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줏대 있게 삽시다(2003년 1월 5일 오전 11시)
마태9: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좆으라 하시니 일어나 좆으니라
아무나 따라 오란다고 줄줄 따라가면 그것은 매우 줏대없는 노릇입니다. 사람들이 다 저마다 자기 소신껏 살아가길 원하고 또 자기가 주인노릇 한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떤 강한 힘에 매여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질질끌려서 산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그 모습은 귀신이 들어간 돼지떼의 모습으로 묘사 되었습니다. 한 마리도 예외없이 바다로 내리 달아 몰사하는 그런 어리석고 아주 맹목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고하면 줏대 없이 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믿는 것 자체를 아주 나약한 것으로 그리고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종교는 그저 취미처럼 하나쯤 가지면 심신에 좋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다 무엇엔가 매여 있어서 꼼짝 못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따라오란다고 따라가는 것이 줏대없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야말로 구원이며 그것이야 말로 생명이며 그것이야 말로 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줏대가 얼마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귀에게 매여 있는 주제에 무슨 줏대를 찾습니다. 무슨 자존심을 찾습니까? 문둥병자가 일어나서 걸어가는 것이 마태가 일어나서 예수님을 좆는 것이 똑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죄사하는 권세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좆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그것이 곧 영생입니다. 그것이 곧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이 줏대 없고 나약한 것이 아니고 가장 줏대 있고 가장 강하고 가장 능력있고 가장 권세있게 사는 것임을 믿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줏대있는 분이고 능력있는 분이며 권세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세상을 정말 줏대있고 소신있게 살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다 바다로 내리달아 몰사하는 돼지떼처럼 세상물결에 휩쓸려서 그렇게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세상풍조에 이리저리 요동치는 자들이 아닙니다. 유행따라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성도는 흔들림없이 예수님의 인도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 견고함이 우리 가운데 있어지기를 소원합니다.
10-11절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 그 제자들이
예수님이 좆아오라고 한 세리 마태나 그밖에 함께 식사를 한 죄인들은 이스라엘사회에서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취급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함께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한 식구, 한백성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인들하고 한상에 둘러서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한통속이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한통속이 되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마다 바리새인들이 시비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다 바리새인들을 시비거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 찾아가서 함께 먹고 마시면서
"당신들 참 열심히 하나님 섬기는 것 보니까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어요. 참 댁들만큼 신상생활 잘하는분들도 없어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당신들만 같았으면 좋겠어요. 말씀연구에 열심이지, 말씀대로 살려고 그렇게 애쓰지요. 말씀만 같고는 모자라서 구체적인 실천강령까지 방법까지 세세하게 그렇게 정해놓고 하나님을 섬기는 당신들을 보면 진짜 소망이 있다니까요? 야 밥맛좋다. 이런 분들하고 밥먹으니까 밥맛도 좋네요. 하나님이 오시면 확실하게 당신들부터 챙길거요."
그러면 누가 시비를 걸겠습니까? 그런데 꼭 밥을 드셔도 죄인이라고 완전히 낙인찍혀서 저런 사람들은 절대 천국못간다고 본보기로 내놓은 사람들하고 한상에서 밥잡수고 있으면서 봐라! 여기가 천국이다(잔치 잔치 열렸네 천국잔치 열렸네),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마태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이말은 이렇게 바꿀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천국이 다 있느냐 그런 소리입니다. 사람들이 그런소리 많이 하지 않습니까? 막살아도 예수만 믿으면 천국에 갑니까? 무슨 그런 천국이 다 있습니까? 마태, 세리들, 저 죄인들, 아니 저렇게 막살아도 천국갑니까? 천국은 그렇게 막사는 사람들이 가는 나라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마태 9:12-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천국은 막살아도 되는 나라가 아니고 마구 죄를 지어도 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님께서 죄사함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나라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죄인이라도 온전케 되는 놀라운 나라입니다. 죄를 지어도 들어가고 막살아도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를 가지고 자기의 처지와 형편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위안을 삼으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막살아도 된다고 하면서 주시는 긍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데 그렇게 까락 까락 따지겠는가?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되는거지. 이러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자기최선으로 바꾸어 놓으려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그렇게 믿는 사람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긍휼은 우리보고 적당히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그 사죄의 은총이 없이는 한 사람도 예수님과 한상에 둘러서 먹고 마실수 없습니다. 여기 이 식탁은 예수님만 빼면 죄인의 나라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기 이 식탁이 천국의 잔치상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이 밥상에 참여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일어나서 나가버리면 그대로 죄인들이 득실거리는 죄인들의 밥상일뿐입니다. 최선을 다한다고 될일이 아닙니다. 최선을 아무리 다해서 별별 음식 다 차려놓고 기분내려고 해도 예수님만 일어나서 나가 버리면 밥상이고 잔치고 다 깨지는 것입니다. 심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밥상은 긍휼의 밥상입니다. 먹고 마시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 참여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식사의 자리는 막살아도 상관없이 베풀어지는 밥상도 아니요, 최선을 다해서 예수님을 대접하는 밥상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차려주시는 밥상이요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잔치입니다. 그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에게 죄사함을 주시는 긍휼의 밥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식사는 우리가 차려놓고 예수님 드십시오, 그런 식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버림받았고 제일 힘들게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이니까 우리와 함께 잡수십시다 그래야 하나님답습니다, 하는 그런 식탁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 제사상입니다. 예수님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는데 받아주십시오 그런 식탁 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탁은 제사입니다. 그런 식탁에는 예수님이 앉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하고는 식사를 안합니다. 그런 제사상 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성드려서 차려봐야 제사상은 귀신들이 먹고 마시는 상일뿐입니다. 제사상을 차릴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차려주시는 상에 참여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는 것은 내가 정성드려서 상을 차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차려놓고 먹어라, 그런것입니다. 그것이 긍휼입니다. 그것이 죄사함의 은총입니다.
