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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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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화력 |
일체 생령을 건지는 길 | |
정신의 의식주 |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삼학 공부를 다 하고 있습니다. 쥐나 고양이도 다
삼학을 합니다.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도 삼학으로 미리 연마를 합니다.
개구리가 파리를 잡는데 가만히 있다가 혀가 나와서 잡습니다. 이것이
다 수양 연구 취사가 다 된 것입니다. 도둑놈들도 삼학을 잘 합니다.
그 집의 식구들이 몇 시에 있는지 휴가를 갔는지 안 갔는지 미리 준비와
연구를 철저히 합니다. 그런데 수양력이 부족하면 도둑질을 하다가
걸려버립니다. 도둑이 집에 들어 갔다가 집주인이 소리를 지른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술을 먹고 자다가 잡힌 경우도 있습니다.
도둑도 삼학 공부가 필요합니다. 자동차도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는 것이
삼학입니다.
고양이 같은 동물이나 도둑이나 보통 사람들은 그때만 합니다.
우리 대종사님과 불교의 서가모니 부처님은 삼학 공부를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게 지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직업에서 돈을 벌 때도 회사
입사 준비를 할 때도 대학생이 시험 공부를 할 때도 또는 가정 주부가
집안 일을 할 때도 하다못해 운전을 할 때도 삼학 공부가 필요합니다.
내일 제가 제주도를 가게 되었습니다. 서울교구 주임교무님들과 함께
갑니다. 그래서 삼 일간 여행인데 그 곳에 가면 선물을 줄 사람이
있어서 선물은 뭘 챙길까? 옷은 뭘 입을까? 피닉스 페밀리에서 기도식을
한다고 법복까지 입고 오라고 하니까 정복도 있어야 하고 그래서 신발도
두 켤레 챙겨야 하는 것 등등 차분하게 연구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일
당황하겠죠? 여행 하나 하는 것도 삼학 공부가 필요합니다.
오늘 화요 공부방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오는 것도 삼학
공부가 안 되면 늦거나 못 옵니다. 오늘 비가 온다고 뉴스를 미리
들었으면 우산도 챙기고 도로가 막히니까 시간 계산을 합니다.
이것이 삼학 공부인 것입니다.
장사꾼도 삼학 공부를 잘해서 손님이 물건을 살 사람인지 안 살
사람인지 직감적으로 안다고 합니다. 저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남을 사람인가? 갈 사람인가? 얼마 동안 버티다 사라질
사람인지 좀 보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힘 조절을 합니다. 옛날에는 힘
조절을 못했습니다. 막 가져다가 퍼 부었습니다.
요새는 그러지 않고 힘을 조절합니다.
실력 있는 권투 선수를 힘 조절을 합니다. 마라토너가 처음부터 힘껏
달리다 나중에 지쳐서 꼴등 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힘 조절을 합니다.
레프트 라이트를 날리고 주위를 돌다가 언제 어퍼컷을 날리고 언제
원•투 스트레이트로 몰아 붙이기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상황을 보면서
힘 조절을 합니다. 이것이 다 삼학 공부입니다.
탁구를 잘 치는 사람은 상대방의 약점이 무엇인지 봅니다. 백이 약하면
백 쪽으로 계속 공을 줍니다. 컷이 약하면 컷을 합니다. 드라이브가
약하면 드라이브를 겁니다. 한 선수가 컷을 할 때 상대방의 실력이
비슷하면 같이 컷 밖에 못합니다. 그러나 실력 있는 선수는 드라이브로
받아 칩니다. 상대보다 더 강하게 밀어버립니다.
경계가 왔을 때 힘이 없는 사람은 당합니다. 그런데 힘이 있는 사람은
경계가 왔을 때 그것을 바꿉니다. 경계가 왔을 때 그 경계가 걸림돌이
되냐? 디딤돌이 되냐? 이것은 그 사람의 에너지의 문제입니다.
그 에너지가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이 에너지입니다. 경계가 왔을 때
바로 공부할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상처가
되어서 괴로워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힘이 있으면 드라이브를 걸어 버립니다.
왜 쩨쩨하게 컷을 하냐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마음에 힘이 있고 정신에 힘이 있고 삼학에 힘이 있으면 상대는
문제가 안 됩니다. 내가 부족하니까 밀리는 것입니다. 바둑도 실력에
차이가 있으면 고수가 하수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습니다. 삼학의
실력, 즉, 마음의 실력 ‘힘력力’자입니다. 정신의 자주력, 사리의 연구력,
작업의 취사력. 힘이 있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힘이 없으니까
‘그럴 수 있느냐? 너는 나쁜 놈이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물을 독사가 먹으면 독이 되고 젖소가 먹으면 우유가 됩니까? 똑 같은
물입니다. 내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에 의해서 독이 되기도 하고 우유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대중에게 박수를 받은 사람과 감방에
있는 사람은 또 같은 경계를 받은 것입니다. 똑 같은 경계가 왔는데
그것을 젖소처럼 우유로 만든 사람, 디딤돌로 삼은 사람은 자기의 큰
자산이 됩니다.
