(鍾城) 종산서원(鍾山書院) 현종 병오년에 세웠고, 숙종 병인년에 사액하였다. : 정여창(鄭汝昌)ㆍ기준(奇遵)ㆍ유희춘(柳希春)ㆍ정엽(鄭曄)ㆍ김상헌(金尙憲)ㆍ정홍익(鄭弘翼)ㆍ정온(鄭蘊)ㆍ조석윤(趙錫胤)ㆍ유계(兪棨)ㆍ민정중(閔鼎重)ㆍ남구만(南九萬) 두분(二公)이 추향되었다.
행영사우(行營祠宇) 을사년에 세웠다. :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ㆍ김응하(金應河)
온성(穩城) 충곡서원(忠谷書院) 만력 병오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기준(奇遵)ㆍ김덕함(金德諴)ㆍ유계(兪棨)
덕원(德源) 용진서원(龍津書院) 을해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송시열(宋時烈)
창주영각(滄洲影閣) : 주자(朱子)의 화상(畫像)
문천(文川) 문포서원(文浦書院) 갑술년에 세웠다. : 송시열(宋時烈)ㆍ민정중(閔鼎重)
□□영당(□□影堂) : 공자의 화상(畫像)
단천(端川) 복천영당(福川影堂) 임오년에 세웠다. : 문선왕(文宣王)의 화상(畫像)
경원(慶源) 충렬사(忠烈祠) 임신년에 세웠다. : 김응하(金應河)ㆍ최진립(崔震立)
북청(北靑) 노덕서원(老德書院) 숭정 갑오년에 세웠고 을축년에 사액하였다. : 이항복(李恒福)ㆍ김덕함(金德諴)ㆍ정홍익(鄭弘翼)ㆍ이상진(李尙眞)ㆍ오두인(吳斗寅)ㆍ이세화(李世華)
안변(安邊) 옥동서원(玉泂書院) 만력 무신년에 중건하고, 임오년에 사액하였다. : 이계손(李繼孫)ㆍ김상용(金尙容)ㆍ조석윤(趙錫胤)
삼현사(三賢祠) 만력 병오년에 세웠다. : 이경승(李慶承) 호는 율도(栗島), 문과에 합격, 판관을 지냈다 ㆍ이선승(李善承) 호는 미곡(薇谷), 감찰을 지냈다. ㆍ이지온(李之馧) 호는 빈교(貧郊), 참판을 지냈다.
정평(定平) 망덕서원(望德書院) 병자년에 세웠다. : 정몽주(鄭夢周)ㆍ조광조(趙光祖)ㆍ김상헌(金尙憲)ㆍ조익(趙翼)ㆍ민정중(閔鼎重)
무산(茂山) □□사우(□□祠宇) 신묘년에 세웠다. : 남구만(南九萬)
[주-D048] □□묘우(□□廟宇) : 문숙공묘우(文肅公廟宇)를 가리킨다. 후에 정북사(靖北祠)로 개칭되었다.[주-D049] □□사우(□□祠宇) : 《동국문헌원우편(東國文獻院宇篇)》에 의하면 오산사우(鰲山祠宇), 오산서원(鰲山書院)을 가리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학상 (역) |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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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興文會院嘉靖癸巳建天啓丙子額 원주, 大成至聖文宣王畫像·東湖文德敬·世宗大王·李繼世·李光夏·○院西別廟萬曆丁未建 원주, 敬憲李繼孫·文翼韓浚謙·佐郎文德敎·肅敏俞絳·青連李後白, 觀察使李光夏。
○雲田院丁未建 원주, 圃隱鄭夢周·靜庵趙光祖·退溪李滉·栗谷李珥·牛溪成渾·重峰趙憲·尤菴宋時烈·老峰閔鼎重。
○松島院, 愼公弼。
