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반 격 - 1
1972년 3월 30일 오후 7시.
백수웅이 그린파크에서 대통령 특별 담화를 시청하던 시간,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소회의실에서 몇몇 수뇌부를 모아 놓고 회의를 개최하고 있었다.
회의 주제는 이 날 발표한 대 북한 평화 원칙 제의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에 관한 것이었다.
참석자는 특별 담화 발표 때 배석했던 각료들이었다.
먼저 윤주영 문화 공보부 장관의 보고가 있었다.
"각하, 대단히 열렬한 성원의 반응이었습니다.
북한에 대해 구체적인 제의를 했다는 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며 절대적인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한마디로 '열광'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언론측은?"
"마찬가지입니다. 야당도 외국 특파원들도, 이는 획기적인 제의로
평화를 위한 대단히 고무적인 제의라는 겁니다.
미국 . 일본. 영국 등 우호국 반응은 대단했습니다만,
중공.소련은 아직 침묵 중입니다."
"음, 그만하면 됐어."
한 시간에 걸친 보고가 끝나자, 대통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금년 10월경 나는 정치적인 중대 결정을 내릴 거요.
내 뜻에 반대하는 사람은 내 곁을 떠날 생각인 것으로 알겠소."
10월경 정치적 중대 결심.
이 결심은 대통령 종신제를 단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결단(후에 10월 유신으로 불려짐.)은 국민적 호응을 얻어야 했고,
호응을 위해서는 분명하고 뚜렷한 명분을 필요로 했다.
대통령의 종신제를 위한 국민 설득의 명분, 그것은 통일과 지속적인 경제 성장 두 가지였으며,
대통령은 통일 후에 은퇴한다는 배수진을 쳐 놓기로 한 것이다.
이 설득과 명분을 만들자면 국민들에게 충격을 줄 만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
이후락 정보부장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 감겨진 두 눈 아래의 입술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국 분단 이래 최초의 정부 수뇌부 평양 방문 및 극비 회담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온 승리의 미소였다.
'됐어. 이제 평양에서 박성철이만 왔다 가면 끝나.
통일을 위한 기초 합의서를 만들고 점진적으로 이행해 간다는 발표를
서울평양 양쪽에서 터뜨리면 되는 거야. 통일을 위해 당분간
집권을 더 연장하겠다는데 누가 감히 반대하겠어.'
홀깃, 김종필 국무 총리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몹시 괴로운 표정이었다.
대통령 후계 문제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두 거물 정치인들의 머리는 서로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해 품 속에 자살용 청산가리까지 집어넣고 평양을 갔다 온 이후락 정보부장은,
이미 박 대통령의 분신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지난 '3선 개헌' 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자기 계파들 조직을 위해 만들었던 '복지회 사건'으로
지난 1968년 공직을 사퇴까지 했던 김종필 국무 총리로서는,
실권이 서서히 이후락 정보부장에게로 건너가고 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선 개헌에 동의한다는 입장 수정으로 다시 총리직에 발탁되기는 했지만,
대통령은 이미 김 총리를 적극 견제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각하, 각하의 지도력이 아니면 국민의 힘이 집결되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다시는 통일을 이루지 못할 겁니다."
이후락 정보부장의 결의에 찬 발언이었고, 신중한 김 총리는 시종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이번에도 반대했다가는 영원히 숙청당한다. 그런 수모만은 면하고 싶었고,
기어이 10월경 중대 결심에 동의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장기 집권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어.'
"야당의 반발이 있을 텐데?"
박 대통령이 다시 정보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야당의 동의를 얻어 가며 정치하다가는 1백 년이 지나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야당. 그 당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야당은 신민당이었다.
그러나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박 대통령에게 무려 1백만 표에 가까운 표차로 낙선한 이후,
진산(珍山)계와 반(反) 진산계로 양분돼 극심한 내분을 보여 힘의 결집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40대 기수론'을 펴 온 원내 총무 김영삼(金泳三) 만이 고군 분투하며
야당제 결집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을 정도였다.
