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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世獻 有碑 宋協姜元禧李後傑朴廷薛安光郁
顯廟 安宗悌 李景沆許欽洪世亨吳道宗
肅廟
呂翼齊 趙門衡 趙麟祥 徐文淑 柳後光 重修文廟 宋耆昌 成至行 高可寅 著廉謹 金季珍 洪禹錫 曺夏盛 善政
金定五 宋宗錫
조경(趙絅, 1586~1669) 본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주봉(柱峯). 시호문간(文簡).
윤근수(尹根壽)의 문인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대과를 단념, 거창에 은거
1623년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고창현감·경상도사에 계속하여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
1624년 형조좌랑·목천현감 등을 지냄.
1626년 지평
1627년 정언, 수찬,
*승정원일기 인조 5년 12월 15일 무신 6/10 기사 1627년 修撰趙絅, 居昌地病親呈辭, 受由, 出去。
모친 봉양을 위해 거창을 자주 방문하게됨. 1627~1632년 사이에 지례관련 시문이 있는 사유
1628년 교리
1629년
승정원일기 인조 7년 7월 11일 갑오 23/23 기사 1629년 趙絅以慶尙道京試官, 將爲出去,
1631년 지례현감
1633.10.10 홍문관부응교,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사간으로 척화를 주장
1637년 청나라가 명나라 가도를 공격하기 위해 군량을 요구하고 안변에 들어오자 척화를 주장함 <玉堂時斥和箚>
1643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기행문을 저술하였다.
1650년 청나라가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에 대한 처벌 요구로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안치
1653년 회양부사를 지내고 포천에 은퇴
1661년 판중추부사로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를 변호하다가 대간의 논박을 받고 파직되었다.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흥해의 곡강서원(曲江書院), 춘천의 문암서원(文巖書院)에 각각 제향
■ 가계
>3 조수곤(趙壽崑) 절충장군(折衝將軍)
>2 조현(趙玹,1543~) [생1567] 공조좌랑 출후 조학수(趙鶴壽)[進]
>1 조익남(趙翼男). 봉사. 配유개(柳愷)의女
>0 조경(趙絅, 1586~1669) [진1612] [문1626]
>-1 조위봉(趙威鳳,1621~1675) [생1642] [文1660]
■관력
좌랑 문형 호당.
■기록
○인조 2년 갑자(1624) 7월 8일(경신)
조경(趙絅)을 목천 현감(木川縣監)으로 삼았다. 조경은 사람됨이 의지가 굳세고 지키는 것이 굳으며 지행(志行)이 간결(簡潔)했는데,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자목(字牧)의 직임에 초배(超拜)되었다.
○승정원일기 33책 (탈초본 2책) 인조 9년 9월 4일 을해 2/6 기사 1631년
趙絅特旨爲知禮縣監
○인조실록 25권, 인조 9년 9월 5일 병자 3번째기사 1631년
간원이 아뢰기를,"어제 갑자기 조경(趙絅)을 지례 현감(知禮縣監)에 제수하는 명이 있었습니다. 조경은 오랫동안 경연(經筵)에서 모시면서 몸을 돌보지 않고 충성을 다하는 절의가 자못 드러났는데, 하루아침에 까닭없이 외직에 보임하니, 여론이 모두 해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내직과 외직을 번갈아 임명하는 것은 본래 안 될 것이 없다.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지례 현감을 오게되는 경위
사직소〔辭職疏〕 겸하여 영사시를 올리다.