○花島院, 撫松孫天佑。
永興興賢祠萬曆壬子建丁巳額 원주, 圃隱鄭夢周·靜庵趙光祖·李繼孫。
吉州德川院庚戌建丙子額 원주, 重峰趙憲。
端川福川影堂壬午建 원주, 文宣王畵像。
<2권33>
慶源祠宇壬申建 원주, 遼東伯金應河·叅判崔雲立。
定平鼻白山, 李光坤。
鏡城彰烈祠丙子建丁未額 원주, 贈贊成鄭文孚·贈持平李鵬壽·贈判官崔配天·贈判決事姜文佑·贈佐郎池達源。
○廟宇, 文肅公尹瓘·文襄公吳延籠。
會寧鰲山祠, 東岡金宇顒·荷潭金時讓·石潭李潤雨。
○鏡城清德堂·昌興君成夏宗。
○興惠宇, 判尹朴光夏。
○顯忠祠, 贈贊成鄭文孚·主簿吳充迪·許灌·崔彦英·守門將李希白·吳遵禮·奉事尹岦。
茂山鄕祠宇辛卯建 원주, 藥川南九萬。
安邊玉洞院, 仙源金尙容·李繼松。
寧邊霜陰院, □□□盧錞。
鍾城鍾山院丙子建甲寅額 원주, 一蠹鄭汝昌·服齋奇遵·眉巖柳希春·守夢鄭曄·清陰金尙憲·休翁鄭弘翼·桐溪鄭蘊·樂靜趙錫胤·老峰閔鼎重·市南俞棨。
○東岡院, 東岡金宇顒。
○行營宇乙巳建 원주, 永川皇甫仁·節齋金宗瑞·將軍金應河。
穩城忠谷院萬曆丙午建額 원주, 服齋奇遵·市南俞棨。
文川文浦院, 尤菴宋時烈·老峰閔鼎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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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집(荷棲集) 조경(趙璥)생년1727년(영조 3)몰년1787년(정조 11)자경서(景瑞)호하서(荷棲)본관풍양(豐壤)초명준(㻐)시호충정(忠定)
荷棲集卷之九 / 諡狀 / 服齋奇先生諡狀
己卯之賢。有若應敎奇公與趙文正公光祖同道云。公諱遵。字子敬。世稱服齋先生。幸州人也。其先出自箕子。高祖諱勉。工曹典書。曾祖諱虔。號眩庵。官判中樞。諡貞武。選淸白吏。祖諱軸。豐儲倉副使。贈承旨。考諱禶。弘文館應敎。贈吏曹參判。妣安東金氏。前妣坡平尹氏。皆贈貞夫人。公以弘治壬子二月二十三日生于京師之靑坡萬里峴舊第。甫數月而孤。金夫人敎公必循規矩如嚴父焉。公天資穎異。讀書能日記數十百言。七歲通小學。十三成文章。人皆謂奇氏有人。旣冠慨然有求道之志。專心學問。一以程朱爲法。事親奉兄。盡其孝敬。推之事物。亦皆盡其倫理。自是行益高名益盛。交遊益附而公猶以任重道遠爲憂。嘗從趙文正入天磨山。深處爲靜坐修省之工。間又紬繹經傳。究其理奧。夜以繼晝。三更而寢。五更而起。歷數月不懈。趙文正呼公曰。子敬勤苦如此。不已勞乎。盖心與之也。癸酉。中司馬兩試。甲戌對策擢別試丙科。而趙文正亦以翌年乙亥登第。當是時中宗大王新卽位。朝廷淸明而上方勵精圖治。將極選經筵之官。以資其啓沃。遂以公爲弘文館正字。而趙文正爲修撰。尋皆賜暇湖堂。公時年二十四。搢紳大夫莫敢望焉。俄陞著作。遷博士。嘗於講席奏曰。人之百行。本於孝悌。故有子曰。君子務本。本立而道生。孝悌也者。其爲仁之本歟。夫在上者。能自盡孝悌以立其本。則下亦感而化之。各親其親長其長而民俗歸仁。若先之以刑政。則是無本不可爲也。又曰。治理何有古今哉。但在乎爲與不爲耳。雖三代之時。若不力行。則豈能致治乎。夫堯舜之業。誠若巍巍難及。然論其性。則堯舜與塗人一耳。而無古今之異。後之人拘於習俗。不知敎化之有術。乃曰。世級已降。不可以復古。此妄人也。苟能精一執中。行之不已。則豈不成三代之治乎。又嘗因文義奏曰。漢之光武匡復帝業身致太平者。以其敦尙儒術也。然不能爲修身齊家之學。故廢正后殺諫臣。此失德也。人主於學。