오프라 윈프리 같은 사람은 자기의 경계를 자산으로 삼아서 큰 성공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오바마에게 준 표가 160만 표라고 합니다.
오바마의 책 소개하니까 베스트 셀러가 되고.. 그 사람의 영향력이
그렇게 큰 것입니다. 그 사람은 경계를 디딤돌로 삼아서 극복 했습니다.
그런데 감방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 사람에게도 똑 같은
경계가 왔는데 자기 실력이 부족하니까 상처가 되어서 상대를 원망하고
상대에게 해를 입혀서 결국은 감방에 가서 세상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똑 같은 경계를 만나서 오프라 윈프리는 대통령도 당선 시키고
아프리카에 큰 학교도 세웁니다. 그 사람은 사회의 저명 인사는 다
만납니다. 원래는 뉴스 진행자였습니다. 그런데 워낙 재치가 좋아서
담당 피디PD가 토크 쇼에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을 한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경계를 원망했다면 세상을 원망하면서 감방에 있거나
죽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신의 수양력, 사리의 연구력, 작업의
취사력을 신•분•의•성으로 했느냐? 아니면 불신•탐욕•나•우로써 그것을
못 했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오프라 윈프리는 따로 있고
감방에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종사님이 내 놓으신 삼학 공부를 하면 누구나 일원상의 속성,
가서나 쓸모가 많은 창조적인 인재, 아주 유연한 인재,
유익한 인재가 됩니다.
회사도 살리고 교단도 살리고 나라, 사회, 세상도 살리는 사람은 어디서
오느냐? 바로 그것은 그 사람이 삼학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정신의 수양력 하나만 해도 정신의 세계가 상상을 초월
할 정도로 끝이 없습니다. 연구의 세계도 마찬가집니다.
현대 사회에서 삼학 공부는 고양이도 하고 도둑도 하고 택시 기사도
한다고 하는데 문제는 삼학을 제대로 하느냐?, 지속적으로 하느냐?,
일원상에 근간해서 할 수 있느냐?, 스승님의 가르침에 바탕 해서 할 수
있느냐?, 사은에 보은하는 삼학을 할 수 있느냐? 이런 것들이 경전을
바탕으로 하느냐? 제가 교화를 해보니까. 갈수록 삼학 공부의 필요성은
높아지지만 삼학 공부는 점점 안하고 있습니다.
3, 4년 전만해도 아침 좌선에 10명씩 나왔습니다. 오늘 아침 좌선에
저까지 합해서 네 명입니다. 현대사가 각박할수록 필요성은 대두 되는데
필요하면 더 해야 하는데 그런데도 더 안 하느냐? 무엇 때문이죠?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 아닙니까? 삼학 공부의 시작은 바로 대종사님의
개교의 동기에서 출발을 해야 합니다. 내가 물질 문명의 욕심에
매몰되어서 삼학 공부를 뒤로 미루는가? 내가 정말로 영생을 믿고
영생에 대해서 생각하는가? 내가 인과에 대해서 확실하게 믿는가?
이 문제들을 중점에 두고 출발해야 합니다.
그냥 어느 수련단체 같이 마음이 편안하니까 긍적적 사고가 생기더라.
또는 건강이 회복되더라. 이런 차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삼학 공부를 통해서 성불할 수 있는가? 삼학 공부를 통해서
진리를 깨칠 수 있는가? 참나를 회복할 수 있는가? 정말 영생의
행복자로서 언제 어디서나 삼학 공부로 즉, 무시선으로 하려고 하는가?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참 대단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대종사님도 있고 교단의 훌륭하신 선진님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베토벤은 작곡가인데 청각장애자였습니다. 말이 안되잖아요?
좋은 귀를 가진 사람이 명 작곡가가 되든지 음악가가 되어야지
어째서 청각장애자가 세계적인 작곡가가 됩니까? 실락원을 쓴 밀턴은
시각장애자였고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쓴 호머도 시각장애자였습니다.
헬렌켈러는 시각과 청각을 다 잃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들은 보통 사람 수 천 명 수 만 명보다 더 값진 삶을
살고 가셨습니다. 밀턴은 장님인데 실낙원이라는 책을 썼죠. 호머도
장님인데 오디세이를 썼죠. 헬렌켈러는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었는데
얼마나 보통 사람 수만 명 보다 값진 삶을 살다 갔습니다.
데모스테네스라는 그리스의 유명한 웅변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발음이 정확하지 않는 말 더듬이였습니다. 그런데 입 안에 자갈을 문채
발음 연습을 했습니다. 지난 번에 제가 얘기한
연설문을 쓴
호두알을 입에 넣고 연습을 했답니다. 알고 보면 이게 다 삼학
공부입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통령을 네 번 했습니다.
그런데 30세에 소아마비가 와서 반신불수였습니다. 그런데 미국
대통령을 네 번이나 한 훌륭한 대통령입니다.
삼학 공부를 들이대면
신체의 장애나 환경의 조건의 문제는 넘어서는 것입니다.
‘교무님 가난해서, 돈이 없어서, 직장 일이 바빠서, 몸이 아파서..’