삼가 아룁니다. 하찮은 소신이 성상의 은총을 흠뻑 입은 사람으로서 지금처럼 어렵고 위급한 시기에 영남으로 물러나 있은 지가 지금 벌써 한 해가 지났습니다. 얼마 못가 죽을 목숨으로 항상 형벌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황공하고 불안한 마음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도량이 하늘과 같아 죄로 여기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대간의 직책으로 부르실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은 명을 받들고 감격하여 저도 모르게 기운이 부족한데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다만 하찮은 소신의 병은 이미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난 가을에 사은숙배하고 낙향한 뒤로 의사에게 치료받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조금도 효험을 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봄이 된 뒤로 저희 집안에 역병이 돌아서 골육이 두루 앓았고 신 또한 거의 한 달이 다 되도록 위독한 상태를 면치 못해 원기가 손상되어 지금까지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반신의 마비는 전년에 비해 조금이나마 나아진 듯하니 부축을 받고 길을 떠나는 것을 어찌 감히 꺼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신이 차마 결행하지 못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신의 어미의 숙병이 고질이 된 지 이제 십 년이 됩니다. 호란 초기에 신은 관악산(冠岳山)으로 들어가고 어미는 영동(嶺東)으로 들어갔다가 험지를 걸어서 돌고 돌아 어렵사리 거창(居昌)으로 와서야 골짜기에서 죽는 것을 면할 수 있게 되었으니 실로 천행입니다. 그러나 병이 점점 더 심해져 평소보다 배나 위독해져서 올 여름에는 온 몸이 붓고 먹고 마시는 것도 날로 적어지고 잠도 전혀 주무시지 못합니다. 자식의 심정으로 어찌 그 옆을 멀리 떠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차라리 명을 어긴 벌을 받을지언정 옷소매를 끊고 떠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신의 다급한 사정을 살펴 재주와 덕이 부족한 자에게 관직을 내리는 명을 도로 거두어 신의 마음을 어지럽지 않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그리고 신이 비록 병으로 먼 시골에 있지만 임금을 그리는 마음이야 어찌 잠시라도 잊은 적이 있겠습니까. 간을 가르고 피를 흘리며 발꿈치를 베이고도 보옥을 세 번 바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고질병을 앓으며 실낱같은 목숨을 잇고 있어 글을 지을 수 없는지라, 생각을 머금고 말을 이어 붓을 잡았다 다시 그만두었습니다.
감히 병석에서 지은 영사시(詠史詩) 한 편을 올리니 말이 비루하고 뜻이 부족하여 비록 백거이(白居易)의 풍유시(諷諭詩)에는 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국사를 다스리는 여가에 살펴보신다면 진작시키는데 작은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은 지극히 간절하고 두려운 심정을 이기지 못하고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사직소〔辭職疏〕
삼가 아룁니다. 신이 성은을 입어 병든 어미를 보살피러 가서 약을 써보고 고통스런 병세를 조금이나마 없앨 수 있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인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신의 모친의 병은 우연히 하루아침에 생긴 병이 아니고 점점 쌓여서 고질이 된 것이라 그 증세가 한 가지가 아니니 수개월 안에 치료하여 나아지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이 맡고 있는 직무는 결단코 하루라도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신의 간절한 마음을 굽어살펴 속히 신의 직책을 체차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신은 또 사실 승문원의 포폄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고향에 내려온 후 포폄 기록을 보았더니 신의 이름이 하등이나 중등의 반열에 끼어 있지 않았습니다. 어찌 하찮은 일개 미천한 신하 때문에 국법을 흔들 수 있습니까. 