其可忽乎。先是王妃愼氏遜于私邸。金公淨,朴公祥勸上復其位。幾陷大僇。故公援古諷今。冀以感動上心。其忠愛之志。見於言外如此。又請爲魯陵立後。以奉其祀。事雖不行。識者韙之。丁丑。陞拜修撰。時有圃隱鄭文忠及寒暄金文敬從祀文廟之議。議久不決。公進曰。鄭夢周理學之宗也。東國之學。自夢周而其源始開。金宏弼少師金宗直。得程朱緖餘。以惠後學。其功皆可祀也。上乃以鄭文忠腏享而命公製其文。人皆榮之。已而。有李誠彥者。投書劾㙜閣之臣。曰言論過激。又曰。政歸時議。誠彥南衮之黨也。濫錄靖國之勳。爲士論所棄。故猜㤪正人。陰欲搆害。於是㙜臣被特旨盡遞。公方病。奮而起曰。此禍之兆也。遂草疏累千言。以發其憸邪熒惑之罪。其略曰。㙜諫人主之耳目公論之所寄也。言之不盡。無以見事之情。言之不直。無以達己之心。今之任㙜諫者。感激奮發。願忠於殿下。宰相苦之。羣小忌之。而抗論不挫者。惟恃殿下而已。殿下又厭之。則誰肯爲國家進言哉。嚮者任士洪請譴㙜諫。謂其言不可盡聽。柳子光誣捏士類。羅織成獄。終貽廢朝之禍。彼誠彥合二人之奸。而欲售其餘術於聖明之世。凡有血氣者。孰不欲加以顯戮哉。自古小人之謀害君子者。必曰。政柄在下。激怒人主。人主不察。一有所惑。則忠良擯逐而其國必危。可不懼哉。夫君子之立朝也。行身以實。論事以正。不可以他誣。若曰政出於下。則一網而盡之故也。然不獨誠彥一人也。其被駁於㙜諫者。咸懷㤪憤。騁訕馳毁曰。某於上前陳某言。大是異事。曰某與某相講學。此朋黨也。胥動浮言。務爲傾軋。嗚呼。小人之惡治好亂。乃如是歟。夫賢邪用捨實關治亂。殿下果知其賢。則信而用之。不爲譖言所移。果知其邪。則去而絶之。不爲浮議所動。明示好惡。然後佞人絀而正士進矣。願殿下日近儒臣。益篤問學。窮理以開其智。持敬以養其氣。常令此心之德。光明正大。不容一毫之私焉。則讒邪不能惑而修齊治平之本。其在是矣。疏入不報。羣小益側目焉。是歲爲校理。轉議政府檢詳。歷司憲府掌令。戊寅春。復入弘文館拜應敎。而趙文正擢秩爲副提學。其出處相先後焉。趙文正旣以挽回世道爲己任。而公爲之左提右絜。將以偕至於大道。故知無不言。言無不盡。上而匡主德。下而淑人心。以行激揚之政。而羣憾旁伺。必欲煽禍。公旣先見其幾。知道之難行。貽書於趙文正曰。吾已無當世之念。將欲斂身於山林耳。趙文正歎曰。吾亦然矣。於是相與求退而終莫之遂焉。及己卯冬十月十五日。公方直宿弘文館。南衮率沈貞,洪景舟等潛入闕上誣告。是夜公與趙文正同被逮入獄。翌日又同竄。而一時賢士皆以罪去。朝廷遂空。而衮,貞等始得志猖獗矣。公初謫牙山。庚辰春。又移謫穩城。時趙文正已死。衮,貞等之所欲殺者。惟公是已。公之在牙山也。嘗登山望母夫人所居。至是衮,貞等將誣以亡命。囚其邑守裵鐵重者。䝱使之爲證。而又逮公至獄恣其鍛鍊。竟不能成其罪。還謫于穩。穩窮髮之鄕也。地邊胡去京師二千餘里。公數月之間。三往返而猶無恙。於是衮,貞等又加律爲栫棘。而太守希其旨。積棘圍屋。其高壓簷。望若荒塚。公自知其必死。心怡然如在樂地。讀易不輟。暇則爲詩以抒其思君戀親之心。又卽其棘中所居者推義命名。戶曰明夷之戶。庭曰從容之庭。架曰載道之架。杖曰不屈之杖。盂曰日新。巾曰自潔。帶曰解惑。席曰禁怠。自夫文房筆硯以及釜鼎竈堗。莫不有名。名凡六十而銘亦繫焉。皆自警之辭。而亦以見朝聞夕死之志矣。辛巳。有宋祀連者起誣獄。滅貞愍公安瑭之家。而衮,貞等勒之加罪於公。金吾郞持後命至。公下庭而迎之。問上候。旣不復爲一語。但曰。吾孝未盡於事親。忠未盡於事君。學未盡於聞道。遂沐浴正席。從容就盡。實十月二十八日也。壽纔三十。聞者莫不流涕。是年返葬于高陽郡元堂里壬坐之原。從先塋也。後二十五年。仁宗大王命復公官如初。明宗朝又贈秩爲吏曹判書。宣祖元年。因李文純公滉言。始大雪己卯諸賢之寃。而南衮等皆追削焉。
