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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으라!(1)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2012년 10월 28일 / 대예배 / 마태복음 11:28-30
마 11:28-30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한국에 와 있던 어떤 선교사가 시골교회를 방문하기 위하여 차를 타고 시골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거운 짐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가고 있는 어떤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시냐?”고 물으니 선교사가 가는 같은 동네이기에 차에 태워주었습니다. 그런데 차에 탄 할머니는 머리에 이고 있는 짐을 계속 이고 있었습니다. 내려놓으라고 해도 괜찮다고 합니다. 또 내려놓으라고 하자 한사코 괜찮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 한 몸 타는 것도 미안한데 짐까지 내려놓으면 미안해서 안 된다.”고 하시며 끝까지 그 짐 보따리를 내려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할머니의 모습이 오늘날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같지 않은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고 다 내려놓으라.’고 하시는데도 굳이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손으로 들고 살아가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고 있는 분들의 인생이 고달픈 것입니다.
▶ 당시 유대인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기에 그들이 지고 있는 짐은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거대한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린 낙심의 짐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거기에다가 지도자들은 전통인 짐과 율법의 짐, 유전(바리새파의 지도자 또는 고대의 율법 전문가들은 기록된 모세의 율법을 새로운 환경에 적용시키거나 혹은 그 기록된 율법 안에서 오랜 관습을 뒷받침해 주는 조항들을 찾아내서 그것을 부연(敷衍)함으로써 기록된 율법을 보다 광범위하게 설명하고 그것을 점차 체계화시켜 나갔는데, 이것이 바로 구전율법 곧 장로의 유전이 되었다.)의 짐까지 지게 했습니다. 거기에 백성들은 각자의 생활에서 주어지는 짐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죄의 짐, 운명의 짐, 질병의 짐, 사망의 짐까지 포함되었는데 말입니다.
예수께서 저들의 짐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로마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영적 해방을 주시겠다는 말씀으로 마음의 고통에서 자유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죄의 속박에서,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율법의 구속에서, 악한 영의 짓눌림으로 인한 정신적 불안에서 해방을 얻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소수의 무리가 이해하기까지도 상당한 기간이 필요로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 멍에는 쉽고 가벼움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메고 있던 멍에의 짐, 두려움의 짐을 다 벗어 던지고 내가 주는 멍에로 바꾸라는 말씀입니다(안식일의 주인은 예수). 그 멍에는 참 평안과 구원, 해방과 영생을 가져오는 멍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가득이나 힘든 세상을 살아가기에 지쳐있는데도, 지지 않아도 될 짐을 지고 스스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생활의 염려와 근심ㆍ걱정을 비롯한 수다한 멍에를 메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삶이 피곤한 것입니다. 그 원인은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짐을 잠자리까지 가져가 잠이 평안치 못하여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잠자리에 갈 때는 잠시라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놓으면 순간 몸과 마음이 평안해지고 포근해져서 곧 잠이 옵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머릿속이 복잡하면 온몸이 경직되어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습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포기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되어집니다.
마 6:25-34 / 내가 전정으로 말한다. 먹고 마시고 입고하는 것으로 염려하지 말라. … 그것은 먹고 마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 않느냐? 26) 공중의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어들이거나 양식을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으나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희는 새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27) 너희가 걱정한다고 해서 그 걱정이 너희 목숨을 한 순간이라도 연장시킬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는 왜 의복 때문에 걱정하느냐? 들의 백합화를 보라! 백합화는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으나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왕도 그 꽃만큼 아름답게 옷을 입지는 못하였다. 30)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꽃들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 돌보아주시는데 하물며 너희야 더 잘 돌보아주시지 않겠느냐? 31) 그러므로 음식과 의복을 쌓아 두려고 걱정하지 말라.(삶이 매우 어려운 예수님 앞에 나온 무리들에게) 32) 왜 그런 것에 마음을 쏟고 자랑을 늘어놓는 이방인처럼 되려고 하느냐?(사람들은 경쟁을 하듯이 남에게 잘 보이려고 옷을 화려하게 입는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이러한 사실을 믿어드리자) 33)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이렇게 하면 일거양득의 복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희의 내일 일도 돌보아주실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의 것으로 족하다.
