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과 창조성을 중심으로 오문환 연세대 사회과학연구소 전문연구원
1. 머리말
동학의 출발은 수운 최제우의 천주1) 체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경신년 4월 5일 천주 체험에서 수운은 천주로부터 “내 마음이 네마음이다(吾心卽汝心)”, “귀신이라는 것도 나다(鬼神者吾也)”(「논학문」)2)라는 말을 들은 것으로 전해진다. 천주 체험이 없이는 동학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므로 수운은 자신이 체험한 천주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으며 어떤 논리로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을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동학의 천주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자들이 적지 않은 연구성과를 발표하였다.3) 최동희(1965)는 수운이 사용한 상제, 화공, 조물자, 천주, 님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했으며, 동학이 신앙하는 대상이 어떠한 지를 세밀하게 살펴주었다(최동희 1965a). 신학자인 김경재(1974)는 수운의 신관은 서구 신학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무신론’, ‘유신론’ ‘휴매니즘’을 넘어서는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운에게 있어서는 “하늘은 스스로가 갖고 있는 그 생명의 무궁함, 그 덕의 광할함, 인간보다 더 그 진리와 성실의 깊음에서 스스로 저절로 주(님)가 되신다”(김경재 1974: 61)라고 하여 서구신학적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재봉(1999)도 천(天)개념을 인격적 특성을 가지는 천신(天神), 자연계의 보편법칙이자 도덕인륜의 근거로서의 천도(天道),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천기(天氣)로 분석하여 동학의 천주는 인격적 속성이 강한 천신에 배속시켰다. 노길명(1995)도 동학의 천주관은 성리학(주로 주자학)의 강한 이법천(理法天)적 성격보다는 경외지심을 일으키는 일반인의 종교적 심성에 호소하는 인격천(人格天)의 성격을 강조했다. 살아 움직이는 인격천에 주목하여 박경환은 동학의 신관은 “천인합일적 천인관계의 사유는 계승하되, 주자학의 이기이원적 존재론을 기일원론적 존재론으로 전환”(박경환 2001, 175)시켰다고 본다. 동학에서 천주가 인격천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은 수운이 주(主)자를 “주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는 것이요”(「논학문」)라고 해석한 것만 보아도 자명하다. 부모처럼 나를 낳고 기르는 존재이기 때문에 천주를 공경해야 할 존재임에는 분명하나 그렇다고 해서 어떤 초월적 주재자 혹은 절대자는 아니라는 점을 수운은 다음처럼 상기시킨다. “아는바 천지라도 경외지심 없었으니 아는것이 무엇이며 천상에 상제님이 옥경대 계시다고 보는듯이 말을하니 음양이치 고사하고 허무지설 아닐런가”(「도덕가」). 김상일(2000, 2001)은 동학의 신관을 인격신적인 측면과 함께 비인격적인 측면의 종합으로 보아 이 점을 서구의 현대 서구철학 및 화이트헤드 철학과 비교 분석하고 있다. 수운의 불연기연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기본논리로 하여 필자는 ‘시천주’ 주문에서 모실 시(侍)자에 대한 수운의 주석인 ‘안으로는 신령이 있고 밖으로는 기화가 있어 한 세상 사람들이 각자 알아서 옮기지 않는다(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하면서 수운의 천주관의 이원적 일원성에 대하여 이미 논한 바 있다(오문환 1996). 동학의 출발은 천주를 모심으로서 시작된다. 천주를 모시게 되면 천주는 두 갈래 방향으로 나타난다. 먼저 안으로는 지금껏 없었다고 할 수 있는 신령이 새로이 드러나게 되고 밖으로는 우주와 연결된 하나의 기운이 솟아나게 된다고 하겠다. 모실 때 천주는 나의 안과 밖에서 새로이 드러나게 되고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이동하지 않을 때 천주의 조화권능이 내 안에 자리잡게 된다(造化定). 천주조화가 내 안에 자리잡게 되면 나와 천주는 하나로 통하여 우주만사를 알게 된다(萬事知)고 하겠다. 동학에서 천주는 지기로부터 고립시킬 수 없으며, 존재(Being)를 활동(Becoming)으로부터 단절시킬 수 없는 이원적 일원론임을 수운, 해월, 의암의 언행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2. 본체·현상의 일원론: 不二
