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포의 사도.이존창
▲ 이존창이 태어나 자란곳 여사울 공소
내포의 사도.이존창
1759〜 1801, 세례명 루도비코 곤자가, 공주에서 참수
아산의 곡교천. 신례원의 무한천. 예산의 삽교천이 합쳐져 아산만으로 흐르는 드넓은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내포 평야. 예로부터 이 넓은 뜰에서 나는 산물은 뱃길로 통하였고. 그 뱃길은 복음의 통로로 이용되었다. 고 내포 평야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농촌 ‘여사울’은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루도비코 곤자가)이 태어나 자란 곳이요, 충청도 복음의 역사가 처음 시작된 못자리이다. 예전에는 천안에 속하였으나, 지금은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이다.
내포 지방에 씨앗을 뿌린 농부
1759년(영조 35년) 여사울의 경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난 이존창의 아명은 '단원‘ 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남인에 속하는 젊은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학문적 소양을 닦아 나갔는데, 훗날 영남 지방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사망한 홍유한과 스승 권철신, 그리고 이기양 등이 모두 남인에 속한 학자들이었다. 또 이존창의 집안이 부유하였던 탓에 삼남(三南. 영남, 호남,충청 지방)을 유람하던 여러 학자들이 자주 그의 집에 들러 숙식을 해결하곤 하였다.
이존창이 천주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열여덟 살 때, 즉 1776년을 전후로 권철신의 문하에 드나들면서였다. 그때 마혼 한 살이었던 스승 녹암(鹿菴)'권철신은 당대의 실학자로 유명한 이익(李瀵)의 학통을 이어받고 있었으며, 이존창이 그의 문하에 들어갈 무렵에는 이미 재기 넘치는 젊은 학자들이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있을 때였다.
이들의 학풍은 조선 전래의 주자학적인 틀에서 벗어나 경전을 자유롭게 해석하고, 스스로 이해하고 깨달은 진리를 실천에 옮기고자 하는 '자득(自得)의 학문’을 중시하였다는 데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학풍 때문에 권철신과 제자들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오는 서학(西學)서적에도 큰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바로 이 책들 속에는 조선의 학자들에게 아주 생소한 천주교 신앙이 담겨 있었다. 따라서 이존창 또한 점차 여기에 홍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천주교 신앙은 얼마 안 되어 새로운 학문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권철신과 제자들은 1779년 겨울 경기도 여주의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講學) 모임을 가지면서 이 새로운 신앙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었다. 주어사는 권철신이 살던 양근 땅의 대감 마을’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가까운 한적한 절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권일신은 1784년 겨울에 이벽, 정약용 등과 함께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니, 이것이 곧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이다.
바로 이 무렵, 이존창은 다시 양근의 대감 마을로 찾아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그에게서 세례도 받았다. 영세 직후 고향으로 돌아온 이존창은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과 덕행, 향촌 사회에서의 배경을 바탕으로 가족과 일가친척, 더 나아가서는 이웃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안 되어 그는 본래의 이름 대신 '루도비코 곤자가’ 라는 세례명으로 더 유명해지게 되었으며, 그가 전한 복음은 다리를 건너 드넓은 내포 평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저 유명한 내포 교회의 기초는 이렇게 다져졌다. 그리고 이후로 내포 지방은 천주교 신자들과 훌륭한 순교자들의 못자리가 되어 왔으니, 그 씨앗을 뿌린 농부가 바로 이존창이었다.
가 성직자단 의 신부로 활약하다
내포 교회의 터전을 닦으면서 이존창은 자주 서울을 오르내리며 학문적 스승인 권철신과 신앙의 스승인 권일신은 물론, 이승훈과 김범우, 전라도의 사도 유항검 등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였다. 그러나 1785년 봄에 있은 첫 번째의 수난으로 김범우가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 가서 죽고. 이어지는 박해자들의 탄압으로 모두가 숨을 죽여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층 신자들은 1년이 지나자 다시 몸을 추슬러 교회 부홍을 위한 단체를 비밀리에 조직하였다. 이 조직이 이름하여 ‘가성직자단('叚聖职緖團)이다.
성품성사를 받지도 않은 평신도들이 임의대로 신부를 임명하고, 그들에게 성사와 미사 집전의 권한을 부여한 것이었다. 이 단체의 조직은 독성죄(瀆聖罪)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지도층 신자들은 이러한 교회 법규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이제 갓 태어난 조선 교회의 부홍을 위해 필요하다”는 선의에서 이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가성직자단이 조직되면서 이존창은 신부로 임명되었고, 이때부터 그의 활동은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의 발길은 당진과 보령의 염전 지역에서 삽교천 인근의 덕산 지역으로, 나아가 차령산맥 너머에 있는 공주,청양 지역으로 이어졌다.
김대건 성인 신부의 집안도 그에게서 교리를 배운 뒤 신앙을 받아들였으며,최양업 신부의 집안도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또 사돈 관계를 맺었다. 훗날 서울로 이주하여 지도층으로 활동한 홍필주나 교회의 밀사로 활동한 황심 역시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충청도 지역에는 특히 농부나 염전의 노동자, 가난한 하층민 출신의 신자들이 많았다. 이들을 위해 이존창은 교회 안에서 한글로 번역되거나 필사된 서적들을 얻어 와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러면 이 책들은 또 누군가에 의해 다시 필사되어 빠르고 널리 확산되었다. 그러니 이러한 사실이 박해자들의 귀에 안 들어갈 리 없었다.