▶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했었습니다. 예수님 밑에 들어가서 온유하게 겸손하게 삶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뭡니까? 한 마디로 한다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부패와 질병과 저주와 사망을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시는 말이 “네 짐을 내게 맡기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내 멍에 밑에 들어와라. 나와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중동에서는 밭을 갈 때 언제나 어미 소 멍에 밑에 새끼 소를 같이 넣어서 밭을 갑니다. 새끼가 온유하게 순종하고 따라가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어미 목에다 길마를 걸어 놓고 그 옆에 새끼를 넣습니다. 어미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멍에를 끌면 새끼는 멍에의 무게만 감당하고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고통과 질병의 짐을 지신 예수님이 함께 하시지만 멍에의 무게만큼은 우리가 감당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다 내게로 오라, 내 멍에를 메라, 내 멍에는 가볍다.”고 하셨지,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다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어려운 오늘의 현실이 순식간에 다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현실과 상황은 그대로 있을 수 있습니다. 대신 이전과는 다르게 내 생각이 달라져서 그동안 무겁게 생각되던 환경과 상황에 소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동안 무겁던 멍에들이 가벼워지기도 하지만 가볍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과 멍에를 같이 하십시오.
똑같은 환경이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므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어려운 현실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기도하므로 좋지 못했던 환경도 극복하게 됩니다.
가나안을 정탐했던 여호수아와 갈렙, 10명의 사건이 이런 경우입니다. 그들은 같은 현실을 보았지만 그들의 시야, 생각, 기준은 달라 서로 다른 보고를 하였습니다. 이런 다른 생각과 기준은 서로 다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은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 나머지 10명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불신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10명은 자신들도 괴롭고, 가족도 괴롭고, 그들의 지파도 괴로웠을 것입니다. 이렇게 내 안에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삼으면 나타나는 현실이나 미래가 다 부정적인 결과를 낳아 평생 무거운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광야 같은 환경이라도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는 소망적인 환경으로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됩니다. 가나안과 같은 천국은 신령한 눈이 뜨이지 않으면 절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현실을 믿음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 미래를 믿음으로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예수를 믿는다고 다 긍정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공동체를 불화하게 만듭니다. 회의를 하면 여러 사람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믿음의 생각은 간 데 없고 자꾸만 안 된다고 실패율만 생각하며 염려만 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은 하지만 모두가 하나님 중심적인 믿음과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좋지 못한 상황에서 바람과 풍랑을 잠재울 큰 믿음을 갖는 것 자체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람과 풍랑을 잠재운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우산장수와 소금장수를 아들로 둔 어머니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날마다 걱정입니다. 비가 오면 소금장사 아들 걱정이고 날이 맑으면 우산장사 아들 걱정입니다. 이것이 오늘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 유형입니다. 예수 안에 살면서도 이렇게 매일 걱정의 끈을 놓지 못합니다. 우울증에 걸리기 십중팔구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매일 감사할 수 있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장사 아들이 우산을 많이 팔 것을 생각하고, 날이 맑으면 소금장사 아들이 소금을 많이 팔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비가 오는 날도 날이 맑은 날도 모두 행복한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경우도 이러한데 이렇게 마음을 조금만 바꾸면 일 년 내내 행복할 수 있는데, 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삶에 위축되어 염려와 근심에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합니까?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며, 두 아들 모두가 한꺼번에 다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처럼 그리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이 무거운 멍에를 지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십니다(신 28, 30장).
■ 영국의 정신과 의사인 하드필드는 재미있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의지가 육체적 힘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 가를 실험했는데, 이를 위해 손으로 쥐는 ‘악력(握力)’을 측정해 분석했습니다. 우선 세 사람의 남자를 불러다 놓고 손으로 쥐어 보라고 했었습니다. 보통 상태에서 평균 악력은 45kg이었습니다. 의사가 그들에게 부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당신들은 약골이다. 육체의 근육을 보니까 힘을 못 쓰게 되어 있다. 영양실조다. 힘이 없다.” 그렇게 약하다고 인식을 시켜 놓고 또 다시 주먹을 쥐라고 하고 보니까 13kg의 악력 밖에는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당신은 굉장히 강하다. 당신은 할 수 있다. 당신 근육을 보니까 훨씬 더 무거운 것을 걸머질 수 있다. 힘이 있다. 약하지 않다. 튼튼하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용기를 주고 측정을 하니까 무려 68kg을 쥐었다고 합니다. 보통 때는 45kg을 쥐고,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오면 13kg를 쥐던 사람이 강하다고 용기를 줘 놓으면 68kg을 쥐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힘의 절반 이상은 마음가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내가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면 연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강하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면 굉장히 강한 힘이 생겨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면 엄청난 힘이 발생할 것입니다.
