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리아(Caesarea) - 이스라엘, 카이사리아 -
(테오필로 2008. 12. 27. 06:38)
카이사리아(Caesarea)는 이스라엘의 텔아비브(45km 북쪽)와 하이파의 중간쯤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팔레스타인 고대 항구이자 행정도시이다.
카이사리아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었던 요르단 강 상류의 카이사리아 필리피와 구분하기 위해 카이사리아 팔레스티나(Caesarea Palaestina) 또는 카이사리아 마리티마(Caesarea Maritima)라고도 하였다. 우리들에게는 ‘지중해 카이사리아’라는 이름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명칭이다.
이곳은 고대 페니키아인들의 정착지로서 ‘스트라톤(Straton)의 탑’이라고 불렸는데, 로마의 통치하에 황제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 기원전 63-기원후 14)는 이것을 헤로데 대왕에게 하사하였고, 헤로데 대왕은 기원전 25년에서 기원전 13년까지 12년 동안 대대적인 공사를 하여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에게 아름다운 도시와 항구를 지어 헌정하면서 황제의 이름으로 명명한 명칭이다.
헤로데에 의하여 카이사리아에 지어진 항구는 기원전 22년에서 기원전 9년 사이에 지어졌는데 당시 세계 최고의 토목공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콘크리트를 이용한 최초의 수중 공법이었다. 남쪽 방파제의 길이는 500m 이었고, 북쪽 방파제의 길이는 200m이었다. 방파제에 사용된 가장 큰 돌덩어리는 5.5m x 1.25m x 1.25m의 크기로 무게는 20톤이 넘었다. 가장 큰 콘크리트 덩어리는 11.5m x 15m x 2.4m이었다. 콘크리트 덩어리는 물위에 틀을 부양시켜 그 안에 콘크리트를 채워 가라앉히는 방법을 사용했다.
헤로데는 자기 영토에 수많은 요새와 화려한 도시들을 건설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두 도시는 훗날 로마령 팔레스타인의 수도가 된 ‘카이사리아’와 다른 하나는 고대 사마리아의 옛 터에 세워진 ‘세바스티예’였다.
카이사리아는 1세기의 로마·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37/38 예루살렘~100경 로마)에 의해 ‘유대고사’와 ‘유대전쟁’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기원전 13년경부터 카이사리아는 유대를 통치하는 로마제국의 총독과 군대의 주둔지가 되었으며 본시오 빌라도[Pontius Pilatus, ?~기원후 36 이후,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 로마의 유대 총독(26~36)]와 안토니우스 펠릭스(Antonius Felix, 기원 후 52-60년에 유대지역 로마 총독)도 이곳 카이사리아에 머물렀다. 기원 후 32년경에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폭동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예루살렘 대성전 옆에 지은 안토니우스 요새에 머물고 있을 때 예수님을 심문하고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로마·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다 제1차 항쟁은(66-70) 카이사리아에서 발생한 유다인과 이방인간의 분쟁이 그 발단이 되었다고 한다.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면서 항쟁은 진압이 되었고 유다는 모든 특권이 박탈되게 되었다. 티투스의 승리를 축하하며 항쟁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카이사리아로 데려와 검투사 경기로 2500여명을 살해하였다고 한다.
또한 전승에 의하면 바르 코흐바의 유다 제2차 항쟁(132~135) 때 로마는 랍비 아키바를 비롯한 10명의 팔레스티나 유다인 지도자와 현인을 카이사리아에서 고문해 죽였다고 한다.
에우세비우스는 「교회사」에서 유다계 그리스도교 ‘예루살렘 원공동체’는 야고보가 처형되고 66년 유다 독립전쟁이 발발하기 전 예루살렘을 떠나 요르단 강 동쪽 지역 펠라로 이주했다고 전한다. 유다인들은 또다시 로마와 전쟁을 벌여 135년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 되었으며 모든 유다인들이 추방되고 예루살렘은 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그와 함께 예루살렘의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종말에 이르렀다.
제2차 유대 항쟁이 진압된 후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고 로마의 속주가 되는 반면 카이사리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 제국 팔레스티나 관구의 수도가 되었으며 약 500여 년간 행정 수도의 구실을 하게 된다.