"경제는 어떻습니까?"
노범호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중동이 조용해서, 석유 공급에 차질만 생기지 않는다면 매년 10퍼센트 성장은 무난합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남북한 회담만 무사히 치른다면
대통령 영구 집권은 받아 놓은 밥상이나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을 위협한 가장 큰 세력은 야당이었으나,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金大中) 후보가 패배해 일단 급한 불은 꺼 버린 셈이었다.
이제 남은 세력은 일부 급진파 대학생과 지식층, 일부 대학 교수, 그리고 현실 참여파 문인들 정도였다.
이 정도 세력을 두려워할 박정희 대통령은 아니었다. 권력 연장의 집념을 불태우는
그에게는 오직 99퍼센트의 국민 지지를 받는 일 뿐이었다.
반정부 세력 동향에 대한 이후락 정보부장의 마지막 보고는 다음과 같았다.
"한때 민주 수호 국민 협의회가 김재준 . 천관우 . 김정례 . 계제훈 등을 중심으로 활발히 움직이는 듯했지만,
작년(1971년) 10월 위수령과 함께 활동이 위축된 편이고요. 서울대 문리대 교수들이 중심이 된
대학 자주화 선언 운동도, 학생들의 지지는 받고 있지만 국민적 호응은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은 . 신경림 . 김지하 같은 문인들은 [창작과 비평]을 중심으로 제법 움직이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이들을 좌경 문인으로 보고 있어 그 역시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이 정도입니다."
없다. 거칠 것은 없다. 남북 회담만 성공리에 마친다면 국민들의 99퍼센트 지지를 받아 가며
종신 대통령으로 나라를 끌어 갈수있다.
3시간에 걸친 회의가 끝난 다음, 대통령은 이후락 정보부장과 노범호 경제 수석을 밀실로 다시 불렀다.
가장 큰 문제인 남북 고위 회담 준비의 장본인들이었다.
세 명의 정치가들은 이제까지의 여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이 부장, 회담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북측 태도는 어떻고
거듭 말하지만 10월 유신 체제 개혁의 승패 여부는 이번 회담에 달려 있어."
"네, 이제부터 간단히 몇 가지만 보고하겠습니다. 일자가 확정되었습니다.
먼저, 북에서 박성철 제 2 부수상과 수행원 3명이 5월 28일 비밀리 서울에 도착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에서 회담을 개최하기로 했고, 장소는 노 회장께서 심사숙고하고 계시지만,
아무래도 워커힐이나 영빈관 두 곳 중 한 곳으로 선정될 것 같습니다."
"워커힐이나 영빈관?"
"네, 각하."
노범호가 나섰다.
"양쪽 다 장단점은 있습니다만, 국내에서 그만한 시설을 갖춘곳은 없습니다.
워커힐은 뛰어난 경관, 최신 시설이 장점이나, 호텔 뒤쪽에 아차산이 있어 경계 문제가 크며,
영빈관은 시설이나 경관은 그만 못하지만, 보안이나 경비에는 최적입니다."
"좋소. 그들에게 좋은 경치를 보여 주는 것도 인상적일 거요.
제 1 후보지로 워커힐, 제 2 후보지로 영빈관을 선택해 조사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만일 워커힐로 결정되면 본관 북측에 있는 사파이어 별장이 좋을 겁니다."
대통령이 다시 이 부장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회담 이슈는 정리되었나?"
이후락 정보부장이 휴대 서류 가방에서 무엇인가가 기록된 것을 꺼냈다.
"오늘 제의하신 5대 원칙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마침내 남북 회담에 관한 구체적인 스케줄이 잡혀졌다.