■ 정신과 의사인 데이비드 핑크(David H. Pink) 박사가 만 명을 상대로 신경과민과 불안증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우선 신경과민과 불안증으로 고생하는 부류는 그렇지 않은 부류로 나누어서 조사했는데,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신경과민과 불안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중요한 특징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늘 안 좋은 부정적인 것만 보고 듣고 말하였습니다. 마음에 신경과민과 불안증이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보는 것과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이 모두다 부정적이었습니다. 안 좋은 것만 찾아다니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환경에 대해 언제나 불평을 말하고, 불만하고, 탄식하고, 불만족을 말하는 것이 정신과민과 불안증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반면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신경과민과 불안증이 없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짐에 눌린 사람들은 늘 불안과 공포 가운데 생활합니다. 그들은 자신과 주변 환경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늘 미움, 원망, 탄식, 불평만 합니다. 신앙상담을 하면서 제일 힘들게 하는 분들을 보면 앉자마자 불평을 합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에 대한 원망, 남편에 대한 원망, 자식에 대한 원망, 사회에 대한, 자기에 대한 원망을 하는 데 한 마디로 불평 전문가(덩어리)입니다. 물론 상담을 하여 상대방의 아픔을 들어주는 것도 약이 될 수 있겠지만 일시적인 효과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과 멍에를 같이 해야만 마음에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잘못된 율법주의 생각을 버리십시오.
왜 사람들은 예수 앞에 나오려고 하지 않을까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예수님을 믿고 봉사ㆍ충성하는 것이 내 인생의 짐을 하나 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은 오히려 믿으려고 하는 이들에게 짐이 됩니다.
마 23:23-26 /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율법에 따라 바치면서 정의와 자비와 믿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무시하고 있다. 물론 십일조를 바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24) 눈먼 지도자들아!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통째로 삼키는구나. 25)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은 방탕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 26) 눈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닦으라. 그래야 잔 안팎이 다 깨끗해질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이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들의 어깨에 지웠습니다. 당대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의 외형적인 준수를 지나치게 강조했습니다. 거기다가 장로들의 유전을 제정하고,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하고, 굴레로 착고를 채워 신음하게 만들었습니다.
유대교뿐 아니라 오늘 많은 종교를 갖고 사는 사람들 중에는 자유를 얻기는커녕 오히려 더 무거운 짐을 하나 더 지고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라고 부르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종교의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면서도 가인이나 에서와 같은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다윗의 큰형 엘리압(삼상 16:6-7)처럼 이미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맡겨진 일에 대하여 묵묵히 충성하는 다윗과 같이 영과 진리로 예배도 하고 순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에 충성ㆍ봉사하라는 짐에 억눌리어 불평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너무 과중하게 헌금을 하라거나, 무리하게 직분을 맡김으로 인하여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에게 교회 생활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사실 그들에게도 과중한 직책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힘에 겨워 헐덕거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마 23:2-4 /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뿐이고 실행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4) 그들은 자기들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요구를 너희에게 강요하지만 자기들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교회에 나오면 편히 쉬게 해 주겠다고 하지 않고 예수님께 나오라고 하셨으며, 한 걸음 나아가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워야 참된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분들에게 이 점을 분명히 강조해야 신앙의 길을 가게 됩니다.
■ 종교를 짐으로 생각해서 자기가 믿고 따르던 신앙을 버리고 떠나갔다가 인생의 긴 방황 끝에 돌아와 다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소설을 쓴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입니다. 톨스토이는 어렸을 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틴에이저 시절에 신앙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55세가 되었을 때, 그는 신앙론이란 글을 쓰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의 지나간 55년간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의 최초의 15년간의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나는 안식을 경험하지 못했다. 안식을 알지 못하고 살아 왔다. 내가 18세 되던 나이, 내 친구는 나에게 찾아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그 말이 진리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의 종교 가족의 종교인 기독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심지어 종교는 속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나이 55세, 이제 나는 내가 버린 어머니의 품과 같은 신앙의 품으로 돌아온다. 나는 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 왔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나는 다시 참된 안식을 발견했다.’