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어찌 감히 구차히 모면한 것을 스스로 다행이라 여기고 밝으신 성상의 아래에서 묵묵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마흔이 넘어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법규상 신에게 이습관(肄習官)의 책임을 지우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신의 본래 뜻은, 잘못된 선발에 순응하여 법을 어기면서 염치를 무릅쓰고 직책에 나아가 이문(吏文)을 강습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신은 포폄이 있기 겨우 수일 전에 갑자기 어미의 병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울에 있는 동안에 오직 의원을 찾고 약을 올리고자 하였을 뿐 직분을 태만한 죄에 빠질 줄은 스스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미처 정고(呈告)하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승문원의 포폄에 관한 당시 의론을 듣게 되었는데, 이미 신을 병든 모친 때문에 정고한 사람으로 여기고 포폄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이 실제로 한 일이 아닌 것으로 신을 용서하고, 신의 본의가 아닌 것으로 신을 헤아린 것입니다. 신의 처지를 보아준 것이 거듭 죄를 짓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간의 복잡한 사정을 비록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제 생각에 필시 본관의 하리가 신이 사직하는 단자를 써서 들인 것을 보고서 마침내 승문원에 이것으로 핑계를 댄 결과 이러한 착오가 생긴 듯합니다. 신은 이 점으로 인해 더욱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신이 서울에 있을 때 그 사정을 대충 들었지만 사사로운 근심이 절박한 연유로 포폄의 계하(啓下)를 기다리지 못하고 조정을 떠났습니다. 아직도 직명을 지니고 있고 아직도 죄과가 감추어져 있으니, 사람들이 말하지 않더라도 신의 마음에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신이 일처리에 착오를 저질러 사람들이 잘못된 이야기를 듣게 하여 국가의 출척(黜陟)의 법도가 무너진 것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속히 담당 관사에 명하시어 신이 포폄에 참여하지 못한 죄과를 바로 잡아 거짓을 용납하지 않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사간을 사직하는 소〔辭司諫疏〕
삼가 아룁니다. 신이 지난달에 병든 어미로 인해 정고(呈告)하고 은혜로이 휴가를 받았는데 고향에 내려간 지 열흘도 되지 않아 집의로 옮겨 제수한다는 명이 또 내려졌으니, 너무나 감격스럽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끝내 병든 어미를 버려두고 차마 떠날 수 없어 외람되이 개인적인 사정을 본주(本州)에 올려 대신 조정에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번에 본직에 제수되어 소명(召命)이 집의에서 체직된 지 겨우 십일 만에 또 내려왔습니다. 옛사람들은 일 년에 아홉 번 승진하는 것을 영예로 여겼는데, 어찌 한 달 사이에 세 번 관직을 옮긴 신만 하겠습니까. 자신을 돌아보니 더욱더 식은땀이 납니다.
그러나 신의 어미의 병환은 하루아침에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기혈(氣血)이 모두 허하고 심화(心火)가 담질(痰疾)과 겹쳐서 마침내 부종이 생겼습니다. 으레 여름에 악화되는데, 이번 여름은 지난해보다 더 심하니, 위태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신이 어찌 감히 성상께 다 아뢸 수 있겠습니까. 저하께서 재차 심양(瀋陽)으로 가시는데도 신은 지송(祗送)하는 신민의 대열을 따르지 못하였고, 세상에 보기 드문 은택이 거듭 내려졌는데도 신은 또 달려가 직임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신의 죄는 비할 데가 없으니 자애로운 성상께서 비록 용서하고 싶어도 끝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병든 모친을 뵙기를 청하는 소〔請覲病親疏〕
삼가 아룁니다. 신에게 일흔 살에 가까운 어미가 있는데 11년간 부창증(浮脹症)을 앓아 온몸 사지에 붓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 증세는 으레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절기를 타고 심해지는데, 심해지면 몸을 뒤척이지도 못하고 호흡이 가빠져서 밤에 눈도 붙이지 못하고, 음식도 전혀 먹지 못하여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 자주 이릅니다. 