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순발력
정동식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22년 4월 4일 월요일, 음력 3월 4일이었다.
꽃바람이 살랑살랑 불며,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이 좋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지난 금요일(4.01) 오전 , 어머니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는 통보를 원장님으로부터 받았지만 자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면회가 금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대로 외롭게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만나서 손이라도
잡고 얼굴을 비비면서 목놓아 울고 싶었다.
1년 5개월 동안 가족과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코로나정국이 원망스러웠다.
2번의 집단감염사태는 면회금지와 비접촉 면회의 일시적 허용을 반복하며, 다른 시설보다 더 엄격한 통제를 요구하고
있었다. 두 번의 상봉 기회를 놓친 나의 잘못도 이젠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가만히 있기보다는 적극적 행동이 필요했다.
나중에 조금이라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바로 특별면회를 신청했다.
혹시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드리라고 당부했다.
‘저희들을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길러주셔서 고맙고, 엄마와 함께 살아서 행복했습니다.
우리 7 남매 화목하게 살테니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세요. 엄마 사랑합니다.’
장남인 내가 만일 어머님 임종을 지킨다면 꼭 해 드리고 싶던 말이었다.
아무리 코로나발생이 폭증하더라도 한 번쯤은 가족과의 만남을 허용하리라 생각했다.
면회신청 후 하루 만에 드디어 토요일 오후 3시에 어머니를 뵐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약속시간이 너무 빨리 결정되는
바람에 멀리 있는 사람은 참석을 못하고, 부산에 사는 여동생 2 명과 매제인 장서방이 가기로 했다. 여전히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인지라 방진복을 입고 들어갔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의식이 없어 그 모습을 보진 못했겠지만
생전에 두 딸과 사위가 어머님을 뵙고 왔으니 그나마 감사할 일이었다.
입관식을 할 때 1년여 만에 어머니를 보았다.
B상조회사 장례지도사님은 여성분이었는데 조화(弔花)로 받은 국화 꽃잎을 일일이 한 잎 한 잎 따서 어머니를 곱게
단장해 놓으셨다. 마치 천상으로 날아갈 관세음보살처럼 보였다.
지도사님의 섬세하고 훌륭한 솜씨가 비통한 자식들의 마음을 밝고 평온하게 해 주셨다.
나는 어머니의 차가운 이마를 만졌다. 이미 온기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슬퍼할 겨를도 잠깐, 장례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될지 걱정이 앞섰다.
왜냐하면 코로나 사망자가 한꺼번에 많이 나와 상주가 원하는 날짜에 장례를 치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화장장 사정이 허락해야만 했다.
수도권의 어떤 분은 7일장을 하신 고인도 있다는 뉴스를 보았지만, 선친께서 친히 엄마를 마중하러 나오셨는지 무사히
3일장을 마치고 영천 국립호국원에 합장했다.
이젠 살아계신 어머니를 만나지 못한다. 이 세상 어느 곳보다 편한 어머니의 포근한 가슴에 안길 수도 없다.
엄마의 웃음소리와 장구장단에 맞춘 창부타령도 그리움의 샘을 쉬지 않고 파야만 들을 수 있을 터이다.
장례를 마친 후 나는 카톡 프사를 엄마의 사진으로 바꾸고 추모기간을 가지기로 했다.
우리집에서 모실 때 아내가 서문시장에서 맞추어 드린 옥색 한복의 엄마 모습이다.
파란색을 남달리 좋아했고, 당신이 가장 즐겨 입으시던 옷이었다.
지금도 가끔 혼자 명상에 잠길 때면 어머니와의 옛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어머님은 2014년 크리스마스이브날 대구로 오셨다.
그날은 어머님 생신일이자 아버님의 기제일이기도 해서 우리 가족에겐 특별한 날이다.
자식들은 선친께서 어머님 생신과 제삿날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배려하신 거라고 믿고 있다.
첫날밤은 모두 선잠을 잤다. 치매 때문인지, 낯선 환경에 적응이 안 되어서 그런지 방과 화장실을 제대로 찾지 못하셔서
A4용지에 ‘이달수’ ‘화장실’이라고 매직으로 크게 적어서 붙여 드렸다.
성탄절에는 영화를 보러 갔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300만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어머님과 보면 더 의미
있을 것 같아 인터넷으로 예약을 했다.
주말의 교통상황을 미처 잘 알지 못해 1시간 늦게 극장에 도착하고 말았다.
관계자에게 읍소한 끝에 겨우 2 좌석을 확보하고 나는 자리가 없어 통로에서 보게 되었다.
영화에서 할머니가 유품을 태우면서 “할아버지 먼저 가서 나중에 나 데리러 와요. 14살에 시집와서 12명을 낳았는데
여섯 잃고 여섯 남았소. 죽은 여섯 자식은 내의도 못 사 입혔는데 저승 가서 애들 만나면 에미가 사주더라고 입혀 주소...”