톨스토이가 오랫동안 방황하게 된 원인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소경인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율법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히 읽고, 배우고, 묵상하고 기도하여 실천함으로 내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내 멍에는 쉽고 그리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일하는 소들은 그 멍에를 결코 짐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멍에는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자신을 돕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새들이 하늘을 나르고 있는 새들이 날개를 부담스러운 짐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일하지 않는 소는 병든 소이지만 소들은 멍에가 있어서 편리하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기분 좋게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소들을 제대로 부릴 줄 아는 그런 지혜로운 주인은 결코 소들을 무조건 일 가운데로만 몰아넣지 않습니다. 적당한 휴식과 일에 균형을 맞춥니다. 쉬면서 일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여기서 쉼이란 무한정한 휴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 그리고 내가 성취해야 할 과제를 위해서 적당한 쉼을 갖게 하는 안식입니다. 마치 악상기호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쉼표(,)와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맞는 멍에를 매게 하시고 예수님도 함께 메고 일하십시다. 힘들고 어려울 것 같아도 하나님의 일을 해야 안식이 있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영혼이 진정한 쉼을 얻는 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힘들게 일하는 것 같아도 정말 힘들고 어려운 것은 예수님이 다 담당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이끄는 대로 따라다니면 칭찬과 상급 그리고 은혜와 기쁨이 따릅니다.
3. 쉬지 못하게 하는 원인에서 벗어나십시오.
히 12:1 / … 이제는 다리에 달라붙어서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죄를 훌훌 털어 버리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정해 놓으신 이 특별한 경주에 인내를 가지고 달려갑시다.
어떤 심리학자는 사람이 잘 쉬지 못하고 마음이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네 가지로 말했습니다.
1. 탐욕 때문에 인간은 진정한 쉼을 누리지 못합니다.
스스로 만족을 모르는 소유의 욕구가 바로 탐욕입니다. 원한다고 모두를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건만 인간은 끊임없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야 말 것처럼 욕심을 부립니다.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합니다. 탐욕을 버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만족하며 감사하며 자족하는 비결을 배워야 참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시기와 질투 때문에 잘 쉬지 못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남과 나를 비교하는데서 옵니다. 내가 특별히 못나지도 않았는데, 남과 비교해 보면 괜히 뭔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나는 만족하지만 나보다 더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배가 아파옵니다. 그래서 그들을 헐뜯고 깎아 내려야 속이 시원해집니다. 그러나 그런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에 쉼이 있을 리 없습니다. 아무리 깎아내려도 나보다 더 훌륭하고 잘 사는 사람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3. 잘 쉬지 못하는 이유는 분노 때문입니다.
순간적으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혈기를 내고 나면, 몇 날 씩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나의 혈기로 상처 받았을 상대방을 생각하면서 잠을 못 이루고 그렇게도 노력했건만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성경에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는데, 화해를 해야지 하면서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손을 내밀지 못하고 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4. 교만 때문에 인간은 진정한 쉼을 누리지 못합니다.
교만은 정직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알던 모르던 교만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정직과 진실이 없는 사람에게 참 쉼이 있을 이가 없습니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심해서 그렇습니다. 그것도 교만입니다. 요약하면 쉼을 잃어버린 것은 바로 죄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안식을 잃었습니다.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등진 것이 죄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신 안식과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행이요 심판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에게 최초로 수고란 말이 나옵니다. 여자에게는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창 3:16)라 하였고 남자에게는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고 했습니다. 얼굴에서 땀이 흘러야 소산을 먹을 것이라는 수고의 벌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온 것이 바로 ‘수고’였습니다. 이는 노동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일에 짓눌려 노동이 즐겁지 않은 저주를 말합니다. 삶이 즐겁지 않은 것 그것이 수고입니다. 그래서 수고란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안식을 잃은 것은 즐거움을 잃은 것이요 행복을 잃은 것입니다.
천국은 안식하는 곳이요 지옥은 안식을 빼앗긴 곳입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불행은 죄를 지어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을 잃은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안식 얻을 곳이 없습니다. 안식은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을 주시기까지는 참 안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나와서 참 안식을 얻으십시오. 그리고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예수님 앞으로 나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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