신이 그간 누차 조정의 명을 어겼던 것은 차마 어미의 곁을 잠시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뜻하지도 않게 이번에 하늘과 같은 성은을 내리시어 명을 태만히 여긴 신의 죄를 처벌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신에게 본직(本職)을 제수하여 총애하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이에 신의 충정이 감격하여 눈물이 뒤이었을 뿐만 아니라, 어미 또한 신에게 사은(謝恩)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습니다. 이 때문에 미천한 신의 병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 병든 몸을 부축 받으며 도성에 들어와 숙직하는 것을 또한 감히 사양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신의 집 노비가 와서 어미의 신변에 대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신의 집안사람들이 잠잠해진 전염병에 또 걸려 여러 노복이 모두 앓아누웠는데, 겨우 몸을 피한 신의 어미는 누추한 집에서 두려움 속에 지내느라 음식 조절이 잘못된 것이 많아 토사곽란 증세에 부창증마저 더치는 바람에 온몸에 경련이 일어 고통을 참기 어렵다고 합니다. 신은 답답하고 애타는 심정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새로 은혜로운 광영을 입어 대궐에 출입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미의 병은 신이 떠난 보름 사이에 위독해졌습니다. 신으로서는 나아가도 물러나도 모두 죄를 짓게 되고 은혜와 의리가 모두 어긋나게 되었으니, 부끄러워 얼굴에 땀을 흘리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고 곧장 땅을 뚫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신은 일찍 아비를 여의고 동생 하나만 있었는데, 동생마저 지난해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노모를 보살필 사람이라곤 신 한 사람뿐인데 지금 어미의 병이 이와 같으니, 신의 사정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서둘러 달려가 치료하는 것을 차마 한 시각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천지 부모와 같으신 밝은 성상께서는 신의 지극한 심정을 살펴 속히 신의 직임을 체차하시어 신이 때에 맞게 달려가 어미의 병을 구완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그렇게 된다면 어리석은 신은 거의 불효의 죄에서 벗어나게 되고, 조정에는 관직이 비는 폐단이 없게 되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매우 다행스럽게 될 것입니다. 신이 마음이 어지러워 다른 것은 알지 못하기에 감히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 1628년추정 조경(趙絅,1586~1669) 거창 낙향~지례현감
고전번역서 > 용주유고 > 용주유고 제3권 > 칠언율시 >
회포를 읊다〔詠懷〕
我年四十之添二(아년사십지첨이)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인데 /
狂走人間一不成(광주인간일불성) 미친 듯 세상 달렸으나 하나도 이루지 못했네 /
始謂雕蟲亦一道(시위조충역일도) 처음엔 조충도 하나의 길이라 여겼더니 /
終知射策太虛名(종지사책태허명) 결국엔 사책이 너무도 허명임을 알았네 /
致君無術唐虞遠(치군무술당우원) 먼 옛날 요순 같은 임금 만들 재주 없는데 /
貰罪多慙日月明(세죄다참일월명) 죄를 용서받으니 밝으신 성상께 부끄럽네 /
歸去南州驚歲晩(귀거남주경세만) 남쪽 고을 돌아와 저무는 한해에 놀라노니 /
干戈衰病任殘生(간과쇠병임잔생) 전란과 쇠병 속에 남은 생을 맡기노라 /
*조충(雕蟲) : 조충전각(雕蟲篆刻)으로, 벌레 모양이나 전서(篆書)를 조각하듯이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는 작은 재주를 말한다. *사책(射策) : 한(漢)나라 때 과거(科擧)의 한 과목인데, 여기서는 급제(及第)를 뜻한다.
고전번역서 > 용주유고 > 용주유고 제3권 > 칠언율시 > / 경상도 읍지(1832) >지례현 >제영
구성의 석축〔龜城石築〕
조경(趙絅,1586~1669)
殘堞山頭尙不平(잔첩산두상불평) 산꼭대기 낡은 성가퀴 아직 평평하지 않은데 / 산정에 무너진 성첩 여전히 불평하지만
昔人於此費經營(석인어차비경영) 옛 사람들은 힘들여 이 곳에 성을 쌓았네 / 옛 사람들 이곳을 힘들여 경영하면서
懸瓠謾學將軍智(현호만학장군지) 현호성의 장군의 지략을 부질없이 배우고 / 현호성의 장군지략 부질없이 가르치고
嬰帶都輸墨子名(영대도수묵자명) 띠로 막아낸 묵자의 명성은 얻지 못했네 / 띠를 둘렀던 묵자 명성 실어 보내네.
綿竹號風疑戰地(면죽호풍의전지) 솜대에 바람 부니 전쟁터인가 의심스럽고 / 솜대의 바람소리 전쟁터인 듯 하여
荒祠擊鼓走村氓(황사격고주촌맹) 황량한 사당의 북 소리에 촌백성 달려오네 / 황폐한 사당 북 울리니 촌백성 달려오네
蟻封蝸角何須問(의봉와각하수문) 개미 둑과 달팽이 뿔을 물을 필요 있으랴 / 한치의 땅이라도 물을 필요 있으리오
付與靈龜號古城(부여령구호고성) 신령스런 거북 이름 붙여 옛 성을 부르네 / 신령한 거북으로 옛성을 부르네.
