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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해야 할 일들(5)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섬기라(2)>
2016년 11월 6일 / 대예배 / 마태복음 4:1-10
마 4:1-10 / 침례를 받으신 후에 예수께서는 성령께 이끌려 광야로 나가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다. 2) 예수께서는 사십 일 동안이나 금식을 한 뒤였으므로 몹시 시장하셨다. 3) 그때 마귀가 와서 돌을 떡이 되게 해보라고 유혹하며 “그렇게 하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증명될 게 아니오?”하고 말하였다. 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가르친다.” 5) 그러자 마귀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지붕 위에 세워 놓고 6) 말하였다. “뛰어내리시오. 그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시오. ‘주께서 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님의 천사를 보내 보호하게 하시니 그들이 두 손으로 너를 꽉 붙잡으리라. 혹시나 돌부리에라도 채이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리라’는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소?” 7)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도 성경에 있다.” 8) 마귀는 다시 예수를 이끌고 아주 높은 산으로 올라가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며 9) “만일 내게 무릎을 꿇고 경배한다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하고 말하였다. 10) 그때 예수께서 “사단아 물러가라. 성경에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고 이르지 않았느냐?”하고 대답하셨다.
1.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공생애는 화려한 환영 속에서 취임식을 거대하게 가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으셨고, 40일 금식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금식기간동안 육체의 한계를 경험하며 육체의 소욕을 철저히 제어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마귀의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마 4:1). 성령께서 예수님을 마귀에게 시험받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런데 왜 성령께서 예수님을 시험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후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다면 예수님이 시험받도록 하신 성령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히 2:10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만물을 만드셨고 만물은 그분을 위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늘로 인도하시려고 예수께 고난받게 하신 것은 지극히 옳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시기에 합당한 완전한 지도자가 되셨습니다.
히 2:18 / 그리고 친히 고난과 시련을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 고난과 시련의 어려움을 아시고 능히 도와주실 수 있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성현들은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타인의 죄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가 타인의 죄를 위해서 그 목숨을 버리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으십니다. 물론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너의 죄를 위해 내가 죽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는 죄의식이 없든지 아니면 희박합니다. 단지 도덕만 강조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산다 하더라도 죄인일 수밖에 없음은 본질적인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열매가 시련을 통해 주어진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에녹, 요셉, 다윗, 다니엘 등), 위대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기는 사람은 많은 시험을 통과하고 이긴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업적들은 포도나무에 있는 가지에서 열린 포도처럼 참으로 귀중한 열매였습니다.
욥 23:10 /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이 말씀을 볼 때마다 고쳐야 할 점이 생각납니다. 사람들은 흔히 마치 원광석을 용광로에서 제련하여 순수한 정금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도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연단하여 정금 같은 믿음을 갖게 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고난을 당하면 자기네들은 연단을 받는다고 착각합니다. 과연 욥처럼 연단을 받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1% 아니 1/100%라도 좋으니 그런 분들이 있었으면 합니다. 금광석을 용광로에 넣으면 불순물이 제거된 순수한 금이 나올 것이고, 은광석을 넣으면 은, 철광석을 넣으면 쇠, 나무나 연탄을 넣는다면 다 타서 재와 연기만 나올 것이고, 종이를 넣으면 순식간에 타서 없어질 것입니다. 기대하던 금은 전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욥처럼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절벽 가까이로 나를 부르셔서 다가갔습니다. 절벽 끝에 더 가까이 오라고 하셔서 더 다가갔습니다. 그랬더니 절벽에 겨우 발을 붙이고 서있는 나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 절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훈련할 때는 인정사정보지 않고 둥지를 뒤흔들어 새끼 독수리를 추락하게 합니다. 새끼 독수리를 죽이려고 하는 행동일까요? 새끼가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새끼가 사정을 하지만 어미 독수리는 사정하는 것을 외면한 채로 보금자리에서 허공으로 밀어냅니다. 새끼는 살려달라고 몸부림을 치면서 날갯짓을 하지만 계속 떨어집니다. 그러다가 기절까지 하면서 땅을 향해 무섭게 떨어집니다. 그런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서 새끼의 날개에 힘을 얻게 해 줍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강하게 하시기 위해 comport zone을 흩어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나 야곱 그리고 요셉에게도 comport zone를 떠나도록 하셨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창 12:1-4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다. “너는 어서 고향을 떠나거라. 한데 어울려 사는 네 친척과 네 집안사람들을 떠나 내가 가르쳐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네 후손이 엄청나게 불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또한 네게 복을 내려 이름을 날리게 하리라. 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3) 네게 복 빌어 주는 사람에게 나는 복을 내리리라. 네게 저주를 퍼붓는 사람에게는 나 역시 저주를 퍼부으리라. 무릇 땅위에 살고 있는 민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 4)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아브람을 따라 길을 떠났다. 하란을 떠날 때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였다.