수운은 「교훈가」에서 “천생만민 하였으니 필수지직 할것이오 명내재천 하였으니 죽을염려 왜있으며 한울님이 사람낼때 녹없이는 아니내네”(「교훈가」)라고 하여 사람을 탄생시키고, 목숨을 유지시키고, 생활을 뒷받침시켜주는 존재로 천주를 그리고 있다. 경신년 천주 체험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도 천주는 깨달음을 주신 존재로 그려지고 있으며 천주의 뜻에 따를 뿐이라는 묘사를 볼 수 있다. “만단의아 두지마는 한울님이 정하시니 무가내라 할길없네”(「교훈가」). 이렇게 본다면 수운은 태어나, 생활하고, 깨닫는 모든 일체의 중심에 천주가 작동하고 있다고 한다. 자식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형식으로 지은 노래인 「교훈가」에서 수운은 “나는도시 믿지말고 한울님을 믿었어라”(「교훈가」)라고 하여 오직 천주께 정성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면 이처럼 우주만물의 모든 것을 낳고, 기르고, 생활하는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천주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에 대하여 수운은 “네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 하단말가”(「교훈가」)라고 하여 천주를 찾아 밖으로 헤맬 것이 아니라 너희들 몸 안에 모셔 있으니 멀리서 찾지 말라고 한다. 해월은 이 점을 분명히 하여 ‘천주는 만물을 낳고 그 안에 살고 있다’(「기타」)고 명료히 하고 의암도 천주란 다름 아닌 ‘본래아(本來我)’로서 천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살고 있다고 표현하였다(「무체법경」). 동학에서 천주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을 생성시키며 동시에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 안에서 살고 있는 존재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주는 한편으로는 우주만물을 생성시키는 초월적 존재로 그려지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주만물 안에 내재된 존재로서 이해되고 있다. 그러므로 동학의 천주관을 초월적 내재론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시각은 아무런 충돌없이 융합되고 있는 점이 동학 천주관의 특성이라 할 수 있겠다. 동학이 제시하는 천주관을 조금 상세하게 분석함으로서 동학의 천주관의 특성과 의의를 찾아보자. 수운을 이어서 동학을 조선 땅에 뿌리내린 해월 최시형은 천주와 인간의 거리를 완전히 붕괴시켜 밀착시킨다. 그리하여 해월에게 있어서 ‘천’은 더 이상 일상생활을 떠날 수 없다고 말한다. “도는 높고 멀어 행하기 어려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용행사가 다 도 아님이 없나니, 천지신명이 만물과 더불어 차차 옮겨 나가는지라. 그러므로 정성이 지극하면 한울이 감동하니 여러분은 사람이 알지 못함을 근심하지 말고 오직 일에 처하는 도를 통하지 못함을 근심하라.”(「기타」). 천주는 곧 일상 생활과 다르지 아니하므로 오직 정성을 다하여 생활하는 것이 곧 천주를 모시는 길임을 강조한다. 해월에게 있어서 일상생활은 곧 천주의 일이므로 성스러움과 속됨의 이원성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해월은 “우주는 한 기운의 소사요 한 신의 하는 일이라, 눈앞에 온갖 물건의 형상이 비록 그 형상이 각각 다르나 그 이치는 하나이니라. 하나는 즉 한울이니 한울이 만물의 조직에 의하여 표현이 각각 다르니라”(「기타」). 모든 존재자의 중심 안에는 하나의 천주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 중심에서 작동하고 있는 하나의 존재를 통하고 본다면 “무엇이든지 도 아님이 없으며 한울 아님이 없는지라”(「기타」)라는 해월의 언명은 자연스럽게 들릴 것이다. 왜냐하면 삼라만상이 모두 이 하나로 통하기 때문이다. ㅍ동학에서 천주는 우주 삼라만상을 낳고 기르는 부모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에서 서구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일신론적 성격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허공이나 우주의 어느 곳에 사람을 닮은 천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천주는 우주 삼라만상을 떠나서 지배하고, 통제하고, 주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만물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살아 있고 활동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달리 말하자면 하늘 안에도, 나 안에도, 돌멩이 안에도 우주만물을 낳고 기르는 자비로운 손길이 똑같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학의 신관은 지배, 통제, 주재의 절대 유일신관과는 다르다. 또한 만물에는 각각 개체 신이 존재한다는 범신론과도 다르다. 동학을 따른다면 개체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신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나란 다수 가운데 최고 높은 하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아니다(不二)’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둘이 아니라는 것은 천주와 우주만물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속(聖俗)이 하나라는 의미이다. 