於是北之人士卽公謫居之墟。而立廟以祀公曰。此奇先生讀易處也。又指其庭曰。此當日受命之所也。相與咨嗟不已。而自京至者入其境。輒先問奇公廟何在。
嗚呼。是孰使之然哉。盖公生稟英睿。輔以正學。審於義利而擇術必精。專於踐履而立志必確。雖夜輒整衣冠以坐。如對神明。故在家而宗族稱其孝。鄕黨服其義。至其進於王廷也。則以爲致治有道。行道有本。以孝悌爲導率。以堯舜爲標準。而尤兢兢乎淑慝之別。知其爲君子也。則捨一時之禍福而必欲親之如兄弟。知其爲小人也。則忘一己之强弱而必欲逐之如仇敵。凡所建白猷爲粹然一出於正。言之必可行。行之必可法。其見于事者。或趙文正之所倡而公和焉。或公之所啓而趙文正成焉。每上殿。趙文正在前。公在後。昌言嘉謨迭發於前席。人皆想望其風采而衰俗爲之一變矣。及其事與心違。則斂退之計。又出於公獨見之明。而趙文正亟稱愜焉。欲與公同其去就。則公於趙文正。其見重有如此者。是故其在玉堂也。有館中雙璧之譽而公其一也。其沒也。李文純公悲之曰。鄧林美材隕於風霆。後之評己卯之賢者曰。金鏗玉潤。深得濂溪之學者。奇某也。雖衮,貞等之搆殺公者。猶曰奇某動法古人云爾。則公之所以爲公者。其可知已。噫。旣謂公動法古人而捏之以亡君之命。抑何心哉。是故太學生辨誣之疏有曰。奇某與趙某。志同道合。又曰。陟屺之行。有頃而返。是可謂之亡乎。苟其欲亡。夫豈自返乎。宋文正公時烈稱其疏曰。此明道伸寃之第一文也。斯可以有徵於後世矣。夫趙文正大賢也。其同遊之士率皆以道相從。觀乎世所傳己卯錮籍。其數至於百有餘人。何其盛也。然考其受禍輕重。則其人之道德高下與夫奸黨之所仇嫉淺深。皆可見矣。故趙文正首嬰其鋒。公與金公淨繼之。而太學生之所訟寃者。亦惟三先生而已。則諸賢雖多。公尤其傑然者矣。嗚呼。在易泰之初九曰。以其彙征吉。蹇之六二曰。王臣蹇蹇終無尤也。若公者當國家休明之會。倡率羣彥。接武並進。可謂得彙征之時矣。隨事獻替。效其忠讜。則可謂有蹇蹇之節矣。而道違其吉。身罹於尤。豈易之道非耶。然我東道學之大明。自己卯始。金文元公長生嘗曰。己卯之治。乃箕子後千載一時也。則公之所遇。雖未克終于征吉。而其爲功於東國者大矣。又誰謂之尤也耶。公平日所著文章。旣見佚而餘者無多。有德陽稿一卷行于世。其對策論師道者。文辭沛然有氣力。與趙文正乙亥試策相上下。詩亦往往有警拔逼古者。朴相公淳嘗讀公遺稿。至於流涕。爲之跋曰。公克己爲學。盡性知命。而餘事文章。亦必本於忠孝。眞所謂關世敎而樹風聲於百代之下。君子以爲知言云。按公家譜。謂公筆法有鍾王之格。天文地志亦皆洞究其精微。然公旣先立乎大者則其細者可略也已。公娶坡城君尹金孫之女。有一子一女。子曰大恒。文科官判尹。諡貞堅。女適尹思和。孫曰應世。以孝㫌閭。事在續三綱錄。曾孫曰自獻。官領議政。死於甲子之獄。後伸寃復官。曰允獻。官郡守。允獻有子。曰秀發。文科官正言。其後世寢微不復有仕於朝者。故公有賜諡之命久矣。而至今未之請焉。盖斯文之闕典也。玆据公後孫錫垕所述年譜。又略掇其事蹟之見於先賢文字者。告于太常。以爲公易名之考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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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영조 > 영조 52년 병신 > 2월 25일 > 최종정보
영조 52년 병신(1776) 2월 25일(정묘)
52-02-25[04] 정사가 있었다. 이조 판서 서명선(徐命善)이 나왔다.