야곱이 정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20년 동안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야곱을 버리시거나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창 28:10-15 /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11) 해질 무렵 야곱은 어떤 곳에 이르러 밤을 지낼 채비를 하고 그곳에 있던 돌 하나를 주워다가 베개 삼아 잠자리에 들었다. 12) 그가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데 땅바닥에서 하늘까지 맞닿는 큰 사다리가 보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부름꾼들이 그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아닌가? 13) 또 그 위에는 여호와께서 서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여호와이다.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네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네게 그리고 네 후손에게 주리라. 14) 네 후손이 엄청나게 불어나 땅의 먼지만큼 많아지리라. 동서남북 어디를 가든지 네 후손들이 그곳에서 가득하게 살리라. 또한 너와 네 후손으로 말미암아 뭇 나라들이 복을 받으리라. 15) 나는 늘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지켜 주리라. 분명히 말한다만 그렇게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하더라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 전까지는 내가 절대로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요셉은 17~8세에 형들에 의하여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갔습니다. 십여 년 동안 신앙인으로 겪어야 할 엄청난 신앙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와 형들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창 45:4-8 / 요셉이 형들에게 말하였다. “형님들! 이리 좀 가까이들 오시지요.” 형들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잘 보세요 형들이 애굽에 팔아넘긴 바로 그 요셉이란 말이에요. 5) 형들이 나를 애굽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세요. 다 하나님의 뜻이 있으신 거지요. 우리 식구들 생명을 구해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나를 미리 애굽으로 보내신 것 아닙니까? 6) 이 땅에 기근이 든 지 올해로 2년째입니다. 앞으로도 5년은 더 기근이 계속될 것입니다. … 7) 하나님께서는 형님들과 또 형님들의 아이들까지 목숨을 구하시려고 나를 미리 이곳 애굽으로 보내셨지요. 하나님께서 이곳으로 나를 보내신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분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복을 내리신 것인가요? 8) 나를 애굽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또 하나님께서 나를 바로 밑에서 일하는 애굽의 총리로 삼으셨지요. 그래서 나는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다 내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옛사람은 버리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물이 변화하여 최고급 포도주가 되는 것처럼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새사람으로서의 변화를 싫어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그냥 살던 대로 안주하려고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라 돌 항아리 6개에 물을 길어다 부어야 하는 희생이라든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마음과 생활방식, 교회를 위한 헌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아니 싫어합니다. 왜 그럴까요?
새사람이 되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아브라함처럼 발붙일 곳(땅이나 사람)이 없는 객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야곱처럼 외삼촌 집에서 수많은 설움과 속임 속에서도 살아야 합니다. 요셉처럼 멸시천대와 더불어 많은 고생을 밥 먹듯 해야 합니다.
그러니 누구 말대로 사서 고생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어진 고난이라면 몰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아브람이 자기 고향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살았더라면, 야곱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늘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요셉이 아버지 집에서 그냥 살았더라면 새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물론 어느 정도 신앙생활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꼬리나 몸통이 아닌 머리가 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도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사도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볼 때 이러한 일들은 장성한 성도로서 당연히 겪어야 할 일들입니다. 아니 가야할 길들이었습니다.