이 도시는 비잔틴 후기와 아랍의 통치를 받으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614년 페르시아의 수중에 넘어갔고 다시 638년에는 이슬람에게 점령되는 대 변혁의 시기에 최대 규모의 도서관도 파괴되었다. 페르시아 역사가에 의하면 이슬람에게 점령되기 전에 이 도시에는 2만 명의 유다인과 3만 명의 사마리아인들이 살았지만 이슬람의 통치시기에 모두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1101/2년, 첫 번째 십자군 동안 카이사리아는 볼드윈 1세(Baldwin I)에 의해 회복되어 2세기 동안 다시금 번영을 누리면서 도시는 강력한 성채로 요새화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살라딘에게 1187년 다시 빼앗겼고, 1191년 십자군은 다시 되찾았다. 그리고 마멜룩크의 시대인 1265년에 결정적으로 빼앗긴 후 이곳에서 더 이상의 전투는 없었다.
1940년 어업 키부츠인 세도트 얌이 고대 유적지 바로 남쪽에 세워져 농업에도 종사하고 휴양 호텔도 운영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첫 골프장이 근처에 만들어졌다.
1950년 히브리대학교가 발굴을 시작했고 이스라엘 정부와 이탈리아의 고고학자들도 발굴(1959~61)에 나섰다. 그 결과 로마의 사원, 원형경기장, 야외극장(2만 명 수용), 수로(물은 수로를 통해 북동쪽으로 거의 16㎞ 떨어진 카르멜 산에서 끌어왔다), 그리고 그 밖의 로마 및 이후 시기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 관심을 끄는 것은 1961년에 발견된 로마의 비문인데,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도록 유죄 판결을 내린 당시 로마의 유대 총독이었던 본시오 빌라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복음서외에 빌라도에 관하여 기록된 첫 번째 기록물이다. 카이사리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카이사리아는 헤로데가 지은 로마 총독들을 위한 군사와 행정수도이기도 했지만 팔레스타인에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195년경에는 현재 공의회 제도의 기원이 된 최초의 공의회가 열린 도시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팔레스티나의 카이사리아를 초대교회 신학의 중심지로 만든 인물은 초대 그리스도교 교부중 가장 위대한 인물로 신학자이자 성서학자인 오리게네스(Oregenes, 185경 알렉산드리아~254경 레바논의 티로)이다. 열여덟 살이던 201년 황제의 박해로 아버지를 잃은 오리게네스는 ‘하늘나라 때문에 고자가 된 사람들’에 관한 말씀(마태 19,12)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스스로 고자가 될 정도로 혈기가 왕성했으며 30대에 저술활동을 시작하였다. 팔레스티나의 카이사리아와 예루살렘을 여행하면서 그곳 주교들의 친구가 되었으며 주교들은 오리게네스가 평신도임을 알면서도 설교를 부탁할 정도였다. 그는 고위 성직자와 귀족들과 교제하며 명성을 얻었고, 이단자들과의 토론을 위해 그리스 아카이아 지방으로 가던 도중 카이사리아에 있는 주교인 친구들이 그의 고향의 알렉산드리아 데메트리우스 주교의 허락 없이 사제품을 주었다. 그는 고자이기 때문에 사제직을 받을 수 없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에서는 그의 사제직을 박탈하고 국외로 추방하였다. 이에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판결이 효력을 미치지 못하는 팔레스티나의 카이사리아에 신학교를 세워 231년경부터 250년경까지 약 20년간 카이사리아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육성하고 많은 신학 저술들을 남겨 카이사리아를 신학 연구의 중심지로 키웠다. 데치우스 황제의 박해 때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고, 석방된 후 후유증으로 오래 살지 못하고 현재 레바논의 티로에서 죽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다음으로 고대 교회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저술가이며, 이후 이단 논쟁에 휩싸여 많은 본문이 소실되었다. 오랫동안 이단논쟁의 중심에 오르는 인물이었지만 다행히 1930년경부터 교부학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교부 신학의 아버지로 재평가 받게 되었다. 오리게네스의 작품은 성서주석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알레고리 해석의 대가였다. 그의 대표작으로 성서본문을 문학적·비평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230년경 구약성서의 여섯 번역본(히브리 원본, 히브리 원본의 그리스어 음역, 아퀼라, 심마쿠스, 70인역과 테오도치온의 그리스어 번역본)을 대조하였는데 이 육중역본을 ‘헥사플라’(Hexapla)라 부른다. 이것은 교부들이 문자적으로 영감을 받았다고 여기는 70인 역의 본문을 가능한 한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오리게네스 교부 다음으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교회사’의 시조요 궁정신학의 원조인 오리게네스의 제자였던 에우세비우스(260/264경~340경, 연대기·교회사·콘스탄티누스의 생애·성서 주석 및 호교서 등 남김)는 카이사리아에서 태어났고 315년경 카이사리아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325년까지의 교회사 열권을 완성하여 ‘교회사의 아버지’라 부른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로마 황제들의 박해와 관용정책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공인되는 격동기에 살았다. 에우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가 통치하는 기간 내내 팔레스티나의 수도 카이사리아의 주교였으며 황제의 절친한 친구이자 조언자로서 그리스도교 제국의 역사신학에 관한 작품을 저술하였다.
