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작은 양조장을 운영하는 유진이었다. 10년 전만 해도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는 이 오래된 건물은 방치된 상태였다. 버려진 공간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유진은 과감하게 이곳을 매입하고 직접 양조장을 열었다. 그녀는 그 공간에 그녀만의 철학과 이야기를 담은 맥주들을 채워 넣었다.
유진의 수제 맥주는 서울에서 꽤나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평범한 라거, 에일이 아닌 그녀만의 레시피로, 계절마다 한정 수량으로 출시되는 '계절의 맥주' 시리즈가 특히 인기를 끌었다. 봄에는 벚꽃과 향신료가 가미된 맥주, 여름엔 감귤과 민트가 어우러진 상쾌한 맥주, 가을에는 단호박과 계피가 섞인 구수한 맥주, 겨울엔 초콜릿과 고소한 구운 곡물이 첨가된 맥주를 선보였다.
매주 금요일 밤, 유진은 양조장 한편에 있는 작은 바에서 고객들과 직접 만든 맥주를 나누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에서도 유진의 맥주에 열광하는 단골이 있었는데, 바로 '박찬우'라는 이름의 소믈리에였다. 그는 와인이 아닌 맥주에 삶을 걸었고, 다양한 맥주를 탐험하다 유진의 양조장에 들어서면서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날 이후 찬우는 매주 빠짐없이 이곳을 찾았다.
어느 금요일 밤, 찬우는 유진에게 물었다.
"유진 씨, 왜 매번 새로운 맥주를 만드세요? 완벽한 맥주 하나를 만들고 그걸로 만족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유진은 조용히 웃었다. "저에게 맥주는 그때그때의 삶을 기록하는 일기 같아요. 지금 내가 느끼는 것, 계절에서 얻는 영감, 주변 사람들이 주는 느낌을 담는 거죠. 완벽이라는 말 대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고 싶어요."
찬우는 유진의 말을 가만히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맥주에 일기를 담는 사람이라니, 그는 더없이 신선하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얼마 뒤, 양조장에 불길한 소식이 찾아왔다. 건물 소유주가 재개발 계획을 세우며 양조장을 철거하려 한다는 것이다.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거대 자본의 힘 앞에서 작은 양조장은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유진은 무력감에 빠졌다. 매일 밤 수백 번도 넘게 그곳에서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맥주들, 그리고 그 맥주를 함께 나누며 쌓아온 시간들이 모두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찬우는 그런 유진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위해 맥주 페스티벌을 기획했다. '유진의 맥주와 서울의 계절들'이라는 이름을 건 페스티벌이었다. 온라인으로 자금을 모으고, 지역 소상공인과 협업해 도시 전역에 포스터를 붙이며 사람들에게 알렸다. 페스티벌이 시작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수많은 미디어에서도 이 양조장에 대해 다루기 시작했다.
마침내, 재개발 회사는 대중의 반발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건물 일부를 유진의 양조장으로 남기고 다른 부분만 재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유진의 양조장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시간이 흐른 뒤, 양조장에서는 새로운 맥주가 탄생했다. 유진이 직접 이름을 붙인 '찬란한 연대'라는 이름의 맥주였다. 연한 붉은 빛을 띠며 계절마다 변하지 않는 깊은 풍미를 가진 이 맥주는, 유진이 수많은 계절과 사람들과 함께 쌓아온 시간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양조장은 여전히 활기찼고, 유진과 찬우는 그곳에서 맥주와 시간을 나누며 계절의 흐름을 담아낸 맥주를 함께 즐겼다.
첫댓글 맥주 맛도 독특하고 주민들의 단결력도 대단하군요.
찬란한연대 ㆍ그맛
궁금하네요ㆍ
저도 그곳에서 맥주 한잔 하고픈 충동을 느낍니다
소신있는 사람들 화이팅입니다
언젠가 독일 수제 맥주집에서 한 잔의 막주를 마셨는데 지금도 잊지 못했거든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