9: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시하지 아니하나이까
제사상 차리는 사람들의 특징은 이겁니다. 우리는 이거 하는데 당신들은 안합니까? 관심이 예수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벌여놓은 일들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긍휼이 아니라 제사요 신랑예수가 아니라 자기들의 정성입니다. 열심입니다.
마태 9: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왜 분위기 깹니까? 지금 신랑하고 재미있게 노는데 지금 잔치가 한창 무르익는데 왜 분위기를 깹니까? 지금 긍휼의 밥상이 거하게 차려져서 그 긍휼을 먹고 마시고 누리고 있는데 분위기를 깨는 것입니다. 우리는 금식하는데 거기 금식안하나? 신랑을 빼앗길 때 금식하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긍휼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긍휼이 아니면 안되는 죄인인줄 알고 제사상 그만 차리라는 뜻입니다.
거기는 왜 금식 안합니까?
거기는 신년 부흥회를 왜 안합니까? 거기는 경로당 사업 왜 안합니까? 거기는 북한 돕기 왜 안합니까? 제자훈련 왜 안합니까? 전도훈련 왜 안합니까? 거기는 --왜 안합니까?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니까 괜히 남들 다 하는 것을 안하면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옵니다. 참, 판깨지마세요. 지금 우리 한참 신나요. 예수님하고 긍휼밥상 차려놓고 오늘도 긍휼 내일도 긍휼 자다가 깨도 긍휼, 지금 다른 거 하고 놀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긍휼의 밥상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이런 줏대가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목사님! 우리는 안합니까? 우리는 돈모아서 복지관 안짓습니까? 교회가 돈을 모을 궁리를 왜 합니까? 그 궁리하느라고 마음이 둔해집니다. 하늘나라를 소망해야 할 사람들이 모여서까지 그런 궁리 하다가 마음이 둔해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집사들(일군들) 왜 세웁니까? 쓸데없는 일 신경쓰지 말고 긍휼의 잔치 망치지 말게 하는 배려가 아닙니까?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하는 좋은 일들을 다 하십시오. 돈 있으시면 복지사업도 하시고 남좋은 일들 많이 하십시오. 돈벌 궁리도 하시고 가족들 먹여 살릴 궁리도 하시고 열심히 새해 계획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은 하시든지 말든지 자유입니다.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말고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말고 먹통처럼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라고 하기만 하면 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밀어주시고 하나님께 영광되게 해주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계획을 세우든지 혹은 이 세상일로 무슨 기대를 하든지,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좀 잘되든지 잘못되든지 이 세상의 일로 좌우되지 않고 변치 않는 믿음의 사람들로 살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뭐 안하면 안될 것 같은 그런 염려를 떨쳐주시기를 원합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이면 된다는 그 마음이 교회에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긍휼이 아닙니까? 그 놀라운 긍휼의 나라에 속했으니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하면 전도가 안될까봐서 걱정하시는데 그런걱정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전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뭘 못한다거나 안한다고 기죽지 말고 그런걱정말고 맘껏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기도도 잘 안하는데 내가 헌금도 잘 못했는데, 난 노인인데, 난 여자인데, 난 목사도 아니고 집사도 아닌데, 그러면서 기죽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헌금 못하는 나를 전하는게 아닌데 왜 기죽습니까? 기도도 잘 못하는 나를, 노인인 나를, 여자인 나를, 목사인 나를, 집사인 나를 전하는게 아닌데 왠 걱정이 그렇게 많습니까?