마 16:24-27 / [예수를 따르는 길]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26) 너희가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생명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생명의 가치를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 사람이 살아온 대로 심판할 것이다.”
빌 2:5-9 /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자세를 본받으십시오. 6)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거나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셨습니다. 7) 오히려 그 큰 능력과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상을 취하여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8) 아니, 훨씬 더 자기를 낮추어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9)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보금자리를 흩어버리시는 것입니다. 익숙했던 고향과 친척과 이웃을 이별하게 하십니다. 추락의 아픔을 겪게 하십니다. 꼭 떨어져서 죽을 것 같습니다. 혼란스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까? 아기 독수리가 추락하면서 그대로 바닥에 내리 꽂일 것 같으면 어미 독수리가 쏜살처럼 내려가서 새끼 독수리를 받는 것처럼 하나님은 성도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보고 계십니다.
시 37:23-24 / 사람이 살아가야 할 도리를 여호와께서 인도하신다. 가르치신 그 길 따라 살아가는 것 여호와께서 흐뭇해하신다. 설령 넘어질지라도 곤두박질하지는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그 손 붙잡아 주시는 까닭이라.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깊은 골짜기도 통과하라는 것입니다. 그곳을 지난다 해도 아무런 두려움없이 가도록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들 곁에 함께 계시고, 전능하신 주의 오른팔로서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니 많은 시름 사라져 버리고 마음이 든든하게 될 것입니다.
무서운 시험을 겪었던 욥의 경우를 보십시오. 욥은 견딜 수 없는 고난들은 하나님께서 미워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훈련의 과정임을 고백합니다.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욥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길을 아신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자신의 처지와 가야할 아시고 인도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를 자신들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성도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지 않으십니다. 성도가 시험을 당할 때는 피할 길도 함께 주십니다.
■ 인도의 대장장이에게 “당신이 금을 연단할 때, 이것이 순금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대장장이가 대답합니다. “예, 금속에서 내 얼굴이 잘 보이느냐를 가지고 결정합니다. 제 얼굴이 깨끗하고 확실하게 보일수록 그 금은 순금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인격에 자기 자신의 모습이 비추어 질 때까지 연단하십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남을 무시하는 교만의 불순물, 죄를 사랑하는 욕심의 불순물, 미움과 시기, 다툼의 불순물과 원망하고 불평하는 불순물들을 고난이란 연단을 통하여 다 없애고, 깎을 것은 깎고, 버릴 것은 버리도록 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인을 치실 것입니다.
원래 시련이라는 말은 순금과 가짜 금을 구별할 때 사용합니다. 쇠붙이를 벌겋게 용광로 속에 달구어서 원하는 형태로 두들겨 찬물에 담급니다.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질 때까지 다시 달구고, 두들겨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 내는 것처럼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음에 들기까지 만들어 가십니다.
금이 가지는 순도는 캐럿(karat)이라는 단위로 표시합니다. 불속에 반복적으로 녹이면서 불순물을 계속 제거하는데 14번 제련하면 14K요, 18번 제련하면 18K요, 뜨거운 불로 24번 제련하면 24K가 되어 순금이 되는 것입니다. 금은 뜨거운 풀무에 들어가고 대장장이에 망치로 사정없이 두들겨 맞을 때마다 아파서 비명을 지르겠지만 어떡합니까? 순금은 이런 제련에 과정이 없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믿음으로 만들어주십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 정제되는 인격이며 삶입니다.
영국 격언에 ‘잔잔한 바다에서는 훌륭한 뱃사공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망망대해의 거친 파도를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유명한 선장이 될 수 있습니다. 고난이나 연단 그리고 단련은 훈련의 과정일 뿐 사람은 고난과 연단을 통해 인격과 신앙이 성숙되어 갑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들로 만들어져 갔고 믿음이 성숙되어졌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있습니까?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잃지 않으면 정금같이 되어 나올 것입니다. 믿음으로 주를 바라 볼 때 신앙이 성숙되고 정금같이 될 것입니다.