*조경(趙絅,1586~1669) [진1612][문1626] 한양인. 字일장(日章), 號주봉(柱峰)ㆍ용주(龍洲). 諡號문간(文簡). 아버지는 조익남(趙翼男) 조부 조현(趙玹, 1543~1606)이다. 윤근수(尹根壽, 1537~1616)의 문인으로 1627부터 모친 봉양을 위해 거창을 방문하는 기록 있음. 1631.9.4~1633(인조11년).10.10. 지례현감을 역임했다. 승정원일기1627년 修撰趙絅, 居昌地病親呈辭, 受由, 出去
*현호(懸瓠): 당 헌종(唐憲宗) 때 이소(李愬)가 눈 오는 밤에 현호성을 공격하여 오원제(吳元濟)에게 승리를 취했던 것을 말한 것이다. *영대(嬰帶) : 초(楚)나라 공수반(公輸般)이 운제(雲梯)를 만들어 송(宋)나라를 치려하자, 묵자(墨子)가 상 위에다 허리띠를 풀어 성으로 삼고, 막대기로 방어 무기로 삼아 공수반에게 공격해 보라고 하였는데, 공수반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홉 번이나 성을 공격했지만 번번이 묵자가 막아 버렸다.”는 내용이 《묵자(墨子)》 〈공수편(公輸篇)〉에 실려 있다. *의봉와각(蟻封蝸角) : 작을 땅을 다투는 것이 모두 하찮은 일이라는 말이다. 달팽이 뿔은 《장자》 〈칙양(則陽)〉에 “달팽이의 왼쪽 뿔 위에 있는 나라를 만(蠻)이라 하고, 오른쪽에 뿔 위에 있는 나라를 촉(觸)이라 하는데, 영토를 다투느라 싸워 시체가 즐비하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1631년 지례현감 조경(趙絅,1586~1669) 고전번역서 > 용주유고 > 용주유고 제3권 > 칠언율시 >
납일〔臘日〕
閉閤彌旬臘始開(폐합미순납시개) 방문 닫고 지낸 지 열흘에 납일이 되니 / 쪽문 닫고 열흘 지나 납일이 되니
縣前山色欲春回(현전산색욕춘회) 고을 앞의 산 경치 봄이 돌아오려 하네 / 현청 앞 산빛은 봄이 돌아 오려하는 듯
陰崖戛戛排氷瀑(음애알알배빙폭) 그늘진 벼랑에선 찌직찌직 언 폭포 풀리고 / 음달 벼랑 찌걱찌걱 빙폭을 밀어내고
東閣暉暉弄日梅(동각휘휘롱일매) 동쪽 누각에선 밝은 햇살이 매화를 희롱하네 / 동각엔 번득번득 햇살이 매화를 비추네.
誰放陽和宣聖德(수방양화선성덕) 누가 따듯한 기운 내어서 성덕을 선양할까 /
我非循吏媿凡才(아비순리괴범재) 나는 순리 아닌지라 용렬한 재주 부끄럽네 /
支頤坐算流年去(지이좌산류년거) 턱 고이고 앉아 세월 가는 것 헤아리는데 / 턱 괴고 누워서 가는 세월 헤아리며
自笑丹心老未灰(자소단심노미회) 늙어도 충심이 식지 않음이 절로 우습구나 / 늙어도 단심이 재되지 않아 실소하네
늦봄에 눈병이 조금 나아서 읊다〔暮春眼病少已有吟〕
病眼初開花已飄(병안초개화이표) 병들었던 눈 막 뜨니 꽃잎 이미 흩날려 /
欲尋春事却無聊(욕심춘사각무료) 봄 경치를 감상하려다 되레 무료해지네 /
啼鶯藏柳煙絲密(제앵장류연사밀) 꾀꼬리 숨은 버들은 가지가 빽빽하고 /
戲蝶經林粉態銷(희접경림분태소) 숲을 지나는 나비는 고운 모습 사라지네 /
天運四時分景物(천운사시분경물) 하늘은 사시를 운행하여 경물이 분명한데 /
人將百歲自昏朝(인장백세자혼조) 사람 사는 한평생은 조석처럼 짧다네 /
黌堂晝靜前山好(횡당주정전산호) 낮 학당 고요하고 앞산은 아름다우니 / 횡당의 한낮은 고요하고 앞산이 아름다워
拄笏看山嘯復謠(주홀간산소복요) 홀로 턱 괴고 산 보며 휘파람불다 읊조리네 / 홀을 괴고 산을 보며 노래가락 읊조리네
>경상도읍지(1832) > 지례현 >제영
앉아서 노래하다[坐嘯]
坐嘯公堂滯(己)二年(좌소공당체이년) 공당에 앉아 휘파람 불며 두 해를 머무노니 / 공당에서 읊조리며 2년을 머무니
主恩重覺闊於天(주은중각활어천) 임금의 은혜 하늘보다 넓음을 거듭 깨달았네 / 거듭 깨닫는 주상 은혜 하늘보다 넓구나
山圍四面春收蕨(산위사면춘수궐) 봄이면 사면을 둘러싼 산에서 고사리 꺾고 / 사면이 산이기에 봄에는 고사리 꺾고
溪合三源日擊鮮(계합삼원일격선) 날마다 세 물길 모인 시내에서 물고기 잡네 / 세 물줄기 합쳐있어 날마다 물고기 잡네
門徑不曾緣(賓)客掃(문경부증연객소) 찾는 이 없어 문 앞 오솔길 쓴 적이 없고 / 문 앞 길에서 일찍이 빈객을 일소하고
菖蒲時作敎儒(生)鞭(창포시작교유편) 창포는 때로 유생 가르치는 회초리가 되네 / 창포부터 유생 가르치는데 채찍질하면서
身兼吏隱幽居僻(신겸리은유거벽) 몸은 이은을 겸하여 궁벽하게 지내는데 / 몸은 이은 겸해 유거에 피해있으니
白晝庭柯哭杜鵑(백주정가곡두견) 대낮에 정원 나무에선 두견새가 우는구나 / 한 낮 정원 나뭇가지에 두견새 울고있네.
