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교회 역사이야기9: 조선 연행사의 북경 성당 방문 이야기
연행사<燕行使> 필수 코스였던 천주당, 신앙 전달의 다리를 놓다
- 연행사도(燕行使圖).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출처 숭대시보(http://www.ssunews.net)
조선 연행사(燕行使)가 본 북경의 성당들은 그야말로 신세계이고, 별천지였다. 서양의 신기한 문물로 가득찬 성당은 뒤이어 파견되는 연행사의 인기 만점 견학코스가 됐다. 그들은 북경의 성당에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고, 무엇을 체험했으며, 어떤 문화충격을 받았을까? 연행사의 성당 방문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먼저 동서남북 네 곳에 성당이 있었던 청나라 수도 북경부터 살펴보고 연행사의 흔적을 따라가 보자.
북경과 동서남북 천주당은 어떤 곳?
마테오 리치를 선두로 중국에 속속 입국한 서양 선교사들은 북경을 천주교 전파의 본거지로 삼았다. 그들은 황제부터 선교하고자 북경에 들어와 흠천감에서 일하면서 자명종, 세계지도, 혼천의 등으로 황실의 환심을 사고 중국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선교사들이 성당을 지어 거주하면서 서양의 과학과 문물을 소개하자 북경은 자연스럽게 지식과 정보가 넘쳐 나는 세계도시가 됐고, 동서 문화교류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명나라 말기 북경에 남당(南堂)이 세워진 이후 청나라는 동당(東堂), 북당(北堂), 서당(西堂)을 차례로 창건했다. 성당 건립에는 황제들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총애하는 선교사들이 성당을 지어 전교의 터전을 마련하고 세를 확장할 수 있도록 땅을 하사했기 때문이다. 동당은 순치제가 2명의 선교사에게 하사한 땅에 세워졌다. 북당도 강희제가 자신의 학질을 고쳐 준 폰타네(Jean de Fontaney, 洪若翰) 신부에게 하사한 땅에 건립된 성당이다.
- 현재 북경시 서성구 서십고대가 33호에 위치한 북당의 옛 모습. 신의식 교수 제공.
조선 연행사는 누구?
연행사란 북경에 가는 외교사절단이다. 북경의 옛 지명인 연경에 가는 사신이라는 의미로 부연사라고도 불렸다.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을 포함한 30명의 정관(正官) 외에도 200∼300명의 인원이 동원됐다. 정치적으로는 사대(事大), 경제적으로는 조공과 사무역이라는 목적이 있었다.
서울(한양) → 의주 → 압록강 → 봉황성 → 요동 → 심양 → 산해관 → 통주 → 북경으로 대략 3000여 리 이어지는 5개월 내외의 긴 여정이었다. 북경에 도착하면 약 60일까지 체류할 수 있었다. 공적인 업무를 마치면 사적으로 중국 학자들과 교류하고, 서점과 역사적 명소를 관광했으며, 성당에서 선교사를 만나 서양의 과학과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서장관의 친인척들은 자제군관이 돼 연행사를 따라갈 수 있었고, 성당을 견학했다.
우리가 잘 아는 김창업, 이기지, 홍대용, 이승훈도 자제군관 자격으로 북경에 가서 현장학습할 수 있었다. 연행사 일원이 돼 북경에 간 사람들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북경의 성당들을 방문하고 ‘유리창(琉璃廠) 서점 거리’를 걸었던 것이 아니다. 서양의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남달랐던 지식인들이었다.
북경에서 새로운 세계를 보고 귀국하는 연행사의 눈에 청나라는 더 이상 야만과 원수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깊고도 형언할 수 없는 감회가 있었다. 그들이 북경 천주당을 방문한 후일담은 당시 조선 국내 지식인들에게 세계화를 간접경험하게 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점차 한국 천주교가 자생할 토대를 마련해 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 남당의 내부. 구경거리가 많아서 조선 연행사 일행 중에 들어가 보는 사람이 많았다. 이현주씨 제공.