이것은 다 아닌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저서를 가장 많이 남긴 사람이 다산
이분이 몇 백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때가 그 사람이 강진으로 유배
갔을 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유배 가서 원망하고 있을 때 대신에 책을
쓴 겁니다. 그것이 다 수많은 경계들 속에서 정신의 수양력, 사리의
연구력, 작업의 취사력이 그 사람을 바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를 하느냐?
대종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은 신분의성이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부정적 세계관, 불신, 어두운 생각들, 소극적인 생각들이
사람들의 성공을 가로 막습니다. 헬렌켈러는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부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
아닌가요? 시각도 잃고 청각도 잃고 또는 다리까지 마비된 사람은
부정적 생각을 가져야 하잖아요? 그런데도 그 분들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신념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신분의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좌선 며칠 하다가 말아버리고 헌배 며칠 하다
말아버리고 사경 며칠 하다가 말아버리고 교당 나오다 말아버리고 법회
보다가 말아버립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특별한 것을 중요시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TV를 보면서 별 생각을 자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떴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다 떴습니다. 그 사람이 TV에 나왔을
뿐입니다. 이미 다 소중한 존재고 이미 일원상이 갊아져 있고 이미 다
뜬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존재가 무한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TV에 나온 사람들을 보면서 대단하다며 박수 치면서 부러워하는데
나라는 존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대종사님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장 긍적적 사고입니다. 대종사님이 알려주신
긍정적 사고는 바로 믿음입니다. 긍정은 믿음이다. 부정은 불신이요
원망입니다. 우리들에게 사은에 대한 긍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같은 긍정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제가 실패한 사람들,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부정적입니다.
감사보다는 원망을 용서보다는 분노를 사랑보다는 증오를 박수
치기보다는 시기와 질투를 칭찬보다는 비난을 웃는 얼굴보다는 화난
얼굴로 현재를 바라보기 보다는 과거와 미래에 집착합니다. 현재 오늘은
불충실 하면서 날마다 과거 것만 울려먹고 미래 생각만 합니다.
그래서 일과 속에서 찾지를 못합니다.
‘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밥 먹고 똥 싸는 것에 있느니라.’ 스님이 답했습니다.
‘에~이 그건 나도 해요.’
‘너는 밥 먹을 때 딴 생각하지? 난 안 한다. 너는 똥 쌀 때 딴
생각하지? 난 똥만 싼다.’
도가 어디에 있냐? 일과에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수양시간을 갖고
낮에 보은하고 저녁에 참회 대조하는 그것이 가장 큰 공부입니다.
그것이 상시응용 주의사항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것만 하려고 어디
훈련을 좀 갖다 와야겠다. 어떤 특별한 책이 있다더라. 특별한 사람이
있다더라. 그것들이 요행수, 어리석음입니다.
제가 오늘 신문에서 귀농 운동의 제창자로 생명·평화 운동을 펼쳐 온
시작으로 귀농 운동과 생명평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안 한 것이 없습니다.
평생 ‘운동’의 길을 간 사람입니다.
< - 10여 년 전부터 ‘마음’이라는 화두와 씨름하면서 마음이라는 것과
씨름하면서 그는 물질 세게의 근본 바탕이 마음이며 세상을 바꾸려면
자신의 마음부터 바꿔야 함을 깨달았다. 그런 각성은 아바타, 오쇼
라즈니쉬 그룹의 각성 인텐시브, 야마기시 공동체의 연찬 등 국내외의
여러 명상 프로그램과 네팔, 라다크, 인도, 바이칼 등지의 ‘영성 순례’로
더욱 또렷해졌다. 체험도 했다. - >
이 분이 안 다닌 곳이 없습니다. 다 돌아 다녔습니다. 이분은 결국
물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구나 마음으로 해결될 문제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지리산 마음 학교를 열었습니다.
일생 다 살고 흰머리 나버렸는데 이제야 학교를 열었습니다.
대종사님은 진작에 이것을 말씀하셨죠? 그것도 마음의 원리를
대소유무로 정확하게 밝혀서 견성, 양성, 솔성으로 정확히 해서 어떻게
된다고 다 밝혀주셨습니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사은의 배보은에서
영생과 인과까지도 다 밝혀놓으셨습니다.
지금 유럽이나 미국에서 동양을 배우자는 현상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티벳의 달라이 라마가 하바드에 가서 강연을 한다면 몇 만 명씩
모여든답니다. 1, 2분이면 티켓이 다 동이 난답니다. 그것은 바로 서양
사상이 한계가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버드대 두웨이밍 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자연과 종교를 아우르는 포용적 인본주의가 세계를 이끌어야 합니다.
서구의 배타적 인간 중심주의는 한계에 이른 지 오래입니다.”>
배타적 인본주의가 아니라 이제는 포용적 인본주의가 맞는다는 것입니다.
인본주의가 아니라 ‘대세계주의’라고 해야 맞습니다.