의암 손병희는 “성인도 또한 큰 장애요 세상도 반드시 작은 장애”라 하여 성속을 떠난 경지를 말했다. 성속의 양변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一)와 여럿(多)의 양변도 떠나고 보이는 세계(色)와 보이지 않는 세계(空)도 관통하는 경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수운이 체험한 천주는 구중궁궐(九重宮闕)의 눈부신 보좌에 앉아서 천상천하를 호령하는 옥황상제인가, 아니면 우주를 마음대로 창조하고 지배하고 호령하는 무시무시한 절대적 주재자인가, 아니면 삿갓쓰고 두루마기 걸친 신선 할아버지인가, 역사적으로 각 문명권은 천주에 대하여 다양한 형상을 그려왔다. 종교와 문명에 따라서 천주는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문명에 따른 표현의 다양성에 대하여 수운의 의식은 분명하다. 수운 자신은 동방 땅에서 나서, 동방 땅에서 득도하고, 동방 땅에서 그 뜻을 폈기 때문에 자신의 가르침을 학으로는 동학이나 도로는 천도라 하였다(「논학문」). 학은 지역에 매이기에 동서남북이 있을 수 있으나 도(道)는 지역이나 방위에 매이지 않으므로 같은 천도라 한다고 했다. 천도는 하나이며 천도의 운동도 또한 하나이나 이를 설명하는 이치와 철학은 다르다는 것이다(「논학문」). 그러나 “천도는 형체가 없는 것 같으나 자취는 있다(「논학문」)”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비록 형태로 색깔로 없지만 그 자취는 있다고 하였다. 천도가 형상을 넘어선다고 해서 없다거나 이른바 완전한 허공이나 진짜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천도의 자취와 흔적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수운에게 내려 와서 이야기를 나눈 천주는 분명 인격적 존재로서 천주의 자취와 흔적이라 하겠다. 수운은 천주의 형상(形)은 “태극(太極)이요 궁궁(弓弓)이라” 했다(「포덕문」). 해월은 수운이 천주의 형상을 태극과 궁궁이라는 영부로 드러낸 것은 세상 사람들이 마음이 곧 하늘인줄 알지 못하므로 천주가 쉬임없이 활동하는 마음이라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해석하고 있다(「기타」).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천주는 끊임없이 약동하는 마음으로 내려와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하여 궁을(弓乙)을 말했다는 것이다. 궁을이란 약동하는 천주의 기운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수운이 체험한 천주는 인간의 형체를 한 절대신과 같은 존재는 아님을 알 수 있다. 비록 무형무색이지만 그 자취는 분명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동학에서 천주는 오직 유일하며, 형상화할 수 없으며, 보려해도 볼 수 없으며,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단지 자취만 있을 뿐이다. 우주만물이 어떻게 생겼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수운의 이해를 통해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수운은 우주순환의 현상에 대해서 두 가지 사고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사시성쇠와 풍로상설이 그 때를 잃지 아니하고 그 차례를 바꾸지 아니하되 여로창생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어떤 이는 한울님의 은혜라 이르고 어떤 이는 조화의 자취라 이르나, 그러나 은혜라고 말할지라도 오직 보지 못한 일이요 조화의 자취라 말할지라도 또한 형상하기 어려운 말이라. 어찌하여 그런가. 옛적부터 지금까지 그 이치를 바로 살피지 못한 것이니라”(「논학문」). 전자는 마치 옥황상제가 있어서 우주만물 모든 것을 창조하고 선한 자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절대자로 생각하는 경향이며, 후자는 우주만물은 무위자연으로 저절로 이루어진 조화의 자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유경향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생각은 중(中)에 이르지 못한 생각이라는 것이 수운의 입장이다. 현대적 용어로 하자면 일신론과 무신론의 대립으로 볼 수 있으며, 동양사상사적 맥락으로는 상제를 신봉하는 유학적 태도와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노장적 태도의 대립으로 볼 수 있겠다. 이 두 가지 견해는 중심을 잡지 못한 견해라는 것이 수운의 지적이다. 동학은 신 혹은 상제에 매인 견해나 물질 혹은 우주에 걸린 생각을 해체시킨다. “귀신이란 것도 나니라”라는 천주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유일신이 되었든 개체신이 되었든 어떤 종류의 신이라도 천주이며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이 네 마음이라”는 천주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늘마음과 사람 마음이 하나인줄 알 수 있다. 