연행사와 북경 성당의 선교사
연행사가 북경 성당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그곳에 사는 선교사들을 만날 수 있고, 서학서와 서양의 과학, 문화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흠천감의 실권을 장악한 남당과 동당의 선교사들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은 매우 컸다. 선진문물과 지식 수입이라는 실질적인 이유가 분명했다. 게다가 선교사들로부터 진기한 선물까지 받았기에 북경에 도착한 연행사 일원이라면 누구라도 성당을 방문했다. 연행사의 체험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의미 있는 몇 가지만 소개하겠다.
김창업은 1712년, 남당을 방문해 천주상, 혼천의, 자명종을 보았다. 1720년 이기지는 무려 아홉 차례나 성당들을 방문했는데, 남당에서 수아레즈(Joseph Suarez, 蘇霖), 마갈헨즈(Antoin de Magalhaens, 張安多), 카르도소(Cardoso, Jean-Francois, 麥大成), 쾨글러(Ignatius Kögler, 戴進賢) 신부 등을 만났다. 이기지는 그들로부터 카스테라, 포도주를 대접받았고 수도꼭지와 같은 설비도 구경했다. 북당을 방문해서는 천리경, 서양고약, 「칠극」 3권, 「곤여도」 2권, 「천주실의」 2권 등을 받았다. 선교사들과 대화한 주제는 주로 동서양 역법의 차이였는데, 깊이 토론하곤 했다.
1729년 김순협은 동당을 방문해 서양화를 보았고, 쾨글러 신부를 만나 고름을 빼는 데에 효능이 있다는 흡독석(吸毒石)과 알레니의 「만물진원」, 서광계의 「벽망」 2권을 받았다. 1765년 동당을 방문한 홍대용의 겸손함과 학구열에 감동한 독일 출신 흠천감정(흠천감의 수장) 할러슈타인(A. Von Hallerstein, 劉松齡)과 흠천감감부(監副) 고가이슬(Antoine Gogeisl, 鮑友管)이 관상대인 흠천감을 보여줬다. 홍대용은 그들과 토론하며 천문지식을 배웠다.
한국천주교회의 자생적 성장
연행사만이 선교사들을 만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선교사들도 조선에서 온 연행사와 교류하길 원했다. 1720년 이기지를 세 차례나 방문한 수아레즈는 포도주와 고약 만드는 법을 설명해 주며 친분을 쌓았다. 1732년 오스트리아 출신 예수회 신부 프리델리(Xavier-Ehrenbert Fridelli, 費隱)는 이의현에게 알레니의 「삼산논학기」와 아담 샬의 「주제군징」, 서양화를 보냈다. 선교사들은 과학서적 속에 종교서적을 슬며시 끼워주면서, 조선 땅에 가는 방법을 물었다. 조선을 선교할 전략을 세우고 조용히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창기 연행사는 북경의 성당들을 과학지식과 정보수집의 창구로 여겼다. 특히 조선 사신들이 체류했던 옥하관(玉河館) 근처 남당은 흠천감의 선교사들이 사는 곳이어서 연행사가 가장 많이 방문했던 성당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과학보다는 종교에 대한 관심이 드높아졌다. 연행사와 선교사 교류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1784년 1월, 서장관 이동욱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아버지를 따라간 이승훈이 예수회 그라몽(Jean-Joseph Grammont, 梁棟材) 신부에게 북당에서 세례받은 것이다.
이후 북당은 조선 천주교회와 연락하는 중요한 장소가 됐다. 1790년 윤유일, 1793년 지황, 1823년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은 연행사의 일원이 돼 북경을 왕래하면서 성직자를 모셔 오고자 노력했다. 자생적으로 성장한 한국천주교회는 창설 200주년인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내한해 103위 성인 시성식을 집전하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한다.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몇 세기 전부터 북경 성당을 방문했던 연행사가 전달자로서 크게 일조했던 것이다.
* 이현주(마리아 막달레나) -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원·서강대 사학과 박사과정
서강대 종교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회원이다. 조선후기 역관과 천주교회에 대해 공부하고자 서강대 사학과에 진학해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21년 7월 25일, 이현주 마리아 막달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