또 < 서구의 계몽적 인본주의가 이성에 대한 지나친 믿음으로 정신을
소홀히 했고 세속화로 흘렀다” >
이것 때문에 미국이 앞으로 패권을 세계에 내줄 것입니다. 우리가 말한
정신 수양에 있어서 미국을 지배하는 정신이 바로 세속화로 흐른
정신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나라가 망하지 않느냔 말입니다. 그렇게 잘
나가던 나라가 꺾어졌습니다. 벌써 중국이나 인도에게 내줄 것입니다.
유럽은 하나로 뭉쳤습니다.
한 개인도 정신에 따라서 그 사람의 행복이 달라지고 국가도 그 국가에
흐르는 정신에 의해서 달라집니다. 우리나라 돈을 보면 어떤 인물이
있습니까? 퇴계 이황, 율곡
미래를 밝게 예측해 줍니다. 그 물질적 가치의 돈에 문화적 가치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정신 문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원불교 교도들의
70~80%는 아침에 다 선을 합니다. 특히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선을
합니다. 우리나라는 원불교 교도의 20~30%만 선을 합니다. 이것은
미국이 내버린 물질적 가치가 우선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정신적
가치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는 아직도 미국의 쓰레기에 매몰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대종사님은 언제 이야기 하셨어요? 원기 100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때 말씀하신 것을 아직도 우리는 쫓아가고 있습니다.
서가모니 부처님이 2500여 년 전에 내버린 부와 명예를 쫓아가고 있고
대종사님이 백여 년 전에 말씀하신 물질 문명에 우리가 노예 생활을
하면서 선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삼학 공부를 만난 사람과 못 만난 사람은 보물을 찾은 것과 못 찾은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잘 모릅니다. 처음에는 수행이라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 정신 수양은 수행의 기초가 됩니다. 사리
연구는 수행의 문을 열어줍니다. 작업 추사는 수행의 결과가 그 곳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쉽게 말하면 열매를 따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행의
기초가 되는 수양에 대해서 현대인들은 조금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공부, 정신수양을 잘 하면 몸과 뇌가 바뀐답니다.
원불교 삼학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원불교의 삼학은
불교의 삼학과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불교는 ‘계•정•혜’인데
왜? 원불교는 ‘정•혜•계’입니까?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합니다.
혜를 끝에 둡니다. 그것도 참 일리가 있습니다.
여우 같은 지혜가 없는 곰 같은 사람과는 같이 못 삽니다.
젊은 사람들께 선물 하나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회사 할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정신적 약자는 돌봐주는 것이지 같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정신적 약자는 자선 사업으로
도와주는 것이지 같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여러분들이 가계를
운영 하던가 사업을 운영하려면 정신적 약자는 지원만 해주고 같이
일하지 마세요. 반대로 같이 일할 때에는 철저히 정신적 자력이 있는
사람,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하면 조금 실력이 딸리는데 월급 싼 사람
쓰지 마시고 월급 더 주고 좋은 사람 쓰세요. 그것이 이익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이 되세요.
왜 삼성의 전무는 50~60억씩 받습니까? 너무하지 않습니까?
왜
천억을 법니까? 너무 하죠? 같은 사람인데.. 물론 좀 너무 한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만한 가치를 한다는 것입니다. 존엄성에 있어서는
모든 인간이 다 같습니다. 다 일원상의 존재적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그릇, 그 사람의 정신적 가치, 그 사람의 역할은
수 천만 명보다 한 명이 나을 수 있습니다.
대종사님 한 분의 가치는 그냥 보통 사람 한 분의 가치와는 다릅니다.
삼학이라는 것은 나의 가치를 최대한 업그레이드 하는 것입니다. 영통을
통해서 맑은 정신, 밝은 지혜, 참나를 가져다 걸림 없이 쓸 수 있습니다.
사리 연구를 통해서 어디 가서나 밝게 빠르게 분석해서 쓸 수 있습니다.
정말 몇 배 차이가 납니다. 작업 취사도 그렇습니다. 습관 하나 떼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늦잠 자는 습관 하나 떼기 어렵죠?
오늘 제가 카페에 들어 갔는데 일반 2단 글에 ‘헌배 양에 집착하지 말고
매일 꾸준히 하자.’ 그것은 뭐죠? 대충 몇 배 안 하겠다는 소리죠?
그 다음에 ‘좌선이 지루하니까 운동을 하겠다’고 합니다.
대종사님이 벌써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한 번 소개 했는데
‘나를 만났으나 나하고 천리 밖에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누구냐?
좌선하다가 실증 나서 운동으로 돌린 사람이다.’
아직 정신 수양의 가치를 이해를 못 하는 것입니다.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잠깐 있다가 마는 것입니다. 정신이라는 것은 영원 불멸한
것입니다. 그 가치에 대해서 아직 모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신 수양은
안 하고 운동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운동도 해야 하지만 정신 수양이
빠진 운동은 정신 수양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 아직 모른 것입니다.
원불교 수양 연구 취사의 특징은, 첫째가 삼학은 동정일여 動靜一如 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핵심은 정(靜) 일심(一心), 동(動) 정의(正義)
입니다. 수양이 정시 수양에만 멈춰있거나 동시에만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연구도 마찬 가집니다. 책보는 연구는 잘하고 시험은 잘 보는데
쓸모 있는 것을 개발하지도 못하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도 없다면 연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취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과 정이 아울러야 합니다.
