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07 연중5주간 월 – 133위 053° 김준기 안드레아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마르 6,53).
133위 053° ‘하느님의 종’ 김준기 안드레아
이름 : 김준기(金俊基) 안드레아
출생 : ?년, , 진천
순교 : 1866년 11월 23일, 청주
자(字)가 ‘시경’이고, 관명이 ‘준기’인 김준기 안드레아는 충청도 진천(鎭川) 출신으로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뒤에는 신자들이 비밀리에 교우촌을 이루고 살던 진천 새울(현 충북 진천군 이월면 신계리)로 이주해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면서 천주교 신자들이나 교우촌을 수소문하고 다니던 진천 포교들에 의해 새울 교우촌도 발각되고 말았다.[1]
진천 포교들이 포졸들을 데리고 새울 교우촌으로 들이닥친 것은 1866년 10월 초였다. 그때 김준기 안드레아와 함께 새울에 있던 네 명의 신자가 체포되어 진천 관아로 압송되었고, 체포되는 것을 면했던 조대여(판크라시오)[1.2]는 이튿날 진천 관아에 자수하였다.[2]
김준기 안드레아와 동료 신자들이 체포되어 오자, 관장은 신앙을 버리고 자유롭게 살도록 권유하면서 여러 가지로 문초했지만, 순교를 각오한 그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관장은 김준기 안드레아와 동료 신자들을 청주로 이송하였고, 그들은 포졸들에게 이끌려 청주 진영(현 충북 청주시 남문로 1가)으로 압송된 뒤 다시 옥에 갇혔다.
청주 영장 앞에서 있은 문초와 형벌은 진천 관아에서보다 혹독하였다. 그러나 김준기 안드레아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신앙을 지켰다. 또 함께 형벌을 받던 교우들이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보고는 그들 모두에게 말하기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함께 순교하자.”고 하면서 힘써 권면하였다.[3] 그뿐 아니라 옥중에서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뒤를 따르라고 가르쳤고,[4] 동생에게도 다음과 같은 당부 편지를 보냈다.
“동생 보아라. 그사이 어머님 모시고 잘 지냈느냐? 나는 주모(主母)의 도우심으로 아직까지 생명을 보존하고 있지만, 어느 날인가는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실 것이다. 너는 내가 죽은 뒤에도 어린 조카를 잘 가르치고, 열심히 수계해서 내 뒤를 따라 천국에서 만날 수 있게 하여라.”[5]
이후 김준기 안드레아는 끝까지 형벌을 극복하고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동료 교우들과 함께 순교했으니, 그때가 1866년 11월 23일(음력 10월 17일)이었다.[6]
[註]__________
[1] 『병인치명사적』, 1권, 89면. 이러한 사실을 증언한 사람은 1866년 10월 17일 청주에서 순교한 이영준 아우구스티노[1.1]의 아들 이순여 토마스로, 증언 당시의 거주지는 강원도 원주 부흥골(일명 부엉골, 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이었다(『병인치명사적』, 1권, 8-9면).
[1.1] 이영준 아우구스티노(李永俊, ?-1866) : 천안 초광골(천안에서 ‘초광골’은 알 수 없지만,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산 32 골짜기를 ‘광골’이라 한다)에서 태어나 살다가 박해를 피해 진천 성암면 지장리(芝長里,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芝長里의 ‘芝’자와 加岩里의 ‘岩’자를 따서 진천읍 芝岩里 변경)로 이사하였다. 병인박해 때 아홉 골짜기 마다 못이 있었다는 진천 지구(池九)머리에 살았던 교우 권 서방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1866년 9월 11일, 천주교인들을 추적하던 청주 포졸들이 기장리 동장(洞長)을 잡아 형문하여 이영준 아우구스티노를 알아낸다. 지구머리에는 권 서방 외에 여섯 가족들이 함께 있었다. 이때 이 아우구스티노는 다른 가족들을 보호하려고 포졸들 앞에 홀로 나아가 “내가 바로 당신들이 찾는 사람이다”라며 자수하였다. 포졸들은 “이놈이 바로 천주교 큰 놈이니 단단히 묶어라.”라고 기뻐하였다. 이 아우구스티노를 포박하고는 고문을 가하고는 청주로 압송하였다. 청주 관장은 심문하기를 “천주교를 모르는 동네로 피난하여 어떻게 교를 믿었느냐?”고 물으니 이 아우구스티노는 “다른 사람 모르게 속으로 나 혼자 은밀히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지구머리에는 전부터 많은 교우가 사는 교우촌이었다. 고개 너머 동골에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은신처가 있었다. 청주 부사는 이를 모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장은 더 묻지 않고 이 아우구스티노를 옥에 가두었다. 그리하여 그 때 지구머리 교우촌의 다른 교우들은 무사하였다. 옥에 갇힌 이 아우구스티노는 몇 차례 신문을 당하다가 1866년 10월 17일 위주치명하였다.
[1.2] 조대여(판크라시오, 1829?-1866) : 진천 새울 사람 ‘조 서방’이라 불리던 그는 서울서 치명한 조덕삼 시몬[1.2]의 사촌이다. 조 서방은 1866년 10월에 진천 포졸들에게 김 서방, 신 서방, 허 서방 등 세 사람이 잡혀갈 때 그들을 뒤따라서 가본 후, 다시 집에 와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진천 관아로 가 자수하였다. 그는 하루 먼저 체포된 세 교우와 함께 진천옥에서 사흘 갇혀 있다가 청주로 이송되어 청주 장대(청주시 흥덕군 운천동)에서 네 사람이 함께 38세에 순교하였다.
[1.2] 조덕삼(시몬, 1833?-1870) : 조대여 타대오의 사촌인 조덕삼 시몬은 1866년 병인박해 때 두 차례나 잡혔으나 모두 도망쳤고, 나중에 충청도 목천(木川) 칠암면 공심리(현 천안시 병천면 매성리의 공시미. 원적산 아래 空心里)에서 살다가 1870년 3월 24일 서울·과 목천 포교들에게 붙잡혔다. 이때 포졸들이 그에게 천주교를 믿느냐고 묻자 그는 주저하지 않고 믿는다고 대답하였다. 또한 목천 관아에서 관장이 심문할 때도 천주교를 믿는 사실을 순순히 자백하였다. 며칠 후에 그는 서울로 끌려가 심문받은 다음 서울에서 38세에 순교하였다.
[2] 『병인치명사적』, 1권, 70면; 6권, 64면.
[3] 『병인치명사적』, 1권, 89면, 이순여 토마스의 증언.
[4] 『병인치명사적』, 1권, 88면. 이러한 사실을 증언한 사람은 양지 은이(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 살던 김준기 안드레아의 아내 문 아나스타시아였다.
[5] 『병인치명사적』, 1권, 89면, 이순여 토마스의 증언.
[6] 『병인치명사적』, 1권, 88면, 문 아나스타시아의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