히 12:1-13 / [하나님의 훈련] 이처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경기장에 둘러앉아 우리의 경기를 지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속도를 늦추거나 뒤로 물러설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다리에 달라붙어서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죄를 훌훌 털어 버리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정해 놓으신 이 특별한 경주에 인내를 가지고 달려갑시다. 2)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며 완성자인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올 기쁨을 아시고 그 십자가를 수치로 여기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의 영예로운 자리에 앉아계십니다. … 12) 그러므로 여러분은 느슨해진 주먹을 힘껏 쥐고 떨리는 무릎을 굳게 일으켜 세우십시오. 13) 그리고 여러분이 걸어가기에 똑바르고 평평한 길을 열어 나가십시오. …
광석들을 용광로에 넣지 않는 한 금은 절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시작부터 믿음이 없다면 아무리 험난한 고난이 지난 후에도 믿음이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고생만 죽도록 한 후에 남는 것은 고난만 받았다는 경력만 쌓일 뿐입니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은 부정적인 말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할 뿐입니다.
▶ 믿음이 있는 사람은 고난을 어떻게 대처할까요?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➀ 고난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 위를 걷다가 바람과 파도를 보고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고, 사도 바울처럼 수많은 생명의 위협과 시련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 그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➁ 고난에 대하여 혼란스러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냉철한 마음으로 ‘고난이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를 살펴 대처를 해 나갑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기도하며 자신을 돌아보기에 힘씁니다.
➂ 믿음이 확실한 사람은 고난이 오기 전이나, 시련의 와중에 있거나, 고난이 다 지나갔거나 상관없이 그의 입의 고백은 욥처럼 동일하며 찬양이 입을 떠나지 않습니다. 금은 용광로에 들어가기 전이나 들어가 있을 때나 밖으로 나왔을 때나 한결같이 금입니다. 단지 용광로를 거치면서 불순물이 다 소멸되어 순금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게 될 것입니다.
■ 40여 km를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나중에는 일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질 것이고, 마치 앞에 놓인 길이 끝이 없는 것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라톤 선수는 경주에 나가면서 두려워 전전긍긍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박차고 나갈 것입니다. 긴 경주동안 단 한 번도 자기가 왜 뛰고 있는지 궁금해하거나 혼란스러워 하지 않습니다. 물론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완주의 기쁨을 상상하며 아랑곳하지 않고 뛸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그가 마라톤을 완주했기 때문에 갑자기 마라톤 선수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가 마라톤 선수로서 많은 훈련과 준비를 했기 때문에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습니다. 겪어야 할 고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통과될 때까지 그 시험은 계속됩니다. 믿음을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키우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난이 오기 전에 믿음을 키우십시오. 고난을 통해 온전한 믿음 – 정금과 같은 믿음이 되도록 힘쓰십시오.
▶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로 나오시기 전에는 받은 바 시련이나 시험이 없으셨다는 말인가? 결코 그것은 아닙니다. 요셉의 경우를 본다면 일찍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위고, 형들의 시기 질투 속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형들의 손에 의하여 애굽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많은 고생 속에서 보디발의 집에 청지기라는 직위까지 오르지만 보디발의 아내의 동침하자는 것을 거절하는 관계로 중상모략으로 인하여 옥에 갇히게 됩니다. 손과 발이 착고로 인하여 심히 상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때가 되매 하나님의 섭리로 바로의 꿈을 해몽하여 총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 후 요셉은 본격적으로 공생애의 길을 걷게 되고 형들과 재회를 하고 그리던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요셉이 아무 준비도 없이 총리가 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연의 일치도 아닙니다.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차기 왕으로 내정되었지만 십여 년 동안의 시련과 연단을 걸쳐 공생애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 후 30세가 되어 유다 왕이 되고 7년 뒤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많은 시련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기에도 벅차지만 공생애의 길을 걸어야 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은 다른 사람의 십자가까지 져야 하기에 참으로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섭리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지만 모세처럼 스스로 선택하여 세상 등지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과 동행한 삶들이었습니다.