원불교의 삼학은 동정일여의 삼학입니다.
둘째가, 이사병행 理事竝行 입니다.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이치만이
아니라 일도 병행한다는 말입니다. 이치를 보아다 일 잘하자는 것이고
그 일 속에서 이치를 발견하자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을 보면
일은 일이고 이치는 이치입니다. 서로 따로 놉니다. 이 둘을 병행하자.
셋째, 영육쌍전 靈肉雙全 입니다. 삼학 공부는 영육쌍전이다. 수양도
정신의 수양과 육신의 수양이 같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원래 같이
되어 있습니다. 그 증거는 많이 있습니다. 수양을 해서 진경에 들어가고
제대로 하면 깨달음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건강도 엄청나게 좋아지고
기억력도 아주 좋아지고 피부도 좋아지고 맑아지고 밝아집니다. 생각도
아주 적극적 의지로 바뀝니다. 사람은 몸이 안 좋아도 부정적으로 되고
수양을 하지 않아도 부정적으로 바뀝니다.
동정일여 動靜一如
이사병행 理事竝行
영육쌍전 靈肉雙全
알고 보면 부정적인 것이 죄악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사색형은
잘 들으세요. 자기 스스로는 정확하고 차분하고 실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재다가 끝납니다. 예를 들어 독화살이 나에게 날라왔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어디서 날아 왔지? 누가 쏘았지? 독의 종류는
무엇이지? 얼마나 깊이 박혔나? 이것 연구하고 있어야 해요?
- 아뇨.
뭐 해야 해요?
- 빨리 빼야 해요.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빨리 빼야죠. 제가 예를 들었지만 이런 사람
많습니다. 지금 빨리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딴 데다 마음을 뺏기고
있습니다. 과거에.. 미래에.. 아니면 재고만 있습니다. 시간은
다 가버립니다. 이것은 이치와 일이 같이 연결이 안 된 것입니다.
화살 얘기를 하니까 그냥 답이 나오잖아요. 바로 뽑아서 치료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현실에서는 분석하고 있는 사람 천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화살 맞은 줄도 모릅니다. 죽은 지도 모르게 죽었습니다.
이해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넷째는 정각정행 正覺正行 입니다. 정각 제대로 깨쳐야 한다.
정신 수양을 해서 제대로 맑혀서 일과 이치에 밝게 깨달아서 실지로
작업 취사로 써 먹어야 한다. 사업 하는 사람은 돈을 벌어야 하고
발명하는 사람은 발명을 해야 하고 연구하는 사람은 논문 잘 쓰고 시험
보는 사람은 시험 점수가 잘 나와야 맞습니다. 이것이 마음 공부입니다.
원불교에 다니니까 부모님 섭섭하게 하고 원불교에 다니니까 학교
성적이 떨어지고 원불교에 다니니까 회사에 적극적으로 못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복합 유념을 못합니다. 무념 할
자리에는 유념 해버리고 유념 할 자리에는 무념 해 버립니다.
그런 사람 참 많습니다.
생각 안 해도 될 것을 무슨 생각이 그렇게도 많은지 번뇌 계교가 얼마나
많은지 망념과 잡념이 꽉 찼습니다. 그 속에는 희로애락애오욕 7정이
서로 섞여서 돕니다. 오죽하면 108번뇌라고 하겠습니까?
진짜 생각을 해야 할 것은 생각은 안 합니다. 이것이 유념 공부와 무념
공부입니다. 크게 생각하면 요란함과 어리석음과 그름이 나오는 것은 이
두 가지 때문입니다. 비울 자리에 비워야 하는데 비우지 못하고 번뇌로
꽉 찼습니다. 알 자리에 알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은 멍해 버립니다.
원불교 삼학 공부라는 것은 따로 있는 이론이 아닙니다. 온갖 관념, 상,
생각을 비워버리라는 것이 수양입니다. 공(空)입니다. 무념 공부입니다.
반면에, 원(圓) 공부로써 유념 공부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유자재로 종횡무진 가져다 써라. 이 정(正)으로 은혜를 생산 하라는
것입니다. 어디에 묶여 있어서 은혜가 안 됩니다. 그럼 나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냐? 바로 이런 공•원•정이라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공(空) – 무념 공부 - 수양 |
원(圓) – 유념 공부 – 연구 |
정(正) – 유무념 공부 – 취사 |
본래 그렇게 번뇌 망상이 많으냐? 무슨 계교심이 많은지..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한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바둑이나 장기를 할 때는 원(圓)
공부를 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두면 상대방이 이렇게 두겠지.. 그 다음에는 이렇게 되니까
이렇게 두어야겠다’고 유념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멍청한 사람은 바둑을 둘 때 생각 없이 둡니다. 당구를 칠 때도
그냥 쳐 버립니다. 축구 할 때도 생각 없이 발로 찹니다. 그런 것을 할
때는 유념 공부입니다.