당시에 앞장서서 천주교를 배척하던 홍낙안은 마침내 조정에서까지 이 문제를 거론하였다.
이존창의 활동은 1788년 무렵 가성직자단이 해체되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선교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오히려 동료들과 협의하여 내포 교회를 더욱 확장해 나가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1791년에 이르러 한국 천주교회는 조상 제사 문제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 전해에 북경 교회의 구베아(A.deGouvea,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내린 사목 서한에 따라 신자들이 전통 제례인 제사를 폐지하였고,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선 사회 전체가 발칵 뒤집힌 것이었다.
그 결과 전라도 진산(珍山)에 살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했고, 각처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신해 박해’(辛亥迫害)이다.
박해가 시작되면서 서울에서는 일부 지도층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이어 전라도 땅과 가까운 충청도 남부 지역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이 중에는 이존창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곧 충청도의 수부인 공주 감영으로 끌려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를 가리켜 교회 기록에서는 “이존창의 배교는 내포 천주교회의 신자들에게 가장 슬프고 창피스러운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공주 감사는 이때 이존창의 배교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면서 “그는 아주 분명하게 배교하였고, 요술이 섞인 사악한 종교에 끌려들어 간 것을 원통히 생각한다고 증언하였으며. 자기가 가르친 모든 사람들을 을바른 길로 다시 돌아오도록 권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정조(正祖)는 공주 감사에게 죄가 없는 평민으로 만들어 석방해 주도록 하명하였다. 그때가 1791년 12월 중순(음)이었다.
그러나 공주 감사의 보고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한 것인지는 의심 스럽다. 이존창의 배교가 그처럼 단호한 것이었을까? 이러한 의심을 갖는 이유는 공주 감영에서 석방되자마자 그는 교회의 품으로 돌아와 천주교의 모든 본분을 다시 지키기 시작하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의 배교는 분명 단호한 배교자의 언행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고향을 떠나 고산에 자리잡다.
여사울로 돌아온 이존창은 얼마 동안 형벌로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추슬러 야만 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시 교리를 실천하면서 사도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향에서는 이름이 너무 잘 알려져있어 예전처럼 드러내 놓고 활동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집안에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그의 형은 선교 활동을 만류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이존창은 새로운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지방으로 가서
신앙 공동체를 이룩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마침내 1791년 12월 30일 밤. 친척들뿐만 아니라 300가구가 넘는 동네의 주민들이 모두 그의
곁으로 모였다. 이존창이 형에게 하직을 고하고 가족들과 함께 여사울을 떠나기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알려 준 사람이 그였고, 입교시키고 세례를 준 것도 그였기에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나 형 혹은 친구를 잃는 것과 같이 슬퍼하였다.
고향을 떠난 이존창 가족이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충청도 홍산(鴻山) 땅이었다. 그러나 이곳에도 이미 천주교 신자들이 살고 있는 데다가 관가에서 그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는 중이어서. 이들 일행은 전라도 금산(錦山)으로, 다시 고산(高山)으로 옮겨 살아야만 했다. 고산에 정착한 이존창은 비복 전보다는 훨씬 덜 드러내긴 하였지만 복음 전파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럭저럭 3년을 지내는 동안 조선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꾸준히 성직자를 모셔 오기 위해 노력하였고, 1794년 12월 3일(양 12월 24일)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영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을묘박해(乙卯迫害)가 일어났고, 이때 성직자 영입에 앞장섰던 용감한 밀사들이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
당시 이존창은 고산 땅에 살면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전주 유항검 형제, 진산의 윤지헌 등과 교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을 알게 되자 이존창은 동료들과 의논하여 주 신부를 전라도로 모셔 오게 되었다. 이제 비로소 성직자로부터 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이때 주 신부는 이존창에게 "그렇게 많은 죄를 범하고 자격도 없이 성사를 행한 데다가 배교함으로써 신자들에게 나쁜 표양을 보였으니, 어떻게 넉넉히 보속을 하겠는가. 순교만이 그대가 용서받는 길이 될 것이오”라고 하였고. 그는 이후로 끊임없이 순교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잠시뿐이었다. 조정에서는 그 이전에 이미 주문모 신부의 종적을 찾기 위해 포졸들을 사방으로 파견해 놓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워낙 비밀리에 활동하였던 탓에 매번 헛수고만 할 뿐이었다.