성경에 있는 시험을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➀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으로 믿을만한 자, 충성되고 헌신된 자를 시험하시고 승리하게 해서 더 큰 인물로 사용하십니다. ➁ 우리를 멸망시키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해서 마귀가 주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사람과 원수 맺게 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나게 하는 사건이 생기게 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겪으신 시험입니다. 성도라면 마귀가 주는 시험일지라도 예수님처럼 당당히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2.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유혹
▶ 사람에게는 기본적인 욕망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식욕(食慾)과 성욕(性慾)과 명예욕(名譽慾)입니다. 물론 개인의 차이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이 세 가지 욕망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완벽하게 욕망을 다스리고 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대충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성도의 갈 길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닥쳐오는 유혹에 대한 올바른 처신 방법입니다.
육체는 일정 기간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생명의 위협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음식을 먹지 않고 얼마나 오래 동안 살 수 있을까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 생존자 박승현(당시 19세)양은 음식은 물론 물 한 목음도 마시지 못하고 17일을 견뎠으며 비교적 건강한 상태로 구조됐습니다. 기네스북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물과 음식이 전혀 공급되지 않는 상황에서 가장 오래 생존 했던 기록은 1979년 오스트리아의 안트레아 마하베츠(당시 18세)군이 세운 18일입니다. 지금까지의 기록으로 보아 붕괴나 지진 등으로 매몰된 상황에서 인간의 생존능력은 대체로 20일정도가 되지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최근에 발행된 '윈 형제와 폴 해터웨이'가 지은 『하늘의 속한사람』이라는 책에서는 '윈'은 물도 마시지 않고 74일간을 금식했다는 신앙 간증이 있기도 합니다.
40일 동안 금식하던 예수님에게 돌로 떡을 만들어 굶주린 배를 채우라는 시험입니다. 그 상황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문제를 해결해 보라고 제시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라면 몰라도 예수님께서는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떡과 돌은 전혀 성질과 쓰임새가 다른 물질입니다. 둘은 서로 비교할 수도 없고 대신 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서 돌로 떡을 만드실 이유가 없습니다.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밭을 갈아 곡식을 심거나,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하신 법칙을 깨뜨리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신 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하신 것으로 저들이 가나안의 양식을 먹게 될 때에는 매일 같이 내리던 만나는 끊어졌습니다.
부지런히 일을 하지는 않고 신분과 지위 그리고 권력을 남용하여 부정축재하는 것은 마귀가 주는 시험에 넘어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런 마귀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성경에 기록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굶주린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오병이로 5천명이 먹고 남도록 풍성한 기적을 베풀어 주셨고, 이어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길 수 생명의 양식을 주셨으며, 굶주림을 뒤로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밥 먹듯 하셨습니다.
요 4:31-34 /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은 예수께 잡수실 것을 권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거절하시며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33) 제자들은 “누가 음식을 갖다 드렸을까?” 하고 수군거렸다. 34)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양식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떡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떡만을 위해 사는 인생이 불행하며 떡이 내 인생의 90%를 차지한다면 불행한 삶입니다. 나를 풍성하게 하고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세상을 분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을 양식보다 귀중히 여기십시다.
3.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인데 설마 다치게 하시겠느냐는 것이 마귀의 유혹합니다. 그러니 뛰어 내려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 말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향해 무리들이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도 그러했습니다.
마 27:39-43 / 지나가던 사람들이 예수께 욕을 퍼붓고 고개를 흔들며 말하였다. 40) “그래, 네가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였지? 자,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네 자신이나 구원하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41)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유대의 지도자들도 예수를 조롱하고 비웃었다. 42) “남은 구원한다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그래, 유대인의 왕이라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럼 우리가 믿겠다! 43) 하나님을 믿고 있다니 하나님께 풀어 놓아 그 증거를 보여주시라고 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큰소리를 치지 않았는가 말이야.”
정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 오셨다면 저들이 믿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하셨겠습니까? 만일 소수의 무리가 믿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은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셨을 것입니다.