형이상의 세계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해월에게서 알 수 있듯이 형이하의 수많은 세상사와 사물들이 모두 천주(物物天事事天)이므로 또한 천주와 사물이 둘이 아님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천주는 형이하와 형이상을 하나로 꿰뚫는다 하겠다. ㅍ우주만물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궤도를 돌아가는 것도 어떤 절대자가 있어서 그 뜻대로 돌리는 것도 아니며 사물이 저절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천주는 우주만물과 둘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포덕문에서 “저 옛적부터 봄과 가을이 갈아들고 사시가 성하고 쇠함이 옮기지도 아니하고 바뀌지도 아니하니 이 또한 한울님 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뚜렷한 것이로되”(「포덕문)」라는 데서 잘 나타나듯이 우주순환은 천지조화와 다른 것이 아니다. 천지는 우주만물 안에 있고, 우주만물은 또한 천지마음 안에 있으니 양자가 어김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천지 안에 조화 있고 조화 안에 천지가 있는 것이다. 무형의 하늘과 유형의 하늘을 회통하여 거느릴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우주만물을 떠나서 따로 천도가 따로 있지 않으며, 천도를 떠난 우주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둘이 아님을 알지 못하고 어느 한 쪽에 기울기 때문에 진리의 중심을 잡지 못했다고 하겠다. 천주는 무형이기에 보이지 않으며 우주만물은 유형화되어 나타난 천주의 자취일 뿐이다. 무형과 유형의 상관성을 가장 잘 나타나는 곳이 바로 모실 시천주(侍天主) 주문에 대한 수운의 침묵에서이다. 시천주(侍天主) 주문 21자를 수운은 자상하게 주석하고 있으나 하늘 천(天)자는 해석하지 않고 있다. 수운이 천(天)자를 해석하지 않은 점은 부처의 침묵과 연관시켜 볼 수 있다. 부처는 “신이 존재하는가?”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침묵으로 응하였다고 한다. 부처의 침묵을 둘러싸고 일부 제자는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대답으로 해석하고, 다른 일부는 신의 부재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불심에 이른 사람은 부처의 침묵이 긍정과 부정, 있음(有)와 없음(無)를 넘어선 진공묘유(眞空妙有) 혹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자리를 가르키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수운은 분명 천주의 소리는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운은 천주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수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에 대하여 천주는 매번 답변을 한다. 대화를 통하여 수운은 천주로부터 영부(靈符)라고 하는 천주의 형상과 주문(呪文)이라고 하는 천주의 소리를 받는다(「포덕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운은 천(天)을 주석하지 않았다. 비었지만 도리어 있는(眞空妙有) 그 자리를 가르키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부와 주문이 천주의 자취라면 도는 바로 수운이 천주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라는 말이라 하겠다. 즉 천주 마음과 수운의 마음이 하나인 것이다. 천주 마음과 사람 마음이 둘이 아님을 수운은 천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다. 인간이라고 하는 극과 하늘이라고 하는 극이 실질적으로 사라지는 그러한 경지라 할 수 있겠다. 수운은 그러한 경지를 수운은 무극대도(無極大道)라 불렀다. 도로 이야기하면 무극대도인 것이며 학으로 말하면 동학인 셈이다.
3. 본체: 無極大道, 不擇善惡
수운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은 무극대도를 받았으며 이를 널리 펴는 것이 하늘로부터 받은 명(命)으로 여겼다. 「논학문」에서는 무극 개념이 한 번, 『용담유사』에서는 무극대도 개념이 13차례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수운은 자신이 만난 천주는 형상과 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무극대도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무극대도 개념의 의미를 보면 이 점이 보다 분명해진다. 극은 상대성을 전제로 한다. 아무리 극이 작거나 크더라도 극일 뿐이다. 유(有)의 한계성을 지적하기 위하여 주렴계(周濂溪)는 「태극도설(太極圖說)」를 썼을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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