그 다음에는 온갖 번뇌를 비우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수양이라는 것은
일정심 一定心 입니다. 일심은 일심이되 딱 정하는 마음입니다.
요란하고 산란한 마음이 아닙니다. 텅 빈 마음입니다.
왜 무념 공부가 안 됩니까? 나라는 것에 묶여서 비울 줄을 모릅니다.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가 재미를 보려고 온갖 잔머리를 쓰는 것입니다.
머리 쓸 자리에는 안 쓰고 머리 안 쓸 자리에는 밤낮으로 쓰고 있습니다.
공(空)은 단순하게 살자는 것이고 원(圓)은 생각 있게 살자는 것입니다.
공은 생각 없이 살고 원은 생각 있게 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사는
사람입니다. 생각 없이 살아야 하고 생각 있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 없이 살아야 될 때 온갖 번뇌 망상으로 가득 차고 생각을
해야 할 자리에는 몰라라 합니다. 환장할 노릇입니다. 이것이 삼학
공부입니다. 이해 하시겠어요?
원불교를 다니면서 영과 육을 하나만 취한 다던가 일과 이치에서 하나만
있다든가 동정간에 정만 하고 끝난다면 대종사님이 섭섭해 할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세 가지를 제대로 할 때
원만구족입니다.
정신에 대해 들어가겠습니다. 분별 이전의 자리를 정이라고 말합니다.
신은 분별. 영령 한 것을 말합니다. 신은 귀신 신자입니다. 정은 분별
이전의 자리를 말한 것이고 신은 영령 한 분별의 자리. 정은 고요한
자리요. 적적한 자리요. 신은 성성한 자리입니다. 그래서 정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정신 수양은 적적 성성, 성성 적적한 자리에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수기망념 修其妄念
양기진성 養其眞性
수양에서 수는 망념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번뇌와 잡념을 비우는
것이다. 이것이 수입니다. 수는 ‘닦을 수’자도 되고 ‘때울 수’자도 됩니다.
때운다는 것은 구멍 뚫린 것을 막아버린다. 망념이 나면 그 구멍을
막아버린다는 뜻입니다.
양은 진성이라. 진성이라는 것은 참 성품을 기른다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망념과 진성은 서로 반비례합니다. 즉, 망념이 많으면 진성이
숨어버립니다. 진성이 드러나면 망념이 숨어버립니다. 염불을 하고,
헌배를 하고, 좌선을 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람들 마음이 복잡하고 괴롭고 힘드니까 술 먹고 놀러 가고 잡니다.
그런데 그 해결책은 여기에 있습니다. 망념 때문에 괴롭습니다. 진성이
드러나면 다 해결됩니다. 헌배를 200~300배만 해도 벌써 진성에 어느
정도 들어 갑니다. 번뇌가 가라 앉습니다. 참 묘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고통스럽던 것이 밝아집니다.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으로 바뀝니다
원문으로 들어 가겠습니다.
< 정신이라 함은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를 이름이요 - >
고요하다는 것은 욕심이 없다는 겁니다. 욕심이 흔적이 없고 번뇌가
없는 것을 고요하다고 표현합니다. 욕심이 없기 때문에 맑고, 맑기
때문에 고요합니다. 그래서 편안해진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욕심이
많으니까 맑지 않고 맑지 않으니까 요란합니다. 머리가 터지려고 합니다.
그것은 나를 중심으로 한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두렷하다는 것은 성성하다는 소리입니다. 신령스럽게 밝다. 묘하게 귀신
같이 압니다. 개도 주인과 도둑을 그냥 알고 대하는 것이 다릅니다.
바다에 있는 유정물이라는 것은 다 안다고 했습니다. 바다에 있는
물고기도 누군가 잡으려고 하면 다 알고 안 잡히려고 자기를 보호합니다.
과학이 그것을 다 알지 못하죠?
두렷하다는 것은 ‘신령스럽다’와 같습니다. 이것을 성성이라고 말합니다.
분별하는 것, 아는 것입니다. 지금 제 목소리를 듣고
‘제원 교무님이구나’라고 아는 것이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신이라고도 하고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아는 자체를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생각이 일어납니다. ‘아 교무님 목소리가 좋아’,
‘목소리가 찢어지네’ 이런 생각이 들면 그것이 분별성입니다.
‘아 교무님 목소리구나’ 여기까지가 두렷한 것입니다.
그런데 분별성은 ‘교무님 목소리가 좋아. 안 좋아’ 분별하는 것입니다.
희로애락애오욕 7정이 거기에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서 지하철에서 예쁜 여자가 대호 교우의 곁을 지나가면 바로
분별 - ‘앗 여자다’,
칠정 - ‘윽 예쁘다.’
감정 - ‘아!.. 저녁에도 계속 생각난다.’ 주착심입니다.
‘너무 예쁜데.. 집이 어디지? ^^;’ 이것이 진짜 감정의 노예입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감정의 노예인줄 모릅니다. 내 자식의 감정에
묶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모두 감정의 노예입니다.
