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선의라는 이름의 자기기만
정우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할 뻔했을 때 담임교사가 장학금을 알아봐 주었다. 그 덕분에 학업을 이어 갈 수 있었던 정우는 선생님에게 약속했다.
“나중에 저도 다른 사람을 돕겠습니다.”
선생님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은 마음이구나. 다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려면, 도움을 받는 사람의 마음도 알아야 한단다.”
정우는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뒤에도 어려운 동료를 도왔고, 갑작스러운 집안일로 자리를 비워야 하는 직원의 업무를 대신 맡았다. 사람들은 그를 인간적인 관리자라고 불렀다.
그는 그런 평가가 싫지 않았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어려움을 덜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 한구석에 작은 기대가 자라났다. 자신이 애쓴 만큼 알아주기를, 자신이 베푼 배려를 기억해 주기를 바랐다.
그 기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정우 자신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사람을 돕는 일이 좋아서 돕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다. 다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정우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었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견디고 지금의 자리에 오른 자신이 제대로 살아왔다는 증거였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통해 자신의 삶에도 의미가 있었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래서 그 평판을 잃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계약직 직원 수진이 그를 찾아왔다.
“팀장님, 어머니가 수술을 받으셔야 해서 며칠 병원에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휴가를 조정할 수 있을까요?”
수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터라, 휴가를 요청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정우는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형편이 어려워 병원에 가는 일조차 망설이던 모습이었다.
“가족이 아픈데 일부터 걱정하면 안 되지요. 업무는 내가 조정해 볼 테니 다녀와요.”
그는 실제로 동료들의 일정을 조정하고 수진의 업무 일부를 대신 맡았다. 며칠 동안 일이 늘어나 늦게 퇴근해야 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수진이 돌아온 날, 정우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팀장님 덕분에 어머니 곁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우는 웃으며 대답했다.
“별일 아니에요. 어려울 때 서로 돕는 거지요.”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수진의 감사 인사를 들은 순간, 정우는 자신이 좋은 일을 했다는 기쁨과 함께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까지 얻었다.
그는 그 두 가지를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며칠 뒤, 정우는 부서의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한 개선안을 발표했다. 몇 주 동안 자료를 준비했고, 여러 부서와 협의도 거쳤다. 이번 제안이 성공하면 팀의 실적이 좋아질 뿐 아니라 자신의 노력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발표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정우는 준비한 자료를 설명하며 참석자들의 반응을 살폈다. 오랫동안 공들인 일이 좋은 평가를 받기를 바랐다.
발표가 끝나갈 무렵 수진이 손을 들었다.
“팀장님,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될까요?”
“말해 봐요.”
“제안하신 방식은 처리 시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예외적인 요청이 자주 들어옵니다. 그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처리 속도는 빨라져도 오류가 늘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진은 실제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확인 절차를 줄이면 업무가 빨라지는 대신 잘못 처리된 건을 나중에 다시 확인하느라 더 많은 시간이 들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정우는 그 문제를 전혀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전체적인 효율에 집중하다 보니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
그는 수진의 의견을 검토할 수 있었다. 빠진 부분을 인정하고 개선안을 보완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먼저 불편해졌다.
왜 하필 지금일까.
자신이 얼마나 공들여 준비했는지 수진도 알고 있을 터였다. 꼭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지적해야 했을까. 회의가 끝난 뒤 따로 이야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정우는 수진의 말을 업무에 대한 의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의 노력과 능력을 의심하는 말처럼 느꼈다.
회의가 끝난 뒤 그는 수진을 불렀다.
“아까 회의에서 꼭 그렇게 말해야 했어요?”
수진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말씀드린 내용에 문제가 있었나요?”
“문제가 있다는 걸 나도 모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게 공개적으로 지적하면 내가 준비를 제대로 못 한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현장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라서 말씀드린 겁니다.”
정우는 수진의 설명을 듣고도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자신이 애쓴 시간과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그가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었다.
“내가 너를 도와준 건 그런 말을 듣자고 한 일이 아니야.”
말이 끝나자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수진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팀장님이 도와주신 일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일 때문에 제가 업무상 문제를 말씀드리면 안 되는 건가요?”
정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수진이 회의실을 나간 뒤에도 그는 한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자신이 잘못된 말을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억울함이 일었다.
자신은 정말 수진을 도왔다. 그때는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수진이 어머니 곁에 있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서운함까지 잘못이라고 해야 하는가.
정우는 스스로 물었다.
서운함을 느끼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었다. 누구나 자신의 노력을 알아주기를 바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서운함을 이유로 수진의 의견을 제한하려 했다는 데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기대했는지 차츰 깨달았다.
수진이 자신에게 고마워하기를 바랐던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판단을 믿어 주기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적어도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말로 요구한 적은 없지만, 그는 도움과 함께 그런 기대까지 건넸다.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자 도움은 어느새 빚처럼 변했다.
정우는 자신이 수진을 도왔던 날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수술을 걱정하던 수진의 표정을 보며 젊은 시절의 자신을 생각했다. 그 마음은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회의실에서 수진에게 한 말 역시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사실이 정우를 괴롭혔다.
그는 자신의 선의를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선의가 언제나 순수했다고 주장할 수도 없었다. 누군가를 돕고 싶은 마음과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있었다.
정우는 오랫동안 그중 하나만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고 여겨 왔다. 이제는 다른 쪽 마음도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도와준 사람이 고맙다는 말을 기다리기 시작하면, 받는 사람은 그때부터 편하지가 않단다.”
그는 예전에는 그 말을 남을 배려하라는 평범한 충고로만 받아들였다. 지금은 그 말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우는 수진에게 감사 인사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베푼 배려를 기억하고, 자신의 판단을 존중하며, 자신에게 불편한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말로 요구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기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수진을 도왔다는 사실을 근거로 수진에게 지켜야 할 태도까지 요구했다.
그 순간 선의는 상대를 위한 마음에서 자신을 위한 권리로 바뀌었다.
작가는 펜을 내려놓았다.
“창조자님, 정우는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왜 자신의 선의를 내세워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 했을까요?”
창조자가 대답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과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은 다르기 때문이다. 전자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하지만, 후자는 자신을 변호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정우의 도움은 처음부터 거짓이었습니까?”
“그렇게 단정할 필요는 없다. 그의 도움에는 진심이 있었다. 다만 진심이 있었다는 이유로 그 안에 섞인 다른 욕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정우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정우는 누군가를 도울 때마다 자신의 삶이 의미 있다고 느꼈다. 그것이 잘못은 아니었다. 문제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상대의 자유를 좁히기 시작했다는 데 있었다.
그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좋은 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상대에게 이유를 돌리고 싶어 했다.
수진이 너무 공개적으로 지적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졌다.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떠올리면 억울함도 조금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수진이 제기한 문제의 타당성을 바꾸지 못했다.
정우는 아직 수진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그 잘못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사과하는 순간 자신이 쌓아 온 평판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고 싶은 마음과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망설였다.
좋은 사람이라는 믿음을 지키는 것과 실제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정우는 이제 그 둘이 언제나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시작했다.
선의는 자신을 믿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자신의 좋은 의도가 상대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돌아볼 때 비로소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