*좌소(坐嘯) : 지방관이 정사를 속관(屬官)에게 맡기고서 깨끗하고 한가하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에 성진(成瑨)이 남양 태수(南陽太守)가 되어서는 잠질(岑晊)을 공조(功曹)로 삼아 그에게 공사를 다 맡겼다. 그곳 민간에서 노래하기를, “남양 태수는 바로 잠공효이고, 홍농의 성진은 앉아 읊조리기만 하누나.〔南陽太守岑公孝, 弘農成瑨但坐嘯.〕”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97 黨錮列傳》 *이은(吏隱) : 녹봉에 연연하지 않고 낮은 직급의 관리로 있으면서 이름을 감추고 사는 사람을 말한다.
3월 30일〔三月三十日〕
今日暮春三十日(금일모춘삼십일) 오늘이 삼 월 삼십 일이니 / 오늘은 봄이 저무는 삼월 마지막날이라
流光轉覺客中催(류광전각객중최) 객지라 세월 빨리감을 더욱 깨달았네 / 흐르는 세월 되돌아 보며 나그네 길 재촉하는데
成功靑帝麾幢去(성공청제휘당거) 공을 이룬 청제는 휘장 날리며 떠나고 / 공을 이룬 봄날은 깃발 펄럭이며 지나가고
代序朱炎得意來(대서주염득의래) 절서를 교대한 더위는 득의양양 오는구나 / 대신 한 붉은 화염 득의양양 오는구나.
風掃花痕冶葉底(풍소화흔야엽저) 예쁜 잎새 아래 꽃 흔적 바람이 쓸어버리고 / 바람은 잎새 아래 꽃 흔적 쓸어가고
雨肥梅子晩山隈(우비매자만산외) 저무는 산 모퉁이에 비 내려 매실을 살찌우네 / 비는 저무는 산 굽이에 매실을 살찌우네.
回瞻古柏蒼髥老(회첨고백창염노) 푸른 수염 드리운 늙은 잣나무 돌아보니 / 늙은 잣나무 다시보니 흰수염 무성하고
身外繁華閱幾廻(신외번화열기회) 몸 밖 번화한 세상을 몇 번이나 보았던가 /몸 밖 번화가 몇 번 돌며 살펴보네.
*한양의 내직에 다시 복귀한 시기의 글로 추정
*청제(靑帝) : 봄을 말한다. 오행(五行)의 학설에 따르면, 동방(東方)은 목(木)에 속하는데, 목은 또 봄과 청색과 인(仁)을 상징하므로, 봄을 주재하는 귀신을 동황(東皇) 혹은 청제(靑帝)로 부른다. * 푸른 …… 잣나무 :
소식(蘇軾)의 〈불일산영장로방장(佛日山榮長老方丈)〉에 “산중에는 단지 푸른 수염 늙은이 있어 쓸쓸한 몇 리 길에서 사람을 맞이하고 보낸다.〔山中只有蒼髥叟, 數里蕭蕭管送迎.〕”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 고전번역서 > 용주유고 > 용주유고 제1권 > 오언율시 >
황량한 남쪽 지방〔南荒〕
束峽氷難解(속협빙난해) 좁은 골짜기엔 얼음 녹지 않고 / 좁은 골짜기 얼음도 녹지 않고
矮簷日少暄(왜첨일소훤) 낮은 처마엔 해가 적게 든다네 / 낮은 처마아래에 햇빛도 적게들어
迎春梅未萼(영춘매미악) 봄을 맞은 매화는 꽃도 피지 않았는데 / 봄을 맞은 매화는 피지를 않았는데
得氣鳥先喧(득기조선훤) 봄기운 느낀 새는 먼저 소란스레 우네 / 봄기운에 꾀꼬리 앞서서 울어대네.