1. 장소: 워커힐(제1 후보지), 영빈관(제2 후보지)
2. 일자: 1972년 5월 29일 - 6월 1일(4일간)
3. 회담 내용: 자주 . 평화 . 민족 단결의 통일 지향 3대 원칙하에 상호 중상 비방 및 무력 도발 중지,
다방면에 걸친 교류의 실현 합의, 이런 합의 사항을 토대로 남북 제반 문제를 개선 해결 하고,
합의된 통일 원칙에 기초해 통일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이번 북측 대표로 박성철 제2 부수상이 서울로 와서 협상을 인준하지만,
협상이 원만히 끝나면 7월 초 서울에서는 저(이후락)의 이름으로,
북측에서는 김영주(노동당 조직 지도부장)를 공동 위원장으로 하는
'남북 조절 위원회'를 결성한 후 두 사람 이름으로 합의된 내용을 서울-평양에서 동시 발표
(후에 '7.4공동 성명'으로 불려짐.)하게 됩니다."
이후락의 마지막 보고가 있었고, 대통령은 회담의 성공을 위해 노범호 회장의 적극적인 보필을 지시했다.
박정희 . 이후락 . 노범호 3인의 밀실 회담은 만찬과 함께 끝이났다.
커피를 들며 담소하던 대통령이 갑자기 생각난 듯 노범호를 향해 질문했다.
"노 회장님, 그 먼젓번에 무슨 문제가 있었다고 했죠?
테러리스트인가 뭔가 하는 젊은이 , 백수웅이라고 했던가?"
"네. 각하. 백수웅이란 젊은 아이입니다."
"수사는 얼마나 진전되었죠?"
"포위망이 좁아지고 있습니다만, 서둘러 체포할 생각은 없습니다. 배후 인물을 조사 중입니다.
국내 불온 단체의 사주인가, 아니면 일본조총련의 지시인가가 아직 밝혀지지 않아서요."
대통령이 커피잔을 내려놓고 담배에 불을 붙여 길게 빨아들였다.
"테러리스트 때문에 시끄러워지면 안 됩니다.
회담을 기피하기 위한 제스처라고 북쪽에서 생떼 쓸 우려도 있고,
또 테러리스트 문제로 남북 회담이 있다는 정보가 국민들에게 알려져서도 안 되니까요.
아무튼 조속히 매듭짓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그 문제만큼은 정보부장님이나 각하께서 걱정하시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 아이가 성균관 대학에 다녔다고 했지요?"
"네, 각하 !"
"성균관 대학 학생들의 스타로, 정부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장을병 교수가 있습니다.
백수웅과 장 교수의 접촉 여부도 내사토록 하시오."
"즉시 조사해 보겠습니다."
밀실 회담이 끝나고 세 사람은 헤어졌다.
하늘도 땅도 귀신도 모르는 남북 비밀 회담은 완전히 무르익어 갔고,
박 대통령은 일본에서 잠입했다는 한 젊은 테러리스트에 각별한 관심을 표명했다.
삼선교 자택으로 향하던 노범호가 행선지를 우이동 허열의 집으로 바꿨다.
"기사, 우이동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삼선교를 지나 우이동으로 접어든 노범호는, 화재 사건 이후 서둘러 설치한 임시 파출소를 둘리본 후,
딸 옥진이의 집 차임벨을 눌렀다.
깊은 상념과 비통에 젖어 있던 노옥진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방문에 깜짝 놀라 현관으로 뛰쳐나왔다.
집을 돌보아 주는 비서가 노범호를 안내하며 들어서고 있었다.
노범호는 굳은 표정으로 응접실까지 올라왔다.
"게 앉거라."
"마실 거 준비할까요?"
"아냐, 시간 없어. 잠깐이면 된다."
노옥진이 아버지와 마주 보며 의자에 앉았다.
이 깊은 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아버지의 의도가 자못 궁금했다.
"간단히 한 마디만 하고 가겠다. 2, 3일 후 미라와 함께 별장엘 좀 가 있거라.
아무것도 묻지 말고."
별장. 말이 별장이지, 그것은 청평 호숫가에 있는 아버지의 또 다른 저택이다.
여름에 수상 스키를 즐기기도 하고, 정치계나 경제계 거물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는 그런 곳이다.
"갑자기 별장은 왜요?"
"위험해서 그래. 지난번 화재 사건도 그렇고,
아이들 시켜 특수 전자 방범 장치를 설치하려고 그러니 미라와 며칠 가 있어."