○ 오재순(吳載純)을 동지의금부사로, 이병모(李秉模)를 응교로, 오재순을 병조 참판으로, 조중회(趙重晦)를 판의금부사로, 김익(金熤)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 증 이조 판서 김창흡(金昌翕)의 시호는 문강(文康)으로, 고 좌참찬 이재(李縡)의 시호는 문정(文正)으로, 증 이조 판서 기준(奇遵)의 시호는 문민(文愍)으로 하였다.
[주-D001] 기준(奇遵) : 1492~1521.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자경(子敬), 호는 복재(服齋)ㆍ덕양(德陽)이고,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514년(중종9) 별시 문과에 응시하여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온성(穩城)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아산(牙山)의 아산서원(牙山書院), 종성(鍾城)의 종산서원(鍾山書院), 고양(高陽)의 문봉서원(文峯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덕양유고(德陽遺稿)》, 《무인기문(戊寅記聞)》, 《덕양일기(德陽日記)》, 《복재문집(服齋文集)》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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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유고(德陽遺稿) 기준(奇遵)생년1492년(성종 23)몰년1521년(중종 16)자자경(子敬)호복재(服齋), 덕양(德陽)본관행주(幸州)시호문민(文愍)특기사항조광조(趙光祖) 등과 종유(從遊)
~ | ~ | ~ | ~ | ~ | ~ | - | ‘文愍’(勤學好問曰文 使民悲傷曰愍)의 시호를 받다. |
~ ~ ~ ~ ~ ~ - ‘文愍’(勤學好問曰文 使民悲傷曰愍)의 시호를 받다.->일성록 > 영조 > 영조 52년 병신 > 2월 25일 > 최종정보
영조 52년 병신(1776) 2월 25일(정묘)
52-02-25[04] 정사가 있었다. 이조 판서 서명선(徐命善)이 나왔다.
○ 증 이조 판서 김창흡(金昌翕)의 시호는 문강(文康)으로, 고 좌참찬 이재(李縡)의 시호는 문정(文正)으로, 증 이조 판서 기준(奇遵)의 시호는 문민(文愍)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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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집(恕菴集) 신정하(申靖夏)생년1681년(숙종 7)몰년1716년(숙종 42)자정보(正甫)호서암(恕菴)본관평산(平山)특기사항김창협(金昌協)의 문인. 신무일(愼無逸), 이위(李瑋) 등과 교유
恕菴集卷之十五 平山申靖夏正甫著 / 祭文 祝文附 / 穩城忠谷書院醒翁金先生並享祭文
猗歟先生。禀氣之剛。遇事乃見。其節彌光。往在昏朝。倫彝掃地。一言抗奮。凜其辭義。人紀賴明。星日並耀。斥和一疏。有海可蹈。垂之萬世。其永有辭。惟氣之養。惟敬之持。行純孝友。節苦氷檗。元城了翁。寔與比德。維所樹立。百世師表。凡在衿紳。孰敢無慕。矧玆氊城。夙所荐棘。俗旣牖敎。潮始知學。受賜之深。山仰靡替。維是享儀。久未克擧。斯文闕典。士林竊歎。有洫祠宮。俎豆兩賢。危忠直道。維服維市。並列爲三。德無軒輊。士論攸同。崇報斯均。起敬興思。永有依因。涓吉卽事。式薦牲釀。神其洋洋。歆此肹蠁。
兩丁祝文
氷檗精操。日星姱節。功存廉立。報崇芬苾。
忠谷書院醒翁並享時告服齋市南兩先生文
爰有醒翁。曾著姱節。曩値昏政。倫紀斁絶。片言扶綱。日星千古。封章斥和。尤嚴致討。淸風礪操。允爲師表。前後被譴。並迹玆土。文敎所被。誦慕俱切。其在崇報。宜罔或缺。玆涓吉辰。虔告並腏。敬薦芬苾。冀垂歆隲。
忠谷書院移建時移安告由文
維玆舊廟。處非其地。卑湫迫隘。易傾而圮。苟於將事。有損瞻視。睠彼西山。不遐而邇。靑烏新卜。吉祥攸萃。撤宇改建。實循僉謀。屬玆移奉。祗告厥由。
還安告文
役有神佑。地亦天設。詢謀僉同。成之不日。額因舊揭。制有增修。於焉妥靈。可卜千秋。屬當玆辰。告完工作。涓吉奉安。位次如昔。以肹以蠁。於斯無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