기적은 아무 때에나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기분대로 베풀려는 것은 커다란 잘못입니다. 물론 자기의 욕심이나 명예심에 의하여 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 기적을 베풀려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축복의 통로 or 기적의 통로 역할만 하면 됩니다.
마치 우리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종인 것을 증명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면 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고 인정도 하게 됩니다.
자기를 증명하려는 사람은 열등감이 많이 있는 사람입니다. 학벌을 내세우고 업적을 나타내려 하고 ‘나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증명하는 행위인데 이것은 열등감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작은 일을 해도 크게 보이려고 하고, 은밀히 해야 할 일도 크게 떠벌립니다. 남이 나를 알아줘야지 내가 나를 증명하려고 하면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물론이거니와 내 존재의 행위를 증명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마귀에게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뢰와 순종입니다.
4. 경배의 대상을 바꾸라는 유혹
첫 번째와 두 번째 시험에서 실패한 마귀는 마지막 세 번째 시험으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그것은 첫 번째나 두 번째 시험과는 달리 매우 노골적이고 도전적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시험은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렇게 해 봐라’는 것이었는데, 마지막 시험은 아주 이판사판 본색을 드러내놓고 막판 결판승부를 겁니다. 마귀는 여러 가지 방법과 전략을 동원해서 성도들을 시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험을 한 번 이겼다고 안심하거나 자신만만해서는 안 됩니다.
고양이에게 쫓기던 쥐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돌아서서 고양이를 물려고 달려든다고 하듯이,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려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하는 말이 만약 나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시험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귀의 시험이 얼마나 위험하고 악랄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마귀가 노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귀는 예수님에게 세상의 영광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것은 고난과 죽음에로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영광을 약속합니다. 하나님은 가서 죽어라고 하셨는데, 마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가서 낮아지라고 하시는데, 마귀는 높아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가서 섬기라고 하시는데, 마귀는 다스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가서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 죄인들을 구원하라고 하시는데, 마귀는 자기에게 절 한번 하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마귀의 약속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매력적입니까? 어느 것이 우리의 성품에 더 맞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이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심을 고백하는 것은 잘한 것으로 예수님도 칭찬하셨습니다.
마 16:15-20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께서 다시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참으로 복되구나.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18) 내가 네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 어떤 죽음의 세력도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너에게 주겠다. 네가 땅에서 잠가 둔 문은 어떤 것이든 하늘에서도 잠길 것이고, 땅에서 열어 둔 문은 하늘에서도 열릴 것이다!”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던 것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음과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신 것은 알았지만 정작 메시아로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에 대하여는 알지 못하였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기적과 표적을 베푸시는 것에 들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제자로서의 3년 동안 걸어온 길이 면류관을 받는 길로 착각을 한 것이었습니다. 사실인즉 제자의 길에서 공생애의 길 즉 사도의 길을 걸어야 할 입문인 줄은 몰랐습니다. 이런 생각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마 16:21-24 /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일과 거기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제자들에게 비로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그 일이란 예수께서 유대인 지도자들인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절히 말하였다. “주님,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주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23)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를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지 않고 인간 편에서만 생각하는구나.” 2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나약하기만 했던 베드로 사도는 A.D. 51년 글라우디오 황제 이후 로마 제국의 박해가 시작될 때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믿음과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베드로전서를 쓰면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벧전 1:6-7 / 그러므로 진심으로 기뻐하십시오. 이 세상에서는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시련으로 괴로움을 당하겠지만 앞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7) 이러한 시련은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나 강하고 순수한 것인가를 보고자 하는 시험에 불과합니다. 마치 금이 불에 정련되어 순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믿음을 어찌 닳아 없어질 금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불과 같은 시련 속에서 연단을 받은 후에도 강한 믿음으로 남아 있을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많은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될 것입니다.
