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기에르 주교편지 (부모님께 드리는)
발신지: 중국산서
발신일 : 1834년 6월 6일
수취인:부모님께
+ 예수마리아요셉
지극히 친애하올 부모님께
부모님의 소식을 접하지 못한 지도 거의 2년이 되어 갑니다 .
두 분의 편지들 중 몇개는 아마 남경으로 발송된 것들 중에 섞여 있을 것 같아요. 요 며칠 제 앞으로 온 꾸러미가 그쪽으로 가 버렸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그것이 저한테 도착하기는 만무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도시와 제가 지금 있는 곳과는 교류가 거의 없거든요. 하지만 이건 워 작은 불운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제 앞으로 발송되는 편지들은 다른 길로 오게 될 것입니다. 제가 잘 대비해 놓았습니다.
올해는 돌아다니는 것을 그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제 선교지에 들어가게 되기까지 유럽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지역들을 또 떠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작년 말에 조선으로 가려던 선교사는 중국인 사제(유방제 신부), 노르망디 바이외 교구의 모방 신부, 프로방스 디뉴 교구의 샤스탕 신부,그리고 저 이렇게 4명이었습니다.
난리를 떨며 저희를 따르겠다는 후발 선교사들이 몇 명 있기는 하지만, 저는 그들에게 이 길을 걷게 허락할 수 없습니다. 저희만으로도 족히 복잡한 상태거든요.
그들이 와서 이 복잡한 상황을 더 복잡하게 해야 할 이유가 있겠어요? 저희가 길을 트게 되면 그들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중국인 사제는 조선에 들어간 지 어언 반년은 됐나 봅니다. 모방 신부는 베이징에 있고, 샤스탕 신부는 남경에, 그리고 저는 서부 타타르 쪽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저희 중 한 사람은 파리 에있고, 다른 이는 로마에, 또 다른 이는 모스크바에 있는 점이랍니다.
저는 조선 입국 방안을 강구하는 데만 열중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저희와 조선 사이에는 접근이 쉽지 않은 지방이 놓여 있습니다. 교우들이 있기는 하지만 유럽인들에게 이상스레 겁을 먹거든요. 저희의 존재가 박해를 유발할까 봐 염려하는 것이지요. 그들 말로는 저희와 함께 있으면 참수당할 위험이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이렇게 두려워 하는것은 전혀 황당한 것이 아닙내다. 머물지 않고 이 지역을 통과만 하면 되는 것이라면 저희도 그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겠지요. 그들집에 숙박하러 가지도 않을 것이고요. 하지만 좋든 싫든 이 지방에 얼마간 머물러야 하니, 이것이 바로 난감한 일이랍니다.
조선 교우들이 늘 그랬듯이 지난 12월에 베이징에 왔다면 모든 것이 잘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경우에 없는 별난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올해는(베이징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중국인 선교사를 맞아들이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고들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오지 않은 유일한 이유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행군 계획을 달리 짜야 했답니다. 그래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라고(5월 12일) 중국인 학생(왕 요셉》을 보냈지요. 이 학생은 도적과 야수들이 득실대는(어쨌건 사람들이 보통 하는 이야기가 그렇답니다) 산과 사막을 지나 타타르의 상당 지역을 횡단 해야만 합니다.
가능하면 조선 국경까지 바짝 다가가서 그 지역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집 한 채를 빌리거나 구입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 여부를 타진해 보아야 한답니다.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길을 터 주실 때까지, 한 교우가 저희 비용으로 장사를 하면서 저희를 감춰 주고 저희는 그 집에서 그럭저럭 숨어 지낼 수 있을 그런 집을 찾고 있습니다.
그 여정이 4,500리(왕복 9,000리)나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길잡이들을 붙여 주고자 했건만, 제가 그를 보살피고자 애썼던 것은 무위였답니다. 아무도 그를 따르려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혈혈단신 떠났답니다. 오직 하느님의 섭리만이 그의 길잡이요 수호자였습니다. 그가 돌아오면 몇몇 중국인이 저를 수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가 돌아올까요? 그렇다면 언제나 돌아올까요?(9월 8일 귀환)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아시겠지요.
저는 이 젊은이의 열의와 용기에 탄복하고 있습니다.
이 젊은이는 저희와 조선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여장을 잘 갖추지도 못한 채 걸어서 다닌 지도 18개월이나 됩니다. 얼마 안 있으면 베이징에서 파리까지 간 거리보다 더 먼 거리를 걷게 되는 셈이지요. 비록 늘 병들고 폐병 위험에 시달리지만, 그는 피로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좀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저희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극복해야 할 새로운 장애물이 나타나니 말입니다. 말씀드렸던 것으로 알지만, 저희가 하고 있는 것은 즐거운 여행이 아니랍니다.
하지만 저희는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제게는 선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시작하신 일을 매듭지으시리라는 믿음이 있으니까요. 저희가 엄청난 위험들을 겪은 것은 맞지만,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저희를 그것들에서 구해주셨습니다.
그 성스러운 이름이여, 찬양받으소서!
한 유럽인 선교사(모방 신부}가 말 한마디도 모르고 길잡이도 없다시피 한 채로 때로는 걷고 때로는 나귀나 지붕 없는 마차를 타고서 아무도 눈치채지 않게 중국 전체를 횡단하여 황국의 도시에 입성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스스로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답니다.
중국 역사책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지요. 그는 어쩌면 황국의 허가서 한 장 없이 베이징에 들어간 첫 번째 유럽인일 겁니다.
하느님 섭리의 이 각별한 보살핌을 저는 전교 후원회 회원들 덕분으로 돌립니다. 저희는 전교후원회 회원들이 저희와 함께 싸워 주시는 한 승리를 확신할 것입니다. 저는 3년 전부터 주교와 선교사
들이 아무런 원조도 받지 못하고 있는 한 선교지(산시)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본의 아니게 다름 아닌 저랍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힘껏 저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해 주고 있답니다. 아량 있는 친우들을 만나는 것이 유럽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요.
저는 이제 중국어를 공부하는 데 조금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강희 황제의 손자인 황손이 저의 가정교사이자 이따금 시종 노릇도 하고 있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서열을 빼앗기고 귀족의 품계와 재산도 잃어가면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의 그리스도교 서원이 한결같자 황제는 그를 고향에서 1만 리나 떨어져 있는 타타르 깊숙한 곳으로 내쫓아 버린 것이지요.
귀양지에서 이 사람은 자신처럼 신앙을 고백하다가 같은 형에 처해진 중국인 사제 한 명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18년을 함께 지냈지요. 형을 마치자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자유가 생겼지만, 그 사제는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습니다. 한편 황손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산서 주교에게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성사를 자주 보는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전교 회장들 중 하나로 받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로서는 한 사제를 보필하는 것이 기쁜 일인 모양입니다.
강희 황제의 손자인 황손이 알다시피 귀족 품계도 없는 저같이 미천한 선교사의 식사 시중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저는 부르르 떨린답니다. 하지만 저는 선행의 공덕을 그에게서 박탈하지 않으려고 그를 그냥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제 앞에서 앉아 있는 법이 없답니다. 제국의 패권보다 십자가의 치욕을 선호했기에 한 세계의 제1 왕좌를 열망할 자격이 있었던 이 남자가 직접 자기 손으로 한 가난한 사제의 시중을 드는 일을 영광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신앙을 통해 자기가 모시는 성직자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분께 순종하는 지극히 효성스런 아들
조선 대목구장 갑사 주교
바르톨로메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