"알겠어요."
이번에도 옥진은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반대하고 따지고 할 의욕마저 상실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답만 그렇게 했을 뿐, 청평 별장으로 떠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백수웅이 반드시 다시 나타나리라 믿고 있었다.
만일 별장으로 떠나 버린 뒤 그가 다시 이 곳에 잠입해 온다면,
그 때 그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청평 별장, 준비되는 대로 다시 연락하겠다. 가서 3, 4일만 있다가 오더라."
노범호는 초췌해진 딸의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전혀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노범호. 오늘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는 정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왔다.
일제 치하 때는 일본 황족과 군부에 충성했고, 해방 된 후에는 자유당에 붙어 돈과 권력의 기반을 닦아 냈다.
그리고 지금은 공화당 정부의 핵심 맴버가 되었다. 지금의 돈과 권력이 결코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피 흘려 쌓은 탑이 자칫 백수웅 어린 녀석 하나로 붕괴 될지 모른다.
그는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 기울이고 있었다.
낮에는 허열을 격려했고, 지금은 딸 옥진을 피신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집에 특수 전자 방범 장치를 할 생각이었다.
지시를 끝낸 노범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정말 꼭 한 가지 부탁만은 잊지 마세요."
" "
"백수웅, 절대 죽여서는 안 돼요. 그가 체포되거든 옛날처럼 뒤로 빼돌려 주세요.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 할께요."
"걱정 말라고 했잖아. 그 일은 전적으로 내게 맡겨 둬. 그 아이는 틀림없이 체포돼.
하지만 죽이지는 않아. 걱정할 거 없어."
노범호는 딸을 안심시킨 뒤 삼선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그도 요즈음은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남북 회담, 유신 헌법 추진, 사업, 거기에 백수웅 문제까지 끼여들어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유신 헌법 추진은 남북 회담의 성공 여하에 달려 있고, 남북 회담은 백수웅에제 위협받고 있었다.
백수웅 문제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노범호로서는 허열이 한시바삐 녀석을 찾아 내
영원히 입 다물게 만들기만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녀석을 하루빨리 제거시켜야 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대 북한 특별 성명의 파급은 엄청나게 컸다.
발표가 있던 3월 30일 석간 신문부터 다음 날 조간 신문까지의
지면은 온통 5대 평화 원칙 제의로 뒤덮여 있었다.
성급한 실향민들은 곧 북한의 고향 땅을 찾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며 눈물을 글썽거렸고,
박정희 대통령 아니면 누가 감히 이런 획기적인 제안을 하겠느냐며 감격해했다.
그러나 백수웅 뒤를 쫓는 허열로서는 점점 더 조급하고 초조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언제나 백수웅의 두어 발짝 뒤에서 녀석의 꽁무니만 쫓고 있었다.
"뭐라구? 그 녀석이 거기에 나타났다.사졌다구?"
충북 괴산을 출장 갔다온 남성우의 보고에, 허열은 미친 듯 고함을 질러 대고 있었다.
"네. 제가 청안의 새골이란 마을에 도착했을 때가 어제 오후 4시였는데,
백수웅은 당일 아침 6시에 마을에 나타났다가 어디 론가로 떠나 버렸답니다."
"에미를, 백수웅 에미를 족쳐 보지 그랬어. 그 여자는 알 거 아냐!"
"물론 백수웅의 어머니도 찾아보았습니다만, 그 여자는 이미 2년 전에 그 마을에서 폐병을 앓다죽었습니다."
"흠---."
허열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불과 10시간의 시차 때문에 녀석을 또 놓쳐 버린 것이다.
"다른 정보는 없었나?"
"지금 그걸 보고드리려는 참입니다.
백수웅은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이상 한결 더 난폭하게 행동할 것이 틀림없구요,
중요한 건 그 녀석이 마을에 10만 원을 내놓았다는 겁니다.
정대일이라는 마을 노인이 백수웅을 만났는데,
어머니를 화장시켜 준 대가로 마을 잔치나 한번 열어 달라며 돈을 주었다는 거였습니다."