벧전 4:1 /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생활]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받으시고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분과 같은 각오로 언제 어떤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견디어 낼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두십시오. 여러분의 육체가 고난을 받을수록 죄악은 그 힘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벧전 4:19 /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옳은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그 일을 계속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지으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결코 여러분을 모른 체 그냥 내버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키는 인물이 된 것의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그의 꿈이었습니다. 아주 선명하게 꿈을 꾸었습니다. 사탄의 대장이 부하들에게 “너희는 가서 이 땅에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을 전멸시키라. 방법은 너희 마음대로 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부하들을 보냈는데 다 돌아다닌 다음에 세 사탄의 부하들이 대장에게 보고하기 위해 왔습니다. 첫 번째 부하에게 “너는 어떻게 했느냐?” “대장님! 사막을 걸어가는 예수쟁이들에게 나는 잡혀 먹히라고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겁이 나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순교를 당할 수 있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오히려 믿음이 더 좋아졌습니다.” “실패했구나. 둘째는?” “저는 바다를 항해하는 예수꾼들에게 폭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갑판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을 찾고 밤새도록 끊이지 않는 기도를 드리고 주님을 더 의지합니다.” “너도 실패했구나. 셋째는?” “저는 세상에 내려가서 가난한 교인들을 찾아가서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주었습니다. 돈과 건강과 성공과 모든 것을 다 가지라고 베풀었더니 10년이 되니까 그들의 영혼은 완전히 썩어버렸습니다.” “너는 성공했구나.” 꿈을 깬 루터는 이게 하나님이 주신 영적 사인이라고 생각하고 고난의 길을 택해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영광으로 여깁니까? 겉으로 나타난 성공의 열매입니까? 고난 속에서 이룬 자기 희생입니까? 이스라엘에서 포도즙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잘 익은 포도를 사람들이 발로 밟습니다. 그러자 순하고 향기로운 포도즙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때 생각하게 됩니다. “아, 두 종류의 사람이 있구나. 다만 잘 익은 포도알이 되려는 사람과 그 포도알이 으깨져 향기로운 포도즙이 되려는 사람이 있다“. 그렇습니다. 잘 익은 포도알처럼 성공하려는 사람과 자기를 희생시켜 남을 살리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 한국 교회가 크게 부흥하게 된 것은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과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천황을 신으로 섬기게 한 신사참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목사 성도들이 신사참배를 따르지 않고 반대하자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대표되는 분 중에 한 분이 주기철 목사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평양 산정현 교회를 시무할 때 마지막 양심의 보루로 남았던 장로교단이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라고 가결하자 설교를 통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흘리셨습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체 하오리까?”
그리고 목사님이 설교를 이렇게 끝맺었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칼날이 기다리고 있어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천만번 죽어도 나는 꺾어지지 않으리라.”
그의 설교가 끝나자 산정현교회 안은 대성통곡이 터지면서 온통 눈물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1938년부터 1944년까지 5년 4개월 동안 다섯 차례 옥살이 하는 동안에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채찍질과 못판 위를 걸어가서 발이 다 못에 찔려 피가 터져서 파상풍에 걸리기도 하고 폐병과 심장병, 각종 고문으로 인해서 병이 생겨나서 1944년 해방을 한 해 앞두고 48세를 일기로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천국을 가십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나를 받아주소서.”
시신을 내오는데 지문까지도 대나무로 다 파여 가지고 지문이 흔적조차 없고 손톱 발톱은 다 뽑혔고 온 몸은 까맣게 타있었다고 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경배하기 위해서 믿음을 지킨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순교의 피가 오늘날 한국 강토를 적셔서 한국이 이와 같이 1천 2백만의 교인들과 5만 4천 교회, 10만여 교역자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환난은 우리를 축복으로 인도하는 도구요 과정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시험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더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다가오고 어려움이 다가와도 믿음을 지키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전진해 나가십시다.
