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명성왕후 민비가 일본 세력에 의해 시해 당한 후, 1896년 2월, 사실상 연금 상태였던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갔습니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역사에서는 기술하고 있지요.
그리고는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기 까지 1년여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릅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관파천 직후부터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은 국왕이 외국공사관에 머물면서 신변의 보호를 받는 것은 나라의 체면상 수치스러운 일이고 외세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루빨리 환궁해야 한다는 상소를 빗발치듯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고종이 1897년 2월까지 계속 환궁을 미루었던 사연은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하여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환궁할 장소를 경운궁으로 정하고 그곳을 수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경운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과는 비교할 수 없고, 궁궐이라고 하기 조차 어려운 한적한 곳이었지요.
고종은 처음부터 민비가 살해당한 경복궁으로는 돌아갈 마음은 아예 없었고, 바로 주변에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여러 나라의 공사관이 밀집해 있어 손쉽게 그들의 보호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경운궁을 수리한 뒤 환궁하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환궁을 미루었던 또 하나의 더 중요한 이유는 궁궐경비대의 확보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종과 측근은 이를 러시아 병력으로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마침 1896년 5월에 있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을 대표로 하는 축하사절단을 파견하고 다음의 다섯 가지를 요청하였지만 러시아 측의 사정으로 대부분 이루어지지가 않았고, 궁궐경비병 양성을 위한 군사교관의 파견을 고려해 보겠다는 정도의 답변만 받았습니다.
①한국 군대가 만족할 만한 수준이 될 때까지 국왕의 신변보호
②군사 교관의 파견
③고종을 보필할 궁내 고문과 내각 고문·광산 및 철도 고문의 파견
④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전신선 설치
⑤일본 차관을 갚기 위한 300만 엔의 차관 제공
이러한 사정, 특히 핵심적인 내용으로 당초 기대하였던 러시아 궁궐경비병의 파견이 무산되었기 때문에, 러시아 군사고문단이 그해 10월 입국하여 800명의 조선군 정예 군사를 훈련시켜 경운궁 궁궐경비대를 조직한 1897년 2월까지, 고종의 환궁은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고종의 환궁에 따라 경운궁은 국왕이 임어하는 법궁의 지위를 가질 수 있었지만, 경운궁의 입지와 주변 여건은 당시 고종과 조선이 처한 어려운 현실을 말해 주는 것만 같습니다.
(참고) 당시에는 러시아를 아라사(俄羅斯), 러시아 공사관을 아관(俄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파천(播遷)은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하던 일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