주착심을 업력이라고도 합니다. 영어로 에고Ego라 그럽니다. 사람들은
개성이라고 합니다. 저 사람은 저런 개성이 있다는 것은 습관이 그렇게
굳어졌다는 것입니다. 주착심은 습관입니다. 그 습관이 업력이 되어서
개성이 되어서 에고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을 중생들은 ‘나’라고
합니다. 이 나가 자기인 줄 압니다.
그런데 참나는 고요하고 적적한 성품과 정신입니다. 이것은 영원 불멸한
것입니다. 이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에고가 자기인 줄
알고는 ‘교무님 저는 강연을 원래 못해요.’라고 저에게 말합니다.
또는 ‘저는 원래 글을 못써요.’, ‘저는 원래 노래를 못해요’, ‘저는 원래
적극적이지 못해요.’ 이것들은 다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길들여진
것입니다. 습관 지어진 것입니다. 원래는 고요하고 두렷합니다. 그래서
대종사님은 심지는 원래 요란하고 어리석음과 그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분별성이 반복을 하면 주착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저를 바라볼 때
‘아 제원 교무님이구나’ 하면 분별입니다.
‘아 제원 교무님이 좋아.’ 좋다라고 하죠. 분별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볼 때마다 좋아.’ 이것이 주착심입니다. 그러니까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괴롭힙니다.
그래서 정신이라는 것은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고요하고 두렷한
경지라는 말입니다. 분별성과 주착심은 정신이 아닙니다.
참 정신을 이 둘을 뛰어 넘는 것이고 이것이 정신입니다.
지금 제 목소리를 듣고 ‘아 그렇구나’하고 아는 것을 마음이라고 하는데,
이 마음은 정신과 함께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마음이 칠정의
마음입니다. 선악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은 수양한다. 정신을
집중한다. 정신을 통일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대조한다. 마음이
작용한다. 마음 공부라고 표현합니다.
왜 그러냐? 만약에 악한 마음을 수양하거나 악한 마음에 집중하거나
악한 마음을 통일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면 히틀러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집중해야 하는데 선심과 악심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끊임없는 공부를 해야
하고, 끊임없는 대조를 해야 합니다. 순간 순간 지금 이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공부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선한 마음 악한 마음까지는 잘 합니다. 주착심까지는 잘
합니다. 그런데 정신 수양, 정신 집중, 정신 통일은 안 합니다. 그러니까
정신의 가치에 대해서 모릅니다. 나눠준 프린트 맨 위에 보면
성품이라고 있습니다. 성품을 ‘일념미생전자리’라고 합니다.
여기는 ‘아 제원 교무님이구나’하는 생각 이전 자리입니다. 분별 이전의
이것을 성품이라고 합니다. 일념미생전이라고 합니다. 한 생각 일어나기
전 마음을 성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시선법에 보면 ‘분별 주착이
없는 성품을 오득하여’ 이렇게 나옵니다. 분별 주착이 없는 성품이라고
합니다. 성품은 단련한다. 회복한다. 오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불교를 복성설이라고 합니다.
저를 바라볼 때 저를 생각하기 이전의 성품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를 바라보니까
정신으로 ‘아 제원 교무님이구나’를 압니다.
거기서 마음에 들면 ‘제원 교무님이 좋아’
다음에 뜻을 세우고 ‘제원 교무님 따라서 열심히 공부해야지’
그 다음에 내가 안이비설신의 6근으로 움직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안이비설신의 6근이 색성향미촉법이라는 6경계를 만나서
즉 여러분의 눈과 귀가 저를 보고 들었죠? 그래서 거기에 대한 식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 제원 교무님이 좋다, 싫다’가 기억이
됩니다. 제 7식까지는 살아 있을 때까지만 씁니다. 여러분이 살아 있을
때만 가치 있게 생각하기 때문에 제 6식인 마음의 세계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런데 영생의 세계 내생의 세계 8식부터는 다음의 생까지
가지고 갑니다. 이것을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 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아뢰야식 8식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업을 지어도 인과로 선업을 짓느냐? 악업을 짓느냐?
또는 수행을 통해서 성품의 세계를 깨쳐서 정신 수양을 했느냐?
그것은 그 사람의 내생에 자기 것이 됩니다.
그런데 정신 수양도 안하고 성품도 깨치지도 못하여 마음이 번뇌 망상
속에서 산 사람은 죽으면 끝입니다. 그래서 죽어서는 전도몽상이 되어서
사람 몸도 못 받는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일반 수련 단체와는 달리 인과와 영생이라는
기초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품, 정신, 마음, 뜻. 순으로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의 관계입니다. 사실은 이것들이 다 나입니다.
나를 설명한 것입니다.
< - 수양이라 함은 안으로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이하며 - >
제가 설명 다 드렸습니다.
< - 밖으로 산란하게 하는 경계에 끌리지 아니하여 - >
산란한 경계는 무엇입니까? 경계는 사은이고 사은이 경계입니다.
그런데 욕심 경계에 끌렸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주착심에 걸린 내가
욕심 경계에 끌렸습니다. 무엇이? 요란해진 마음이..