"10만 원?"
허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10만 원. 3급 공무원 두 달치 봉급에 해당되는 돈이다.
그런 거금을 선뜻 내놓을 수 있다면, 허열은 지금까지 그를 잘못 판단하고 있던 것이 틀림없다.
양동 무허가 창녀촌에 은신해 있던 것을 알기 때문에 돈 한 푼 없이 떠도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녀석이"
지난번 화재 사건이 또 머리에 떠올랐다. 아직도 정확한 화재원인은 찾아 내지 못하고 있었고,
그 불이 왜 자신의 집 벽을 타고 넘어왔는지도 알아 내지 못한 상태였다.
"바로 그 점입니다."
머리 좋은 남성우가 허열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지난 화재 사건은 백수웅의 장난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남성우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렇다면 화재 발생 시간이 새벽 2시 전후였거든.
그러니까 백수웅은 우이동 우리 집 주변에 은신해 있다는 증거야."
"이봐, 최 형사!"
"네."
이미 중앙정보부로 전근 발령이 났는데도 이들은 습관적으로 형사 명칭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최일우가 허열을 바라보았다.
"그린파크로 전화해. 제일 구석지고 큰 객실 하나 비워 놓으라고.
며칠 동안 거길 임시 수사 본부로 사용한다."
"알겠습니다."
최일우가 즉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최일우가 그린파크 임시 수사 본부 사무실을 준비하기 위해 전화하는 동안,
허열은 자신의 집으로 전화해 아내 옥진을 찾았다.
옥진의 맥빠진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예요. 웬일이세요, 전화를 다하고?"
"집엔 별일 없어?"
"어제 저녁 때 아버님이 다녀가셨어요."
"뭐라구? 그래, 무슨 말씀이 계셨었어?"
"잠시 별장에 가 있으라고 하섰어요. 전자 감응 방범기를 설치 하신다구요."
허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인 어른은 이미 화재 사건이 단순 화재가 아니라
백수웅의 침투임을 꿰뚫어보고 계신 것이 확실했다. 실로 경탄할 만한 제안이었다.
"잘 했어. 내 책상 서랍에 호신용 권총 있는 거 알지?"
"네. 그건 왜요?"
"자기 침대로 옮겨 놔 잘 들어, 극비 사항이니까, 그 테러리스트라는 백수웅 녀석 말이야,
그 녀석이 우리 집 근처에 진을 치고 있어. 그러니 몸조심하고 미라 보호 잘 해. 비서들 눈치채지 못하게
별장으로 가는 건 취소야. 아버님께 내가 설명 할 거니까. 그 녀석 목표가 우리 집으로 바뀐 거 같아.
아무튼 집에 꼼짝 말고 있으라구. 난 그린파크에 숨어서 지켜 볼 거니까."
통화가 끝났다.
노옥진은 수화기를 바보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허열은 심각했다.
'망할 자식, 나와 미라를 미끼로 이용하려고 하는 거야.
백수웅이 아닌 다른 살인자가 나타난다고 해도 그 자는 나와 미라를 미끼로 이용할 거야.'
그건 사실이었다.
우이동 집의 침투를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곱게 물러날 백수웅이 아니다.
그는 다시 집을 노리고 침투해 들어와 아내와 미라를 희생시킬 것이다.
그것이 서지아의 죽음에 대한 그의 보복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내가 피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 백수웅을 집으로 끌어들여 체포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실패해서 미라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어린 미라가
'그래, 미라만은 빼돌려야 해. 삼선교 할아버지 집으로 보내야겠어.'
자식에 대한 사랑만큼은 어쩔 수 없었는지,
허열은 아내를 집에 머물게 해서 백수웅 을 끌어들이는 미끼로 이용하고,
미라는 장인어른 댁으로 피신시킬 생각이었다.
"예약됐습니다. 특실을 5일간 빌려 쓰기로 했습니다."
최일우가 그린파크 예약 완료를 보고했다.