오리게네스를 도와 30만권 이상의 성서 사본을 수집하여 카이사리아의 신학 도서관을 당시 교회 도서관으로 최고의 권위를 누리게 하였던 카이사리아의 팜필리우스 그리고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 대 바실리우스, 히에로니무스 등의 쟁쟁한 신학자들이 카이사리아에서 수학하였고 활동하였다.
사도행전에서의 카이사리아
카이사리아는 사도행전에서 필리포스와 베드로 사도와 관련되어 등장하며 특히 사도 바오로와 밀접한 곳이기도 하다.44년에 헤로데 아그리빠가 카이사리아에서 죽고(사도 12,23) 갈릴래아를 포함한 이스라엘 전역은 로마 직속령이 되었다.
사도행전에서 필리포스는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길을 가다가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난다. 필리포스는 이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이사야 예언서와 예수님에 관한 복음의 말씀을 설명해 준 다음 세례를 주고 아스돗에서 카이사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을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8,26-40 참조). 바오로 사도는 3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에 카이사리아에 있는 필리포스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머물렀고(사도 21,8) 카이사리아의 제자 몇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사도 21,16), 성전에서 체포되었다(사도 21,27이하). 베드로는 카이사리아에 살고 있는 이방인인 이탈리아 군대의 백인대장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교회로 받아들였다(사도 10,1―11,18). 이 사건은 할례 없이 이방인을 교회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결별하는 중대한 사건이 되었다. 이제는 율법에 의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이름으로 구원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사울(바오로)이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대담하게 설교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사울을 없애버리려고 하였고,형제들은 이것을 알아차리고 사울을 카이사리아로 데리고 내려가 고향 타르수스로 보냈다(사도 9,30).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제2차, 제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카이사리아를 지나갔다(사도 18,22; 21,8).
바오로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자 카이사리아에 있는 총독에게로 호송되었다(사도 23장). 그리고 카이사리아에서 2년간 옥에 갇혀 있으면서 펠릭스 총독과 그의 후임자 페스투스 총독 그리고 아그리파스 임금 앞에서 변론하였고(사도 24-26장) 바오로가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자 카이사리아 항구에서 로마 황제에게 보내졌다(사도 27,2).
일곱 부제 중 한 명인 필리포스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이사야 예언서와 예수님에 관한 복음 말씀을 설명해 준 다음 세례를 주고 아스돗에서 카이사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을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8,26-40).
바오로 사도는 제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에 카이사리아에 있는 필리포스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머물렀고(사도 21,8), 카이사리아의 제자 몇 사람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사도 21,16). 그 이후 바오로 사도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갔다가 성전에서 붙잡혀 유다인들은 그를 죽이려 카이사리아에 있는 총독에게 데려갔다(사도 23,23-35). 바오로 사도는 카이사리아를 세 번이나 방문했으며, 특히 마지막에 로마로 이송되기 전 2년간(58~60년) 이곳 감옥에 수감돼 있다가 로마로 압송돼 갔을 정도로 사도 바오로와 연고가 깊은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