그래서 거기에 끌리지 말고 두렷하고 고요한 본래의 정신, 참나.
이것을 그대로 양성하자는 것이다. 분별성과 주착심에 놀아나지 말자는
것입니다. 에고Ego에 묶이고 업에 묶이고 습관에 묶이고 선한 마음,
악한 마음을 넘어선 고요하고 두렷한 성성 적적한 그 본래의 정신을
양성하는 것이 바로 정신 수양인 것이다.
양성이라는 것은 자기 본래의 고요하고 두렷한 온전한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자는 것이다. 못난 내가 새로 만들어서 수양을 해서 부처로
만들자. 이것이 아닙니다. 헬렌켈러가 따로 있고 루스벨트라는 사람이
따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나도 헬렌켈러와 루스벨트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능력이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못난 나를
수행을 통해서 만들자가 아닙니다. 여기에 앉아계신 분들이 삼학 공부를
제대로 하면은 얼마든지 깨달음도 얻을 수 있고 정말 복족족 혜족족한
큰 불보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체생령을 건지는
것입니다. 나를 구제해 주는 분이 대종사님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여기에 나왔잖아요? 나는 고요하고 두렷한 정신 그것이
나라는 말입니다. 아까 이 마음 저 마음이 내가 아닙니다. 분별성
주착심이 내가 아닙니다. 참나는 것은 고요하고 두렷한 온전한 정신
그것이 나요 죽어서도 그것은 계속 나입니다. 거기에 공을 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정신에 공을 들여야지 왜 마음에다 업에다가 에너지를
쏟고 있느냔 말입니다. 이것을 알면 하게 되어 있습니다.
체험이 있기 전까지는 신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원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원력이라는 것은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원력입니다.
나는 이렇게 개같이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이렇게 중생으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삶을 개선해 보겠다고 하는 강한 원력입니다.
원력의 힘으로써 정신 수양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신(信)의 힘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본래 일원상이라는
강한 긍정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으로 하다 보면 체험이라는 선물이
옵니다. 그러고 나면 알아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체험이 오기
전에 투자도 별로 안 한다면 서원과 원력과 신이 아니라 원력보다는
욕심이요 신보다는 불신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체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정신에 대해서도 모릅니다.
‘교무님 얼마나 바쁜지 아십니까? 자야 해요.’
방바닥에 본드 칠한 것처럼 딱 붙어 있습니다.
질문하세요.
요즘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곳은 많아도, 자기 자신에 대해
알려주는 곳은 별로 없습니다. 제가 오늘 설명한 것 얼마나 이해 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한 사람당 천 만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내가 아깝습니다. 내 말 뜻이 무슨 말인지 이해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n 질문 과 답변 =========================================
Q_박원허: 단회를 할 때, 정신 수양의 과목에서 사람마다 특성이
있으니까 각자의 특성에 맞는 수양을 하면 된다고 말했었는데,
오늘 창훈 교우님 강연 원고를 보니까 전신 수양의 과목에 기본 과목,
실용 과목, 기타 과목으로 나뉘는데 이렇게 나뉜다고 생각하면 실제로는
수양에 선후가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A_교무님: 제가 오늘은 정신의 원리와 가치에 대해 설명을 했는데,
정신 수양을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는 다음주에 설명을 할 것입니다.
정시와 동시, 염불과 좌선의 관계. 이런 것들이 나중에 나올 것입니다.
나는 좌선만 하겠다, 아니면 나는 염불만 하겠다는 생각은 다 틀린
생각입니다. 표리의 관계입니다. 염불은 좀 산란할 때 좌선은 좀더 깊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몽근 대패냐 거친 대패냐 대종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까 제가 긍정의 마음을 이야기 했는데 긍정의 마음은 믿는
마음입니다. 부정의 마음은 불신의 마음입니다. 원력의 마음은 조촐한
서원의 마음이요 욕심의 마음은 탐욕의 마음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달라집니다.
제가 원불교를 처음 만났을 때 누가 이처럼 설명해주었다면 정말로 미쳐
버렸을 것입니다. 나만 흥분해 있는지 모르겠는데.. 세상에나 참나를
설명해주는 대종사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런 스승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붕어가 물 먹고 뻐금뻐금 하듯이 ‘혼자 죽어라 하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
그런 분들은 인연이라도 잘 짓고 가세요.
원불교는 안 믿는 것 보다 믿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원불교 공부를
제대로 하면 보통 잘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엄청난
은혜를 입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이 새부처님으로 오셔서
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대종사님이나 정산종사님이나
우리 대산종사님은 사실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분들이 내놓으신 법문을 우리가 만나서 공부를 하는데 부정적인
생각으로 현실의 물욕에 빠진 생각으로 아니면 자기의 작은 가치관으로
잰다면 별 볼일 없습니다. 그것은 신심도 아니고 서원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타이핑:
편 집:
|
첫댓글 감사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
^^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v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b
성은교우님, 정원교우님 수고많으셨어요 >.<
혜민교우님도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ㅅ-ㅅ*
빠진화요방 강연 공부 잘 했읍니다 감사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