지금 시간 오전 11시. 몇 가지 서류와 남성우, 최일우 둘만 대동한 채
허열은 어두워지는 오후 7시경 그린파크로 떠날 계획이었다.
그린파크를 중심으로 한 1킬로미터 이내의 지리는 눈 감고도 훤히 알 수 있다.
새벽 2시경 통금을 뚫고 집으로 침투해 불을 싸지를 수 있는 거리라면 1킬로미터 이내가 틀림없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앉아 있던 허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응, 나 그린파크 현지 답사 좀 하고 올게."
허열은 주차장으로 내려가 손수 차를 몰고 우이동 그린파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10만 원, 그 거액을 성큼 내놓을 정도라면, 어쩌면 그 녀석은 그린파크에 투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을지로를 벗어난 허열의 승용차는 그린파크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고,
허열의 머리는 온통 백수웅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지아를 희생시킨 대가가 돌아오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백수웅이 그린파크에 은신해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모두가 백수웅 자신의 발자국 때문이었다.
집에 화재를 일으키고, 괴산 시골에 나타나는 이 모든 행적들이 그를 추적하는 좋은 실마리가 되어 주었다.
만일 그 녀석이 그린파크에 투숙해 있다면 단숨에 체포할 것이며,
제2의 장소에 숨어 있다면 자신의 집을 포위했다가 두 번째 침투 때를 노릴 것이다.
우이동 숲 속에 자리잡은 서울의 명물 그린파크가 저 쪽에 보였다.
허열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켜 가며 차를 세우고 로비로 걸어 들어갔다.
언제 맞부딪칠지 몰라, 한 손을 허리에 집어넣어 권총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객실의 체크아웃 시간이 가까워져서인지, 로비는 종업원들로 가득했다.
허열은 프런트 데스크의 책임자를 찾았다.
"네, 제가 주임인데요. 객실 사용하시려구요?"
안경을 쓴 깨끗한 피부의 남자였다.
"지배인을 만나고 싶소, 중요한 일이오. 빨리 안내하시오."
주임이 허열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이 곳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단골 고객의 신분을 제대로 파악해 놓지 못하고 있었다.
"제게 말씀하시면"
허열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주임을 노려보았다.
"빨리 안내해. 기관원이야. 중대 사건이 터졌어."
'기관원'과 '중대 사건' 이라는 말에 주임이 깜짝 놀라 지하 1층의 관리 사무실로 안내했다.
지배인 배흥식은 허열을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린파크 최고의 VIP가 나타난 것이다.
"아니, 허 검사님 , 이 시간에 연락도 없이 ,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요즘은 커피 마시러 오시지도 않고"
"네, 좀 바빴습니다."
여직원이 커피를 날라 왔다.
허열이 일어나 여직원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아내와 미라를 동반한 채 이따금 외식도 하고 커피도 마시러 다녀,
이 곳 지배인과는 친숙한 관계였다.
"웬일이십니까? 무슨 일 있습니까?"
"배 지배인, 국가적인 중대한 일이오. 아무것도 묻지 말고 몇가지 부탁만 들어 주시오."
객실은 약 60퍼센트의 투숙률을 보이고 있었다.
7쌍의 지방 신혼 부부, 13명의 사업가, 그리고 45명의 일본인 투숙객이 있었다.
그러나 백수웅을 추리할 만한 인물은 찾을 수없었다.
허열은 기어이 수첩에서 백수웅의 해묵은 사진을 꺼내 보여 주었다.
"이 인물을 찾고 있습니다. 좀 오래 된 사진이긴 하지만, 얼굴윤곽은 크게 바뀌지 않았을 거요."
배홍식 지배인이 낡은 흑백 사진을 받아 들었다. 낯익은 얼굴이다.
좀 어려 보이기는 해도 217호에 장기 투숙하고 있는 '가마 모토'라는 일본인이 틀림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일본인입니다."
첫댓글 허열도 머리하나는 잘 돌아가는것 같네요
숨가쁜 추격전이 시작 되는건가요?
즐감~~~
잘 읽고갑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