화가 난 포졸들은 전라도 땅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이름이 알려져 있는 이존창을 수소문하여 찾아냈고. 공주 감영에 투옥한 뒤 형벌을 가하면서 주 신부의 종적을 자백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체포되어 형벌을 받은 이존창은 감사의 평결에 따라 천안에서 연금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다시 한번 마음이 약해진 자신을. 그리고 앞으로는 사도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할 것을 한탄하였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관가에서는 이때 이존창에게 죄인들을 매질하는 형리(刑吏) 직책을 맡겼으나,형식적인 것이라 실제로는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천안에서 연금 생활을 하는 동안 이존창은 다시 한번 수난을 겪어야만 하였다. 1797년의 정사박해(丁巳迫害)로 말미암아 이듬해부터 옥중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박해는 조정의 명에 따라 일어난 것이 아니라 천주교를 증오하는 충청 감사가 제멋대로 일으킨 것이었는데, 특히 1798년과 1799년에 많은 순교자를 냈다. 당시 충청도 각처에서 100여 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체포되어 해미, 공주, 홍주, 청주 등지에서 형벌을 받았으며, 이들 대부분은 이존창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옥중 생활은 이존창에 게 선교 활동의 단절을 의미하였다. 그의 행동은 감시 장교에 의해 매일 상부에 보고되었고, 이러한 감시 아래에서 그는 마음 놓고 기도마저 드릴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완전히 신앙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신자들과 연락을 취하였다.
순교, 그리고 남은 신앙
이존창이 천안에서 옥살이하는 동안 주문모 신부도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피신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주 신부는 그동안에도 북경 교회와 연락하기 위해 새 밀사들을 끊임없이 북경에 파견하였다. 이때 그 임무를 수행한 밀사가 이존창의 인도로 교리를 배워 입교한 황심과 김유산이었고, 1798 〜 1799년 사이에 이존창은 옥중에서 비용을 마련하여 비밀리에 밀사 파견을 도왔다.
사실 밀사의 파견은 가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 모두가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사들은 북경 교회에 서한을 전달하거나 조선 교회의 상황을 알리고. 선교 비용과 성사용 성유(聖油)를 받아 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거나 서양 선박〔洋舶〕을 청해 오는 일도 밀사의 몫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박해를 극복하고, 교회를 유지해 나가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존창은 항상 감시를 받는 처지였으므로 신자들은 그와 연락할 때마다 가슴을 졸여야만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언제나 신앙의 힘을 빌려 비밀리에 교회를 도왔으며. 1799년에는 김유산을 통해 명도회(明道會)회장으로 임명된 정약종과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듬해부터 이존창은 옥살이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관아의 문밖출입은 할 수 없었다.
1800년 여름, 정조가 승하하고 어린 순조(純祖)가 즉위하면서 천주교를 증오하는 무리들이 조정 안팎에서 날뛰기 시작하였다. 경기도 지역에서는 이미 박해가 시작되었고, 천안의 이존창에게도 시시각각으로 위험이 닥쳐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1801년 1월 10일(양 2월 22일),조정에서 천주교 금지령을 반포하면서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시작되었다.
박해 직후 이존창은 다시 ‘충청도 천주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공주에서 문초를 받고 즉시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런 다음 2월 16일(음)부터 의금부에서 두 차례 문초를 받은 뒤 한 차례 형벌을 받았는데, 여기에서 이존창은 추관들의 추상과 같은 호령에 다시 한번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때때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신심을 다잡곤 하였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그전에 사망한 김범우와 권일신, 이미 체포되어 있는 최필공과 최창현 4명뿐이었다. 이존창은 그와 교류한 다른 신자들의 이름은 일절 발설하지 않았다.
2월 26일(양 4월 8일) 이존창은 함께 문초를 받은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판결을 받았다. 그에게 내려진 평결은 ‘해읍 정법'(該邑正法). 즉 죄인의 고향에서 처형함으로써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이존창은 즉시 공주로 송환되었고, 이튿날 마흔세 살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다.
그의 머리는 여섯 번째 칼질에서야 겨우 떨어졌다고 한다. 그의 친척 가운데 몇 사람이 사형 집행 현장에 있었는데, 시신을 거둘 때는 머리가 목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회 끄무레한 실낱같은 흉터가 둘러친 것 외에 다른 흔적은 없었다고 한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이처럼 자신이 신앙의 못자리로 만든 충청도 땅을 자신의 묘 자리로 삼았다. 이후 그의 직계 후손은 끊어졌지만, 그의 신앙은 그가 복음을 전한 또 다른 사도들에 의해 꾸준히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김대건 성인과 최양업 신부의 집안은 훗날 여러 명의 성인과 순교자를 탄생시킬 정도로 한국 교회에서도 가장 유명한 집안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탄생지인 여사울에서는 180여 년이 지난 1984년부터 사적지 조성 사업이 시작되었고, 1987년 11월 1일에는 그 자리에서 생가터 축복식 및 유적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면 과연 이존창은 ‘하느님의 종'으로 간택될 수 있을까? 그가 오늘날의 충청도 교회를 있게 한 사도였음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여러 차례의 배교와 회두 과정은 순교자로 인정하는 마지막 선택을 어렵게 한다. 실제로 그는 마지막 법정에서 혁혁한 공로를 보여 주지 못하였다. 다만. 그는 가혹한 문초 과정에서도 신자들을 밀고하지 않았다. 그리고 초기 교회의 총회장 역할을 하면서 모든 신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최창현은 끝까지 그를 가장 존경하는 교회 인물로 꼽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