할머니의 이 대사에 극장 전체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어머님도 가끔 “부모님 생각하면 가슴이 메인다. 따뜻한 양말 한
켤레 못 사 드리고...” 하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음에도 정작 어머니는 본 영화의 줄거리를 이해하지 못하셨다.
엄마가 즐겨 부르시는 노래 중에 ‘방귀 송’이 있다. 스토리가 있어 언제 들어도 웃음이 난다.
처녀시절에 이순이라는 언니가 옆집에 살았는데 결혼식 후 언니 집에 놀러 갔더니 험상궂은 형부가 이 방귀송을
부르더란다. “방구방구 낍시다. 방구방구 낍시다. 방구 잘 끼는 사람, 신체 건강하고, 방구 못 뀌는 사람 신체 약하다.
언니 신랑은 시커멓게 생긴 만주 사람인데 부를 노래가 그렇게 없나? 그것도 노래라고 부르더라. 내 같으면 그 사람에게
시집 안 가겠더구먼....하도 노래 같잖은 노래를 불러서 참고 또 참다가 삽짝 문을 나와서 혼자 실컷 웃었다.”며 눈을 지그시
감고 그날의 일들을 회상하셨다.
어린 시절에도 7남매 중 누군가의 방귀소리만 들리면, 혼을 내려고 하는 엄마는 물론 우리 자식들은 결국 자지러지게
웃음보를 터트리곤 했다. 엄마는 치매가 많이 진행되었을 때도 이 노래만큼은 잘 부르고 웃음을 잃지 않았다.
어머니는 신문 읽기도 좋아하신다.
“90 된 할머니가 어째 이래 신문도 잘 읽소?”하면 “내가 어릴 때 서당에서 공부를 1등 했다”라고 하신다. 큰 글씨만
읽는데 한 부를 다 보시면 15분 정도 걸린다. 처음엔 내용을 다 아시는 줄 알고 오래된 신문은 안 드렸는데, 일요일의 경우
어제, 그제 신문을 드려도 그냥 읽으신다.
장구 치며 노래 부르기는 물론 신문도 볼 줄 아시니 어르신의 소일거리로 큰 도움이 되었다.
어머니는 치매가 있어도 순발력이 대단하셔서 대화중에 가끔 감동을 주기도 했다.
일전에 밤이 깊은 시간에 귀가했는데도 거실에 나와 계시길래 “어머니! 아직 안 주무시네~ 배가 출출해서 그런가요?”
하면서 들어갔더니 “네가 아직 안 왔는데 잘 수 있나” 하신다.
아내가 외출 후 간식을 챙겨 드리면서 “어머니 심심했지요?” 하고 여쭈면 “그래, 심심했다. 이제 나는 니 없으면 못 산다.”
하셨다. 어머니의 이 말씀에 아내는 지치기 일보직전에 또 충전이 되더란다.
대처능력이 원래 좋으신 건지, 생존본능이신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느 날 아내와 엄마가 사랑에 대해 담소를 하고 있었다. “엄마는 아버님께 사랑을 받았나요?”
엄마의 즉답이 없자 아내가 다시 질문했다. “엄마는 곰인가요 야시인가요?”
침묵을 깨고 어머니가 말한다. ”음~~ 나는 곰이었지. 니는 곰도 아니고 야시도 아니고~~, 둘째(며느리)는 야시지.
그러고 보니 한 집에 여러 종류가 사네 그자? “
엄마는 원래 무뚝뚝하고 잔정이 없는 분인데 특유의 입담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 주셨다.
어머니는 아무 때나 잘 웃으셔서 실없이 왜 웃냐고 핀잔을 주면 “그럼 지 짜까?” 하신다.
엄마 말씀대로 지 짜면서 살아갈 필요는 없다.
웃으면 복도 따라오고 집안 분위기가 훨씬 밝아지니까.
우리 부부는 치매 걸리신 어머니를 3년 모셨다. 엄마의 동생인 이모께서는 더 대단하시다.
요양병원에 보낼 정도의 남편을 시설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만 10년 이상 수발하셨다.
평범한 어르신도 모시기 힘들지만 질환이 있거나 치매어르신을 모시는 일은 상당한 내공이 필요하다.
어르신의 모든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모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경험에 의하면 잘한 일은 묻혀버리고 오히려 서로 안 좋은 기억과 상처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치매가 찾아온 부모님을 모시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반드시 치매와 어르신 요양 전반에 관하여 배우고 익힐 것을 권장하고 싶다. 특히 남자들은 꼭 학습하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공부를 하지 않고도 어떤 일이든 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시는 방법을 알면 조금이나마 시행착오를 덜 하면서 어르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유감스럽지만 나도 어머님을 보내고 나서야 공부를 했으니 너무 아쉽고 송구할 따름이다.
22.11.04
첫댓글 귀천(歸天)하신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묻어나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