病逐衰年入(병축쇠년입) 늙은 나이 따라 병이 찾아드는데 / 늙은 나이 따라서 병이 찾아드는데
經因靜處繙(경인정처번) 고요한 곳에서 경전을 읽는다네 / 고요한 곳 의지하여 경전을 번역하네.
南荒吾不恨(남황오불한) 황량한 남쪽 지방 한스럽지 않다네 / 황량한 남쪽지방 원망하지 않은 채
連案對兒孫(련안대아손) 밥상 붙이고 손자 아이를 마주하니 / 책상을 붙이고서 어린 손자 마주하네
*남황오불한(南荒吾不恨) : 소동파의 시에 九死南荒吾不恨, 玆遊奇絶冠平生. ‘만황의 땅에서 아홉 번을 죽는대도 나는 원망하지 않으리. 세상 소풍이 내 평생을 장식했으니…’라며 소풍 같은 인생 여정이 이제껏 당한 유배의 아픔을 이긴다고 털어놓는다.
임신년(1632, 인조10) 섣달 그믐밤을 새며〔壬申守歲〕
忽驚南食久(홀경남식구) 홀연 남방의 음식에 놀란 지 오래니 / 남쪽 음식 오래되어 홀연히 놀래다가
守歲再觀燈(수세재관등) 재차 섣달 그믐밤을 새며 등불을 보네 / 다시금 등불보며 가는 해 지새우며
恩譴鳴琴宰(은견명금재) 견책 받고서 거문고 타는 수령 되어 / 은혜로운 견책에 거문고 울리는 수령되어
閑居入定僧(한거입정승) 선정에 든 승려처럼 한가로이 지내네 / 한가로이 지내며 승려처럼 입정하네.
浮沈元不別(부침원부별) 인생살이 부침은 본래 다르지 않는 법 / 부침은 원래부터 구별할 수 없기에
衰病任相仍(쇠병임상잉) 노쇠함과 질병이 서로 따르도록 둔다오 / ㅇ나이들고 병드는게 쌓이도록 버려두네.
伯玉吾何敢(백옥오하감) 거백옥을 내가 어찌 감히 기대하랴 / ㅇ백옥을 내가 어찌 감당하리
爲非亦未曾(위비역미증) 무엇이 그른지도 아직 알지 못하는데 / ㅇ하고 안하고 역시 지금까지 못하는 걸.
*남방의 음식에 놀란 : 남쪽 고을로 부임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저자는 1631년 10월에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부임하였다. 한유(韓愈)의 〈초남식이원십팔협률(初南食貽元十八協律)〉에 “내가 남방으로 귀양을 왔으니, 남방의 음식을 먹는 게 당연하지.〔我來禦魑魅, 自宜味南烹.〕”라는 구절이 있다. *견책 …… 되어 : 저자가 홍문관 부교리로 있다가 견책을 받아 지례 현감에 제수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거문고 타는 수령은 공자(孔子)의 제자인 복자천(宓子賤)이 성품이 매우 인애(仁愛)하여 일찍이 선보(單父)를 다스릴 적에 항상 거문고만 타고 당(堂) 아래를 내려가지 않았으나 선보가 잘 다스려졌다는 데서 온 말이다. 《呂氏春秋 察賢》 *거백옥(蘧伯玉) :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 “거백옥은 나이 50세에 지난 49년의 잘못을 알았다.〔蘧伯玉行年五十, 知四十九年之非.〕”라고 하였다. *백옥 : 위관. 서진(西晋)의 대신. 자(字)는 백옥(伯玉)이며 하동(河東) 안읍[安邑: 지금의 산서성 하현(夏縣) 서북쪽]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