■ 조선의 교회는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선교사의 순교 위에 세워졌습니다. 토마스는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습니다. 당시 쇄국정책을 쓰던 조선은 솔가지와 유황을 뿌려 나룻배를 떠내려 보냈고 셔먼호에 나룻배가 닿자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배에 탔던 사람들이 뭍으로 올라오자, 군관들이 그들을 처형했습니다. 토마스는 죽이려는 군관 박춘권에게 성경을 주면서 두 손으로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토마스 선교사를 처형했습니다. 그 후 박춘권의 심령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도대체 죽어가면서도 책을 주려던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하며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믿게 된 박춘권은 훗날 영주교회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그 날 성경책을 대신해서 받았던 군관 박영식은, 성경책을 뜯어 방의 도배를 하였는데 날마다 벽에 붙어 있는 말씀이 들어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성경으로 도배한 집이 평양에서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교회가 되었습니다. 널다리골 교회는 1907년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던 장대현 교회의 전신입니다. 한 알의 밀이 희생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열매는 희생을 전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 태평양 가운데에 있는 ‘피지’라는 섬나라에 빌리 부쓰(Billy Booth)라는 사람이 예수를 믿고 전도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느 집에 가서 전도를 하다가 집 주인에게 질그릇으로 머리를 얻어 맞았습니다. 빌리부쓰는 전에 훌륭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구원받은 후에는 그가 군에서 차고 다니던 큰 칼을 벽에다 걸어놓고 예수 믿기 전에 자기가 얼마나 포악했던가 하는 것을 늘 반성하고 그 앞에서 성경을 읽곤 했습니다. 그런데 전도하다가 질그릇으로 머리를 얻어맞고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머리도 아프지만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 나라에서는 여자들이나 질그릇으로 얻어맞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까 분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벽에 걸려있는 칼을 붙잡고 가서 복수하려고 했지만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 . 참아야지, 참아야지.”하며 참았습니다. 마침 칼 밑에 펴놓은 성경을 들어 읽어 보니까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이 말씀에 그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음도 편안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엌에 들어가서 제일 좋은 질그릇을 하나 골랐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가 문을 두드렸더니 그 집 주인이 싸우러 온 줄 알고 무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 때 빌리 부쓰는 그 사람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의 질그릇이 내 머리를 때리다가 깨졌으니 대신 이 질그릇을 받으십시오. 성경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는데 당신이 나를 질그릇으로 때려서 내가 그것 때문에 천국에도 가게 됐고 하나님 앞에 많은 상을 받게 되니 감사합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질그릇을 받고 크게 감동을 받아 그도 예수를 믿고 전도해서 그 온 동네가 복음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하란 말씀 그대로 도리어 사랑을 베풀었더니 자기도 복 받고 그 사람도 구원받고 많은 사람도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썩으면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는 교훈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자기를 포기하셨습니다. 자기의 뜻을 포기하셨습니다. 부유함을 포기하셨습니다. 명예를 포기하셨습니다. 심지어 생명까지 포기하셨습니다. 완벽한 포기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 최고의 것을 포기하신 예수께서는 기꺼이 포기하는 자를 지금 찾으십니다. 온갖 하늘의 귀한 선물을 주시고자 포기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손에 쥔 것을 빼앗길까봐 꼭 쥐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잃어버리고 미워하면 영생하도록 보존됩니다. 내 것이라고 고집하는 순간 잃어버리고 사라집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꺼이 포기하십시다. 심지어 목숨이라도 주를 위해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한 알의 밀 같은 굳센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영광보다 고난의 자리를 먼저 택하여야 합니다. 편한 자리와 불편한 자리 중 불편한 자리에 먼저 앉으십시다. 쉬운 일과 어려운 일 중 어려운 일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한 알의 밀처럼 희생하는 자리, 포기하는 자리, 섬기는 자리를 찾으십시다. 봉사자는 일한 후에 자랑하지만, 섬기는 자는 더 잘 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자신을 보존하는 일에 힘쓰지 말고, 닳아 없어지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다툼이 있을 때 이기는 것보다 양보하고 지는 쪽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죽어지는 것이 바로 영광의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이 죽는 원리를 배웁시다. 교회 공동체가 잘 되는 길은 섬김과 희생과 포기의 리더십을 가진 성도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죽어지는 밀알 같은 성도들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한 알의 밀처럼 되십시다. 그런 희생을 통하여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런 포기를 통하여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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