우리교회 오면 뭐가 좋아요. 그것은 예수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단체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목사님이 좋고 우리 교회는 설교가 좋고 우리 교회는 무엇도 있고 무엇도 있고 하면서 믿을만한 것들을 마구 던지는 것입니다. 안심하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기치는 집단이 아니니까 안심하고 나와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식으로 신뢰를 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자선사업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본받는다고 하면서 거리의 부랑아들이나 노숙자들, 사회의 여러 소외계층을 돕는 사업을 벌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무슨 사업을 하든지 그것은 하고 싶은대로 하는것이고 자기 마음에 원하면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잡수시는 것은 그런 자선사업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돈을 열심히 모아서 예배당 짓고, 그 다음엔 복지센터짓고, 학교, 수양관, 기도원, 장례식장, 공원묘지 운영 하면서 실컷 기분을 냅니다. 교회는 이제 사회속에 안전하게 자리잡은 거대한 사업체의 형태를 띄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래야 한다고 공공연히 떠듭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 같이 말합니다. 적은 무리가 모이는 교회라도 이미 꿈꾸는 것이 그런 모양이면 애초에 글른 집단일뿐입니다. 시작부터 관심이 하늘나라가 아니라 이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세상에서 크게 되고 안전하게 자리를 잡는 일을 목표로 세워 그것을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내걸고 세력의 확장을 꾀합니다. 이제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흩어진 나그네라는 말씀앞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어떻게 찾을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재미 보라고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재미를 기대하면서 예수님을 좆겠다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이 아닙니다. 돈 있으면 기부도 하고 없는 사람들 돕고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교회라고 그런일을 하면 안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것과 믿음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그저 사람들이 돈쓰면서 기분내는 것이니까 그정도로 이해하고 예수님을 좆는 것은 그런 세상이야기 하고는 별천지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자선사업은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들이 차리는 제사상에 불과하니까 죄사함을 베풀어 주시는 긍휼의 상, 하나님의 긍휼을 먹고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자선사업을 하면 좋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항상 그런 긍휼을입지 않으면 안되는 죄인인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서기관은 좆겠나이다, 어떤 서기관들은 참람하도다 그럽니다. 같은 서기관으로서 신앙이 같고 신분이 같고 생각이 같은 종류의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좆겠나이다 하면서 열심을 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참람하도다 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계속 일관되게 행동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그와같이 제멋대로 믿는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멋대로 믿는 사람들의 그런 믿음을 다 거절하십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 기분입니다. 기분내는 것은 자유이고 취미일수 있지만 천국은 자기 원하는대로 하고, 바라는대로 얻고, 하고 싶은대로 취미생활하는 것 같이 그렇게 자기 기분 내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한테서 나오는 믿음은 다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것들은 다 예수님의 살과 피로 차려진 예수님의 긍휼의 밥상, 예수님의 그 발자취를 따르는 밥상이 아니라 예수님은 계시지도 않는데 자기들끼리 기분내고 잔치벌이는 제사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마태 9:16-17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부대에 넣어야 둘다 보전되느니라
요즘 교회는 자기 기분 내는 모임으로 변해 버린 것 같습니다. 안으로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려는 모든 시도들이 있습니다. 교회만 오면 세상의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될 듯이 보이도록 그렇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한분으로 인해서 천국이 아니라 천국을 아예 눈이 보이는 수준으로 만들어 갑니다. 예수님과 죄인들이 식사하는 모양이 아니라 예수님 빼놓고 자기들끼리 천사들처럼 되어서 노는 것입니다.
그런 놀이에 예수님 끼어들면 판이 깨집니다. 제사놀이에 긍휼이 오면 판이 깨지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그러면 판 다 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와같이 죄인들과 같이 잡수시는 것은 이와같은 긍휼의 밥상 말고는 모든 밥상을 다 깨뜨리겠다는 것입니다.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풍조에 휩싸이지 말고 이와같은 주님의 긍휼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얼마나 줏대가 있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능력이 있습니까? 우리 예수님이 능력이 있으신데 왜 쓸데없는 짓들을 그렇게 합니까? 학교를 짓고, 경로당을 짓고, 복지관을 짓고, 상담실을 운영하고(이런 것을 한다고 뭐라는게 아니라), 이렇게 이런 것들을 해야 복음이 전해진다는 그런 발상을 예수님이 조금이라도 가지셨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긍휼을 베푸시는 예수님 모신 교회가 세상한테 잘보일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잘보이려면 세상이 교회한테 잘보여야 합니다. 교회가 복되지 세상이 복됩니까? 그런데 왜 자꾸 세상풍조를 따라가려고 합니까? 기껏해야 제사상이나 차리는 것을...
교회가운데 예수님 계십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온전한 긍휼을 입은 사람들이, 예수 없고 긍휼이 없는 죄인들한테 잘보일것이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아부를 떨고 왜 그렇게 못난짓거리들을 하는지 모릅니다. 교회가 문제를 해결해 주는데면 그렇게 문제가 많은 데밖에 더 됩니까, 그런 교회 누가 나옵니까? 놀러나 나올까 구원받으러 나옵니까? 교회가 무슨 병원입니까? 직업상담소입니까? 아니면 심리치료해주는데 입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받음으로 온전한 사람들, 죄사함받았기에 온전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가 아닙니까. 그 온전함과 그 온전함을 주시는 예수를 자랑하지 못하면 무슨 전도입니까? 예수님께서 병든자를 부르러 오셨습니다. 병원을 차려놓은 듯이 하고, 여기 오면 치료해준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발로는 절대로 나올수 없는 죄인들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흔히들 사람들이 하는대로 쓸데없는 노력들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에게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 쓰신 말씀뿐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주시는 죄사함의 긍휼뿐입니다. 그것을 알리시고 그것을 자랑하시고 그것 때문에 모이기에 힘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올해도 줏대있게 삽시다! 주님의 긍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